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저택에서 도망치자3
* * *
“좀 특이한 애들이지?”
“아, 아하하……, 개성 넘치셔서 재미있는 분이었어요.”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를 닦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말에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고, 레이시는 아샤의 반응에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하아……, 이게 다 기사단에 여자밖에 없어서 그래. 직원이라도 남자로 좀 섞어둬야 쟤들이 정신을 차릴 건데 정절을 지켜야 한다면서 전부 여성으로 채우더니 정신이 나간 게 틀림 없어.”
기사단이든 뭐든 집단에 한쪽 성별밖에 없다면 자연스럽게 음담패설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쪽 성별만 있으면 긴장감이라는 게 없고 동질감만 남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
거기에다가 감옥보다는 낫다지만, 훈련 일정이 꽤 힘든 기사단이니까 스트레스가 그쪽으로 발산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제 막 입단했을 땐 기합을 잡는답시고 단체로 자신을 강간하려고 한 미친 집단도 있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아샤는 지금의 벽천화 기사단은 어쩌면 레이시의 말대로 그냥 개성이 넘치는 집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상한 녀석이라는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기지개를 켜다가 시계를 보고는 이부자리를 펼쳤다.
“난 아래에서 잘 테니까, 침대에서 자.”
“네? 제가 아래에서 잘게요.”
“아니, 손님을 바닥에서 재울 순 없잖아.”
“그래도……. 거기에다가 미네르바랑 오면서 같이 자기로 약속을 해버려서…….”
“…….”
1인용 침대라 자신이 바닥에서 자겠다고 하는 아샤.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말에 당황하다가, 방의 주인인 아샤가 침대에서 자고 자신이 바닥에서 자는 게 맞지 않겠냐며 자신이 바닥에서 자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샤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자라며 침대를 다시 양보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양보에 난감하다는 듯 눈살을 찡그리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껴안고 있는 미네르바를 가리켰다.
팔로는 모자란 건지 날개로도 레이시를 끌어안고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일이 갑자기 늘어나 피곤해서 한동안 같이 자지 않았더니 이렇게 됐다며 어색하게 웃다가 아샤에게 사과했다.
“하아……, 그럼 그냥 셋 다 바닥에서 자자. 이불 새로 꺼내올게.”
“죄송해요…….”
“괜찮아. 난 침대보다는 바닥을 더 선호하기도 하고.”
“진짜요?”
“응, 너무 부드러워서 별로 안 편하더라고.”
아까 꺼내온 것보다 더 큰 이불을 가져오면서 침대가 불편한 이유를 말하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부드러우면 좋은 게 아니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이부자리에 누웠다.
“태어날 때 버릇이야.”
“아……. 그러고 보니 아샤는 어디에서 태어났나요?”
“산적 집단.”
“……네?”
“잠이 안 오면 이야기해줄까?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레이시에게 자기 팔을 내어주면서 힐끗 쳐다보는 아샤.
레이시는 베개 대신에 아샤의 팔에 머리를 눕힌 다음 잠시 고민하다가, 산적 같은 흉흉한 이야기보다는 다른 걸 듣고 싶다고 말하며 궁금해하던 걸 물어봤다.
“아샤의 뿔이 왜 그렇게 됐는지 궁금해요.”
깔끔하게 깎여나간 뿔.
자신의 것과 다르게 관자놀이에서 살짝 위로 뻗은 한쪽 뿔을 보던 레이시는 반대쪽 뿔은 왜 꺾였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질문에 눈을 깜빡이다가 뿌리만 남은 오른쪽 뿔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엘라가 꺾어버린 거야.”
“……에?”
“내가 막 태어나서 날뛰고 있을 때……, 그러니까 경외의 야차가 되기 전의 내가 엘라하고 싸웠을 때 엘라한테 져서 꺾여버린 뿔이야.”
“다, 다시 안 자라요……?”
“아니, 자라고 있는데 일부러 내가 깎아내고 있는 거야. 그때 깨달은 걸 기억하려고 하고 있거든.”
아샤의 말에 움찔 떨다가 그때 깨달은 게 뭐냐고 물어보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질문에 아직 야차로서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상태라는 걸 깨닫고는 레이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아샤의 품에 안기게 되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자기 품에서 빠져나가자 아샤를 불만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레이시를 꽉 끌어안았고, 레이시는 두 사람의 행동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아샤를 올려다보면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머리를 가볍게 몇 번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내 정체성하고 관련된 이야기야.”
“정체성이요?”
“응. 경외의 야차. 원래는 다른 거였거든.”
“뭐였어요?”
“탐욕.”
“……?”
아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시.
지금껏 자신이 봐왔던 아샤는 탐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당장에 지금 이 방만 봐도 사치품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 기준 한 달 2400만 원까지 받는데 장식품도 없고, 책상에 있는 것들이라고는 노트 몇 권과 필기구, 그리고 병법서가 끝.
가지고 있던 옷들도 전부 유행을 타지 않는 기성품인데다가 그 기성품도 썩 고급은 아니다.
거기에다가 월급으로는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니, 아무리 봐도 아샤는 몇 번을 생각해봐도 탐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탐욕의 야차로 태어난 걸까?
레이시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올려보자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시선에 피식 웃더니 가볍게 끌어안으면서 눈을 감았다.
“내일 일어나서 이야기해줄게. 지금 잠자리에서 하기에는 이야기가 좀 길거든.”
“으응, 네에…….”
아샤의 말에 이불을 가슴까지 올리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이불을 올리자 자기 날개로 레이시를 감싸준 다음 레이시를 천천히 재워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방 잠에 빠지는 레이시.
아샤와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잠든 걸 확인하자 금방 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벽천화 기사단은 아침부터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레이시가 여기에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 있어?”
“에, 엘라 공주님!”
미스트와 함께 벽천화 기사단을 방문한 엘라.
엘라는 싱글벙글 웃고 있으면서도 눈은 웃지 않는, 무서운 웃음을 지으면서 당장에 레이시를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아샤에게서 받은 국왕의 명령서엔 레이시가 좋다고 할 때까지 레이시를 보호하라고 적혀있었고, 벽천화 기사단은 국왕 직속의 기사단이었기에 엘라보다 국왕의 명령이 우선시 되고 있었다.
즉, 지금 자신들이 엘라를 돌려보내야 했다.
……왕국에서 한 손 안에 드는 강자에다가 혈통도 공주인 엘라를.
그렇게 생각하자 현 벽천화 기사단의 대장인 마리아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엘라에게 엘라의 명령을 듣는 건 지금은 무리라고 말했다.
“구, 국왕님의 명령이 우선시 되기 때문에 공주님의 명령은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흐응, 국왕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
“돌아가주셨으면 합니다!”
“아하하, 그렇게 딱딱하게 있지 마. 나도 그 정도 이성은 있으니까. 마리아 시트리아 남작.”
“……네, 넵!”
아니, 어떻게 봐도 당신, 이성이 날아갔잖아.
엘라의 말에 그렇게 생각하는 마리아.
마리아는 엘라가 자신의 이름을 풀 네임으로 부르며 어깨를 두들기자 정신이 나갈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기사단의 일부터 처리하고 보자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아냐, 아냐. 괜찮아. 너희들도 바쁠 테니 일 해, 나는 들릴 곳이 있어서 가볼게. 억지 부려서 미안했어.”
“아, 아닙니다!”
마리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마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는 엘라.
마리아는 엘라의 손길에 움찔움찔 떨다가 엘라가 미스트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부하들이 금방 돌아오지 않을까 물어보자 얼굴을 굳혔다.
확실히 자신들이 아는 엘라라면 분명히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아는 아샤에게 일을 떠넘기기 위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왜인지 모르게 늦잠을 자는 아샤.
자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했으니까 올라가서 문을 두들겨주면 금방 깨겠지.
“저기, 대장~ 아직 주무세요?”
하지만 아샤는 마리아의 예상과는 반대로 문을 두들겨도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잠을 자는 건지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반응이 없는 아샤.
마리아는 혹시 아샤가 병이라도 걸렸나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고, 동시에 두 사람의 살기를 몸으로 받게 되었다.
이부자리에 앉은 채 무덤덤한 얼굴로 마리아를 쳐다보는 아샤와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화낸다고 말하듯 날개 깃털을 잔뜩 세운 채 으르렁거리는 미네르바.
마리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입을 가리고 천천히 레이시를 쳐다봤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 했는지 앓는 소리를 내면서 아샤의 허벅지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칭얼거리는 레이시.
딱 봐도 피로에 쩔어서 죽어가는 모습이라, 마리아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레이시는 이제 막 메이드 일을 시작한 초보자.
갑자기 일이 늘어난 엘라의 일정을 따라잡을 정도의 기술이 없다.
체력은 타고난 체력으로 감당하겠지만, 정신력 쪽은 타고나는 것보다는 갈고닦는 게 더 크니까 정신적으로 지쳐서 못 일어나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명령서에 엘라와 미스트가 싸우고 있어서 도망쳤다고 했었던가…….
마리아는 거기까지 떠오르자 조심스럽게 문을 닫더니 뒤꿈치를 들고 살살 걸으며 아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 대장.”
소리를 최대한 죽여서 이야기하는 마리아.
아샤는 레이시의 등을 토닥이다 흐트러진 이불을 덮어주며 뭐냐고 물어봤고, 마리아는 아샤에게 1층에서 있었던 소란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러자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긁는 아샤.
마리아는 아샤의 반응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샤를 쳐다봤다.
“다른 공주님은 몰라도 엘라 공주님은 대장이 아니라면 무리니까요.”
“그래?”
“네.”
“그럼 이번에는 네가 해봐. 대장이잖아.”
“…….”
아샤의 말에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는 마리아.
마리아는 정말 자신이 해봐야 하는 거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어깨를 으쓱이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고 있는데 다크 서클이 짙어진 것처럼 보이는 레이시.
아샤는 이런 애를 억지로 깨울 수 없지 않냐며 마리아를 쳐다봤고, 마리아는 아샤의 말에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오래 지내지는 않았지만, 레이시의 성격이 알기 쉬운 편이라 마리아는 아샤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고 말았다.
하긴 왕궁에서 일하는 것치고는 순진해서 바보 같아 보일 정도의 레이시에게 일을 떠넘기는 건 기사도에 어긋나니 자기도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아는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얼굴로 경례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살아돌아오지 못한다면 제 집무실의 2번째 서랍, 비밀 공간에 있는 춘화집을 전부 태워주세요.”
“나가 뒈져, 집무실에서 뭐하는 거야? 변태년아.”
“춘화를 볼 시간이 그 때말고는 없는 걸요.”
“넌 두 번 뒤져라. 네가 그 나이 먹고 혼담 하나 없는 것도 이해가 확 되네.”
“자기는 처녀 아니다 이거죠? 흥……, 혼자서만 궁정 로맨스를 즐기고. 치사해.”
투덜거리면서도 소리없이 밖으로 나가는 마리아.
아샤는 그런 마리아의 모습에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레이시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진정했는지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가 다시 깊게 잠들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미네르바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거 요리사에게 가서 건네주면 좋겠는데……, 내 이름을 말하면 거기에 적힌 것들을 줄 거니까 들고 와줘.”
“나는 너의 미네르바가 아니다.”
“레이시가 먹을 거야.”
“그것부터 말해라. 그럼 다녀오겠다.”
마찬가지로 레이시가 중간에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가는 미네르바.
아샤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다루기 꽤 쉽다고 생각하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레이시가 뒤척이며 자기 다리를 끌어안자 얼굴을 붉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