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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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대에 누워 눈을 뜰 때면 이훈이 눈앞에서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고, 코가 막혀 눈을 뜨면 눈앞에는 하얀 침구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의문은 여름에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추운 겨울에 그와의 행위는 땀을 가득 흘리게 했다.

    이훈과의 밤은 겨울에 흘리는 땀, 딱 그 정도로 이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엮인 감정은 이훈의 곁에 누워 있을 수 있다는 기쁨이 가득 억눌렀다.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감정에 따라가기 힘든 건 주인인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무거운 눈은 푹 잤다 싶을 정도의 시간에 뜨였다. 무거운 몸을 뒤척이며 동공이 빠르게 확장된 건, 여전히 몸에 남아 있는 끈적임과 고통 때문이었다.

    “아, 우…….”

    아이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리의 부리처럼 한곳에 모여 이상한 발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허리와 아래에서 몰려오는 진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강한 막대기로 쑥 하고 쑤셔 오며 찌르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일어나.”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는 밤새 들었던 남자의 음성과 같았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작은 테이블에 앉아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훈이 보였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늘 그랬듯 멀끔했고, 보지 못한 새로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 봤자 집 안에서만 입는 편한 일상복이었지만 그에게는 단정하게 보이는 옷이나 다름없었다.

    “곧 나가야 해. 얼른 일어나.”

    한쪽 팔을 테이블에 걸친 채 다리를 꼬고는 누워 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이훈의 표정에는 그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런 남자를 쳐다보는 것마저 힘들었던 아이였기에 그가 무슨 생각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혼자 씻을 건 아니잖아.”

    “네에…….”

    겨우 몸을 돌려 이훈을 바라보고 있던 여름은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켰을 때는 침대에 눌리는 엉덩이에 고통이 밀려왔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을 때는 찌릿하게 진동이 어렸다.

    입을 꾹 다물고 이훈이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가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어질한 머리가, 여름의 다리를 흔들리게 했다. 우스꽝스럽게 앞으로도 아니고, 균형이 흔들려 뒤로 넘어지려는 참 다가온 이훈이 아이의 허리를 팔로 휘감았다.

    아이의 입에서 ‘으, 우’ 하는 소리가 이어서 터져 나왔다. 아마 이훈이 아니었다면 안 그래도 아팠던 엉덩이에 멍이라도 났을 게 분명했다.

    “들어가.”

    쓰러지려던 아이의 몸을 일으킨 이훈이 하는 말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던 작은 여름의 등을 욕실 쪽으로 밀었다. 작게 대답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훈은 그가 넘어지지 않고 욕실에 들어가는지만을 확인하고 있었다.

    밖은 추웠지만, 그의 방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춥지 않았기에 맨몸으로 욕실까지 걸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다리가 벌어지고 어기적거리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지만, 아린 몸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일이었다.

    커다란 욕실에 들어서니 욕조 안에서 넘실거리는 물이 보였다. 진작에 이훈이 받아 놓은 물인지 미지근했다. 욕조 앞에 멈춰 서서는 들어오지 않는 이훈을 한 번 돌아봤다가, 천천히 발을 담갔다. 불편한 이물감을 얼른 씻어 내고 싶었다.

    물에 닿는 동시에 저리던 몸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무릎을 당겨 안으니 사라졌으리라 믿었던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무릎에 뺨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지난밤의 장면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높은 벽에 뒤덮여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그게 전부였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훈이 보였다. 그의 연인이자 앞으로 결혼할 상대를 만나고 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고 이훈과 섞였다.

    얼굴이 화르르 붉어지고 고개가 절로 무릎 사이로 들어갔다. 뭘 한 걸까,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했다. 그의 온도는 여전히 생생했다. 차가울 것만 같았던 이훈은 생각 외로 뜨거웠다. 따뜻하다는 말이 아닌 뜨겁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분명 미지근했던 물이 공기가 흔들리며 차가워졌다. 이물감을 없애던 물은 여름을 어느새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이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점차 내려갔다. 뭘 한 걸까, 또다시 따라오는 의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결혼을 막겠다고 호기롭게 내려와서는 차가워진 물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도 웃겼으니 말이다. 어이없기 그지없는 제 모습을 누가 볼까 싶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더욱 숨겼다. 물에 부르트고 있는 손가락처럼 몸이 녹고 있었다.

    “다시 잠이라도 자는 거야?”

    긴 시간 동안 짧고 강하게 들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욕실 안을 조용히 울렸다. 이훈이 길게 내려온 소매를 걷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서로 마주한 시선이 떨어지지 않은 채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여름의 눈에는 이훈이 가득했다.

    “안 들어왔으면 다시 잠들었겠네.”

    “아니, 자는 게 아니라…….”

    몸을 더욱 무릎 쪽으로 숨긴 여름이 꿈틀꿈틀 이훈의 방향으로 궁둥이를 옮겨 갔다. 욕조에 걸터앉은 이훈과 가까워진 여름은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남자의 단정한 모양새와는 차이가 나는 흐트러진 모습이 대조를 이뤘다.

    “머리라도 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었으면서, 잠을 잔 게 아니면 뭐야.”

    “생각 좀 했어요…….”

    욕조에 두 팔을 올려 눈만 치켜떠 남자를 쳐다보고 있는 여름의 표정은 누구보다 부드러웠다. 이훈의 얼굴을 봤다고 금세 불안하던 마음이 씻겨 내려간 모양이었다. 이훈의 허벅지 바로 옆에 머리를 기대고 엎드려 있는 여름의 머리는 조금도 젖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막힘 없이 부드러운 것이 금방 감았다 싶을 정도였다.

    “무슨 생각.”

    그렇다고 씻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아이를 뒤로하고 샤워기를 끌고 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고개를 눌러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로 머리를 적시는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냥, 이것저것.”

    여름은 이훈이 하는 대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꾹 감았다. 무거워진 머리가 젖어 들며 시원해졌다. 샴푸질을 하는지 여기저기 조몰락거리는 느낌이 들었으나, 아이는 마음에 요동치는 말을 꺼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작은 머리를 그렇게나 쓰면 안 아프던 머리도 아프겠어.”

    머리를 쓰진 않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남자의 손에 흔들리던 몸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여름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만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훈이 만일 결혼하게 된다면 곧장 데려가 달라고 조르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까지 다 감기고 번듯한 몸이 된 아이의 몸을 일으키고는 문 쪽을 밀 때까지도 동공의 초점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아이를 앞에 두고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생각 중인 건 이훈뿐이었다.

    “수건 들고 나가. 또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머리나 말리고 있어.”

    밖으로 내보냈다고 해서 혼자서 물기를 닦기는커녕 젖은 몸으로 침대에 앉아 있을 게 뻔했던 여름이기에 신신당부하는 것 역시 습관이 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이훈은 그렇게 말하며 위에 입고 있던 티를 올려 벗었다. 들어온 김에 씻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네.”

    아이는 커다란 수건을 어깨에 두르며 몸이 떨리는 것과 추위를 걷어 내고자 몸을 살짝 굽힌 채 이훈의 말대로 욕실 문밖으로 나섰다. 따뜻한 기운이 맴도는 욕실 안에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이훈이 눈초리가 따가웠다.

    욕실과 그 다른 공간의 온도 차이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금방 씻고 나오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여름에게는 더욱 그랬다. 갑작스레 낮아진 온도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욕실 문을 닫고 몸을 돌리니, 눈앞이 가로막혔다.

    “어?”

    “씻었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벽에 아이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뒤로는 욕실의 문이 닫혀 물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당연히 이훈일 리 없는 남자의 눈 밑에 나 있는 점은 예뻤다. 평소와 비슷하게 긴 잠옷을 풀어 헤쳐 입은 이온이 여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은 아직 씻나 보네. 이리 와. 옷부터 입자.”

    “아니, 혼자 할 수 있는데…….”

    “형 서운하게 하지 마.”

    언제 들어온 것인지도 모를 이온은 아이의 어깨에 걸려 있는 수건을 더욱 끌어당기며 방 안쪽으로 이끌었다. 목소리에는 앙탈이 묻어 있었다.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여름의 옷을 입히고는 침대에 앉히는 건 이훈이 아닌 그의 방에 들이닥친 이온의 몫이 되었다. 그리곤 익숙하다는 듯 서랍에서 드라이기를 꺼내 여름의 짧은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형이랑 같이 잤어?”

    뜨거운 바람과 드라이기의 큰 소리는 이온의 목소리까지 삼키지는 못했다. 아이의 머리를 헤집으며 젖은 머리가 마를 때까지 안에서 위로 만지작거렸다. 기분 좋은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 여름의 위로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

    “응? 여름아, 왜.

    이온은 멈추지 않는 손을 움직이며 되물었다.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 온도가 내려가고 점차 시원해졌다. 머리가 잘 마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이의 입이 이온의 물음에 대답하려 우물쭈물했다.

    “……큰형한테 말했어요?”

    상황이 너무 유치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불안이 우스웠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제 모습이 구겨져 사라질까 버둥대고 있는 꼴이니 유치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건 여름일지도 몰랐다. 내려온 지 오래된 동아줄을 뒤늦게야 붙잡고 싶은 간절함 사이에서 태어난 감정은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쩌면 익숙하지 않은 반항이었다.

    “……그렇게 말해 준다면서요.”

    “맞아, 그랬었지.”

    불편하지 않게 들리던 드라이기 소리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사위가 고요해지고 욕실 너머에서 울리던 물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젖어 무겁던 머리가 가벼워졌지만, 아이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기에, 고개를 살며시 돌리는 것으로 떨쳐 냈다.

    성인이 되고도 보잘것없는 제 행동을 금세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아니에요 하고는 이온에게 사과를 건넸다. 말 한마디로 그 상황을 회피하고자 했다. 아이는 흘러내리는 웃옷을 끌어 올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온을 돌아보려 했다.

    “너 뭐야.”

    그러나 이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보았던 모습 그대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나오고 있었다. 이훈의 눈은 여름의 뒤에 앉은 이온에게로 꽂혀 있었다.

    “씻었어?”

    “안 보여?”

    머리를 털어 보인 뒤 수건을 한쪽으로 던졌다. 얼핏 보아도 씻고 나온 모양새였지만 이훈의 목소리는 이유 모르게 까칠했다.

    “흐응. 여름아, 형은 나한테만 차가워. 우리 막내는 손수 씻겨 줬으면서.”

    “그건…….”

    여름의 뒤에 서 있던 이온이 한숨을 푹 쉬며 아이에게로 몸을 숙이며 끌어안았다. 작은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는 뭉그러지게 비볐다.

    그의 애교에 당황한 건지, 이미 이훈이 저를 씻겨 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온에 놀란 것인지 모를 여름은 고개를 돌리고는 손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아아, 서운해라.”

    흔들림 없는 이온의 목소리에 이어 그는 여름의 등을 온전히 끌어안았다. 그런 꼴이 웃긴다는 듯 그들을 지나쳐 방문 앞에 선 이훈은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옆으로 돌아서 둘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나가라는 턱짓은 그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빨리 나가, 그리고 한이온, 너는 나갈 준비도 해.”

    “왜, 에?”

    뺨을 아이의 어깨에 딱 붙인 채 눈만 치켜뜬 이온은 말을 늘이며 대꾸했다. 이도 못 하고 저도 못 하는 상황에서 가운데 낀 기분에 점차 여름의 표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이 작아지고 열이 올라서인지 빈정거리는 이온의 태도에 이훈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었다.

    “넌 대체 네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주 어릴 적과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이온의 행동은 이훈의 한숨을 불러오기 쉬웠다.

    “엄청 어리죠.”

    아이의 어깨를 짚고 몸을 일으킨 건 그 뒤의 일이었다. 이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온은 이훈보다 아주 조금 컸다. 그랬기에 둘의 시선은 꽤 비슷했다.

    여름 역시 주춤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온의 뒤를 따랐다. 서로 비슷한 잠옷을 입은 채 어슬렁거려서일까, 이훈의 눈가가 좁아졌다. 당장 나가라는 듯 문을 더욱 활짝 열어 준 건 이훈의 몫이었다.

    “아, 그리고.”

    하마터면 앞서 나가던 이온이 갑작스레 멈춰 서서 그의 등에 코를 박을 뻔했다. 이온은 고개를 돌려 이훈과 여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겨울치고는 꽤 따뜻한 기운이 맴돌아서였을까. 차가운 바람이 그리웠다. 아이의 걸음을 말리는 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새에 들이는 이온의 뜸이었다.

    “다음 주에 여행이라도 갈까?”

    “…….”

    “우리 가족끼리.”

    문 가운데에 가만히 서서는 비범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이훈도, 여름도 입을 떼지 않았다. 이훈에게는 이온이 어이없어서, 여름에게는 온갖 생각이 뭉쳐 덩어리로 불어나고 있었기에 섣불리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왜?”

    그 누구도 정적을 깨지 않는 상황에 이온의 입꼬리가 생긋 올라갔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왜, 왜 하고는 반복해서 물었다.

    더운 여름이 오기 전 따뜻한 꽃이 피어날 때 여행 가는 건 몹시나 이상적인 일이었다. 여름은 한 편으로 설레면서도 불안했다.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믿어서였을까. 제 앞에 보이는 이훈의 넓은 등을 흘깃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형의 결혼도 있고…….”

    결혼식이라도 올리면 여행은 무슨, 바쁜 일이 계속되지 않을까요 하고 끝맺음하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돌아보는 이훈의 얼굴에 목소리가 먹혔다.

    “뭐야, 아직도 말 안 했어?”

    그런 아이의 말에 놀란 목소리를 뱉은 건 이온이었다.

    “그 깊은 밤을 보내 놓고?”

    “하, 네가 할 말이야?”

    이훈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이온을 노려보았다. 그런 형을 뒤로하고 아이의 가까이 걸어온 이온은 그의 작은 어깨에 팔을 올렸다.

    “여름이가 아직도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대개로 사람들은 형식적인 발표가 필요할 때가 있어. 형의 약혼도 그런 거야. 물론 나도 몰랐던 일이야.”

    이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훈의 헛웃음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

    “나는 형이 아직도 여름이한테 말하지 않았을 줄은 몰랐네. 형이 나빴다, 그렇지?”

    이온은 작은 어깨를 끌어와 품 안에 가둬 앉았다. 금방이라도 눈망울에 물기가 차오를 것 같은 여름의 눈은 이온의 어깨 너머로 서 있던 이훈의 얼굴을 보고는 쏙 들어갔다.

    남자의 표정은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후련한 것 같기도, 또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 확실한 건 처음 보는 표정에 얼이 빠져 버린 건 여름뿐이었다.

    “그럼 여름이의 걱정도 사라졌으니까, 여행 갈 수 있겠네?”

    품 안에서 꺼낸 아이와 이훈이 서로 마주할 수 있도록 비켜선 이온은 그제야 눈마저 휘도록 웃었다. 1분은 지났을까 싶은 짧은 시간이 하룻밤의 걱정을 사라지게 했다. 사실을 알게 되면 소수점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금세 사라지는 것이 불안이었다.

    “싫다고 한들 안 갈 건가?”

    “우리 가족의 첫 여행인데. 형이 빠지겠다고?”

    가족, 여행, 우리 가족의 첫 여행. 아이의 머릿속에 날아다니는 단어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와 동시에 이훈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반짝거렸다. 의도치 않은 아이의 행동이었다. 가족도 처음이었지만, 가족 여행은 꿈속에서도 그리지 못한 이상이었다.

    “여름이가 이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한쪽 팔로 아이의 어깨를 끌어왔다. 일부러 몸을 숙여 여름과 키를 맞춰 이훈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훤히 보였다. 늘 즉흥적인 이온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그 누구도 없었다.

    이훈은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여름과 그런 아이의 옆에 딱 붙어 생긋 웃고 있는 이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열린 문으로 걸어 나갔다.

    “형도 좋다네. 잘된 일이지?”

    “네.”

    아이의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말은 짧았으나 웃음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아이를 이끌고 이훈의 발걸음을 따라 방으로 향하는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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