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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하게 된 건 좋지만 내가 여자가 되어버렸다-81화 (81/542)

〈 81화 〉 합의­1

* * *

미약의 여파인지, 대피소에서부터 미네르바에게 팔짱을 끼고 비틀거리면서 엘라에게 돌아가는 레이시.

엘라는 귀족들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어서 피곤해졌는지 평소보다 차분해진 얼굴로 책을 읽다가레이시가 별관으로 돌아오자 책을 덮으며 팔을 벌렸다.

“아샤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약 기운 남아있지? 조금은 쉬자.”

“에……?”

“응?”

“드, 들었…….”

“그거야, 약에 취했다는데 안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몸 많이 아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상냥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는 엘라.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웃음에 흠칫 떨더니 조심스럽게 침대로 기어서 들어가 미네르바에게 와달라며 침대를 가볍게 두들겼다.

엘라와 미네르바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동시에 말을 잃어버렸다.

엘라는 레이시가 자신을 피했다는 사실에,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반응이 이상했기에.

그렇게 서로 침묵하고 있자 미네르바는 엘라를 힐끗 쳐다보다가 쭈뼛거리면서 레이시의 옆에 누웠고 레이시는 아무런 말 없이 미네르바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움찔 떨었다.

귀까지 붉어진 얼굴.

하지만 그 모습은 애교가 가득 담긴 투정 같은 게 아니라, 수치심에 가득한 모습이라 미네르바는 조심스럽게 날개로 레이시를 가려준 다음 이불을 올려서 다시 한번 얼굴을 가려줬다.

그리고는 엘라를 자신을 보는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 미네르바.

질투의 대상이니 뭐니해도 일단 엘라와 미스트,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 레이시가 행복해하니까 이런 상황에선 도와줘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신호를 보내자 엘라는 심장이 철렁하는 걸 느끼며 이마를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귀족 중에서도 상대방의 연애사에 대한 걸 캐묻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지…….

그동안에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사람밖에 없으니 마음대로 했지만,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

특히 귀족이 아니라 평민에 더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엘라는 철렁했던 감정이 초조함으로 바뀌는 걸 느끼며 미스트를 쳐다봤다.

엘라의 질문에 미스트는 내일 아침까지는 기다려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미스트의 말에 미스트를 흘겨보다가 아침 8시가 되면 말해달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갔다.

그러자 한숨을 내쉬며 엘라를 따라가는 아샤.

아샤는 레이시를 잘 부탁한다며 미스트에게 말한 다음 밖으로 나갔고, 모두가 나가자 미스트는 레이시에게 다가가 레이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으음……, 레이시?”

“지, 지금은 말 안 할래요…….”

귀족으로서의 사고방식밖에 모르는 엘라나, 전투 외에는 정말 최소한의 규칙 정도만 지키는 아샤와는 다르게 레이시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알 것만 같은 미스트.

미스트는 레이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이시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서 파악하려고 했고,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 정체를 파악했다.

레이시의 목소리에는 죄책감과 수치심밖에 없었으니까.

아마도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아샤와 몸을 섞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이나 미네르바의 경우에는 엘라가 은근히 허락해준다는 뉘앙스를 풍긴다거나, 아니면 대놓고 3p를 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아샤는 아니다.

아샤는 레이시에게 전투 교사 겸 호위로 붙여준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레이시라면 죄책감 같은 걸 느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레이시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눕힌 뒤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공주님은 괜찮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훌쩍……, 그렇지만…….”

미스트가 엘라의 이야기를 꺼내자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말한 방금전의 말이 무색하게 곧바로 반응하는 레이시.

미스트는 레이시의 반응에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어주면서 엘라의 대한 이야기를 하며 레이시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이시가 울먹거리면서 자책을 심하게 하자 레이시의 이마를 가볍게 눌러주면서 레이시에게 피곤해서 그런다고 속삭여주었다.

지금은 그저 피곤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해서 자신을 자책하기만 할 뿐이니, 차라리 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에 생각하자고 말하는 미스트.

레이시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미스트의 손길에 울먹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에는 이 세상에서 자주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깊게 생각하지 안 했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람을 피운 게 아닐까?

아무리 상대방이 괜찮다지만, 아무래도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훌쩍거리다 현실로부터 도피하듯 미네르바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잠들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미스트.

미네르바는 레이시에게 팔베개를 해주면서 미스트에게 엘라에게 잘 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고, 미스트는 그런 미네르바의 말에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미네르바는 공주님을 싫어하시지 않았나요?”

“그래도 주인에게는 엘라가 필요하니까.”

투덜거리면서도 레이시를 바라보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불만이지만, 그래도 애정을 느끼는 시선으로 레이시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가슴 사이로 고개를 파묻는 레이시의 머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리곤 잔잔하게 웃다가 미스트에게 다시 한번 부탁하고는 날개를 펼쳐 덮는 미네르바.

미스트는 미네르바의 대답에 놀란 얼굴을 하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다음 엘라에게 갔다.

“벌써 왔어?이유가 뭔지 알 거 같아?”

“네.”

“그래서 뭐야?”

“아무래도 바람을 피웠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저는 공주님의 부하인데 공주님이 허락하신 사이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애완동물이고 공주님께서 알게 모르게 서로 관계를 허락해두셨잖아요?”

“그거야……, 뭐……. 으응……?”

귀족 사회에서는 정실 외에 애인 3~4명 있는 건 별로 흠집조차 못 되니까.

당장에 자신의 아버지만 하더라도 부인이 4명이나 있고 자식을 10명 넘게 낳았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 자체가 없다.

엘라가 레이시에게 원하는 건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딱히 자신만 봐달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엘라는 미스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스트를 쳐다봤고, 미스트는 그런 엘라의 시선에 난감하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레이시는 귀족보다는 평민에 더 가깝다고요?”

“그래서 몸을 한 번 섞은 일로 그렇게까지 해?”

“평민들은 첩에 대한 개념이 없는걸요? 바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조에 의문을 느낀다고 해도 별 이상함은 없어요.”

“그럼 내일 아침에 나는 괜찮으니 아샤와 마음껏 몸을 섞어도 된다고 말해줄까?”

“그러면 더 싫어하죠. 공주님.”

“……내가 사귀었던 여자들은 좋아했는데?”

“그거야, 그 사람들은 공주님의 권력과 재력을 보고 붙은 사람이니까 그렇죠. 공주님도 참……. 그분들은 자신의 몸을 판 거고, 레이시는 공주님이 좋아서 옆에 붙어있는 거잖아요. 화살을 맞고 펑펑 울었으면서도 공주님 혼자 위험한 곳에 안 보내겠다고 열심히 훈련받은 애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였지…….”

미스트의 핀잔에 이마를 부여잡는 엘라.

자꾸만 귀족 위주로 생각하는 자신도 자신이지만, 레이시도 레이시였다.

어지간한 일로는 자신의 애정이 변할 리도 없는데 왜 이렇게 겁을 먹고 흔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이 변하면 싫어할 거라느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타인과 몸을 섞었다가 그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던가…….

자신이 정말 그 정도로만 레이시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천천히 올라오는 스트레스.

자신의 애정을 의심하는 레이시가 슬슬 짜증나기도 하고, 자신이 그 정도의 마음밖에 가지지 못할 정도로 애정을 주지 못했나 싶어서 자책감도 들어 엘라는 머리를 거칠게 긁다가 눈앞에 있는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다리를 꼬았다.

“술.”

“여기에 있습니다. 공주님.”

엘라의 말에 술을 건네주는 미스트.

엘라는 커다란 맥주잔에 와인이 담기자 벌컥벌컥 마신 후 다시 잔을 건네주었다.

와인을 아는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고급 와인을 맥주처럼 마신다고 경을 칠 일이었지만, 미스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계속해서 잔을 채워주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엘라가 처음 떠올린 방안은 레이시에게 여자 노예를 몇 명 사줘서 몸을 섞는 것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

신체의 사랑과 정신의 사랑이 다르다는 걸 인식시켜서 레이시의 죄책감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왕족다운 발상.

다른 때는 레이시를 잘 배려해주면서 왜 이렇게 가끔씩 엇나가는 걸까?

미스트는 엘라의 말에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면 그러는 순간 레이시가 엘라의 곁을 영영 떠나버릴지도 모르니 그만해달라고 말했고 엘라는 그 말에 다시 술을 홧김에 삼키고 잔을 내밀었다.

꽤 독한 술이었기에 양을 조절해서 와인을 따라주는 미스트.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적당히 벌을 준다거나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벌을……? 그거, 플레이에서 하는 말이 아니지?”

“네. 레이시가 싫어하는 걸 해서 벌을 주는 게 어떨까요? 이번에는 수치심을 자극하는 종류의 벌이 좋겠네요.”

벌이라는 건, 늘 나쁜 영향만 주는 게 아니었다.

벌을 받는 것으로 가지고 있던 죄책감을 없앨 수도 있고, 벌을 받고 나서야 부모의 애정을 느끼는 아이도 있다.

그러니 벌을 줘서 레이시의 죄책감을 덜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말하자 엘라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미스트를 바라봤고, 미스트는 엘라의 시선에 자신은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만 자신이라면 벌을 주고 레이시가 그 벌을 모두 소화하면 칭찬해주며 달래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귀족과 평민의 시점 차이를 확실하게 해주고 몇 명까지는 허락해줄 것이라고 확실하게 알게 해줄 것이다.

미스트는 그렇게 말했고 엘라는 그런 미스트의 말에 내키지 않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할까…….”

“네, 그러세요.”

“벌…….”

레이시가 싫어할 것, 그리고 자신이 레이시에게 하고 싶은 것.

나중에 칭찬을 해주려면 그런 것이 아니면 안 됐기에 엘라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내 좋은 게 떠올라 한숨을 내쉬며 미스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일, 그림자에 숨어서 몰래 도와줘.”

“알겠습니다.”

“하아아……, 싫네.”

턱을 괴고 다시 술을 마시는 엘라.

미스트는 이 이상은 내일 벌을 주는데 지장이 생길 거라고 말했지만, 엘라는 그런 미스트의 말에 싫은 일을 하는데 술 없이 어떻게 버티냐면서 잔을 흔들었다.

“오늘은 마시고 죽을래.”

“알겠습니다.”

엘라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잔을 계속해서 채워주는 미스트.

그리고 다음 날 새벽 5시.

엘라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을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미스트는 방을 깨끗하게 치운 채 엘라에게 인사했다.

“그럼 레이시에게 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두통을 억지로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라.

미스트는 엘라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준 다음 레이시의 방문을 두들겼고, 레이시는 그 소리에 미네르바에게 좀 더 몸을 파묻었다.

미네르바는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레이시를 끌어안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망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겠다.”

“……아니에요.”

미네르바의 말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이시.

솔직히 엘라가 뭐라고 화를 내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기에 레이시는 문을 열고서 조심스럽게 엘라의 얼굴을 바라봤고, 엘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시의 시선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벌……, 받고 싶다면 주겠는데, 중간에 취소는 안 돼.”

“읏…….”

엘라의 말에 움찔 떠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천천히 손을 뻗어 뺨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그럼 그렇게 할게. 옷……, 벗어.”

각오를 다졌는지 차가운 눈으로 레이시를 바라보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눈빛에 흠칫 떨었다가 이내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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