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데이트2
* * *
“도착했네요.”
“……아.”
미스트의 말에 고개를 드는 레이시.
고개를 들자 엘라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성벽 위에 아예 마을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의 웅장한 성벽이 보였지만, 레이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러자 미스트는 못 말린다는 듯 일부러 앞으로 가는 엘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국왕님껜 제가 말해서 하루 정도의 시간을 벌어두겠습니다. 공주님.”
“……그래.”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반응에 고개를 살짝 숙이다가 성문을 지나고 수도 안으로 들어오자 다시 고개를 들고 엘라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살짝 가져갔다가 엘라의 눈치를 보며 잡는 손.
약간 따뜻하고, 굳은살이 조금 배겨 있는 손의 감촉에 레이시는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전투를 가르쳐주면 어떻게든 자신을 따라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미스트와 자신이 번갈아가면서 지켜준다면?
하지만 그런 방법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엘라는 자신이 터무니없는 상상만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적은 폐위된 왕자, 블루드.
블루드는 태자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왕족을,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자신을 죽이고 세력을 흡수하면 다른 왕자나 공주들과 싸울 수 있는 정도가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엘라는 블루드가 마을을 통째로 지울 각오로 군대를 보내 자신을 습격했을 때를 상정했다.
그 때 자신은 레이시를 지켜줄 수 있을까?
그건……, 100% 확신할 수 없다.
눈먼 화살에 있고 암살자도, 독도 있다.
아니, 그런 개인적인 공격이라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공성 병기 같은 걸 끌고 와서 혼란, 혼전을 유도한다면 레이시가 알아서 도망쳐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레이시는 끔찍한 꼴을 당하거나 죽고 말겠지.
그런 생각에 엘라는 다시 한번 떨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레이시를 쳐다봤다.
“그럼 우린 따로 놀다 들어갈게.”
“네, 공주님.”
“……그래서, 어디로 가볼까?”
자신의 손을 약하게 잡고 있는 엘라의 손을 꽉 잡고 물어보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가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자 놀란 듯 엘라를 쳐다보다가 이내 모르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의 속도를 천천히 낮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엘라는 그럼 자신이 에스코트하겠다면서 도시 안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가고 싶은 곳 있어?”
“우선 걷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수도는 넓어서 걸으면 피곤할 텐데.”
“그래도요.”
엘라의 손을 꽉 잡으면서 말하는 레이시.
손바닥에 식은땀이 흐르자 엘라는 잠시 레이시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근처에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구간에 가서 말을 맡겼다.
레이시는 말에서 내려오자 이번에는 공원에 가보고 싶다며 엘라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근처 공원이라면 여기네.”
“엘라는 와본 적 있어요?”
“아니, 지도 보고.”
“아……. 정말이다.”
“풉, 바보 같네.”
“으으……. 모를 수도 있죠.”
엘라는 레이시를 가볍게 놀리며 작게 웃었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웃음에 샐쭉거렸다.
자기를 놀리지 마라며 투덜거리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이번이 마지막 데이트가 될 거니 최대한 레이시에게 맞춰주기로 하고 움직였다.
“간식 좀 먹을래?”
“네, 부탁할게요.”
그리고 그런 엘라의 움직임에 레이시는 불안감을 느꼈다.
갑자기 친절해진 게 꼭 자신과 헤어지려고만 하는 것 같다.
그런 생각에 레이시는 엘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서 엘라의 손을 꽉 잡고 공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길거리 요리는 오랜만이네, 아하하. 적당한 싸구려 맛이 맛있어.”
“엘라는 잘 안 먹어요?”
“뭐, 독살 당할 위험도 있고 길을 걸으면서 이런 걸 먹으면 습격당하기 쉬우니까.”
“으응…….”
“그래도 언제 먹어도 맛있네. 역시.”
“보통 맛만을 생각하니까요.”
엘라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하는 레이시.
엘라는 레이시의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데이트를 이어갔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데이트를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을 땐 꽤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줄 알았지만, 정작 데이트 중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카페에서 점심 대용으로 빵을 먹다가 레이시의 얼굴을 살펴봤다.
“……에?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응.”
“아, 에헤헤, 고마워요.”
뺨에 묻은 빵조각을 떼어주자 배시시 웃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얼굴에 피식 웃다가 점점 마음을 정하기 시작했다.
역시 레이시를 죽이기는 싫으니 왕궁에서 일하게 하고 시간을 내서 보러 가자고…….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떼어낸 빵조각을 우물거리면서 이제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으, 으음~ 그러네요. 에헤헤……. 잘 모르겠어요. 데이트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솔직하게 데이트라는 거 뭘 하는 건지 잘 모르겠거든요.”
“왕궁 식으로 말하자면 춤이라도 춰야 하는데, 춤은 무리지?”
“아, 아하하…….”
“그럼, 헤어질까? 할 것도 없는데…….”
“아, 그, 그건! 그건 싫으니까…….”
엘라의 말에 다급하게 일어나 엘라의 손을 잡는 레이시.
레이시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큰 소리를 냈다가 주변의 시선에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엘라는 레이시의 옆에 앉아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지켜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시.”
“네?”
“나는 널 죽게 하고 싶지 않아. 이번 일은 상대방이 허접이라 괜찮았지만, 다음에도 괜찮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커피를 마시면서 최대한 레이시의 시선을 피하는 엘라.
엘라는 자신이 뛰어넘었던 사선들을 말하면서 이런 일은 부지기수라고 말했고 레이시는 자신을 밀어내는 엘라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엘라의 말은 이해하고 있다.
자신을 배려해서 자신과 떨어지려고 하고 있을 뿐이고 자신을 버리는 건 아니라고.
그리고 자신도 엘라와 계속 같이 다니다 보면 험한 일을 당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살을 맞아 정신이 망가질 뻔하기도 했었고…….
“그래서 떨어져서 지내면 좋겠어. 최대한 시간을 내서 만나러 올게. ……조금은 외로울지도 모르겠지만, 레이시는 성실하고 착하니까 금방 적응할 거야. 나보다 괜찮은 여자를 만날지도 모르고…… 남자에게 안길지도 모르겠네. 아하하, 어쩌면 나중에 내가 싫어져서 안 만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엘라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싫어요…….”
“응?”
“떨어져서 지내는 거는……, 이해할 수 있어요. 제, 제가 짐일 뿐이라는 것도……. 그래도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네. 미안해.”
“엘라도……, 위험한 거죠?”
“응. 나는 소수로밖에 못 움직이고 상대는 아예 대도시 하나를 다스리고 있는 상태니까. 다수의 폭력은 꽤 위험해.”
차가운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엘라의 눈을 바라보는 레이시.
엘라는 물기가 어린 레이시의 눈에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시선에 눈을 비비고 어색하게 웃었다.
“저, 사실……, 데이트…….”
“응.”
“데이트……, 아하하……. 말을 잘 못 하겠어요…….”
마음을 정리하려고 데이트를 하자고 말했지만, 데이트하자 오히려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겠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니 자신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려고 하는 것도, 그러는 와중에도 최대한 시간을 내겠다는 것도…….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어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자신을 메이드로 만든 건 엘라인데 이렇게 떼어 놓으려고 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이런 건 어린애 같은 아집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고 엘라에게 자꾸만 화가 난다.
마지막 데이트가 될지도 모르니까 웃으면서 하자고 생각했는데…….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러자 엘라의 손등을 가볍게 밀어내며 엘라를 노려보는 레이시.
레이시는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엘라에게 말을 이어갔다.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 응, 알아. 미워해도 괜찮아.”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았어요. 멋대로 덮친 건 엘라면서…….”
“…….”
“솔직히…… 데이트, 하면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야, 저, 엘라가 저를 덮쳐서 메이드가 됐고 따라다니게 된 거잖아요? 아하하……. 그래서 지금 데이트하면 마음이 흔들릴 줄 알았어요. 그야, 위험한 일도 겪었고, 엘라는 처음 했을 때부터 3개월 뒤에 헤어질 거라고 폭언도 했었잖아요. 그런데요, 이상하게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요. 그냥 아파요.”
눈을 가리고 바들바들 떠는 레이시.
나쁜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머테리아 후작과 그 병사일 텐데 왜 자신이 아파해야 하는 걸까?
레이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한참을 떨다가 이번에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냥, 아파요. ……끅, 끄흥! 떨어지기 싫어요……. 다른 일로, 바빠서……, 그런 거라면……, 윽, 윽! 그런 거라면……!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미안해.”
“듣기 싫어요……!”
“…….”
엘라의 사과에 큰 소리를 내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소리에 레이시의 뺨을 만지다가 조심스럽게 눈물을 쏟고 있는 레이시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가슴팍이 다 젖을 때까지 레이시를 안아주고 있자, 레이시는 떨어져서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엘라…… 엘라는 경험이 많죠?”
“응. 많아. 아마 두 자리 숫자.”
“……엘라는 저 말고도 많죠? 그래서 제가 싫어진 건가요……? 이런 일, 특별하지도 않은 건가요?”
“레이시.”
“저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인 거죠……?”
“레이시!”
“……!”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네겐 진심이야. 이렇게 마음 아파하는 것도, 수없이 많이 들었던 그 말에 이렇게 열 받는 것도 처음이야.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싫어.”
눈빛을 잃고 절망에 가득한 얼굴로 자신이 싫은 거냐고 물어보는 레이시.
다른 여자들에게서 꽤 많이 들었던 말이었지만, 엘라는 다른 때와 다르게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냈다.
주변 행인들이 전부 자신들을 지켜볼 정도로 큰 목소리.
엘라는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자 한숨을 내쉬면서 레이시와 눈을 마주쳤고 레이시는 엘라의 시선에 흠칫 떨다가 조용히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런지, 감정이 조절이 안 된다.
엘라에게 싫은 말은 듣기 싫다고 소리쳤으면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해버렸다.
그런 생각에 레이시는 손을 꽉 쥐며 울먹이다 다시 한번 엘라를 쳐다봤고 엘라는 레이시가 자신을 쳐다보자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레이시의 말을 기다렸다.
“저기, 엘라…….”
“응.”
“저번에 제 말, 아무거나 하나 들어주신다고 했었죠……?”
“응.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하나 들어줄게.”
혹시나 레이시가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말할까,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들어주겠다며 선을 긋는 엘라.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엘라를 꽉 끌어안았고 엘라는 레이시의 등이 떨리자 뭐든 말해도 괜찮다며 레이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레이시는 엘라와 눈을 마주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저……, 저를…….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마음의 아픔도 모두 꾹 참아내며 말한 소원.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소원에 말 대신 키스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