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뭐든지 경험이 중요하다1
* * *
“이제 화 풀어요. 네?”
“…….”
“으응, 미안하다니까요~. 언제까지 그렇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실 생각이에요? 저 외로운데…….”
“우, 우우우……! 그, 그으으……!”
침대에 누워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레이시를 달래주는 미스트.
하긴 마지막에는 맨정신임에도 그런 걸 강제로 하게 만들었으니 화를 낸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미스트는 쓰게 웃다가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춘 다음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귓속말을 속삭이며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레이시는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가 간지러운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얼굴을 베개쪽으로 돌렸다.
삐져도 단단히 삐진 모습.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다시금 씁쓸하게 웃다가 이내 레이시가 자신의 손 위로 손을 포개어놓자 키득키득 웃으면서 레이시를 꽉 끌어안았다.
“씨이잉…….”
그리고 레이시는 그런 미스트의 행동에 일부러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하듯, 어린애가 화났다는 걸 표현할 때 내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화가 풀린 건 아니다.
그런 부끄러운 꼴을 당했는데 그렇게 금방 화를 풀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도 오늘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화가 나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느끼고 있어도 미스트가 애교를 부리자 입꼬리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로 올라가고 싶어서 움찔거린다.
분명 화가 나고 있는데, 어째선지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차라리 애증이 느껴진다면 어떻게든 이해할 텐데, 화가 났는데 행복하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두통이 살살 올라오자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는 듯 미스트의 손에 깍지를 끼고 베개에 고개를 아예 파묻어버렸다.
덕분에 숨쉬기가 조금 불편해졌지만, 차라리 갑갑한 게머리가 아픈 것보다는 몇 배나 낫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더욱 깊게 파묻어버리는 레이시.
“아직 화났어요? 제가 죄송해요, 네? 이 쪽 봐주세요. 사과할게요.”
“으, 으으으……! 몰라요!”
그렇게 레이시가 어떻게든 미스트의 시선을 피하고 있자, 레이시에게 계속해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줄 때처럼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러자 레이시는 이제 마음껏 투정 부려도 된다는 생각에 괜히 소리를 높이며 짐짓 화낸 척했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연기를 꿰뚫어 보고는 어울려주었다.
이런 귀여운 연기라면 몇 번이고 어울려줘도 나쁠 건 없으니까.
사과라면서 레이시를 끌어안고 다시금 볼에 입을 맞춰주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부드러운 입술이 자신의 뺨에 닿자 얼굴을 붉히며 발을 버둥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져서 슬쩍 미스트를 흘겨봤다.
그러자 미스트는 자신을 용서해줄 마음이 들었냐며 눈웃음을 지었고 레이시는 미스트의 눈웃음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베개에 파묻은 채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레이시.
미스트는 레이시의 어린애 같은 화해의 손길에 기쁘다는 듯 웃으면서 레이시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깍지를 꼈다.
처음에는 손가락끼리 맞닿았다가 점점 닿는 면적을 넓혀가는 미스트.
레이시는 손바닥으로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한숨을 깊게 내쉬다가 몸을 돌려 미스트와 눈을 마주쳤다.
각오를 잔뜩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마주치자 곧바로 붉어지고 계속해서 풀어지는 얼굴.
레이시는 그런 자신의 반응이 부끄러워 잠시 발을 굴리다가 이내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미스트의 손바닥을 자신의 엄지로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미스트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미묘한 얼굴로 레이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기쁜 듯하면서도 당황한 것 같기도 하면서,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
레이시는 미묘한 미스트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미스트는 대답 대신에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올렸고 레이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미스트에게서 손으로 옮겨졌다.
“으응…….”
“……깍지 끼는 거, 싫어요?”
레이시의 말에 작게 신음하는 미스트.
미스트는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고민했을 뿐이지만, 레이시는 미스트가 진지한 얼굴로 신음하자 움찔 떨면서 미스트의 눈치를 살펴봤다.
미스트가 깍지 끼는 걸 싫어하는 거라면 투정을 너무 부린 걸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레이시는 조심스럽게 깍지를 풀면서 미스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스트는 레이시의 행동과는 정반대로 레이시의 손을 꽉 잡으며 깍지 끼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했을 뿐이라고 말헀다.
딱 보니 레이시는 방금 그 행위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한 것 같은데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면 놀라지 않을까?
……그만큼 재미는 있겠지만.
생각의 흐름이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자 미스트는 잠시 이성과 본능 쪽에서 고민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본능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시, 제 손바닥 간질인 거요.”
“네?”
“그거 연인끼리 잠자리를 가지자는 신체적인 은어 같은 건데……, 부족했다면좀 더 해드릴까요?”
“헤……?”
“후후, 레이시가 부족하다고 조를 줄은 몰라서 살짝 놀랐어요. 그거로는 조금 부족했나요?”
미스트의 말에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미스트의 얼굴을 바라보는 레이시.
레이시는 뇌가 완전히 정지했는지 처음 한 10초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미스트를 바라만 봤다.
하지만 패닉이 완전히 지나가고 나자 레이시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선 당황한 듯 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딱 예상한 만큼의, 아니, 그것보다 훨씬 귀여운 반응을 보여주는 레이시.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농담이라며 레이시를 안아주었다.
“우, 우읏……, 어느 쪽이요……?”
“한 번 더 하자는 거요. 손바닥 간질이는 건 정말로 그런 은어이니 조심해주세요.”
“…….”
차라리 앞의 쪽이 농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레이시는 몰려오는 수치심에 잠깐 그렇게 생각하다가 미스트가 옷장에서 새로 옷을 꺼내 입기 시작하자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저, 미스트, 큰일 났어요.”
“네?”
“제가 입을 옷이 없어요.”
미스트의 방에 오기 전, 드레스룸에 모든 옷가지를 벗은 채 왔단 사실을 떠올린 레이시.
당연한 사실이지만, 레이시의 옷은 레이시의 방에만 있었다.
……큰일이다.
다시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정도로, 큰일이다.
레이시는 이대로라면 자신이 또 알몸으로 저택을 활보하다 자신의 방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미네르바에게 덮쳐질 거라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라면 분명히 ‘이런 모습으로 온 건 허락한다는 거겠지?’라면서 자신을 침대 위로 넘어트릴 게 틀림없다.
특히 이번 주는 안 했으니까 망설임도 없이 넘어트리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고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을 보고 킥킥 웃으며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자, 여기 이 옷은 맞을 거예요.”
“네?”
“레이시가 바지만 입는다고 해서 못 준 옷이거든요.”
“…….”
“어떤 게 좋아요? 롱 스커트? 아니면 미니?”
“롱 스커트로……, 부탁드립니다.”
왜 미스트의 옷장에 자신의 몸에 맞는 스커트가 있는 걸까?
레이시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미스트가 자신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보여주자 입을 다물었다.
하나는 허벅지의 중간까지 오는 스커트에, 나머지 하나는 종아리를 절반 정도 가려주는 스커트.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선택지였기에 레이시는 롱 스커트를 가리켰고 미스트는 그럴 줄 알았다며 환한 미소와 함께 옷을 건네주었다.
……가게에서 골랐던 치마를 입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치마는 입어도 아래가 헐렁하구나.
옷을 입긴 입었는데, 옷을 입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 레이시는 얼굴을 붉히며 긴 치맛자락을 아래로 내려 안 그래도 보이질 않을 자신의 맨다리를 가리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단추 풀리면 엉덩이가 보일 거예요.”
“으으윽!”
“우후후, 뭐, 저는 그래도 좋지만요.”
“미스트으으으으으~!”
“네네, 농담이에요. 죄송해요. 그럼 슬슬 저녁 준비할까요? 아……, 그리고 그 전에 이거 확인해보셔야죠.”
“네?”
레이시의 반응을 보고 즐기다가 기껏 가지런하게 맨 넥타이를 다시 푸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미스트의 목에 남은 자국을 보고는 작게 탄성을 지르다 얼굴을 붉혔다.
새하얀 피부에 피어난 울긋불긋한 작은 열꽃.
남들이 보면 단순한 멍에 불과하겠지만, 레이시에게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열꽃이었다.
“후후, 다시 응석을 부리시는 거예요?”
“우으으으…….”
“그럼 저녁 준비하러 갈까요?”
키스마크를 보자마자 품에 안기는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싱긋 웃는 미스트.
레이시는 미스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미네르바를 부르러 방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 당연하다는 듯 레이시를 꽉 끌어안고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미네르바.
“……갑자기 생겼다는일이라는 건 뭐지? 내가 도와줄 수 없는 거였나?”
“아, 으응……, 다음 주에 엘라가 와서 그거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런가…….”
“싫어요?”
“당연한 걸 물어보지 마라.”
날개를 작게 퍼덕이면서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질투에 어색하게 웃다가 미네르바를 꽉 안아주었다.
그러자 어떻게든 질투심을 정리했는지 미네르바는 조심스럽게 레이시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네르바의 키가 훨씬 커서 자연스럽게 허리가 아픈 자세가 되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레이시를 끌어안는 미네르바.
그렇게 미네르바는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레이시의 몸을 꽉 껴안고 있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앗…….”
“……저녁 먹기 전이라 안 되나?”
“그, 그것도 그렇지만……. 이번 주만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엘라 때문인가?”
“으응, 그것도 있고요.”
정확하게는 뭔가 몸이 무거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뭔가 할아버지의 농사일을 잔뜩 도와주고 앓아누웠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든다.
지금 당장 아프지는 않지만, 며칠 내로 크게 아플 것 같은 느낌.
이 몸이 되고 나서는 전생에서 할 수 없었던 운동을 하고도 개운했는데 대체 뭐가…….
레이시는 잠시 자신의 몸에 걸리는 감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미네르바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자신을 껴안자 어색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미네르바를 달래주었다.
“주인의 냄새는 더 좋아졌는데…….”
“엑……, 내, 냄새요?”
“좀 더 내 취향이 된 거 같다.”
레이시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비비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대답에 다급하게 자신의 팔을 들어 몸에서 냄새가 나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레이시의 몸에서는 비누 냄새밖에 나지 않았고, 레이시는 그런 자신의 체취에 비누 향기가 강해졌나 싶어 어색하게 웃었다.
미스트의 입욕제로 거품 목욕이라는 걸 난생 처음 해봤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화들짝 놀라 체취를 맡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고 미네르바는 부끄러워하는 레이시의 모습에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람의 냄새를 맡으면 안 됐던 걸까?
책에서 봤었던 정보를 떠올린 미네르바는 레이시에게 신경 쓰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레이시는 미네르바의 사과에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냥 제 몸에서 냄새가 나나 확인한 거 뿐이에요. 그럼 내려갈까요?”
“알았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안심.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미네르바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미스트를 도와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커다란 냄비에 뭔가 팔팔 끓이고 있는 미스트.
레이시는 그게 오늘의 저녁이냐며 접시를 꺼내며 미스트에게 물어봤고 미스트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건 소스용 육수, 그리고 이건 수프를 준비할 때 쓰는 육수에요.”
“에…….”
“오늘 저녁은 미리 주문해뒀으니까 금방 올 거예요.”
“그렇구나…….”
“죄송해요. 오늘만 이렇게 해요.”
“으응, 괜찮아요.”
“나는 싫다. 모르는 인간의 밥을 먹긴 싫다.”
“아, 아하하……. 제가 먹여드릴게요. 그래도 싫어요?”
“…….”
아마 엘라를 위해서 미리 저녁을 준비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투정을 부리는 미네르바에게 자기가 밥을 먹여주겠다면서 미네르바를 달래주었다.
그러자 가만히 레이시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레이시를 끌어안는 미네르바.
레이시는 왜인지 모르게 평소보다 미네르바가 무겁다고 생각하면서 미네르바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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