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1)

***

재헌이 오기 전까지는 매일 같이 윤 비서가 그 역할을 대신하여 집에 머무르고는 했었다. 그러나 재헌이 고용되고 나서부터는 아침 일찍 나서는 건 형제뿐만이 아니라 윤 비서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점심을 먹고 난 이후면 식사를 아이에게 챙겨 주는 이모님과 재헌 그리고 여름만이 저택에 남게 된다.

재헌이 저택 밖으로 외출하자는 말을 꺼낸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짧은 시간이어도 강산이 변하고 날씨가 변하기 충분했다.

매일 입던 카디건은 어느새 어둠 가득한 옷장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고 어느새 두꺼운 겉옷이 가장 가까운 곳에 걸려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눈이 올까 기대가 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 뺨을 스치곤 했다.

재헌은 거의 매일, 여름의 방에 올라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일하는 시간이 아니냐고 물으면 그는 쉬는 시간이라고 대꾸하고는 말았다.

변화가 없었기에 괜찮은 하루들이었다. 암묵적인 규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선을 넘어 버렸을 때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때의 안온이었다.

과외 선생님인 민혁이 아예 오지 않는 날들이 점차 늘어났다. 여름은 민혁이 오지 않는 날이면 이온에게 이유를 묻고는 했으나, “아마 바빠서 못 온 게 아닐까?” 하는 등의 말과 함께 가벼이 넘어갈 뿐이었기에 자세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민혁을 볼 때면 자신을 상담처라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괜찮다는 듯 달래주는 이온을 보며 불편한 마음을 억눌렀다.

“뭐 해?”

2층 계단 난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커다란 공간에 푹신한 소파와 함께 널찍한 테이블이 놓여 있는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거실인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지는 구분할 수 없지만, 식사하고 나면 여름이 들르는 곳 중 하나였다.

“그냥 밖에……. 형은 어디 나가세요?”

소파에 편히 앉아 있는 여름에게 다가온 건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는 재헌이었다.

재헌은 손에 가벼운 봉투를 들고는 여름의 옆에 서 있었다. 겉옷까지 껴입고 있는 걸 보니 밖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재헌을 올려다보았다. 재헌과 함께한 시간에 익숙해져서인지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응. 잠깐 이모님 심부름.”

“아…….”

“같이 갈래?”

어느 정도 그를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같이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말에 대한 면역은 아직 없는 모양이었다.

여름의 동공은 지, 지금요? 하는 말과 함께 확장되었다. 실로 갑작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여름은 재헌이 당황스러웠으나 눈을 동그랗게 뜬 여름의 모습은 재헌에게 일상이었다. 생긋 웃은 재헌이 여름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는 듯 흔들었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자.”

여름은 그를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어 내 일어났다. 반강제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의 말을 거부하기에는 목소리에 쾌활함이 가득했다.

말로만 하는 제안인 줄만 알았던 일이 얼마 가지 않아 당장 일어나니 걱정보다도 설렘이 가득했다. 길거리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커다란 저택의 바깥이 궁금하면서도 기대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 추우니까 겉옷도 두꺼운 걸로 입고.”

재헌은 여름을 소파에서 돌아 나오게 끌어당기고는 등을 떠밀었다.

‘이렇게 정말 나가는 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도중 멈칫하며 뒤를 돌아볼 때마다 여전히 아래에서 응시하고 있는 재헌의 모습이 보였다.

여름은 느릿한 걸음으로 2층에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 이대로 나가는 건가, 의자에 곤히 걸려 있던 두꺼운 점퍼를 집어 들었다.

이온도 이훈도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여름이 저택에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이는 재헌뿐이었다.

그들에게 말하지 않고 나가도 괜찮은 게 맞을까, 아침까지만 해도 환히 웃으며 저를 안아 주던 이온의 얼굴이 훤하게 떠올랐다. 괜히 불편한 마음을 지워 낼 수 없었다.

“왔어?”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헌이 여름의 겉옷을 더욱더 여며 주었다. 잊고 있던 단추를 잠가 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정원에라도 나가지 않으면 바깥 날씨를 알기 어려웠다. 저택은 따뜻했고, 어디 하나 아쉬운 곳이 없었다.

“밖에 추워요?”

날씨도 모르고 얇은 옷으로 정원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의도치 않은 기침을 내뱉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여름의 모습을 본 이온은 그날 이후로 두꺼운 옷을 입지 않으면 정원조차 내보내 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여름의 의자에는 늘 두꺼운 겉옷이 상시로 걸려 있었다.

재헌은 이상하게도 정원으로 통하는 큰 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돌려 다이닝 룸을 향해 걸었다. 곧장 따라오지 않는 여름을 돌아보며 얼른 오라며 언질 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식탁이 늘어져 있는 공간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공간에 붙어 있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재료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걸 보아 창고로 사용하는 곳인 게 분명했다.

“정문으로는 오가질 못해서 다이닝 룸이랑 연결된 뒷문으로 나가야 하는데, 괜찮지?”

정원과 이어져 있는 커다란 문이 정문인 모양이었다. 정문을 이용하는 건 형제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형제들의 차가 오갔고, 그들만이 사용하는 입구였다. 그래서인지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은 다이닝 룸과 이어져 있는 창고 문을 이용해야 했다.

여름에게는 당연히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정문 못지않게 작은 문도 열악한 환경은 아니었다.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도 몰랐기에 발걸음 하나 옮기기 어색했다. 여름은 재헌의 뒤를 바라보며 걸었다.

문을 열고 나오니 정원과 비슷한 풀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아마 저기 보이는 문을 열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막상 나가려니 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손목에서부터 느껴졌다. 저택을 두르고 있는 커다란 담이 오늘따라 높게 보였다.

“먹고 싶은 건 없어?”

재헌은 여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얼어 있는 여름에게로 말을 건넸다. 분명히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나, 재헌을 따라가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형이 좋아하는 거 먹어요.”

이곳이 어딘지도 몰라서일까. 알고 있는 게 없던 여름은 그저 재헌이 추천해 주는 곳을 가는 게 편했다.

재헌은 문에 걸려 있는 도어 록에 비밀번호를 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안에서 나가는 것임에도 꽁꽁 닫혀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먼저 나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문 너머로 이어진 길대로 달리는 자동차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졌다.

여름은 천천히 발걸음을 문 너머로 옮겼다. 저택으로도 단독 주택으로도 보이는 제 집은 꽤 높은 곳에 있었다.

여름은 담 너머로 나와 고개를 돌리니 아래로 향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보였다. 게다가 주변에는 형제의 저택과 비슷한 모양의 집이 많았다. 여름의 머릿속에는 부자들의 동네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모님 심부름은 이따 하고, 여름이랑 나왔으니까 밥부터 먹어야겠네.”

까마득하게 보였던 내리막길로 그들은 발걸음 했다. 여름은 오히려 어안이 벙벙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도, 발걸음을 내디딘 제 모습도 무엇 하나 실재하는 것 같지 않아서였다.

여름은 곧 돌아올 곳이라 생각하는 집을 뒤로하고 걷고 또 걸었다.

***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작은 경양식 집이었다. 여름은 돈가스를, 재헌은 우동을 먹었다.

재헌의 말로는 학생 때 형을 데리고 자주 오던 곳이었으나, 그의 형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가족과의 추억이 있는 곳에 데려와 주신 거구나 여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 안 가득히 음식을 밀어 넣었다.

서울은 넓었고 사람도 차도 많았다. 그 길을 따라 재헌은 익숙한 걸음으로 커다란 마트 안으로 향했다. 커다란 봉지에 한가득 무언가를 구매한 재헌과 달리 여름은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경하기 바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오르는 순간 중 하나였다. 밥까지 배불리 먹고, 쉼 없이 움직이다 보니 얼마 없던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그때 재헌이 여름을 데리고 들어간 곳이 카페였다. 이미 카페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맴돌고 있었다. 따뜻한 걸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들어왔지만, 막상 들어오니 느껴지는 목마름에 시원한 주스를 주문하여 마셨다.

“많이 힘들어?”

여름의 앞에 앉아 응시하는 이는 재헌이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재미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괜히 싫다는 거 데려왔을까 봐 걱정했는데.”

괜히 힘들다는 여름을 끌고 나왔을까 걱정한 재헌은 턱을 괴고는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여름과 달리 따뜻한 라테를 먹고 있던 재헌은 앞에 앉은 여름을 바라보았다. 여름은 어색하다는 듯 음료를 홀짝이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것들이 더 많았다.

“티슈 좀 가져올게. 마시고 있어.”

여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저 멀리 티슈를 가지러 가는 재헌의 뒷모습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여름은 망고 주스를 두꺼운 빨대로 휘적거리며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재미는 있었으나, 다시 경험해서 치미는 불편함을 억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형제에게 숨기는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으며, 재헌의 제안을 거절할 용기도 없었다. 무엇 하나 줏대 없는 제 모습에 속에서는 한숨이 나왔다. 재헌이 돌아오면 집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보이려던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 의자를 거칠게 빼내는 소리에 여름은 멍하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제 티슈를 가지러 간 재헌인 줄만 알았다.

쉼 없이 원을 그리며 휘젓던 빨대를 쥔 여름의 손이 단숨에 멈췄다.

“…형?”

단정해 보이면서 편하고 어두운 정장을 입고 있는 이온이었다.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어서인지 여름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는 여름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에 눈을 과장하듯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이제 형 소리 잘하네.”

“…….”

“재미없게.”

***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여름에 태어난 이온은 커 갈수록 환영은커녕 관심조차 식어 가는 작은 존재였다.

이미 가업을 이어 갈 첫째는 날이 갈수록 올곧고 어른들의 뜻대로 자라나고 있었기에 방해할 대체재는 필요 없었다. 오히려 있음을 경계해야 했다.

불행인 건지 다행인 것인지 초여름의 아이는 어른들의 뜻, 딱 그 반대로 성장했다. 하고 싶은 건 해야 했고, 하기 싫은 건 절대 하지 않았다. 집안은 그런 아이를 아래로 끌고 내려갔고 뜻을 펼칠 수 없게 낮추었다.

그래서였을까 가업을 이끌어 갈 첫째 아이의 명성과 위치는 높아져 갔고 드세었다.

그렇게 혼자 커 가는 아이에게는 부모조차 관심 두지 않았다. 아주 가끔 형인 첫째 아이와 시간을 보낼 뿐, 함께했던 이들은 또래의 친구들뿐이었다. 뜨거운 날 태어난 아이는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길로 걸었다.

아이의 형도, 아이의 부모도 그를 돌보는 직원들도 몰랐다.

그래서 아이는 저를 알아줄 가족을 만들어 냈다. 그에게는 부족함을 채워 줄 가족 놀이였고, 남이 보기에는 그저 방해였다.

점차 다른 길로 걸어가는 아이의 홀로 남은 가족인 첫째는 그런 동생을 보며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늦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에겐 이 순간이 절망이었다.

***

여름은 눈앞에 이온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은 평상시보다 확장되어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온의 표정에서 놀라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넓은 카페에는 빈자리가 많았으나, 그는 곧장 여름의 앞에 앉았다. 그것만으로 우연이 성립되지 않았다.

“재헌이랑 놀러 나왔어?”

그의 목소리는 다른 때보다 낮았고 차가웠다. 카페에서 작게 울리는 노랫소리와 섞여 들어 잔잔하게 들려왔다.

이온은 의자에 편히 기대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름과는 멀어지는 자세였다.

아이는 왜인지 벌어지지 않는 아랫입술을 앙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놀러 나온 것임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눈을 끔뻑이지도 않고 응시하기만 하는 이온의 모습에 무어라 할 말을 잃었다.

무엇을 말해도 거짓말일 것 같았고, 무슨 말을 하여도 숨긴 하루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형이랑.”

“걔가 나가자고 했다고?”

“…….”

그의 심부름을 따라왔다고 해야 했을까, 재헌에 동조한 건 저도 마찬가지였기에 입이 꾹 다물렸고 고개도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나가면 안 된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잖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빨라졌다. 그러나 이온의 목소리는 노래와 다르게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들려왔다.

“응? 여름아.”

사실 알고 있었던 것도 같다. 정문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도 처음 저택에 왔을 때 두꺼운 줄에 묶여 있던 이유도 전부 말이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이 모든 게 사실이라는 현실도 함께 말이다.

“형님, 오셨어요?”

일방적인 이온의 시선을 받고 있던 사이에 흘러 들어온 건 재헌의 목소리였다. 재헌은 손에 휴지를 들고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이온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상했다. 재헌은 갑작스레 등장한 이온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의자에 편히 기대 있던 이온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연스레 시야에 재헌이 들어왔다. 재헌의 입꼬리는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눈을 지지듯 밟고 시간이 지나면 바라보기도 싫은 더러운 것이 된다.

새하얀 것이었음을, 아름다웠던 것이었음을 알고 있기에 그냥 두었던 것이 독으로 돌아왔다.

이온은 활짝 웃으며 한숨을 내뱉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착해서 이렇게 됐나. 어떻게 생각해, 재헌아?”

“너무 착하셔서 잔인하시죠.”

재헌은 휴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잔잔한 파도보다도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기나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여름과 다르게 금세 자리에서 일어난 건 이온이었다.

“다시 받아 주실 건가요? 여름이랑도 꽤 친해졌는데. 사이 좋은 형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재헌이 말했다. 어느새 그가 쥐고 있던 티슈는 구겨져 제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온이 시선이 다시 한번 재헌에게로 향했으나 곧장 떨어졌다. 이온의 표정 변화는 단 조금도 없었기에 그 누구라도 그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 출근은 안 해도 돼.”

그의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재헌이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의자를 끄는 거친 소리가 울렸다.

“너는 따라 나와.”

이온이 일어난 자리를 바라보던 재헌을 뒤로하고 여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카페의 문을 열고 나가는 이온의 모습을 잃을까 시선을 놓지 못했다.

여름은 고개를 우왕좌왕하다 금세 이온을 따라나섰다. 남기고 온 재헌이 신경 쓰였으나, 이온에게 잘못을 빌지 않았다. 그를 두고 나온 것에 대한 사과는 내일 꼭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발걸음을 빨리했다.

카페의 문을 밀고 나오니 이온의 뒷모습이 보였다.

멈칫하는 발걸음을 힘겹게 떼어 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앞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차가 있었다. 비싸 보이고도 광택이 저절로 이는 차는 눈에 익숙한 이온의 차였다. 늘 그가 출근이라는 걸 할 때 정문을 통해 나가는 것 중 하나였다.

“먼저 타.”

그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이온은 한 손으로는 차의 뒷문을 열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름의 등을 밀어 안으로 들어가게 도왔다.

여름은 찬찬히 발을 넣었다. 수없이 많이 본 차였지만, 직접 몸을 담는 건 처음이었다.

여름에 이어 이온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작은 진동이 울리더니 곧장 출발했다. 차 안에는 적막함이 맴돌았다. 이온은 여름이 앉아 있는 반대 방향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점차 바깥의 모습은 익숙한 길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재헌과 걸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차로 이동하지 않았으니 그와 시간을 보낸 장소 모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느새 정면으로 익숙한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말하고 싶었다.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고, 허락을 받고 나가고 싶었다고 형제에게 변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여름은 쉽게 열리지 않는 입을 꾹 다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밖은 재헌과 시간을 보냈던 곳보다 훨씬 고요했다. 머릿속에는 이해가 가지 않던 재헌의 표정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와 일주일 넘게 함께하면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무서웠지만 궁금했다. 대체 왜 무섭게 절망에 빠진 얼굴을 했느냐며 사과와 함께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느새 차는 정문 앞에 멈췄다.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여름의 불안은 잠식되어 있었다. 이온과 대화를 나눌 시간은 집에서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식사도 같이 하고, 가끔 잠도 같이 잤으며, 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전부 이온과 함께하는 것이었으니 이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시간도 많겠다, 단지 그렇게 생각했다.

“오셨습니까.”

문밖에 나와 있던 건 윤 비서였다. 그는 살며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문을 활짝 열어 비켜섰다. 이온은 피곤한 듯 눈을 찌푸리더니 어깨를 주무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올라가자마자 씻어야겠어.”

이온은 여름에 시선을 주기는커녕 윤 비서에게 고갯짓하고는 재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를 따라 걸었고 계단 앞이었다. 여름은 뒤돌아보지 않는 이온의 등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여름은 그런 이온을 여전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그가 갑작스레 뒤를 돌아보고는 난간을 잡고 내려다보았다.

“얘는 윤 비서가 데려가.”

이온은 내려다보고, 여름은 올려다보고. 그들의 시선이 아주 잠시 맞물리다 떨어졌다.

“따라오시죠.”

윤 비서가 말했다. 그러나 여름은 저 멀리 사라진 이온이 서 있던 곳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요하던 날에 휘몰아치는 파도는 잔잔한 흐름을 바꾸었다. 그곳에서 남겨 두고 온 재헌의 절망이 무엇인지, 아주 잠시 느낄 수 있었다.

윤 비서를 따라 걸으니 매일 같이 밤을 보내던 방이었다. 형제의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는 매일 같이 여름을 데리러 오던 이가 윤 비서였다.

그러나 어느 날을 기점으로 이온이 저와 함께해 주었다. 식사를 위해 아침에 들르는 이도, 퇴근하자마자 여름과 시간을 보내던 이도 이온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윤 비서와 문 앞에서 헤어지는 건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저녁 식사는 방으로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네?”

윤 비서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여름의 시야에는 어두운 문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다이닝 룸으로 나오라고 했던 건 그들이었다. 이 집에 온 이후 처음으로 여름 혼자 방에서 저녁을 먹는 것이다.

여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져 갔다. 몸을 돌릴 생각도 못 하고 침대에 걸릴 때까지 한 걸음씩 물러났다. 툭 하고 침대에 걸리자 힘이 풀린 여름의 몸이 침대에 푹 늘어졌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옷을 벗을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름은 양팔을 벌리며 침대에 편히 누웠다. 차차 눈이 감겼다. 앞으로의 생각을 하기 싫었다. 아무렇지 않을 거라 믿었기에 말이다.

땅거미는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내려앉았다. 밖에서 울리는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여름은 여전히 두꺼운 겉옷을 입고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이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또다시 금세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네. 나가요.”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고 몸은 무거웠다. 문을 여니 예상한 대로 윤 비서가 서 있었다. 조금 전과 달리 손에는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었다. 아마 오늘의 저녁인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이온이 문을 열고 밥을 먹으러 가자며 데리러 올 것 같았으나 현실은 아니었다.

여름은 윤 비서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두리번두리번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넓은 복도에는 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없었다. 오히려 공허만이 맴돌 뿐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막아서고 있는 여름을 비켜 방으로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윤 비서는 여름이 자주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음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어중이떠중이처럼 옆에 서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왜, 오늘은 방에서 먹어야 하는 거지.’

타이밍이 오묘했다. 형제가 정해 놓은 규율을 지키지 않아서였을까. 무거운 벌을 받는 것 같았다.

“내, 내려가서 먹으면 안 되나요?”

윤 비서님도 이온도 그리고 이훈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제 뜻을 들어 주고는 했다. 여름에게는 큰 용기가 담긴 말이었다. 그가 커다란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었음에도 부탁이라는 걸 하는 일에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미 이온 님이 지시하신 일이라서요. 맛있게 드십시오.”

여름의 문을 닫았던 모습처럼 윤 비서는 잡을 틈을 주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방을 가득 채우는 음식 냄새가 고약하게 느껴졌다.

양손을 맞잡아 뜯으며 여름은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응시해도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방에 남은 건 몇 시간 전과 달리 여름 혼자뿐이었다.

아무리 태어났을 적부터 혼자였을지라도 외로움이라는 건 언제나 해소될 수 있는 감정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공허할 때마다 웃었고, 웃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피어났다. 괜찮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날이 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손에 없던 것을 가진 기분을 전혀 모르기에 괜찮다는 말이 통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위험 속에서 가족이라 믿을 만한 사람들이 생겨났고, 손에 쥐었다.

배가 쑤시는 것처럼 아파 오고, 무얼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그들이 건네준 저녁을 남길 수는 없었다. 억지로 일어나 숟가락을 들었고, 다 먹은 뒤에는 형제의 집에 처음 온 날처럼 그대로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배는 불렀지만, 속은 아팠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여름은 여전히 방에 맴돌고 있는 음식 냄새를 없애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붉은 나뭇잎은 시간을 모르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앙상해진 나뭇가지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얀 테이블과 의자는 차가운 바람을 맞아 점차 차가워지고 있었다. 여름은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는 엎드렸다.

겨우 저녁 한 끼를 혼자 먹었지만, 불안한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니, 그들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감히 짐작도 안 됐다.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눈을 감았다. 눕기에는 속이 더부룩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안온한 생활에 익숙해져 안일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단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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