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왕궁 생활의 시작2
* * *
“어때?”
“미스트, 혹시 엘라에게 쌍둥이 자매가 있었나요?”
“아뇨? 이분은 레이시도 잘 알고 있는 엘라 파우스트 오라토리엄 공주님이세요.”
“……거짓말!? 아예 사람이 바뀌었는데요!?”
“말했잖아, 공주로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서는 제대로 공주의 역할을 한다고. 태자 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인간이라고 해도 왕가의 일원으로서 이것저것 지키라고 시끄럽게 굴거든.”
“어, 어어.”
“그나저나 그 반응이면 내기는 내가 이겼네. 킥킥, 새로운 초커를 사러 가지 않으면 안 되려나.”
“으앗!? 아, 아니거든요! 안 졌어요!”
“흐응? 정말?”
“…….”
“나, 레이시가거짓말 하면 슬플 거야.”
“……졌어요.”
미네르바의 날개를 덮고 한참 잠을 자고 있던 레이시.
어떻게든 모자란 잠을 보충하던 레이시는 미스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잠에서 깨서 문을 열었다가 얼굴만 익숙한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라와 얼굴은 완전히 똑같은데 분위기는 완전히 반대인 사람.
레이시는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다가 미스트에게 귓속말로 엘라가 쌍둥이었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의 질문에 빵 터지고 말았다.
내기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무시할 줄은 알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방법으로 내기를 피하려 하다니.
엘라는 귀엽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한 레이시의 대답에 한참을 웃다가 그림자로 레이시의 목을 묶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자신의 목을 묶는 그림자에 다급하게 자신은 내기에서 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시간이 안타깝다며 웃다가 레이시의 볼에 입을 맞추며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러자 레이시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아래로 숙였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능글맞게 웃다가 이번에는 입술에다 입을 가볍게 맞추며 얼른 알현실에 가자고 말했다.
“우선 알현실에서는 내 뒤에 서서 따라오면 돼. 다른 곳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나나 미스트만 바라보고. 미네르바는 레이시의 뒤에서 레이시를 지키듯 따라가. 인사해야 할 때가 생기면 미스트가 머릿속으로 말을 걸 거야. 그거에 따라서 움직이면 돼.”
“……네, 기억했어요.”
“후후, 그렇게 긴장하지 마.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으으응…….”
“흐음,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볼까?”
“네?”
“그냥 상견례하러 간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런 말 하면 더 긴장되잖아요.”
“킥킥!”
엘라가 무슨 말을 해도 결국에는 긴장하겠네…….
엘라의 웃음에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도움을 요청하듯 미스트를 바라봤고 미스트는 싱긋 웃으며 그렇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매번 정기적으로 하는 보고에 레이시 양과 관련된 일을 추가로 말 할 뿐이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셔도…….”
“후후, 평소처럼 있으세요. 그래도 괜찮은 자리니까요.”
하지만 엘라에 이어 미스트도 그다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지 않자 레이시는 한숨을 내쉬면서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전생에서 알바 면접을 볼 때도 긴장했었는데, 대통령과 똑같은 한 나라의 국왕과 만나는데 긴장을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레이시는 숨을 깊게 내뱉으면서 엘라와 함께 알현실에 들어갔고 수많은 귀족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늦었구나.”
“네,늦었네요. 근데 어차피 딱히 특별히 하는 말도 없는데 정시에 도착해야만 하나요?”
“……그럼 정기보고회를 시작하지.”
그리고 그런 레이시의 긴장감은 엘라에게 말을 건 사람을 보자 극에 달했다.
차마 고개를 들기 어려울 정도의 느낌을 풍기는 노년의 남성.
레이시는 국왕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눈을 깔고 미스트의 옆에서 숨을 죽이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귀엽다는 듯 웃다 국왕을 바라봤다.
“국왕님께서 지시한 3명의 특수 범죄자, 8개의 도적단과 14마리의 몬스터를 처리했습니다. 덤으로 자잘한 민원도 처리했고, 왕가에게 반기를 든 머테리아 후작의 삼족을 멸했습니다. 보고에 대한 증거는 모두 보냈고 받았다는 수신도 받았습니다.”
“수고했다.”
“네.”
“그렇다면 그 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너도 알겠지만, 너는 태자나 다른 후계자가 아니다. 그렇게 많은 공을 세우면 안 되는 입장이지.”
“…….”
“이번엔 누구의 공으로 돌리겠느냐?”
“돌리고 싶지 않군요.”
엘라의 말에 크게 술렁이는 귀족들.
이때까지 다른 사람의 공으로 돌리고 그 대가로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엘라였기에 귀족들은 엘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황했다.
하지만 엘라는 그런 귀족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국왕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말을 이어갔다.
“제 공으로 삼고 싶습니다.”
“……흐응, 그 이유는 뭐지?”
“저도 슬슬 제 집을 가지고 싶네요. 선대 국왕이 수도 내 별장으로 사용했었던 그 저택을 원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제가 스카우트한 경외의 야차도 그 저택에 머물게 하고 싶군요. 그동안 제가 했던 일들의 대가로는 정말로 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거라면 밖의 저택이 있을 텐데 굳이 새 저택을 원하는 건?”
“거기는 원래 지어지길 다른 귀족들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지 생활하는 곳이 아니죠. 그럼에도 제가 참았던 이유는 저는 수도에 오래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슬슬 그런 생활도 질려서 집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선대 국왕의 별채를 제게 하사해주셨으면 합니다.”
“무, 무례합니다! 엘라 파우스트 공주! 선대 국왕의 자녀분들이 버젓이 보고 계신데 그걸 달라니……! 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저도 제가 자비로 처리하던 일들을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왕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순서가 맡지 않더라도 제 재량껏 백성들을 위해서 일해왔습니다만, 당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앞으로는순서를 지키도록 하죠.”
“그것은……!”
“순서가 중요하니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저야 제 사람을 제외하면 죽든 살든 신경도 안 쓸 수 있습니다만?”
“혹시 그 뒤의 야차 때문에 그런 겁니까!? 여자 때문에 무리한 부탁을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십쇼!”
“하! 시끄럽습니다. 어차피 제가 남자를 좋아했다고 해도 다른 나라의 왕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생각을 하고 계셨을 것 아닙니까? 뭐, 임신도 못하는 여자에게 자식을 팔 왕족이 있다는 전제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그런 불경한 소리를!”
“불경한 건 저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든 당신이 불경한 겁니다. 얼굴도 모를 정도로 별 중요하지도 않은 귀족 주제에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어차피 옆에 있는 볼르도르 공작이 시켰겠지만요.”
“그만해라, 엘라.벡 백작도 그만하시게.”
“……죄, 죄송합니다.”
자신과 국왕의 대화 사이에 끼어든 귀족을 보면서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는 엘라.
엘라는 마음만 먹는다면 곧바로 존재 자체를 지워주겠다는 듯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고 국왕은 그런 엘라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중재했다.
엘라가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건, 지금 이 일이 매우 개인적인 감정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협박이었다.
그동안 다른 남매들에 비해서 싼 가격에 얌전히 말을 잘 들어주고 있으니 이번에는 원하는 걸 내놓지 않으면 그대로 엎어버리겠다는 협박.
엘라가 해왔던 일을 생각해보면 야차 한 명과 예술적 가치도, 금전적 가치도 적은 선왕의 별채 한 채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그 뒤의 야차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신다면?”
엘라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나오는 일은 무척 드물었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국왕.
아름답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영애들이 매달려도 감정적으로 변하지 않고 그저 육체 관계만 즐겼던 자신의 딸이 왜 저런 귀엽기만 하고 특이할 게 없는 야차에게는 진심이 된 걸까?
국왕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한 느낌에 가만히 레이시를 쳐다봤다.
그러자 엘라는 레이시를 가리듯 몸을 움직인 다음 국왕을 노려봤고 국왕은 그런 엘라의 모습에 피식 웃다가 귀족들을 보고는 헛기침과 함께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네가 이번 공로를 직접 원하는 건 그것들을 얻기 위한 명분이로군.”
“네, 돈이나 장신구, 술과 여자와의 데이트 같은 건 명분이 없어도 괜찮지만, 이번에 제가 요구한 건 명분이 없으면 귀찮아질 테니 말이죠.”
“그 뒤의 야차가 말이지.”
“…….”
“뭐, 좋다. 이번 일은 네 공으로 인정하고 네가 원한 것들을 들어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 야차는 테이밍 스킬을 가진 것 같으니 사냥개도 하사하도록 하지. 대신 일은 제대로 해라.”
“제가 일을 대충 처리한 적이 있던가요?”
“아비로서 으레 하는 말이다.”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제 메이드에게서 눈을 떼주셨으면 하는군요. 남자의 시선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라서 말이죠…….”
이제는 한술 더 떠 대놓고 질투까지 표현하는 엘라.
국왕은 그런 엘라의 모습에 놀랍다는 듯 엘라를 쳐다보다가 알겠다며 30분만 기다리라며 엘라를 다른 방에 보냈다.
그러자 엘라는 레이시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알현실을 빠져나갔고 레이시는 다른 방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엘라를 쳐다봤다.
“응? 왜?”
“왜라뇨!? 그, 그렇게 싸워도 괜찮은 거예요!? 국왕님이랑 귀족들이잖아요!?”
“싸우다니, 그런 건 그냥 말다툼 수준이야. 아마 내가 공으로 뭔가 얻으려고 하는 게 싫었던 거겠지.”
“네?”
“보통 공을 대충 돈만 받고 다른 왕자나 공주에게 돌렸거든. 귀족들과 국왕이 의논해서 그 공이 누구 걸로 할지 정했고. 그런데 갑자기 이번 토벌 건의 공을 내가 가지겠다고 했으니 짜증 났겠지.”
“그런…….”
엘라의 말에 아연실색하는 레이시.
레이시는 아까의 싸움이 영 어이가 없었는지 한참이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응?”
“엘라가 한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하기 위해서 돈으로 엘라를 유혹하다 이번에 그게 안 통하자 그렇게 화낸 거라고요? 정말요?”
“응. 왜 그래? 이상해?”
“이상하죠……. 엘라가 한 건데…….”
“킥킥, 괜찮아. 괜찮아.”
레이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스킨십에 조심스럽게 뺨을 부비적거리다가 엘라에게 괜찮은 거냐고 물어봤고 엘라는 레이시에게 괜찮다며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었다.
“레이시는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이런 일은 내게 익숙하니까.”
“으응……. 정말이죠?”
“그래. 방금도 말투는 좀 험악했지만, 금방 이야기가 끝났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레이시는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훈련에 집중해. 이번에 야차를 데리고 올 텐데 그 녀석에게 배우면 돼.”
“네.”
“……아직 일하러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떨어지기 싫네.”
“…….”
“아아, 한심한 눈으로 보지 마. 이번 일은 빡셀 거란 말이지……. 전투는 없겠지만, 신경전이라든가 그런 힘든 일이 일어날 거야.”
“……그래요?”
“응, 안아줬으면 하는데. 레이시의 가슴에 코 박고 자고 싶어.”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말은 좀 자제 해주세요…….”
“해줄 거지?”
“…….”
엘라의 말에 한숨을 내쉬면서 엘라의 얼굴을 가슴으로 끌어 당기는 레이시.
이미 반쯤 자포자기한 레이시의 얼굴에 엘라는 웃음을 터트리다가 조용히 눈을 감고 레이시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아아……, 일하기 싫다.”
“저도 열심히 할 테니까 엘라도 열심히 하라고요.”
레이시의 목에 입을 맞추다가 다시 한번 레이시의 입술에 입술을 겹치는 엘라.
버드 키스를 몇 번인가 반복하던 엘라는 레이시를 꽉 끌어안고 어리광을 피우기 시작했다.
“후우, 일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네.”
“아하하…….”
“레이시.”
“네?”
“사랑해. 내가없는 동안에도 나 기억해줘야 해?”
“엘라는 잊고 싶어도 잊기 힘들거든요?”
“쿡쿡, 그것도 그런가…….”
이번에는 키스하다가 레이시의 입술을 약하게 깨물고 다음 자리에서 떨어지는 엘라.
잠시 후, 수속이 끝났다며 사람이 오자 엘라는 레이시의 손을 잡고 새로운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