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31)

***

여름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스르르 닫히는 눈꺼풀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가로막혔다. 아이는 몸을 세웠던 힘을 잃고 이온의 위로 완전히 쓰러졌다. 이온의 다정한 말을 끝으로 겨우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아득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 아니었는지, 중간중간 뜨이는 눈은 기억으로 남았다. 분명 앞에는 둘째 형인 이온의 얼굴만이 자리했으나, 눈앞에는 이훈이 자리하기도 했다.

변화가 적은 표정과 함께 반듯하게 올린 머리는 쉬이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무겁게 뜬 시야 앞으로 보이는 이훈은 앞머리가 젖어 가볍게 내려와 뜨거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흐트러진 이훈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거칠었다. 짧은 순간 그에게 미움받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조금의 힘과 정신이 있었다면 이훈을 그대로 끌어안았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았을 때. 그때가 몇 시였는지 여름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지금은 아침 시간은 훌쩍 넘긴 오후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침대에 우두커니 누워 있던 여름은 이불로 덮인 발끝을 바라보았다. 발끝 너머로 커다란 창이 보였다. 쭉 뻗은 잔디의 끝에는 호수의 물이 빛에 비추어 반사하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 보는 따뜻한 빛이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시선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시간이 생긴다면 밝은 날 호수 근처에서 형제와 천천히 거닐고 싶었다. 호수 안에 사는 물고기도 함께 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일어났어?”

이제는 눈을 감고 들어도 알 수 있는 이온의 목소리였다. 그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끔한 이온이 가벼운 카디건을 걸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고 싶었으나, 무겁게 내려앉는 몸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은 어때? 아직도 아파?”

여름은 이온의 질문에 긍정이라도 한다면 병원에 가야 할까 싶어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아래가 찢어질 듯 아파져 오지도 않았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 다행이다. 약을 발라서 그런가. 효과가 있었나 보네.”

혀가 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름은 저었던 고개를 멈추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조금 더 자. 일어나면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 호수에 가고 싶었다며, 형이 말해 주던데.”

이온은 흘러 내려온 이불을 여름의 목 끝까지 올려 주고는 가슴 부근을 토닥였다. 아이는 할 말을 잃고 그의 눈을 끔뻑이며 쳐다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형제는 늘 그랬다. 말하지 않아도 제 속을 들여다보았으며 바라는 대로 해 주었다. 가끔은 구름을 거닐고 있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어 두려웠다. 여름은 그토록 바라던 날이 하루하루 이어졌음에도 울컥하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아프게 깨물어야 했다.

***

알 수 없는 날씨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지만, 기온은 뚝 떨어져 있었다. 전날 비가 온 것도, 앞으로 비가 올 예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출발하기 전 겉옷을 챙기길 다행이었지, 여름은 한쪽에 걸어 놓은 옷을 위에 걸치고는 신발을 신었다.

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곳곳에서 아우성치는 근육통만이 남아 있을 뿐, 어제와 같은 두통이 있는 것도, 열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아팠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전부 끝을 모르는 호수 때문이었다. 커다란 별장이 호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형제와 아이는 단 한 번도 물가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래로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겨우 밤에 가끔 나와 보는 것이 전부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호수를 둘러보는 산책은 이온의 입에서 먼저 나온 제안이었다. 전부 여름이 초래한 일이긴 했으나, 무뚝뚝한 첫째에 눈치만 보기 바쁜 막내가 전부인 가족에서 이온이 아니고서야 산책하러 가자는 말이 쉽게 나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온의 입에서 나온 제안은 불가항력이었다. 야속하게도 커다란 저택에 단 하나뿐인 침대에서 매일 밤 같이 자야 하는 형제였기에 여름의 작은 움직임이 이온의 눈에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아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커다랗게 나 있는 통창을 바라보았다. 해가 막 떠오르고 있을 때는 깊은 수면이 드러났고,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버티고 있을 때는 눈부시게 빛나는 물결이 창을 뚫고 들어왔다. 노르스름한 노을이 질 때는 깊은 물이 진한 색으로 변해 있는 광경은 감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여름의 눈은 당장이라도 깊은 호수에 뛰어들거나, 주변을 서성이며 구경하고 싶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아침을 먹다가도 식빵을 입에 물고는 뒤로 돌아 창 너머를 바라보는 아이였다. 모를 수 없는 아이의 바람은 형제의 헛웃음으로 변했다.

분명 간절해 보이는 여름이었으나, 단 한 번도 밖에 나가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법이 없었다. 반년이 넘는 시간,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여름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했다.

겨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아이에게 바람은 과분한 것이었다. 주어진 상황에 감사할 뿐, 그보다 더한 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하루라도, 조금이라도 눈에 담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온이었다. 이온이 만들어 낸 모습인지, 여름이 그런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온의 얼굴에서는 포만의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줄곧 생각해 오던, 바라던 모습이었다.

“비가 오려나.”

가장 앞에서 거닐고 있던 이훈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늘 목 끝까지 잠겨 있는 하얀 셔츠를 입을 것 같은 이훈은 이곳에 올 때면 편한 옷만을 들고 왔다. 출장이라는 핑계로 떠나는 다른 지역은 전부 일이었다. 그에게 유일한 휴가는 지금 위치한 별장뿐이었다. 이온은 유독 편한 일상복을 입고 있는 이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오길 잘했지.”

호수 가까이 산책하러 가자는 이온의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이훈이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이온이 팔을 조르고, 여름이 따가운 눈빛을 보내면 짜증스럽게 천장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훈이었기에 함께 산책을 나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원형으로 나 있는 호수는 한 바퀴를 기꺼이 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 크지 않았으며, 산자락이 두르고 있는 물가였기에 크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히려 그 점이 여름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가고자 하는 곳을 단번에 파악하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이었으나, 별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호수를 두르고 있는 길 정도는 다져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형제는 걷고 또 걸었다. 물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차가웠으나, 코가 시릴 정도는 아니었다.

물밑이 보이지 않는 호수는 별다를 게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자연에서 자라나는 물가였다. 주변을 메우는 나무와 많은 생명체가 주변을 꾸미고 있었을 뿐 형제의 눈에는 그저 별장 앞에 자리한 자연,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아이는 달랐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듯 눈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잘게 출렁이는 호수의 진동도, 가끔 땅을 밟고 움직이며 지나다니는 생명체들도 전부 신기했다.

여름은 한 곳에서 나고 자라 안아 주는 이 하나 없이 혼자 자랐다. 그리고 평범하게 학교에 다녔다. 물론 학교에서 평범한 아이들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했지만, 그리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단지 아쉬웠던 점 하나는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또 눌렀어야 했다는 것이다. 검은색 가위가 아닌 노란색 가위를 쓰고 싶어도 보육원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색뿐이었고, 학교에서 하는 소풍을 가고 싶어도 보육원 아이들은 단체로 약속이라도 한 듯, 빠져야 했다.

그게 전부였다. 불만 없는 삶이었다. 그때면 몰려오는 서운한 감정을 추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육원이 주지 않은 ‘한여름’이라는 이름 하나만이 제 것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수많은, 수백 명의 아이와 어른들이 함께 지내야 했던 커다란 보육원보다야 작은 크기였지만 ‘한여름’에게는 단숨에 집이 생겼다. 보육원이라는 집을 잃을 뻔한 상황에서 얻은 집이었기에 꽤 모순적이었다.

형제의 집에서 보낸 시간은 지금껏 살아온 곳에서는 상상도 못 할 여유였다. 아이는 늘 주어진 여유에 감사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오늘처럼 새로운 곳에서의 기억으로 정신이 팔릴 때면 다짐을 까먹곤 했다. 여름은 아랫입술을 꾹 물어 더 이상 입이 벌어지지 않도록 의식해야 했다.

“저기서 쉬었다가 갈까.”

호수의 반 바퀴를 거의 돌았을 때쯤 이온은 손을 쭉 뻗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호수 아래로 향하는 비스듬한 길은 커다란 나무로 인해 그늘이 져 있었다. 호수의 찰랑이는 물과 가까운 것이 발을 담그기에 어렵지 않은 위치로 보였다.

이온이 말한 곳으로 걸어간 이훈은 어렵지 않게 땅에 주저앉았다. 괜스레 여름의 눈이 커졌다. 이훈과 같은 사람이 땅바닥에, 그것도 흙이 가득 날리는 땅에 앉아 있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아서였을지도 몰랐다. 여름은 괜히 높은 산과 같은 남자가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간지러워졌다.

“발 한번 담가 봐.”

물이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있을 뿐, 산에 있는 계곡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커다랗고 작은 돌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여름은 괜히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형제의 눈치를 보다 커다란 돌을 밟고는 쪼그려 앉았다. 물은 차가웠다.

이온의 말대로 여름은 신을 벗어 발끝부터 푹 담갔다. 머리를 찌르르 울리는 차가움이 골을 찔러 왔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느껴지는 물줄기가 간질거리게 했다.

저절로 몸이 형제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간질거리는 기분을 함께 느끼고 싶었지만 바라만 봐도 충분한 그들의 모습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활짝 웃는 아이의 모습에 형제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해, 굳었으나 이내 마주하여 웃었다. 물론 움직임 없던 이훈의 입꼬리는 여전했으나, 여름은 그도 이 기분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이온이 재밌냐며, 감기 걸리니 나오라 재촉할 때까지 아이는 발장난을 치며 호수를 눈에 담았다.

***

여름이 별장에 돌아오자마자 이온과 함께 욕실로 향하는 건 당연했다. 물가에서 어서 나오라며 재촉하던 이온의 손을 잡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름뿐만 아니라 이온까지 홀딱 젖어 버린 바람에 호수를 한 바퀴도 채 못 돌고 별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물 떨어뜨리지 말고 들어가.”

그 사이에 윤 비서에게 전화가 온 이훈은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귓가에 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욕실을 가리키며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는 길에 젖은 옷이 마를 법도 한데, 찬 바람만 가득했던 탓에 오히려 추위만 더 얻은 셈이 되었다.

이온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위의 옷을 올려 벗어 던지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 뒤를 여름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이훈은 저들이 한 곳에 들어가 그저 추위를 달래기 위해 따뜻한 물 아래에 있다가 순순히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훈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윤 비서의 이야기를 더욱 잘 듣기 위해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들숨 날숨을 인식하는 순간 거슬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들의 모습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함이었다.

“추, 추워요…….”

아이는 욕조에 들어가 앉으면서도 손을 모아 입김을 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지근한 숨이 손 주변의 온도를 높였다. 수도꼭지에서는 뜨거운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아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게 나신이 된 이온 역시 넓은 욕조에 있음에도 여름의 옆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아직도 추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욕실 안에 있는 욕조는 네모난 형태였으나, 크기가 넉넉하여 덩치가 있는 형제가 전부 들어앉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아이는 집에 있는 욕조들을 보아 와서인지, 이 정도 크기에 쉽게 놀라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여름이 그 사실을 인지했다면 배가 불렀다며 자학했을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리 와.”

팔을 욕조의 테두리에 걸치고 있던 이온은 팔을 내려 비어 있는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쭉 뻗은 이온의 허벅지 위로 아이가 올라탔다. 당황할 새도 없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얼굴을 붉힐 겨를도 없이 아이는 금세 제 형의 위로 올라타 있었다.

“힘 빼.”

아이와 형의 교류는 대부분 욕실에서 이루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온이 먼저 여름에게 가족과 함께하는 샤워가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길 수 있도록 해서인지도 몰랐다.

“열이 날 것 같아?”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여름이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소름이 돋은 팔이 잘게 떨릴 뿐, 열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의 맨살을 쓸어 주던 이온은 천장을 바라보고는 들리지 않는 숨을 뱉었다.

허벅지를 드는 대로 들리고, 허리를 트는 대로 움직이는 아이의 무게는 여전히 가벼웠다. 팔랑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아이였기에 허벅지 위에 무게를 전부 내려놓는다고 할지라도 가벼운 건 가벼운 것이었다.

쉽게 느껴지지 않은 아이의 존재가 흥분으로 다가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차라리 모른 척 구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다행이네.”

“괜히 들어갔나 봐요. 아직도 추워요.”

아이는 따듯한 기운이 절로 나오는 이온의 몸 가까이 엉덩이를 이용하여 슬며시 달라붙었다. 후회 가득한 어조는 호수에 괜히 들어가 감기라도 얻어 온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재밌었으면 됐지, 재미없었어?”

아이가 고개를 들어 살며시 이온의 눈을 바라보았다.

“…… 재미있었어요.”

“산책하길 잘했지?”

여름은 본래 호수 근처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욕심 없는 아이는 눈앞에 있는 사탕조차 집어 먹지 않았기에, 여름 역시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온도를 느끼기 바쁜 동물처럼 달라붙었다.

“그럼 형한테 상 줘야지.”

이후 여름의 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이온의 손은 어쩌면 당연했다. 아이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온의 말에 대한 마땅한 문장을 찾느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서로 마주 안고 있는 자세는 숨어 있는 온도를 느끼기 딱 좋았다.

그러나, 삽입 이전에는 아이에게 오로지 무리가 가는 자세였다. 길을 만들기 위해 손으로 풀어 나가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꽤 공을 들이는 형제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온은 여전히 어, 어 하며 무슨 상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게 분명한 여름의 허리를 부여잡고 몸을 돌렸다. 어, 어 하는 소리가 어? 하는 높낮이로 변하는 순간 아이의 시야가 변했다.

탄탄히 자리한 이온의 살갗이 보이던 여름의 눈에는 커다란 욕실이 한가득 들어왔다. 앞에서 들리던 제 형의 뜨거운 숨소리는 이제 뒤에서 들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틈도 없이 이온이 등을 꽉 눌러오는 탓에 무릎을 가벼이 구부리고는 앞으로 쭉 뻗어 있는 이온의 종아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아 몸을 숙여야 했다. 몸의 무게가 앞으로 쏠리며 저절로 들린 하반신을 뚫고 들어오는 건 이온의 손가락이었다.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형제의 것이 함께 들어와 좁은 길을 뚫어 놓았다. 그래서인지 녹진하게 풀려 있는 내벽은 이온의 손가락을 단숨에 두 개도 삼켰다.

“흐응…….”

여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이온의 두꺼운 종아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잘 들어간다. 분명 다 뺐는데, 엄청 부드럽네.”

형인 이훈과 함께 기절한 아이를 눕혀 씻기고는 뒤처리를 함께했었다. 아이가 눈을 감았더라도, 기절했을지라도 멈추지 않는 형제의 움직임은 동물의 것이나 다름없는 짐승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 결과에 부합하게 달큼한 체취와 함께 아이의 구멍에서는 사정액이 넘치다 못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전부 빼냈다고 생각했는데, 닿지 않는 곳까지 자리하던 것이 구멍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 풀어도 되겠다, 이미 열려 있네.”

“으응…… 흣…….”

구멍에서 손가락이 짧은 소리와 함께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아이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이제는 이온의 종아리를 꼬집는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가고 고개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예쁘다.”

한쪽 팔은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던 여름의 배를, 다른 손으로는 기둥을 잡아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멈출 새 없이 이온의 허벅지에 내려앉게 된 여름의 입이 단숨에 벌어졌다.

“아! 응, 으!”

벌어진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프다고 말하기 전에 끝나 버린 주사나 다름없었다. 허공을 가르고 있는 여름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아래를 가득 채우는 형의 성기를 받아들여야 했다.

무슨 기분이지? 너무 아픈데, 무서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으니 더욱 이상했다.

여름의 배를 두르고 있던 이온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고환이 아이의 살결에 닿을 때까지 여름의 몸을 꾹 눌러 뿌리까지 삽입했다.

조이는 여름의 내벽은 여전히 자극적이었으나, 녹진하게 풀어진 아이의 안이 젤보다도 더 뛰어난 효과를 보여 참을 만했다.

이온의 큰 손이 아이의 부드러운 살결을 따라 올라갔다. 작은 가슴 가운데, 도톰하게 튀어나온 양쪽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가슴에 모여 있는 살집이 손안에 들어찼다.

“아, 응! 간, 지러워요…… 으, 흐읏!”

본래 부드러운 아이의 목소리는 섹스만 하면 거칠게 변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쾌감에 섞여 목을 긁는 소리를 내는 아이의 목소리는 이온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애절하게 놓아 달라며, 빼 달라 애원하는 제 동생의 모습은 능히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살 좀 쪄야겠다. 잡히는 게 이리 없어서야.”

이온의 손이 움직이고 있는 곳은 아이의 가슴이었기에, 살이 없는 곳이 복부도 아닌, 가슴이라는 뜻이었다.

“애라도 낳으면 젖이 생길 텐데. 그럼 살이라도 붙지 않을까?”

“흐응…… 아, 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온의 것은 그가 내뱉는 말을 따라 내벽이 잘게 흔들렸다. 원래에도 커다랗게 느껴지던 이온의 성기가 안에 드리우니 작은 움직임에도 머릿속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온통 신경이 아래에 쏠려 있으면서 이온이 움직일까 봐 겁을 잔뜩 먹고 있던 탓에 그가 하는 말이 귓가에 머물렀을 뿐, 온전히 들리지 않았다.

순간 아이의 등이 이온의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이온이 여름의 배에 두르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온 모르게 살며시 엉덩이를 들어 그의 기둥을 빼내고 있던 아이의 노력이 짧은 순간에 수포가 된 것이었다.

“아, 응!”

이온이 허벅지와 허리에 힘을 주어 삽입한 성기를 튕겼다. 허리를 잔뜩 비트는 탓에 아이의 몸을 강하게 부여잡아 추삽질을 반복했다. 얼마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어 몰려오는 감각을 참아야 했다.

“네가 왜 이렇게, 좋을까? 응?”

나도 모르겠다. 이온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응! 하…… 아! 흐응!”

아이의 눈물은 더욱 빠르게 흘러내렸다. 자극이 심한 자세이기도 했으며 눈앞에 이온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제 허리를 두른 이온의 팔을 애절하게 부여잡은 손이 지탱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동생이라 그런 거겠지. 가족이니까.”

가족을 사랑하는 건 어쩌면 이유가 필요 없는 당연하니까. 아이와 가까이하고 망가뜨리고자 하는 마음이, 그 이유 때문일 것이라 믿었다. 이온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온의 허리 가까이 오는 욕조 속 물이 세차게 움직였다.

“네, 아, 응! 가, 족, 하응!”

아이는 늘 그랬다. 가족이라는 말에 목숨을 걸 수 있는 맹목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름은 얼핏 들리는 단어의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대답했다.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는 몰랐으나, 아이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아이의 안에 뜨거운 것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울컥 쏟아지는 것들이 생생히 느껴졌으나, 욕조의 물인지 이온의 사정인지 쉬이 구별할 수 없었다.

“혀, 혀엉…… 읍, 흐응.”

목구멍을 막아 오는 울음도,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도 전부 무서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이온의 살갗에 가둬지고 싶었다. 그의 숨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것도 살아 숨 쉬는 것 하나 보이지 않는 모습이 두려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응, 여름아. 왜?”

이온의 사정은 아이의 많은 사정 끝에 오는 단 한 번이었지만, 사정 끝에 이온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멎었다. 이온은 허벅지를 들어 올려 추삽질을 하기보다 허리에 힘을 주어 느릿하게 내벽을 휘젓기를 반복했다.

“무, 서워, 요…… 안아, 주세요…….”

무서운 것도 많네, 이온은 그렇게 말했지만 다정한 웃음기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당장 몸을 돌려 이온에게로 안기고 싶었으나, 아래에 고정된 성기는 고개마저 돌리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온의 손이 위로 올라와 아이의 유두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도톰하게 튀어나온 유두를 꾹 누르고는 꼬집어 튀어나오게 하기를 반복했다.

“형이 그렇게 좋아?”

이온의 목소리에는 충분히 웃음기가 가득 차서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이미 제정신을 부여잡고 있기란 지금의 여름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온이 물어 오는 질문은 자다 일어나도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쉬웠다.

“네, 간지러, 워. 네…… 좋아요. 형, 좋아요…….”

“그래. 나도 네가 너무 좋아.”

***

형제의 여행은 몹시 여유로웠다. 매일 해야 했던 공부도 하지 않고 잠을 많이 잤다. 특히 여름보다도 이온이 자는 시간이 늘었다. 여름을 끌어안고 느지막하게 일어난 이온은 점심을 먹고 주변을 산책하다 또다시 아이를 끌어안고 잠을 잤다.

이온을 따라 여름도 잠이 올 때면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그의 품 안에서 가져온 영어 단어장을 외우거나, 저 멀리 보이는 호수를 한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건 아주 가끔 몸에 힘이 없을 때만이었다.

대부분의 오후는 이온이 잠이 들었다는 걸 손을 흔들어 확인한 뒤, 이온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는 별장에서 빠져나오고서부터 시작된다. 이온은 심심해하는 아이를 알았기에 원할 때마다 별장 주변을 산책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서는 매일 몇 시간씩은 산책하는 여름이었다.

물론 대부분 이훈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빠져나오는 거였지만 말이다. 이훈이 전화를 받으며 목소리를 높일 때쯤 신발을 신었고, 이훈이 초조한 발걸음을 숨기지 못할 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별장 주변은 비가 오든 비가 오지 않든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여름은 운동화를 고쳐 신고 호수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에는 형제들과 걸었던 방향이 아닌 별장의 입구 쪽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호수를 돌아볼 참이었다.

이훈의 차를 타고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가니 넓은 흙길이 보였다. 옆으로 나 있는 호수는 여전히 느릿하게 넘실거렸다. 그리 덥지 않아서인지 시원한 바람이 아이의 앞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별장에 여행하러 와서는 듣지 못했던 자동차의 배기음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더니, 저 앞에서부터 불빛이 눈을 찔러 왔다. 저절로 손을 올려 눈을 가리니, 귓가를 공격하던 소음이 사라졌다. 아이에게 가까이 오던 자동차가 멈춘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차가 있었나, 여름은 왜인지 몸을 순환하고 있는 감각들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의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렸다. 키가 이훈 정도 될 것 같은 커다란 남자였는데, 여름의 얼굴을 보자마자 살았다 싶은 환한 표정이었다.

“혹시 이 근처 사세요? 길 좀 물어도 될까요?”

처음에는 윤 비서님이라도 오셨나 싶었다. 산 깊숙한 곳까지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여름의 머릿속에서는 윤 비서뿐이었다. 그러나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가만히 서 있는 아이의 앞까지 빠르게 다가왔다.

“저희가 이 근처 호텔을 찾아가고 있는데, 내비게이션이 말썽이라.”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으로 보고 있던 내비게이션을 내밀어 보여 주었다.

여름의 동공이 빠르게 떨렸다. 여름의 주변에는 겨우 형제와 과외 선생님 그리고 매일 같이 보는 이모님과 비서님뿐이었다. 게다가 반년도 넘는 시간 한 장소에서 사람 하나 접하지 않은 채 지냈다.

넓지 않은 아이의 사회에서 일면식 없는 사람은 두려움과 당혹 그 자체였다. 비록 겨우 길을 물어 오는 남자일지라도 말이다.

여름이 꾸려 놓은 자리에는 길을 물어 오는 남자 따위가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전혀 학습되지 않은 두려움과 어설픔이었다. 여름은 꾹 다문 입술을 쉽게 떼어 낼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남자는 바쁜 길을 떠나야 하는지, 핸드폰 화면 속의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이곳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어 왔다.

여름은 고개를 제 쪽으로 숙인 남자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채 주먹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떨고 있다는 사실을 눈앞의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떻게 입을 떼야 하지. 언어 구사 능력이 사라진 사람처럼 입술이 떨리고 눈가에 열이 올랐다. 이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덩치도 크고 차까지 있는 이가 저를 쫓아오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저기요? 이 호텔 가는 길 몰라요?”

아무 대답 없는 여름에 모습에 화가 났는지 남자는 한 발짝 더 다가와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름에게로 몸을 굽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 아, 그게…….”

남자의 걸음에 또다시 물러난 여름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알겠다 모르겠다 별 답이 없는 자신에게 짜증을 느낀 것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하얗게 변해 갔다.

“제가 잘, 저도 여행을…… 아니 그게 아니고…….”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뒷걸음질 쳤다. 남자를 피하고 싶었다. 여름은 뒤에 오르막길이 있는 것도 모르고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여름은 오르막길의 도입부에 발이 삐끗하여 뒤로 넘어갔다.

손을 바닥에 짚지 않았으면 머리부터 부딪혔을 게 뻔해, 넘어지고서도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아니,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왜 뒷걸음질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여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제 상황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남작 건네는 손을 거절했다가는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천천히 팔을 들었다. 그러나 여름의 손이 남자를 맞잡기도 전에 사이로 들어온 어느 한 사람 탓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여름아.”

익숙한 음성에 시선이 절로 올라갔다.

“어디 갔었어.”

이온이었다. 그토록 머릿속에서 떠올린 사람 중 한 명, 이온이 아이의 양쪽 팔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분명 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이온을 마지막으로 산책을 나온 건데, 어느새 편하게 입은 일상복 차림의 이온이 제 눈앞에 있었다.

마법과도 같았다. 형제는 어쩌면 하늘이 저를 위해 내려 준 사람과도 같았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면 눈앞에 나타났고, 힘이 들 때는 저를 누구보다 높은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이들이 마법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이는 이온의 팔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여잡았다. 그는 그런 여름의 손을 맞잡아 주며 남자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온의 등에 가로막혀 저를 떨게 했던 남자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목구멍을 막아 오는 긴장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온의 한 손을, 여름은 양손으로 꽉 잡았다.

“이 학생 일행이세요? 혹시 제가 밀었다는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혼자 넘어진 거니까요.”

남자는 갑자기 등장한 이온에게 빠르게 변명했다. 그러나 이온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의 목적을 먼저 물었다. 조금의 감정도 표정도 없는 말이었으나, 아이의 안정을 취하기에는 이온의 존재만으로도 적합했다.

“어디 가신다고요.”

“아, 그게 이 호텔인데요.”

“아래로 내려가서 직진하시다 보면 이 길과 비슷하게 생긴 큰 골목 하나가 나옵니다. 그 길로 들어가면 있을 겁니다.”

이온은 그렇게 말하고 빠르게 등을 돌려 오르막길을 걸었다. 그의 한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던 여름이기에 그의 뒤를 따르는 건 당연했다.

산책을 위해 운동화를 고쳐 신고 걸었던 길은 따뜻했는데, 그의 손을 붙잡고 돌아가는 길에는 왜인지 차가운 바람이 많이 불었다.

결국, 여름은 길 하나 물어 오던 남자에게 아무 대답도 해 주지 못했으며, 조금의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이유를 모르겠다. 그저 입술이 떨리고 목구멍이 굳었다. 보육원이 불에 타기 전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주변 이에게 말을 거는 용기가 없지는 않았는데, 이상했다.

그러나 이온의 존재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절로 들게 했다. 모순적이지만 그랬다. 여름은 이온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으며 운동화를 벗었고, 익숙한 소파에 앉았다.

책상 주변을 돌아다니며 전화하고 있던 이훈 역시 아이의 모습을 보더니 티가 나지 않게 동공이 커졌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책상 위로 던져 놓은 뒤, 소파 근처로 다가왔다. 어느새 여름의 앞에는 구급상자를 들고 있는 이온, 그리고 이훈이 있었다.

인제 보니 손바닥이 아주 엉망이었다. 아스팔트의 바닥도 아니고 포장 하나 되어 있지 않은 흙바닥이었으니 손바닥이 엉망으로 까져 피가 나고 있음이 당연했다. 이온의 손을 잡을 때만 해도 몰랐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는데, 왜인지 형제가 제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제야 따끔거리는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왜 넘어졌어?”

소파에 앉은 여름의 아래로 무릎을 접어 앉은 이온의 아이의 다친 손바닥을 확인하고 있었다. 손을 어찌나 엄밀히 보는지, 여름의 시야에는 이온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

결국, 이온은 소독약을 가져와 아이의 손에 천천히 바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돌아온 감각에 손이 움찔거렸으나, 이온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냥, 길을…….”

사실 그 남자가 무어라 한 말은 딱히 없었다. 그저 길을 잘못 들어 지나가고 있는 저를 붙잡고 물어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자에게 들었던 감각을, 입이 꾹 다 물린 저의 모습이 병일까 두려워 형제에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왜 넘어져.”

“…….”

“겨우 길을 물어봤을 뿐인데, 왜 손이 이렇게 되냐고.”

이온은 고개를 들어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에 관해 물어 왔으며, 이미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저 대답해 주면 될 뿐인 상황에서, 손이 엉망이 될 정도의 일이 따로 있었을 것이라고.

아이는 분명 그의 뜻을 알아차렸음에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저 눈가가 손바닥의 상처처럼 붉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여름은 울지 않으려 했다. 마음속으로는 울지 않겠다고 몇 번을 속삭였는데, 이온의 뜻에 맞춰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모르는 사람이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이 무서워졌으며, 심장이 비이상적으로 뛰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눈물이 먼저 나왔다.

“왜 울어.”

제 아래에 앉아 있는 이온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팔짱을 끼고 있는 이훈을 굽어보았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이훈을 보고 있는 시야가 흐릿해지고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무서웠어요.”

“뭐가.”

손을 올려 눈물을 닦고 싶었지만, 이미 손바닥에는 이온이 둘러준 것인지 하얀 붕대로 가득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흘린 눈물은 아이의 목소리마저 물기 가득하게 만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물어보는데 입이, 안 떨어지고…….”

병에 걸렸다. 확실했다. 아무리 부정해도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여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더욱 짙어졌다.

“형, 형들이랑 윤 비서님도…… 이모님한테도 쉬운데…….”

어려웠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제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 뿐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고 손을 찢어 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이는 멍청한 편이 아니었다. 과외 수업만 해도 그랬다. 선생인 연우가 한번 말하면 한 번에 알아듣고 평생을 기억하는 아이였다. 기본적으로 머리도 좋았으나, 노력의 결이 달랐다. 할 줄 아는 게 공부뿐인 여름에게는 오롯이 모든 노력을 쏟을 수 있는 곳이 공부뿐이기도 했기에 결과는 당연히 좋았다.

그러나 아이가 배울 수 없는 부분에 있어서는 바보 천치, 아는 것 하나 없는 백지나 다름없었다. 사회와 관계가 그러했다. 버려진 보육원에서 형제에게 구해진 여름은 아주 작은, 사회에 갇혀 버렸다. 물론 여름은 모르는 일이었다. 여름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작은 사회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여름의 생활 반경은 형제의 커다란 집, 그리고 정원. 그게 전부였다. 그랬기에 사회는 무슨, 숨 쉬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기회조차 없었다. 여름은 무지의 늪에 계속해서 빠져들고 있었다.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정체된 여름은 그저 뒷걸음질 치며 사람에게서 멀어졌기에 아이가 지나가는 사람마저 무서워하는 일은 당연했다.

“그랬구나.”

이온은 어깨를 흠칫 떨며 울고 있는 아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는 소파에 앉아 제 위로 올렸다. 여름은 어느새 바뀐 시야에 놀라기는커녕 울음을 멈추고 싶어 몸에 가득 힘을 주고 있었다.

아이는 이온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어깨에 얼굴을 품었다. 한 번 터져 버린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그의 품 안에서 따뜻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 서 있던 이훈의 표정은 울고 있는 아이보다도 더 구겨졌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이온의 얼굴이 기괴하게 휘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훈의 얼굴에 금이 갔다.

왜인지 맹수가 만들어 놓은 덫에 빠진 초식 동물을 보는 허탈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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