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데이트1
* * *
“괴물 새끼가……!”
“단체로 연장 들고 몰려와서 여자 한 명을 죽이려고 한 주제에 뭔 소리야?”
레이시와 미스트가 동굴에서 나올 때, 엘라는 마지막 남은 정규군을 죽이고선 혀를 찼다.
대체 남을 죽이려고 든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유언으로 남기는 걸까?
……아니,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레이시의 몸 상태다.
미스트가 전해준 레이시의 말 덕분에 빨리 대응하긴 했지만, 대응이 빠르다고 문제가 안 생긴다는 건 아니니 빨리 가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눈을 감고 미스트의 마력을 찾기 시작했다.
“……릴리트의 마력이네.”
하지만 엘라가 찾아낸 건 미스트의 마력이 아니라 릴리트의 마력이었고, 엘라는 릴리트의 마력에 눈을 찌푸렸다.
릴리트를 소환했을 정도라면 레이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걸까?
미스트가 적들을 죽이면서 흥분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적들이 미스트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할 거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엘라가 본 머테리아 후작은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혀를 차면서 유령마를 소환해 미스트가 소환했을 릴리트의 마력을 쫓아갔다.
“엘라!”
“레이시!”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시 일행과 마주치는 엘라.
엘라는 레이시를 보자마자 유령마를 역소환하면서 레이시에게 달려갔고 레이시는 몸 곳곳에 피가 튄 엘라를 보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엘라에게 달려갔다.
“안 다쳤어요!?”
“응. 이거 내 피 아냐.”
엘라는 잔뜩 놀란 레이시를 달래주면서 레이시의 몸을 살펴봤고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옷이 바뀌어져 있다.
옷을 벗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었던 거겠지.
거기에다가 약한 피 냄새…….
엘라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파악하다가 레이시가 꽤 험한 꼴을 봤다는 걸 깨달았고 이내 레이시를 안아주다가 떨어졌다.
“……레이시. 다쳤었어?”
“그, 지금은 괜찮으니까…….”
“역시, 나랑 너랑은, 떨어지는 게 낫겠네.”
“그, 그게 무슨……?”
오늘 있었던 일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훈련에 가까울 정도로 별 것 아닌 일.
그런데도 다친다는 건, 레이시가 자신과 같이 있으면 앞으로 더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의 몸을 살피면서 역시 수도에 도착하면 헤어지는 게 낫겠다고 말했고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말에 당황했다.
엘라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단호하게 말하는 엘라의 얼굴에서 미안함으로 가득 했으니까.
아마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떨어져 지내는 게 낫다고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해도 역시 떨어져 지내는 게 낫다고 말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하자 레이시는 덜컥 겁을 집어먹고 엘라의 손을 잡았다.
“저, 자, 잠시…….”
“나랑 같이 있으면 오늘 일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일이 많을 거야. 위험한 일은 더 많겠지. 떨어져서 지내는 게 좋을 거야.”
“그, 그러니까.”
자신을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한 사람은 엘라이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엘라에게 그대로 말하려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좀처럼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말을 하기 위해서 입을 열면, 화살의 고통과 사람들의 고함이 떨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다가 레이시의 뺨을 쓰다듬었다.
“영원히 헤어지겠다는 건 아냐, 메이드로 일할 수 있게 해줄 테니 왕궁에서 얌전히 지내. 최대한 자주 만나러 갈게.”
“그, 그……. 그게, 아…….”
엘라의 말에 말을 더듬으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못 하는 레이시.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다 레이시의 뺨을 가볍게 만지다가 유령마를 소환해서 말에 태웠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도시로 돌아가는 엘라.
엘라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성큼성큼 저택으로 걸어가 머테리아 후작의 가족에게 쳐들어갔고 머테리아 후작의 가족들은 엘라의 모습에 흠칫 떨었다.
분명 왕자의 병사와 영지의 병사가 같이 나갔는데 왜 엘라가 멀쩡한 걸까?
자신의 아버지가 실패한 걸까?
그런 생각에 장남은 미리 준비했던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엘라가 장남의 목을 조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머테리아 후작이 내게 반기를 들었다.”
“컥!? 컥, 커헉! 마, 말을…….”
“왕족에 대한 반란죄. 삼족이 내 손에 죽어도 할 말은 없겠지.”
“……!?”
“어차피 블루드의 시주였지? 하, 폐위된 왕자 따위를 지지하니 죽는 거다. 죽기 전에 마지막 교육이니 제대로 기억해둬라.”
“크헉!?”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목이 그래도 꺾여 축 늘어지는 장남.
그 모습을 보고 다른 가족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엘라는 시끄럽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마탄을 연달아 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의 몸을 관통할 정도로만 쏘다가 이내 화를 주체하지 못했는지 아예 벽을 뚫고 마력이 날아갈 정도로 계속해서 마탄을 쏘아내는 엘라.
“아아아악!”
습격을 받은 건 언제나 똑같았는데 어째선지 짜증이 주체가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한참을 마탄을 쏘아내다가 건물이 무너질 듯 비명을 지르자 손을 위로 들어 지붕을 잿더미로 만든 다음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보이는 건 잔뜩 겁먹은 레이시의 모습.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 났던 이유를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생각보다도 깊게 레이시에게 빠진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엘라는 이래서는 안 된다면서 천천히 레이시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스킨십도 줄이고 대화도 되도록 미스트를 통해서 전하며 수도로 움직이는 엘라.
레이시는 그런 엘라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엘라의 행동이 확실히 옳다.
자신은 엘라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거고, 이런 걸 견딜 만큼 자신의 정신이 튼튼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엘라가 멀어지는 걸 느끼자 레이시는 마음 한 구석이 아픈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 엘라가 자신과 떨어지려고 했다고 말했을 때와 다른 고통.
그때는 그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떨어지려고 해서 화가 났다면, 이번에는 떨어져야만 것 때문에 아프다.
엘라와 떨어지기 싫다.
엘라가 자신을 위로해줬으면 한다.
레이시는 그런 자신의 생각에 쪼그려앉아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봤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
레이시는 그 모닥불을 보자 괜히 감정이 격해져 눈을 가리고 차오르는 눈물을 가렸다.
“괜찮으세요?”
“아, 으, 네. 에헤헤……, 죄송해요. 불침번 서는데…….”
미스트의 말에 다급하게 눈을 비비면서 웃는 레이시.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조용히 레이시의 옆에 앉아 엘라에 대한 말을 꺼냈다.
엘라가 레이시와 거리를 벌리는 건, 다른 사람들보다 레이시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지 레이시가 싫어져서 그런 건 아니라며…….
레이시는 그런 미스트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런 건 알고 있다며 멋쩍게 뺨을 긁었고 미스트는 레이시의 대답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뭐라고 위로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이러는 거랍니다.”
“네?”
“레이시는 잘 모르겠지만, 엘라 공주님이 이렇게 사람에게 빠진 적은 처음 보거든요.”
“……아하하, 만난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에게…….”
“레이시는 만난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니, 잘 모르겠어요.”
자기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위로 받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그런 식으로 말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레이시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면서 어색하게 웃다가 미스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희 내일이면 수도죠?”
“네, 내일 새벽에 출발하면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헤어지는 거죠……?”
“아마 레이시 양의 직책이 정해지겠죠. 공주님이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서의 메이드로 들어가지 않을까요?”
“…….”
“저희는 위험한 일을 하니까요.”
“아,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
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생각이 복잡해져 먼저 자도 괜찮겠냐고 물어봤고 미스트는 피곤하면 자도 된다며 레이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텐트 안으로 들어가는 레이시.
미스트는 레이시가 잠을 자기 시작하자 엘라가 있는 텐트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공주님은 자는 척 그만 두셔도 될 거 같은데요.”
“……시끄러워. 미스트.”
“아하하,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어떻게 해? ……너무 풀어진 게 문제네. 백성들을 도와주는 일만 했으니까.”
“레이시 양과 헤어질 건가요?”
그런 건 무리일 것 같은데요.
미스트는 엘라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은 채 엘라를 바라봤고 엘라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차라리 처음부터 건들지 않는 게 좋았으려나.”
“이미 늦었잖아요?”
“알아.”
“서로 이렇게 헤어지면 상처만 줄 거라고요?”
“너도 이런 경험은 없으면서.”
“저는 공주님과 비교하면 제 3자에 가까우니까요.”
“……자기도 실컷 즐긴 주제에.”
“아하하.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뭘 어떻게 해? 일단……, 레이시를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 생각해야지.”
“정말 의외네요. 다른 귀족 가문의 영애들은 마음대로 가지고 놀으셨으면서.”
미스트의 말에 가만히 미스트를 노려보는 엘라.
미스트는 조금만 더 건들이면 엘라가 터질 것 같아 키득키득 웃으면서 입을 바느질하는 흉내를 냈고 엘라는 그런 미스트의 모습에 혀를 차며 레이시가 자는 텐트를 봤다.
모닥불의 불빛에 미네르바와 같이 자는 모습이 보이는 레이시.
사람들에게 호되게 당한 다음부터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게 된 모습에 엘라는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피했다.
저걸 계속해서 보면 머리가 어떻게 되버릴 것만 같다.
자신 때문에 저렇게 되어버린 거니까…….
“왜 다들 자기가 멋대로 안겨놓고 책임을 지라고 했던 건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만 같네.”
“성장하셨네요.”
“시끄러워.”
“그럼 조금 주무시겠어요? 며칠 동안 잠, 한숨도 못 주무셨잖아요?”
“……부탁할게.”
미스트의 말에 그대로 앉은 채로 잠을 자는 엘라.
미스트는 그런 엘라의 모습에 엘라의 스트레스가 평소보다 높아 보인다고 생각하다 엘라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 혼자서 불침번을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미네르바와 함께 텐트에서 나온 레이시는 미스트에게 인사하면서도 주변의 그림자를 눈으로 훑어봤다.
숨어있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는 모습.
미스트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물로 적신 수건으로 레이시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들을 부탁했다.
그러자 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들의 상태를 살핀 다음에 짐을 지우기 시작했고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정을 뗄 거라면 지금부터 떼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와 눈을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수도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에, 엘라!”
“응?”
“여기요, 엘라의 말…….”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엘라를 붙잡았고 엘라는 레이시가 자신을 붙잡자 움찔 떨면서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아도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게 아닐까?
엘라는 레이시의 눈을 보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미스트가 눈에 보이자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런 고민을 하면 레이시가 좀 더 위험해질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라는 레이시에게서 말의 고삐를 받은 다음 칭찬의 말이라거나 그런 말 없이 그대로 말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 그리고!”
“응?”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요…….”
하지만 레이시는 그런 엘라를 붙잡듯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말을 받아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이 용기를 낸 모습.
엘라는 그런 레이시의 모습에 잠시 입술을 꽉 깨물다가 마지막 부탁이라며 거리를 벌리며 레이시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레이시는 엘라의 말에 흠칫 떨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부탁이 뭔데? 원하는 부서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데이트 해주실래요?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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