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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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거운 눈꺼풀이 저절로 뜨였다. 충분히 잠을 잔 건지, 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여름의 시야에는 하얀 천장뿐이었다.

    고개를 돌릴 수도,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거대한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고, 누군가 방망이로 때리고 있나 의심이 들 정도로 아팠다.

    눈을 뜬 순간부터 간밤의 장면들이 잠이 오지 않아 누워서 보는 단편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언제부터 기억이 끊긴 것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으나, 도중에 기절한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불편했던 이물감이 사라진 걸 보아 이온이 씻겨 준 것은 안 봐도 훤한 일이었다. 이미 어제는 보지 못한 새로운 잠옷에 시원한 기분까지 드는 걸 보아 깔끔히 씻고 난 뒤인 모양이었다.

    넓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 끝까지 꼼꼼히 덮고 있는 여름은 매일 같이 옆을 채우던 따뜻한 온기마저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함께 눈을 뜨던 이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온이 일어나 방을 나섰을 만큼 시간이 많이 지났나, 아침을 울리는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걸 보아 매일 일어나던 시간은 다 지났을 게 분명했다.

    일어나야지, 몸을 일으키려 손에 돌아오지 않는 감각을 찾으려 몸을 비트니 허리가 아려 왔다. 아무래도 한 자세로 오랜 시간 버티고 있었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아픈 곳은 아무래도 이온의 것이 오가던 길이었다.

    찢어지지 않을까 했던 곳에는 찌르는 고통만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여름은 침대를 양손으로 짓누르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커다란 창으로 따스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저 빛 아래에 잠식되었던 게 몇 시간 전이었는데, 어느새 하루가 지나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디지털 탁상시계를 바라보니 점심 먹는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지난밤, 이온의 검사는 얕은 지식으로 파악하기 힘든 행위였다. 지금도 여름은 그와의 교접 사실을 파악하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시간을 따를 뿐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여름은 구겨진 잠옷을 탁탁 털며 문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계단으로 이루어진 복도에는 먼지 하나 굴러다니지 않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1층이 보이는 난간 가까이 다가갔으나, 아래에 돌아다니는 이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은 눈으로 이온을 찾고 있었지만, 그의 시야에는 이제는 익숙해진 저택의 풍경만이 흘러들어 왔다.

    어디 가셨지, 요즘 들어 출근하지 않는 이온이었기에 점심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이온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내려올 걸 그랬나, 제정신도 아닌 채 잠옷 차림으로 1층까지 다 내려오고 나니 후회가 치밀었다. 몸은 아프지, 눈에는 이온이 보이지 않으니 발길이 닿는 대로 걷게 되었다.

    그가 무얼 하는지 모르겠으나, 이온의 동향을 파악하고서는 바로 방으로 올라갈 생각을 하며 다이닝 룸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쇠 하나 없는 다이닝 룸에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안으로 들어간 여름의 동공은 금세 흔들렸다.

    다이닝 룸에 중앙에 있는 기다란 테이블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 자리에는 이훈이 자리하고 있었다. 점심이 가까워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이의 얼굴을 보게 되니 화들짝 놀라게 되는 건 당연했다.

    “……출근 안, 하셨어요?”

    이훈은 의자에 앉아 연기가 나는 찻잔을 들고는 패드의 화면을 보고 있었다. 물론 여름이 문을 열고 들어옴과 동시에 고개를 번뜩 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다이닝 룸 안을 들어온 이가 여름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재차 고개를 내렸다.

    “한이온이 대신했잖아.”

    “……아. 번갈아 가며 하시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

    어쩐지 보이지 않던 이온은 출근한 모양이었다. 그를 찾겠다고 쪼르르 내려온 여름은 괜히 호랑이라도 만난 기분에 들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고 잘게 떨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난 뒤로는 인정할 수 없는 어색함이 들고는 했다.

    매일 같이 이훈을 생각하는 여름이었기에 모순적인 감정이었으나, 이전처럼 눈을 마주하기 어렵고, 저절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름은 긴장 속에 생긴 손의 물기를 닦고는 이훈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차를 마시며 바쁜 일이라도 하는지 패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몰래 들어온 만큼 방해되지 않게 몸의 중심을 뒤로 실어 천천히 걸어 나갈 생각이었다. 여름은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두 발을 바닥에서 떼어 내 얼마나 움직였을까, 갑작스레 다이닝 룸 가득 울리는 이훈의 말에 여름의 몸이 저절로 굳었다.

    “오늘은 수업이 없나 보지?”

    “네?”

    어느새 이훈은 고개를 든 채 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은 테이블에 고스란히 올려져 있었다.

    “옷이.”

    그는 단순한 턱짓으로 여름을 가리켰다. 여름이 보는 이훈은 늘 단정하고 깔끔하며 멋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집에만 있더라 하더라도 단정한 머리와 안경은 그의 멋을 더하게 했기에 여름에게는 동경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오늘의 이훈도 그랬다. 얇은 긴팔에 단정히 누른 머리와 매일 같이 쓰고 있는 안경 차림이었다. 그러나 이훈의 말에 고개를 살며시 아래로 내려 제 차림을 확인한 여름은 얼굴에 드러난 경악을 가릴 수 없었다.

    아무리 자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일지라도 잠옷을 입고 1층까지 내려온 적은 드물었다. 당연하게 일상복과 같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 집을 누비다 보니 잠옷 차림이 다 벗은 나체 차림과 비슷하게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어, 아아…….”

    “웬만하면 사이즈에 맞는 옷으로 입고.”

    그의 말에 저절로 손이 어깨로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잠옷 상의가 아래로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여름은 허둥지둥 옷을 끌어 올리고는 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보았다. 흐물흐물한 잠옷이 여름을 감싸 몸의 윤곽을 아득히 가리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두드리며 다시 뒷걸음질 치고 있던 여름은 등에 맞닿은 벽을 느끼고서야 서둘러 뒤를 돌아 문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옷을 입고 나오지 않은 사람이 다름없는 표정으로 2층을 서둘러 올라가는 여름의 발걸음 소리는 누구보다 컸다.

    위로 뛰어 올라가 허둥지둥하는 손으로 잠옷을 벗고는 얇은 맨투맨으로 갈아입는 와중에도 달아오른 얼굴이 식을 새가 없을 정도로 붉었다는 사실은 여름만이 알고 있는 비밀 중 하나였다.

    ***

    여름의 방에 붙어 있는 유일한 창문은 과외 선생인 연우조차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커다랗고도 넓었다.

    그러나 여름의 창문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365일 앞을 지키고 있었기에 완전히 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신기한 창문이었다.

    하나 확실한 건 태양 빛이 그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날은 매일 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름은 창문이 생김과 동시에 이곳에 와서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이온이 본다면 당장이라도 여름을 낚아채 제 옆에 붙여 놨을 취미일 테지만, 여름은 시간이 나면 늘 의자를 번쩍 들어 준비하고는 했다.

    테이블에 붙어 있던 의자를 들고는 커다란 창문 아래에 내려놓았다. 가벼운 의자여서 다행이지 조금만 더 무거웠으면 이런 짓도 못 할 뻔했다. 창문 가까이 내려놓은 의자 위로 조심스레 올라가 다리를 모아 앉았다.

    여름이 크고 넓은 창문 아래에 앉아 있는 날은 해가 맑고 너무 뜨겁지 않은 날뿐이었다. 의자 위에 올라가 모아 세운 무릎 위에 팔을 올려 편히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면 비틀게 자라난 나무 사이로 거리가 펼쳐진다.

    그리 높지 않은 담장 너머의 거리는 여름이 늘 봐 왔던 거리의 모습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하나 다른 점은 꽤 높은 언덕 위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점도 지난날 재헌과의 외출로 익히 깨달은 사실이었기에 아주 새롭지만은 않았다.

    커다란 집이 늘어져 있는 거리였기에 지나다니는 사람보다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가 훨씬 많았다. 아주 가끔은 작은 솜 같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럴 때면 여름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웃음을 지어 보일 때가 있었고 창문 틈에 기대 낮잠을 청할 때도 있었다. 그만큼 아이에게는 안온한 취미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여름이 보육원에서 형제에게 구조, 혹은 다른 명칭의 무언가를 당한 날로부터 반년도 넘은 시간이 지났다. 길다면 긴 시간 사이에 여름이 저택 밖으로 발걸음 했던 날은 아이가 더욱이 형제에게 매달리게 되는 계기가 되던 그 날을 제외하고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아이는 이제 알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이 규칙으로 자리를 잡아 저를 옭아매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선을 넘어 버리는 행동을 하기에는 이미 불안한 마음이 커다랗게 잡아먹은 뒤였다.

    여름은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하고 있었기에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단 사실에 놀랄 때가 있었다. 주로는 창문 앞에 앉아 밖을 나다니는 이들을 볼 때면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과외도, 넓은 정원에서 산책도, 아주 가끔은 이온이 시키는 대로 스트레칭을 할 때도 있었다. 없는 게 없는 곳인 만큼 형제의 집은 여름의 공간으로 자리 내린 지 오래였다. 그에 익숙해지는 것도 여름이었다.

    “─름.”

    세운 무릎 위에 누워 따스한 볕 아래에 있던 여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귀가 번뜩 뜨였기 때문이었다.

    “여름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었을 이온의 목소리였다. 출근했다고 들었는데, 이른 시간에 퇴근한 모양이었다. 여름은 반가움에 몸을 돌렸지만 기대한 이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뭐 해.”

    이제 보니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뒤가 아니라 앞이었다. 그러나 앞은 여름이 가장 좋아하는 창문이자 밖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창밖을 내려다보니 정원에서 우두커니 서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온이 보였다.

    층마다 높이가 꽤 있었지만 겨우 2층이었기에 이온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잘 잤어?”

    그는 파란빛 도는 어두운색의 코트에 손을 넣고는 창문에 몸을 내민 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겨울이었음에도 따스한 볕에 시원한 봄이 온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이온은 어떻게 알았는지, 여름이 금세 잠들었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

    여름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온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1층과 2층에서의 만남에서 몰려오는 반가움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 해맑게 웃어 보였다. 당장이라도 환하게 웃으며 끄덕이고는 이온의 앞에 서고 싶은 기분에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러나 아이의 해맑음과 동시에 이온의 표정이 금세 꿈틀하고는 굳었다. 코트 속에 숨겨진 가슴이 질끈 아팠다. 이상한 기분의 정답을 찾는 건 진작에 포기했기에 그리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름이 절대 눈치채지 못할 주머니 속의 손에는 힘이 가득 들어갔다.

    저 해맑음을 꺾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이어지는 상상이 이뤄지는 날들을 영원히 삼켜야겠다 싶었다.

    ***

    여름이 새로운 가족으로 집에 오고 나서부터는 암묵적으로 매일 아침은 함께 해야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름이 혼자 아침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각기 다른 시간에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 게 어색할 지경이 되었다.

    일찍 눈이 떠지는 아침, 이훈의 일로 이온 역시 바쁜 듯하여 ‘아무도 없겠지’ 하고 내려온 1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부터 생겨났다.

    소리 하나 나지 않게 계단을 내려온 여름은 복도 끝에서부터 태블릿을 한 손에 쥐고 눈을 떼지 않은 채 걸어오고 있는 이훈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훈은 고개를 한 번 들어 올려 여름이 멍하니 서 있는 걸 바라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갔다.

    여름 역시 놓칠세라 정신을 차리고는 이훈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이온은 제 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따뜻한 차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한쪽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지?”

    이온은 한쪽 팔을 식탁 위에 올려 턱을 괴고는 이훈에서부터 여름까지 쭉 돌아보았다.

    충분히 오랜만이라는 말에 걸맞은 식사였지만 그 누구도 공감의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이온 역시 익숙하다는 듯 차려진 식사를 들기 위해 수저를 쥘 뿐이었다. 고요함 속에서 이온의 목소리만 가득한 상황은 여전했다.

    “내일모레야.”

    여름이 함께 나온 요구르트를 먹기 위해 한 수저 떴을 때였다. 이훈이 입 주변을 냅킨으로 닦으며 이야기했다. 수저를 쥐고 있던 손이 잘게 떨렸다. 애써 감추기 위해 요구르트를 빠르게 입 안에 넣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무릎에 올려 둔 손은 여전히 주제도 모르고 떨고 있었다.

    “뭐가?”

    이온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훈에게 되물었다. 그의 속은 한 치 앞도 몰라 누구도 예상할 수 없기에 이온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뭐겠어.”

    “아, 벌써 내일모레야? 맛있는 걸로 부탁드려야겠네. 차 이사님은 뭘 좋아하시려나.”

    그의 목소리에는 리듬이 담겨 있었다. 누구보다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는 그의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까다로운 이온의 허락을 통해 이훈이 만나고자 하는 상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었다.

    흥얼거리기 시작하는 이온을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 이훈은 여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부는 해. 저녁만 먹을 거니까.”

    확실히 여름에게 하는 말이었다. 주로 점심을 먹고 나서 하는 과외를 저 때문에 빼지는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네, 그럴게요.”

    “형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여름이는 이미 공부만 좋아한다고.”

    늘 이온의 옆에 앉는 여름이었기에, 이온이 여름의 어깨에 기대며 어리광을 부리는 말투를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훈이 그런 이온을 무시하는 것 역시 어렵지만은 않았다.

    “너도 싸돌아다니지 말고.”

    “내가 언제 그랬다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쭉 내민 이온의 뒤로 다이닝 룸 문이 닫혔다. 이훈이 나간 식탁에는 여전히 작은 움직임들이 남아 있었다.

    ***

    여름의 과외는 꽤 평탄하게 흘러갔다. 대부분 그녀의 가르침을 들으며 외우고, 암기해야 했으며, 언제는 시간을 재며 모의고사를 풀었다. 대학에 갈 자신은 없었지만 과외 선생인 연우는 늘 잘하고 있다며 응원을 해 주었다.

    물론 형제들도 여름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온은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과외를 함께 듣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옆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으며, 끼어들지 않는 그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굴었다.

    그런 이온이 이훈의 서재에 조르르 달려가 모든 이야기를 보고 하듯 조잘댄다는 건 여름은 평생 모를 일이었다.

    이온 덕에, 아니 이온 때문에 이훈 역시 강제로 여름이 어느 정도 하며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의 앞에서 티를 내는 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근데 사장님 오늘 그거, 하시는 거 맞지?”

    “네?”

    “기사 못 봤어? 아주 선남선녀가 따로 없던데.”

    연우가 말하는 그것의 정체를 눈치채는 건 쉬웠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 검색하더니 여름에게 내밀었다.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기에 서로의 시선이 핸드폰에 고정되었다.

    그녀가 보여 준 건 다름 아닌 인터넷 기사였다. 그리 길지 않은 기사에는 익히 보던 이훈의 모습과 어떠한 여성의 사진이 함께 있었다. 선남선녀라기에 그들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으나, 같은 곳에서 찍힌 서로의 사진이 분할로 붙어 있었다.

    그저 약혼한다는 정보만이 실린 아주 짧은 기사였지만 젊고 능력 있는 남녀의 새로운 행보여서인지 이목이 쏠렸다는 사실은 안 봐도 훤한 분위기였다.

    “진짜 드라마 같다.”

    연우는 여름이 너도 가는 거니, 하고 물어 왔지만 차마 집에서 밥 먹는 거로 대체한다는 사실을 쉬이 말하기 힘들어 연우에게로 핸드폰을 건네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나도 결혼식에 불러 주시려나. 여름아, 선생님은 늘 너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녀의 유쾌한 에너지는 옆에 있는 이도 좋은 영향을 받는다고, 여름 역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여 긍정의 대답을 건넸다.

    “그럼 오늘은 4월 모의고사로 해 볼까? 좋은 날이니까, 쉽게.”

    좋은 날, 그녀의 미소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연우는 늘 솔직하고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늘 과외만 시작하면 달콤한 말로 꾀어내고는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가장 무서운 건 왜인지 모를 알 수 없는 감정이랑 같았다.

    해가 떨어지겠지 싶은 시간이 되어서야 끝나던 과외가 오늘따라 3시도 되지 않아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끝이 났다. 이상하다 싶어질 정도로 빨리 끝난 과외였기에 그녀에게 되묻자 연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방을 들며 말했다.

    “응? 사장님이 일찍 끝내 달라시던데? 아마 약혼식 때문 아니겠어?”

    그녀가 말하는 사장님이 이온이라는 건 안 봐도 훤했다. 여전히 약혼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여름은 약혼이라는 단어를 결혼으로 바꾸어 이해하는 편이었다. 그 점이 더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어색하기도 했고 말이다.

    분명 저녁을 함께 먹는다고 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계산되어 머릿속에 들어왔다.

    연우가 떠나고 나서도 자리에서 움직이기 힘들었던 여름은 이온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책상을 떠날 수 있었다.

    여름은 평소보다 단정한 차림새인 이온을 보고는 하얀 티에서 이온이 골라 준 얇은 티로 갈아입고 그의 앞에 섰다.

    이온은 그런 여름을 돌려 기차놀이 하듯 어깨에 손을 올린 후 그를 밀어 1층까지 내려가도록 도왔다.

    이끄는 대로 끌려간 여름은 다이닝 룸에 들어서자마자 커지는 동공을 막지 못하고 거친 숨을 뱉어야 했다. 식탁의 다리가 지금 당장 부서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차림이 눈앞에 들어왔다. 삼삼오오인 색이 균형을 이루기라도 하는 듯 무언가 가득했다.

    “……이게, 무슨.”

    “와, 이모님 혼자 하신 거예요?”

    차림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식기를 두고 있던 그녀는 괜히 땀을 닦는 듯한 모습으로 생긋 웃었다.

    “귀한 분 오신다고 해서 힘 좀 썼죠. 곧 도착하신다는데, 얼른 앉아요.”

    “빨리 앉아야겠네요.”

    그녀의 말에 몸이 굳어 버린 여름과 달리 이온은 알겠다며 뒤에서 아이를 밀어 왔다. 아마 이온이 뒤에 없었다면 그대로 얼어 버렸을 여름이었기에 다행인 일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오히려 익숙한 장소에서 음식만 많아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또 되새겨도 몸에 가득 들어간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여름의 맞은편에는 두 명분의 빈자리와 식기가 놓여 있었다.

    “오늘 잘해야겠다. 그렇지?”

    “……네.”

    “우리 가족이시니까.”

    여름의 머리에 묵직한 무게가 내려앉는다. 당연하다는 듯 여름의 옆에 자리한 이온이 아이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가족이었다. 여름에게 가장 소중하고 간절했던 단어였다. 이훈이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새로운 가족이 생기게 된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제 가족이 되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했던 날이 있었다.

    분명 그런 날도 있었는데, 과분하다 못해 많은 걸 받고 있으면서 그들에게 털어놓지 못할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여름은 무릎에 놓인 두 손을 맞잡아 강하게 긁기 시작했다. 서로의 손톱이 마비된 감각을 일깨우는 모습이었다.

    “우린 가족이야.”

    그의 말에 마음이 편해졌다. 애써 머릿속을 지워 버린 걸지도 모르지만, 이온의 말에 제 처지를 깨닫게 된 건 사실이었다. 몸에 가득 들어갔던 긴장은 여전했으나, 조금의 기대감이 부푼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고요하던 문밖에서 일정한 간격을 둔 소리가 나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반사적으로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온과 여름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청색 빛이 도는 어두운 정장을 입고 있던 이훈은 기사 사진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름이 매일 같이 보는 이훈은 느릿하고도 바른 걸음으로 다이닝 룸 문 너머로 들어오고 있었고, 뒤이어 들어온 이 역시 어딘가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머. 네가 여름이구나. 생각보다 더 어린데?”

    그들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 그녀는 단숨에 아이의 옆에 있던 이온을 지나쳐 여름의 앞으로 다가와 양손을 맞잡았다. 어느새 그녀에게 두 손 모두 잡힌 여름의 입에서는 어, 어 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완전 아기다, 피부 하얀 것 좀 봐. 이온이 너는 어디서 이런 애를 주워 온 거야.”

    그녀는 손을 흔들며 여름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생긋 웃어 보였다. 웨이브가 고운 긴 머리에 여름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의 큰 키의 여자는, 여름이 보았던 기사 사진 속의 그녀와 같은 모습의 사람이었다.

    그녀와 마주 잡은 손을 놓을 수도, 그렇다고 계속 잡고 있기도 애매했던 순간 이온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허, 차 이사님 우선 자리에 앉으시죠. 이래 봬도 약혼식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잖아요.”

    이온의 손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와 여름이 맞잡은 손을 강하게 떼어 냈다. 입고 있던 옷을 탁탁 털던 그녀는 불만스럽다는 듯 이온을 올려다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뭐야. 아직도 그거야? 오늘로 그 놀이는 끝난 거 아니었어?”

    “그만하고 빨리 와서 앉아.”

    이훈의 말에 치사하기는 하고 말하며 식탁을 돌아 주어진 자리에 큰 소리가 나게 털썩 앉은 그녀는 아이의 상상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현재의 이 상황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여름뿐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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