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31)

***

커다란 창을 넘어 차가운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흔한 새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햇살은 자는 이를 눈뜨게 하기 충분했다. 늘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깨어나던 이훈은 왜인지 모르지만, 평소와 다르게 푹 잤다는 기분과 함께 눈을 떴다.

게다가 옆에서는 누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연스레 떠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꿈틀거리는 누군가가 있을 만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해.”

당연했으나, 이온이었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자다 만 잠옷 상태로 침대에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들킬 줄 몰랐다는 듯 어? 하고는 고개를 든 이온의 반응에 얼이 빠졌다.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언제 일어났어?”

이온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왜 알람이 안 울린 것인지, 이제야 떠올랐다. 서재에서 서류 하나 가지러 왔다가 몇 시간을 욕실에서 보낸 건지, 두고 온 휴대폰도 잊고 말았다.

이훈은 욕실에서 나오고서도 서재로 넘어가 넓은 소파에서 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몸은 솔직했다.

꽤 오랫동안 씻었는지 욕실에 나오자마자 여름은 자신이 둘러준 수건 그대로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그대로 두었다가는 더 큰 귀찮은 일이 생길 듯했다.

아이를 흔들어 깨우니 여름은 던져 준 잠옷을 눈도 뜨지 않고 갈아입고는 다시 누웠다.

이대로 서재로 돌아갈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지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구석 한편에서 몸을 말아 누운 채 자는 여름의 덕인지, 넓은 침대에 남은 공간은 넉넉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물론 이온이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이훈의 미간 사이가 좁혀져 작은 주름이 생겼다. 아침부터 이훈을 예민하게 만드는 건 이온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아침부터 왜 이래. 나가.”

그는 이미 이불까지 젖히고는 말아 누운 여름과 이훈의 사이에 엎드렸다. 이훈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돌아온 건 조용히 하라는 듯 입술을 막아 가리고 세운 이온의 손가락이었다.

“…….”

이미 잠에서 깨어났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여름은 여전히 새근대며 자고 있었다. 이 소란에도 눈 하나 꿈틀대지 않고 잠에 빠져 있는 걸 보아 아이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내일모레면 성인인 걸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제 나이로 보기는 어려웠다.

“우리 진짜 가족 같다. 그렇지?”

생긋 웃으며 내뱉은 이온의 말에 이훈은 덮고 있던 이불을 던지듯 치웠다.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렸다. 이온과 여름이 비슷하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상하고도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 시도 때도 없었다.

“깨워서 같이 나와. 그리고 오늘도 출근하는 거 잊지 말고.”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고는 걸려 있던 카디건을 입으며 이온에게 경고 어린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온은 이훈의 말과 동시에 세우고 있던 몸에 힘을 빼고는 침대에 대(大)자로 팔을 벌려 누웠다.

“귀찮은데.”

그가 따라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훈은 혀를 차고는 문을 열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온은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하얀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삼켰던 환한 미소가 얼굴 위로 드러났다.

“사이 좋아졌네.”

이온은 제 형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작은 담요 하나를 가져가 서재에 있는 넓은 소파에서 잘 거라 확신 어린 예상을 했었다. 매일 일어나곤 하는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씻고 같은 시간에 다이닝 룸에 내려와 앉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이른 아침 식탁에 앉은 건 졸리는 눈을 비비며 내려온 이온뿐이었다.

‘아직 두 분 모두 주무십니다.’

‘잔다고?’

먼저 내려온 이온을 위해 작은 수프가 나왔고, 이온이 전부 먹을 때까지 그 누구도 다이닝 룸으로 오지 않았다. 여름보다도 이훈이 출근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얼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윤 비서는 그제야 이온에게 이훈과 여름 모두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고 전해 왔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풉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형이 아직도 자고 있네. 보기 좋게 당한 게 분명했다. 새로 생긴 동생에게 말이다.

여름과 한방을 쓰게 된 첫날 이훈의 늦잠이라니, 꽤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이닝 룸 안으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렸다. 이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로 밀린 의자가 굴렀다.

들고 있던 식기까지 테이블에서 뒹굴며, 이온은 거침없이 다이닝 룸에서 벗어났다. 그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어떤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그날 아침은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형제의 시작이었다.

***

보육원에 있을 때는 자주 생생한 꿈을 꾸곤 했다. 새롭게 보육원을 방문한 어른의 손을 잡고 정문을 지나던 친구들이 나올 때도, 빨래하다 말고 원장님과 뛰어놀던 어제의 추억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얼굴이 흐리게 보이던 이들이 입양하겠다며 제 손을 잡아 주던 꿈 같은 것을 꾸기도 했다.

그럴 때면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 깨어나기 싫었다.

보육원에서 커다란 불이 나기 전 곧 보호 종료 아동이 된다는 걸, 퇴소하여 사회에 나가야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자립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인지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던 꿈에서만 존재하는 이들이 꿈에 자주 나왔다.

자신들과 함께 가자며 속삭이던 목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다 커버린 고등학생을 입양하여 가족으로 맞이하는 어른들은 드물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희망을 놓을 수 없던 이유는 꿈에서 제 귀에 속삭이던 이들 때문이었다. 그건 작은 희망이었다.

그들의 흐릿한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도 형제의 집에 온 뒤로는 작은 꿈도 꾸지 않아 어려웠다. 그러나 아주 가끔 얼굴이 흐릿해 구별할 수조차 없던 꿈속의 이들이 저를 품어 준 형제가 아닐까 하는 기적과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희망을 심어 준 건 꿈속에 이들이나 형제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꿈이 멈춘 것도, 여름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누군가 코 주변에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이는 여름이었다. 옆으로 돌아누워 있었는지, 눈을 뜨니 커다란 창문 사이로 따뜻한 햇볕이 눈을 찌르고 있었다.

이온이었다. 제 얼굴 앞에서 반쯤 올린 몸을 틀어 제 코를 간지럽히고 있는 이는 분명 이온이다.

“일어났어?”

흐린 눈을 비비고 보아도 이온이었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는 건지. 시야가 맑아졌다. 자고 일어났음에도 부족한 졸음이 몰려오지 않는 걸 보아 충분히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세수만 하고 나와. 밥부터 먹자.”

아이는 어제저녁 시간에 보았던 잠옷과는 다른 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분명 자기 전 씻고 갈아입었겠지만, 괜히 웃음이 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온은 아이의 뺨을 툭툭 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

“어제 형이랑 잘 잤어?”

여름은 그와 욕실을 향해 한 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새로운 옷을 입고 있는 걸 보아 분명 갈아입기는 한 듯한데, 이상한 게 몸에서 나오고 나서부터는 기억이 사라진 듯 흐릿했다.

“어… 씻고, 그냥 잤어요….”

여름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피곤했는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딱 거기까지 기억이 났다. 옷도 잘 입고 있었고, 몸에 이상도 없었다. 어색할 것만 같았던 이훈과 잘 잤겠거니 싶었다.

“같이 씻고?”

“네.”

여름은 재차 끄덕여 보이고는 혼자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같이 씻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짧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금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온이 세수하고 나오라 하였으니 서둘러 얼굴을 씻으려는 참이었다. 이온은 어제와 같이 활짝 열린 욕실 문에 기대고 섰다.

“너무 재밌다.”

물소리와 동시에 소곤거리는 이온의 저음이 섞여들었다. 자조 어린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이훈과 여름이 함께 방을 쓴 지 3일이 지났을까 많은 인원이 들어간 공사였던 만큼 끝에 도달하는 것 역시 빨랐다.

이훈도, 여름도 아닌, 이온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여름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겨 들고는 2층으로 다시 오르게 되었다.

방의 구조는 이전과 달리 이훈의 큰 방과 비슷하게 변했다. 더욱 커진 새로운 책상과 옷장이 눈에 훤히 들어왔고 창에는 하얀 커튼이 자리 잡게 되었다. 새로운 보금자리여서인지 두근거리는 설렘이 가득했다.

이온은 방을 구경하는 여름의 뒤에 서서는 양팔을 벌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여름일지라도 이온의 행동에 대한 뜻은 단숨에 눈치를 챘다. 여름의 얼굴은 금세 불그스름하게 변해 갔다. 그러나 전과 달리 여름의 다리는 이온을 향해 걸어갔다.

아이는 이온의 품에 강하고도 약하게 안겼다. 고맙다면 한 번 안아 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온은 하하 웃으며 아이의 등을 끌어안아 주고는 토닥였다. 꽤 사이가 좋아 보이는 형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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