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미인 대회는 무리에요3
* * *
엘라와의 목욕을 즐긴 후, 레이시는 옷을 갈아입고는 아샤에게 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신기할 정도로 엘라와의 섹스 이후 몸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해, 본능적으로 내일이 됐든 오늘 자는 순간이 됐든 피가 터진다는 직감을 받아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국왕이 말했었던 다과회에 참석하기 전에 다과회의 호위를 부탁하기 위해서.
엘라는 미스트가 있다지만, 레이시는 귀족 사회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레이시는 아샤에게 발걸음을 옮겼고, 언제나처럼 벽천화 기사단의 훈련을 도와주던 아샤는 레이시가 오자 훈련 도중에 눈을 돌리고 레이시를 바라봤다.
“그래? 다과회에?”
“네.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나는 기사니까 그냥 편하게 부탁해.”
“으응, 네…….”
도대체 어떻게 이쪽을 보고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걸까?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그렇게 생각하다가 아샤가 아예 몸을 돌리자 놀라면서 아샤의 뒤를 쳐다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다가 몸을 돌리더니 멱살을 잡고 사람을 집어던졌다.
“우와.”
“뒤에서 노릴 땐 제대로 노리라고.”
“기, 기습을 안 하는 게 아니라요?”
“응? 기습이 뭐가 어때서?”
“……훈련이잖아요? 다치면 어떻게 해요?”
“그럼 훈련하다 다친 놈이 바보인 거지. 그리고 이렇게 안 하면 만약의 사태 때 대비를 못 하잖아. 참, 너 슬슬 보충제 떨어지지? 달거리도 시작할 시간이고.”
“네. 매번 부탁드려서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훈련인 건지 실전인 건지 구별이 되지 않는 기사단의 훈련.
레이시는 그런 기사단의 훈련에 어색하게 웃다가 아샤가 금방 보충제를 가져다주겠다고 말하자 작게 사과하면서 아샤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잠시 뿔을 긁으면서 레이시를 기사단 내부의 의무실에 데리고 가는 아샤.
아샤는 미리 준비해뒀던 철분 보충제나 증혈 보조제, 그리고 생리대 등을 건네주면서 멜리아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미리 말해주겠다고 했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다과회야? 너나 엘라나 그런 건 싫어하잖아.”
“아……, 그게 국왕님께서 시키셔서요.”
“국왕이……?”
“네.”
“…….”
레이시의 말에 입을 다무는 아샤.
아샤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뿔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마음에 걸리는 게 생기자 짜증이 났는지 아샤는 샤워하고 오겠다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샤워하는 도중에 뭔가 떠올랐는지 몸을 씻자마자 레이시에게 가서 조심스럽게 국왕이 무슨 대회에 나가라고 했냐고 물어보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질문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샤는 귀찮게 됐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왜 그러세요?”
“아니, 국왕이 그렇게 말한다는 건 엘라를 주기적으로 다과회든 사냥대회든 파티든 참석하게 만들겠다는 의미거든. 그래서 귀찮아지겠다 싶어서.”
“아아……, 아샤는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셨죠?”
“뭐, 보통의 사람들은 나를 무서워하니까. 특히 전쟁이나 몬스터 사냥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아샤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샤가 도와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샤의 얼굴을 보면 쑥덕거리며 거리를 벌렸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편하게 있고 싶어도 편하게 있기 힘들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아샤에게 사과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사과에 레이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때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아하하…….”
“흐음, 그것보다 다과회……. 엘라에게 가봐야겠네.”
“네, 그러세요. 저는 슬슬 애들 오후 산책시킬 시간이라서…….”
오전 산책을 넘겼으니까 오후 산책은 빼먹으면 안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아샤와 헤어진 다음 미네르바와 함께 산양을 타고 말들을 산책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책을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가자 레이시는 엘라와 아샤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보였고, 레이시는 그 모습에 미스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혹시 심각한 이야기인 걸까?
두 사람의 표정만 보면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레이시는 덩달아 긴장하며 미스트를 바라봤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표정에 별 거 아닌 문제라며 웃었다.
“별로 쓸모없는 걸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
“지금 레이시를 호위할 때 갑옷을 입고 할지 아니면 제복을 입고 할지 의논하는 거예요.”
“……네?”
미스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냥대회라면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화살이 날아다니고 날붙이를 들고 다니는 위험한 대회인데 조금 과하다고 하더라도 갑옷을 입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번에 레이시가 가는 곳은 평범한 다과회.
날붙이가 날아들 일도 없고 화살이 날아들 일도 없는 곳.
그런 곳에서 갑옷이라니…….
레이시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열심히 의논하고 있는 엘라와 아샤를 바라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레이시의 시선을 전혀 못 느끼는 건지 역시 갑옷을 입고 가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갔고, 레이시는 두 사람의 과보호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웃으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한숨을 내쉬며 미스트에게 안겼고, 미스트는 레이시가 안기자 작게 웃으면서 자기라면 저렇게 안 하겠다고 말했다.
“네?”
“저라면 아예 시작 전에 뿌리를 뽑고 시작하죠.”
“…….”
“아니면 애초에 문제가 안 될 사람들만 초대한다거나.”
미스트의 말에 미스트도 저 두 사람에 지지 않을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걸 떠올리는 레이시.
저번에 자신의 과거를 밝힌 이후로 가끔씩 가면을 쓰는 걸 멈췄던 미스트였기에 레이시는 잠시 당황하다가 손을 들어 미스트의 머리에 있는 흉터를 만지면서 쓰게 웃었다.
“그러지 말아주세요…….”
“후후, 그럴까요?”
“네. 부담스럽잖아요.”
만약 다과회에 나갔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라는 걸 깨달으면 어떤 느낌일까?
태어날 때부터 왕족이었던 엘라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자기는 아니다.
자기는 전생 일개 대학생에 현생 일개 메이드.
그런 준비된 파티에 가면 속이 뒤틀려서 위에 구멍이 뚫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미스트에게 그러지 말아달라고 말했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말에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대부분은 레이시에게 직접 시비를 걸 사람은 적을 거예요.”
“네?”
“국왕님께서 공주님을 위해서 파티를 열겠다고 했는데, 공주님이 아끼는 레이시에게 시비를 걸어서 국왕님과 공주님의 시선에서 일부러 벗어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아하하…….”
“굳이 있다고 한다면 공주님과 사귀시던 전 여친들이 있긴 한데, 그렇게 했다간 애인에게 질척거리는 귀족이라는 불명예를 받을 테니 그런 것까지 감수할 사람들이 있을까 의문이긴 하네요.”
“……으응.”
미스트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한숨을 내쉬는 레이시.
레이시는 자신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의 행태에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먼저 들어가도 괜찮겠냐고 물어봤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가 끝나면 정리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레이시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느껴지는 푸릉푸릉 거리는 감촉에 마른세수를 하다가 자신을 껴안고 있는 미네르바의 어깨를 톡톡 건들었다.
“으응?”
“저……, 그, 잠시.”
“아, 응. 알겠다.”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시를 놓아주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이불을 개더니 더러워지지 않았다며 웃었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웃음에 어색하게 웃다가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으게에에…….”
언제 느껴도 그로테스크하고 불쾌한 감촉이다.
그러고 보니까 누군가가 정자를 배출하면 쾌락이 느껴지는데 왜 난자를 배출할 땐 고통밖에 없냐고 화를 냈었던가…….
레이시는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전생에서의 술자리를 떠올려보며 뺨을 긁었다
이제는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겠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뒤처리를 깔끔하게 끝낸 다음에 아래로 내려왔고, 엘라는 레이시가 내려오자 손을 흔들면서 인사한 다음 한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드레스 카탈로그.”
“네?”
“레이시는 바지를 좋아했지?”
“그, 네…….”
“그래서 여성용 옷으로 몇 가지 준비했으니까, 거기에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걸로 두, 세 벌 골라봐.”
“……에?”
“이번에는 너와 내가 같이 가는 다과회니까 적당히 옷을 챙겨 입어야 하거든. 그리고 그거 말고도……, 네가 차려입은 모습도 보고 싶고.”
“저, 저번에 옷을 샀으니까 그거 입고 가면 안 될까요?”
“으응? 그 옷은 차려입은 사용인의 옷이니까 안 돼.”
“무슨…….”
아직 옷을 사고 1년도 안 지났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레이시는 엘라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거렸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레이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그냥 마음에 드는 거 고르고 입어줘.”
“그, 으응…….”
“아니면 내가 원하는 거 사서 입힌다?”
“아, 알았어요! 우우우……. 정말…….”
결국 엘라의 협박에 못 이겨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이 귀여운지 레이시를 자신의 옆에 앉힌 뒤 볼을 콕콕 찔렀고, 레이시는 엘라의 손장난에 얼굴을 붉히면서 손을 치웠다.
레이시는 다과회가 언제 열리는지 물어봤고 엘라는 아무리 늦어도 5일에서 6일 뒤에는 열릴 거라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옷은 주문하면 하루 안에 나올 테니까 괜찮아. 천천히 주문해봐.”
“으응……. 이거요.”
“빠르네?”
“전부 너무 화려해서 최대한 수수한 거 고른 거예요.”
“아하하, 안 그래도 되는데. 이런 옷은 좀 어때?”
“……미쳤어요?”
“왜? 어울릴 거 같은데.”
엘라가 가리킨 옷을 보고는 아연실색하며 엘라를 쳐다보는 레이시.
허벅지를 다 까놓고 가터벨트로 스타킹을 고정시켜두는 옷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헤실거리는 걸까?
레이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며 엘라를 쳐다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키득키득 웃으면서 농담이었다고 말했다.
“레이시는 섹시함을 강조하는 옷보다는 귀여움을 강조하는 게 잘 어울리기는 해.”
“으으으…….”
엘라의 말에 얼굴을 붉히다가 다과회에 가서 주의할 게 뭐가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엘라를 피해서 일부러 미스트에게 안겼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질문에 참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진다며 레이시에게 자기 방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따라서 일어나는 엘라.
미스트는 엘라가 자신을 따라오자 엘라에게는 할 일이 있지 않냐며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서류를 건네주었고, 엘라는 미스트가 건네준 서류를 읽더니 이내 씩 웃으면서 미스트를 쳐다봤다.
그리고 가볍게 기 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
레이시는 두 사람의 행동에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미네르바에게 안겨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일이나 하자며 발걸음을 옮겼다.
“힘 쓰는 건 내가 할 테니 주인은 오늘은 건강상태만 확인해주면 좋겠다.”
“고마워요, 미네르바. 어째저를 생각해주는 게 미네르바뿐이네요. 아하하하.”
“그러면 상을 주면 좋겠는데…….”
레이시의 말에 헛기침하다가 자신의 볼을 내미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애교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고개를 좀 더 숙여줄 수 있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환하게 웃으면서 허리를 숙여 자신의 뺨을 레이시의 얼굴 옆에 가져다줬다.
그러자 미네르바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자 얼굴을 붉히면서 배시시 웃다가 축사를 정리할 때 사용하는 커다란 삽을 들고는 마구간에 들어갔고,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에게 조심하라며 손을 흔들어주다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