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저택에서 도망치자2
* * *
“흐아아…….”
“많이 힘들어?”
“네?”
“아니, 네가 그렇게 늘어지는 건 처음 봐서.”
씻고 나오자마자 축 늘어져서 미네르바에게 기대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행동에 그렇게 힘드냐며 얼음을 잔뜩 담은 차가운 물을 건네주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일이 많아진 건 그럭저럭 참을만 한데…….”
“진짜 싸우는 거야?”
“아뇨, 진지하게 싸우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그럼 진지하지 않게 싸운다는 거네.”
“…….”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주말에 누구와 놀고 싶냐며 자신을 유혹했던 두 사람.
차라리 자기와 놀자고 유혹하면 화라도 내겠지만, 두 사람은 그런 부분에서도 치밀한 건지 절대로 자기와 노는 걸 강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강조하는 건 놀러 가면 이런 게 있다고 말하는 것뿐.
서로 싸우는 기색은 전혀 없이 진지하게 휴일에 대해서 논하는 것뿐이라서 유치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화낼 수도 없다.
평소의 두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더더욱.
그렇기에 레이시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한숨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일단 밥이라도 먹자고 말했다.
“과자 많이 먹어서 배 안 고프면 안 먹어도 되는데, 여기는 야식 금지라서 먹어두는 게 좋을 거야.”
“아, 그럴까요?”
“응, 공짜 배식이니까 먹어둬.”
레이시의 대답에 머리를 가볍게 한 번 더 쓰다듬어준 다음 식당으로 내려가는 아샤.
미네르바가 레이시를 안은 채 식당으로 내려가자 기사들은 레이시와 미네르바를 보고 소곤거리다가 아샤와 레이시가 앉은 긴 테이블에 앉기 시작했다.
“대장~, 밥 같이 먹어도 되죠!?”
“응? 맘대로 해, 그런데 기사단끼리 먹는 게 안 나아?”
“에이~ 부하들끼리 있는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풉, 제법 대장처럼 됐네.”
아샤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금발이 인상적인 여성.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여성은 아샤에게 다가와 친밀감을 표현하더니 자연스럽게 레이시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사람과 친해지는 게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샤를 바라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시선에 눈앞의 여성이 누구인지 말해주었다.
“저기……, 이 분은 누구신가요?”
“현 벽천화 기사단 단장, 내 후임이지. 참, 벽천화 기사단은 왕가의 여성을 호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사단이야. 보면 전원 여자지?”
“당신이 레이시라는 메이드죠? 요즘 되게 화제더라고요! 아, 저는 마리아라고 해요!”
“아, 아하하……, 만나서 반가워요. 드릴 게 과자밖에 없는데 괜찮으신가요?”
아샤의 소개에 곧바로 레이시에게 악수를 요청하며 인사하는 마리아.
레이시는 마리아의 인사에 양손으로 악수를 받아주다가 주섬주섬 국왕이 건네준 과자를 건네주었다.
운동하는 사람에게 저녁 식사 전에 과자를 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센스가 최악이었지만, 마리아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는지 레이시에게서 과자를 받고 그대로 입에 넣었다.
“음~ 이거 되게 맛있네요! 어디에서 샀어요?”
“네? 그건 잘 모르겠는데…….”
“헤에, 수제인가요? 누구에게 선물 받은 건가요?”
“국왕님이요.”
“어……, 저……, ……씹어 삼켰는데 잠시의 여유만 주시면 토하고 올게요.”
“에?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좀 더 드실래요?”
“아, 아뇨. 국왕님의 하사품을 다른 사람이 먹으면 물리적인 의미의 모가지라…….”
즐겁게 과자를 먹다가 레이시의 말에 그대로 독이라도 삼킨 얼굴이 되는 마리아.
아샤는 마리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킥킥 웃다가, 정식 하사품이 아니니 레이시만 괜찮다면 먹어도 좋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마리아는 레이시의 눈치를 보다가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아, 죽다 살아났네요!”
“병신.”
“대장 너무해요!”
“킥킥! 그것보다 밥 받아올게.”
“아, 저희는 미리 주문해뒀어요.”
“그래.”
마리아의 말에 레이시와 미네르바, 그리고 자신의 식사만 받아오는 아샤.
레이시는 기사들은 운동하는 사람이라 역시 고기 위주로 먹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샤가 들고 오는 식판을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일단 식판의 크기가 말도 안 됐다.
자신이 남성이었을 때도 다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의심이 갈 정도로 커다란 식판.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깨끗하게 닦여진 식판 위에는 당근과 샐러리, 그리고 베이컨이 섞인 매쉬드 포테이토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언뜻 봐도 주먹보다 큰 감자를 3~4개씩 으깬 양.
그리고 그 옆에는 그것보다 큰 덩어리의 고기가 2장 쌓여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샐러드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식판만 커다란 게 아니라, 그냥 음식의 양이 미쳤다.
푸드파이터인가?
운동하고 잘 먹어야 근육이 붙는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건 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레이시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연실색하자, 아샤는 식판을 각자의 앞에 내려놓으면서 많으면 남겨도 괜찮다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에이, 대장. 이 정도도 못 먹는다고요?”
“레이시는 메이드잖아. 너네 같은 근육 고릴라가 아니라고.”
“대장! 저희도 여자거든요!? 고릴라라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서 기사단을 애인 한 명 만든 놈이 하나도 없는 모쏠아다집단으로 만든 거냐?”
“……대, 대장도 모쏠아다면서!”
“…….”
“……에?”
“뒤에 건 아냐…….”
그러자 장난치듯이 말을 꺼내는 마리아.
아샤는 레이시의 긴장을 풀어주는 마리아의 모습에 역시 마리아가 좀 더 대장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마리아의 농담을 받아주었다.
그러다가 나온 모쏠아다 이야기.
기사단의 목적 때문에 아예 여성밖에 없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아샤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면서 마리아를 쳐다봤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샤의 시선에 말의 수위만 조절할 뿐 아샤도 모쏠아다가 아니냐며 당당하게 아샤에게 농을 던졌다.
그러자 아샤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괜히 포크로 매쉬드 포테이토를 휘적거리는 아샤.
마리아는 그런 아샤의 반응에 웃는 얼굴로 아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고는 정말이냐며 덜덜 떨기 시작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역시 기사단에서 나가야 하는 거죠!? 나가야 애인이 생기는 거죠!?”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바보야…….”
“으아아아! 대장! 어째서 솔로 부대를 탈출하신 거예요!?”
“시끄럽다고! 밥이나 퍼먹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괜히 소리치고는 고기를 입에 넣는 아샤.
마리아는 그런 아샤의 모습에 킥킥 웃다가 그래서 누구와 했냐고 물어봤다.
만약 창관에 간 거라면 누가 괜찮은지 말해달라고 말하는 마리아.
아샤는 그런 마리아의 말에 갈색 피부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다가 한 번만 더 떠들면 주먹과 얼굴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번엔 레이시에게 너무하지 않냐며 키득키득 웃었다.
“…….”
하지만 레이시는 똑같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마리아는 레이시의 반응에 좆 됐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의 센서가 작동하지 않았던 걸까……?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봤지만, 부하들은 마리아와 똑같은 얼굴로 마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들도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시선.
마리아는 그런 부하들의 시선에 정면돌파 하나밖에 안 남았다며 입술을 꽉 깨물고 레이시를 바라봤다.
“어, 어쩌다가 대장하고 하게 됐나요?”
“……에, 에로 던전의 트랩에 걸려서요.”
“아, 아하하하! 저희 대장이 너무 거칠게 하진 않았죠!? 처녀라서 되게 거칠게 했을 건데 화낼 땐 화내주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 제가, 스, 스승님을……, 그…….”
“…….”
그러고 보니 병법서에서 한순간의 치기에 모든 걸 맡기지 말라고 했던가…….
마리아는 병법서를 좀 더 열심히 읽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레이시를 보는 방향으로 머리를 박았다.
“대장, 몇 분 할까요?”
“몰라, 이 새끼야.”
마리아의 말에 욕설을 퍼부으며 붉게 물든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는 아샤.
레이시는 마리아에게는 자기는 괜찮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고 말했고, 아샤에게는 자기가 마음대로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네가 괜찮다면 괜찮아.”
“그, 고마워요.”
“밥이나 먹자, 식으면 맛없어.”
레이시의 고기를 대신 잘라준 다음 자기 식판에 있는 걸 빠르게 비우기 시작하는 아샤.
레이시는 아샤가 밥을 먹기 시작하자 똑같이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아샤나 미네르바와는 다르게 아무리 먹어도 양이 줄지 않았다.
뭔가 자기 밥만 계속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
레이시는 어째서 먹으면 먹을수록 커져 보이는 음식에 허탈한 웃음을 흘리다가 고기를 잠시 우물거리다 모자라다는 듯 식판의 묻은 소스를 포크로 긁던 미네르바를 보고 자신의 고기를 덜어주었다.
“저, 다 못 먹겠는데 도와주세요.”
“으, 으응……, 정말 괜찮은 건가?”
“저는 더 못 먹겠어요. 아하하…….”
레이시의 웃음에 쭈뼛거리다가 레이시가 먹여주는 고기를 먹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자신의 입에서 고기 특유의 향기가 감돌자 헤실헤실 웃으면서 고기를 먹었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빈 식판을 정리하고 음료수를 세 잔 들고 왔다.
두 잔은 기사들이 보충제로 자주 마시는 음료로, 한 잔은 소화를 돕기 위한 따뜻한 차로.
“자, 차 마셔. 소화에 도움을 주는 거야.”
“고마워요.”
“다 먹으면 말해. 치워줄게.”
“네.”
아샤의 말에 마음 놓고 미네르바에게 고기를 입에 넣어주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먹여주는 고기에 발을 앞뒤로 흔들다, 레이시의 식판이 텅텅 비자 칭찬해달라는 듯 레이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역시 대형견……, 귀엽다니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네르바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어주었고, 아샤는 레이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리아가 자신을 쳐다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이번에는 반드시 농담을 성사시킨다며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거 아세요?”
“네?”
“사실 대장님, 레이시 씨 훈련 봐주고 다음 날부터 엄청 신경 썼다는 거! 경을 줘야 하는 대상에게 외를 줬다면서 엄청 신경 쓰면서 밤에 잠도 안 잤어요!”
“헤에…….”
이제 레이시가 자신을 도와서 대장을 놀리면 된다!
분위기 메이커의 명예를 걸고서 어떻게든 농담을 성사시킬 생각이었던 마리아는 레이시에게 말할 농담을 생각하며 레이시의 얼굴이 뚫릴 듯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못 말린다는 듯 싱긋 웃는 레이시.
“알고 있었어요. 훈련할 때 중간중간 제게 미안함을 느끼셨으니까요. 저는 괜찮다고 했는데…….”
“시끄러, 이 바보야. 내가 안 괜찮아.”
“그래도요. 저는 정말 괜찮은 걸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돌린 채 턱을 괴는 아샤.
마리아는 아샤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지자 멍하니 아샤를 바라보다 돌아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돌려 레이시를 바라봤다.
나긋나긋하게 웃으면서 아샤를 바라보는 레이시.
미네르바가 품에 안겨서 칭얼거려도 웃으면서 대하는 모습에 마리아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에?”
“제게 여자력을 가르쳐주세요!”
“아, 아하하하……?”
“이 병신은 또 무슨 소리야……?”
“대장마저 숫처녀로 만드는 그 포용력을 부디이잇!”
물구나무를 선 채 레이시에게 절하며 여자력을 기르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마리아.
레이시와 아샤는 그런 마리아의 행동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마리아와 같이 다니던 사람 4명도 같이 물구나무를 선 채 절하기 시작하자 도망치듯이 숙소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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