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이유가 있다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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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좌우로 쭉 찢으며 소리없이 웃는 미네르바.
아샤는 그런 미네르바를 힐끗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저택 앞에서 레이시를 건들었다는 년, 로라지? 요새 이름 자주 들리던데.”
“…….”
“……그 종족차별주의자 쓰레기라고 가정하고 말할게. 현실적으로 너나 레이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는, 어떻게든 그년보다 좋은 성적을 얻어서 비웃어주는 거야. 그 이상은 개인적으로 항의해도 잘 안 받아들여지더라고.”
“해봤나?”
“너희들보다 먼저 당한 게 나야. 애초에 그 년은 자신의 자신감을 위해서 자신보다 약한, 아니, 전투의 문외한인 사람을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이는 쓰레기야. 왕궁에서 얌전히 있으니 기사 한 명 정도는 어떻게든 담글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건지 그 땐 나를 죽이려 들었어.”
“…….”
아샤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잠시 생각하던 미네르바는 뭔가 이상한 게 떠올라 진지한 얼굴로 아샤를 바라봤다.
“그 여자, 마법산가?”
“마법사? 퍽이나 그러겠다. 그냥 궁수야. 잘 다루지도 못 하는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활도 거지 같이 쏘는 녀석. 전쟁터에 오면 적군 머리통보다 아군 뒤통수에다 바람구멍을 먼저 만들걸.”
“……그럼, 그 년은 뭘 믿고 나대는 거지?”
“너도 인간 사회에서 살아보면 대충 알 수 있을걸?”
아샤의 말에 웃는 얼굴에서 눈살을 팍 찌푸리는 미네르바.
지금까지는 레이시를 괴롭힌 로라를 괴롭힐 생각만으로 가득 차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분노가 가라앉고 생각할 시간이 생기자 미네르바는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체 로라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왜 로라를 따른 것일까?
엘라나 미스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받고 따르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그럴만한 힘이 있고, 그 두 사람의 주변에는 그 두 사람보다 월등하게 약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거기에다가 그 두 사람과 맞먹는 힘이 있는 아샤는 두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니 힘이 강한 사람이 많은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로라는 그런 게 아니었다.
만약 로라가 마법사가 아니라면, 신체의 힘으로 승부를 보는 전사라면……, 대체 왜 주변의 기사들이 로라에게 쩔쩔 매는 걸까?
자신과 레이시처럼 몸을 섞는 것도 아닐 텐데……?
미네르바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모르겠다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고 아샤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에 낄낄 웃다가 레이시를 보며 레이시와 오래 지내다보면 알 거라고 말했다.
“너랑 다르게 레이시는 권력이라거나 그런 걸 너무 과대평가해서 보니까 잘 관찰해봐. 그럼 대충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 년이 괴롭혀도 병신처럼 얌전히 당하고만 있지. 엘라의 이름을 팔기만 하더라도 금방 끝날 텐데 말이야.”
“주인을 모욕하지 마라.”
“……그래, 미안하네. 말 실수였어.”
“…….”
아샤의 말에 천천히 살기를 끌어올리는 미네르바.
눈동자가 사람의 눈동자에서, 부엉이의 것으로 변하자 아샤는 혀를 가볍게 차면서 양손을 들어올리며 항복의 의사를 보였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살기를 죽이고 고개를 돌렸고, 이내 레이시가 자신을 바라보자 무표정으로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아샤는 그런 미네르바의 모습을 보고 홀려도 단단히 홀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긴 야차라 같은 야차에 대해 저항 능력을 가닌 자신도 방심하면 무심코 편의를 봐주고 싶은데 그런 내성이 없는데다 주종관계라 매일 같은 침대를 사용하는 미네르바는 오죽할까?
주종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였다면, 아마 어딘가에 감금되어서 매번 따먹혀도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레이시가 강철 막대를 허공에서 3번 정도 튕기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시를 말렸다.
“시간 됐어! 훈련 끝.”
“아, 벌써요?”
“그래. 막대기 줘봐.”
“네에.”
아샤의 말에 아까 계속 쳐대던 철 막대기를 가볍게 던져주는 레이시.
아샤는 레이시가 건넨 철 막대기에 남은 흔적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알게 모르게 힘이 실렸는지, 중간중간 채찍에 깎여 나간 자국이 보이는 막대기.
남을 죽이는 전투를 한다고 쳤을 땐, 이 정도 분노는 담겨있는 게 좋다.
자신이라면 그냥 죽여야 하기 때문에 죽일 수 있지만, 레이시는 그렇지 않으니까.
하지만 레이시는 평범한 메이드인 데다, 전투를 하게 된다면 그 장소에서 최대한 무사히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했다.
그런 사람의 무기술에 살의가 담겨봐야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
무기술에 살의가 담겨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공격에 의식을 할애하게 되고 그럼 방어능력이 떨어지니까.
특히 채찍처럼 공격 후,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기의 경우에는 어설프게 공격과 방어를 배분하면 안 된다.
특이한 무기가 잘 쓰이지 않는 이유는, 뭐든지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저, 잘 못 했나요?”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처음에는 투구 부수는 것만으로도 벙쪄있던 초보자가 기본은 갖췄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서. ……너, 채찍, 일반적인 가죽 채찍이지?”
“네? 네. 미스트가 사준 거예요.”
“그럼 그건 훈련용으로만 쓰고 전투용 채찍은 내가 사줄 테니까 실전 훈련할 땐 그거 써라. 선물로 사줄게.”
“저, 정말요? 괜찮은데…….”
“괜찮기는, 훈련해야 해서 사준다는 거거든? 이 멍청아.”
가볍게 혀를 차면서 눈을 찌푸리는 아샤.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반응에 움찔 떨다가 아샤가 한숨을 내쉬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아샤는 머리를 긁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좀 예민했다며 레이시에게 사과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
레이시는 그런 아샤의 행동에 눈을 깜빡이다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고 아샤는 레이시의 물음에 적당히 말을 숨겨서 대답해주었다.
“생각보다 성장 속도가 빨라서 그런다. 막대기를 보면 여기랑 여기가 깎여나갔지? 한 번, 두 번은 괜찮지만, 이 정도 힘으로 계속 휘두르다 보면 채찍 끝이 찢어져서 풀어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 전에 새 채찍을 사는 게 좋을 거야.”
“아…….”
“그나저나 이제 네게 훈련 방향을 정해줘야 하는데 예상보다 조금 빨라서 어떻게 할지 고민이네.”
아샤의 말에 부끄럽다는 듯 웃는 레이시.
하긴, 아샤는 이런 부분은 완벽주의자 성향을 보이니까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 있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잘 부탁한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고 아샤는 레이시의 인사에 대충 손짓하다가 저택으로 돌아갔다.
“…….”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레이시를 바라보는 미네르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미네르바의 웃음에 레이시는 눈을 크게 깜빡이다가 조금씩 착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서 이렇게 웃음을 보이는 거구나…….
도통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금 이렇게 잔잔하게 머금었다는 건 그런 거겠지.
조금 바보 같다고 할 정도로 남을 좋게 보는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미네르바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미네르바는 그런 레이시의 웃음에 똑같이 착각하기 시작했다.
레이시가 저렇게 웃는 걸 보면 레이시도 복수하길 원하는 거겠지.
하긴 레이시가 아무리 착하더라도 뺨을 맞고, 머리채를 잡힌 채, 험한 말을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있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지금 자신에게 제약이 걸려있지만, 사실 레이시의 힘만으로도 그 여자를 압도할 수 있는 방법은 차고 넘친다.
그렇게 생각한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웃음에 같이 웃으면서 저택으로 돌아갔고 레이시는 저택에 들어가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미네르바. 죄송한데 먼저 위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알겠다.”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올라가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가 2층으로 올라가자 침을 꿀꺽 삼킨 다음에 엘라의 방문을 두들겼다.
“엘라, 잠시 괜찮을까요?”
“응? 아, 괜찮아. 왜?”
레이시의 목소리에 흔쾌히 들어오라고 말하는 엘라.
엘라의 대답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레이시는 거꾸로 카드 탑을 쌓고 있는 엘라를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 왜……?
레이시는 상상 이상의 기묘한 풍경에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은 다음에 궁금해진 것을 물어봤다.
“저……, 그, 그게!”
“응.”
“비, 비밀로 해주실래요? 미스트에게는……. 사, 사실 엘라에게도 말하기 싫은데 어쩔 수가 없어서…….”
“왜 미스트에게 안 물어보고 내게 물어본 거야?”
“그게…….”
엘라의 질문에 움찔 떨다가 엘라의 눈치를 살피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카드 탑을 회수해 대충 던져두고 레이시를 가만히 쳐다봤고 레이시는 엘라가 자신을 쳐다보자 쭈뼛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미, 미스트는 언니 같은 느낌이라면, 엘라는 애인……, 같은 느낌이라서요. 미스트는 제가 그, 물어보면 되게 화낼 거 같아서, 무서워서…….”
“나는 화 안 낼 거 같아?”
“그게……, 화내도 그냥 이야기를 들어줄 거 같아요.”
사실은 아샤가 했던 말 때문이지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샤가 자신을 훈련 시킬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스트는 사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
그때 미네르바가 보였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그게 없는 말은 아니겠지.
……솔직히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아샤가 자신은 엘라와 비슷하다고 말했으니까 그걸 그대로 따라서 엘라에게 묻고 싶다고 말했고 엘라는 레이시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레이시는 지금 꽤 힘들어하고 있으니까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애인 같이 느껴진다는 말에 입꼬리가 주체가 안 된다.
계속 이런 기분이면 곤란한데…….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를 보며 뭐가 궁금하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로라와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해줬다.
“미네르바를 보고 짐승이래서요……. 하지만 제가 볼 땐 미스트와 미네르바, 둘 다 사람으로 느껴지거든요……. 그냥 미네르바가 새의 날개와 다리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걸까요?”
“아, 그런 이야기? 그러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네 스킬인 테이밍으로 설명해주면 되겠다.”
“네?”
“테이밍 할 수 있는 조건, 그걸 말해줄게.”
엘라의 말에 눈을 깜빡이면서 엘라를 쳐다보는 레이시.
엘라는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들기면서 레이시에게 앉으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우물쭈물거리다 엘라의 허벅지에 앉았다.
“그러니까, 테이밍은 우선 비인간종을 사역해서 자신을 돕게 만드는 스킬이야. 그리고 비인간종과 인간종을 구별하는 요소는 크게 3가지가 있지.”
“뭔데요?”
“첫째, 다른 종족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번식이 가능한가.”
“네?”
“그러니까 남녀성별이 모두 있어야만 한다는 거지. 예로 들어 미스트는 수인족. 남성과 여성이 모두 있고 다른 종족의 무언가가 필요하다거나 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이런 부분에서 볼 때 미스트는 인간종이야. 하지만 미네르바의 종족인 하피는 전원이 여성이야. 다른 종족의 수컷을 납치해서 교배하지 않으면 종족 유지가 되지 않아. 그러니까 비인간종……, 짐승이라는 거지.”
“아, 아아…….”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태생적으로 대인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야.”
“대인관계요?”
“흐음, 말하는 게 조금 애매하네. 이성을 유지한다? 사회 속에 섞인다? 그런 느낌이야. 이건 레이시, 너와 상관있는 이야기겠네.”
“그런가요?”
“야차가 인간종인지 비인간종인지 논의되고 있는 이유가 이거야. 너나 아샤처럼 대인관계가 가능한 녀석도 있는가 하면 저주의 야차라던가 살의의 야차처럼 보자마자 살아있는 걸 죽이려고 하는 녀석도 있거든. 그래서 명확한 기준이 없어져서 야차가 인간종인지 비인간종인지 구별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어. 지금은 뭐, 학술적으로는 인간종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렇구나…….”
“마지막 세 번째는 신을 모실 정도의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야.”
“네?”
“오우거 같은 걸 보면 남녀성별이 다 있고 자기들끼리는 대인관계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그들의 집단 한계는 한 20명이 끝이야. 3대 친족이 뭉친 것 이상의 대인관계는 못 만들어. 자연스럽게 신을 느끼거나 그럴 수도 없지. 자연스럽게 그들이 습득하는 스킬은 일정 레어도 이하의 스킬 뿐이고.”
“그……래요?”
“응. 정확하게는 7레어도 이상부터는 신의 축복을 받는 영역이야. 독실하든 배교적이든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어야만 해.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면 그 이상은 무리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건 구체적인 신의 존재를 느끼는 게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느끼는, 돌연변이로 인식되어서 이름이 붙고 최우선 토벌 대상이 돼.”
“으응…….”
엘라의 설명에 로라가 했었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레이시.
다른 두 조건을 충족해도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미네르바를 짐승이라 말했고, 두 번째 조건에서 논의가 일어났기에 나를 열등종이라고 말했구나…….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넘기고 자신의 품에 안았다.
“뭐, 그런 년의 헛소리는 잊어버려. 누가 뭐라고 해도 넌, 내 메이드니까.”
“…….”
엘라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조금만 이러고 있겠다면서 엘라를 안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작게 일렁이는 살기.
……미스트와 미네르바가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엘라는 레이시가 그걸 눈치채지 못하게 이마에 입을 맞춘 다음, 등을 토닥이며 레이시의 주의를 계속해서 끌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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