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일상, 데이트, 일상4
* * *
“……덮치셨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
“레이시 양이 울길래 그런 거로만 알았죠.”
눈가가 빨갛게 부은 채로 엘라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들어오는 레이시.
미스트는 아무리 봐도 울고 온 게 틀림없는 레이시의 얼굴에 눈을 깜빡이다가 엘라를 추궁해봤다.
물론 그 추궁이 맞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엘라가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편이라고 해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그냥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꺼내는 말이다.
그런 걸 엘라도 알고 있는지 엘라는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볼케릭, 그 자식하고 맞딱뜨렸어.”
“아하.”
엘라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시의 눈가를 닦아주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손길에 훌쩍거리다가 미스트에게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전부 다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미스트.
레이시는 그런 미스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미스트를 올려다봤다.
“볼케릭 왕자님은 혈통과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시는데 엘라 공주님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좀 그렇거든요.”
“훌쩍……, 왜요?”
“동성애자이시잖아요.”
“…….”
미스트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걸 이해해버린 레이시.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작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공주님에게 맞선 이야기를 꺼내시는 건 볼케릭 왕자님과 그 추종자분들이세요. 뭐, 다른 공주님들도 엘라 공주님에게 은근히 압박을 가하시지만요.”
“훌쩍.”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이 자신의 세력을 불리는데 독이 되고 있음에도 우직하게 그 길을 밀고 나가시는 분이라서 설득은 아마 안 될 거예요. 그래서 매번 마주칠 때마다 싸우신답니다. 그래도 유혈 사태까지는 가지 않아요. 그렇죠?”
엘라를 보며 웃는 미스트.
엘라는 레이시가 안 보이는 각도로 살짝 엄지를 들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무리 열 받아도 남매의 기사를 다치게 할 수는 없잖아? 그냥 중력으로 살짝 눌러서 못 움직이게 하는 게 끝이야.”
“훌쩍……, 그래도 싸우지 마요. 무섭단 말이에요.”
“아아, 알았어. 알았어. 오랜만의 데이트여서 좀 화가 많이 났을 뿐이야.”
아까까지 남아있던 앙금이 사라지고 순수하게 걱정만 남은 레이시의 목소리.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목소리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레이시를 끌어안았고 동시에 아이야트에게 받은 무도회 초청장을 꺼냈다.
아이야트는 자신의 아내가 무도회를 열었으니 참석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속내는 아마도 류테인 백작을 기절시킨 일에 대해서 설명해줬으면 한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한숨을 내쉬더니 미스트에게 초청장을 건네주며 드레스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고 미스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레이시를 힐끗 쳐다봤다.
엘라는 미스트의 시선에 레이시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살짝 주면서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드레스는 레이시가 입고 있는 옷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옷이다.
레이시가 얌전한 편이라고 해도 치마가 있어도 매일 같이 바지와 셔츠를 입는 사람이 갑자기 소화할 수 있는 옷이 아니다.
다행히 무도회가 토 나올 정도로 격식을 차리는 자리는 아니니 투 피스 형태의 옷이나 쓰리 피스 슈트를 입히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를 소파에 앉히고 손가락을 3개, 그리고 4개를 차례대로 펼쳤고 미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하러 나가겠다고 말했다.
“후아, 좀 진정했어?”
“…….”
엘라의 말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미네르바에게 안기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킥킥 웃다가 세 명분의 차를 내려왔고 레이시는 탁자에 내려진 차를 홀짝이다 눈을 흘겼다.
“그래도 그렇지, 남매가 그렇게 무식하게 싸워요?”
“기 싸움이지 실제로…….”
“씁!”
“……알았어. 참을게.”
“약속이에요. 훌쩍…….”
칼을 먼저 뽑은 건 저쪽인데…….
엘라는 짐짓 억울하다는 듯 레이시를 쳐다봤지만, 레이시가 손만 내밀어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잡자 피식 웃었다.
하긴 아무리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 없겠지.
레이시는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 없을 정도로 착한 성격인 것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초청장에 대한 걸 물어봤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뭐가요?”
“가볼래? 무도회. 재미는 없겠지만 한 번쯤은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우, 우으……. 저는 춤 출 줄 모르는데요…….”
“응? 안 춰도 돼.”
“무도회인데요?”
“이름만 무도회지 사실 춤 추는 사람은 거의 없어. 전문 댄서가 대신 추고 하하호호 웃는 게 대부분이야. 귀족이 춤을 춘다고 해도 그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길 때뿐이고 그마저도 안 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게 무슨 무도회에요?”
“글쎄다? 수도에 박혀서 놀고, 먹는 게 일이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자기들 춤 추려고 무도회를 여는 게 아니라 춤 추는 걸 구경하려고 무도회를 여는 건가?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그렇게 생각하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엘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엘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말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예절 교사나 다른 교사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헛기침이 전부거나 전부터 그랬다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뭐, 하여튼 가볼래? 춤은 대충 일주일 동안 스텝만 밟아보고 가도 괜찮을 거야.”
“으, 으으응…….”
“주인이 아프니 안 된다.”
“아니, 일주일 정도 지나면 멀쩡해지니까 가보자는 거야.”
“……안 된다.”
“너도 같이 갈 수 있어. 레이시의 펫이니까.”
“그럼……, 그럼 주인의 뜻을 따르겠다.”
결국 같이 못 가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였잖아.
레이시가 훈련을 받을 때 이야기를 들었던 엘라는 킥킥 웃다가 어떻게 할 거냐며 레이시를 바라봤고 레이시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무도회든 뭐든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친구끼리 모여서 노는 거라면 모를까, 모르는 사람이 가득한 곳에서 처음 만난 상대와 하하호호하고 웃는 건 조금 꺼려지는 일이니까.
엘라와 미스트, 두 사람과 급격하게 친해진 건 갑작스러운 환생에 멧돼지의 습격이라는 두 사건이 겹쳐서 일어난, 일종의 우연이었고…….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엘라의 눈치를 봤다.
반드시 가야 하는 일이면 가고, 그게 아니라면 가지 않겠다는 조심스러운 어필.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대답에 작게 웃다가 굳이 갈 필요는 없으니 안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초청장을 던졌다.
“새언니니 뭐니 해도 직접 얼굴 본 지 벌써 4년을 넘었으니까.”
“엘라…….”
“응?”
“혹시 가족끼리 사이가 무척 안 좋은 건가요?”
뭔 가족이 4년이나 안 보는 걸까?
전생엔 적어도 1년에 3달은 할아버지의 농가에 가서 농사일을 도와줬었던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정말 괜찮은 거냐며 엘라를 바라봤다.
가족끼리 칼을 들고 싸울 정도며 아버지와도 편하게 이야기하기 힘든 분위기에서 만나고 심지어 사람을 죽여가며까지 일해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줘야 한다.
이제 와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만, 엘라가 멀쩡한 가정에서 크기는 한 걸까?
아니, 애초에 판타지 세계라고 해도 5살에 암살자에게 습격받았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레이시는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혹에 눈에 걱정의 빛을 잔뜩 머금고 엘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엘라는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모두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야.”
“정말요……?”
“응, 그리고 네가 있잖아. 네가 오고 나서 마음이 편해졌어.”
“……오늘따라 부끄러운 말 자주 하네요.”
“네가 오늘따라 애교를 많이 부려서 외로워서 이런다고 생각했지.”
엘라의 말에 얼굴을 붉히는 레이시.
다만 마냥 싫은 건 아닌지 레이시는 조심스럽게 미네르바의 허벅지에서 엘라와 미네르바 사이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 모습에 작게 질투하다가 레이시의 남은 손을 잡아버리는 미네르바.
엘라는 두 사람의 모습에 킥킥 웃다가 턱을 괴고 가운데에 끼여 곤란하다는 얼굴을 보고 작게 웃었다.
서로 계산 없이 이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이라니…….
작년만 하더라도 그런 건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레이시를 보자 엘라는 역시 뭐든지 경험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손을 조심스럽게 빼더니 담요를 들고 와 엘라에게 덮어주는 레이시.
손 안의 온기가 사라지자 엘라는 다시금 레이시의 손을 잡더니 같이 자자며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소파의 밑부분에 있는 레버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발판 부분이 앞으로 나오면서 침대로 변하는 소파.
어떻게 된 건지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과 안에 있는 부분의 높낮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자 레이시는 어떻게 한 거냐며 엘라를 쳐다봤다.
“원리라면 설명해줄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있어?”
“…….”
“후후, 자자. 울어서 피곤하지?”
“누구 때문에 울었는데…….”
“아하하, 미안해.”
다시금 사과하면서 레이시를 껴안고 소파에 눕는 엘라.
레이시는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다가 눕자마자 졸음이 몰려오자 조심스럽게 미네르바에게 팔을 뻗었다.
3명이 누우면 조금 좁겠지만, 같이 잘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듯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면서 손바닥으로 소파를 두드리는 레이시.
미네르바는 그런 레이시의 유혹에 엘라를 살짝 흘겨보다 조심스럽게 레이시의 옆에 누웠고 같이 잠을 잘 때마다 해주던 것처럼 날개로 레이시의 몸을 덮어주었다.
따스하게 뺨을 쓰다듬는 햇빛에,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날개 이불.
하나 같이 레이시의 수마를 자극하는 것들에 레이시는 금방 새근거리기 시작했고 엘라와 미네르바는 레이시를 보고 흐뭇하게 웃다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자신을 껴안고 자는 레이시를 보고 여유롭게 웃는 엘라와 엘라의 웃음을 보고 눈살을 팍 찌푸리는 미네르바.
엘라는 레이시의 등을 살짝 끌어안으며 미네르바를 쳐다봤고 미네르바는 엘라의 행동에 이마의 핏줄을 세우며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손가락에 힘을 주더니 날카로운 손톱을 꺼내는 미네르바.
엘라는 참 알기 쉬운 협박이라며 미네르바의 손톱을 바라보다가 레이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신의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갔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손가락에 줬던 힘을 빼면서 투덜거렸다.
“치사하군.”
“난 기사가 아니고 마법사라서.”
“……흥.”
레이시가 누구의 주인이고 누구의 사람인지 확실히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결국 가장 소중한 건 레이시니까.
미네르바는 엘라와의 대결이 구조적으로 불리하다며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했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은 불편한 자세가 됐지만, 레이시의 배를 피해서 팔을 둘러 레이시를 끌어안고 자는 미네르바.
엘라는 잠들기 전에 자신에게도 날개를 건네주는 미네르바의 행동에 작게 웃다가 똑같이 눈을 감고 따사로운 햇살에 눈꺼풀을 감기 시작했다.
“어머…….”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미스트.
미스트는 레이시의 옷을 주문한 주문서를 가계부에 정리해두더니 작게 웃으면서 세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집안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쩌지…….”
세 사람이 저렇게 자는 건 아마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거 같은데…….
“으, 으으응…….”
자신의 손에 들린 국왕의 명령서를 곤란하다는 듯 바라보는 미스트.
국왕의 명령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미스트는 일단 레이시의 몸이 괜찮아지면 이야기하자고 생각하며 주방 청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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