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새로이 변한 여름의 방, 그 커다란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앞머리가 휘날리도록 시원했다.
형제가 아침 일찍 출근을 위해 나가면 여름은 과외 선생님인 민혁을 기다렸다.
점심을 먹고 얼마 안 있어 가방을 질질 끌고 들어오는 민혁에게 물 한잔 건네주는 건 이제 습관이 될 것 같았다.
민혁과의 수업은 수업의 형태를 띠지 못했다. 대부분 민혁이 짜증이 나거나 재밌었던 일에 관한 한탄 아닌 이야기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 그가 가르쳐 주는 대로 문제를 풀기도 했다.
또 너무 놀고 있나,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면 너는 한이훈, 한이온이 있는데 왜 대학에 가려고 하냐는 민혁의 일침을 들어야 했다. 간절한 건 여름 하나였다.
“넌 대학에 가면 뭘 제일 하고 싶냐?”
민혁은 다른 손으로 누군가가 방으로 올려 준 사과를 씹어 먹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묻고는 나도 대학생 일 때가 있었지, 하고는 허공 어딘가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나이를 더 먹는 일에 한 번도 기쁘다는 감정이 들어 본 적이 없어서인지 여름은 오히려 민혁이 신기했다.
“하긴 네가 뭘 알겠냐. 대학에 가면 네 또래 애들이랑 술집 오가면서 먹고 마시고, 죽고. 생각만 해도 얼마나 신나?”
민혁은 손가락을 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리로 리듬을 탔다. 어떤 부분이 웃긴 건지, 호통 가득한 목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대학생 시절, 어떤 술집에 가서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끄덕이는 고개는 멈추지 않았지만, 민혁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또래와 함께 술집에 가는 게 당연하다는 말은 살면서 처음 들을 정도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꼭 전부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제 무지함에 입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새로 알아가는 건 재미있기도 했다. 그의 술주정 같은 말을 듣는 것보다 말이다.
민혁이 하고 싶은 말을 끝내면 어딘지 모를 진도를 나가거나 문제 풀이를 도와주었다. 언제는 문학을, 언제는 수학을 그리고 가끔 영어도 함께 했다.
2시간도 넘게 앉아 있다 보면 수없이 테이블에 놓인 간식이 변했다. 언제는 윤 비서님이, 언제는 이모님이 가져와 주셨다. 물론 여름도 새로운 사람이 가져다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똑똑,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민혁은 다리를 풀며 “들어오세요!” 하고 강하게 외쳤다.
간식이 온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는 넓은 쟁반부터 시야에 들어왔다.
쟁반에 가득 쌓인 쿠키를 들고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였다. 눈부터 코, 그리고 입까지 무엇 하나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민혁의 시선은 사내가 들고 있는 쟁반에 꽂혔다.
“이모님이 가지고 올라가라고 하셔서요. 여기에 두겠습니다.”
멀끔한 인상의 사내는 여름과 민혁이 앉아 있는 테이블 한편에 쟁반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다양한 색을 가득 삼킨 듯한 쿠키는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벌써 어유, 맛있겠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이네. 새로 들어왔어요?”
민혁은 성격 좋게 사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 네. 오늘 첫 출근입니다.”
“역시. 저는 이 꼬맹이 과외 선생이에요. 어려 보이는 데 인물 좋네.”
민혁은 한 손으로는 쿠키를, 다른 손으로는 사내에게 악수의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사내는 하하 웃더니 손을 맞잡고는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민혁의 말대로 사내는 떡 벌어진 어깨에 훤칠한 키 때문인지 연예인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을 정도로 깔끔한 인상이었다.
민혁은 처음 보는 이를 발견하여 당황에 사로잡힌 여름이 주춤하는 사이에 쿠키를 강하게 집어 들었다. 여름과 달리 민혁의 시선은 키가 큰 사내가 아닌 쿠키에 고정되어 있었다.
“여름아, 너도 쿠키 좀 먹으면서 공부해라.”
“… 전 괜찮아요.”
“그쪽도 알죠? 이 집 막내인데, 아주 부끄럼쟁이예요. 지 형들이랑 어찌나 안 닮았는지.”
민혁은 커다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여름을 인사시키는 민혁의 입 주변에는 쿠키 부스러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부끄러운 줄은 아는 건지, 탈탈 털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알다마다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저택에서 헬퍼로 일하게 된 김재헌입니다.”
그는 고개를 살며시 꾸벅이며 여름에게 인사했다. 김재헌. 얼굴이 백옥 같은 사내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싶었는데, 이모님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구나. 여름은 그 정도로 이해했다.
“안녕하세요, 한여름입니다.”
여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인사했다. 재헌 역시 생긋 웃었다. 어색하면서도 선을 지키며 인사하고 있는 둘을 보던 민혁은 붉은 레드벨벳 쿠키를 입에 넣고는 아차 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둘이 또래 같은데? 재헌 씨는 몇 살이에요?”
목소리 중간마다 우걱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테이블에 편히 기대앉아 먹을 게 가득한 것을 볼에 밀어 넣고 있는 모습이 태평해 보였다. 재헌은 민혁의 질문에 손가락을 세워 자신을 가리키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스물네 살입니다. 또래라고 하기엔, 제가 너무 양심이 없지 않나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애써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꽤 차이가 나는 이온과 이훈에 비해 재헌과 여름은 또래라고 하기 충분했다.
서로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여름과 재헌 뒤로 거봐, 내 말 맞지, 하고는 귀엽다는 듯 웃고 있는 건 민혁뿐이었다.
“에이, 그 정도면 또래죠. 여름이랑 좀 많이 놀아 줘요. 애가 사정이 있어서 친구 사귈 기회도 없을 거예요. 아마 당분간은 확실히 없을 거야.”
그는 언제 웃었느냐는 듯 금세 굳어 버린 표정으로 여름을 바라보고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작은 목소리로 ‘심하면 평생 없을 수도.’라는 말을 뱉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 이온이 아낄 만하다고, 민혁은 생각했다.
“또래라면 잘 맞을 것 같은데, 잘 지내봐요.”
무해하게 웃는 재헌을 바라보며 여름 역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야, 인물 좋은 둘이 친하게 지내면 그림이겠네.” 하며 민혁은 시원한 것을 마신 듯한 굵은 목소리로 감탄의 말을 이었다.
“여름아, 오늘 내가 알려 준 거 복습 많이 하고. 알지?”
“네….”
민혁은 떨어져 있던 가방을 주워 들어 어깨에 대충 걸쳤다. 여름은 혹시나 재헌이 가지고 올라온 쟁반, 그러니까 쿠키 접시가 놓여 있을 만한 테이블 구석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빈 접시가 되어 있었다. 벌써 가시는 건가, 점차 민혁이 돌아가는 시간이 빨라졌다.
“그래. 나 이제 가 봐야겠다. 열심히 하고. 같이 내려가죠.”
그는 재헌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빈 접시를 재차 챙겨 든 재헌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갔다.
먹으러 오시는 걸까, 간식이 사라지면 민혁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민혁 앞에서는 복습하겠다 당당하게 말했지만, 오늘 배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새로운 얼굴을 보아서 그런지 머리가 복잡했다. 24살, 재헌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정도의 나이를 먹었을 것 같았기에 충분히 이해되었다.
보육원에서는 또래보다는 동생,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육원 누나, 형, 그리고 친구 동생들과는 자연스레 가족처럼 지냈으나 친구를 만드는 게 어렵다는 건 여름에게도 해당하는 일이었다.
물론 민혁의 말대로 곧장 재헌과 친구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
창문 바로 아래에 있는 테이블이어서인지 찬 바람이 잘게 새어 들어왔다. 의자에 걸어 두었던 카디건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시간은 멈출 줄 모르고 빠르게 흘러갔다. 형제와 얼마나 함께했는지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한다. 기절해 기억을 잃은 날이 언제인지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간 적도 없었고, 달력도 보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하나 분명한 건 앞으로는 가족과 함께라는 사실이었다.
여름은 그 사실만으로 다 괜찮았다. 저를 구해 주었으며 가족으로 삼아주고, 따뜻한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입양이라는 과정으로 가족을 찾아 떠난 제 친구들도 전부 이렇게 지내고 있을까. 그들은 나보다 먼저 행복했겠구나.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재헌아, 물 좀 채워 줄래?”
그들이 다 같이 모이는 건 삼시세끼 식사를 할 때만은 아니었다. 날이 좋은 날에는 정원에 테이블을 깔아 놓고 차를 마시기도 했고, 가끔은 거실에 모여 서로의 할 일을 했다. 모든 건 가족의 행복을 위해 하는 거야 하고 외치는 이온의 주도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훈의 표정이 뭐 씹은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분명 오늘은 한이온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금세 잡혀 버린 게 문제였다.
재헌은 이온의 말에 비어 있는 컵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분홍색으로 우려 나오는 모습이 투명 컵 너머로 훤히 보였다.
“내가 왜, 굳이 이 시간에 이 난리를 치고 있어야 하는 건데?”
정원에서 차를 먹는 것도, 신문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밖에는 영하 날씨만 아닐 뿐 찬 바람이 날카롭게 휘몰아치고 있었기에 여유롭게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실 날씨는 되지 않았다.
이온은 여름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다이닝 룸에서 늘 식사하던 자리 그대로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자고 제안해 왔다.
물론 거부하는 이훈을 따라 들어와 서재의 소파에 누워 나올 때까지 징징거리기를 반복했기에 끌려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형제의 돈독함을 위해서지. 여름아, 코코아는 맛있어?”
“네. 달아요.”
카페인이 들어가 있는 차를 대신하여 코코아를 먹고 있는 건 여름뿐이었다. 코코아를 마시는 여름의 입 주변이 어둡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이온은 손을 내밀어 자연스레 여름의 입가를 쓸어 주었다. 그에 붉어지는 여름의 뺨은 당연했다.
얼마나 차를 마셨을까, 재헌은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잔이 비면 물을 따라 주었다. 그러고는 여름의 옆에 하얀 티슈를 내려놓았다.
“재헌이랑은 인사했나 보네? 호기심 많은 여름이가 질문 하나 안 하는 걸 보면.”
당장이라도 이상하고도 욕 나오는 이 시간이 지났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차를 홀짝이고 있는 이훈과 달리 이온은 근황이라도 묻는 진행자처럼 서로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네. 선생님이랑 같이 인사했어요.”
“서로 친구처럼 잘 지내봐. 재헌이 착한 애야.”
이온은 맞은편에 앉은 여름의 뒤에 서 있는 재헌을 바라보고는 재차 여름에게 시선을 돌렸다. 과하게 큰 단독 주택이었기에 관리하기에 벅찬 건 사실이었다. 매번 고용에 관여하는 것 역시 이온이었다.
“재헌아, 너도 앉아.”
비어 있는 여름의 옆자리를 턱짓했다. 헬퍼라고 하기엔 이미 뒤탈 없이 편하게 알고 지냈던 아이 중 하나였기에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신경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재헌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다르게 붉게 물들어 갔다. 재헌은 들고 있던 물병을 내려놓고는 이온이 가리키던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차를 홀짝이던 이훈은 질리는 상황, 그리고 잔인하기보다 차가운 이온의 모습에 혀를 찰 뿐이었다.
“형, 이것 좀 드실래요?”
재헌은 앉자마자 제 앞에 나타난 두꺼운 마카롱이 보였다. 여름이 제 몫으로 앞에 놓여 있던 마카롱을 재헌 쪽으로 밀었기 때문이었다.
재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를 받았다. 그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는 동안 바라보는 시선이 없던 건 아니었다.
여름의 입에서 “형”이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찻잔만 바라보던 이훈도, 여름의 작은 목젖을 바라보던 이온도 그의 입으로 시선을 모았다.
재헌의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여름과 재헌이 형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만큼 친해진 건지는 형제도 알 수 없었다.
“여름아, 나는?”
매번 능글거리던 이온의 얼굴에도 금이 간 것처럼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질 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카롱을 드시고 싶어 하시나?’
여름은 제 접시에 있는 모든 마카롱을 재헌에게 밀어주었기에 남은 게 없었다.
“…가서 가져올까요?”
어딘가 남은 마카롱이 있을 게 분명했다. 이온이 먹고 싶다면 빠르고도 신속하게 가져올 자신이 있었다.
여름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움직이다, 고개를 젓는 이온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몸의 힘을 뺄 수 있었다.
“아니, 그거 말고 형 소리. 우리한테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아마.”
사실 이온 역시 이전부터 여름에게 ‘형’이라 부르라고 언질하곤 했다. 그러나 딱히 여름이 그들을 부를 일도, 부르는 상황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호칭이 성립될 새가 없었다.
하필 재헌에게 형이라고 할 게 무엇인가. 이온은 괴고 있던 턱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여름은 당연히 이온이 마카롱을 먹고 싶어 하는 줄만 알았는데, 호칭에 관해 이야기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형이라고 불러 봐.”
접시를 애매하게 받아 들고 있는 재헌만이 이온과 여름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색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여름이 어색하게 이, 이온이 ‘형’하고 말할 때까지 눈에 들어간 힘은 풀릴 새가 없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만 하고 있음에 짜증이 난 이훈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까지 별 소득 없는 대화만이 오갔다. 물론 삼 형제만이 아닌 새로 온 재헌 역시 함께였다. 서로 또래니까 사이좋게 지내라는 이온의 말은 여름의 귓가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
“이거 마시면서 해.”
“형.”
재헌은 가끔 2층에서 공부하고 있을 여름에게로 간식이나 음료를 가져다주고는 했다. 사실 그가 할 일은 대부분 혼자 있을 여름을 챙기는 일이나, 청소 등등이었다.
여름은 그에게서 토마토 주스를 받아 든 뒤 갈증을 축였다. 달콤한 맛이 몸속으로 들어오니 머리가 맑아졌다.
“입에 묻었다.”
재헌은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여름의 입 주변에 묻은 토마토 주스 자국을 쓸어 지워 주었다.
또 묻었었나, 괜한 머쓱함에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은 입을 쓸어 보이고는 재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공부는 잘돼?”
“……열심히는 하고 있어요.”
“그거면 됐지.”
재헌은 생긋 웃는 여름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큰 키를 가지고 있던 재헌이어서인지 여름이 올려다보아야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반대로 재헌은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기 충분한 위치였다.
“하고 싶은 건 없어?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 것 같아서.”
형들이 아닌 제 또래의 이와 대화를 나누는 건 이온과 이훈과의 대화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재헌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하고 싶은 거요?”
사실 재헌의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고를 수 없었다. 원하는 것도 해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 가르쳐 주어야 그런 게 있구나 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무지라는 한계가 존재하는 여름은 알 수 없었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헌은 혼자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말이 없는 여름이 ‘깊은 고민에 빠졌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재헌은 괜히 눈을 비스듬히 뜨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놀고 싶지?”
“어…….”
“괜찮아, 나도 그 나이에는 놀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했어.”
집에서 공부만 하는 여름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는 재헌의 시선이 이어졌다.
“놀고 싶을 땐 놀아야지. 걱정하지 마, 형이랑 놀자.”
그는 팔을 살짝 내려 여름의 팔꿈치 부분을 잡아 흔들었다. 어깨와 함께 흔드니 여름의 팔이 팔랑팔랑 좌우로 흔들렸다.
보육원에서도 학교에서조차 누군가 먼저 다가와 함께하자고 하는 게 많았다면 모를까, 여름은 괜히 몰려오는 어색함에 말간 볼을 긁었다.
“좋아요. 그런데….”
나가도 될까.
밖에서 자유로이 걷던 기억이 흐릿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절한 상태로 온 이후 문 너머로 나가 제멋대로 나돌아다닌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발이 족쇄처럼 묶여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랬던 자신이 재헌과 놀고 싶다는 이유로 밖을 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돌아갈 수 있는 곳은 매일 등을 눕히는, 형제가 있는 이곳뿐이어서인지도 몰랐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상태로 밖을 돌아다니기보다 족쇄라도 차고 집에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이상한 점도, 불만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재헌이 함께하자고 하는 상황은 매우 다른 부분이었다. 재헌의 부탁 어린 제안에 거절할 수 없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여름이 네 시간에 여유가 생길 때, 그때 같이 가 보자. 이 주변에 맛집 많더라.”
“…….”
“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말고.”
재헌은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는 여름을 바라본 뒤 곧장 방 밖으로 나갔다.
여름은 여전히 남아 있는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시간이 될 때…….’
추상적인 말이어서일까. 당장 코앞에 닥친 일로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물론 당장 얼마 가지 않아 재헌이 꼬드겨 올 줄 알았다면 그리 쉽게 넘기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