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루피너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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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을 유지하기로 약속을 하고 수도로 돌아가는 레이시.
그동안 호랑이에게 나비라는 이름을 붙여준 레이시는 나비의 등에 올라탄 채로 움직였고, 또 나비의 밥을 위해서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몬스터들을 대신 사냥하면서 수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레이시의 모습을 본 상인들이 레이시에게 한 가지 호칭을 붙여주었고, 수도 근처의 야영지에서 그 호칭을 들은 레이시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자비로운 야차라거나 녹색의 테이머라거나 그런 건 이해를 할 수 있는데 대체 엘라의 자애는 뭐예요?”
“글쎄?”
엘라의 자애라니…….
대체 왜 그런 호칭이 생긴 걸까?
레이시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엘라는 레이시의 의문에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유를 추측해보기 시작했다.
“호랑이 먹이를 구하느라 평소엔 안 도와주던 일을 너를 시켜서 도와줘서 그런가?”
“……확실히 그러면 자비롭게 보이긴 하겠네요?”
“그렇겠지?”
“으, 으으으응……. 그렇지만 조금 부끄러운 걸요.”
엘라의 자애라니.
우선 엘라의 것이라는 것도 조금은 부끄럽지만, 자기가 엘라의 자애가 모인 존재라고 불려지는 것도 부끄럽다.
자기가 무슨 자애로운 사람이라고…….
엄청 낯부끄러운 칭찬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한숨을 내쉬면서 엘라에게 안겨서 투덜거렸고, 엘라는 레이시의 머리카락을 땋아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자기는 레이시의 호칭이 마음에 든다면서.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웃음에 볼을 부풀이다가 수도에 가면 뭐할 거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마 각종 행사에 참가할 것 같다고 말했다.
“셰런 미인대회에는 반드시 얼굴을 비쳐야 하고, 모험가 길드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도 축사를 말해주기 위해서 가야 해. 내 일이 모험가 길드에서 하는 일과 겹치는 부분도 있고 이동하는데 모험가 길드의 도움을 받기도 하니까.”
“그렇구나…….”
“겨울에는 몬스터들도 활동이 둔해지니까 그동안에는 마법사로서의 일보다는 왕권 강화를 위해 공주로서의 일을 하는 편이야.”
“왕족으로서의……. 귀족을 만나는 거구나.”
엘라의 말에 귀족들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찌푸리는 레이시.
루룬 같이 적당히 배려해주면서 칭찬해주는 사람만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미아크 자작 가의 사람들처럼 작정하고 칭찬만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조금 싫을 거 같다.
그렇기에 레이시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고, 엘라는 레이시를 뒤에서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걱정하지마, 레이시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할게.”
“으응…….”
“사랑해. 사랑스러운 나의 자애.”
“부끄러우니까 그런 말 금지. 그리고 그런 건 엘라에게 안 어울린다고요.”
“후후, 기분은 좋잖아?”
느끼한 말을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레이시를 유혹하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얼굴을 붉히다가 엘라의 볼을 꼬집으면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라가 팔을 벌리며 안기라고 말하자 조심스럽게 엘라의 품에 안겨서 엘라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엘라가 읽던 건 중간부터 읽어도 별 상관 없는 시집이었다.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건 이런 걸 자주 읽기 때문일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시집에 꽤 낯뜨거운 문구가 있는 걸 보고 눈을 깜빡거리다가 엘라를 쳐다봤다.
“왜?”
“‘저를 언제 잊으시나요?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여.’, ……잘도 이런 부끄러운 걸 읽네요.”
“풉, 그래? 다시 말해볼래? 이번엔 감정을 담아서. 이건 병에 걸린 시인이 자기 애인에게 보낸 편지니까 조금 슬픈 목소리로.”
“저는 연기는 잘 못 하는데요…….”
“그래도 해봐.”
엘라의 말에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최대한 감정을 잡아보는 레이시.
미스트의 연기에 비하면 어색한 분위기가 티가 나는 연기였지만, 레이시는 최대한 열심히 연기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시에 답해줬다.
“저를 언제 잊으시나요? 나의 사랑스러운 연인, 엘라.”
“나는 너를 하루에 몇 번씩 잊는단다.”
“……우응, 무슨 대답이 그래요?”
“글쎄? 로맨틱하지 않아?”
“뭐가요?”
“하루에 몇 번을 제외하면 너를 항상 사랑한다는 거잖아. 하루에 몇 번, 그 시간을 제외하면 애인을 생각하며 지낸다는 건데 로맨틱하지.”
“아……, 으읏……. 그,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럽네요…….”
“그래도 기분 좋지?”
엘라의 웃음에 눈을 깜빡이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대답에 키득키득 웃다가 레이시의 뿔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계속해서 시집을 읽었고, 아샤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솔방울을 모닥불에 던졌다.
그러자 펑펑거리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불.
레이시가 그 불에 놀라 모닥불을 바라보자 엘라는 아샤에게 질투는 흉하다면서 키득키득 웃었고, 아샤는 엘라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엘라의 말대로 어느 정도 질투하고 있었는지 아샤는 한숨을 내쉬면서 복잡한 얼굴로 레이시를 바라보다가 자기 뿔을 긁었다.
딱히 질투할 건 없는데…….
아샤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자기가 경외의 야차로 진화하기 전, 탐욕의 야차일 때 느꼈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걸 빼앗아서라도 가지고 싶은 마음.
탐욕으로 인한 질투라니…….
아무래도 조금 부끄럽네.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오른쪽 뿔을 벅벅 긁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산책 다녀올게.”
“위험하지 않아요?”
“응, 괜찮아. 아직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고.”
레이시의 걱정에 작은 손도끼를 챙기면서 숲속으로 들어가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를 빤히 쳐다보다가 엘라의 품에서 마저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상당히 낯부끄러운 글이 적혀 있는 시집.
하지만 엘라와 서로 대화를 주고받듯이 시집을 읽은 덕분인지 생각보다 시집은 재미있게 읽혔고, 미네르바와 함께 불침번을 설 때도 엘라에게 따로 시집을 받아 모닥불에 의지해서 읽기까지 시작했다.
“아직 읽고 있는 거야?”
그리고 불침번 서기 가장 어려운 시간에 일어나서 레이시의 옆에 앉는 아샤.
아샤는 열심히 주변을 경계하는 미네르바와 나비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시집이 재미있냐고 물어봤고 레이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기 부하들도 그러면 좋겠다고 말했다.
“벽천화의 녀석들……, 특히 마리아는 시집을 좀 읽어야 해.”
“아, 아하하……, 그런가요? 그럼 마리아 씨는 무슨 책을 읽어요?”
“보통은 안 읽는데 읽는다면 춘화잡지.”
“……네?”
“춘화잡지 중에서도 도심에서 유명한 호스트가 세미 누드로 술을 마시거나 유혹하는 그림.”
“…….”
“애가 신입으로 들어왔을 땐 전략전술 부분에서 만점을 받은 데다가 실력도 나쁘지 않은 채로 들어왔는데 실전을 좀 겪더니 애가 망가지더라고……. 뭐 그래도 할 땐 하느라 괜찮지만.”
“그, 그렇군요.”
“시집을 읽는 재미 같은 걸 네가 가르쳐주면 보지 않을까?”
“그럴까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글쎄?”
시집을 읽는 재미…….
레이시는 잠시 고민하다가 엘라가 자기에게 해줬던 것처럼 읽어주면 읽겠구나 싶어 아샤의 옆에 앉은 다음에 헛기침한 다음 무슨 시를 읽을지 고민했다.
춘화잡지를 매달 구독할 정도라는 거 같으니까 조금은 야한 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레이시는 시집에 적당한 시가 있자 아샤의 손을 잡고 시를 읽기 시작했다.
“저를 사랑한다면 저를 망가트려주세요. 그대가 주는 거라면 뭐든 사랑하니 저를 아프게 해주세요. 당신을 잊지 못할 때까지 제 몸에 열꽃을 새겨주세요. 저는 그대의 것, 그대의 꽃, 언제나 그대를 바라본답니다.”
“…….”
“이렇게 읽어주면 좋아할까요?”
“……그만두자. 그 녀석에게 이상한 성벽을 심어주겠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기를 아끼지 말고 거칠게 흔적을 남겨주면 좋겠다는 여인의 시.
아샤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모닥불의 탓으로 돌리며 고개를 돌렸고, 레이시는 아샤의 반응에 아무래도 연기가 문제인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전혀 못 하겠는걸.
그렇게 생각하던 레이시는 아쉽다는 듯 시집을 덮었고, 아샤는 레이시가 시집을 덮자 이제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봤다.
“네? 자야죠?”
“아, 미안. 설명이 부족했네. 수도에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는 거였어.”
“으응……?”
“엘라는 이런 거 말 안 해주고 자기가 모두 처리하려고 할 테니까 나라도 말해줘야지.”
아까와는 다른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를 바라보는 아샤.
아샤는 가볍게 헛기침하더니 레이시에게 잘 하면 레이시가 귀족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네?”
“솔직하게 말해서 이때까지 네가 평민이었던 게 더 신기한 일이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한 나라의 공주의 메이드잖아?”
“메이드는 평민 아니에요?”
“평범한 귀족가문의, 평범한 직위를 지닌 사람의 메이드라면 그렇겠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아샤는 메이드의 기원부터 말하자고 생각하면서 집사와 메이드가 원래는 귀족 가문의 자녀들이 하는 일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아카데미나 이런 것들이 정착하기 전에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까 높은 계급의 높은 직위를 지닌 사람에게 자기 자식을 보내 훈련시켰고 그게 집사와 메이드라는 것.
그리고 현대에 와서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고는 하나 직위가 높거나 중요한 일을 하는 귀족들을 대상으로는 아직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공주의 경우에는 공주의 안전도 있고 정계의 정점이니 많은 걸 배우고 인맥을 만들고 있어서 대부분은 귀족이 메이드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을 아샤가 말해주자 레이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자기 자식을 집사나 메이드로 보낸다는 거죠?”
“응.”
“그리고 엘라는 공주님이라서 엘라의 전속 메이드가 되면 온갖 정보와 인맥을 얻을 수 있어서 지금도 엘라의 메이드가 되고 싶다고 줄을 서는 중이고.”
“그렇지.”
“그런데 제가 평민이라서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고 있었고, 국왕님께서 저를 배려해서 제게 준 남작이나 남작의 작위를 주려고 하고…….”
“응, 셰런 미인 대회에 나가는 메이드들은 대부분은 자작 이상의 사람들이니까 최소한 남작이 되어야 할만하잖아.”
“…….”
“뭐, 너 같은 경우에는 테이머로서의 실력만 따져도 남작 작위는 충분할 거야. 이름이 나비였지? 저 나비처럼 커다란 호랑이를 테이밍한 것만으로도 왕궁에서 일하는 신입은 가볍게 이길 테니까.”
지금은 레이시가 워낙 유순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귀족 작위를 안 주고 있지만, 나비 같은 호랑이를 테이밍해서 왕궁으로 돌아가면 그런 게 불가능하다.
귀족들은 계산이 빠르니까 레이시를 준 남작이나 남작으로 만든 다음 자기 계급을 이용해서 레이시를 찍어 누르려고 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엘라도 개입하기 힘든 부분이 생긴다.
……그런 부분은 자기가 도와줄 거지만.
하여튼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미리 알고 당하면 대처하기 쉬워지니까 아샤는 레이시에게 왕궁에 들어가면 겪을 일들을 추리해서 레이시에게 말해주었고, 레이시는 의외로 태평하게 아샤의 말을 들었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겁나지 않냐고 물어보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질문에 배시시 웃으면서 아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 일은 아샤가 도와줄 거잖아요? 그리고 엘라랑 미스트도 저를 도와줄 테니까 겁먹고 있는 것보다는 여러분들에게 기대어서 견뎌보게요.”
“……으, 으응. 그래?”
레이시의 예상 외의 대답에 아샤는 뿔을 긁으면서 멋쩍어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레이시에게 다 들었으면 내일을 위해서 일찍 자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고하세요.”
아샤의 볼에 입을 맞춘 다음 미네르바와 함께 하양이와 나비의 옆으로 가는 레이시.
아샤는 하양이와 나비를 침대 삼아 자는 레이시를 보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괜히 신경질 내며 솔방울을 모닥불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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