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저택에서 도망치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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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와의 하룻밤을 보낸 후, 레이시는 한동안 꽤 지치는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엘라의 휴가가 끝난 것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엘라를 호출하는 일이 많아져서 일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2마리의 말로는 일정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마구간에는 총 8마리의 말이 머물기 시작했다.
말들이 많아졌기에 도둑맞거나 말들이 상해를 입지 않도록 사냥개들이 마구간을 지킬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했고, 동시에 레이시도 말들의 편자라거나 그런 것들을 신경 쓰며 말들을 산책시키는 일이 늘어났다.
그러면서도 아샤의 훈련은 빠지지 않고 하면서 왕궁 내 다른 일들을 도와줬고, 자연스럽게 개인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으니 개인 시간을 줄였고, 그러다보니 정신적으로 꽤 지치기 시작했다.
몸은 4시간만 자면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만, 레이시의 정신은 평범한 범인.
레이시가 전생에도 성실하게 일하긴 했지만, 하루에 18시간을 노동하고 2시간의 개인 정비시간만 가지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빡세게 일한 건 아니었다.
좀 새벽 일찍 일어나고 몸이 고된 일을 하긴 했어도 12시간의 노동시간을 지켰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시간까지 일하는 거로 따지자면 거의 하루 18시간에서 19시간의 중노동을 하고 있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서로를 보듬어준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꽤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일 시간 괜찮을까요?”
“레이시, 내일 시간 비워줄래?”
“…….”
아니, 지금은 그렇게 서로를 보듬어주지도 않나…….
레이시를 지치게 하는 두 번째 이유.
그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택 안에서의 엘라와 미스트의 분위기가 변했던 게 컸다.
미스트는 전과 다르게 엘라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다.
미스트는, 레이디스 메이드와 하급 메이드의 직급 차이를 이용해서 레이시에게 일을 가르쳐준다며 엘라가 보든 말든 레이시에게 스킨십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이면을 숨길 필요가 없어져서인지 가끔은 짓궂은 장난질을 치기도 했다.
보통 스킨십하면 뺨을 쓰다듬거나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정도이지만, 엉덩이를 가볍게 만진다거나 아랫배를 끌어안고 저녁 메뉴로는 뭐가 좋냐고 물어보거나…….
그리고 그런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엘라도 아니었다.
엘라는 자신이 한 말 때문에, 그리고 미스트에 대한 배려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명령으로 금지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스트가 레이시를 독점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엘라는 자기 힘으로 레이시를 쟁취하기 위해서 움직였고,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예전에 사귀었던 귀족 영애들에게 사용했었던 유혹까지 아무렇지 않게 행하기 시작했다.
일단 남들 앞에서 애정 과시는 기본이었다.
국정을 다루는 일에 나갈 때는 참긴 했지만, 다과회에 참석하거나 사냥대회에 갈 때는 레이시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걸고 있던 목걸이를 걸어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개 메이드에게 하기엔 너무나 과한 애정표현.
특히 마지막은 귀족들에게 레이시가 자신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귀족들은 점점 레이시에게 눈에 들이기 시작했다.
레이시는 어쩌면 엘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때문에 레이시는 팔자에도 없는 귀족들의 선물을 받을 처지에 놓였다.
일단 그런 걸 한 번이라도 받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전부 거절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매번 거절하는 것도 꽤 힘들었기에 레이시의 정신은 마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이시가 힘들어하는 마지막 이유는 자신을 자주 호출하기 시작한 사람 때문이었다.
“하하하, 그래서 이 음료수, 꽤 맛있지 않나?”
“아, 아하하……, 그러네요.”
태평하게 음료수와 과자를 먹으면서 과자부스러기를 일부러 옷 위로 흘리는 장년의 남성.
얼굴과 분위기만 보자면 평범한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지만, 남성의 정체는 오라토리엄의 최고위 혈통과 직업을 가진 사람.
국왕이었다.
전생의 감각으로 따지자면 대통령에게 연신 개인적으로 호출받아 같이 과자를 먹고 있는 것과 똑같은 상황.
그렇게 생각하자 레이시는 위가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아 어색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국왕은 그런 레이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웃으면서 왕궁의 최고 셰프들이 만든 다과를 레이시의 앞접시에 붓다시피 하고 있었다.
“흐음, 어째서 과자를 들지 않는 건가? 음료수가 별로인 건가?”
“그런 건 아닌데요…….”
이건 딱 그거다.
마을의 청년회장이 농촌에 농사하러 봉사활동을 갔을 때, 청년회장이 자신에게 막걸리를 건할 때와 똑같은 상황이다.
그래도 마을 청년회장은 그냥 같은 사람이니 어떻게 넘길 수 있을 텐데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쩌면 대통령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
레이시는 그런 사람이 자신을 매일 같이 호출하자 진심으로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일로 만난다면 그래도 속이 편하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니…….
왜, 어떻게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는 걸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전생 일개 대학생, 현생 일개 메이드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다.
“저……, 엘라에게 가야 하는데.”
“아하하, 가봐야 엘라와 미스트의 사이에 끼여서 괴롭힘, 아니, 아니지. 사랑받는 것밖에 할 일도 없지 않은가. 지금 나랑 여기서 이렇게 노는 게 훨씬 편할 걸세. 물론 나와 있어도 편하지는 않겠지! 아하하핫! 하지만 딸내미와 딸내미의 부하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이 사람이 정말 대통령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맞는 걸까?
레이시는 가벼워 보이는 국왕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다가 국왕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슬펐다.
아무리 눈앞의 사람이 불편해도 엘라와 미스트가 자신을 사이에 두고 기 싸움을 벌이는 것보다는 훨씬 편하다.
서로가 자기가 좋다고 애정을 표현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는데 자신에게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니……, 차라리 둘 다 자신에게 불만이 있으면 마음이 편했으리라.
“흐흐흐흐…….”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아니, 내 딸 아이가 그렇게 질투 많은 성격인 줄은 몰랐네! 아하핫! 분명 애인 하나나 둘, 셋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만들든 말든 신경 안 쓴다고 말할 아이였을 텐데!”
“그거 실제로 말했어요.”
그리고 화풀이한답시고 촉수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한사코 거절해서 간신히 상자 안에 봉인해뒀던 임신 가능 스킬 보석을 내게 건네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한숨을 내쉬면서 눈앞의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왕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그렇게 엘라나 미스트가 부담스럽다면 오늘은 저택에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변명거리를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걸세. 하루 휴가도 주고.”
“……휴가요?”
전에 같았으면 하루에 5시간 일하면서 무슨 휴가냐고 물어봤겠지만, 벌써 2주 동안 하루에 4시간 자고 1시간 휴식하면서 19시간을 일한 레이시는 국왕의 말에 혹해 눈을 빛냈다.
하루 동안 쉴 수 있다.
엘라와 미스트의 기 싸움이 없는 곳에서.
보너스나 그런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국왕의 제안에 레이시는 과자를 먹을 때와 다르게 생기가 넘치는 눈으로 국왕을 바라봤고 국왕은 쿡쿡 웃더니 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오늘은 이대로 아샤에게 가게. 그럼 쉴 수 있을 걸세.”
“정말요?”
“그래, 내 명령이니 엘라나 다른 왕족들도 건들지 못할 걸세. 그리고 누가 만약 건든다면 이걸 내밀게.”
“이건…….”
“국왕의 표식이라네. 아하하! 감히 불경죄로 죄를 치르기 싫다면 자네를 건들진 않겠지! 으하하하!”
가벼운 국왕의 말에 어색하게 웃는 레이시.
다른 메이드라면 국왕이 이런 걸 하사하는 순간 그대로 절을 한 채 부들부들 떨겠지.
자신이 이런 걸 들고 다니면 죽을 거라면서…….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 너무 지쳐버렸고, 그렇기에 약간은 주저하면서도 그대로 국왕이 써준 서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국왕은 이제는 과자를 싸주면서 휴일을 즐기러 가라며 손을 흔들었고, 레이시는 국왕의 배려에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미네르바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아아…….”
“그래서 주인, 아샤에게 가는 건가?”
“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저택으로 돌아가면 위에 구멍이 날 거 같아요…….”
차라리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해서 자신의 찬란한 과거를 자랑하던 어르신들을 상대하는 게 훨씬 편할 정도다.
그렇게 말하자 미네르바도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시를 끌어안았고,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행동에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애정을 표현했었던 미네르바.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기 싸움에 짓눌려 자신을 껴안는 것도 마음껏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다.
불쌍한 미네르바.
레이시는 동질감에 동정심에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국왕이 챙겨준 과자를 미네르바의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어요?”
“……응, 맛있다.”
“에헤헤, 오늘은 쉬어요.”
“안고 있을 수 있나?”
“껴안기만 한다면요.”
“……헤헤.”
요즘 들어 레이시의 웃음을 따라 하듯 웃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자신과 똑 닮은 미네르바의 웃음에 똑같이 웃다가 아샤에게 발걸음을 옮겼고 전 부하들의 훈련을 봐주고 있던 아샤는 레이시가 든 서류를 보고 떨떠름한 얼굴로 레이시를 쳐다봤다.
“……어, 으음. 진짜야?”
“그, 네……. 솔직히 위가 뚫릴 거 같아요.”
“그럼 어쩔 수 없지. 기사단 숙소는 비어 있으니까 너랑 미네르바가 잘 수 있는 곳은 있을 거야.”
서류에 써진 내용은 정중한 내용으로 적혀있었지만, 내용을 요약하자면 엘라와 미스트 사이에서 레이시의 등이 터지고 있으니 하루 정도 재워달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샤로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우선 엘라가 남을 질투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라가, 자기 애인이 남에게 사랑받고 있어서 질투한다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관계를 끊어버리는 게 엘라일 텐데?
거기에다 한술 더 떠서 엘라와 경쟁하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니라 미스트?
차라리 갑자기 자신이 기사도를 지킨다는 게 좀 더 말이 될 정도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로 사실만 보자면, 레이시의 말은 아마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국왕이 이렇게 직접 레이시를 보살피라고 서류를 내온 걸 보면 이미 조사는 끝났고, 레이시가 엄살을 피운다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골치 아픈 일이 되었다며 머리를 긁다가 도끼를 허리춤에 차고 부하들에게 레이시를 숙소에 데려다주고 오겠다고 말했다.
“따라와, 숙소 좀 멀거든.”
“네에.”
머리를 긁으면서 레이시와 미네르바를 기사단의 숙소로 데리고 가는 아샤.
한참을 걸은 아샤는 다른 곳보다는 약간은 시설이 허름한 건물에 도착했고, 두 사람을2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 데려다줬다.
“4인실인데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그 부분은 괜찮아. 이 방은나 혼자 쓰거든.”
“네……?”
“아, 오해하지 마, 내 전임 대장이 내가 야차라 나를 따돌린 거야. 그리고 내가 대장이 되었을 땐 혼자 지내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지금 후임 대장 녀석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지내는 거고.”
“전임대장께선 왜……?”
“글쎄? 혈통주의자가 볼 땐 평민, 그것도 인종이 아니라 야차가 기사단에 들어온 게 좆 같았겠지. 그것보다 휴일에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샤워부터 하고 나와. 네 몸에 적당히 맞는 옷 들고 올게.”
“네에…….”
하긴 휴가를 나왔는데 일부러 어두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미네르바와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기 시작했고, 아샤는 그 물소리를 들으며 엘라와 미스트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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