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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커다란 보육원 뒤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다. 시간이 날 때면 많은 아이가 동산에 올라 뛰어놀았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에 낮은 풀이 기분 좋게 피어나 있어서인지 누구라도 뛰어놀기 좋은 곳이었다.
늘 원장실의 책상에 앉아 일하시거나, 보육원으로 돌아오지 않아 바빠 보였던 원장님이 작은 동산에 올라오신 날이었다.
괜히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치밀었다. 원장님과 함께 놀 수 있어서였을까,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게 완벽했다.
손을 잡고 있던 어린아이들의 등을 떠밀어 주며 저 멀리 보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언덕을 내달렸다. 그런 아이들과 별다르지 않은 얼굴의 여름 역시 원장님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저 아래에서 원장님이 올라오고 계셨다. 산책이라도 하러 나오셨나, 아니면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유 모를 설렘은 여름의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했다.
‘급한 일은 끝나셨어요? 산책 나오신 거예요?’
여름에게 꼬리가 있다면 빠르게 흔들었을 터였다. 여름은 언덕 아래로, 원장은 위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쩐지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던 원장님이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고 함께 산책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원장님!’
아이는 두 손으로 익숙한 팔을 잡았다. 저에게는 어머니이고 아버지인 원장님이었다. 분명 그런 줄 알았다.
‘여름아.’
나이를 지긋하게 먹어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붉고 맑은 피가 얼굴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얼굴빛이 원래부터 붉은색이었던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원장님이 맞나, 아이의 손에 힘이 빠져나가고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무서운 얼굴이 아이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행복하냐라고 묻는 목소리는 저를 키워 준 원장님이 맞는데, 왜 이렇게 다른 향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아이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아니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푸른 빛이 나는 동산에 어둠이 내려앉고 깔깔대며 웃던 아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남은 이라고는 죽은 건지 살아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원장님과 잔뜩 떨고 있는 저뿐이었다.
“여름아.”
꿈속에서 들리던 목소리와는 너무나 다른, 다정한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숨을 거칠게 내 쉬며 눈을 떴다.
부풀었다 사그라드는 복부를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거칠게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붉은 피에 빠져들 것만 같았는데, 눈을 뜨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악몽 꿨어?”
소리를 따라 고개를 올렸다. 어쩐지 너무나 따뜻했다. 이온의 품에서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손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손가락 하나가 젖어 있던 눈가를 쓸어내렸다. 따뜻한 기운이 그대로 여름에게로 스며들었다.
“엄청 울었네. 무서운 꿈이었나 봐.”
제 몸을 두르듯 안고 있는 이온의 얼굴은 오늘도 다정했다. 무서운 꿈이었다. 피 칠갑을 하고 제 가까이 다가오는 원장님의 환영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다시 떠올려도 등에 소름이 돋았다.
몸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는 형의 품에 얼굴을 품었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보이는 것 하나 없어도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충분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은 팔을 이온의 허리에 두르고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저가 향할 곳은 형제의 품이라는 듯이, 너무나 간절한 움직임이었다.
이온은 어깨를 떨며 웃은 뒤, 함께 끌어안았다.
“과외도 까먹고, 많이 졸렸어?”
따뜻한 온기에 고개를 품고 있던 여름의 얼굴이 순간 들렸다. 이온 너머는 이미 어슴푸레했다. 윤서가 돌아가고나서부터 기억이 희미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잤나, 테이블에 엎드려 시간을 보냈나, 확실하지 않았다. 그는 큰 손으로 놀라 입이 살며시 벌어진 여름을 끌어당겼다.
“선생님은 그냥 돌려보냈어. 여름이 네가 낮잠 자는 게 워낙 귀해야 말이지.”
“…….”
“오늘은 일찍 퇴근했거든, 나도 네 옆에서 잤는데.”
몰랐지, 이온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분명 고개를 품고 있던 이는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이온이 아이의 어깨에 눈을 비비며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체취를 맞기 위해 킁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지만, 아이는 얼이 빠져 알아차릴 수 없었다.
수업도 빼먹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나, 꿈속에도 쫓아온 그가 미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그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이대로 그날의 기억에 사로잡혀 형제를 곧게 보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하는 공포 같은 것 말이다.
여름은 천천히 몸에 힘을 빼며 이온의 어깨에 기댔다.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맞대 껴안고 있는 이들은 너무나 달랐다. 그들의 생각도 온기도 전부.
눈을 내리감고 서로에 기운을 느끼던 찰나, 차가운 여름의 등을 타고 이온의 따뜻한 손이 파고들었다. 열감이 있는 손바닥이 아이의 옷을 파고들어 등을 휘저었다. 갑작스러운 이온의 손길에 고개를 치켜든 둘의 시선이 맞물렸다.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이온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다리를 아이의 몸 위로 올려 감았다. 이제 완벽하게 이온의 품에 갇힌 꼴이 되었다.
“……모르겠어요.”
“왜 몰라. 이렇게 차가운데.”
그의 손이 어깨까지 올라갔다가 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이온의 양손이 아이의 허리춤을 잡았다. 아이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옆으로 몸을 세우고 있던 몸을 반대로 돌렸다.
“아!”
아이를 붙잡고 있던 몸이 돌아가자 저절로 여름이 이온의 배 위로 올라왔다. 저절로 여름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란 마음에 몸을 세우니 다리를 벌리고 그의 몸 위에 앉아 있는 꼴이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형은 너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는데, 왜 여름이는 모를까.”
이온이 천장을 바라본 자세로 편히 자리를 잡는 동안 아이의 허벅지가 더욱 벌어졌다. 윤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곧장 쓰러지듯 잠이 든 모양이라 그런지 얇은 잠옷보다는 편한 운동복 같은 일상복을 입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은 내려다보고, 이온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맞닿았다. 아이는 그의 가슴과 복부 가운데로 손을 모았다.
“내가 내 동생을 너무 좋아하나?”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그의 말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여름뿐이었다. 얕은 숨을 내쉬며 정말 고민하는 듯한 소리가 이온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는 천천히 아이의 몸을 훑었다. 여전히 아이의 티 안으로 손을 넣은 채 허리를 잡고 있던 이온의 손이 겨드랑이 가까이 올라갔다.
“옷, 입에 물어 봐.”
그는 옷을 어깨까지 끌어 올리고는 티셔츠를 아이에게 잘게 흔들었다. 이미 드러난 복부와 가슴팍으로도 부끄러웠는데, 티셔츠를 입에 물고 있으려니 눈가에 열기가 치밀었다.
그러나 여름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이온이 올려 준 티셔츠를 입에 물었다. 티셔츠를 무니, 벗은 것만 못한 모습으로 반쯤 나신이 되었다.
“왜 벌써 섰어.”
그의 손이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아이의 젖꼭지에 힘이 들어가 튀어 올라 있었다. 평소보다도 선홍빛을 띠는 아이의 가슴에서 이온은 시선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유두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온의 손가락에 여름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이미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앉아 옷이 올라갈 때부터 몸에는 긴장도 힘도 잔뜩 들어가 있었다.
몸에 나 있는 주름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훑고 내려온 그의 손은 재차 여름의 얄팍한 허리를 잡았다. 이온의 손은 따뜻했다. 그의 손을 따라 흥분이 치밀어 올랐다.
두려움에 떨다 모든 걸 게워 낸 뒤여서인지 몸에 힘이 없었다. 그저 이온이 흔드는 대로, 이온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흔들렸다.
이온의 양손은 흉통을 잡는 사람처럼 가슴 부근에 고정되어 엄지손가락 하나만이 유두를 툭 건들기 시작했다. 아이의 몸을 붙잡고 엄지로 흥분에 튀어 오른 유두를 꾹 눌렀다. 여름의 머리가 천장을 향해 들리며 물고 있는 티셔츠 탓에 꾹 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 응…….”
“몸에 분가루라도 바르나. 어떻게 이렇게 뽀얗지.”
이온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몸이 뽀얗다 못해 투명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충분히 먹였음에도 살갗에 드러나는 뼈의 자태는 여전했으나, 전날보다 분명히 살이 오르긴 했다. 특히 가슴이 그러했다.
이온은 아이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한 손은 잘게 떨리고 있는 여름의 허벅지에, 다른 손은 유두를 아프게 꼬집었다.
“아, 으응!”
“아파?”
이온의 손짓에 따라 엉덩이를 들썩이던 여름이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티셔츠를 물고 있었기에 말을 하지 못했으나 크게 뜬 눈은 솔직했다.
“아픈 건 아니고, 그럼 그냥 좋은 거구나.”
바짝 선 유두를 이온이 있는 힘껏 희롱했다. 겨우 한 손에 들어오는 아이의 가슴을 쥐어짜는 이온의 표정은 누구보다 평온해 보였다. 여름은 이온의 복부에 붙이고 앉아 있는 아래가 뭉쳐지는 감각이 들었으나, 티를 낼 수 없었다.
어슴푸레하던 바깥은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이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앞으로든 뒤로든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고 버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온의 힘을 당해 낼 여름이 아니었기에 그의 원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위에도 서고, 아래도 섰네. 여름이는 바쁘겠다.”
이미 이온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건 포기한 지 오래였다. 뜨거운 열기로 눈앞이 흐릿하기도 했고, 그를 바라볼 용기가 있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위에 모은 손에 힘을 주고는 비틀거리는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물고 있던 옷이 아래로 떨어지고 여름의 입이 뻐금거렸다.
“그, 그만…… 흐응…….”
이온의 다른 손이 아이의 바지춤으로 다가왔다. 사타구니를 소중한 것을 쥐듯이 잡으니 아이의 몸이 무너졌다. 이온이 사타구니를 잡느라, 허리를 고정하던 손도 사라졌겠다, 여름이 힘주고 버티던 고개가 앞으로 기울며 이온의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물론 이온은 환영이라는 듯 모든 손을 멀리하고는 아이의 등을 끌어안았다. 당장이라도 옷을 벗기고 알 수 없는 행위를 하며 성기를 쥐어 오리라고 생각했으나 왜인지 이온은 그저 가만히 끌어안아 주었을 뿐이었다.
순간 의아했으나, 여름은 발끝에서부터 저리는 감각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에 그저 눈을 내리감았다. 이온은 아이의 맨살을 쓸어내리며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호흡을 어루만졌다.
인제 그만 저녁을 먹으러 내려가든가, 씻자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고개를 올려 이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매일 같이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의 눈 밑에 나 있는 점은 꽤 매혹적이었다. 날카롭기보다 예쁘게 올라간 눈과 함께 시선을 끌게 했으니 말이다.
그의 점을 홀린 듯 바라보다 눈의 깜빡임이 멎을 때였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무게감과 함께 고개가 그의 콧대 가까이 떨어졌다. 어느새 서로 맞붙은 입술에 부드러우면서도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살며시 돌아간 이온의 얼굴을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그것도 형과 제 것이. 그저 서로의 것이 붙었을 뿐이었다. 이온은 입술을 살며시 떼어 내고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굳어 버린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벌려야지.”
그의 눈썹이 산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아이의 입술에 향했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굳이 벌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아이의 입이 충분히 벌어져 있었다.
뒤통수가 가까워지고 이온은 아이의 머리를 강하게 틀어잡았다. 꽉 쥔 손 탓인지 고통이 밀려와 눈가가 찡그려졌으나, 입 안으로 들어오는 이온의 것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으, 응… 우, 흐…….”
분명 그의 혀였다. 이온의 혀가 입 안 가득히 훑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행위가 키스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책에서도 티브이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많이 나오는 아주 기본적인 지식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행위의 일부가 아닌가, 그러나 아이는 형과 나누고 있는 행위에 모순을 느끼지 못했다.
여름은 이온을 사랑했으며 형제를 사랑했다. 그랬기에 어쩌면 그들과 나누는 행위는 당연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가 느끼던 당혹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구름 위를 떠다니는 푹신한 기분이 자리 잡았다.
여름은 바둥거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이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부끄러움에 눈을 감았으나, 이온의 얼굴만이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것도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 걸까, 여름은 가족인 이들이 좋아서 병이라도 걸릴까 두려운 기분까지 느껴야 했다.
“흐응, 하아…….”
입 안을 헤집던 혀가 빠져나가고 아이의 숨소리가 방 가득히 울렸다. 이온은 금세 입술을 떼어 내지 않고 아이의 아랫입술을 빨아올렸다. 분명 거친 호흡을 진정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알 수 없는 일들에 가슴이 쿵쿵거렸다.
“형이랑 뽀뽀했네.”
붉어진 뺨 위로 뜨거운 손바닥이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이 뜨거운 열기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눈앞이 아득해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초점을 잡아야 했다. 그는 뺨을 토닥이며 엄지손가락으로 젖어 버린 여름의 입술을 닦아 냈다.
평온한 이온과 달리 여전히 멍해 정신을 다잡지 못하고 있는 여름의 얼빠진 표정이 웃긴 지, 이온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득한 바다처럼 검은 머리에 예쁘게 휘어진 눈, 그 아래로 흰 바탕에 찍혀 있는 점은 늘 그랬듯, 눈을 뗄 수 없었다. 여름은 멍한 눈을 이온에 가까이 가져갔다. 도장을 찍어 내듯 그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가 붙였다 금세 떼어 냈다.
짧은 뽀뽀였다. 그것도 이온을 향한 여름의 입맞춤 말이다.
여름은 그저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조각상 같던 그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줄곧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스르르 내려갔다. 놀란 것인지 눈이 잘게 뜨였다 원상태로 돌았다. 콧대가 맞붙기라도 할 정도로 가까웠던 여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작은 숨을 내쉬며 웃었다.
그제야 여름의 호흡도 돌아왔다. 이온에게 용기를 냈으나, 그가 웃을 때까지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여름이 네가 성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데.”
그는 여름의 뒤통수를 살며시 누르며 끌어왔다. 저절로 어깨 위로 얼굴을 품게 되었다. 분명 이온의 몸 위에 누워 있음에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성인, 맞아요…….”
아이는 느릿하게 대꾸했다.
“안 믿긴다는 거지, 믿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그의 큰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이 평온해질 줄 알았으나, 더욱더 엉망이었다. 귓가에 울리고 있는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빠르게 뛰는 심장을 무시할 수 없는 걸 보아 제 것일 확률이 높았다.
여름은 이제 알았다. 형제를 향한 감정을.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연인의, 친구의, 그리고 가족의 모든 감정을 뭉쳐 놓은 사랑.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모든 애정의 끝에, 가장 위에 있는 감정이 아닌가. 여름은 만약 그들에게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을 해 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사랑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무리 불안하여도 변하지 않는 그러한 감정들 말이다.
여름은 저도 모르게 이온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문질렀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얼 했던, 멀어지면 꿈과 같은 어둠에 잡아 먹힐 것만 같았다. 맹목적인 감정은 불안을 낳았다.
“여름아.”
부드러운 감촉이 귓가에 느껴졌다. 이온이 아이의 귀에 입을 맞춰왔다. 귀를 입술로 물었다 떼어 내고는 작게 불렀다.
“차 이사님이랑 무슨 이야기했어?”
여름의 몸이 순간 굳었다. 이온의 말 때문인지, 귓가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엄청 이른 시간에 오셨다던데, 과외도 못 할 정도로 차 이사님이 여름이를 피곤하게 했을까 봐. 형은 걱정이 되네.”
고개를 들고는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있었던 사실을 전부 말했다. 어디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입이 열렸고, 조금도 빠짐없이 있었던 그대로의 진실을 말했다.
“명재? 여름이 친구야?”
“네, 명재랑은 같은 방도 쓰곤 했어요.”
그랬구나, 어느새 이온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으며 헤드에 기댔다. 그의 옆에 앉으려다 이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한두 번 아닌 일에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편하기만 했다.
“짧은 머리, 그리고 조금 어두운 피부. 그 친구가 명재 맞지?”
“……네?”
“아, 그리고 녹색 가방을 앞으로 메고 있었는데.”
아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재였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제 물건을 그리 많이 가지지 못한다. 게다가 가방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명재는 녹색, 여름은 어두운 벽색의 가방을 초등학생 때부터 사용했다.
명재는 언제든 가방을 빨리 벗고 뛰어놀고 싶다며 매일 다 해진 가방을 앞으로 메고 다녔다. 여름이 뒤로 벗는 게 더 빠르지 않겠냐며 말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명재는 아마도 앞으로 메는 게 좋은 것 같았다.
여름은 이온이 말하는 사람이 제 친구인 명재라고 확신했다. 명재는 이한 그룹의 높은 사람이 하는 통화를 엿들었다고 했다. 여름은 명재가 본 그 남자가 형제 중 하나일 것이라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그저 예상이고 감이었지만 말이다.
“언제 한 번 명재라는 친구, 집에 초대할까?”
그러나 아무리 이훈이고 이온일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이왕 연락된 거 빨리 얼굴 보면 더 좋고.”
그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부드러운 아이의 살결을 어루만졌다. 이온이 장난을 치건 말건, 아이는 놀란 눈을 크게 뜨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명재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굳이 밖으로 나가 명재를 봐야 한다면 여름 쪽에서 거절이었다. 그러나 명재가 제집에 오는 건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귓가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정말, 집에 초대해도 돼요?”
아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이온은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여름이 네 집인데, 친구 하나 초대하는 걸 누가 막겠어.”
내 집.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를 제집에 초대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란 말에 가슴이 부풀었다.
얼굴이 선홍색으로 변해 가는 뺨을 쓰다듬던 이온은 아이를 허벅지 위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 헤드에서 등을 떼어 내 일어났다.
“그럼 여름이 너도 찬성한 걸로 알고 형이 알아서 명재한테 물어볼게.”
“네, 네. 너무 좋아요…….”
“그래, 나도 기대가 되네. 일단 내려가자, 저녁 먹어야지. 아마 늦으면 형이 엄청 짜증 낼걸.”
감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일상이었다. 지난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안온하고 따뜻한 그런 삶 말이다. 매일 땅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워 모으며 상상했던, 가족과의 하루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여름은 손을 한데 모아 꼼지락거리며 이온에게서 뒤처질까 발걸음을 빨리해야 했다.
***
“들어와.”
커다란 문 너머로 들리는 익숙한 음성이었다. 여름은 제본한 모의고사와 문제집을 품에 가득 안고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문손잡이에 손이 가기까지는 몹시 느렸다.
분명 좋은 일인데,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일의 시초를 떠올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 수능을 본다고 했었나?’
여름의 건너편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이온이 말했다.
여름은 이온이 제 방에 있을 때면 될 수 있으면 테이블에서 공부하려고 했다. 책상에서 하는 것이 의자도 편하고 맞춤이지만, 침대에 누워 쉼 없이 말을 걸어오는 형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그런 이온이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네, 아마도요, 선생님은 그렇게 해 보자고 하셨어요.’
‘그래?’
이온은 그런 여름의 대답에 끄덕여 보았다. 사실 어떻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그 무엇도 정해진 게 없었으나, 선생님인 연우는 경험 삼아 이번 연도부터 수능을 보면 좋겠다고 말해 왔다. 그녀의 선택을 당연히 따르는 여름이었다.
이어지는 말이 없는 이온을 한 번 바라보고는, 재차 풀던 모의고사로 고개를 내렸다. 멈춰 있던 손이 움직였다.
‘그런데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거 아니야?’
‘네, 네?’
‘여행도 다녀오고…… 차 이사님이랑 놀고, 공부할 시간이 있었나?’
이온은 뺨에 괴고 있는 손바닥에 얼굴을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저절로 고개가 올라가고 시선이 마주했다. 아이는 얼이 빠진 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얼마 전에는 홀린 듯 잠에 취해 있느라 수업을 빼먹기까지 했다. 그래도 선생님인 연우의 칭찬과 잘하고 있다는 말에 안심하는 터였는데…….
‘그, 그래도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더 열심히 할 수 있어요.’라고 흐릿하게 끝맺음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였다. 그들의 바람 하나 들어주지 못한다면 아무런 구실을 못 하는 낙엽이나 다름없이 보일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게다가 만일 못한다면, 생각의 끝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열심히 해야지.’
‘…….’
형제는 제 수업이건 성적이건, 그리고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이온은 방에 줄기차게 찾아와 응원의 말을 남겨 주는 편이었지만, 이훈과는 미래에 관해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갑작스러운 재촉과 같은 이온의 말에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나도 빠짐없이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이온이었기에, 죄책감에 섞인 감정 탓에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지금보다 열심히 하려면 환경 좀 바꿔야겠는걸.’
높낮이 없는 이온의 말에 여름이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혼자 하는 것보단, 누가 옆에서 감시하는 게 낫잖아.’
‘…….’
‘대학교에 꼭 가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어?’
왜인지 그의 말에 작은 조롱이 담긴 것도 같았으나 아이는 눈치챌 수 없었다. 멍하니 이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기억이 1층에 있는 이훈의 방문 앞에 온갖 짐을 들고 서 있는 이유였다. 이훈은 초가을에 있는 커다란 기념행사 이전까지 재택근무, 그러니까 집에서 업무를 본다고 했다. 그의 서재는 여느 업무 공간보다 잘 되어 있기에 여름은 그럴 수 있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똑똑.
“들어와.”
아이가 빈손으로 노크하고 난 뒤였다. 분명 서재 안에서 이훈의 목소리가 들려왔건만 들고 있는 책을 세게 쥘 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저릿하게 떨렸다.
그의 옆에서 공부가 정말 잘 될까, 여름은 왜인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지금 들어가는 게 맞을까, 손잡이로 향하는 손이 너무나 느렸다. 그때 뒤로 춘자 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왜 안 들어가세요?”
“아…… 이제 들어가려고요.”
“얼른 들어가서 공부해요. 맛있는 과일 준비해서 가져다드릴게요.”
춘자 씨는 복도 끝 서재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여름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녀가 보고 있으니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고, 여름은 이모님에게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느린 걸음이었다.
손잡이를 향해 시선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양팔로 책을 끌어안은 뒤, 뒤를 돌았다.
이훈은 늘 그렇듯, 가운데에 있는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을 터였다. 분명 바쁜 업무를 보느라 서재에 들어온 저에게는 관심 하나 주지 않겠거니 생각했는데, 몸을 돌리자마자 이훈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단정한 스리피스 정장을 입고서는 의자에 편히 기대 있었다. 고개를 빤히 들고 있으니 저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 해.”
“형이 여기서 공부하라고, 혹시 방해됐으면 그냥 나가도 괜찮은…….”
아이가 뒷걸음질 치니 문에 등이 부딪혔다. 그가 나가라는 말 한마디만 한다면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고 서재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그의 옆에 있고 싶으면서도 이훈에게 거슬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공부를 못 하고 있지 않으냐는 소리를 들은 요즘에는 특히 더 그랬다.
“어딜 나가. 이리 와.”
이훈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나갈 것 같던 여름은 타액을 삼키며 빠르게 다가갔다. 그가 앉아 있는 책상 앞에, 이훈의 정면에 서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훈이었지만, 큰 키 때문인지 그와 시선이 얼추 맞았다.
“네 책상. 앞으로는 저기에 앉아.”
이훈이 턱짓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훈의 책상 앞에는 소파가 있었고, 그의 서재를 두르는 책장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넓은 공간 탓에 빈 곳은 많았다. 그의 책상에 대각선 방향으로 새로운 테이블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제 방에 있는 하얀 테이블과도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으나 의자는 그냥 간이 의자가 아닌 등받이에 바퀴가 달린 튼튼한 의자였다.
“……감사합니다.”
여름은 품에 안고 있던 책과 함께 새로운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에서 공부해도 된다는 허락이나 다름없는 제 테이블을 보니 가슴이 저릿해졌다. 공부의 집중도보다도 공부하면서 이훈을 볼 수 있다는 설렘이 먼저 다가왔다.
이훈에게 거슬리지 않게, 소리 없이 의자를 빼내고는 앉았다. 넓은 테이블은 새것의 비릿한 냄새가 나는 듯했지만 깔끔한 자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아 새것의 티가 잔뜩 났다.
다행히 필기도구를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터면 서재 가득히 들려오는 타자 소리를 끊고 이훈에게 빌려 달라는 말을 해야 할 뻔했다. 아이는 가져온 책을 한쪽에 쌓아 두고는 가장 급한 국어 모의고사 하나를 펼쳤다.
분명 지문을 읽어야 했는데, 눈앞이 흐릿했다. 글씨가 이 앞에 있는데도 점점 멀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제 가까이서 들리는 타자 소리와 사람의 숨소리 때문인 건지 눈앞이 아득했다.
고개를 더욱 모의고사 쪽으로 숙였으나, 이훈을 힐끔거리는 시선을 막을 수 없었다. 인간과 대자연이, 현대 시를 한 번 읽었다 계속해서 들리던 타자 소리가 멎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훈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화들짝 놀라 저절로 숙였던 허리가 쭉 펴졌다. 아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이훈과 시선이 맞닿았기 때문이다.
“왜 자꾸 쳐다봐.”
그를 쳐다보고 있던 건 사실이었지만, 이훈 역시 눈치챈 줄은 몰랐다. 아이가 앉아 있는 의자가 심정을 대변하듯 뒤로 주춤 물러났다.
“쳐다본 게 아니라…….”
손에 쥐고 있던 샤프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채 손을 한데 모았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 혹시 뭐…… 뭘 좋아하시나 싶어서요.”
아이가 줄곧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이온이었다. 가끔 이모님과도 긴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나 하루 있었던 일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는 이온뿐이었다. 그랬기에 아쉬움에 허덕이던 여름은 늘 이훈이 궁금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많았으나, 이훈은 그러지 않았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여름은 꽤 멀리 떨어져 앉은 이날이 기회가 아닐까 싶어 고개를 빳빳하게 든 참이었다. 아이는 어쩔 수 없는 심장 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려 했기에 힘을 주어 참아야 했다.
“그건 왜.”
그는 목을 편히 의자에 기대고는 다리를 꼬았다. 대각선 위치에 앉아 있는 여름이었기에 옆으로 돌아앉은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더 알고 싶어서…….”
“…….”
“이렇게 된 거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 더 좋은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요.”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횡설수설했으나 이유는 맞았다. 그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아이는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는 샤프를 주물럭거리듯 만지며 불안을 삼켰다. 그가 됐다며 돌아서지만 않기를 바랐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네?”
“서로 알아가는 게 좋다며. 근데 나는 다 알고 있다고. 너에 대해.”
보기 드문 이훈의 웃음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아도 티가 날 정도로 활짝 웃곤 하는 이온과 다르게 이훈은 그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이훈은 눈썹이 평소보다도 더 올라갔기에 그가 웃고 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제가 말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세요?”
어느새 이훈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여름은 그가 저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보다도, 그에 대해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이 더 기분을 늘어지게 했다.
“글쎄.”
아이는 멍하니 이훈을 바라보았다. 나도 더 많은 시간이 흐른다면 저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매번 어딘가 어설프고 부족한 저와는 달리 매 순간이 제 손안에 있다는 듯 구는 형의 모습은 경이롭기도 했다.
여름의 경호와 따라다니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여름이 서울 집에 오고 나서부터는 담장을 두르듯 지키고 있던 고용인들까지 있었다. 모두 이온의 아래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아이가 단 한 번, 이온이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자, 헬퍼였던 이와 밖으로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서부터는 담장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사라졌다.
이온이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며 그들을 물렸다고 했다. 이유는 그저 그럴 필요 없어졌다, 그게 전부였다.
여름이 어린아이나 가둬야 하는 이도 아니었기에 이훈은 아무 말 않고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여름을 지킬 사람도, 감시할 이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온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아이의 이야기해 오는 입은 현저히 줄었으나, 집에서 일하는 이모님과 윤 비서 그리고 과외 선생으로 충분했다. 여름에게 말하는 것처럼 이훈은 이미 아이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샤프심은 부러지고도 남았는지, 제 허벅지 위에 있던 샤프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늘도 할 수 없나 하는 생각에 괜히 샤프를 굴리며 괴롭혔다. 지난날처럼 그의 방에 머물며 잠이라도 자야 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나도 알고 싶은데……. 괜한 심술보가 볼에 붙어 버렸다. 붉게 물든 여름의 볼이 부풀었다. 그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아쉬움에서 나오는 심술이었다.
“……저를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장난이었다. 그에게 장난을 걸 수 있는 정도로 컸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훈을 알고 그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마음이 겁을 찍어 눌렀다. 이렇게 말하면 구겨진 표정으로 화를 내거나, 나가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다. 무섭기보다 나도 서운한데, 뭐라는 기분으로 뱉은 말이었다.
여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훈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여름은 제 뜻대로 예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늘 잊어버리곤 했다. 지금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색하게도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보면 안 될 것을 보고, 들으면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굳게 굳어 있었다.
왜? 그제야 심술로 부푼 볼에 숨이 빠져나갔다. 조금 전 심술과 함께했던 장난이 찍어 눌렀던 겁이 새롭게 피어났다. 그가 화라도 낼까 두려워졌다. 차갑게 굳은 얼굴이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일어나야 하나, 괜히 아이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런가 보네.”
귓가 가득히 울리던 아이의 불안한 심장 소리가 이훈의 말과 함께 맞았다. 그는 터뜨리는 숨과 함께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어딘가 힘이 들어갔던 자세가 편하게 늘어졌다.
“이제야 알았다고. 네 덕분에.”
아이는 알 수 없는 이훈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제 덕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만일 머릿속의 생각이 겉으로 티가 난다면 물음표만이 가득했을 여름이었다.
표정이 거의 없는 이훈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가 기분 좋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들뜬 기분이 곱게 올라간 눈썹뿐만 아니라, 어깨도 솟아 있었다. 그는 의자를 더욱 책상에서 빼냈다.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의 오른쪽 허벅지까지 보였다.
“이리 와.”
이리 오라 말하는 이훈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여름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뛰어갈 것처럼 이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공부하던 것도 가져와야지.”
“아.”
그의 앞에 서서 혼나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모의고사를 가져오라는 말을 듣고는 그게 아니구나 싶어 한시름 놓았다. 여름은 풀고 있던 국어 모의고사와 함께 샤프를 들고 이훈에게로 걸어갔다.
이훈의 서재는 다른 곳보다 따뜻하고 무거운 향이 났다. 아무래도 책이 많았고, 매일 같이 머무는 이의 체취를 닮아 가는 듯했다. 아이는 무슨 영문으로 공부할 것까지 들고 오라고 하나 싶었으나, 이훈의 곁에 다가가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훈은 말을 잘 듣게도 옆으로 다가온 아이를 비어 있는 허벅지 위로 올렸다. 아이에게 억,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무렇지 않게 의자를 돌려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어…….”
여름은 놀라 그의 테이블 위로 모의고사를 던지듯 내려놓고는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분명 책상에 앉은 모습이었으나, 의자는 이훈의 허벅지가 되었다. 너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뒤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더욱 어색했다.
“공부해. 나도 일하게.”
이훈의 말에 몸이 잘게 떨렸다. 이 상태로, 이 자세로 공부하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제 속도 모르는 그의 양팔이 몸 사이로 빠져나와 키보드 위로 올라가고, 아무렇지 않게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건 여름뿐이었다.
그의 허벅지에 앉아, 품에 갇힌 순간부터 문제를 풀기는 포기해야 했다.
그의 품 안에서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비틀거리면 그의 몸에 스치기 일쑤였다. 숨조차 겨우 쉬고 있던 여름이었기에 아이는 그저 샤프를 쥔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집중해야지.”
그의 목소리로 몸이 느릿하게 울렸다. 화들짝 놀란 여름의 어깨가 잘게 솟았다 돌아왔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차 화면을 보는 듯했다. 저를 품 안에 안고 어찌나 편해 보이는지, 여름은 오히려 의문이었다.
그가 보고 있으니 펜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끄적이는 척이라도 하기 시작했다. 괜히 지문에 밑줄을 치며 속으로 읽고 있었다.
여름은 집중력도 문제를 이해하는 능력도 남보다 빠르고 높은 편이었다. 그랬기에 어느 문제건 똑같이 집중이 잘 되었고, 부족한 적이 없었다.
분명 그런 줄만 알았다. 아이는 지문이 점차 멀어지고, 흐릿해지는 경험을 오늘 처음 해 보았다.
문제를 보고 있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온몸의 신경이 등 뒤로 모였다. 그의 위에 앉아 있으니 무거울까 몸에 들어간 힘마저 풀 수 없었다. 여름은 그저 문제의 옆에 동그라미를 겹쳐 그리며 불안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작스레 들리는 이훈의 말에 저를 부르는 줄 알고 놀랐던 여름은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그가 전화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훈은 한 손은 핸드폰에 다른 팔을 아이의 팔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몸에 긴장이 잔뜩 들어갔다.
“당연히 다른 날에 해야지. 같은 날에 했다가 뭔 사달을 내려고.”
그는 하는 일 관련으로 누군가와 전화하고 있었다. 신경이 전화로 쏠렸겠다고 생각하니 몸에 들어간 힘이 절로 풀렸다.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가 편하게 늘어뜨리자 어깨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제 어깨에 이마를 묻은 이훈의 머리가 보였다. 분명 몸이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순간적으로 이훈이 기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제 배에 두른 팔 때문인지 완전히 그에게 갇힌 기분이 들었다.
“첫날은 대충 해. 잘해도 욕할 사람들이야, 신경 쓸 필요 뭐 있겠어.”
그의 팔이 꿈틀거리더니 제 배에 손바닥을 펼쳤다.
“그렇게 하던지. 이제 끊어.”
그러고는 배에 있는 살을 쓰다듬듯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통화는 손에 움직임과 동시에 끊겼다. 아이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져 갔다.
“딴짓하지 말고 공부하라니까.”
티셔츠 위로 그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제 배에 있는 살을 파악하는 것 같기도, 쓸어내리는 것 같기도 한 그의 손짓은 오히려 여름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인 건 확실했다.
그의 손이 점차 위로 올라오려다 멈췄다. 아랫입술을 세게 다물고 있던 터라 그의 손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더욱 올라오겠다고 생각했건만 이훈의 팔은 거기서 떨어졌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테이블 위로 올라오고, 이전처럼 팔이 아이의 옆에서 나와 키보드 위로 올라갔다.
어색하고도 긴장감 가득한 시간의 시작이었다. 여름은 문제를 풀기보다 몸에 가득 들어간 긴장 풀기를 목표로 잡고 그의 허벅지 위에서 익숙해지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시간과 연습은 모든 병의 약이라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의 위에서도 편히 문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온은 무얼 읽는지, 화면 가득히 보이는 문서들을 읽고 있었다.
그에게 들키지 않게 모의고사를 바라보며 이훈의 모니터를 힐끔거렸으나 하얀 건 바탕이고, 검은 건 글씨라고 무슨 말인지, 무얼 뜻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이훈이 무얼 하는지 알아채는 일은 진작에 포기했다.
하나 발견한 건 그가 읽는 문서 곳곳에 이한 그룹이라는 명칭과 직인이 박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형제가 이한 그룹의 대표이긴 한 모양이었다. 여름은 놀란 마음을 감추고 여전히 현대 시를 읽어 내고 있었다.
이훈이 밝은 화면에서 눈을 떼어 낸 건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였다.
제 품에 있던 아이의 존재도 잊은 채 화면을 읽어 내리기 바빴다. 창립 기념 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직원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기업에 돈줄이 되는 높은 이들의 비위까지 맞춰야 했다.
두 번에 걸쳐 진행하는 행사에 신경이 어찌나 들어가는지, 그동안 출근이라면 조금도 하지 않던 이온을 총괄직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주주 총회를 겸사겸사하는 행사로 이사와 주주들의 가족까지 초청하는 화합을 보일 예정이었다.
뭐가 어찌 됐건, 이훈은 이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 유일했다.
썼던 안경을 벗고 피곤한 눈을 쓸어내릴 때쯤에야 제 품에 있던 아이를 알아챘다. 호기롭게 문제를 가져와 공부하는 척을 하더니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원래도 낮잠을 가끔 자는 이였기에 놀랍지만은 않았다.
이훈은 아이의 배와 가슴에 손을 얹고는 의자를 뒤로 물렸다. 저절로 잠에 빠진 여름의 몸이 들렸다. 그는 조심스레 아이의 몸을 옆으로 돌려 품에 고개와 몸을 기댈 수 있게 했다.
새근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잠에 빠진 아이는 아무리 건드려도 깨어날 것 같지 않은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이훈은 아이의 허리춤을 끌어안고 한쪽에 드러난 귓가에 얼굴을 가져갔다.
아이의 귀 뒤에서는 뽀얗고 가벼운 향이 났다. 이훈은 눈을 지그시 감고 향을 들이마셨다. 남이 보면 육아를 하느냐고 물을 자세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제 모습이 더 어이가 없었다. 헛웃음을 겨우 삼키고는 머리를 의자에 묻었다. 그 와중에 여름을 끌어안은 손에 힘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의자에 기대 눈을 지그시 감았으나, 제 품에서 자는 아이처럼 잠이 오지는 않았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누런빛이 들어왔다.
“뭐 해?”
무거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새어 들어오던 빛이 사라졌다. 그 대신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오붓한 시간을 내가 방해한 건가?”
이온은 입고 있던 옷 한 벌 벗지 않아 단정한 셔츠 차림으로 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생긋 웃는 얼굴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여름이는 자는 거야?”
테이블을 돌아 이훈의 앞으로 다가온 이온이 어깨를 떨며 웃고 있었다. 분명 아이는 성인이었고, 미성년자를 벗어난 지 한참이 되었다. 게다가 그리 작은 키도 아닌 평균 남자의 키여서인지 어디서 아이 소리 하나 듣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형제는 그들 자신도 모르게 여름을 아이 취급했다.
이온은 검지로 소리 하나 없이 자는 여름의 뺨을 꾹 눌렀다. 성장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음에도 살결에 잡티 하나 없이 매끈했다.
“날짜는.”
허리를 숙이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온이 이훈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다음 달 초 정도로 하게. 너무 더워지면, 짜증 나잖아.”
“나쁘지 않네.”
이훈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의 오금과 어깨에 팔을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품의 아이를 소파에 걸어가 눕힐 때까지 여름은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낮잠치고는 깊게 잠든 게 분명했다.
“공부 좀 했어?”
누워 있는 아이의 반대편 소파에는 이온이 앉았고, 재차 자리로 돌아간 이훈은 테이블 앞에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
“낙서만 하던데. 미대라도 보내야 하나.”
이훈은 그렇게 말하며 안경을 들어 썼다. 그런 이훈의 말에 이온은 큰 숨을 터뜨리며 웃었다. 양팔을 벌려 소파에 걸치고는 다리를 꼬았다. 풀어헤친 셔츠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형이 애를 끌어안고 있으니까 그렇지.”
“너만 하겠어?”
이훈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누구보다 편하게 늘어진 이온을 향해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품 안에 여름을 넣어 놓는 이온이었다. 그런 이온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
“우리가 너무 닮은 것 같아서. 놀랍다고.”
출발선은 달랐다. 이온은 아이를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지만, 이훈은 거부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적에 들이는 일만큼은 막으려 했던 게 엊그제 같았다. 분명 출발하는 길도, 달리는 길도 서로 달랐으나 도착점이 같았다.
이온은 이훈이 여름과 함께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강하게 느꼈다. 피와 유전자는 속일 수 없이 진실한 것이며 어쩌면 출발선보다도 도착선이 같아지는 건 한순간일 거라고. 무서울 정도로 형과 닮아 있었다.
“그러게.”
아무런 말 없이 시선을 피하겠거니 싶었던 이훈이 입을 열었다.
“이젠 알 것 같더라고.”
끝을 알 수 없는 이훈의 말에 이온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다른 이가 보았으면 무섭게 웃고 있다고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통쾌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