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뭐든지 경험이 중요하다3
* * *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술 적당히 퍼마시고.”
저택이 보이는 곳에서 인사하는 집사.
엘라는 집사의 인사를 손을 휘휘 젓는 것으로 받아주더니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봤다.
옷에 얼룩이나 주름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몸에 어울리는지, 그리고 주변과 어울리는 옷인지 아닌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옷매무새를 다듬던 엘라는 10분 정도 흐르자 만족한 듯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런 엘라를 뒤에서 쳐다보던 아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엘라를 쳐다봤다.
“이게 뭔…….”
“왜?”
“아니, 진짜로 너 죽을 때가 됐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무섭게.”
“뭐가?”
“여자, 그것도 메이드를 만나는데 그렇게 옷 신경 쓰는 거 보면 진짜 네가 죽을 때가 다 됐다 싶어서 겁난다고.”
“그건 걔들이 내가 어떤 옷을 입어도 좋아하는 연기를 하니까 그런 거고.”
“레이시는 다르냐?”
“……흠, 아니? 레이시도 내가 무슨 옷을 입든 좋아해줄 걸?”
“…….”
“킥! 그냥 기분 문제라고 하자.”
아마 자신을 만나던 귀족가문의 딸내미들은 자기가 나체로 나와도 좋아하는 척 할 사람들이다.
귀족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들밖에 없으니까.
그런 생각에 엘라는 레이시를 만나기 전에 더러운 걸 생각했다며 가볍게 혀를 차면서 다시 저택으로 움직였고 아샤는 그런 엘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로 뭔가 잘못 먹었나?
친구끼리 머리가 잘못된 거냐고 물어볼 때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엘라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아샤.
엘라는 그런 아샤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면서 아샤에게 괜찮다며 손짓했다.
“그냥 내가 레이시가 좋아서 그래.”
“……와, 진심으로 기분 나빠졌어. 속이 메슥거리는 거 같은데, 토하고 와도 돼?”
“아니, 왜, 그렇잖아? 레이시는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내가 입는 옷에 따라서 다른 반응을 해주니까. 그게 기뻐서 옷을 차려입는 거야.”
“미안, 지금 이게 더 기분 나쁘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욕도 뱉지 않고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찬 칼로 손이 가는 아샤.
엘라는 그런 아샤의 반응에 킥킥 웃다가 다시금 저택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의 감촉이 없어지는 엘라.
하지만 그건 전쟁터에서의 피로 때문에 감촉이 사라지는 것과는 달랐다.
발이 푹푹 묻히는 게 아니라, 가슴의 고동이 너무 강해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느낌.
엘라는 아이처럼 들뜬 자신의 감정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기분을 느끼며 점점 빠른 걸음으로 레이시에게 걸어갔다.
아마 주변의 눈이 없었으면 달려가는 것으로 모자라서 마법으로 순간이동해서 레이시를 확 끌어안았겠지.
아샤는 그런 엘라의 모습에 중증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저 멀리서 기사단과 함께 말을 데리고 오는 류테인 백작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집사가 막았을 텐데 왜 무리해서 저러는 걸까?
아샤는 만약의 사태에는 말의 목을 베어버리자고 생각하면서 백작의 행동을 쳐다봤다.
곧바로 엘라에게 가는 류테인.
엘라는 레이시에게 가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류테인을 잠시 흘겨보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든 다음 레이시에게 갔다.
“다녀오셨어요? 다친 곳은 없고요?”
“마음이 다쳤으니까 안아줘.”
“아하하……, 진짜로 다친 곳은 없죠?”
“응.”
다른 사람들 앞에서 꽉 껴안고 있는 게 부끄러운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어색하게 엘라의 응석을 받아주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괜히 더 놀리고 싶어져서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레이시의 등을 더듬기 시작했다.
등을 쓰다듬다가 목과 귀를, 그리고 허리에서 엉덩이로…….
엘라는 과연 레이시가 어디쯤에서 반항할까 기대하면서 레이시의 몸을 만지작거렸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행동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다 엉덩이를 만질 때쯤 몸을 비틀었다.
“……우으.”
다른 사람들 앞이라 엘라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가만히 노려보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부르르 떨다가 레이시를 꽉 끌어안고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추며 애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잘 지낸 거 같네.”
“사람들 앞이니까 참아줘요…….”
“흐흥~ 싫어.”
“으, 으으으…….”
일방적인 애정표현.
그 모습에 수를 맞추기 위해서 차출된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엘라가 다른 귀족들과 사귈 때와는 다른 얼굴로 레이시를 안고 있다.
왕족의 연애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가십거리였는데 거기에 특이함까지 얹어지자 소곤거림은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레이시의 얼굴도 터질 듯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남들 앞에서 애정 표현하는 애인이 싫다는 사람이 있는 거구나…….
“사람들이 본다구요오오오…….”
“보여주는 거야.”
“싫거든요!? 부끄럽거든요!? 울 거예요!?”
“헤에, 나와 만난 게 그렇게 기뻐?”
“으으으……! 그만 놀려요오오오!”
있는 힘껏 부끄러움을 참다가 이내 소리를 지르며 부끄럽다면서 엘라의 볼을 꼬집고선 엘라에게 잔소리하는 레이시.
엘라는 얼굴을 붉힌 채 투덜거리는 레이시를 보고 작게 웃다가 아쉽다는 듯 마지막으로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반성의 의미와 반가움의 의미가 뒤섞인 입맞춤.
가볍게 맞닿고 떨어졌지만, 레이시는 한참을 굳어있다가 앓는 소리를 하면서 엘라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아하하, 그럼 돌아갈까? 가서 그동안 뭐 했는지 말해줄게.”
“으으……, 네.”
“점심은 준비해뒀습니다.”
“아, 고마워. 신경을 안 썼네. 너도 별 일 없었지?”
“뭘요. 이해하고 있답니다.”
엘라의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준비된 것의 목록을 말하는 미스트.
저택으로 돌아가면 그대로 누워서 하고 싶은 걸 해도 될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엘라는 미스트에게 수고했다면서 자신의 코트를 미스트에게 건네줬다.
이걸로 자신은 공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서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말하듯 움직였지만, 안타깝게도 류테인 백작에겐 그게 말을 걸어도 된다는 신호로 보였는지 앞서가는 엘라에게 말을 걸었다.
“저, 공주님!”
“으응……?”
그런 류테인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 엘라.
엘라는 자신의 신호가 안 보였나 싶어 한숨을 내쉬다가 궁정 매너에 대해서 모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류테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시종과 기사들에게 용혈마를 데리고 오라고 말하는 류테인.
류테인은 엘라에게 자신의 딸 아이와 언제쯤 다시 만나줄 수 있는지 물어보며 엘라에게 용혈마를 선물로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서 선물이지 그게 뇌물이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사실이었고, 엘라는 하다 못해서이제는 자신을 창녀처럼 보는 거냐며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다.
“제 딸 아이가 상사병에 걸린 듯 매일 앓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말을 타시고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잘 모르겠는데. 이제부터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 부분을 부디 어떻게든!”
“하아아아, 이미 다른 여자들도 그렇게 말했는데……. 미스트, 그동안 편지를 보낸 영애들이 있었던가?”
“네, 전부 보관하고 있습니다.”
“리스트를 적어서 류테인 백작에게 건네줘.”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다 다른 귀족들을 이용해서 압박하기로 하고 미스트에게 명령을 내리는 엘라.
미스트는 엘라의 명령에 종이 가득 가문의 이름을 적어 류테인에게 건네줬고 류테인은 그런 종이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자신의 영지에선 왕과 같은 권력을 부릴 수 있는 공작부터 시작해서 후작, 백작이 가득한 종이.
자신이 이런 말을 한 마리 바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류테인은 입을 뻥긋거리며 엘라를 쳐다봤다.
그러자 피식 웃으면서 레이시의 등을 받치며 저택으로 가는 엘라.
류테인은 지금 여기에서 놓치면 정말 안 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용혈마의 고삐를 잡고 엘라에게 가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용혈마를 자극하고 말았다.
용종의 피를 물려받아 생긴 폭력성과 말 특유의 예민함이 합쳐지자 용혈마는 크게 소리를 내면서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고 류테인과 그 기사들은 당황하며 말을 붙잡기 시작했다.
그냥 죽이는 거라면 어렵지 않지만, 지금 이 말은 엘라에게 바칠 말.
거기에다가 이 정도 거리라면 저택에서 피 냄새를 맡을 수도 있었기에 어떻게 하지 못했고 용혈마는 그런 기사의 행동에 더욱 날뛰다 그대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한숨을 깊게 내쉬는 엘라.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그렇게 생각하며 용혈마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준비를 하던 엘라는 레이시가 놀란 얼굴로 뛰쳐나가 말 위에 그대로 올라타자 흠칫 떨었다.
“우왓!? 메, 멜리아 씨! 사람 데리고 도망쳐요!”
“헤에……?”
“말했잖아, 스위치 만들고 있다고. 저 정도 용기는 생긴 모양이네.”
“그러게.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성장했네……. 뭔가 아쉬운데…….”
전 같았으면 무섭다고 숨었을 건데 오히려 말에 올라타 말을 진정시키려고 하다니, 꽤 배짱이 붙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모으던 마력을 허공에 흩날린 다음 레이시의 모습을 감상했다.
용혈마의 위로 올라탄 레이시는 우선 사람들에게 돌진하지 못하게 고삐를 한쪽으로만 세게 잡아당겨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말은 등 뒤에 있는 레이시가 방해라며 앞발과 뒷발을 차례대로 크게 들었다가 땅을 찍으며 레이시를 떨어트리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등자가 있다고 해도 기승 관련 스킬이 없는 레이시에게는 꽤 버거운 움직임.
하지만 레이시는 야차 특유의 힘으로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버텼고 덕분에 몸이 크게 요동쳐도 떨어지지 않고 용혈마의 고삐를 계속해서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용혈마는 위, 아래로 움직이는 건 안 통한다고 생각하고 붉은 땀을 흩날리며 목을 반시계 방향으로 빙글 돌렸다.
갑작스럽게 변한 힘의 방향.
기승 스킬을 가진 기사라고 해도 제대로 버틸 수 없는 그 행동에 류테인의 기사들은 레이시의 미래를 예상하며 탄성을 질렀다.
저 상태라면 그대로 낙마하고 용혈마의 의해서 저 메이드의 머리가 땅에 박혀 으깨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날아가겠지.
그렇기에 기사들은 다급하게 말이 낙마한 레이시를 지키기 위해서 앞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기사들의 걱정을 불식시키듯, 레이시는 들려진 오른쪽 다리를 말의 목에 걸고 몸을 회전시켜 빙글 돌아 다시 말의 등에 올라탔다.
“후극, 후극……, 후우윽…….”
긴장감 때문인지 빠르게 숨을 몰아쉬는 레이시.
용혈마는 레이시의 호흡에 꽤 지쳤다 싶었는지 숨을 고르다 다시 한번 하늘 높이 앞발을 들었고 레이시는 자신의 몸이 뒤로 들리자 이를 꽉 깨물며 허리춤에 채워뒀던 채찍을 꺼내 용혈마의 입에 물렸다.
“이익……!”
사람들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졌고, 기사들도 칼을 뽑은 걸 보면 상처를 입혀도 상관없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손바닥의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힘을 주며 고삐를 강하게 틀었다.
그러자 목이 한 쪽으로 급하게 꺾이며 무게 중심을 잃어버리는 용혈마.
아무리 용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해도, 목을 제압당한 이상 평범한 말과 다른 점이 없었기에 용혈마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으갹!”
그리고 동시에 용혈마에게 깔리지 않기 위해서 땅을 데굴데굴 구르는 레이시.
멜리아는 그런 레이시를 보고 다급하게 레이시에게 달려갔고 레이시는 옷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멜리아를 보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괜찮은지 물어봤다.
“안 다쳤죠?”
“바보야, 나한테 할 말이…….”
그런 레이시의 웃음에 레이시가 다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웃는 멜리아.
하지만 멜리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자 멜리아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고 레이시는 그런 멜리아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똑같이 시선을 아래로 움직여봤다.
그러자 보이는 건 흙바닥에 고일 정도로 많은 피.
땅에 흡수되지도 않고 고여있는 작은 피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고 레이시는 자신의 하반신을 적시고 있는 피를 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응? 에? 에에?”
멜리아도 다치지 않았고 내 몸에도 이렇게 피가 흘러나올만한 상처는 없는데?
낙마도 제대로 안 다치게 낙법을 치며 데굴데굴 굴렀으니까 뼈도 안 부러졌을 텐데?
그런데 왜 피가 계속 이렇게 흐르는 거지?
피 특유의 악취에 눈을 깜빡이며 한참이나 자신의 하반신을 보는 레이시.
그러다가 멜리아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다리를 가려주자 그제야 레이시는 현실을 인식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엄마는 이렇게 피를 많이 쏟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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