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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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으로 들어오니 이훈은 겉옷을 벗은 채 테이블 한구석에 펼쳐 놓은 자리에 앉아 일을 보고 있었다. 언제 밖으로 나갔느냐는 듯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그에게 들릴까 느릿한 걸음으로 돌아온 여름이었다.

    이온이 들고 들어온 런치 박스는 예상과 다르지 않게, 당연하게도 윤 비서가 준비해 놓은 음식들이었다. 자세한 내용물은 알 수 없었으나, 이온이 자리를 잡고 앉아 냉장고 안으로 정리해 넣는 모습만이 보였다.

    그가 식탁에 차려 놓은 저녁은 이온이 윤 비서를 어떻게 만났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무용담과 함께 흘러갔다. 물론 이훈은 대꾸도 하지 않으며 묵묵히 밥을 먹었다. 여름만이 눈을 반짝이며 드라마 같은 이온의 말에 집중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말 안 씻을 거야?”

    1층에 유일한 문은 커다란 욕실이었다. 이미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물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있었다. 욕실에서 몸을 빼낸 채 이훈을 바라보고 있는 이온은 얼른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문이나 꽉 닫아.”

    이미 여름을 홀딱 벗긴 채 끌고 들어간 이온이었다. 누가 보면 애라도 키우느냐는 소리를 할 법한 모습이었다. 이훈은 이온의 말에 헛웃음을 겨우 삼켜야 했다. 꼴 좋고 셋이 다 벗고 들어가 씻을 생각은 전혀, 죽어도 없었다.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욕이란 욕은 다 들을 만한 모습이었다.

    “여행까지 와서 일이나 하고 있으니 이마에 주름이 생기는 거야.”

    그제야 고개를 치켜든 이훈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형은 주름이 자글자글 생겨도 멋있지.”

    그와 동시에 도망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빠르게 욕실의 문이 쾅 하고 닫혔다. 그들은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사이좋게 수건으로 꽁꽁 두른 채 밖으로 나왔다.

    여름의 얼굴은 왜인지 모르게 달아올라 있었고, 아이를 챙기는 이온의 손길은 누구보다 섬세했다. 정리해 놓은 짐에서 잠옷을 꺼내 입은 이온과 여름은 사이좋게 침대에 앉아 이훈을 바라보았다.

    그놈의 일은 언제 끝나느냐며 재촉했다. 물론 늦은 시간에도 흐트러짐 없이 멋있는 모습에 또 한 번 반한 아이의 뺨이 발그레해지기도 했다. 결국, 이온과 여름은 여전히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일하는 이훈을 두고는 침대에 누웠다.

    저택에 하나 있는 침대는 형제가 전부 누워도 부족함 없는 크기였으나, 이온은 아이를 끌어와 옆구리에 착 붙이고는 눈을 감았다. 이훈은 언제 자려나, 걱정 아닌 걱정에 잠겨 있던 여름이 몸을 꿈틀거릴 때마다 이온은 팔과 다리를 전부 사용해 아이를 가둬 안아야 했다.

    커다란 공간에는 이훈의 타자 소리만이 자리 잡았다. 중간마다 늦은 시간임에도 윤 비서에게 걸려 오는 전화에 답하는 말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안경을 쓰고 있는 눈앞이 흐려지고 움직이는 어깨가 뻐근해졌을 때 이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걸어가는 길에 저절로 돌아간 고개가 침대로 향했다. 숨은 쉬고 있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게 자는 이온과 여름은 서로의 온기마저 맞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이훈은 애써 무시한 채 여전히 따뜻한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씻고 나왔다.

    온종일 입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여전히 별장에 하나뿐인 침대는 불만 그 자체였다. 소파에서 잘까 싶었지만, 이불 하나 없이 잤다가는 골병이라도 들어 골칫덩어리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간 이훈은 이를 앙다물고는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끌어왔다. 어느새 여름을 가운데에 두고는 양쪽에 형제가 자리 잡은 모습이 되었다. 이훈은 하반신을 이불로 덮은 채 침대에 헤드에 편하게 기댔다.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앞으로 뻗어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기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과 잠들어 있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저절로 이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새근새근 소리가 절로 나오도록 잠들어 있는 둘의 표정은 누구보다 편안해 보였다.

    ‘대체 뭘 하는 건지.’

    나이를 먹었다면 먹을 대로 먹은 시간이었다. 이른 나이에 커다란 회사를 품 안에 떠안고 다른 길로 걷는 이온을 끌고 오기만 했을 뿐인데 남들이 말하는 결혼 적령기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도 남았다.

    그동안 이온이 말하는 ‘가족’이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바뀌었다. 이훈이 이온을 인지하게 된 날의 첫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동생인 이온이 태어났다는 사실마저 알지 못했다. 사무치게 억울한 일이었다.

    이온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던 날은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나이쯤 되어서였다.

    같은 집에서 자란 건 맞을까 싶어질 정도로 처음 보는 아이였다. 친동생이 있을 줄은, 게다가 저도 모르게 훌쩍 자라난 아이일 줄은 정말 몰랐다. 저에게 이 사실을 숨긴 모든 어른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 형이래.’

    볼우물이 움푹 파여 있는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웃지 않아도 날카로운 인상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유전자 검사 따위 의미 없는 일이었음을 아이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이훈은 굳이 아이의 손을 잡아 주지는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아이의 눈이 안정될 때까지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제야 이온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동생이라는 존재가 생겼으니 심심한 하루가 반복되지만은 않겠구나, 분명 이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 나이의 순수함이 뭉쳐 생겨난 오만함이었다.

    이온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의 이훈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떠안은 회사에 적응하고도 남은 높은 자리에 올라설 때였다. 이훈이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으나 너무 바빴으며, 신경 쓸 이유도 겨를도 없었다. 모든 걸 혼자 해 온 저였기에 이온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형, 내 동생이야.’

    그때부터였다. 윤 비서와 일해 주던 이모님만이 겨우 오가던 집에 얼굴 하나 본 적 없는 이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처음엔 이온의 유흥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온이 지내는 2층은 닳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들락거렸다.

    회사와 가까운 호텔에서 살다시피 했던 이훈이었기에 이온이 누구를 데려오던 누구와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나간 과거와 별다르지 않았다. 작고 잦은 차별은 혐오를 낳았고, 혐오는 변화를 이끌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이온이 원했던 욕구를 이훈은 몰랐고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너무 하찮아 보이는 제 동생의 행동에 이훈은 왜 그렇게 사느냐며 물었던 적이 있었다. 역시나 충동적이었다.

    ‘나한테는 가족이 형밖에 없으니까, 부족하면 새로 만들어야지. 어쩌겠어.’

    ‘…….’

    ‘가능한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

    그때 이온은 그렇게 말하며 이훈의 품에 안겼다. 이훈은 이온의 변덕을 따라갈 수 없었다.

    분명 한참 어린 이온이었으나, 이훈의 키를 아주 살짝 넘어선 지는 오래였다. 이훈의 어깨에 고개를 품더니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훈은 그때까지도 몰랐다. 고등학생인 줄만 알았던 이온이 성인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온의 ‘가족’은 반년도 가지 못하고 매일 바뀌었다. 어떤 날은 일주일도 가지 못해 상대가 바뀐 적도 있었다. 이온의 이야기는 늘 윤 비서를 통해 이훈에게 들려왔다. 그러나 여름은 어딘가 이상하게 달랐으며 특별했다.

    반년이라는 시간은 훨씬 지난 지 오래였다.

    이온이 ‘가족’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부족함 없는 성의를 보이는 건 당연했다. 대부분은 금전적인 부분이었다. 금전적으로 가족으로 불릴 만한 이들을 통한 만족감, 그리고 위안을 사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온이 여름에게 하는 행동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전의 이들은 오고 싶을 때 집에 왔으며 이온에게 매달리기를 반복했다. 아무 이유 없이 퍼 주기만 하는 이온이 간절했을 터였다.

    그 시간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지금의 이온은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 양이었다. 커다란 성에 가둬 놓고는 눈을 막았고, 도망가고자 하는 마음마저 다정함으로 짓밟았다. 이온은 스스로와 비슷한 아이를 찾아냈다. 그리고 통하리라 믿으며 데려왔다. 그 과정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던 순간들을 후회했다.

    여름은 어릴 적의 이온과 닮아 있었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예민했으며 간절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존재를 가지고 싶어 했다. 맹목적인 애정은 이온을 끌어당겼고, 그런 둘이 붙어먹기에 딱 좋았다.

    이훈은 옆에 누워 있는 여름의 입에서 푸, 하는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온이 데려온 유흥거리의 아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수도 없이 봐왔던 ‘가족’의 외향을 전부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온의 속을 알 수 없는 건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다를 것 없었다.

    이훈은 천천히 침대에 이불을 들추며 몸을 내리눌렀다. 눈을 감는 순간 잠이 들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여전히 길게 느껴질 여행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당연하게도 이훈이었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려 욕실로 들어가기까지는 아주 찰나였다. 온몸을 씻고 나오며 새로운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이들은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여전히 껴안고 얕은 숨만 내쉬고 있는 이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이훈은 완전하게 차려 놓은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미 윤 비서의 연락을 확인하기까지도 시간이 매우 필요했기에 가만히 있을 틈이 없었다.

    - 네, 대구 지부는 오늘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박 부장님이 자기는 언제 서울 올라갈 수 있느냐면서 하루에 수십 통은 전화가 옵니다.

    테이블에 대충 올려놓은 핸드폰에서 한숨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네. 몇 년은 더 박아 놓을 수 있게 해.”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이질 않겠네요. 그런데 서울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 이온 님께 물어도 대답 하나 해 주지 않으시더라고요.

    타이핑하던 손이 멈추고, 그의 음성에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여전히 이불 더미가 한 곳에 뭉쳐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 작지 않은 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도 시끄럽지 않은지 그 누구도 먼저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몰라. 이왕 온 거 다음은 없게 만들어야지.”

    이훈은 늘 이온의 뜻대로 하는 편이었다. 반기는 허락보다는 그저 수긍할 뿐이었다. 이온과 뜻도 관심사도 다른 이훈이었기에 그저 하라는 대로, 하자는 대로 했다. 이번 여행이 특출난 건 아니었다. 이온이 무언가 원하면 이훈 역시 귀찮아하면서도 따르는 편이었다. 그러고는 다음은 없기를 바랐다.

    -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연락해 주십시오.

    “응.”

    이훈은 그가 무어라 말을 하던 간 화면에 보이는 것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끊어지는 수신음 하나 들리지 않고 뒤이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왕 가족 여행 가신 거 좀 쉬다 오세요. 그러다 몸 상하는 거 한순간입니다. 이제 책임질 가족도 많으시면서.

    그때 손이 나간 건 순간적이었다. 이훈은 대답도 하지 않고 붉게 물들어 있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온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윤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훈보다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훈도 다 늦어져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윤 비서는 이온이 막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옆에서 돌보곤 했다고 말해 왔다. 어쩌면 다 늦어져서야 존재를 알게 된 친형제보다 나은 존재일지도 몰랐다.

    “으음. 눈부셔…….”

    그때 이온이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펼쳐진 통유리창에서 들어오는 햇볕이 뜨거웠는지 손으로 눈을 강하게 눌렀다. 그런 이온에게 눈 하나 돌리지 않은 채 이훈은 단조롭게 대답했다.

    “일어나고도 남은 시간이니까 그렇다고는 생각 못 하지.”

    “여름이도 아직 자는데, 나한테만…….”

    숨소리가 가득 들어간 목소리에는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는 티를 내려는 건지 목이 잠겨 있었다. 이온은 고개를 살며시 돌려 여름의 가슴팍을 느릿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11시를 겨우 넘어가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 늦은 잠을 자곤 하는 둘이 아니었으나, 지난밤 먼 거리를 달려오느라 피곤이 쌓였던 모양이었다.

    겨우 눈을 뜬 여름의 오금과 등에 팔을 넣어 들어 올리고는 욕실로 들어가는 이온의 뒷모습 바라보았다. 남들이 본다면 육아라도 하는 게 아니냐며 욕하고도 남을 모습에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러나 금세 이훈의 표정이 굳었다. 이온의 모습이 제 모습과 별다르지 않게 보인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비롯한 짜증 때문이었다.

    이훈은 제발 오늘만큼은 밖을 나가지 않고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여행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곳을 다녀본 것도, 휴식을 가져 본 적도 없었지만 새로운 곳을 갈 때 늘 바라던 점은 단 하나였다.

    가만히 있고 싶다, 쓸데없는 체력을 쓰기 싫었다. 그러나 늘 붙어 있던 이온이 가만히 두질 않았기에 쉽게 이뤄질 수 없는 바람들이기도 했다. 이훈은 실패를 거듭 싸고도 하염없이 오늘의 바람을 속을 읊조렸다.

    “오늘은 바다에 가 볼까?”

    씻고 나온 이온이 차려 놓은 아침을 먹는 도중에 나온 말에 이훈의 몸이 멈칫 굳었다. 이온이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샌드위치의 맛이 좋았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어도 기분이 꽤 나아지려는 참이었다.

    “바, 바다요?”

    곧장 반박해야 했다. 바다라는 말에 여름의 눈이 밝아졌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기대하고 있었다.

    “바다에도 갈 수 있어요? 저 바다는 한 번도 안 가 봤어요.”

    여름은 들고 있던 포크마저 내려놓은 채 이온에게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이훈은 감히 기분이 저조해지는 건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작은 흥분에 젖어 버린 아이의 바람을 거부할 이온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를 타고 좀 가야 하긴 하는데, 우리에겐 운전기사 한이훈 님이 있으니 괜찮을 거야.”

    이훈의 이름이 이온의 입에서 흘러나오자마자 여름의 고개가 삐죽 돌아갔다. 이훈은 막을 새도 없이 나오는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냥 조용히 있다 돌아가지.”

    그러고는 얼마 남지 않은 샌드위치를 도로 내려놓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남은 날 전부 여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활동만 하다 돌아갈 게 분명했다.

    “그냥 울어 버려.”

    금세 표정이 무너진 여름을 부추기는 건 이온이었다. 울어서 혼내 버려, 하고는 이훈에게 야유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훈의 눈에 이온은 바다에 가던, 가지 않던 별 상관 하지 않을 듯한 이온의 찢어지는 웃음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호수…… 산책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젯밤의 이훈은 바다는커녕 산책도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하게도 기업의 대표까지나 되는 이훈이 바다에 갈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여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떨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살면서 해 보지 못한 일은 많았다. 바다를 보지 못한다고 달라질 것 하나 없었다. 바다 말고도 모르는 건 많았다. 그저 그중 하나가 되는 것뿐이었다. 여름은 이훈을 보는 눈이 흔들리고 있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런 여름의 머릿속을 뻔히 읽고 있던 형제의 시선이 서로 맞물렸다. 금방이라도 울먹이며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감히 바다에 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에 뭉친 짜증은 손끝까지 치밀었다.

    “네가 뭘 주워 온 건지는 인지하고 있는 거야?”

    이훈의 질문에 턱을 괴며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이온은 짧지 않은 웃음과 함께 답했다.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물론 하나뿐인 동생이지.”

    ***

    별장에서 바다는 그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은 이훈의 눈치가 보였으나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원도에서 바다를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점심시간이 살짝 지나서야 도착한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굴레 같았다. 넓게 펼쳐진 물은 무서울 정도로 맑았다. 궁금해서는 안 될 마지막이 저절로 궁금해지는 자연이었기에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이는 제 형의 손을 잡고 찰랑이는 물에 발을 담갔고, 손으로 물살을 갈랐다. 물론 이훈은 모래사장의 초입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선글라스로 빛을 매운 채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있는 푸른 지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는 뒤에서 부른 이온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몸을 돌릴 수 있었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몸은 설렘으로 가득하여 따뜻해지고 있는 줄만 알았다.

    형제와 아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횟집에 들어가 점심을 했다. 처음엔 어두운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길래 이온의 옷을 강하게 부여잡으며 불안을 감췄다. 직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널찍한 방이었다.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뒤이어 나오는 음식들은 여름이 살면서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다.

    회라는 음식은 본 적도 있고, 잘 알고 있기도 했으나 직접 먹어 본 건 처음이었다. 물컹한 식감이 눈가를 찌푸리게 했으나 말없이 맛있게 먹는 형제의 모습을 따라 멈추지 않고 입 안에 넣기를 반복했다.

    짧았던 바다를 떠나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여름이 조수석에 타야 했다. 오가는 길에 시끄럽게 떠드는 이온이 짜증이 난다는 이유였다. 그런 이훈의 말에 이온은 어떤 부분이 시끄럽냐며, 형이 그래도 되는 거냐는 식의 대꾸 아닌 대답으로 가득해졌기에 역효과를 불러왔음을 이훈은 그제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들이 푸릇한 정원이 있는 별장으로 돌아온 건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이었다. 짧은 외출에도 긴장했던 모양인지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여름은 아래로 쓰러져 내렸다. 이온이 옆에서 부여잡지 않았다면 바닥에 곧장 무릎이 찍혔을 게 분명했다. 물론 이온 역시 그런 여름의 모습을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었으므로 익숙하다는 듯이 안아 들어 소파로 데리고 갔다.

    별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있었던 두통과 이상하게 기력이 빠지는 기분을 이제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몸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감기인가, 기침만 안 할 뿐이지 따뜻한 열감도 어지러운 두통도 딱 감기의 전조 증상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던 참, 여름은 목구멍 아래에서부터 몰려오는 쓴맛에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이온과 이훈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여름은 변기를 부여잡고는 지금껏 먹은 모든 것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구나 하는 기분과 함께 쏟아 냈다. 목을 강하게 쓸고 올라오는 타액들은 따끔한 고통과 함께 몰려오고 있었다.

    “애 가질 정도로 싸댄 적은 없는데.”

    겨우 쏟아 낸 것들을 흘려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여름을 일으켰다. 당연히 들려오던 목소리는 이온의 것이었으니 이온일 줄 알았던 여름이 고개를 돌린 순간 보인 건 이훈이었다.

    아이가 곧게 자리에 서자마자 빠져나가는 이훈의 손을 다 늦어져서야 바라보았다.

    “너도 병원에 가 보는 게 어때?”

    “나? 나는 아픈 곳이 없는데.”

    이훈은 손을 털며 이온에게 말했다. 그런 형제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입을 닦던 여름은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에 좀이라도 핀 것 같다.”

    “아아, 너무해.”

    욕실 입구에 비스듬히 서 있던 이온이 서럽다는 듯 눈꼬리를 축 내린 채 여름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의 무게에 한걸음 앞으로 밀렸지만, 저에게서 이상한 냄새라도 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어디 아픈 거야? 왜 갑자기 토를 했지.”

    껴안고 있던 등에서 앞으로 손을 뻗은 이온은 아이의 뺨을 조몰락거리며 상태를 살폈다. 아름다움에 피어난 가시가 온몸을 찌르고 있는 기분은 한바탕 쏟아 냈어도 여전했다.

    “모르겠어요.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요…….”

    분명 이온의 품 안에 있던 여름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을 하나도 안 가져왔는데, 일단 눈 감고 자자. 열은 안 나는 것 같아.”

    “……네.”

    이불이 눈앞에 드리울 정도로 푹 덮였다. 이유를 모르고 목이 잠겨 왔지만, 여름은 이온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전부 괜찮아져 있으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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