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무녀 유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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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자다가 도시에 도착한 레이시.
레이시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마차에서 일어나다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감탄하다가 마차의 주차를 맡겠다며 미스트를 바라봤다.
그러자 미스트는 싱긋 웃으면서 이 도시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이미 저희를 접대해주는 쪽에서 준비해서요. 그곳으로 가는 게 끝이랍니다.”
“아하……. 그럼 저 뭐해요?”
“그러네요. 우선 오늘은 일만 하도록 하죠. 아샤, 레이시를 잘 부탁할게요.”
“응.”
미스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과일을 아삭거리면서 먹는 아샤.
생긴 건 배 같지만, 맛은 레몬인 신기한 과일이라 기억하고 있던 레이시는 아샤가 먹는 과일을 빤히 바라봤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며 새 과일을 건네주었다.
“에헤헤…….”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내가 지킬 수 있게 곁에 붙어. 그리고 오늘은 다과회에서 행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대피소는 저녁쯤에나 갈 수 있을 거야.”
“네? 행사요?”
“휴우신의 무녀 전설이야. 몰라?”
아샤의 말에 어색하게 웃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이면서 휴우신의 무녀에 대한 전설을 말해주었다.
“별 거 아닌데, 바다를 사랑한 한 무녀가 있었대. 물고기들과 대화하고 같이 헤엄치고 바다의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무녀가.”
“헤에…….”
“그런데 어느 순간 상어들이 바다로 올라오더니 물고기들과 어울려 놀던 사람들과 물고기들을 해쳤고 아름다운 휴우신의 바다는 삽시간에 피에 물들었지.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슬퍼하던 무녀는 바다에 들어갔어.”
“자기 자신을 바친 건가요?”
“응? 아닌데?”
“그럼요?”
“한 손에는 작살을, 한 손에는 그물을 들고 들어가서 상어들을 도우너 케밥으로 만들었지. 저기 저거처럼 물고기 살을 잘라서 탑처럼 쌓고 빙글빙글 돌리는 거 있지? 휴우신이 물고기 케밥으로 유명한 이유가 그거야.”
“……무녀가요?”
인당수에 몸을 바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바친다거나 그런 것도 편견이라면 편견이라지만, 자신의 예상을 아득하게 벗어난 아샤의 말에, 레이시는 한참이나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성녀라는 이름으로 망치로 용을 때려잡거나 맨주먹으로 악마를 퇴치한 사람이 꽤 많다는 걸 떠올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체 감옥에서 망치는 어디에서 구했고 어떻게 용을 때려죽였는지는 불명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것과 비교해보면 작살과 그물로 상어를 전멸시켰다던 무녀의 이야기는 현실성이 있는 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마부석으로 몸을 옮겼고 미스트는 레이시에게 가장 큰 저택으로 가면 된다며 고삐를 맡겼다.
그러자 긴장하면서 고삐를 잡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를 바라보다가 전처럼 너무 긴장하지는 말라며 레이시의 이마를 가볍게 검지로 튕기고는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긴장하면 말들에게까지 감정이 전해지니까, 긴장 풀어.”
“네!”
“아니, 풀라고…….”
“넷!”
“……아니, 아니다. 춤 배울 때도 너는 이랬으니까 그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에헤헤.”
아샤는 레이시의 얼빠진 웃음에 덩달아 피식 웃더니 말들이 잘 훈련 받았으니 고삐를 잡고 있기만 하면 될 거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대로 천천히 고삐를 쥔 손에 힘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자 좀 더 부드러워진 움직임을 보이는 말들.
아샤는 스트레스가 줄어든 말들을 보고 레이시를 칭찬해주며 대 저택으로 갔고 얼마 안 가 아누이 백작가에 도착했다.
“휴우신에 온 걸 환영합니다! 엘라 공주님!”
“으긋!?”
“이제는 익숙해져야지.”
“아, 아뇨, 왕궁에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정렬하고 있는 걸 볼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트라우마도 있다고 할까…….”
“흐응……. 뭐, 적어도 여기에 있는 녀석들은 안전해. 전부 날이 없는 가검이니까.”
“정말요?”
“예절만 차리는 장소에 진검을 들고 오는 멍청이 새끼가 어딨겠어? 그러니까 안심해.”
레이시의 이마를 검지로 튕긴 다음 자신들을 마중나오는 귀족에게 가는 아샤.
“엘라 파우스트 오라토리엄의 기사, 아샤다. 그대의 이름은?”
“알트 아누이의 장남, 벡트 아누이라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모시겠습니다!”
“알겠다. 마차는 맡기기로 하지. 레이시! 공주님의 시중을 들어라.”
“아, 네!”
지극히 귀족스러운 대화.
레이시는 그런 대화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아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엘라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밖에는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힘내요.”
“하아……, 알았어.”
엘라의 대답에 배시시 웃으며 엘라의 볼에 입을 맞춰주고 문을 열어주는 레이시.
레이시는 마차 아래에서 엘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와 아샤의 호위를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왕궁 축제 때만큼은 아니지만, 화려하게 꾸며진 채 여러 사람이 엘라를 기다리고 있는 저택 안.
사람들은 엘라가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박수로 엘라를 환영했고 엘라는 사람들의 환영에 손을 들어서 대답하고는 술이 담긴 잔을 들고 축사했다.
그러자 다시 한번 크게 박수를 치는 사람들.
레이시는 미스트처럼 엘라의 뒤에서 시선을 아래로 한 채, 그런 엘라의 모습에 역시 자신이 아는 엘라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스트를 쳐다봤다.
“후후, 역시 다른 분 같으시죠?”
“에헤헤…….”
레이시의 생각을 읽고는 배시시 웃으면서 레이시의 의견에 동의하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과자를 삼키고 있던 걸 들킨 아이처럼 어색하게 웃다가 엘라가 발걸음을 옮기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엘라는 소파에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더니 레이시를 자신의 옆에 앉히고서 미스트에게 심부름을 부탁했다.
“과자 적당히 들고 오고 레이시는 술 안 마실 거니까 적당히 음료수로.”
“알겠습니다, 공주님.”
“추가로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그래, 언제나 고마워.”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뜨는 미스트.
엘라는 주변 귀족들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한 시간밖에 이럴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 시간 뒤면 저 녀석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진짜 싫어.”
“아하하…….”
“그러니까 애교부려줘.”
“애, 애교요?”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걸요.”
자신이 아는 애교는 전생에서 봤었던 tv 프로그램에서 어설픈 사투리를 내며 ‘오빠야~.’라고 부르는 게 끝인데 그런 걸 여자가 여자에게 ‘오빠야~.’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언니야~.’라고 말하면 주변 귀족들이 불경죄라고 말할 거 같고…….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결국 좋은 애교가 떠오르지 않자 레이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엘라에게 기댄 채 사과했고 엘라는 레이시의 사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귀여운데 왜 사과할까?
지금 이렇게 머리를 기대고 조심스럽게 팔짱을 끼는 것만해도 귀족들의 타산적인 애교에 비하면 몇 배는 귀여운데…….
그렇게 생각하던 엘라는 레이시의 얼굴을 보자 피식 웃으면서 이게 레이시의 매력이니 그냥 즐기자고 생각하며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마의 뿔을 가볍게 만졌다.
매끈하게 미끄러지는 손가락.
엘라는 그런 뿔의 감촉에 킥킥 웃다가 미스트가 가져온 다과를 집어 레이시의 입에 넣어주었다.
“저, 저도 먹을 수 있는데.”
“싫어?”
“싫은 건 아닌데…….”
나름 로망 중 하나였기에 얌전히 입을 벌리고 다과를 먹는 레이시.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자 아무래도 부끄러운지 레이시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다가 엘라가 한 것처럼 다과를 건네주었다.
공주가 메이드에게 과자를 주는 건 이상해도, 메이드가 공주에게 과자를 주는 건 그냥 시중드는 행동이니까 시선이 줄어들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엘라가 레이시가 건네준 다과를 먹자 레이시에게 꽂히는 시선은 점점 더 강해졌고 레이시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경직된 미소를 입에 머금다가 엘라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도와달라는 듯 울먹거리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를 보자 좀 더 골려주자며 킥킥 웃으며 각종 애정행각을 과시하듯 보여주기 시작했다.
손등에 입을 맞춘다거나 입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 자신이 먹는다거나, 일반 시종이 따라준 술은 마시지 않고 레이시에게 술을 따르게 한다거나.
그렇게 한 시간쯤 놀다가 주변 귀족들의 인내심이 점점 닳아 없어지자 엘라는 그걸 보고 아쉽다는 듯 레이시의 목을 약하게 깨물었다.
“으으으응……!”
“조심해서 다녀와. 사랑해.”
“에, 그, 네, 네에…….”
“너는 말해주지 않는거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요…….”
“괜찮아. 말해줘. 안 그러면 안 놓아줄 거야.”
능글맞게 웃으면서 레이시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엘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던 레이시는 엘라의 행동에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엘라가 정말로 놓아주지 않을 듯 자신을 끌어안자 얼굴을 붉히며 엘라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는 사랑한다는 말.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말이었지만, 엘라만은 그 말을 확실하게 듣고는 레이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다녀와. 미네르바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데리고 가고.”
“네, 네에에…….”
터질 듯이 붉어진 레이시의 얼굴.
엘라는 레이시의 얼굴에 귀엽다는 듯 웃다가 아샤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했고 아샤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레이시, 미네르바와 함께 저택을 빠져나갔다.
“흐아아아…….”
“죽으려고 하네.”
“부끄러운 걸요…….”
“흐응, 그런 것치고는 기뻐 보이는데?”
“그, 그거는!?”
“뭐, 이해해, 연정이 네 먹이니까 그렇게 사랑받으면 기쁘기야 하겠지.”
“으읏…….”
아샤의 말에 얼굴을 붉히다 고개를 돌리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국왕이 말했었던 [무녀의 쉼터]라는 곳이 어디인지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엄청 유명한 곳인지 지나가던 행인에게 물어보자 곧바로 위치가 나왔고, 아샤는 레이시와 미네르바를 데리고 무녀의 쉼터에 발을 디뎠다.
생긴 건 고급 여관처럼 생긴 무녀의 쉼터.
하긴 대피소로 쓰려고 한다면 이런 대형 여관의 창고나 지하실이 적당할지도…….
아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엘라의 문장을 보이면서 가게의 주인과 만날 수 있냐고 물어봤고 직원은 아샤가 건넨 문양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세 사람을 여관 꼭대기 층으로 안내했다.
“여,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지배인님을 모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만 하랑 지폐를 직원에게 팁으로 주면서 밖으로 보내는 아샤.
아샤는 소파를 꾹꾹 눌러보다가 이내 소파에 몸을 파묻고 육포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거 멜리아 씨가 만든 거죠?”
“응? 응.”
“에헤헤, 아샤는 정말 착한 거 같아요.”
“……뭔 소리야?”
“그치만 고급 요리 먹을 수 있지만, 아샤를 위해 만든 걸 더 좋아하잖아요.”
“그거야 내가 경외의 야차니까 그런 거……, 아, 넌 모를 수도 있겠네.”
“네?”
“여기서 이야기하긴 조금 복잡하니까 나중에 가르쳐줄게.”
턱짓으로 문을 가리키며 몸을 일으켜세우는 아샤.
레이시가 그 턱짓에 고개를 돌리자 지배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고 레이시는 지배인을 보자 작게 감탄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여기 국왕님께서 이걸 보여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이시가 자신의 일을 하자, 티켓을 붙잡고 오묘한 눈이 되는 지배인.
지배인은 아샤와 레이시, 그리고 미네르바를 번갈아 보다가 긴장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 무녀 유희를 체험하시겠습니까?”
“네? 에……, 네?”
체험이라고 했으니까 대피소에 들어가보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지배인은 그런 레이시의 대답에 일행을 데리고 지하로 갔다.
“이 방에 들어가주시면 됩니다.”
“……으응.”
우리끼리만 들어가는 건가?
레이시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조금 불안하다는 듯 방 안쪽을 바라봤다.
길이가 한 5m쯤 되는 복도가 있는 방 안 쪽.
그 안에는 새로운 문이 있었기에 대피소라기보다는 비밀스러운 방 같았고 레이시는 그런 방을 보고는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들어가자. 여차하면 지켜줄게.”
“내가 더 강하니 내게 기대라, 주인.”
“아, 아하하…….”
하지만 레이시와 다르게 무덤덤하게 방에 들어가는 아샤와 미네르바.
레이시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갔고, 동시에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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