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6장) (27/31)
  • [6장]

    “원하는 대학은 여전히 없고?”

    이제야 서서히 뜨거운 날이 지나가는 계절이었으나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준비를 하고 있는 이라면 알 수 있는 당연함이었다. 여름은 문제를 풀다 말고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선생인 연우는 이전부터 원하는 대학과 학과를 계속해서 물어 왔다. 문과 계열로 가고 싶다는 말만 하고는 이후 하나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한 여름에게는 당연한 처사긴 했다. 연우가 몇 번을 물어도 여름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형제들이 원하는 것 같아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거 하나뿐이어서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지, 남들처럼 대단한 꿈이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생기면 꼭 말해 줘. 물론 지금처럼 열심히만 하면 좋은 결과 있을 거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연우는 그렇게 말하며 당연한 위치에 있는 과일을 포크로 쿡 찍었다.

    네, 감사합니다. 여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칙칙한 문제지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대학에 가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만족하는 곳으로만 가고 싶었다. 그것이 이 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실내에서도 얇지만 긴 잠옷을 입을 수 있는 계절이 되자, 여름은 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연우가 말했던 걱정이 이런 걸까 하고 다 늦어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 있으면 괜스레 두려움과 걱정이 몰려오곤 했다.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하는 걱정과 조급함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름은 쉽사리 혼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일을 나가지 않는 이훈의 서재에 선뜻 내려가 옆에 앉아 공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원래라면 그의 옆에서 떨며 이훈의 눈치를 보고는 긴장 어린 몸을 풀지 못하고 잠에 빠졌을 여름이었으나, 그럴 정신도 시간도 없다고 느낀 것인지 이제는 이훈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여름이 의아했으나, 조금 웃기기도 한 이훈은 재밌다는 생각밖에 안 했다. 그런 여름을 살살 꼬셔 제 무릎 위에 올려 두고는 바지를 벗기고 가슴을 희롱할 때도 잦았으나, 아이는 꼬박꼬박 서재로 출근하듯 방문했다.

    이훈은 아예 고개를 돌려 여름의 눈동자가 쉴 틈 없이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사람 하나 집에 올 거니까 수업은 없을 거야.”

    공기가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적막했던 서재 안에 그의 목소리가 가득 울렸다. 여름은 네? 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름이 쉽게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이 누가 오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커다랗게 뜨이고 있었다.

    “다음 주에 나갈 일 있다고 말했잖아. 괜찮은 옷 하나 없어, 너.”

    그랬었나. 여름은 기억에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말에 대꾸하나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괜찮은 옷 하나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왜 수업하지 못하는 사유가 되는 건지, 무엇 하나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공부해.”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뻑이던 여름을 향해 재차 공부 하던 것들을 향해 턱짓했다. 쳐다보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뜻이 적나라하게 전달됐다. 여름은 아차, 하고는 몸을 재차 테이블로 숙여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네.”

    어쨌든 저 멀리서 저를 보고 있을 형의 말대로 내일 수업이 없을 예정이니 조금 더 열심히 문제를 풀어야겠다 싶었다.

    ***

    점심을 먹고 나서 방으로 끌려온 길이었다. 분명 여름은 공부하러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문제를 풀다 힘이 들면 대학교나 학과에 관한 생각을 해 보려 했는데.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원래 이렇게…… 입어 보고 벗고 해야 하는 거예요……?”

    여름의 방에는 없던 행거와 처음 보는 옷가지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었다. 윤 비서는 제 방 가운데에 생겨 버린 행거에 많은 옷을 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출근한 사람이 그 누구도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옷이에요?”

    여름은 윤 비서님이 혼자 들락날락하며 옷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물었다. 여름은 형제들과 나란히 침대에 앉아 있었으나, 옆에서 자꾸 지분거리는 이온에게 볼을 물어뜯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등 뒤의 허리춤에 팔을 두른 이온이 볼에서부터 입꼬리를 아프지 않게 물고 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여름의 말이 억눌린 듯 느리게 나왔다.

    “이게 마지막 옷입니다.”

    윤 비서는 들고 있던 옷걸이 하나를 재차 걸며 말했다. 이훈과 이온은 아무런 대답도 말도 하지 않았으나, 윤 비서는 당연하다는 듯 문을 닫고 나갔다.

    이온이 팔을 풀고 여름의 양쪽 볼을 눌러 입술이 새 부리처럼 튀어나오게 하고는 그곳에 두어 번 쪽쪽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름의 볼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에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이것부터 입어 보자. 뭘 입고 가야 하려나.”

    자연스레 행거 가까이 걸어가 옷 하나를 집어 든 이온이 여름을 향해 내밀었다. 이후 아이가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서 옷을 받아 드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입어 보자는 건, 당장 갈아입어야 한다는 건데, 여름은 옷가지를 들고 눈을 끔뻑였다.

    이온은 이미 여름에게 옷을 넘겨주고는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팔을 뒤로 받치고 몸을 편히 기대앉은 지 오래였다.

    분명 형제들과는 숨 쉬듯이 샤워를 하고 몸을 나눴으나, 마련해 준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게 되는 건 괜스레 부끄러웠다. 아직 옷 하나 벗지 않고 있었으나 이미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옷을 들고 불그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여름은 보지 못할 형제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으려면 다 벗어야지.”

    다리를 꼰 허벅지에 팔을 받치고는 턱을 괴고 있던 이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는 분명 옷을 손에 쥐고 있었으나 땅에 끌리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 끝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한 벌인데, 언제 다 갈아입으려고.”

    평생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굳어 있던 아이는 형제에게 재촉 어린 말을 듣자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왔다. 하마터면 제가 부끄럽다는 이유로 형제의 시간을 잔뜩 빼앗아 귀찮게 할 뻔했다.

    여름은 들고 있던 옷을 잠시 행거에 걸어 두고는 입고 있던 반소매와 편한 운동복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그들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은 적도 갈아입혀진 적도 많았으나 괜스레 어색하고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흰색 티셔츠에 이훈이 줄곧 입고 다니는 정장과 비슷한 재킷을 걸치고는 어두운색의 바지를 입었다. 이상한 순서였으나, 손이 꼬이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다 입고 보니 중요한 곳에나 입고 나가야 할 것 같은 단정한 차림새가 된 것 같아 어색했다.

    여름은 더욱 큰 하얀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름은 어색한 어깨에 힘을 풀려 노력하면서 그들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것도 입어 보자.”

    이온이 늘어지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저 멀리 보이는 행거에 손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간은 그리 빠르게 흐르지 않았다. 형제가 바라보는 눈이 무섭게 느껴졌고 옷을 입고 벗고 반복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형제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알려 주지도 않고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옷을 입고 벗었던 일이 있었던 건 맞는지, 이후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름은 여전히 색도 많고, 다양했던 옷의 이유도 의도도 알지 못했다.

    물론 여름이 그 옷들의 주인이 저였고, 중요한 곳에 입고 가야 하는 차림이었음을 알게 된 건 일주일도 넘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

    여름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커다란 공간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게다가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혼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난날 수도 없이 많은 옷을 입어 본 이유는 전부 이것 때문이었다.

    창립기념일, 저 높은 곳에 쓰여 있는 이한 그룹의 창립기념일 행사라는 문구는 아무리 크고 많은 사람 사이에 있어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커다랬다. 누군가 들려준 유리잔을 손에 들고는 빈자리를 찾아 거닐던 여름은 가만히 멈춰 서서는 천장과 가장 가까운 그 문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교복 넥타이밖에 해 본 적 없는 여름에게 셔츠를 입히고 단정한 넥타이까지 매어 준 이는 이온이었다. 색만 다를 뿐이지 서로의 옷이 전부 비슷한 스타일이었기에 여름은 괜히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게 전부 여기 오기 위해서였구나…….”

    쥐고 있던 유리잔을 두 손으로 매만지다가 재차 몸을 돌렸다. 사람들 틈에서 부딪히지 않게 조용히 다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인파가 가득했으나, 아이는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형제와 같이 이곳에 도착했으나, 가장 큰 형인 이훈은 운전해 주신 윤 비서님과 어디론가 함께 사라지고, 이온 역시 저를 이 커다란 공간에 밀어 넣고는 구경하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떠나 버렸다.

    아무래도 그들의 회사이기에 바쁜 건 당연하다 생각하여 여름은 누구 하나 찾지 않고 저의 몫을 다하는 중이었다.

    벽을 따라 이어져 있는 빈 테이블과 의자를 찾은 여름은 쥐고 있는 물 잔을 더욱 거세게 쥐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쉬고 있다 보면 이온이 찾아오겠거니 싶어 여름은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싶었다.

    “안녕하세요.”

    사람들은 중앙에 모여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고 있었기에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라고는 몇몇 없었다. 게다가 여름이 찾은 테이블에는 먼지 하나 쌓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은 정도로 사람이 없었는데, 누군가 다가와 동그란 테이블의 자리를 채웠다.

    하필 여름과 맞은편에 앉았기에 자리를 채운 이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는 흑빛을 넘어서 푸른 빛이 도는 어두운 머리색에 고운 흰 피부를 가진 단정한 남자였다. 저보다 나이는 확실히 많아 보였으나, 그리 많은 나이일 것 같지도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나, 이 테이블엔 홀로 앉아 있던 여름과 남자밖에 없었기에 분명 저 인사는 저를 향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름 역시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모르는 이가 말을 거는 이 상황에 손이 잘게 떨렸으나 형제의 회사에서 소란을 떨 수는 없었다. 단지 그 마음으로 눈가에 힘을 주어 참았다.

    창립 기념일이라고 짜인 순서가 있는 건 아닌 듯했으나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노래가 억눌렸으나, 여름은 흘러들어 오는 노래가 이 분위기에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여름. 그쪽 이름 맞죠?”

    테이블에는 먹을 것 하나 없었고, 제 앞에는 여기까지 들고 온 물컵뿐이었다. 흘러 들어오는 노래에 의지하고 있던 터,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여름은 모르는 남자가 인사를 했던 상황보다 제 앞의 남자가 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 눈이 크게 뜨였다.

    “저 모르죠. 아, 형이 이야기했을 리가 없겠구나.”

    형? 분명 여름의 귀에는 넓은 공간에 흘러나오던 노랫소리만이 가득했건만, 이제는 제 앞에 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자리하고 떠나질 않았다. 그만큼 그에게서 눈을 떼어 내지 않고 있었다.

    “저 예전에 이온이 형 동생이었는데, 지금은 여름 씨가 동생이죠?”

    “…….”

    “역시 모르는구나. 괜찮아요, 저도 처음 알았을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놀랐거든요.”

    남자는 지독하게 하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는 턱을 괴었다. 여름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한 미소는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여름은 남자의 말대로 놀라기는 했으나 모든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에 제가 있는 이유도 모르는데, 남자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여름이 아니었다.

    왜인지 기대감이 잔뜩 섞여 있는 남자의 눈이 보였으나, 어찌 반응해야 할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거요.”

    남자는 테이블 위로 알 수 없는 것을 올려 두고는 제 쪽으로 쭉 밀어 넘겼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어딘가 익숙한 하얀 봉투였다.

    “이것 좀 형한테 전해 줄 수 있어요? 저는 죽어도 안 만나 주더라고요.”

    어느새 그가 건넨 하얀 봉투는 제 것이 되었다. 남자는 저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은 얼떨떨한 얼굴로 봉투를 집어 들어 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익숙하더니 안에는 어디서 보았던 봉투의 그대로 돈 뭉텅이가 들어 있었다. 이온의 테이블 위에서 보았던 흰 봉투와 같은 모양새였다.

    “……그냥 전달만 해 드리면 되는 걸까요?”

    아이는 이유도 의도도 찾기를 멈췄다.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형제에 관한 일이라면 특히 그랬다. 아무런 변화 없는 여름이 의아했는지, 남자의 웃던 입꼬리가 멈칫 굳었으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쪽이 버린 동생이 주는 거라고 해 주세요.”

    버린 동생,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많은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그의 흔적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여름은 그가 주고 떠난 하얀 봉투를 품에 소중히 안고는 갑작스레 벌어진 일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는 스스로 이온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버려졌다는 말로 봐선 지금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제가 그들의 동생이었다. 그에게 충분히 이전의 가족도 지인도 있을 수 있었기에 쉽사리 놀랍지는 않았다. 지금이 중요했다. 그러나, 그런데.

    ‘대체 뭘까.’

    알 수 없는 일에 관심 가져도 괜찮은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건 무슨 기분일지 모르는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불어 닥친 것도 사실이었다. 여름은 저절로 처지는 어깨에 힘을 주고는 허리를 세우려 노력했다. 몸까지 처지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저를 스치고 지나간 이유 모를 것들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온의 동생이 되었던 남자가 동생이 되었다가 버려졌다. 저에게도 충분히 있을 가능성 중 하나였다.

    남자가 동생으로서 자격을 박탈당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여름은 이대로 대학에 가지도 못하고 동생으로 두어야 한다는 필요성마저 사라질까, 나도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남자처럼 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으나 쉽게 들려오는 노래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안정시켰다.

    배가 고플 법도 한데, 허기 하나 돌지 않으니 이상하기도 했다. 여름은 의자에 편히 기대고는 들고 있던 물잔 아래에 흰 봉투를 받쳐 넣었다. 혹여나 날아갈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를 스쳤던 남자의 얼굴마저 흐릿해질 때였다. 어두운색의 셔츠만 입고는 저 멀리서 저를 향해 걸어오는 이는 익숙하다 못해 반가운 사람이었다.

    “이리 와.”

    이온이 주머니에 넣었던 한쪽 손을 잡아 빼며 여름의 쪽으로 내밀었다. 여름 역시 혼자 있던 시간이 긴 만큼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는 그저 이온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조급한 마음만큼 발걸음은 빨라졌다.

    “잘 놀고 있었어?”

    이온은 구겨진 여름의 겉옷을 펴 주며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는 걸어왔던 길 그대로 여름의 몸을 돌려 데리고 갔다. 아이가 앉아 있었던 테이블과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네. 많이 바쁘셨어요?”

    “아니, 별로. 형한테 가자. 이미 위로 도망갔대.”

    여름은 이온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스치는 이마다 아름답고도 화려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름은 분명 옆에 이온이 있음에도 저를 스쳐 지나가는 이들에게로 눈이 돌아갔다. 이온이 제 어깨에 팔을 두른 덕에 길을 곧장 잘 가고 있었으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커다란 공간을 벗어나 엘리베이터 가까이 걸어갔다. 긴 복도와 바깥에도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했다.

    “형.”

    그때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를 낸 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하얀 봉투의 그 남자였다. 그는 저에게 곤두세웠던 신경을 어디에 버리고 온 것인지 몸을 배배 꼴 것처럼 굴더니 붉은 얼굴을 겨우 들었다.

    “벌써 이훈이 형한테 가는 거야? 너무 오랜만인데.”

    이온의 시선이 자연스레 제 옆에 붙은 남자에게로 향했다. 미동도 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설렘으로 붉어졌던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치 아니면 부끄러움 그 어느 사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용기를 가지고 걸었던 남자의 말은 조금도 용납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이온이 여름의 어깨에 두른 손이 발걸음보다도 먼저 힘이 들어갔다. 여름을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넣고는, 그 역시 따라 들어왔다. 잔뜩 무너진 남자의 얼굴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보였으나 시스템에 따라 닫히는 문은 가차 없었다.

    여름은 유일하게 이름 없는 층수를 누르는 이온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큰형한테 가는 거예요?”

    “응,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간 사람한테.”

    아아, 아이는 그렇구나 하고 끄덕였다. 이온은 이전의 일이 있었던 건 맞을까 싶은 정도로 평온했고, 조금의 변화 하나 없었다. 그러나 어깨에 올라온 이온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움직임 때문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고요한 공기만이 흐르자, 어쩐지 마음이 불편한 건 여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온이 이렇게 하겠다면 따라야 하고, 저렇게 하겠다면 따라야 하는 게 저였기에 이후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내렸다. 행사가 열리던 층과는 달리 너무나 고요했다. 이훈은 이미 행사라는 것에서 벗어나 그의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 가까이 다가가자 앉아 있던 이가 일어나 인사를 했으나 이온은 그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미세하게 빨라진 이온의 발걸음을 따라잡으려 여름은 허리를 곧장 펴야 했다.

    서재와 비슷하게 커다란 이훈의 공간은 넓었고, 환한 창문 때문인지 쭉 펼쳐져 있었다. 이온은 여름을 데리고 이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있는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전화하고 있던 이훈의 미간이 순간 좁혀졌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일단 끊지.”

    이훈이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 등에 팔을 올리고 편히 앉아 피곤함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온과 달리 여름은 손을 허벅지 위에 한데 모으고는 저 멀리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훈과 제 옆에서 힘들다는 말을 연달아 뱉고 있는 이온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뭐 했어.”

    이훈이 피곤해 늘어져 있는 이온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여름에게 물었다.

    “그냥 여기저기 구경하고, 물도 먹고……. 아, 노래도 들었어요.”

    “그게 다야?”

    친해진 사람은 없고 하며 말을 덧붙였다. 말을 나누어 봤느냐가 먼저 아닐까, 여름은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훈은 그런 여름의 반응에 아쉽다느니, 잘됐냐느니 하는 반응 하나 없었다. 그저 그랬냐는 듯 여름과 별다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아무 말 하나 없는 사이를 끼어든 건 눕다시피 앉아 있던 몸을 세운 이온이었다.

    “김지혁은 여기에 왜 있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온의 고개가 이훈에게로 돌아갔다.

    “무슨 김지혁.”

    알면서 물어보냐는 식으로 쳐다보는 이온에게 웃음 짓는 이훈의 미소는 평소의 이온과 닮아 있었다. 그런 이훈에게 진 사람처럼 이온의 얼굴에는 볼만 부풀리지 않았지, 심술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는 네 동생이었던 김지혁이 김혁수 본부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늘 잊어버리는 것 같네.”

    이온은 괜히 이훈의 말을 듣다 화가 났는지, 옆에 앉아 있는 아이의 허리를 감싼 채 몸을 숙여 여름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었다. 엉엉 우는소리만 있었다면 아이는 제 형이 울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자세였다.

    이온은 여름의 살갗과 가장 가까운 셔츠 위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달큼한 향은 아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체취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온의 머리를 여름이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여름의 눈에는 형에게 혼이 난 동생으로 보였던 탓이었다.

    “옆에 있었어.”

    이온은 여전히 여름의 배에 얼굴을 품고 있었기에 웅얼거리는 소리로 목소리가 짓눌렸으나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말한 이온은 여름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이 순간적으로 놀랐을 정도였으나, 여름은 멈추지 않고 이온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매만졌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닐 텐데.”

    여름은 알 수 없는 형제의 대화였으나, 이온이 점차 제 가까이 붙어 오고 있다는 건, 그리고 이온이 일방적으로 큰 형에게 혼나고 있다는 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이는 억지로 웃지도, 그렇다고 궁금해하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그들의 옆을 지켰다.

    “여름아, 네 형이 저렇게 무서운 사람이다.”

    “네?”

    “아마 동생 하나 없었으면 때리고도 남았을 거야.”

    여름보다 몇은 많은 이온이었지만 지금은 저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저 형에게 혼나고 동생에게 지켜 달라고 하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들어 울상인 이온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아프지 않게 쥐고는 습관처럼 매만지며 눈을 휘어 웃었다.

    “왜 웃어.”

    이온이 끌어안았기에 그의 품에 갇힌 모양새인 여름이 웃고 있는 모습은 이온이 누구보다 가까이서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냥, 편안해서요.”

    멈추지 않던 입이 순간 굳었다. 이전보다 굳어 버린 이온의 표정에 여름은 웃던 얼굴을 감추고는 횡설수설 변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가족은 원래 가장 편한 관계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평온하고 그들과 함께 있다는 기분을 들게 하는 이 분위기가 편안했다. 아이는 그렇게 설명하고 싶었으나 솔직한 감정이 먼저였다.

    “……그래, 맞지. 가장 편안하고 편한 사이.”

    이온은 끌어안았던 여름을 놓고는 소파의 가장 끝으로 몸을 움직여 자리 잡았다. 여름은 갑작스레 멀어진 이온이 의아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동생의 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오는 건 이훈뿐이었다.

    “됐어. 몇 시쯤 끝나는 거야. 지겨워 죽겠어.”

    이온은 어정쩡했던 몸을 바로 세우고는 다리를 꼬았다. 덥다는 듯 셔츠 깃을 잡고는 펄럭거렸다.

    “아마, 곧. 지금 퇴장 준비 중이래.”

    여름이 눈을 끔뻑이며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립 기념이라는 행사가 곧 끝날 예정인 모양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이런저런 내빈 소개와 시상식 각종 공연 등을 보고 난 뒤로도 한참은 지난 시간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자리 지켜야 할 이유 없지 않아? 전부 윤 비서한테 시켜 놓고서는. 피곤한데 집이나 가자, 옷도 답답한데.”

    이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자고 이야기했으나 이미 갈 준비를 끝낸 모습이었다. 이훈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듯 의자를 뒤로 물리고 일어나 의자에 걸어 두었던 재킷을 팔에 걸었다.

    머릿속에 남는 기억 하나 없는 행사였지만, 집 밖으로 나왔다는 것조차 긴장하기에 충분했던 여름 역시 집으로 빠르게 돌아가자는 의견에는 격하게 찬성이었다. 이온을 따라 일어선 여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무엇 하나 잊어버린 기분이었는데, 이온을 보면 떠올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이 불편했다. 김지혁, 그가 입에 담았던 이의 이름이었다. 보통 남자의 이름이었고, 그와 관련된 사람일 텐데.

    “아.”

    오늘 저에게도 이온과 관련된 남자 하나가 다가와 이야기하고는 부탁까지 했었다. 게다가 아주 중요한 것을 전달해 달라고도 했었는데, 이온을 반가워하고 그를 따라 이훈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당장 그곳으로 돌아가 하얀 봉투를 찾아와야 했다.

    몸을 일으켰던 여름은 빠른 걸음, 아니, 거의 뛰다시피 문을 열고 빠져나가 계단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로 가기에는 너무나 늦을 것 같았다. 분명 이훈은 행사의 인파들이 퇴장 중이라고 했다. 그 뜻은 당연하게도 행사가 끝나고 있음을 뜻하니 여름의 마음이 계속해서 조급해지고 있었다. 빠르게 내려가느라 차오르는 숨이 형제에게 언질 하나 하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게 했다.

    여름은 창립 기념 행사가 열렸던 층을 알지 못했으나, 급히 내려가다 사람의 소리가 가득 들리는 곳으로 빠져나갔다. 이온과 함께 기다렸던 엘리베이터가 보여 길을 찾는 건 쉬웠다.

    누군가 가져갔을까,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있는 힘껏 밀어야 하는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훈의 말대로 퇴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벽을 두르고 있는 테이블을 따라 걸으니 저 멀리 하얀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가 보였다. 뛰다시피 달려가 그 봉투를 쥐었다. 남자가 저에게 생긋 웃으며 부탁까지 한 일이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게다가 돈까지 잃어버릴 뻔했다.

    만약에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린 당사자인 제가 갚아야 할 돈이었는데, 저에게는 단 한 푼도 없었기에 마음이 더욱 조급했던 것도, 순간의 안도가 찾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도 안 전해 줬어요?”

    주머니에라도 넣어야 할까, 품속에 안고 있던 돈을 소중히 품고 있던 순간이었다.

    “아, 네…….”

    분명 저에게 봉투를 건네준 남자였다. 까먹었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입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다. 당사자에게 꺼낼 말은 아니었다.

    “빼돌리지 말고 형한테 전해 줘요. 어차피 그 돈, 여름 씨도 곧 받을 테니 너무 탐내지는 말고요.”

    돈을 쥐고 있던 여름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어쩐지 그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형이 버릴 땐 버리더라도 예의는 차려 주더라고요.”

    “…….”

    “전 진짜 가 볼게요. 가족 놀이 재미있게 해요.”

    남자는 그렇게 인사하고 남은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사라지는 뒷모습은 지난 만남과 별다른 것 없었다. 어딘가 익숙하다 싶더니,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대사였다. 직접 들으니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 사람은 내 것이었고, 너도 나처럼 버려질 것이다. 저주 아닌 저주 같은 말이 여름을 멍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정리되는 것들은 없었다. 조명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고 실내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얼마 남지 않았다.

    어둠이 잠식되기 전에 여름은 서둘러 발을 놀렸다. 손에 쥔 봉투에 힘을 주고 있는 건 당연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올라가야 하나, 형제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여름이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 근처를 서성이던 중이었다.

    “여름아.”

    움직이는 숫자를 보고 있던 여름의 시선이 절로 내려갔다. 하얀 셔츠만 입고 있던 그는 어느새 재킷을 챙겨 입었는지 평소 이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언제 내려오신 거지, 여름이 의아해하고 있는 탓에 순식간에 성큼 다가온 이온을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 만났어?”

    여름의 둘째 형이자, 고개를 올려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는 남자가 아이의 뺨에 손을 얹고서 입을 열었다. 그의 볼은 평소보다 상기해 있었으며 안정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 이거요.”

    저에게 달라붙어 가까웠던 흰 봉투를 어딘가 이상한 이온에게로 내밀었다. 느릿하게 그의 얼굴이 아이의 손으로 향했다. 이온은 느릿한 손을 올려 아이가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그제야 여름의 마음이 놓였다는 사실은 이온이 알아챌 수 없는 일이었다.

    “들었어?”

    그는 손에 쥔 봉투를 강하게 쥐었다. 매끈하던 하얀 봉투가 제 모양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일그러졌다. 그 안에 돈 들어 있는데…… 그 모습을 본 여름의 입이 아주 조금 벌어졌다.

    “그 새끼가 뭐라고 했어?”

    이온은 손바닥 위에 있는 구겨진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낯선 공간에서는 어색함을 불러왔고 알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여름은 여전히 답도 뜻도 모르는 이온의 질문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여름아, 응?”

    아무 말 않는 여름을 재촉했다. 구겨진 종이에 고정되어 있던 얼굴이 번뜩 들리고, 그런 이온을 올려다보고 있던 여름과 시선이 맞닿았다. 그의 눈가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제 얼굴 가까이에 있었기에 쉽게 눈치챌 수 있었으나, 이온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그가 말하는 ‘그 새끼’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여름이 오늘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차려입고 이곳에 와서 이야기를 나눈 이라고는 단 한 명뿐이었다. 이온의 손에 있을 봉투의 위치를 대충 가늠하여 바라보았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거, 가져다드리라고. 그 안에 돈이 있잖아요, 형이 준 것이니 돌려주라고…….”

    부탁을, 정말 그것뿐이었다고 덧붙이려 했다. 그러나 제 팔을 가득 쥐어 잡는 이온의 힘에, 그리고 무너질 것만 같았던 그의 얼굴에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아니, 꾹 다물렸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랬구나.”

    그는 어쩐지 불안정해 보였다. 불안한 얼굴로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온이 힘을 주어 잡은 팔뚝만이 아려 왔다. 이온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가벼운 입이 너에게 이미 말했겠구나. 그걸 듣고도.”

    이온이 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어두웠던 테이블 밑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가 저에게 화를 낸 적이 있던가. 아니, 조금의 짜증은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하얀 백지가 되어 갔다.

    “너도 그렇게 될까 무서워서 천치처럼 이 돈을 전해 주는 거야?”

    내가 무얼 잘못했지, 그에게 양팔을 잡혀 갇히고는 무서운 시선 아래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가 쏘아붙이는 대상이 저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얀 봉투에서 벗어난 손이 떨렸다. 그가 아프게 쥐어서인지, 어쩔 수 없는 공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명재도 지금의 이온처럼 생각했을까, 호구처럼 저를 키워 준 이를 없애다 못해 처리해 버린 이와 피를 나누고자 하는 형제가 되고 싶었냐고, 그렇게 간절했냐고. 언젠가 원장님이 아닌 네가 될 수 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냐고, 외치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눈가에 열감이 느껴졌다. 여기서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이미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끌기 충분한 자세였다. 여름은 최선을 다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부여잡고 있는 팔에는 진작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열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름에게 아프다는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나오지 않게 참고 또 참는 데 집중했다. 이온이 열릴 제 입을 기다리는 것 같았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오늘도 배우지 못한 저는 정답을 알 수 없었다.

    “왜 말이 없어, 여름아 응?”

    “…….”

    “아니야, 말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나오지 않는 게 맞았어. 그냥 돌아가자.”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내린 이온은 아이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 이대로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이미 이온이 여름의 팔을 놓는 순간 힘이 빠진 여름의 팔은 축 처지듯 아래로 떨어졌으니 이온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피했다.

    이온은 여름의 손목을 잡고 몸을 돌렸고, 아이의 고개는 아래로 떨어졌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고 나가라고 하면 어쩌지, 나는 그들에게 무어라 말해야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꼬리를 무는 말을 생각하니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발끝을 스치지 않고 떨어지는 눈물이 고개를 숙인 여름의 눈에 보였다. 이제는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매번 긴 시간을 형제와 함께했다고 자부심 가득히 생각했는데, 고작 조금의 흔들림만 있으면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저 자신이 초라했고 힘들었다. 사람을 믿지 않았던 건 형제가 아니라 제가 아니었을까. 겁이 난다고 겁을 먹고만 있었으니 벗어날 방법조차 못 찾는 건 당연했다.

    형제가 저를 버릴 리가 없었다. 짐을 싸고 흰 봉투를 쥐여 줄 사람이 아니었다. 매일 밤 따듯하게 안아 주었으며 쓰다듬어 주던 이들이었다. 분명 그렇게 믿어 왔다.

    명재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악은 아닐까 걱정했던 날이 있었다. 형제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악이 될 수 있는 형제의 가능성을 짓누를 만큼 컸다. 무언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로 되돌리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왜인지 눈가에 오른 열감을 애써 지워 낼 수 없었다.

    “돌아가는 건 너 혼자 해.”

    이온의 등도 쳐다보지 못하고 땅을 보며 걷고 있던 여름을 뒤에서 끌어안아 당긴 건 이훈이었다. 이온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뒤를 돌았다. 여름 역시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말이다.

    왜 울어. 이온의 커진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름 역시 이온을 보고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저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온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줄곧 여유롭던 사람이었다. 조급해진 그의 얼굴은 아이의 꾹 다물린 입이 열리게 했다.

    “형.”

    이온의 팔이 아래로 늘어졌다. 애원 어린 목소리에는 물기가 담겨 있었다. 이온이 한 걸음 다가올수록 이훈은 여름을 옆으로 보내고는 뒤로 물러났다. 명백하게 피하고 있었다. 결 하나 없이 견고하던 이온의 얼굴이 무너졌다.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한 후회는 혼자 해. 괜한 사람 끌어들여서 울리지 말고.”

    “…….”

    “네가 진정 원했다면, 정리부터 했어야지. 그게 먼저였어.”

    이 사달이 날 줄 알았다는 듯한 이훈의 목소리는 올곧았다. 떨리는 이온과 마주하는 시선은 멈추지 않고 붉어졌다. 이온이 화를 내는 줄만 알았던 지난 시간이 후회되었다. 그가, 이온이 저와 별다른 것 없는 감정에 휩싸이고 있었음을 정말로 몰랐었다.

    여름의 손목을 쥐고 있는 이훈의 손은 가벼웠다. 힘 하나 주지 않고 그저 아이를 앞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욕심 가득한 상태로 혼자 불안에 떨며 애를 울리는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

    “아래에 윤 비서 있으니 차 타고 먼저 돌아가.”

    “형은…….”

    이온은 떨리는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알아서 할 테니 어디로 빠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

    이훈은 이온에게 곧장 집으로 가라고 말했으나, 먼저 돌아선 건 이훈이었다. 그는 여름의 손을 쥐고는 왔던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에게 발걸음을 맞추면서도 뒤를 돌아 멀어지고 있는 이온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자리를 지키고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온이 보였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점점 멀어지고 있음에도 흔들림 하나 없는 이온의 모습은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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