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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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나가 산책하던 정원도 아지랑이가 온종일 올라오는 뜨거운 나날이 계속되자, 여름은 발길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산책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뜨거운 햇빛을 느끼고 있으면 기운이 쪽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명재는 그렇게 떠나갔다. 저에게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힘겹게 부탁했으나, 저에게는 핸드폰도, 연락을 할 수 있는 도구도 방법도 없었기에 손쉽게 그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었다.

형제와 지내며 잊어버린 친구였지만, 한 번 얼굴을 보니 허한 마음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여름은 공부하다가도 산책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이유 모를 기분을 새로운 방법으로 달래고는 했다.

“과일이라도 가지고 가세요.”

과일 한 접시를 가지고 올라오신 이모님이었다. 그녀는 정갈한 과일을 여름에게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녀가 올라올 때, 타이밍 좋게 문밖으로 나온 여름이었기에 그녀에게서 접시를 받아 들고는 저 끝에 있는 작은형의 방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이온의 방은 저의 방과 달리 커다란 통창이 있었다. 호수가 훤히 보이던 별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2층에 있는 통창이어서인지 더욱 빛이 잘 들어오고 아름다웠다. 여름은 더운 날 산책을 못 하는 허한 감정과 부족한 광합성을 이곳에서 새롭게 채우는 편이었다.

그의 테이블을 힘겹게 통창 가까이에 끌고 가 앉았다. 이대로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투명하고 경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창문이어서인지 가끔 무서웠으나, 밖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게 해서 좋았다.

여름은 두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려 품에 끌어안은 채 과일을 찍어 먹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선생님이 오실 시간이었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 수업하고 형제와 저녁을 먹으면 또다시 하루가 지날 터였다.

“별거 없네.”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감정을 저 자신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명재를 만나고부터 생각이 꼬리를 무는 날이 잦아졌다.

그들을 두고 편안하고도 넓은 곳에서 숨을 쉬며 살아온 게 죄였을까. 가족으로 여기고 마음을 준 게 명재를 잃게 만든 것일까. 별거 아닌 일에도 수없이 불어난 생각은 몸 하나 움직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떠날 수도, 떠나야 하는 이유도 몰랐다. 여름은 그저 지나가는 슬픔이겠거니 하고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붉은 수박을 다 먹어갈 때쯤, 약속한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빈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방과 별다르지 않게 멀끔한 이온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제 방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좀 더 밝고, 물건이 적었다. 그래서인지 깔끔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 같았다.

번듯한 분위기에 괜스레 어깨가 축 처져서였을까, 그의 테이블에 붙어 있는 거울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괜히 뻗친 머리를 매만지기 위해 거울 밑 테이블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이온의 방에 자주는 아니지만, 꽤 들락날락했다고 생각했는데, 테이블이나 물건들을 세세히 본 적은 없었다.

여름이 그 무언가를 보게 된 건 몹시 우연이었다. 과일 접시를 내려놓는 순간 옆에 잔뜩 쌓인 흰 봉투들이 보였다. 가정 통신문을 가정에 전달할 때 나오던 정갈한 봉투였다.

이상한 건 흰 봉투들이 하나로 높게 쌓여 있었으며, 그 여러 개의 산이 테이블 구석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온의 방이니 이온이 업무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준비물 같은 건가. 여름은 저절로 그것에 손이 갔다.

내용물을 확인하려는 손이 주저하듯 순간 멈칫했으나, 곧장 손이 나갔다. 흰 봉투에 어울리게 그 안에는 황금색 돈다발이 담겨 있었다. 여름은 침착하게 내려놓았다. 다른 봉투들도 똑같았다. 공장에서 찍어 내기라도 한 듯 똑같은 것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여름은 처음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그것을 정리하고는 빈 접시를 가지고 나갔다.

이온의 물건이었고 의미를 두거나 그럴 자격도 없었으며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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