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여름 외근4
* * *
“그러니까 따로 떨어져서 움직여야 한다는 거죠?”
“네. 괜찮으시겠어요?”
“모처럼의 축제라 같이 있고 싶지만, 일이 먼저니까요.”
미스트의 말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하는 레이시.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괜히 고민했나 싶어 머리를 긁다가 정해졌으면 됐다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엘라는 레이시를 꽉 껴안고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레이시의 배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친 다음에 레이시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하는 엘라.
레이시가 남들 앞에서 뭐하는 거냐며 부끄러워하자 엘라는 휴우신에 들어가면 하루 정도는 못 볼 테니 이러고 있자며 레이시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벼댔다.
엘라는 누가 뭐래도 떨어질 생각이 없다는 듯 레이시를 끌어안고 자신의 다리를 레이시의 다리와 엮었고, 아샤는 그런 엘라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너, 힘들겠네.”
아샤는 레이시를 동정해주었다.
남의 연애사까지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저렇게 애정표현을 하면 아무래도 싫겠지…….
뭐, 애정표현을 하는 사람이 이 나라에서 강하기로는 한 손에 들고 권력으로 세도 1%이며 재력으로 해도 10% 이내에 들어가는 엘라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싫은 건 역시 싫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아샤는 레이시를 딱한 눈으로 바라봤고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시선에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평범하게 생각해본다면 엘라에게 눈총을 주거나 자신을 동정하겠지.
미스트처럼 그저 ‘어머~.’ 라거나 ‘우후후~.’라며 웃거나 미네르바처럼 자기도 껴안겠다고 말하는 쪽이 더 특이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고 아샤는 그런 레이시의 말에 레이시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나지만, 너도 네 감정을 얻는 게 힘들구나…….”
“네?”
“됐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사 올게.”
“나, 탄산.”
“넌 네가 사세요.”
“주군의 명령인데?”
“여기에서는 보고할 사람 아무도 없거든?”
엘라의 명령은 가볍게 씹어주면서 레이시와 미네르바에게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는 아샤.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행동에 어색하게 웃다가 엘라랑 같은 게 좋다고 말했고, 아샤는 레이시의 대답에 혀를 가볍게 찼다.
하지만 더이상 추궁하지는 않고 탄산으로 5잔 사 온다고 말한 다음, 식사는 미스트에게 맡기고 나갔고 엘라는 아샤가 나가자 기지개를 쭉 켜면서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췄다.
“축제 이튿날에는 시간 내게 비워줘. 같이 놀자.”
“제가 시간 안 내도 같이 돌아다닐 거죠?”
“응, 그렇게 된다면 배에 음문 새기고 목줄 채우고 돌아다닐 거지만.”
“……변태.”
“아핫!”
레이시의 한 마디에 상쾌한 얼굴로 웃는 엘라.
레이시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둘째 날은 비우겠다고 말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대답에 경쟁하듯 셋째 날은 자신하고 있자고 말했고, 미스트는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넷째 날은 자신이 예약하겠다며 웃었다.
그러자 레이시는 웃는 얼굴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며칠을 돌아다녀야 하는 걸까?
밖에서 노는 건 좋아했지만, 이렇게 빡빡하게 일정이 잡혀버리니 아무래도 기쁘다기보다는 힘들다는 게 먼저 떠올랐다.
“괜찮은가요?”
“네? 에헤헤, 네, 괜찮아요. 다들 저를 너무 좋아하셔서 조금 힘들긴 하지만요.”
“아하하, 그럼 전 저녁 주문을 넣으러 갈게요. 레이시는 편하게 있어요.”
“네에~.”
다들 일하는 데 자신만 편하게 있는 게 조금 신경 쓰였지만, 자신의 일은 엘라의 옆에서 엘라가 심심해하지 않게 말동무를 하는 것이다.
……대체 메이드란 뭘까?
판타지 세상에 왔다고 해서 라노벨에 나오는 메이드들 마냥 어떻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엘라의 말 상대를 하는 것으로 월에 250만을 받는다니.
레이시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자신의 손에 깍지를 끼는 엘라를 바라봤다.
언제 침대에 누울 거냐고 물어보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시선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침대에 누워 엘라를 껴안았고 엘라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레이시를 품에 넣었다.
“하아아아~ 살 것 같다.”
“과장이 심해요.”
“흐흥~ 과장 아니거든. 휴우신에 도착하면 늙은이들 대화상대 되주고 매달리는 녀석들을 상대해줘야 하니까 지금은 이러고 싶어.”
“으응…….”
하긴 엘라가 자신에게 처음 메이드를 권유했을 때도,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을 고용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조심스럽게 엘라의 뺨을 쓰다듬어주다가 자신이 있어서 정말로 괜찮은 거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게, 엘라가 저를 원했던 건 제가 아무것도 몰라서였잖아요. 하지만, 미스트에게서 이것저것 배우고 이러다 보면 저도 변할 텐데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흐으응.”
레이시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엘라.
레이시는 왠지 화가 난 듯한 엘라의 모습에 쭈뼛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떨어지려고 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를 꽉 끌어안고 투덜거렸다.
“다음부터는 사랑받고 싶다면, 외롭다고 말해. 그렇게 질투심 유발하지 말고.”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다음부터 그런 이야기하지 마. 괜히 화나니까.”
엘라의 말에 쭈뼛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며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주다가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고민에 잠겼다.
가끔씩 보이는 자신감이 없는 모습.
연정의 야차인만큼 사랑을 몇 번이고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
종족 수준이나, 본능 수준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한참을 고민하던 엘라는 레이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레이시와 깍지를 끼고 손바닥을 간질었다.
손가락을 세우고 가볍게.
레이시가 미스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자주 사용하는 신호였고, 레이시는 엘라의 신호에 눈을 깜빡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뭔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있는 데다가 방을 여러 개 빌린 것도 아니라 엘라는 아쉽다는 듯 레이시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빗다가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늘은 참을게.”
“감사……, 오늘은요?”
“응, 오늘은.”
“…….”
다음에는……?
레이시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며 엘라를 올려다봤지만, 그걸 물어보는 순간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았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킥킥 웃으면서 레이시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는 엘라.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듯 몇 번이고 반복하며 만족할 때까지 입을 맞춘 엘라는 지금이라도 방을 새로 빌릴까 고민하다가, 미스트가, 그리고 차례대로 아샤가 돌아오자 그제야 완전히 포기하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가끔가다가 굶주린 들짐승이나 몬스터들이 덤벼드는 일은 있었지만, 레이시가 채찍을 채 들기도 전에 주변 사람들이 처리했었으니까.
문자 그대로 그냥 평범한 메이드인 레이시가 할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몬스터 때문에 놀란 말들을 진정시켜주는 일 정도……?
그래도 일이라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국왕의 명령도 받았는데 너무 노는 것 아닌가?
받는 돈을 생각해본다면 딱히 이상할 건 없었지만, 너무 나태해지는 느낌이라 레이시는 마차의 안에서 쭈뼛거렸고 책을 읽던 엘라는 그런 레이시를 힐끗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래?”
“아뇨, 그냥…….”
“휴우신에 가게 된다면 너도 일하게 될 거니까, 편하게 있어. 그전까지는……, 뭐, 서로가 할 수 있는 걸 했다고 하자. 레이시는 오우거들을 상대로 마차와 말들을 지키면서 싸울 수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그러니까 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알겠지?”
“아하하하…….”
엘라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
레이시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엘라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다가 가방에서 티켓을 꺼냈고 [무녀 유희 입장용 티켓]이라고 써진 글을 만지작거렸다.
대피소의 이름이 왜 무녀 유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국왕이 자신에게 맡긴 일이다.
제대로 감찰에 성공한다면 엘라도 칭찬받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파악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마치 첫 무도회에 나서는 여자애들처럼 각오를 잔뜩 다지고 있는 모습.
전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 뒤처리가 힘들 것 같아 귀찮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곁에 둘 사람이라 그런지 그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사실 대피소의 성능이야, 아무래도 좋은데.
말이 좋아 대피소지 성벽과 병사들이 뚫리는 순간 대피소는 그냥 몬스터의 먹이저장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된다.
성벽처럼 튼튼하지도 않고, 외부의 적을 공격할 무기도 없고, 비밀 통로도 없으니까.
그러니 대피소의 의미는 자연재해를 견디는 공간임과 동시에 몬스터나 적군이 습격해왔을 때, 도로에서 걸리적거리지 않게 일반 시민을 치우는 것 정도밖에 없다.
사찰이라는 건, 아마 아버지가 레이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대접해주는 거겠지.
자신의 문양 옆에 있는 왕가의 메달이 그 증거.
거기에 아샤까지 같이 간다면 거기에 있는 귀족이 누구든지 간에 레이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킥킥 웃었다.
“우응?”
“열심히 하라고. 나도 열심히 할게.”
“네! 열심히 해요!”
사실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엘라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시를 바라봤지만, 그렇게 말해도 레이시는 열심히 할 것 같아 엘라는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책을 덮었다.
휴우신까지는 앞으로 3시간 정도 남았겠지.
“조금만 잘까?”
“네? 일어난지 얼마 안 됐잖아요.”
“도시로 들어가려니 짜증나서, 3시간 뒤면 도착하니까 조금만 자자.”
“으응……, 알았어요. 미네르바는 어떻게 하실래요?”
담요를 챙기면서 팔을 벌리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그런 레이시를 보고는 레이시에게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며칠째 마차 안에서 얌전히 앉아서인지 날갯죽지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이시는 자신이 아프면서까지 애교를 부리면 화를 내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한 미네르바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리며 날갯죽지가 아프니 밖에서 날다 오겠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대답에 어색하게 웃다 오늘 저녁에 같이 자자며 달래주었다.
그러자 야한 거를 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밖에서 어떻게 그런 걸 하냐며 말을 피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면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면 오늘은 나랑 단 둘이서 자는 거다. 다른 사람 없이.”
“네, 그럴게요.”
레이시의 대답에 날갯짓하며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엘라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들기자 꾸물꾸물 기어가 안겼고, 엘라는 레이시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럼 공주님, 휴우신에 도착하면 깨우겠습니다.”
“흐아아아암~, 그래, 고마워. 후우으으……. 레이시도 잘 자.”
“네에~.”
엘라의 말에 티켓을 가방에 집어넣고 엘라가 한 것처럼 하품하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담요를 가슴까지 올렸고 레이시는 엘라의 품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 얌전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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