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요새 도시로3
* * *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도로를 달리는 마차.
레이시는 그 마차 안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태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엘라와 미스트, 그리고 미네르바를 곁눈질로 힐끗힐끗 봤다.
“저번에 보고가 들어 온 숫자는 총 2만이라고 해요.”
“흐응, 평소보다 좀 늦는 듯 하더니 2개의 세력이 합쳐진 건가? 아니, 아니지. 원래 세력이 외부 세력에 항복한 거구나.”
“네, 그런 거 같아요. 보고서를 보니까 몬스터의 대 이동이 있었어요.”
“흥, 고블린 같은 게 얼마나 모여 있든 상관없다. 내가 이긴다.”
“사냥은 나랑 아샤가 하는 일이니까, 미네르바는 포트리스 안에서는 그냥 레이시의 호위를 맡아줘.”
“그럴 생각이다.”
앞으로 2만 군세를 상대하러 간다기에는, 너무 평온한 대화.
레이시는 그런 그들의 대화에 우물쭈물거리면서 고블린이 위험하지 않은 몬스터냐고 물어봤다.
“응? 아니, 그렇게 안 위험한 것도 아닌데?”
“에……?”
“고블린들이 인간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남성들밖에 없어서거든? 그러다 보니 번식을 위해서 여자들을 보면 그대로 납치해서 모판으로 쓰고, 나름대로 신들을 모시고 있어서 특수 개체 같은 경우에는 7 레어도 이상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도 있어. 다 성장해도 13살, 14살 청소년 수준의 힘만 가지고 있다고 해도 숫자가 숫자니까 빠르게 증식해.”
“……네?”
“포트리스의 병사가 3000명에서 4000명, 모험가까지 포함하면 5500명 정도인데 포트리스는 오라토리엄에서도 꽤 손에 꼽는 군사 도시야. 뭐, 애초에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 요새 도시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매번 7000마리씩 죽어도 년에 한 번은 증식해서 다시 도시로 쳐들어오는 새끼들이야. 엄청 위험하지.”
“그런 곳에 가는 건데……, 그, 다들 왜 이렇게 평온하게 있어요?”
“그야, 고블린이잖아……?”
“아까 위험하다면서요?”
“응.”
……말장난인가?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엘라를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쳐다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킥킥 웃더니 레이시를 끌어안고 일단 가보면 알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아샤에게 좀 더 빠르게 마차를 몰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엘라.
아샤는 엘라의 질문에 지도를 보더니 불가능하다며 가볍게 일축한 다음, 레이시를 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일단 군대라고는 해도 그 녀석들의 투척 무기는 대부분이 만들다만 화살하고 돌멩이야. 가끔 마법이 날아오기도 하는데 마법은 내가 막아줄 테니 신경 쓰지마.”
“화살하고 돌은요?”
“요새 위까지 안 날라와. 그러니까 안심해.”
“네, 네에…….”
아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쭈뼛거리는 레이시.
그러다가 레이시는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씩 쳐다봤고,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태평하게 책을 읽고 과일을 먹고 있자 덩달아 긴장을 풀고 요새 도시, 포트리스로의 여행을 즐겼다.
그리고 포트리스에 들어간 레이시는, 성벽 위에 올라갔다가 끔찍할 정도로 많은 수의 고블린들을 보고 기겁했다.
처음 숫자가 2만이라고 들었을 때는 솔직히 실감이 안 됐다.
인구수나 밀집도는 한국에 살 때가 훨씬 높긴 했지만, 한국에는 넓은 평야에 사람들을 늘여세우지 않으니까 실감하려고 해도 실감할 수가 없었다.
기껏 실감한다고 해도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인 걸 보고 ‘600명이 모이면 이런 정도구나.’라고 생각하며 감탄한 게 끝.
하지만 지금 레이시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곳부터 시작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전부 초록색의 작은 인간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거인들.
키가 3m에서 4m는 될법한 거인들이 깎다 만 나무를 들고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는 오우거보단 작지만, 마찬가지로 키가 2m에서 3m는 되는 보라색 피부의 거인들이 나무를 깎은 창을 들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아샤가 ‘트롤이랑 오우거네?’라고 중얼거리지 않았다면, 그 정체도 모르고 겁을 먹었겠지.
물론 알고 있다고 해도 겁을 안 먹는 건 아니었고, 레이시는 다리가 후들거려 엉덩방아를 찧을 뻔 하다가 미스트와 미네르바에게 기대서 간신히 버텼다.
“2만이라며? 이 정도면 4만 정도 되겠는데?”
“그, 그게! 전령을 보낸 날에도, 그리고 다음 날에도 점점 모이더니…… 추, 추가 지원을 보내놨습니다! 부디 그,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티게만 해주셨으면 합니다……!”
허리를 숙인 채 덜덜 떨면서 입을 여는 영주.
엘라는 갑옷을 입은 영주의 부탁에 피식 웃더니 영주의 등을 가볍게 때리면서 추가 지원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순간 영주는 자기가 잘못 들은 건지 엘라를 가만히 쳐다봤고, 엘라는 그런 영주의 반응에 잠시 웃다가 미스트를 불러 지팡이를 달라며 명령을 내렸다.
“5개면 될까요?”
“응. 5개. 아샤는 관측. 미네르바는 레이시를 붙잡아줘. 조금 거칠게 나갈 거니까.”
“에? 네……? 뭐, 뭐하시게요?”
“폭격.”
미스트의 지팡이를 잡고 쾌활하게 웃는 엘라.
그리고 엘라는 전신에서 마력을 뿜어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여름의 햇빛이 따갑게 쏟아지는 정오였음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그늘이 잔뜩 깔리는 땅.
레이시는 땅에 깔리는 그림자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고 이내, 일식이 일어난 걸 보고 입을 벌리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엘라의 눈동자와 똑같은 푸른색의 코로나를 뿜어대며 하늘을 어둡게 물들이는 일식 현상.
레이시는 일식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코로나를 보고는 엘라를 쳐다봤고, 이내 엘라의 눈동자가 하늘처럼 새까맣게 변해 눈동자가 있던 위치에 코로나처럼 일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 저 하늘은 엘라가 만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흑마법 제 9위계심판의 눈동자. 제 1격.”
지팡이를 잡고 시동어를 말하는 엘라.
그 순간 지팡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잿더미로 변했고, 하늘에서 검은색 빛무리가 떨어졌다.
별빛을 담은 듯, 곳곳에하얀색의 빛을 담고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은 빛.
그리고 그 검은 빛이 끊기자 땅에도 코로나의 형상이 남더니 고블린의 군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흐에……?”
“에……?”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기운 빠지는 소리.
성벽 위에서 활을 들고 긴장하고 있던 궁수들도, 그리고 엘라의 옆에 있던 영주도, 미네르바가 잡아줘서 후폭풍을 견딘 레이시도 모두 지금 현상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구멍이 뚫린 군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그들과 다르게 아샤는 무덤덤하게 엘라에게 관측 결과를 말해주었다.
“야, 저기 대빵한텐 안 맞았다.”
“그럼 관측해줘. 이 마법 쓰면 한쪽 시야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보는 느낌이 돼서 거리가 잘 안 맞는단 말야.”
“네 기준으로 전방 500m. 전방에서 오른쪽으로 13도 굽혀서 한 발.”
“알았어. 제 2격.”
다시 한번 지팡이를 잿더미로 만들더니 2번째 빛무리를 내다 꽂아버리는 엘라.
2번째 빛무리가 끊기자 4만이 넘었던 고블린의 군세는 절반 이상이 사라졌고 그쯤 되자 고블린들도 상황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이해했는지 다급하게 회피하려고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대를 나누지 않고 한 덩치로 군세를 운용한 게 그들의 도주에 발목을 잡았다.
애초에 도주는 집단이 10명 단위만 되더라도 가장 중요하게 훈련할 정도로 고급 기술이었다.
그런 걸 2만이나 되는 숫자가 제대로 훈련받지도 않고 본능만 따르며 도망치니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엘라는 그런 그들을 비웃으며 제 3격과 4격을 이어서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블린의 군세는 언제 모였냐는 듯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졌고, 엘라는 그런 군세를 보고 개운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자, 끝.”
“어, 어버버버버…….”
엘라의 말에 50대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이상한 소리를 내는 영주.
하지만 그런 영주를 비웃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를 보고 웃을 수 있을 정도의 이성을 유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반적인 병사들이 영웅의 행적을 보인 사람이 나타나면 환호를 한다지만, 그것도 어느 수준이 있지 엘라가 한 건 그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자신이 본 게 죽음의 공포 때문에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의 광경.
그 광경에 성벽 위에 올라와 있던 사람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적이 있었던 평야를 멍하니 바라봤다.
“미스트, 도시 안에 첩자가 있을 거야. 찾아내, 그리고 죽여.”
“네, 공주님.”
“그럼……, 레이시, 일도 끝났는데 그거 할래?”
하지만 정작 그런 풍경을 만든 장본인은 자기 일이 끝났으니 레이시에게 하러 가자며 손짓했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돌려 엘라를 보다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지,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응? 뭐가? 아, 도시 안에 첩자가 있으니까 처리하라고 한 거? 미스트라면 하루 안에 처리할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렇다. 다음은 내 차례다.”
“미네르바……, 그것도 아니에요…….”
“에……? 어째서……?”
“지금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대체 이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고도 태평한 얼굴을 할 수 있는 걸까?
레이시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엘라를 바라봤지만, 엘라는 그런 레이시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건 미네르바나 아샤도 마찬가지.
레이시는 너무나 태평한 세 사람의 모습에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미스트를 떠올리고는 미스트에게 하소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미스트는 자신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주었으니까, 지금 이 일도 이해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미네르바에게 미스트에게 데려다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부탁에 무조건 해주겠다면서 날개를 펼쳤다.
아샤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가지 말라며 말렸지만, 레이시는 엘라하고 계속해서 말하면 상식이 이상해질 것 같다면서 미네르바에게 안긴 채로 미스트에게 날아갔다.
“야.”
“응?”
“지금 미스트, 그거지?”
“응. 캘러미티 가의 얼굴을 하고 있을걸?”
“그거 좆 된 거 아냐?”
말이 좋아서 암살자의 이면이지 캘러미티 가문의 얼굴이라고 하면 역사가 긴 살인귀 가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일반적인 기사들의 살기도 못 견디던 레이시가 수십 세대에 걸쳐서 혈통 자체를 개량해 강제로 완성된 암살자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될까?
……잘은 몰라도 좋은 꼴은 못 보겠지.
어쩌면 미스트하고 사이가 틀어져서 불편한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엘라를 쳐다봤지만, 엘라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서 레이시가 편해졌는지 미스트가 가면을 잘 유지하지 못 하더라고.”
“벌써?”
“응, 그래서 그냥 일찍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이렇게 하는 거야.”
“…….”
엘라의 말에 복잡한 얼굴을 하는 아샤.
미스트가 그렇게 빠르게 타인에게 편안함을 느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엘라의 행동도 약간은 이해가 안 됐지만……, 아샤는 일단 레이시를 믿기로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시는 좋은 사람이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얼굴 풀어. 아니면 뭐야? 벌써 쌓였어?”
“뒤진다, 진짜.”
“킥킥!”
아샤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평야에 남은 잔당을 부탁하는 엘라.
아샤는 엘라의 명령에 다시 한번 날고 있는 미네르바를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성벽 위에서 뛰어내려 착란 증상을 느끼고 있는 오우거의 머리를 주먹으로 으깨 죽였다.
“하아아…….”
정말 괜찮으려나…….
자신을 보자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본 아샤는 늘 들고 다니는 도끼를 꺼내고는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일단, 몸이나 좀 움직일까…….”
움직이다 보면 레이시를 어떻게 도와줄지, 대충 감은 잡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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