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이유가 있다면2
* * *
“미스트.”
“네?”
“저……, 레이시 화났어?”
“조금요. 쉬잇. 지금 끼어들면 복잡해진답니다.”
원하는 메뉴로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영 뾰로통한 레이시.
엘라는 샐러드를 깨작거리다가 미스트를 툭툭 건들며 조심스럽게 물어봤고 미스트는 엘라의 질문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시가 화난 건 순 자신의 잘못 때문에 그런 거지만, 지금 화가 난 이유는 엘라 때문이니까 엘라가 끼어들면 괜히 더 복잡해진다.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하다 일단 엘라와 레이시를 떼어놓자고 생각했다.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된 사람을, 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과 붙여놓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니까.
레이시도 기분을 환기하고 나면 응어리를 대화해서 풀겠지.
그렇기에 미스트는 레이시에게 시킬만한 심부름을 건네주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심부름에 평소처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사냥개 사육소랑 말 사육소에 가서 여기에 적힌 걸 받아오면 되는 거죠?”
“네. 편지와 연락은 보내뒀으니 가서 말씀만 하시면 괜찮을 거예요.”
“그럼 다녀올게요.”
접시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따라 일어나서 레이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저, 혼자 가도 괜찮은데.”
“나도 같이 가겠다.”
“아하하, 혼난 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거로 하겠다.”
“아하핫! 미네르바도 혼나는 건 싫은 거네요.”
“뭐…….”
미스트에게 잔뜩 혼나면서 천천히 눈치를 배우기 시작한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신경 쓰지 않게 대충 둘러대면서 레이시의 뒤에서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레이시는 미스트에게 언제까지 돌아와야 하는지 물어봤고 미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둘이서 산책을 느긋하게 하고 돌아올 수 있게 꽤 넉넉한 시간을 불렀다.
“혹시 돈이 모자라시면 여기에 있는 거 쓰시고요.”
이 정도면 두 사람이 음료를 마시며 산책한 다음 돌아와도 적당히 돈이 남겠지.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다녀오겠다며 힘차게 인사하는 레이시를 배웅했다.
해가 뜨면서 따뜻해진 날씨.
레이시는 시간도 넉넉하고 날씨도 좋으니 산책을 다녀오지 않겠냐면서 미네르바를 바라봤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괜찮다면 좋다.”
“그럼 일 빨리 끝내고 조금만 산책해요.”
산책을 먼저 하고 일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여유로운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일을 먼저하자고 말하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부터 갈 거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가까운 곳부터 먼저 가자며 말 사육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시가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물건을 내놓는 중장년.
이제 막 50대쯤 되었을까?
말 사육소의 사람은 레이시에게 무거울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봤고 레이시는 그런 직원의 말에 가볍게 가방을 들어올렸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무거운 소리와 함께 올려지는 가방.
레이시는 사육사의 허락을 받고는 가방 안에 든 걸 확인했고, 옥수수와 당근 같은 게 보이자 말에게 주는 특식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가방을 닫았다.
“그럼 가볼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가방 안에 꽉 차서 무게가 10kg은 될 건데 내색하지 않고 한 손으로 가방을 들고 움직이는 레이시.
사육사는 그런 레이시를 보고는 당혹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 레이시를 배웅했고 레이시는 사육사의 배웅을 받으면서 사냥개 사육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냥개 사육소에서 받은 물건도 사냥개에게 주는 특식으로 핏물과 소금기가 깔끔하게 제거된 고기였다.
종이에 돌돌 말려진 생고기.
이번에도 꽤 무게감이 있었지만, 한 손으로 몇십 kg의 무게를 들 수 있게 된 레이시는 별 무리 없이 가방을 들고 남은 시간 동안 미네르바와 산책하기 시작했다.
서로 가방을 한 개씩 든 채로 사과를 하나씩 입에 물고 걷는 두 사람.
레이시는 미네르바와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택으로 가는 걸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일까요? 저분들 저희 저택으로 가는 거 같은데.”
“글쎄? 모르겠다. 우연 아닌가?”
아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말에 고개를 돌려 사람들이 있는 곳을 보고는 작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레이시의 손을 잡고 조금만 더 걷자며 몸을 빙글 돌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의가 가득하던 얼굴.
레이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한 적의일 수도 있지만…….
미네르바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생각을 멈췄고 레이시는 그런 미네르바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팔짱을 꼈다.
“으응?”
“이러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
레이시가 살짝 어깨를 기대자 눈을 크게 깜빡이는 미네르바.
미네르바는 이러려던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기왕 굴러온 호박이니 얌전히 받아먹자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레이시와 팔짱을 끼며 산책했다.
그리고 적당히 시간을 죽인 후, 레이시와 미네르바는 저택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이제 그 사람들은 밖으로 나왔거나 나오는 중이겠지.
그런 미네르바의 예측대로, 아까 저택으로 향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은 줄 지어서 저택에서 나오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잔뜩 씩씩거리는 사람들.
그 중 검은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른 맨 앞의 여성은 저러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내쉬고 있었고 레이시는 그 여성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길을 비켜줬다.
괜히 걸리면 잘못될 것만 같은 분위기.
길 구석에서 그렇게 생각하던 레이시는 맨앞의 여성이 자신을 노려보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뭐지? 내가 뭔가 큰 실수라도 했나?
자신을 보자마자 숨소리가 더욱 더 거칠어져서 짐승 같아진 여성의 모습에, 레이시는 눈을 깔고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가 남들에게 큰 잘못을 한 적은 없었기에 레이시는 점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미네르바의 손을 꽉 잡았고, 미네르바는 레이시를 반걸음 뒤로 물러나게 해 자신의 몸으로 가려주었다.
그리고 레이시가 미네르바의 뒤에 숨자 검은색 단발의 여성은 레이시와 미네르바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네?”
“너, 이름이 뭐야?”
“레이시요…….”
“흐응.”
레이시의 대답에 레이시를 품평하듯 위, 아래로 훑어보는 여성.
그러더니 이내 여성은 그대로 레이시의 뺨을 후려쳤다.
미네르바가 막아 여성의 손이 레이시까지 닿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에 미네르바의 팔뚝이 붉어졌고 레이시는 여성의 행동에 당황한 듯 여성을 쳐다봤다.
하지만 여성 쪽은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공격을 막은 미네르바가 잘못했다는 듯 혀를 차며 미네르바의 뺨을 곧바로 다시 때렸다.
짜악하는, 듣기만 해도 피부가 따가워지는 소리가 크게 났지만, 미동도 없이 얌전히 여성을 내려다보는 미네르바.
여성은 그런 미네르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미네르바에게 발길질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레이시가 앞으로 나와 미네르바 대신 맞았다.
레이시가 맞은 부위는 뺨.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앞으로 나올 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크게 당황하며 레이시를 감싸더니 이내 이를 으득거리면서 여성을 노려봤다.
그러자 여성은 미네르바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짐승 취급받는 하피 주제에 뭘 노려봐? 하긴 그 주인에 그 애완동물이지. 공주님도 뭐 때문에 이런 년을 받아들이신 건지.”
여성의 말에 눈앞의 여성이 로라 류테인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레이시.
지금 이 여성은 자신에게 화풀이하려고 왔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미네르바를 진정시킨 다음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고 여성은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킥킥 웃다가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억지로 들게 했다.
“으극……!”
“공주님도 공주님이야. 대체 왜 이런 걸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건지……. 이런 열등종은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섹스 토이에 불과한데.”
“윽, 아, 아얏……!”
레이시의 얼굴을 품평하듯 머리채를 잡고 이리 돌리는 로라.
로라는 한참을 그렇게 품평하다 레이시를 창관에서도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여자인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모르겠다며 확 놓았다.
그러자 크게 휘청거리는 레이시.
로라는 그런 레이시를 보며 앞으로도 나대면 이것보다 험한 일을 겪을 줄 알라며 협박한 다음 자리를 옮겼고 미네르바는 사람들이 떠나자 조심스럽게 레이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주었다.
“……괜찮나?”
“아, 아하하, 괜찮아요. 으응, 이런 일을 실제로 겪을 줄은 몰랐네요.”
전생에선 알바하다 당한 갑질 정도가 제일 충격적이었는데…….
레이시는 방금 로라에게 들은 신분 차별과 성희롱에 얼떨떨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자신을 품평하던 로라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침을 삼켰다.
자신을 같은 지성체로 보는 눈이 아니라, 정말로 도구로 보던 눈.
살면서 사람이 그렇게 차가운 눈을 할 수도 있구나 싶었던 레이시는 자꾸만 떠오르는 그 눈동자에 천천히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마치 다친 상처를 인식한 후에 고통이 느껴지는 것처럼, 로라가 가고 나서부터 느껴지는 공포와 수치심.
섹스 토이라거나, 열등하다느니…….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악의에 레이시는 천천히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울음에 당황하다 조심스럽게 레이시를 끌어안았다.
“흐끅……, 흐끅……!”
미스트가 말했었던, 신분으로 모든 걸 본다는 말.
처음에는 그게 그냥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 으레 보이는 자부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산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책에 적혀 있던 귀족의 모습은, 그만큼의 노력을 하고 책임감을 가진 뒤에 힘을 얻은 사람들이니까.
그런 거라면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은 경험으로 그냥저냥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겪은 그 차별은 그런 귀여운 종류의 일그러짐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대항해시대 당시 영국인이 피지배자들에게 보이던 시선과 같은, 정말로 인간을 인간이라고 보지 않는 차별이었다.
“히끅……!”
그리고 그런 차별은 평화로운 시대에 살았던 레이시가 견딜만한 종류의 차별이 아니었고, 레이시는 좀처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계속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레이시를 끌어안은 채, 레이시의 뺨을 계속해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괜찮나?”
미네르바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네르바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레이시가 자신의 품에 안기자 조심스럽게 날개로 레이시를 감싸고 레이시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주었다.
그리고 10분 정도가 흐르자, 레이시는 울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는지 미네르바의 품에서 벗어났고, 가볍게 눈을 비빈 다음에 환하게 웃었다.
“죄, 죄송해요! 아하하, 그렇게 아픈 일을 당한 것도 아닌데 울어버려서.”
“……정말, 괜찮나? 주인이 원한다면…….”
“괜찮아요. 그러면 미네르바가 위험해지잖아요. 아, 대신에 엘라나 미스트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해주실 수 있죠?”
“……주인이 원한다면, 아무하게도 말하지 않겠다.”
“고마워요. 비밀로 해주세요.”
엘라나 미스트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분명 로라와 크게 다툴 게 뻔하다.
그러면 자신이 참으면 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엘라의 성격이라면 분명 로라와 싸울게 뻔하다.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던 레이시는 몇 번이고 미네르바에게 당부한 다음 눈을 가볍게 문지른 다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요? 미스트가 기다릴 거예요.”
“……그래, 알겠다.”
레이시의 말에 이번에는 먼저 팔짱을 끼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행동에 살짝 놀라다가 조심스럽게 깍지를 끼고서 저택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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