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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하게 된 건 좋지만 내가 여자가 되어버렸다-143화 (143/542)

〈 143화 〉 루피너스­3

* * *

아샤의 불침번으로 편하게 잠을 자고 일어난 레이시.

왕궁에 갈 거면 아침 일찍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미스트의 말에 레이시는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출발 준비를 끝마쳤다.

하지만 꽤 이른 시간에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시 일행의 마차는 외벽에서부터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나비 때문이었다.

딱히 나비가 난동을 피웠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나비는 병사들이 준 고삐도 얌전히 물었고, 레이시의 명령을 제대로 따라서 레이시가 가라는 곳으로만 발걸음을 옮겼으니까.

하지만 말들에게는 나비가 얌전하다거나 그런 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나비가 얌전히 하품하면서 주변을 둘러봐도 시선을 나비에게서 떼지 못하는 말들.

나비가 장난삼아 작게 그르릉거리면서 레이시에게 애교를 부릴 때에는 소변까지 지려대며 다리를 오들오들 떨었고, 레이시는 그런 말들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미스트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미스트는 싱긋 웃으면서 이미 조치는 취했다며 레이시를 안심시켰다.

“좀 있으면 왕궁에서 벽천화 기사단이 와서 길을 열어줄 거예요.”

“정말요?”

“네에, 그러려고 있는 기사단이니까요.”

왕족을 에스코트하기 위한 기사단이니 길을 여는 일도 한다고 말하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아샤를 힐끗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생한다고 말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일은 겪어보지 못했지만, 이런 일들이 그 녀석들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아, 아하하…….”

“정 신경 쓰이면 나중에 고맙다고만 말해줘.”

“네에.”

결국 스스로 움직이는 건 포기하고 벽천화 기사단이 오길 기다리는 레이시.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30분 정도 기다리자 벽천화 기사단이 완전무장한 채로 레이시를 찾아왔고, 레이시는 오랜만에 보는 마리아의 얼굴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도와주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어, 아……, 오, 오랜만이네요. 레이시 씨.”

“죄송해요, 이런 일로 도와달라고 말하고……. 그런데 앞의 말들이 안 움직여서 그러는데 길을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레이시는 마리아와 다른 기사들이 몰려오자 마중나가서 감사인사를 하면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해주었고, 마리아는 레이시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시선을 자꾸만 나비에게 돌렸다.

어지간한 집보다 커다란 덩치의 나비.

나비의 몸에서는 한 산을 지배하던 지배자로서의 품격과 위압감이 풀풀 풍겼고, 마리아는 그런 나비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키다가 앞에 있는 말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벽천화 기사단의 도움을 받고 나서 간신히 왕궁이 있는 제 2 내벽의 안쪽까지 이동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제 2 내벽을 통과하면서 저택으로 바로 갈 거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그러고 싶지만 무리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에? 왜요?”

“아빠에게 보고하러 가야하거든. 루룬이 마케르크 변경백의 이름으로 왕족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우리가 간 거잖아. 그러니까 배그에서 뭘했는지 마케르크 가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말해야 해.”

“그렇구나…….”

“그리고 네 일도 있고 말이야.”

“아…….”

엘라의 말에 작게 소리를 내면서 아샤를 바라보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가 아샤를 바라보자 설명하기 편하겠다면서 싱긋 웃었다.

“아샤에게 들었으니까 설명하긴 편하겠네.”

“으응……, 정말 귀족이 되는 거예요? 저는 그냥 엘라의 메이드일 뿐인데.”

“싫어?”

“싫다기보다는……, 그러니까 조금 부담스러워요. 귀족은 국가에서 여러 편의를 봐주죠?”

“아무래도 그렇지. 그만큼 의무를 지기도 하니까.”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평범한 사육사에게 귀족의 의무를 요구하다니…….

레이시는 그랬다간 부담감에 쓰러져버릴 거라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나비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나비가 먹은 몬스터가 총 몇 마리인지 기억하냐고 물어보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엘라는 아샤를 보면서 몇 마리 죽였는지 말해달라고 말했다.

“우선 오우거만 해도 5마리는 죽였지.”

“……에.”

“고블린은 80에서 안 세었고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서 마을을 습격한 늑대나 멧돼지도 몇 마리 잡아먹었지. 강도도 몇 명 체포했고.”

“그, 그렇구나…….”

늑대나 멧돼지를 사냥하는 건 따라갔었지만, 몬스터를 죽이는 건 나비에게 마음대로 날뛰고 오라고 말하기만 하고 직접 보지 않았기에 꽤 놀란 얼굴을 하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얼굴에 피식 웃으면서 이미 그만큼 죽인 것만으로도 신입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득하게 뛰어넘었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그런 거냐며 뺨을 긁었다.

자기는 나비 밥 주려고 그냥 상황을 파악하고 마을 사람들을 도와줬을 뿐인데…….

뭔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되게 칭찬받는 상황이 되자 레이시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엘라는 레이시가 눈치를 보자 피식 웃으면서 마을 사람들을 도와준 건 사실이지 않냐며 레이시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나비의 식사를 해결하고 싶었으면 굳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다른 일을 해도 괜찮았잖아. 하지만 굳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고. 그러면 칭찬 받아도 괜찮아.”

“그렇지만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 걸요? 칭찬을 받으려면 나비나 미네르바가 받아야할 거 같은데…….”

“미네르바와 나비를 돌보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게 시키는 게 너잖아.”

“그래도…….”

“레이시.”

“네?”

“한 나라의 국왕이 자기 딸과의 친분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직위를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 직위를 내릴 땐 국왕이 10명의 임명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임명관의 과반수가 찬성해야만 돼. 즉, 지금 이렇게 이야기가 정해진 건 다른 사람들도 레이시가 남작 직위를 받을 정도의 공을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야. 그런데 레이시가 그렇게 칭찬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겠어?”

“……으, 으읏.”

“얌전히 받자?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엘라의 말에 차마 더 이상 칭찬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입을 가볍게 맞춘 다음 레이시를 계속해서 다독여주었고, 레이시는 엘라에게 기대어 앓는 소리를 내면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단 상은 받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는지 레이시는 상을 받고나서 곧바로 도망치자고 칭얼거리고 있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칭얼거림에 작게 웃으면서 그렇게 하자며 입을 맞췄다.

그리고 왕의 알현실에 들어가는 엘라.

공개적으로 왕과 만나는 자리라 그런지 국왕은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봤었던 아저씨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근엄한 얼굴로 엘라와 레이시를 바라봤고, 레이시는 그런 국왕의 얼굴에 움찔 떨면서 엘라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엘라는 작게 웃으면서 지금은 미스트와 아샤 뒤에서 얌전히 있으라고 말한 다음 앞으로 나섰다.

“엘라 파우스트 오라토리엄, 이번에 배그 영지에 가서 어떤 도움을 줬는지 보고하라.”

“변경의 탐색, 범죄자의 색출, 몬스터의 사냥 등등 잡다한 일을 처리하면서 변경백에게 필요한 지원은 없는지 물어봤습니다. 대부분은 다 괜찮은데 근래에 변경의 몬스터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서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수성병기의 지원을 해주시는 게 어떠신지?”

“흐음, 마케르크 가문이라면 거짓말일 리는 없겠군. 고려하겠다. 그리고 네 메이드가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들었다만.”

“네, 오우거를 5마리, 고블린을 80마리, 멧돼지와 늑대를 각각 10마리 씩 사살했으며 도적단 하나를 궤멸시켰습니다.”

“흐음……, 전부터 네 메이드는 대단한 동물들을 길들였었지. 객관적으로 볼 때 무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지?”

“제 메이드는 전투에는 그렇게 능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펫들은 그러지 않은 것 같다만…….”

“미네르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샤와 동등하다고 말씀드리죠. 그리고 미네르바에게 견주지 못하지만 이번에 새로 테이밍한 대호, 나비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기사보다는 강합니다.”

“그렇군. 그럼 그녀는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지?”

“국왕님께 충성을 바치는 제게 충성을 바칩니다.”

국왕의 질문에 레이시에게 손짓하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손짓에 쭈뼛거리면서 엘라의 옆에 섰고, 미스트가 시키는 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국왕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왕좌에서 일어나서 레이시에게 다가가는 국왕.

레이시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얼굴로 국왕이 다가오자 쭈뼛거리면서 국왕을 바라봤고, 국왕은 다른 사람 몰래 레이시에게 윙크하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럼 레이시여, 야차인 그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도록하지.”

“네, 넷!”

“그대는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는가?”

“저, 저는 엘……, 그으……, 그러니까…….”

레이시는 국왕의 말에 반사적으로 엘라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당황하며 국왕과 엘라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일단 공식적인 주인은 엘라다.

그러니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냐는 질문을 들었을 땐 기본적으로 엘라의 이름을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레이시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이 나라의 정점인 국왕.

엘라보다 위에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이고, 그렇기에 레이시는 엘라의 이름을 말해야 하는지 국왕의 이름을 말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왕은 레이시를 도와주기 위해서 사람들 몰래 윙크하면서 레이시에게 엘라를 보라고 눈짓했고,레이시는 그런 국왕의 시선에 엘라가 한 말을 떠올리고 환하게 웃으면서 그대로 말했다.

“국왕님께 충성을 바치는 엘라 공주님을 따라요!”

“그런가? 그럼 오라토리엄 왕국에 충성을 바치는 건가?”

“네!”

“그렇군. 그럼 지금처럼 엘라를 잘 보좌하길 바라며 그대에게 남작의 계급을 하사하겠다.”

날이 없는 가검을 뽑으면서 레이시의 어깨에 가검을 가볍게 올리는 국왕.

레이시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움찔 떨면서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고, 국왕은 레이시의 반대쪽 어깨와 머리도 가볍게 칼로 댄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레이시에게 루피너스라는 성과 함께 공식적으로 남작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겠다. 모두 새로운 귀족의 탄생을 축하하도록.”

국왕의 말에 박수치기 시작하는 귀족들.

레이시는 귀족들의 박수에 언제 끝나냐며 엘라를 쳐다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시선에 국왕의 하사품만 받으면 끝난다고 귓속말했다.

“으우우우……, 쉬고 싶어요.”

“나도. 집에 가면 쉬자.”

“으으응…….”

엘라의 말에 칭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이시.

국왕은 레이시에게 엘라의 문장을 음각으로 새긴 회중시계를 허리춤에 직접 시계를 채워주었고, 레이시는 국왕의 하사품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국왕은 이것으로 엘라와 관련된 일은 끝났으니 자리에서 물러나도 좋다고 말했고, 엘라는 국왕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귀족들이 몰려오기 전에 레이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리를 떴다.

“수고했어.”

“흐아아아아……. 지쳤어요. 들어가면 씻고 자야겠어요.”

“그래, 나도 피곤하네, 같이 자자.”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웃는 엘라.

오늘은 오랜만에 다 같이 낮잠이나 자자면서 미스트에게도 쉬어도 좋다고 말했고, 아샤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자기는 자기 숙소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샤의 손을 잡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레이시.

마치 같이 자지 않을 거냐고 물어보듯 쳐다보는 레이시의 시선에 아샤는 횡설수설 변명하다가 이내 엘라가 자기를 보고 웃자 한숨을 내쉬면서 자기도 자야하는 거냐며 레이시를 바라봤다.

“엘라가 다 같이 자자고 했으니까…….”

“하아아아……. 알았어. 대신 기사단에서 할 일이 좀 있으니까 먼저 씻고 자고 있어.”

“에헤헤……. 기다릴게요?”

“그냥 자지.”

“다 같이니까 아샤랑도 같이 잘래요.”

“……하아.”

아샤의 대답에 배시시 웃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웃음에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레이시의 이마를 가볍게 때린 다음, 레이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럼 빨리 갔다 올게.”

“네에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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