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애를 하게 된 건 좋지만 내가 여자가 되어버렸다-98화 (98/542)

〈 98화 〉 저택에서 도망치자­4

* * *

“으, 으응…….”

레이시가 일어난 건 미네르바가 아샤의 심부름을 하고 나서 10분 정도 후였다.

10분 남짓한 시간 밖에 더 안 잤지만, 그래도 피로가 많이 풀렸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몸을 뒤틀며 스트레칭하는 레이시.

그러다가 레이시는 문득 자신이 베고 있는 게 베개가 아니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위로 했고, 이내 아샤와 눈을 마주치자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으응……? 아?죄송해요!”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이거 마셔.”

식은 차를 건네면서 어깨를 으쓱이는 아샤.

레이시는 그런 아샤에게 몇 번 더 사과하다가 아샤에게서 차를 건네받고 홀짝거렸고, 아샤는 레이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할지 물어봤다.

“어제라면…….”

“야차에 대한 이야기.”

“아, 으음……,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재미는 없긴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괜찮아.”

달콤한 차로 입술을 축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아샤는 그럼 차를 다 마신 다음,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말했고 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네르바와 함께 욕실에 들어가 가볍게 샤워했다.

“후아…….”

“그래서 어디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산적을 했다는 이야기부터요.”

그리고 샤워를 끝낸 레이시는 아샤와 함께 기사단 숙소 뒤편에 마련된 테라스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레이시가 가장 먼저 듣고 싶다고 말한 건 산적 일을 했다는 이야기.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별 거 아니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다가 자신이 태어났을 때를 말해주었다.

“나는 산적들이 있던 곳에서 그 감정을 빨아먹고 태어났거든. 아마도.”

“정말요?”

“응. 다른 건 몰라도 산적이 있는 곳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그 산적들은 나를 보자마자 덮치려하더라.”

“보자마자요!?”

“용병이나 모험가는 마을의 창관이라도 갈 수 있지, 산적은 그런 것도 못 하니까 성욕이 쌓이기만 하거든. 병사들이 쫓고 있어서 사람을 납치하지도 못해서 염소에다가 박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자가 나타나봐, 어쩌겠어?”

“괘, 괜찮으신거죠……?”

“물론 내가 다 때려죽였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이는 기술이 처음부터 머리에 박혀있었거든. 그래서 그거를 사용해서 전부 죽였어. 그리고는 그들의 재화를 모두 훔쳤지. 아, 그때 입은 옷이나 장신구는 전부 들고 있어. 기념이라고 챙겨뒀거든. 보여줄까?”

“으응……, 네.”

아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대답에 잠시만 기다려 달라면서 숙소로 들어가더니 10분 정도 후, 다른 옷을 입고 내려왔다.

그리고 그런 아샤의 모습은 무척이나 괴리감이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늘 정복과 제복, 그리고 갑옷을 입고 다니던 것과는 다르게 크롭티와 다리에 달라붙는 가죽바지를 입은 아샤.

그런 아샤의 배꼽과 귀에는 피어싱이 잔뜩 있었고, 심지어 입을 벌리자 혀에도 십자가 형태의 커다란 피어싱이 박혀있었다.

“…….”

“어때? 오랜만에 끼워서 구멍을 다시 냈는데.”

“혀, 혀에도요……?”

“혀는 구멍 안 냈어. 이거 마도구거든. 산적 대장이 쓸 줄을 몰라서 그냥 상자에 처박아두던 걸 꺼내 쓴 거지만.”

“아샤는 어떻게 알았어요?”

“무기라면 쥐는 순간 어떻게 쓰는지 대충 알거든. 그렇게 해서 쓴 거지.”

자신의 혀를 약하게 깨물더니 입에서 불을 내뿜는 아샤.

이렇게 암습을 하는데 쓰이는 도구라고 말한 아샤는 자리에 앉아서 머리를 긁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먹을 게 없어서 대충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적이냐고 물어본 다음 산적이라고 대답하면서 내 몸을 덮치려고 하면 머리를 으깨주었지. 한 3년을 그런 식으로 사냥을 다니다 보니까 산적을 사냥하는 야차가 있다고 소문이 나더라고. 엘라와는 그때 만났어.”

“헤에…….”

“그때 엘라는 12살이었던가? 한 10년도 전의 이야기니까. 미스트는 18살이었던가? 그랬을 걸? 사람의 나이는 잘 모르겠으니까 아무래도 좋지만.”

“보자마자 싸웠어요?”

“아니, 나는 한 번 물어봤지. 산적이냐고. 그러더니 아닌데 싸워보자면서 마법을 날리더라고. 그래서 싸웠지. 미스트가 개입해서 졌지만…….”

“정말요?”

“마법사가 거리를 내준 채 전사하고 싸우면 전사가 이기지. 거리가 10m면 내가 반드시 이기고, 거리가 50m쯤 떨어져 있으면 반반이고, 100m 떨어지면 내가 무조건 져. 물론 처음 만났을 땐 미스트가 개입해서 졌지만.”

“그렇구나…….”

“그때 전투의 흔적이 이 뿔이야. 처음 진 건데 진 거보다는 한 감정이 앞서더라고.”

“무슨 감정인데요……?”

“나도 미스트 같은 부하가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게 존경을 주는 부하가. 그때도 미스트는 엘라의 메이드였으니까. 솔직히 부럽더라고.”

“아하…….”

아샤의 말에 왜 아샤가 탐욕의 야차였고 이제는 경외의 야차가 됐는지 이해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엘라에게 패배한 다음 바로 왕궁으로 왔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그런 건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배고파서 밥 달라고 마을까지 내려간 거야.”

“……네?”

“미스트가 해준 걸 먹고 나니까 내가 해 먹는 건 좀 맛이 없더라고. 그래서 질려서 마을에 내려갔더니 엘라가 기사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해서 기사단에 들어갔어. 그리고 기사 활동을 하다보니까 내가 원하는 감정이 뭔지 깨닫고 야차로서 진화한 거지.”

“헤에에…….”

“너도 언젠가는 진화할지도 모르겠네.”

“진화하면 뭔가 많이 달라져요?”

“음……. 이런 거지.”

잠시 눈을 감더니 곧바로 [경외의 야차] 스킬을 사용하는 아샤.

아샤가 야차라면 가지는 고유의 스킬을 사용하자, 레이시는 순간 숨이 턱 막히며 손끝을 떨었고 아샤는 레이시의 반응에 스킬을 꼈다.

“방금 그건 경외의 중에서 외……, 그러니까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스킬이야. 위압감이지. 반대로 이건 경, 존경심이야.”

“흐, 흐에……?”

아샤의 말과 함께 바뀌는 감정.

이번에는 뭔가 아샤가 지켜준다면 고블린 군세도 뚫고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정이 들면서 아샤를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킥킥 웃으며 스킬 사용을 완전히 멈췄다.

“이런 식으로 스킬에 액티브 효과가 생겨.”

“흐아아…….”

“참고로 내가 죽였었던 살의의 야차는, 스킬을 사용하면 약한 자는 그대로 죽어버리더라. 나 혼자 가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가축 피해가 생겼었어. 너는 연정의 야차지? 그러면 뭔가 사람을 현혹시키는 걸지도 모르겠네.”

“아, 아하하……. 그런 건 좀 싫은데.”

사람을 유혹하다니……, 딱히 서큐버스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그럼 밥 때문에 기사가 된 거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야차의 습성에 대해서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비싼 밥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직접 주는 밥을 더 좋아하는 건 그곳에 존경심이 있기 때문이며 야차는 그런 걸 먹어야만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다는 것.

그리고 레이시가 지금껏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건 엘라나 미스트나 미네르바나 전부 레이시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게 말하자 레이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럽다고 말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킥킥 웃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사실이잖아. 그것보다…… 어떻게 할래?”

“네?”

“마리아가 말리고 있긴 하겠지만, 엘라는 국왕에게 가서 당장에 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을 거야. 국왕도 3시간 이상은 못 벌겠지. 도망칠래?”

안 도망치면 금방 엘라와 미스트 사이에서 다시 시달릴 것이라고 말하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곳이 없다며 쓰게 웃다가 조용히 아샤를 바라봤다.

“……저, 실례가 안 되면.”

“가자. 데이트.”

“네?”

“좀 더 쉬고 싶은 거지? 데이트 가자. 오늘까지 휴일이니까 좀 더 놀아도 괜찮겠지.”

“에, 에헤헤…….”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는 레이시.

레이시는 잠시 쭈뼛거리기는 했지만 아샤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았고, 아샤는 레이시를 보면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산적 시절 때 입은 옷은 야성적이기는 해도, 남과 돌아다닐 때 입을 만한 옷은 아니니까.

하지만 아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시 엘라와 미스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그런 두 사람의 목소리에 움찔 떨더니 그대로 아샤의 팔을 잡고 도망쳤다.

그래도 아직 제 2 내벽의 안쪽이었지만…….

“흐음, 이대로 제 1 내벽까지 도망치자.”

“괜찮아요?”

“뭐, 제 2 내벽 안은 왕족의 손바닥 안이니까 제 1 내벽으로 가야지.”

“그치만 엄청 먼 걸요…….”

마차의 말들이 경보로 걷는다지만, 그래도 한 시간이나 움직일 정도면 무척 넓은 게 분명하다.

그렇게 말하자 아샤는 레이시를 마구간에 데리고 가더니 레이시를 껴안고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차는 아샤.

레이시는 말이 출발하자 미네르바를 보고 당황했고, 미네르바는 말을 따라 달리다가 이내 레이시와 기사단 숙소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 나까지 따라가면 들킬 것 같다.”

“에? 네…….”

하기는 미네르바 같은 하피는 쉽게 눈에 띄니까 같이 가면 들킬 확률이 높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한숨을 깊게 내쉬고 말 위에 있는 레이시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나랑 두 번 놀아주는 거다……?”

불만 가득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레이시를 생각해서 시간을 벌어주겠다고 말하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미스트만 아니라면 모르는 척 떼를 쓸 수 있을 거라며 레이시를 바라봤고,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말에 내려서 미네르바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정말 고마워요.”

“흐으응…….”

레이시의 말에 날개를 퍼덕이다 얼른 가라며 다시 말에 태워주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에게 힘들면 그냥 그만둬도 된다고 말한 다음 아샤의 몸을 꽉 잡았고, 아샤는 말을 출발시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누가 보면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줄 알겠네.”

“아, 아하하……. 말만 없지 진짜 전쟁터에요.”

“하긴 두 사람이 기 싸움하는 거라면 차라리 몬스터 사냥에 나가는 게 훨씬 편하겠네.”

“아하하…….”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시선을 피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안 보이기 시작하자 죄책감에 한숨을 푹 내쉬다가 아샤와 함께 제 2 내벽을 통과했고 귀족들, 혹은 부호들이 오고 가며 생활하는 곳에 도착했다.

“일단 말은 맡기고 왔어. 말 타고 다니면 추적당할 거니까.”

“으응…….”

“그래서 어디로 갈까?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데려다 줄게.”

“저는 여기는 잘 모르는걸요. 아샤는 이 근처 잘 아세요?”

“글쎄……. 부하들하고 간 곳은 있긴 한데…….”

부하들을 데리고 자주 갔었던 곳을 떠올리고는 눈살을 찌푸리는 아샤.

아샤는 레이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술은 어느 정도 할 줄 아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아샤의 질문에 잘 못 마시지만 그래도 아예 못 마시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전생에도 술을 그럭저럭 먹었으니, 전생보다 몸이 강한 지금은 좀 더 잘 마시겠지.

그래서 술을 조금은 마실 수 있을 거라고 말하자 아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부하들하고 자주 갔던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근데 술집으로 가는 건가요?”

“음……, 술집이긴 한데, 조금 애매하네. 노래나 이런 것도 부르거든.”

“으응?”

아샤의 말에 레이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바드가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는 고급 주점.

귀족과 부호들이 다니는 거리에 있는 술집이니 그런 술집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약간은 기대된다며 아샤를 보고 헤실헤실 웃었고, 아샤는 레이시의 웃음에 머리를 긁다가 레이시를 데리고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