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일상, 데이트, 일상3
* * *
엘라의 말을 들은 레이시는 발을 구르다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엘라를 손가락으로 찔러댔다.
차마 밀쳐내지는 못하고 손가락으로 찔러대는 레이시의 모습에 엘라는 한참을 키득키득 웃다가 레이시를 꽉 끌어안았다.
“우, 우웃…….”
“그래서, 나는?”
“네?”
“나는 좋아해?”
“그, 다, 당연하죠?”
“당연하다는 말은 싫은데.”
“……그럼.”
“나랑 똑같다는 말도 싫고, 내가 생각하는 만큼도 레이시가 생각한다는 말도 싫고, 여하튼 단어로 말하는 거 빼면 전부 싫어.”
레이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먼저 선수를 치며 레이시가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가 자신의 말문을 틀어막고 좋아한다는 말을 강요하자 입을 뻥긋거리다가 얼굴을 엘라의 몸에 파묻었다.
자신의 품에 안기는 레이시를 보고 다시금 웃는 엘라.
엘라는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레이시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레이시에게 작게 속삭였다.
“말 안 해줄 거야?”
“……그, 그게!”
“아아~ 레이시는 나 싫어하는구나? 하긴 너와 만나기 전에 이 사람, 저 사람 건들고 다녔으니 싫어해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요!”
“그럼 말해줘.”
“마, 말해줘야 해요?”
“레이시도 그렇게 물어봤잖아. 안 그래?”
이제는 부끄러움이라는 방패마저도 잡아 치우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행동에 너무하다며 울먹거리다가 엘라가 레이시가 먼저 하지 않았냐며 볼을 꼬집자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이 부분은 확실히 먼저 시작한 일이긴 하지…….
변명의 여지도 없는 일이라 레이시는 다시금 엘라의 몸에 얼굴을 파묻다가 샐쭉한 얼굴로 엘라의 몸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애교가 잔뜩 섞인 손가락질.
엘라는 기분 좋게 레이시의 애교를 받아주다가 충분히 즐긴 다음, 자신의 몸을 찌르는 레이시의 손에 깍지를 끼고 기다리고 있다며 속삭였다.
그러자 귀까지 새빨개진 레이시.
레이시는 엘라의 눈치를 보다가 엘라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입을 열었다.
“조. 좋아해요.”
얼굴을 몸에 파묻은 채로 속삭이는 거라 잘 들리지도 않고 소리도 작았지만, 확실하게 들리는 좋아한다는 말.
엘라는 레이시에게 수고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피가 쏠려 꽤 뜨거워진 레이시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킥킥!”
“우으으읏…….”
“자, 슬슬 도착할 거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레이시를 달래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봤고 이내 축구 경기장 크기의 정원이 실존하는 걸 보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어때? 지도대로 생겼지?”
“그러네요……. 실제로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킥킥! 그럼 가보자.”
마차의 문을 열면서 레이시의 손을 부드럽게 잡는 엘라.
레이시는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지 않아도 된다며 어색하게 웃다가 마부가 짐을 들고 따라오자 도시락을 들고 엘라의 옆에 섰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요.”
“짐 옮기라고 돈을 주는 건데……, 뭐, 도시락 정도는 괜찮으려나?”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 도시락의 다른 손잡이를 잡아주며 레이시와 발걸음을 맞추는 엘라.
조금 걷기 시작하자 금방 꽃이 가득한 정원에 들어가게 된 두 사람.
레이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엘라를 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곁눈질로 꽃을 보기 시작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눈길을 절로 뺏을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
엘라는 레이시가 자꾸만 자신이 아닌, 꽃을 보자 장난삼아 작게 한숨을 내쉬어봤고 레이시는 엘라의 한숨에 움찔 떨면서 엘라를 바라봤다.
데이트하는 건데 너무 꽃만 봤나?
레이시는 그런 생각에 엘라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거렸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키득키득 웃으며 도시락통을 혼자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곁눈질로 보면 제대로 못 보잖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보자.”
“에? 제, 제가 들게요.”
“응? 아냐, 괜찮아. 손이 편해야 제대로 볼 수 있잖아. 아까부터 손가락 꼼질거렸으면서.”
“엣!? 들켰, 아니, 그러니까…….”
“풉,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응?”
“그, 그게, 으, 으응……,……네.”
“다 들켰네요. 자, 마음껏 봐. 어차피 점심시간까지 시간은 남아있어.”
정원에 있는 시계탑을 가리키며 웃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겨 시계탑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다가 이내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쪼그려 앉아 꽃잎을 매만졌다.
꽃의 이름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예쁘네.
레이시는 예전에 봤었던 야생화와 눈앞에 있는 꽃을 비교하며 배시시 웃었고 엘라는 레이시의 웃음에 그렇게 꽃이 좋은 거냐며 레이시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볼 땐 과일 말고는 아무래도 좋은 것들인데.”
“에에~, 그래요?”
“응. 가끔 요리에 꽃이 장식되어 오기도 하는데, 꽃은 맛이 없더라고. 진짜 아무 맛도 없어. 향기가 살짝 날 뿐이지. 그런데 거기에다가 영양도, 포만감도 없잖아.”
“그래도 예쁘잖아요?”
“흐응…….”
레이시의 말에 비음을 흘리다가 그대로 꽃을 꺾어 레이시의 머리카락에 장식해보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엘라는 레이시가 당황하든 말든 계속해서 꽃을 꺾어 레이시의 머리와 뿔을 장식했다.
그리고 레이시가 엘라의 행동에 놀라 완전히 굳어버리자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네.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예쁘네.”
“예, 예쁘네가 아니라 꽃을 이렇게 따도 괜찮아요!?”
“으응? 뭐, 괜찮아. 그렇지? 정원사.”
“네, 괜찮습니다.”
“으, 으으…….”
“그러고 있어.”
레이시가 장식된 꽃을 건들려고 손을 올리자 레이시를 말리며 싱긋 웃는 엘라.
엘라는 자신을 믿지 않은 벌이라며 피크닉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 그렇게 있어 달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아래로 내렸다.
……만약에 이 꽃을 치우면 엘라는 꽃이 아니라 다른 무시무시한 짓을 하겠지.
거기에다가 기왕 꺾은 꽃이라면 이렇게라도 있는 게 더 좋을 거고…….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엘라의 손을 잡고 연못 한가운데에 세워진 정자까지 걸어갔다.
“후아……, 무릎베개해줘. 중간에 레이시가 부끄러워해서 일어났으니까.”
“……우으. 여기요.”
“흐아~ 좋다.”
“으응, 그렇게 좋아요?”
“응. 뭐랄까……, 기분 좋네.”
“아하하. 그게 뭐예요?”
설명하려고 했던 건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그냥 기분이 좋다며 웃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웃음에 똑같이 웃으면서 엘라의 손에 깍지를 끼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햇살도 기분이 좋고 일단 가볍게 낮잠을 잤다가 저녁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엘라? 네가 이 정원에는 무슨 일이냐?”
엘라에게 말을 건 사람은 이제 30대 초에 들어갔을 법한 건장한 남성.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그 남성은 레이시와 엘라를 번갈아 보더니 눈살을 확 찌푸리며 엘라에게 잔소리했고 엘라는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그 목소리에 천천히 일어났다.
“뭡니까? 볼케릭 오라버니. 여동생이 정원에서 메이드와 좋은 시간을 보내겠다는데.”
“남자에게 그런 걸 하고 있다면 모를까 네가 동성에게 그러고 있다는데 좋게 볼 수 있겠나? 이번에는 며칠 동안 안고 버릴 거냐? 네 행동이 왕가의 명성에 먹칠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걸 아직 모르는 거냐?”
“하하, 아버지도 제 성향을 허락해주셨는데 잘도 오라버니 따위가 말하네요.”
“뭣……?”
“못 들으셨나요? 볼케릭 오라버니 따위가 잘도 말한다고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저랑 엇비슷한 수준의 권력밖에 가지지 못한 왕족이라니, 너무 불쌍해서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네요. 그 하찮은 능력으론 제가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남매가 하는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벌한 대화.
자칫 잘못하면 주먹질도 오갈 수준의 대화 수위에 레이시는 당황하면서 엘라를 말렸지만, 엘라는 괜찮다면서 너스레를 떨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맨날 여자는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정작 자기 곁에는 얼굴 딱딱한 남정네 새끼밖에 없는 걸 보니 오라버니가 아니라 언니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머, 죄송해라. 여성으로서 배려가 부족했네요. 드레스라도 선물해드릴까요?”
“에, 엘라아아~.”
“아……,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동성애가 부끄러워서 가리고 계시던 건가요? 동생을 커튼으로 이용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무력도, 재력도, 매력도 부족한 오라버니.”
“류테인 백작이 쓰러졌다.”
“그게 누구인가요?”
“네가 협박한 백작이다! 백작은 자신의 딸을 위해서 말을 걸었을 뿐인데 그 대상을 협박하더니! 그것도 고작 메이드를 위해!? 왕족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라!”
“……고작, 고작이라.”
레이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거칠어지는 분위기.
엘라는 당장이라도 레이시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원에서 그들을 지워버릴 듯 살기를 내뿜었고 볼케릭과 그 주변인들은 이미 칼을 뽑아 들고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누군가 물방울을 떨어트리기만 한다면 그대로 폭발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레이시는 그런 분위기에 당황하며 눈물을 글썽였고 엘라는 레이시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며 레이시를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눈을 감고 뜨면 내가 모두 제압해둘 테니까. 괜찮지? 죽이는 게 아니라면.”
“싸우지 마세요. 네? 참아요오. 제발요. 네? 네?”
“에이~ 싸우다니. 저런 것들이 무기를 들고 덤비는 건 싸움하는 게 아냐. 내가 가지고 노는 거지.”
이미 이성을 잃었는지 레이시의 만류에도 마력과 살기를 철철 뿜어대며 볼케릭을 노려보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반응에 어쩔 줄 모르고 엘라의 몸을 잡았고 반대로 볼케릭은 칼에 쥔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라의 폭력이 볼케릭을 덮치기 직전, 누군가 가볍게 박수를 쳐서 엘라와 볼케릭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야트 오라버니. 헤에~ 별일이네요. 하루에 한 분 뵙기도 힘든 분을 두 분이나 뵙다니.”
“아하하, 엘라는 여전하구나?”
“흐흥~ 저야 뭐, 언제나 망나니, 짐승, 이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까요.”
“어라? 나는 엘라가 마법의 총애를 받는 흑마법의 공주라는 별명만 가진 줄 알았는데?”
볼케릭과 대화할 때와 다르게 꽤 편한 말투로 대화하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목소리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건 아이야트라는 왕자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며 울먹거리면서 쳐다봤다.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이대로면 엘라가 사람을 다치게 할 것을 걱정하는 눈빛.
아이야트는 그런 레이시의 눈빛에 엘라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메이드구나?”
“네에~ 사랑스러운 메이드죠. 부럽죠? 하지만 안 줄 거예요. 오라버니는 제 허락 없이는 대화하는 것도 금지라고요?”
“아하하, 외간 여자하고 대화했다간 부인한테 얻어맞을걸?”
“풉! 새언니는 잘 지내시나요?”
“응, 잘 지내고 있지. 참, 이번에 우리 와이프가 무도회를 열거든. 그래서 볼케릭에게도 참석하라고 말하려고 부른 건데……, 나쁜 일을 겪게 했네. 미안해.”
“잘못한 건 볼케릭 오라버니랍니다. 아이야트 오라버니가 아니라.”
“알아, 그래도 사과를 받아줬으면 좋겠네. 그리고 볼케릭. 너 또 엘라에게 여자는 뭐해야 한다느니 이야기했지?”
“하지만 아이야트 형님……!”
“왕가의 체면은 계승자가 챙기는 거지? 그리고 엘라는 계승자가 아니고. 그럼 우리가 엘라의 취향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닐까?”
“형님은 너무 무릅니다! 엘라, 저년은 대체가 왕가의 일원이라는 자각이 없습니다!”
“자각이 없다면 바쁜 우리를 대신해서 그렇게 많은 일을 처리하고 공을 적게 가져가진 않았겠지. 그렇지? 엘라의 도움을 받아두고 그렇게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크읏.”
계승 순위가 더 높은 아이야트가 엘라에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순간 볼케릭의 말은 힘을 잃고 여기에서 더 싸워봤자 아무런 이득도 못 얻는다.
그걸 알기에 볼케릭은 이를 갈면서도 얌전히 아이야트 뒤에 있던 집사가 건네는 초청장을 받아들었고 아이야트는 그런 볼케릭에게 어깨에 조금만 힘을 빼자며 웃었다.
그리고 볼케릭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뒤로 물러나자 아이야트는 품에서 초청장을 꺼내 엘라에게 건넸다.
“엘라야, 이건 무도회 초청장. 미스트도 데려오고, 옆의 메이드 씨도 같이 오세요.”
“새언니가 저를 부르신 건가요?”
“응.”
“후후, 그럼 가야죠. 그럼 이때 뵐게요.”
“그래. 잘 지내고. 자, 볼케릭은 가자!”
엘라의 말에 볼케릭을 데리고 정원을 빠져나가는 아이야트.
엘라는 두 사람과 그 추종자들이 떠나자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켰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를 보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흐어어엉! 싸, 싸우지 말자구 했자나요오오!”
“으앗!? 아, 미, 미안해! 하지만 볼케릭, 저 새끼가 먼저…….”
“흐아아아앙!”
“아, 아아아아아~. 잘못했어! 레이시를 욕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해. 응?”
레이시의 울음에 아까까지의 살의는 어디로 갔냐는 듯 당황하며 레이시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모습에 더 크게 울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레이시가 원할 때까지 다독여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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