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미인 대회는 무리에요5
* * *
엘라와 루룬의 대화는 생각 외로 평범했다.
국경에서 상대 국가에 이상한 움직임은 없는지, 식량의 공급에는 차질이 없는지, 또 주민들의 분위기는 어떠한지…….
엘라가 한 설명 때문에 편견을 가졌던 건지 두 사람은 정말 평범하게 귀족의 대화를 주고받았고, 레이시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쭈뼛거리며 부끄러워했다.
그러자 레이시를 귀엽게 바라보는 엘라.
루룬은 엘라의 시선에 같이 레이시를 보다가 싱긋 웃으며 엘라에게 꽤 많이 변했다며 잡담을 시작했다.
“예전에는 좀 더 제 취향이셨는데, 꽤 많이 변하셨군요.”
“요즘 들어 자주 듣는 말이야.”
“후후, 지금 제가 다시 만나자고 해도 만나주시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런 말, 하지 마. 레이시가 질투하거든.”
레이시를 끌어안고 키득키득 웃는 엘라.
루룬은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확실히 달라졌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엘라는 루룬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사람은 원래 변한다며 과자를 입에 넣었다.
그러자 루룬은 키득키득 웃다며 엘라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면서 레이시를 쳐다봤고, 레이시는 루룬의 시선에 움찔 떨면서 루룬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움츠려들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저는 하층민 사냥 같은 것엔 전혀 흥미가 없거든요.”
“아, 아하하…….”
“그것보다 저는 오히려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요?”
“네?”
자연스럽게 레이시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다과를 입에 무는 루룬.
루룬은 레이시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이내 잔잔하게 웃으면서 차를 마셨다.
미스트처럼 소리를 내지 않고 차로 입술을 적시듯 마시는 모습.
레이시는 그 모습에 미스트만이 아니라 귀족들은 전체적으로 저렇게 차를 마시는구나 싶어 루룬을 가만히 쳐다봤고, 루룬은 레이시와 눈을 마주치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엘라가 반한 이유를 알고 싶어요.”
“네……?”
그리고는 레이시에게 질문하는 루룬.
루룬은 레이시가 어떻게 엘라를 유혹했는지 궁금하다면서 몸을 앞으로 살짝 굽혔고, 레이시는 그런 루룬의 행동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테이블 아래로 엘라의 손을 꽉 잡았다.
엘라는 레이시의 손길에 허리에 손을 둘러주면서 레이시를 안심시켰고, 루룬은 그런 엘라의 반응에 레이시를 안심시키듯 손을 들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애인도 있고 아까도 말했듯, 레이시 양은 제가 못 괴롭힐 정도로 귀여워서 친구는 괜찮지만, 애인은 무리거든요.”
“으, 으으……?”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걸까?
루룬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루룬의 눈치를 보는 레이시.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은 모습에 레이시는 쭈뼛거리면서도 천천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고, 루룬은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제 이번 애인도 엘라와 비슷한 성격이라서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제게 빠지게 할 수 있을지 궁리하는 중이라 레이시 양의 의견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 그게……, 딱히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애매한 거라…….”
“그런가요? 아쉽네요.”
레이시의 대답에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주제를 돌리는 루룬.
루룬은 엘라를 바라보며 갑자기 연 다과회에 참석한 이유가 뭔지 물어봤고, 엘라는 루룬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레이시를 슬쩍 쳐다봤다.
그러자 루룬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레이시를 위해서 뭔가 준비하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고, 이내 그 준비 중인 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엘라의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루룬은 몇 가지 가설을 떠올리다가 엘라의 속을 떠보았다.
“미리 축하드려도 되나요?”
“뭐로 축하하게?”
“그러네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약혼자가 생기신 거요?”
레이시에게 메이드가 입는 옷이 아니라,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의 옷을 준 것.
그리고 레이시를 바라보는 엘라의 시선이 거짓이 아니라 침실에서나 보이는 진심이 담긴 눈빛이었다는 것.
이 모든 게 위장일 수도 있지만, 엘라에게 호의적인 귀족들만이 모인 파티회장에서까지 그렇게 연기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루룬은 싱긋 웃으면서 레이시를 쳐다봤고, 레이시는 루룬의 시선이 자기를 향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기 추리에 확신을 가지는 루룬.
루룬은 엘라가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고, 엘라는 그런 루룬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아직 남은 일이 있으니 결혼은 빨라도 2년 뒤에나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하, 그럼 지금은 그 기반을 만드는 일을 하시는 중이겠네요. 흐음……, 어떻게 하실 건가요? 레이시 양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전투에 대한 재능이 있어보이지 않는 걸요? 그렇다고 학자나 예술가의 재능도 없어 보이고…….”
“셰런 미인 대회에 나갈 거야.”
“아하. 그럼 공주님이 꽤 힘드시겠네요.”
셰런 미인 대회는 국왕이 왕족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서 주는 상이니, 엘라는 지금보다 조금 더 바빠질 것이다.
안 그래도 엘라는 꽤 많은 일을 하는 상태였다.
올해에는 3개월의 휴가를 가지는 바람에 여름이 통으로 비긴 했지만, 봄만 하더라도 온갖 민원을 왕가의 이름으로 해결했고 가을에는 포트리스에 몰려든 고블린 군세를 처리했다.
거기에다가 도시 안에서 내통하고 있던 배신자들까지 처리했으니, 다른 왕족과는 다른 의미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마케르크 변경백의 영애로서 생각해본다면, 아이야트나 볼케릭 같은 왕자들보다도 훨씬 자신에게 이익이 될 정도로…….
특히 엘라에게는 충성을 바쳐도 왕과 왕가에게 전체적인 충성을 바치는 일이 되어 정치적인 일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게 편했다.
그렇게 생각한 루룬은 싱긋 웃으면서 엘라에게 도움을 줄지 물어봤고, 엘라는 루룬의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미스트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자기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미스트.
엘라는 미스트의 반응에 역시 그냥 루룬이 원하는 일이 있어서 그러나 싶어서 루룬을 쳐다봤다.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좋겠어?”
“어머, 제가 전 애인에게 뭔가 요구할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아니야?”
“필요하면 그러겠지만, 이번 건 순수한 호의에요. 다른 왕자님, 공주님들과 비교했을 때 엘라가 저희 마케르크 가문에, 배그에 이득이 되거든요. 그러니 좋게 보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마케르크 가문이나 배그에 대한 지원을 늘려달라는 게 아니라?”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지만, 사실 다른 귀족들에게 이런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지금애인이 평민이다보니 요즘따라 질문이 늘어났거든요.”
“흐응…….”
루룬의 말에 비음을 흘리다가 잠시 손익계산을 하는 엘라.
엘라는 루룬에게 자기를 어떻게 도와줄 거냐고 물어봤고 배그 영지에는 전통적으로 무희를 뽑는 대회가 있지 않냐며 웃었다.
“거기에 레이시 양을 초대할게요. 그리고 레이시 양이 이기면 배그 근처에 있는 영지에 홍보해드릴게요. 그럼 엘라가 고생하는 일이 줄어들 거예요.”
“흐으응……. 근데 그건 그냥 쌩 미인 대회 아니야?”
“맞아요. 근데 레이시 양이라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태연하게 웃으면서 레이시의 우승을 전제로 말하는 루룬.
엘라는 루룬의 말에 확실히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루룬은 그러면 수속을 준비할 테니 다과회가 끝나면 와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당황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보는 레이시.
레이시는 갑자기 미인대회에 나가게 생기자 당황하면서 두 사람을 말리려고 했고, 엘라와 루룬은 레이시의 반응에 슬쩍 고개를 돌려 레이시를 바라봤다.
“자, 잠깐만요……. 미인대회에 제가 나가라고요?”
“응. 왜?”
“레이시 양이라면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답니다? 제 애인이 강적이긴 한데, 제 애인은 그런 대회를 별로 안 좋아하니까 올해는 나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 거예요.”
“아, 아니! 못 이기니까요!? 갑자기 미인 대회라니, 저는 그런 곳에 못 나가요!”
“왜?”
“부, 부끄럽잖아요!? 제가 엘라나 미스트처럼 예쁜 것도 아니고, 아샤나 미네르바처럼 멋지게 생긴 것도 아닌데!”
“…….”
“…….”
“이, 인정하죠?”
두 사람이 말을 멈추자 얼굴을 붉히면서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두 사람이 말을 하지 않자 안심과 자괴감이 반씩 섞인 얼굴로 엘라나 다른 사람이니까 자기를 좋아하지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거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계속 말해보라는 듯 레이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엘라와 루룬.
레이시는 두 사람의 시선에 움찔 떨다가 눈을 질끈 감고서 나가봐야 예선에서 탈락할 거니 못 나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다 엘라를 쳐다보는 루룬.
루룬은 엘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시선을 피하자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라, 요즘에도 칭찬하는 거 안 하시죠? 그거 저는 괜찮아도 다른 여자들은 싫어한다고 했잖아요.”
“……다른 애라면 모를까 레이시에게 하는 건 분위기를 안 타면 부끄러운 걸.”
“그래도 애인이면 귀엽다,예쁘다 칭찬해줘야죠. 저렇게 자신감이 없으면 불쌍하잖아요.”
“으윽.”
“하아, 하여튼 수속은 밟아놓을 테니, 레이시 양을 데리고 오세요. 아시겠죠?”
“알았어.”
“……어째서요!? 안 하는 분위기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레이시의 말에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의 볼을 꼬집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가 자신의 볼을 꼬집자 왜 그러냐며 울상을 지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울상에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레이시의 볼을 잡아댕겼다.
이상한 건 평소라면 엘라를 말릴 미스트가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그냥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는 것과 미네르바가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뭔가 엘라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
레이시는 자기를 도와줄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엘라의 손을 들어주자 옆에서 갑옷을 입고 호위하던 아샤에게 도와달라고 말해줬고, 엘라는 아샤가 말리고 나서야 손을 떼준 다음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럽고 갈 준비나 해.”
“절 수치심으로 죽이실 생각이죠!?”
“왜 그렇게 자기 외모에 자신감이 없어? 집에 거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레이시는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그렇게 내가 칭찬을 안 해줬던 걸까?
엘라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레이시를 쳐다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시선에 움찔 떨며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췄다.
전생에서는……,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그렇게 외모 자랑하면 놀림 받는다고요…….
이렇게 말해도 엘라는 농담이라거나 헛소리라고 말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우울해했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무슨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듣겠다 싶어 레이시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며 루룬이 보고 있다며 엘라를 밀어내는 레이시.
하지만 레이시의 말에 엘라는 오히려 보여주자며 장난스럽게 웃다가 입술 대신 뺨에 입을 맞춘 다음, 귓불을 약하게 깨물며 작게 속삭였다.
“레이시는 충분히 예뻐, 그러니까 잔말 말고 가자?”
“히이이…….”
그런 엘라의 목소리에 바들바들 떨면서 얼굴을 붉히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이 재미있다며 키득키득 웃다가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루룬에게 금방 가겠다고 말했다.
“그럼 배그 영지에는 최대한 빠르게 가볼게. 그 근처에 뭔가 할 일이 있다면 편하겠는데 뭔가 내게 부탁할 일은 없어?”
“몬스터들이 근처에 늘어났다고 했으니, 왕가에게 힘을 빌려달라고 요청할게요. ……그나저나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두고 있었네요. 엘라 공주님? 레이시 양? 그럼 마케르크 가문에 방문하는 날을 손 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적당히 기다려.”
“히이잉…….”
두 사람의 대화에 울상을 지으면서 고개를 아래로 떨구는 레이시.
루룬은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작게 웃다가 영지로 오면 선물을 주겠다며 오는 걸 기다리겠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그런 루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