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이유가 있다면1
* * *
“아직도 다리가 떨리는 거 같아…….”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새벽.
레이시는 건초와 사료를 준비하고 말과 사냥개들을 보살핀 다음 저택 정원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자신의 다리를 주물렀다.
근육은 완벽하게 회복됐지만, 아직 여운이 남아있는 다리.
특히 마지막에 빨아들이는 그건 정말이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게 되고 다리와 허리가 덜덜 떨리는 감각.
사람이라는 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버릴 수도 있다는 걸 배운 레이시는 한숨을 내쉬다가 성벽 너머로 해가 걸리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보게 된 건 벽 앞에서 팻말을 들고 있는 엘라와 미네르바였다.
‘앞으로는 성욕이 들끓어도 자제하면서 하겠습니다.’라고 적힌 팻말.
레이시는 초등학생이나 받을 법한 체벌을 받고 있는 두 사람을 미묘한 얼굴로 보다가 조심스럽게 뭘 하고 있는지 물었다.
“반성의 아무것도 안 하고 30분간 멀뚱멀뚱 서있기. 그것보다 일하고 온 거야?”
“네.”
“땀 냄새가 좋은걸?”
“……미스트으으~.”
“네?”
“엘라가 저보고 땀 냄새가 좋다면서 킁킁거렸어요!”
“헤에, 그렇군요. 공주님. 공주님은 30분 추가, 미네르바는 이만 그만해도 괜찮아요.”
“에에에엑!”
미스트의 말에 비명을 지르며 레이시를 바라보는 엘라.
하지만 레이시는 어제의 복수라며 상쾌한 미소를 지은 다음 방으로 올라갔고 미스트는 레이시를 보고는 따라 올라가 레이시의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주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
“레이시에게도 잔소리할 게 있어서요.”
“……저, 저는 잘못한 거 없는데.”
“정말요?”
“…….”
미스트가 웃는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자 자연스럽게 눈을 아래로 까는 레이시.
미스트는 레이시의 반응에 피식 웃더니 레이시의 옷을 벗고 같이 욕실에 들어가 레이시를 씻기기 시작했다.
“뭐, 공주님이 미네르바를 부추겨서 레이시를 덮친 거겠죠. 레이시도 처음에는 저항하다가 분위기에 휩쓸려서 어떻게 하지도 못 한 거고요.”
“아, 아하하하.”
마법이나 분신으로 감시라도 하신 건가요?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다가 미스트가 따뜻한 물을 자신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붓기 시작하자 어깨를 움츠리며 미스트를 쳐다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나체가 되어선 만화가 아니고서야 본 적이 없는 크기의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미스트.
레이시는 저절로 시선을 잡아 끄는 미스트의 가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미스트가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때리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레이시도 레이시잖아요? 적당히 조절해줘야죠.”
“으, 으으응…….”
“다음부터는 좀 더 확실히 거절해주세요. 아시겠죠?”
“네에…….”
레이시의 머리카락을 감겨주며 가볍게 주의주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주의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미스트에게 몸을 기댔고 미스트는 레이시가 기대오자 싱긋 웃으면서 레이시의 손을 잡아 욕조 안으로 데리고 갔다.
방에 딸린 욕조지만 두 사람 정도는 여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욕조.
하지만 미스트는 일부러 레이시를 껴안은 채로 콧노래를 불렀고 레이시는 목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눈을 가늘게 뜨다 천천히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괜찮으려나 모르겠네요.”
“네?”
“사냥회라는 거, 레베카 님이 제안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거친 모임이라서요. 주변의 다른 귀족들이 부추긴 거 같네요. 그중에는 저번에 용혈마를 데리고 온 류테인 백작가의 사람도 있는 것같고요.”
“아……, 류테인 백작 가문의 영애가 공주님과 사귀던 사이……라고 하셨죠?”
“네? 아,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원나잇이란 느낌이에요.”
“에?”
“공주님이 받는 스트레스를 전부 그런 식으로 해소해서요. 싫어졌나요?”
“그, 아뇨. 결혼하신 상태라면 모를까 또 그런 건 아닌데 간섭하는 건 조금 아닌 거 같아서요.”
“얼굴에는 질투가 보이는데요?”
“그건…….”
미스트의 말에 움찔 떨다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레이시.
머릿속으로는 엘라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결혼하기 전에 어떤 생활을 보냈든 그건 그 사람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지금의 상대를 존중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어도 몸으로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까?
생각해보면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데이트 좀 몇 번 하고 섹…….
아니, 그 정도면 사귀는 게 아닌가?
레이시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곳의 문화는 자신이 아는 문화와 많이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그런 건 의외로 다들 하는 걸까나…….
점점 생각이 복잡해지자 레이시는 전생의 버릇대로 손가락으로 손등을 긁어댔고 미스트는 점점 붉어지는 레이시의 손등을 보고는 레이시의 손을 잡아 깍지를 껴 긁는 걸 막았다.
“다른 여자 이야기하는 건 매너가 아니었네요. 죄송해요.”
“네? 아하하……, 괘, 괜찮아요.”
“으음,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류테인 가의 영애가 원나잇한 사이라는 이야기요.”
“그러네요. 그분의 이름은 로라 류테인이고 활동적인 성격의 분이랍니다. 사냥대회를 자주 열고 활 솜씨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랍니다. 레베카 님이 무도회를 연 목적이 류테인 백작을 달래기 위한 거라면, 로라 님의 입김이 닿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어요.”
“으으응…….”
“레이시가 못 하는 거로 솜씨를 뽐내서 자랑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사냥회를 핑계로 레이시를 암살하려 든다거나…….
레이시에게는 말하지 못할 이야기지만, 그런 일은 꽤 자주 일어난다.
상대방이 귀족이라면 상대방의 가문과 전면전이 되니 조금이라도 망설이겠지만, 레이시는 단순한 메이드.
엘라의 전속 메이드라고 해도, 일단 직함은 평민에 메이드다.
엘라가 진심으로 화를 내서 가문을 멸문하려고 해도 주변에서 막을 확률이 다분히 높고 증거가 없는 이상 제대로 된 공격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뭐, 그렇게 내버려두지는 않겠지만.
기껏해야 아무런 직업도 가지지 않은 귀족 가문의 영애치고는 활을 잘 쏠 뿐이지 기사와 비교해보면 중하위에 불과하고 레이시를 제외한 사람과 비교하면, 비교하는 것자체가 실례가 될 정도의 차이가 있다.
엘라라면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기도 전에 로라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 거고 아샤라면 화살을 잡아채 집어던져 로라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아얏!”
“아, 죄송해요. 아팠어요?”
“손가락이 빨개졌어요.”
“호오~ 해드릴까요?”
“괘, 괜찮아요. 애도 아니고……. 그런데 그분을 싫어하세요?”
“여기에서 하는 이야기는 메이드끼리의 비밀이에요.”
“아, 네!”
“솔직하게 말해서 류테인 백작 가문의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 없답니다~. 타고난 신분만으로 으스대는 사람이거든요. 거기에다가 레이시가 몇 배는 더 귀엽고요. 향수를 뿌리는데 엄청 독해서 토할 것 같거든요. 사냥개들을 잘 쓰지 못하는 이유가 그거 때문일 거예요.”
꺄륵 웃으면서 메이드의 가면을 뒤집어쓰는 미스트.
미스트는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신분을 세뇌하듯 몇 번이고 속으로 말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너무 과하게 꾸미고, 자신이 가진 능력과 비교하면 너무 많은 걸 받고 있으니까요.”
“그거 저도 포함이죠……?”
“네? 아뇨. 레이시는 적당한 일을 하고 적당한 월급을 받고 있으니까 괜찮지 않나요?”
“그게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아하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런 게 어딨어요? 그리고 레이시는 그런 걸 이용해서 뭔가 하려고 하지도 않잖아요. 서로 배려하면서 사귀는데 문제될 건 없어요.”
“그런 걸까요…….”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워낙 뛰어나서 솔직히 말해서 부담될 때가 있다.
특히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더더욱.
아무리 좋게 말해도 레이시는 자신은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그렇다고 특이한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가진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엘라가 자신에게 들러붙을 때마다 그런 부분이 신경 쓰였다.
특히 이런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레이시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만 같아 어깨가 자연스럽게 말려들어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야 재벌가 사람과 평범한 사람이 연애하는 이야기가 제법 나온다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실은 중산층과 차상위계층의 사람이 결혼하고 연애하는 이야기도 보기 힘들다.
그만큼 돈과 권력의 차이는 크다.
그런데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자신이 한 나라의 공주의 사랑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
레이시는 생각할수록 답이 안 나오는 고민에 점점 우울해지더니 몸을 둥글게 말았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를 보고는 말실수를 했다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레이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야영을 배우기 위해서 꼬박꼬박 잠에서 깬 채로 있었고 저택에만 있어도 된다는 엘라의 말에도 엘라를 따라가기 위해 아샤에게 훈련을 받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레이시는 자신과 엘라를 정직하게 비교하겠지.
오늘따라 실수를 많이 한다고 생각한 미스트는 일단 주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레이시의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요? 슬슬 어지럽고, 공주님 없이 이 이야기를 계속하기도 뭐하고요.”
“네? 아, 그러네요.”
자신의 말에 억지로 웃음을 짓는 레이시.
미스트는 레이시의 머리에 묻은 비눗물을 씻겨준 다음 연두색의 머리카락이 붙은 뿔을 가볍게 만졌다.
스윽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감촉을 전해주는 레이시의 뿔.
미스트는 레이시의 뿔을 한동안 만지다가 이제 진짜 나가자며 몸을 닦기 시작했고 레이시는 미스트를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평소보다 경직된 분위기.
혹시 로라 류테인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말하기 힘든 일을 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로라랑 엘라가 의외로 깊은 사이였다던가?
레이시는 로라에 대한 자꾸 이어가다가 가슴이 점점 답답해지자 괜히 머리를 닦는 손에 힘을 주며 거칠게 머리를 닦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꽤 커다랬다.
머리카락끼리 엉키키도 하고 뿔에 머리카락이 엉키기도 하며 엉망이 되는 레이시.
미스트는 갑자기 짜증 내는 레이시의 모습에 작게 웃다가 레이시를 의자에 앉힌 다음에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주면서 레이시를 달래주었다.
“으음, 로라 님의 이야기가 그렇게 화가 났나요?”
“……따, 딱히요. 화낼 건 없잖아요.”
“얼굴에 화났다고 쓰여 있다구요?”
“으웃.”
“기름 좀 사용할게요.”
동백기름을 빗에 바르더니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주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손길에 괜히 투정을 부리다가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고 미스트는 우울한 표정의 레이시를 보며 곤란하다며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공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레이시랍니다.”
“……그치만.”
“정 의심되시면 조금 무리인 부탁을 해보세요. 아마 공주님은 뭐라도 들어주실 걸요?”
“그러면 엘라가 난처할 거니까 싫어요…….”
자신의 질투심 때문에 상대방을 난처하게 한다니.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기에 레이시는 눈을 돌리며 더욱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나, 지금 뭐 하는 걸까…….
상대방이 좋아하는 건 확인하고 싶고,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건 싫고…….
엘라를 믿고 있으면 딱히 이런 고민도 안 할 텐데.
“……우그으으으으으.”
“머리 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으음~, 오늘 아침은 레이시가 먹고 싶은 거로 할까요?”
이성과 본성 사이에서 한참을 갈등하는 레이시.
미스트는 의자에 앉아 끙끙 거리는 레이시를 보고 작게 웃다가, 레이시에게 먹고 싶은 걸 물어보며 레이시의 볼을 가볍게 쪼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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