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31)
  • ***

    이른 아침, 서재의 문고리가 달칵하는 소리에 의자에 앉아 있던 이훈의 고개가 커다란 문으로 곧장 향했다. 여름이었다. 여름이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살며시 넣었다. 서재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가장 마지막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이훈을 발견했다.

    웃기게도 이훈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아이의 동공이 저렇게 커질 수 있나 싶어질 정도로 커졌다. 화들짝 놀라 문틈 사이에서 얼굴을 빼내 문을 쾅 하고는 닫았다. 이훈은 애써 한숨을 삼켰다.

    “들어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금 전과 같은 모습으로 문이 살며시 열리고는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데자뷔인가 싶은 상황에 이훈의 얼굴에 들어간 힘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아이는 그의 말에 문을 더 열더니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왜인지 이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걸어도 한이훈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고, 옆으로 발을 옮겨도 마찬가지였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그런데…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아이는 쭈뼛거리더니 책장 쪽으로 게걸음을 하여 이동하며 말했다. 이훈은 그저 귀찮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놓여 있는 담요를 집어 들고는 재차 몸을 눕혔다. 소파에 다리를 뻗고 가로로 누운 이훈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눈을 감았다.

    안경을 괜히 썼네, 누워 있던 이훈은 생각했다. 밀린 일이 끝나서인지 남들보다 조금 늦은 연휴를 보내고 있는 참이었다. 꼭 닮은 형제의 방해가 없다면 충분히 안온한 연휴였을 텐데 말이다.

    여름의 작은 발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굴하지 않고 안경을 쓴 채 담요를 목 끝까지 끌어 올리고 눈을 감아 몸에 힘을 풀었다. 여전히 졸음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거슬리는 아이의 발소리만 없다면 당장이라도 잠들 수 있을 만큼 눈가가 무거웠다.

    옆으로 걷는 것 같기도, 서재 곳곳을 전부 돌아보는 것 같기도 한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가 찾는 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찾기 힘든 모양이었다. 저 소리만 없었다면 다시 잠들었겠지만, 이훈은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그저 몸이나 쉰다고 생각하고 눈만 감고 있었다.

    “주무시나…….”

    그때 아이의 작은 숨결이 담요 밖으로 드러난 이훈의 팔에 맞닿았다.

    조금 전 여름의 다리는 어둡고 높은 그의 서재로 향했다. 여름은 형제와 함께해 온 시간에 비해 이훈과 나눈 대화가 그 누구보다 적다고 생각했다.

    매일 넓은 다이닝 룸에서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차를 마신다고 할지라도 나누는 대화는 없었다. 주로 이온의 말로 흐름이 이어졌고, 무겁지 않은 정적이 내려앉을 뿐이었다. 그런 이훈이 신경 쓰이는 건 여름뿐이었다.

    어떻게든 말 한 번 걸어 보려 눈을 굴려도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차 드세요?’ 하는 말 한마디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매일 같이 차려입고, 목 끝까지 잠근 단정한 복장은 교복 하나 차려입지 못하던 여름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거리낌 없는 사이로 나아가고 싶어도 기회를 찾기만 할 뿐 여름의 용기는 어디서도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재헌과의 일로 터져 버린 불안감과 그의 긴 출장은 먼 거리를 더 뒤로 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가까워지고 싶다.’

    먼 곳에서 돌아온 이훈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여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말이었다. 혼란스럽게 흩뿌려지는 문장은 아주 가끔 눈가를 붉게 만들었다. 세뇌나 다름없는 생각은 여름에게 흔치 않은 용기를 가져왔다.

    여름은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닫혀 있는 서재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제 용기였음에도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시선에 놀라 문을 열었던 문을 닫아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닫힌 문을 보고서야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차린 여름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그냥 돌아갈까, 이미 문에서는 한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여름은 안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재차 문고리에 손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색하게 서재를 거닐다 이훈의 숨소리마저 잦아든 걸 눈치채고는 천천히 소파 가까이 걸어온 여름이었다.

    늘 거친 말투에 범접할 수 없는 높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훈이었는데, 털이 가득 달린 담요를 덮은 이훈을 보니 무섭다기보다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곤함에 찌들어 잠자리에 든 이훈을 보니 아쉬움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품에 안은 무겁지 않은 책 두 권의 무게가 생생히 느껴졌다. 여름은 발꿈치를 들고는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소파 앞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놓인 테이블과 소파 사이 거리가 있었기에 작은 체구인 여름의 몸이 사이에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고른 숨을 쉬며 눈을 감고 있는 이훈의 얼굴은 여전히 멀끔했다. 잡티 하나 없는 얼굴이 신기할 정도로 맑았다. 단정하기만 한 얼굴일 줄 알았는데, 타고난 윤곽에 굵음이 가득했다. 여름이 손이 저절로 그의 얼굴로 향했다.

    살면서 만져나 볼 수 있을까 싶은 이훈의 얼굴이어서인지 여름의 손이 홀린 듯 다가갔다. 검지 하나를 펼쳐 옆으로 누워 있었기에 드러난 그의 오른쪽 뺨을 아프지 않게 살며시 쿡 찔렀다.

    여전히 이훈은 눈을 뜨지도 일어나지도 않았기에 그의 팔을 저지하지 않았다.

    ‘깊게 주무시나 보다,’

    여름의 얼굴이 전보다 밝아졌다. 검지 하나로 느껴지는 이훈의 얼굴 감촉은 꽤 부드러웠다.

    용기가 더욱이 생긴 여름은 검지 하나에 숫자를 더했다. 손바닥을 펼쳐 그의 부드러운 뺨 위에 올렸다. 따뜻한 기온이 여름의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렇게 얼마나 맞대고 있었을까, 여름은 금세 그의 뺨에서 손을 떼어 냈다. 이훈이 당장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괜한 두려움에 숨을 죽이며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훈이 눈이라도 뜨면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

    그러나 여름의 귀에는 서재에 달린 시곗바늘이 지나가는 소리만이 울릴 뿐 그의 눈꺼풀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여름은 그제야 숨죽이기 위해 가득 들어간 힘을 풀고는 바닥에 편히 앉았다.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책들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는 조금 천천히 몸을 앞으로 당겼다. 굽힌 팔꿈치를 쭉 펴지 않아도 그에게 충분히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훈은 소파에 편히 누워 있었고, 아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 채 소파 밑바닥에 앉아 있었다. 감상하듯 무릎을 세우고는 턱을 괴어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의 고른 숨이 훤히 보일 정도로 눈에 담는 시간이 늘어 갔다.

    이온과 달리 깔끔하고 단정한 이훈이었다. 일을 할 때만 쓰시는 안경은 원래 자면서도 끼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금세 시선은 그의 입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훈은 생각보다 과묵했고 해야 하는 말은 확실히 했다. 특히 이온에게 그랬다.

    여름은 아주 가끔 허물어야 하는 벽 없는 형제 사이가 부러웠다. 그러나 금세 욕심 담긴 생각을 지워 내기도 잘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름은 허벅지에 올려 둔 이훈의 책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 감상이 끝나고 극장을 떠나는 관객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레 그리고 아쉬움이 담긴 느릿한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큰 사장님은요?”

    앞치마를 잔뜩 조여 맨 춘자 씨가 물기 가득한 손을 털어 내며 이훈의 방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아침 식사를 위해 이훈을 찾고 있던 모양이었다.

    여름은 뭐라도 훔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고는 문 앞에서의 대화가 소란스러워 깨어날 이훈을 걱정했는지, 걸어오는 그녀에게로 빠르게 걸어갔다.

    “다시 주무세요. 피곤하신가 봐요.”

    “하기야 출장이 좀 길었어야지. 얼른 와요, 작은 사장님도 내려오셨어요.”

    “이것만 방에 두고 내려올게요.”

    여름은 들고 있던 책을 꼭 쥐어 앞으로 내보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벼운 몸짓 때문인지 거친 발걸음 소리 하나 안 났다. 계단을 오르는 여름의 뒷모습을 향해 빨리 내려오라는 말을 남긴 춘자 씨는 다이닝 룸으로 사라졌다.

    “……”

    마침내 서재 앞에서의 소리가 멎었다. 그제야 담요를 걷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훈은 소파 등에 편히 기댔다.

    이훈은 여름이 들어온 이래로 단 한 순간도 잠에 빠져든 적이 없었다. 그저 규칙적으로 숨을 쉬었을 뿐 혼자 오해하고 감상하다 나간 건 여름이었다.

    한이온이 데려온 아이여서일까. 여름마저 어딘가 이상했다. 이훈은 피곤한 눈가에 힘을 풀고는 계속해서 내려오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이가 어떻게 나온들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담겼다.

    생각을 마친 이훈은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의자로 넘어갔다. 긴 출장을 핑계로 쉬다 보니 밀린 일이 많았기에 조금도 게으르게 있을 틈이 없었다.

    이훈은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은 어리고 어릴수록 학습과 습득이 빠르다는 것도, 그게 저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

    티타임, 늘 비어 있는 시간마다 돌아오는, 이훈이 가장 싫어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이온의 말로는 차를 마시며 형제의 우애를 다진다고는 하지만 그저 귀찮았다.

    “무슨 차 드세요?”

    주황빛이 투명하게 돌고 있는 찻잔을 들고는 입을 맞대고 있던 이훈은 앞에서 들려오는 여름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매일 물어본다는 질문이 같았다.

    “너랑 같은 거.”

    같은 색에다가 같은 찻주전자에서 따른 차인데도 묻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으나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여름 역시 더는 말을 잇지 않고, ‘그렇구나.’ 하는 말을 길게 끌며 찻잔을 꼭 쥐고는 홀짝일 뿐이었다.

    여름의 이유 모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편한 바지에 운동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려면 금세 쫓아온 여름이 뒤에서 “출근하세요?” 하고 물어 왔다. 이훈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의식하며 다물고는 헛웃음을 터뜨리곤 문을 열고 나왔다.

    정장도 아닌 스포츠 브랜드의 운동복을 보고도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는 건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모르는 게 많은 아이가 여름이었다. 그러고는 굳이 정원까지 이훈을 따라 나와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런 이훈에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최근 들어 그가 거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사실이었다.

    2층에 이온과 붙어 있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이가 여름이었다. 그런 아이가 거실에 놓인 소파에서 모든 걸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했다.

    거실이라 부를 수 있는 넓은 공간에 놓인 소파에서 뒤를 돌면 긴 복도가 보인다. 복도의 중간에는 다이닝 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문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는 이훈의 서재가 있었기에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은 한이훈의 공간이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방에서 나와 서재로 이동하는 도중. 몸을 완전히 돌린 채 소파에 기대 복도의 끝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는 여름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마주한 것인지 감히 셀 수도 없었다.

    “뭘 봐.”

    일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안경을 끌어 올리며 문 앞에 멈춰선 이훈은 오늘도 마찬가지로 소파 등에 두 손을 올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름에게 입을 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하며 몸을 금세 돌리고는 없던 일로 굴 것 같았으나, 여름은 오히려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성큼 이훈의 서재 앞으로 달려와 그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훈의 시선이 여름에게 닿았다.

    “어디 가세요?”

    “보면 몰라?”

    거센 이훈의 말이 대답을 이었다. 당장이라도 문고리를 잡고 서재로 들어가려는 제 모습을 보고도 어디 가냐는 말이 나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눈치가 없는 건지 그는 여전히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물어 놓고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아…… 그럼 저도 올라가 볼게요.”

    여름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가까운 계단을 향해 걸어가서는 빠르게 올라갔다. 마치 오늘 할 질문은 끝이 난 것처럼 미련 하나 없는 뒷모습이었다.

    얼이 빠지는 건 남은 사람뿐이었다. 여전히 몸을 돌려 계단만을 바라보고 있던 이훈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다이닝 룸에서 나온 이온이었다. 이상하게 굴면 이유를 찾으면 된다. 그 해답을 알고 있을 만한 이 역시 단 한 명뿐이었다. 이훈은 금세 이온을 불러 붙잡았다.

    “한이온.”

    “응? 왜?”

    이온에게 묻는 게 정말 맞을까. 오히려 더 피곤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이훈은 가만히 서서는 이온을 바라보았다.

    “설마 나 기다렸어?”

    손가락을 펼쳐 자신을 가리키는 모습과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들어와.”

    “와, 형이 먼저 초대해 주는 건 또 처음인데.”

    설렌다. 방방 뛰며 뒤를 따르던 이온은 이훈보다도 먼저 소파에 편히 기대앉았다. 짜증스럽게 이온을 바라보던 이훈 역시 그와 떨어져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애가 이상하게 구는 이유, 알아?”

    귀찮기만 한 이온을 굳이 서재까지 끌고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또다시 귀찮은 제2의 한이온으로 자랄까 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누가?”

    이온은 줄곧 그랬다. 전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사람을 떠봤다.

    “여름이?”

    “시도 때도 없이 꽁무니 물고 따라와서는 헛소리만 하잖아. 눈도 제대로 못 보던 애가 갑자기 저러는 덴 이유가 있지 않겠어?”

    오히려 조금 전 이온의 자세로 변한 건 이훈이었다 물꼬가 트인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고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귀엽네.”

    이훈은 금세 미간이 좁혀졌다.

    “뭐? 이 상황에서도 너는.”

    여전히 진지함 없는 이온에게 진절머리 난다는 듯 얼굴을 구겨 보였다. 그러나 이온은 소리를 내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 전처럼 배를 부여잡고 웃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말이다.

    “둘 다 말이야. 형도 여름이만큼 귀엽고.”

    그런 말을 듣기에는 먹을 만큼 먹은 나이였지만 이온은 굴하지 않고 과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였다.

    그런 이온을 향해 한숨을 내보이고는 재차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전부 귀찮았다. 처음부터 이온을 끌고 들어온 저의 잘못이었다.

    “그냥 친해지고 싶은 거 아니겠어?”

    “…….”

    “원래 아이들은 이유 모를 애정을 쏟아붓곤 하잖아. 그 대상이 정해진 걸지도 모르지. 난 이미 여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형이 여름이한테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이야. 당연한 거라고.”

    천천히 이온의 말을 들었으나,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내가 무얼 해 주었다고, 이유 없이 여름이 주는 애정의 이유를 찾게 됐다. 이온에게도 그랬다.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가 이 정도 크기의 애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가. 이훈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가족이 된다는 건 그들의 전부가 되어 주어야 했고, 커다란 애정을 주고받아야 했다.

    그 과정이 모두 귀찮다고 느껴진 이훈은 그런 여름을 대충 받아 준다면 이 길이 끝나리라고 믿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

    “어디 가세요?”

    손에 모종삽을 들고 복도를 거닐고 있던 이훈의 앞에 나타난 건 밝은색 맨투맨을 입고 있는 여름이었다. 오늘 하루 여름의 첫 질문이었다.

    이제는 이훈마저 여름이 얼마나 말을 걸어오는지 저도 모르게 세고 있을 지경이었다.

    “밖에.”

    그는 한 손에 들어오는 모종삽으로 문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1월 내내 오랜 출장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연휴를 보냈다. 그러나 잘게 들어오는 윤 비서의 압박과 울리는 전화를 무시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주말이 지나는 대로 출근을 하겠다는 말과 함께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가만히 앉아 있기도 싫었던 이훈은 서랍을 열어 먼지가 쌓이고 있는 장비들을 꺼내 착용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여름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일부러 아이가 과외를 한다는 시간에 나왔는데 말이다.

    “너 과외 안 해?”

    “일찍 끝났어요. 정원 가꾸시게요?”

    인생의 절반도 넘는 시간을 보내던 보육원에서도 텃밭과 정원들이 넓게 이어져 있었다. 주말에는 따로 시간을 정해 주기적으로 정원과 텃밭을 가꾸고 물을 주기도 했었다.

    편한 복장으로 모종삽을 들고 나가는 이훈을 보아하니 보육원에서의 기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반가움에 이훈과 대화하고 있다는 긴장이 금세 사라졌다.

    “올라가서 공부나 해.”

    그러나 이훈은 따라나서려는 여름을 금세 눈치를 채기라도 한 건지 한 손에 들고 있던 모종삽을 앞뒤로 흔들며 올라가라 재촉했다.

    앞을 막고 있는 여름을 피해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 한 사람분의 발소리만 들려야 할 텐데 이훈의 귀에 다른 이의 숨소리와 발소리가 현관문을 열기까지 들려왔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문을 막고 돌아선 이훈 때문에 여름은 문밖으로 한 발짝도 내밀 수 없었다. 금세 시야가 그의 가슴에 막힌 여름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어서 올라가라는 듯 턱짓하고 있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너무 공부해서 머리가 아픈 것 같은데……. 방해 안 되게 조용히 있을게요.”

    고작 대문 근처도 가지 않는 작은 텃밭과 정원에 가는 것뿐이었다. 여름 역시 줄기차게 산책하러 나가는 곳이었음에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이훈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기대감을 잔뜩 품은 듯 보이는 아이에게 이훈은 도저히 거절의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이훈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여름을 두고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엄밀히 따지면 허락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아이의 고집은 점차 이온을 닮아 가는 듯했다.

    1월의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기에 여전히 바람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게다가 두껍게 껴입지 않는다면 무리일 정도의 날씨인 건 여전했다. 그런데도 여름은 맨투맨 하나만 입고 이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두꺼운 점퍼를 입은 이훈마저 춥다고 느낄 정도로 바람이 불었으나, 여름은 그저 이훈을 놓치지 않는 일에 신경 쓰고 있을 뿐이었다.

    이훈이 모종삽을 들고 도착한 곳은 저택 왼편에 널브러져 있는 흙들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얼핏 보면 텃밭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어지러운 곳이었으나 중간중간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싹이 그 존재를 증명했다.

    여름이 막 이곳에 도착했을 적에는 가을이 막 지나가고 겨울이 오고 있었다.

    붉게 물든 나무들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 꽃 하나 보이지 않던 정원이었기에 이훈이 새롭게 변화를 주려는 모습이 여름의 눈에는 신기하게만 보였다. 추위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훈은 모판흙일 게 분명한 것들이 쌓여 있는 곳을 향해 대충 발로 문대고는 곧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얼룩덜룩한 모양을 평평하게 다져 주었다. 정성스러운 발짓이 꽤 애정이 담겨 보였지만 정반대였다. 텃밭을 가꾸기에 적합한 이름 모를 토양들과 비료가 섞여 있겠지만 이훈의 머리에 남아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취미는 텃밭을 가꾸고 싱싱한 채소를 따 먹는 것도, 예쁜 품종의 꽃을 길러 내는 것도 아니었다. 악취미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쓸모없고도 낭비적인 취미는 이온마저 헛웃음 치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건 뭐예요?”

    그는 저택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상자를 들고는 평평해진 텃밭 위에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여름을 바라보았다. 이왕 따라붙은 이가 있는 만큼 작년과는 다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씨앗. 네가 골라 보고 싶어?”

    “그, 그래도 돼요?”

    원래는 미리 정해 놓지 않나, 순간 의아했으나 이훈이 기회를 줬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떠 피어오르는 의아함을 억눌렀다.

    여름은 그의 눈치를 보며 상자를 향해 쪼그려 앉았다. 작은 상자였지만 떨어질 때 둔탁한 소리가 났기에 묵직해 보였다.

    상자 안에는 예상한 대로 많은 씨앗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작은 봉지에 씨앗의 이름과 그림까지 그려져 있어서인지 눈에 확 들어왔다.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야생화부터 딸기와 같은 일상에 익숙한 품종까지 말이다.

    “많이 꺼내. 한 번에 심을 거니까.”

    “……네? 전부 지금 심어도 괜찮은 씨앗들이에요?”

    그렇다기에는 그 가짓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이렇게 추운 겨울에는 살아남지 못하게 생긴 것들도 눈에 보였기에 여름은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나도 몰라. 그냥 마음에 드는 거나 꺼내.”

    그렇다 할 취미 하나 없던 이훈이 새해가 되면 습관처럼 하는 일이었다. 온갖 씨앗을 사들여 흙에 심고는 한 해 동안 무엇이 피어나는지를 지켜보는 일을 말이다. 이온은 늘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매년 다른 것이 싹을 트고 열매까지 맺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꼭 겨울에 심어야 하는 작물이 잘 생존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확률이 높은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여름에 심어야 할 작물을 기대하기도 했다.

    자주 물을 주지도, 매번 관찰하지도 않았으며 다 죽은 새싹들을 오늘처럼 치워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으나 이훈은 습관을 잊는 법이 없었다.

    오늘은 웃기게도 아이와 함께였다. 여전히 당황 섞인 눈으로 이훈을 올려다보고 있던 여름은 그의 말에 따라 마음에 드는 씨앗을 품에 넣기 시작했다.

    이훈은 그런 여름을 뒤로한 채 그저 발로 흙을 거칠게 헤치며 씨앗을 심을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저택에 붙어 있는 정원일지라도 야외는 야외였다. 차가운 바람에 떨리는 손으로 여러 개의 씨앗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여름의 바지 끝단은 흙으로 범벅이었다.

    “골랐어? 몇 개 꺼내서 그냥 던져.”

    그는 텃밭에서 벗어나 턱짓으로 가리켰다. 여전히 여름의 머릿속에는 이게 맞나 싶은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충 흙을 향해 흩뿌리니 안 그래도 잘 보이지 않던 작은 씨앗들이 흙 사이로 사라졌다.

    얼마나 뿌렸을까, 이름도 처음 보는 예쁜 꽃과 맛있어 보이는 상추, 참외, 딸기 씨앗도 뿌렸다. 그러고는 재차 쪼그려 앉아 손으로 흙을 쓸어 모아 이곳에 자리했을 씨앗의 위로 흙을 덮어 주기 시작했다. 차갑고도 거친 기운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제야 곁으로 다가온 이훈은 여름이 덮고 있던 곳을 향해 발로 흙을 밀어 넣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이훈에게 한 번, 갑작스레 시야에 가득 찬 흙 때문에 두 번 놀란 여름은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숨을 헉, 하고 삼켰다. 이제 바지 밑단만이 아닌 모든 곳이 비료 섞인 토양으로 범벅이 되었다.

    게다가 이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옆에 놓여 있던 시퍼런 색의 물뿌리개를 들고는 기울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놀란 여름은 뒤로 빠르게 몸을 물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했다고 생각했으나, 물뿌리개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닥에 맞닿는 동시에 튀었나 보다. 물기 가득한 흙과 물이 어떻게 튀겼는지 베이지색 맨투맨에도 묻어 있었다.

    여름은 그에게 멀리 떨어져 서서는 조금 억울한 눈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못 보면 째려본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감정이 실린 눈빛이었다.

    “왜. 해 보고 싶어?”

    그러나 금세 여름의 눈빛을 눈치를 챈 이훈은 아이가 물뿌리개마저 스스로 해 보고 싶어 하는 줄 알고 여름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행동에 더욱 눈가가 내려간 여름은 앓는 소리만 내며 그가 건네는 물뿌리개를 건네받을 뿐이었다.

    조금 움직였다고 몸이 달궈져서인지 춥지는 않았지만 아주 조금 고되게 느껴졌다.

    물뿌리개도 씨앗이 가득 담겨 있던 상자도 벽에 대충 기대 던져 놓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이훈이었다. 그를 따라 발걸음을 빨리한 건 물뿌리개 속 물을 전부 씨앗을 향해 뿌려 주고 나서의 일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니 온도가 확연히 달랐다. 찬바람이 사라지고 미지근한 기운이 맴돌고 있어서인지 벌써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서고는 고개를 살며시 내리니 진흙으로 가득 덮여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제 신발이 보였다. 누가 보아도 격한 활동을 하고 난 뒤의 모습이었다.

    “아!”

    신발의 묻은 흙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안으로 들어가다 어딘가에 부딪힌 여름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눈앞에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으리라 생각했던 이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발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네?”

    “바지도 그렇고, 위에도 그렇고. 누가 보면 혼자 다 한 줄 알겠어.”

    그는 여름의 바지에서부터 맨투맨까지 흘겨보며 혀를 내둘렀다. 여름은 그의 말에 울컥하여 눈에 힘이 들어갔으나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감히 고르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놀라게 해서 바지가 엉망이 되었고, 사람이 있는 곳으로 물을 뿌려 옷이 젖었는데 말이다.

    “안 그래도 이모님 할 일도 많으신데.”

    너까지 일을 만드네, 이훈은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으나 그의 말이 훤히 들렸다. 이대로 제 방이 있는 2층까지 간다면 가는 길목마다 따라오라고 표식이라도 남기는 동화처럼 흙 자국이 남고 잔부스러기가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여름은 당연히 제가 씻고 나와 청소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반박할 말을 찾았기에 입을 열려는 순간, 이훈은 몸을 살짝 숙여 여름의 허리를 부여잡고는 어깨 위로 올렸다.

    “아니, 무슨……!”

    단숨에 이훈의 어깨에 들린 상태가 된 여름이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훈의 등과 걷고 있는 반대 방향의 풍경뿐이었다.

    성인이 된 지 꽤 됐는데도 어린아이를 업는 것처럼 단숨에 들리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여름은 내려 달라는 듯 몸을 앞뒤로 흔들며 이렇게나마 그에게 반항했다.

    “흙 떨어지니까 가만히 있어.”

    짧은 거리를 못 참고 발버둥 치는 여름의 엉덩이를 내리치니 그의 움직임이 단숨에 멎었다. 귓가에는 ‘엉, 엉, 엉덩이를…….’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얼굴이 붉어져 눈가만 비비고 있을 아이의 모습은 안 봐도 훤했다.

    이훈이 여름을 내려놓은 곳은 2층도 아닌 그의 방 안에 있는 화장실이었다. 방으로 데려다주는 줄만 알았던 여름은 어안이 벙벙한 채 차가운 욕실 바닥 위에 서 있었다.

    “뭐 해, 들어가서 씻고 나와.”

    지난번, 방의 공사로 인해 이훈의 방에서 지내던 날 이후로 처음 오는 곳이었다.

    이훈은 전과 달리 욕실의 문을 단단히 닫아 주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욕실에 혼자 남겨진 여름은 멀끔한 그의 차림과 제 모습을 비교하니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신발도 바지도 심지어 속옷도 젖었지만, 오늘은 매일, 하루에 세 마디는 대화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고 넘긴 셈이었다. 가족 간의 대화는 중요하다는 말을 열심히 지켜 내고 있었다.

    여름은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축축하게 들러붙은 옷을 벗었다.

    흘러나오는 물과 함께 더러움이 씻겨 내려갔다. 진즉에 말라 껍질이 생겨 버린 자국마저 손으로 비비니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해진 여름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며 선을 맞춰 반듯하게 놓여 있는 수건 중 하나를 꺼내 몸을 닦았다.

    “……어?”

    물기가 가시고 옷을 입으려 보니 갈아입어야 하는 옷이 없었다. 입고 들어온 옷들은 원래의 색마저 감출 만큼 더러웠기에 씻고 난 뒤에 입기에는 무리였다. 씻을 생각만 하고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다.

    여름은 수건과 함께 입었던 옷들을 바구니에 넣고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주먹 하나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살며시 열어 문 앞을 확인했다. 혹시나 이훈이 갈아입을 만한 옷을 앞에 두고 갔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 그 어디에도 제 옷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저 밖에서 이훈이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저, 저기…….”

    “…….”

    “저 갈아입을 옷이…….”

    “나와, 줄게.”

    다행히 이훈은 우물쭈물하는 여름의 소리를 들었는지 서랍을 열어 아이가 입을 만한 옷을 꺼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안심한 여름은 문을 활짝 열어 욕실 밖으로 나왔다.

    물기를 깔끔히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습기 가득하고 따뜻했던 욕실에서 나와서였을까. 찬 기운이 단숨에 몸을 꿰뚫었다.

    몸에 생겨난 소름과 동시에 부르르 떨리는 몸에 머리가 핑 돌았다. 바닥이 좌우로 움직이고 천장이 돌고 있었다.

    여름은 여전히 서랍을 뒤집고 있는 이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으로 걸어가 침대에 등을 기대고는 바닥에 앉았다. 옷 하나 안 입고 침대 위에 앉을 수도 없기도 했고, 계속해서 서 있다가는 어지러워 넘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맞겠지, 입…….”

    그때 이훈이 손에 옷을 들고는 몸을 돌렸다. 욕실 안으로 건네주려 욕실을 바라보았지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모습을 보고는 돌아간 고개가 아이를 금세 찾아냈다.

    다른 사람이라면 대충 수건이라도 걸치고 나오겠지만 여름은 나체 그대로 바닥에 앉아 침대에 기대고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 있었다.

    왜 바닥에 앉아 있는 거야. 게다가 몸을 말고 있는 자세에 아이의 작은 몸은 더욱 왜소하게 보였다.

    아이에게 다가갈수록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테두리 안에 갇혀 살았다 할지라도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여름의 태도가 외려 어이가 없었다.

    “일어나서 입어.”

    그는 발끝에 아이가 닿을 것만 같을 정도로 가까이 섰다. 시선을 내려 여전히 무릎을 세운 채 고개를 묻고는 들지 않고 있는 여름을 빤히 응시했다.

    울먹거리며 부끄러워하던, 눈이라도 감아 달라고 애원하리라 생각했으나 아이는 계속해서 몸을 떨고 있을 뿐 파묻은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추워?”

    아이는 그제야 그의 말에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여름은 추웠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힘을 주어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어두운 공간마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훈이 제 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추가 짓누르고 있는 듯한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추운 거야, 아픈 거야.”

    얼마나 추위를 먹은 건지 인사불성의 상태가 되어 버린 여름의 앞에 이훈이 무릎을 굽혀 앉은 건 그 뒤의 행동이었다.

    이훈은 한 손을 아이의 머리에 가져가 힘을 줘서 들어 올렸다. 붉어진 눈가의 얼굴이 무릎에서 떨어지며 고개가 들렸다.

    겉옷 하나 입지 않고 흙을 퍼낼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펄펄 끓을 것만 같았던 아이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게다가 멈추지 않는 떨림이 이훈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니 아프기도 춥기도 한 모양이었다.

    “또 들들 볶겠네.”

    이러다 자주 아픈 여름을 위해 갖춰 놓은 약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늦은 겨울이 오고 자주 앓는 여름의 모습에 골병이 나는 건 이훈이었다.

    아이가 정상 체온에서 벗어나면 이훈이 있는 1층으로 뛰어 내려와 무슨 약을 먹여야 하냐며 어깨를 흔들곤 하는 이가 제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축 늘어진 여름의 목에 가져온 두꺼운 후드티를 밀어 넣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옷을 입혀 준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팔자에 없는 일을 하고 있자니 오묘한 기분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훈은 아이의 몸을 제 쪽으로 더욱 당겨 기대게 한 뒤 후드티를 찬찬히 내려 입혔다. 이훈의 것이었기에 크기가 커서 여름에게 입히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바지였다. 하필 바닥에 앉아 있던 탓에 이도 저도 못 하는 자세가 되었다.

    게다가 아이는 여전히 기력이 빠져나가는 건지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안으로 말고 있었다. 힘을 주고 있는 건 이훈 혼자였다. 팔만 두르지 않았지, 껴안고 있는 자세를 인지하고 나서야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꽉 잡아.”

    “네, 네…….”

    아이의 팔은 어느새 이훈의 목을 두르고 있었다. 이훈이 강제로 두르기도 했으나, 그의 말과 동시에 없는 힘을 끌어온 여름이 그의 목을 꽉 두르고 있기도 했다.

    그는 옆에 널브러져 있는 바지를 들어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일어난 이훈은 여름의 등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는 바지에 여름의 다리를 넣기 시작했다. 포장마저 뜯지 않은 새것의 속옷도 함께 가져왔지만 일말의 오기가 속옷을 입혀 주는 것만큼은 포기하게 했다.

    이훈은 보이지 않는 고개를 더욱 내밀어 손을 움직였지만, 여름은 더욱 제 형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여름은 그가 두르고 있던 팔이 떨어져 나간 뒤로 넘어질까 두려워 절대 힘이 들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한 팔과 몸에 긴장이 들어갔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리며 세상이 돌고 있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냥 욕실에서 기다릴걸, 왜 나와서는. 자꾸만 들어가는 힘을 풀기 위해 숨을 빠르게 쉬었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여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이훈의 어깨에 묻고는 그가 입혀 주는 바지에 다리를 밀어 넣었다.

    “내가 뭘 했다고 세워.”

    그러나 여름은 형제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매번 간과하고는 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아래를 그의 몸에 비비는 자세가 되니 이훈의 말에는 작은 웃음기가 들어가 있었다. 눈을 끔뻑일 정도로 부끄러웠으나 아래가 간질거리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전히 아래가 화끈거리면서 부풀고 있었으나 아이는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을 할 뿐이었다. 그저 몸을 더욱 이훈에게 당기며 구세주를 찾은 사람처럼 꼭 끌어안는 작은 해소를 말이다.

    이훈은 그런데도 부끄러움을 감추고 허리를 좌우로 비트는 여름의 행동이 가소로웠다. 진작에 들어갔을 바지가 여름의 움직임에 막히고 있었다. 멋모르고 아래를 세우는 건 괜찮았으나 한이온이 쳐들어와 저들의 모습을 보는 건 곤란했다.

    오금에 걸려 있는 바지를 끌어 올리며 다른 손으로는 살이 몰려 있는 통통한 아이의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다른 곳에 비해 몰려 있는 살 때문인지 찰진 소리가 울렸다.

    “아니……왜, 또 엉, 덩이를…….”

    목이 쉬어 갈라진 목소리에는 당황이 섞여 있었다. 여름은 엉덩이의 맨 살갗에 남의 손이 닿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 그러다 심해지면 밖으로 나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여름의 몸이 단숨에 굳었다. 이훈 역시 아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지를 허리까지 끌어 올렸다. 목이 갈라지고 점차 열이 오르고 있는 아이의 몸은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감기로 보이는 증상이 심해지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여름의 머릿속은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웠다.

    아래가 멈추지 않고 부푸는 것도 병원에서 고쳐야 하는 건가, 그의 어깨에 묻었던 고개에 더욱 힘을 주며 좌우로 비볐다. 이훈에게 묻고 싶었으나 놀림당할까 입을 꾹 다물었다.

    여름의 머릿속에 쓸데없는 가정들이 돌아다니는 사이 이훈은 그를 끌어안아 침대 위에 던지듯 눕혔다.

    “아.”

    하필 엉덩이부터 떨어진 탓에 등이 나중에 떨어져 숨이 입 밖으로 거세게 튀어나왔다.

    “잠이나 자.”

    이훈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깐 채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씨앗 하나 심으려다 다 큰 남자 하나를 양육한 셈이 되었다.

    차라리 한이온을 부를 걸 그랬나, 여름과 마주하면 팔자에 없는 일을 저절로 하게 된다. 지난 욕실에서의 행위처럼 말이다.

    “아파요…….”

    “어디가.”

    그렇게 움직였으니 금세 눈을 감고 자겠지 싶었으나 여름은 붉어진 뺨을 가리지 않고 아프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훈은 이불을 아이의 목 끝까지 덮어 주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이제 조용히 하고 자.”

    여름의 곁에 앉아 있던 이훈은 아이의 말끝이 흐려지는 걸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방이었음에도 자는 이가 깰까 싶어 조용히 나가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