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첫째 아이, 둘째 아이1
* * *
레이시의 가출 이후, 엘라와 미스트가 서로 기 싸움을 벌이는 일이 줄어들었다.
서로 한다고 해도 장난식으로 가볍게 말장난을 치는 정도로 바뀐 두 사람의 기 싸움.
덕분에 레이시는 전보다는 훨씬 편하게 일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덜 싸운다고해서 일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여전히 레이시는 하루 18시간을 계속 일했고,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루 쉬는 날에도 말과 사냥개들은 밥을 먹고, 생리활동을 하고, 아프기도 하니까.
그래서인지 조금만 쉬어도 축 늘어지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그런 레이시를 걱정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내줬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서 차를 건네주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가 차를 건네주자 몸을 일으키고 엘라에게 칭얼거렸다.
“으아아……. 전에는 어떻게 전부 처리한 거예요?”
“전부 마구간지기에게 맡겼지. 그런데 지금은 네가 왔으니까 마구간지기에게 신세를 지지 않는 거고.”
“으으응…….”
“근데 혼자서 처리하기는 확실히 꽤 양이 많지. 말이 8마리에 사냥개가 5마리니까.”
사냥개야, 그러려니 해도 말 8마리가 치명타다.
체력을 관리하면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지만, 혼자서 돌보기에는 수가 너무 많다.
새벽 4시에 읽어나 몸 상태를 살핀 다음 아침밥을 먹인 다음, 점심까지 풀어서 산책시키고, 점심밥을 먹인 다음에는 씻겨준 다음 빗으로 빗어주고, 마구간을 치우고, 저녁을 먹이면 하루가 꼬박 가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잠시 테이블을 툭툭 두들기다가 이내 마음을 정했다.
“흐음……, 하긴 굳이 말만 타고 다닐 이유는 없겠지?”
“네……?”
“다른 가축을 구하자. 아직 덜 테이밍 된 짐승을 보관하는 곳이 있거든. 거기에서 탈 걸 구하자. 체력도 좋고 관리하기도 편한 동물로. 왕족이 말만 타라는 법은 없잖아?”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음, 각종 서류를 작성해야 하고 테이머가 관리해야 되지만 지금보다는 편할 걸? 싫으면 그만둘게.”
“일이 줄어든다면 할게요!”
엘라의 말에 벌떡 일어나서 당장에 하겠다고 말하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작게 웃다가 그럼 곧바로 가자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미네르바와 함께 엘라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엘라가 간 곳은 국왕이 있는 알현실.
다른 귀족들 몇몇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국왕은 평소와 다르게 근엄한 얼굴로 엘라를 맞이했고, 엘라도 진지한 얼굴로 국왕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무슨 일이지, 엘라?”
“예비 사육장에 입장하는 것을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유는 무엇이더냐?”
“말의 체력이 약해서 제 메이드의 부담이 커졌습니다. 제가 타고 다닐 가축을 담당하는 자의 체력이 걱정되니 말 대신 체력이 좋은 다른 가축을 원합니다.”
“흐음, 미스트의 경우에는 별 부담이 없는 걸로 안다만?”
“살아있는 생물과 집안일을 비교하는 건, 비교대상이 이상하군요.”
“그렇다면, 네가 가축의 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허락해주마.”
“알겠습니다.”
예비 사육장에 있는 동물들은 전원이 왕궁에서 일하는 귀족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 위한 동물들이니, 엘라도 돈을 내고 동물을 사라고 말하는 국왕.
엘라는 어차피 돈을 낼 생각이었다면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레이시와 함께 움직였고, 레이시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엘라를 쳐다봤다.
“공주인데 돈을 주는 거예요?”
“공주니까 더더욱 돈을 줘야만 해. 남들에게 모범을 보여줘야지.”
“헤에에…….”
“그것보다 레이시는 체력이 좋은 짐승을 고를 준비나 해. 네가 길들여야 해.”
“으응, 어떤 동물이 좋을까요?”
체력이 좋은 동물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개나 소.
사냥개들은 레이시가 아는 동물들 중 유일하게 먹잇감을 지치게 해서 죽이는 맹수고, 소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오래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니까.
레이시가 그렇게 체력이 좋은 동물을 떠올려보면서 엘라에게 어떤 동물이 좋냐고 물어보자, 엘라는 몇몇 동물만 빼면 레이시가 좋아하는 동물로 고르라고 말했다.
“그리폰과 와이번은 군용 짐승이니까 고르면 안 돼. 전갈이나 거미는 암살 시도가 있다고 팔아주지 않을 거고, 늑대나 개는 타고 다니면 야만인 취급이고 소는 농민들을 업신여긴다고 욕 먹으니까 안 돼.”
“헤에에…….”
“그러니까 그거 빼고 아무거나 골라. 나는 뭘 타고 다니든 상관 없으니까.”
“네에~.”
레이시의 대답에 작게 웃더니 이마에 입을 맞춰주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최대한 멋진 동물로 고르겠다며 기합을 넣었고, 엘라는 레이시에게도 그런 면이 있을 줄 몰랐다며 키득거렸다.
하긴, 전부터 이런 어린애 같은 부분이 있긴 했지.
마법을 처음 봤을 때도 눈을 빛내고 마법을 가르쳐줬으면 한다고 말했었고.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에게 잘 부탁한다며 볼에다 입을 맞추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주인, 새로운 동물을 들이는 건가?”
“으응? 아마도요?”
“…….”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샐쭉거리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얼굴을 보고는 왜 그러냐며 미네르바의 볼을 쪼물거렸고,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자신의 볼을 쪼물거리자 샐쭉 내민 입술을 집어넣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작게 투덜거리는 미네르바.
단어조차 되지 않는 웅얼거리는 소리에 레이시는 어색하게 웃다가 다시 미네르바와 눈을 마주쳤다.
……삐졌다.
자신과 눈을 마주쳐도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로.
미네르바의 반응으로 그걸 알게 된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왜 삐졌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말이나 사냥개를 들였을 땐 이런 반응 안 보였는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반응할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아무 말 없이 미네르바를 가만히 쳐다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와 눈을 마주치다가 이내 고개를 홱 돌리며 레이시를 꽉 끌어안았다.
“빨리 예비 사육장인지 뭔지하는 곳에 가고 싶다.”
“응? ……아, 뭐. 그러자. 오늘은 일 없으니까 나도 빨리 쉬고 싶고.”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이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에게 나중에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말한 다음 미네르바와 깍지를 꼈고, 엘라는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간 감촉에 어깨를 으쓱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방 도착한 예비 사육장.
예비 사육장은 마구간이나 사냥개 훈련소와는 다르게 동물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같이 있으면 안 되는 동물이 있다거나 한 번에 한 동물만 테이밍 할 수 있게 배려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레이시는 예비 사육장에 있는 동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말 대신 타고 다닐 동물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선 치타나 이런 고양잇과 동물은 제외.
말들의 체력 안배 때문에 말을 대신할 동물을 고르는 건데, 고양잇과 동물들은 대부분 체력도, 회복력도 낮으니까.
애초에 지구력만 놓고 보자면 초식동물이 대부분의 육식동물을 압도한다.
그러니 직접 타고 다니거나 마차를 끌게 할 동물을 고른다면 초식동물, 혹은 잡식성 동물이 좋다.
“아……, 산양이다. 근데 되게 크네요.”
“저건 북쪽의 설산에서만 사는 아이스 마운틴 클라이머네.”
“네?”
“아이스 마운틴 클라이머. 산양들이 다들 그렇지만 저 종은 특히나 산을 잘 올라서 붙은 이름이지. 전신에서 냉기를 내뿜어서 체력도 좋고, 잡식성에, 가끔 소금을 먹여야 한다는 것 외에는 주의할 점도 없어서 꽤 괜찮은 녀석이야. 저 녀석으로 할까?”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던 레이시의 눈에 띈 건 커다란 산양이었다.
초식성에, 달리기도 꽤 잘하고, 체력도 나름 강한 동물.
레이시는 산양이라면 무척 좋을 것 같다면서 엘라에게 허락을 구했고, 엘라는 자신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며 레이시의 등을 가볍게 밀어줬다.
“그럼 도와주시겠어요?”
“……부우.”
“……아, 아하하.”
하지만 엘라와는 반대로 미네르바는 레이시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어린애처럼 레이시를 끌어안고 계속 놓아주지 않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왜 그러냐며 볼을 쪼물거렸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레이시는 어색하게 웃다가 엘라를 쳐다봤고, 엘라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간 제한은 없으니까, 괜찮아.”
“으응……, 죄송해요.”
엘라의 말에 안심하면서 미네르바의 손을 잡는 레이시.
레이시는 미네르바에게 잠시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냐면서 웃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움찔 떨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따끔따끔거리면서 레이시의 웃음을 쳐다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미네르바는 괜히 투덜거리면서 레이시를 끌어안았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포옹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포옹도 평소와 다르게 힘이 들어간 걸 보면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왜 갑자기 미네르바가 삐졌나 이건데…….
사냥개와 말들을 고를 때와는 너무 다른 반응.
레이시는 대체 왜 미네르바가 삐지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미네르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단 같이 걷자며 미네르바와 손을 잡고 예비 사육장 안을 걷기 시작했다.
“산양을 들이는 거 싫어요?”
“……모르겠다. 주인이 편해지려면 들여야 한다는 건 알고 있는데…….”
레이시의 말에 레이시를 끌어안고 부비적거리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반응에 아무 말 없이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손길에 아무 말 없이 레이시를 꽉 끌어안았다.
“으우우우…….”
“아하하하…….”
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모르겠다는 듯 레이시의 몸에 고개를 파묻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행동에 작게 웃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산양을 들이는 건 나중으로 하자고 말했다.
“그러면 주인이 힘들지 않나?”
“괜찮아요. 으음~ 일이 많기는 하겠지만, 미네르바가 도와주면 못 견딜 정도도 아닌 걸요. 안 그래요?”
“……으응. 그렇다…….”
레이시의 말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괜찮다고 말하자마자 사라진 가슴의 따끔거림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레이시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느껴지는 건 뭔가 가슴이 뚫린 것 같은 공허감.
미네르바는 그런 자신의 감정이 이상하다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단 레이시의 말을 따라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미네르바는 레이시에게 찰싹 달라 붙어서 레이시의 일을 흉내내서 돕기 시작했다.
원래 맡던 말의 산책을 돕는 일뿐만이 아니라 말의 저녁을 대신 먹이기 시작했고, 사냥개의 훈련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레이시의 일의 절반을 돕기 시작한 미네르바.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말의 숫자를 늘리는 게 아니라 산양이든 뭐든 튼튼한 동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연약한 동물이 수십마리가 있어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연약한 동물이 수십마리가 있다면 서로의 체력을 계산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계산해야해서 불편하기만 하고, 일이 늘어나기만 한다.
강한 녀석 한 마리를 돌보는 게 훨씬 편하다.
그렇게 생각한 미네르바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들에게 건초를 잔뜩 준 다음 미스트에게 갔다.
“어머, 무슨 일이신가요? 레이시라면 공부하고 있을 텐데…….”
“미스트에게 볼 일이 있다.”
“으응?”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나?”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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