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이유가 있다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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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의외로 연기를 잘하지 못한다.
연기 연습을 몇 년을 하더라도, 거울이라는 도구가 없으면 자신의 얼굴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약간의 틈을 보이고 만다.
만약 완벽하게 타인을 속이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재능을 가진 몇몇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
그리고 안타깝게도 레이시는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재능을 1~100점까지의 점수로 매겼을 때, 레이시는 아무리 잘 쳐줘도 10점 이상을 받기 힘들었다.
왜냐면 레이시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생각하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할 거라는, 그런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그런 성격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금 고리타분하더라도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고 남을 잘 도와주는 사람은, 그 고리타분함이 고풍스러운 멋으로 다가오는 일은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없으니까.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겼는데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걸 말해주지 않아서 보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갑갑한가.
이럴 땐 상대방이 자신에게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에 다른 때보다 몇 배는 답답했다.
수단은 많지만, 사용할 수 없는 것만큼 스트레스는 없으니까.
“……돌아왔어요?”
“네, 에헤헤, 특식인가요?”
“네, 슬슬 날이 더워져서 한 번쯤은 특식을 먹여야 할 거 같아서요.”
“체력이 중요하긴 하죠!”
엘라도, 미스트도 레이시의 얼굴을 쳐다보자마자 레이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손가락으로 빗어서 조금 가라앉혔다고는 해도 헝클어진 티가 나는 머리카락.
약간 붉어진 뺨과 부어오른 눈가, 살기가 가득한 미네르바.
그리고 방금 자신들과 말다툼을 하고 밖으로 나간 로라까지.
거기까지 생각해보면 레이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걸 추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말다툼이나 갈등은 몇 번이고 다시 생길 수 있고, 그때마다 개입해버리면 이런 일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면 레이시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럼 특식 준비 도와주시겠어요?”
“네!”
일부러 더 힘차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미네르바에게 훈련가기 전까지만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부엌으로 들어갔고 엘라는 레이시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
“레이시에게 뭔 일이 생겼어?”
“나는 모른다.”
엘라의 질문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미네르바.
하지만 모른다고 대답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미네르바는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했고 엘라는 그런 미네르바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레이시의 몸에 상처가 남을 거 같으면 저질러버려. 뒤처리는 해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거면 돼.”
짧게 대답한 다음 다시 책을 펼쳐 읽는 엘라.
미네르바는 그런 엘라의 행동에 눈을 깜빡이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어떻게 했으면 좋았던 걸까?
레이시가 자신의 뒤에 숨어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갑자기 앞으로 나와서 자신을 대신해서 맞은 걸까?
……처음부터 막지 않았어야 했을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레이시가 좀 더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미네르바는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식을 전부 준비하고 레이시가 부엌에서 나오자 조용히 눈을 뜨고 레이시를 쳐다봤다.
아직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남아있는 레이시의 얼굴.
그런 어색함은 레이시가 미네르바의 얼굴을 바라보자 더 심해졌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반응에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저택 입구에서 기다리겠다.”
“아,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미네르바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천천히 와도 된다고 말한 다음 저택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 레이시를 기다렸고 머리를 정리한 레이시는 저택 입구에서 앉아있는 미네르바를 보곤 고맙다며 미스트의 손을 잡았다.
“말 안 했네요?”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말해도 좋다고 말했으면 말했을 거라며 레이시의 허리를 끌어안고 살짝 들어올리는 미네르바.
반사적으로 레이시가 자신의 몸을 껴안자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몸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째서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이해하지 못하겠다.
자신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았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말하듯 레이시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한숨에 조심스럽게 미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훈련하러 가자며 싱긋 웃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조심스럽게 레이시를 내려주었다.
“아, 아샤에게도 비밀이에요! 아시겠죠?”
“그래.”
애초에 엘라와 미스트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으니,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못 견딜 지경까지 가지 않는 이상 누가 물어봐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에헤헤……, 고마워요.”
“대신,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한 부탁인가?”
“노력할게요.”
아르바이트에서 갑질 당한 정도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사과에 눈을 살짝 피했다가 아샤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오늘은 며칠에 한 번씩 있는 기술 훈련의 시간.
아샤는 두 사람이 연무장에 오자 자연스럽게 달리기 훈련을 시켰고 레이시는 아샤의 말에 기운차게 대답한 다음 평소처럼 마라톤을 시작했다.
“……야.”
“……?”
“레이시한테 뭔 일 있었어?”
“……나는 모른다.”
“그렇게 대답하라고 말했나 보네?”
모르는 척 해봐야 다 안다는 듯 말하는 아샤.
미네르바는 아샤의 말에 레이시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게 정말 서투르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시의 말을 따르기 위해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거칠게 긁는 아샤.
아샤는 자신의 뿔을 손톱으로 긁다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사냥대회 준비는 잘 되고 있어? 거기에 아마 숲에는 레이시가 들어갈 거 같은데.”
“왜지?”
“왜기는, 엘라, 그 년은 지 새언니하고 떠드느라 출전하지 못할 거고 미스트는 엘라의 옆에 붙어있어야 하니까 그러지. 메이드가 미스트, 한 명밖에 없을 때는 미스트가 출전해서 쓸어담았다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
“레이시가 엘라의 옆에 있을 수도 있잖나.”
“레이시는레이디스 메이드가 아니잖아. 끽해야 최하급의 스컬러리나 체임버 메이드와 비슷한 수준일 건데 그런 년이 공주의 옆에 있는다? 엘라가 아무리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막 나가긴 힘들지. 다른 사람들을 전부 엿 먹이는 일이 되거든.”
“어째서지?”
“넌 말야, 다들 전원 귀족 가문 출신의, 비서나 다름 없는 메이드를 데리고 오는 자리에 아무것도 모르는 년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될 거 같냐?”
“…….”
“뭐, 엘라의 힘이 적은 건 아니니까 레이시가 옆에 있어도 다들 뭐라고 하지는 못 하겠지만, 괜히 적을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레이시를 출전시키는 게 맞지.”
“그렇군…….”
“그나저나 안 좋은 소식이 들려서 방어 훈련을 시키려고 했는데, 저래선 새 기술의 습득은 어려워 보이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지?”
“별 거 아냐, 늘상 있는 일이지. 하류계층, 평민 사냥이야.”
“…….”
“평민 출신인 녀석을 사냥 대회에 불러 몰라 죽이는 거지. 딱히 드문 일은 아냐. 평민 출신이 왕궁에 와서 일하면 자주 당하는 꽤 흔한 일이지. 레이시는 특히 주변 귀족이 볼 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중이라 죽이고 싶은 목표일 거고.”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긁는 아샤.
아샤는 이렇게 공공연하게 소문이 흘러 다니는 걸 보면 아마 100%에 가까운 확률로 암살 시도를 받겠지.
화살을 맞든, 단검에 맞든, 마법에 맞든, 살의가 가득한 공격을 받겠지.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열심히 달리고 있는 레이시를 힐끗 쳐다봤다.
꽤 무리한 운동을 시켜도 군말없이 따르고 매번 노력하는 착한 녀석.
너무 착한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전투현장에 오지 않는다면 솔직히 말해서 좋게 대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레이시라면 경외라고 불리는 자신의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착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빠져나가기 조금 힘들다.
“……정말인가?”
“응. 나도 몇 번 당해봐서 아는 일이니까, 거의 확실할걸.”
“…….”
“주먹에 힘 빼, 지금 당장 암살당한다는 건 아냐.”
“…….”
아샤의 말에 천천히 주먹에 주던 힘을 푸는 미네르바.
미네르바의 손이 펼쳐지자 쥐고 있던 돌덩이가 몇 조각으로 쪼개져 바닥으로 흩어졌고 아샤는 그런 미네르바의 손을 보고는 혀를 찬 다음 말을 이어갔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내 나름대로 신분을 사용해서 레이시를 호위할 테니까.”
보통 메이드를 호위하는 일은 없었지만, 기사도에 나와 있는 약자를 보호한다는 말과 주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문구를 명분으로 들이밀면 어떻게든 레이시를 호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호위한다면 어지간한 녀석들은 암살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레이시가 엘라의 이름에 맞는 성적을 거두는 것만이 문제일 뿐, 레이시가 다치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말하자 미네르바는 얼굴에서 분노를 지우고 기쁘다는 감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고양이가 구석에 몰린 쥐새끼를 보는 듯한, 포학함이 느껴지는 기쁨으로 가득 찬 얼굴.
언제든지 목숨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얼굴에 아샤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사냥 대회에 참석할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제약을 풀어달라고 말할 거야?”
“이번에는……. 근데, 안 그래도 상관 없다.”
보통 테이머가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테이밍시키면, 테이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테이밍 된 존재의 힘을 제약하게 된다.
그 제약의 강도는 테이머가 가지고 있는 힘에 반비례하며, 테이머가 강하면 강할수록 제약의 강도가 약해진다.
하지만 그건 테이머가 약하면 약할수록 제약의 강도가 강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미네르바의 몸에 걸린 제약의 강도는 8할이 넘는 힘을 봉인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지금 미네르바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어디까지나 레이시가 낼 수 있는 정도.
만약의 이야기지만, 제약이 사라지면 미네르바는 자신이나 엘라, 미스트와 비슷한 수준의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어설픈 화살에 다칠 일도 없고, 남을 죽이지 못해서 쩔쩔 매는 일도 사라진다.
그 사냥 대회에 나오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한 마리나, 두 마리 쯤 동물을 죽일 때쯤에는 숲에 있는 모든 동물이 죽겠지.
그렇게 생각한 아샤는 미네르바를 힐끗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긁었다.
“뭐……, 마음대로 해라.”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뭔데?”
“그 사냥 대회의 성적이라는 건, 높으면 높을수록 좋나?”
“그야 그렇지.”
접대 사냥도 아니고 그냥 사냥 대회니까 점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겠지.
물론 점수가 너무 높아서 0점 출전자가 많아진다면 다른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짓이 되겠지만, 엘라라면 그딴 건 자기가 알 바냐고 말할 것이다.
엘라는 지금 열리는 사냥 대회 같은 조건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0점을 맞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아샤는 미네르바에게 고득점이면 고득점일수록 레이시의 명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고 미네르바는 아샤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보기 드물게 입술을 쭉 찢으며 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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