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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임에도 불구하고 층높이가 높아서인지 하늘과 가까운 기분을 들게 했다. 새가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은 여름은 가만히 몸을 늘어뜨리고만 있었다.
뭘 해야 하지, 보육원에 있을 때는 빨래를 한다든지, 밀린 청소와 봉사자님들을 돕느라 쉬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저택에 오니 여유와 자유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방 밖으로 나서는 일은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아주 가끔 정원에 산책하러 나갈 때뿐이었고 화장실까지 붙어 있는 방에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거의 매일 이온이 찾아왔고, 앞으로는 과외 선생인 민혁이 찾아올 것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지금의 상황을 여전히 인지하기 어려웠다. 하나 확실한 건 그들과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름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설레고, 자신과는 이질적인 단어여서인지 저를 끌어당겼다.
여름은 마구잡이로 놓인 문제집을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고는 테이블 위로 엎어져 누웠다. 새 책상인 건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안온한 이 생활에 어서 빨리 적응하고 싶었다.
저녁은 미역국이었다. 여름은 늘 가만히 형제의 대화를 들을 때면, 그들이 싸우는 건지 대화를 하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를 형 대우하겠다고 식탁 정중앙에 앉힌 것 역시 이온인 모양이다.
“멀쩡한 방을 왜 갈아엎어.”
이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커졌다. 이온은 익숙하다는 듯 생긋 웃으며 답했다.
“먼지도 많고 거실보다도 적막하다니까.”
하, 이훈은 쥐고 있는 숟가락에 힘을 준 채 터지는 숨을 내뱉었다. 뻔뻔하다 못해 어이없는 이온의 행동에 그의 눈가에는 주름이 지도록 힘이 가득 들어갔다.
여름은 소리도 같이 먹는 것인지 잔 소음도 나지 않도록 그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미역국을 떠먹고 있었다. 아마 이온의 심기를 맞춰 주느라 억누르기 바쁜 건 이훈인 것처럼 보였다.
“침대는 바빠서 대충 놓느라 화장실 앞에 있고, 그 흔한 책장 하나도 없어. 이래도 정말 괜찮아?”
이온은 다리를 꼬고는 식기 하나 들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이훈만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상대는 듣기를 거부하기로 작정했는지 미역국에 얼굴을 박고는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공사 시작하면 여름이가 지낼 곳이 없잖아.”
“그 많은 방이 있는데 없긴 왜….”
커다란 저택에 빈방 하나 없을 리 만무했다. 귓가에 들리는 터무니 없는 말에 이훈은 고개를 번뜩 들어 반박했으나, 이온이 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마땅한 곳이 없으니, 그동안은 내 방에서 같이 지내야겠어.”
이훈은 그제야 그가 불순한 의도로 공사고, 먼지고 하는 말을 꺼낸 사실을 눈치챘다. 살며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눈을 슴벅이고 있는 여름이 보였다.
이온이 제격의 인물을 찾은 건 확실했다.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에서 거짓을 읽을 수 없었다.
“따지면 네 방보다 내 방이 낫지 않겠어? 더 넓은 건 1층인데.”
그렇다고 이훈이 대놓고 건드려 오는 이온을 받아 줄 성격도 안 됐다. 이리 말하지 않으면 금세 여름을 방에 데려갈 이온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뱉었다.
이훈은 입맛이 사라져 짜증스럽다는 듯 식기를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그의 먹이를 제가 데려간다는 말까지 내뱉으면 공사를 포기하겠거니 싶었다. 물론 1층의 제 방이 2층에 있는 이온의 방보다 넓은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
“그래. 그럼 형한테 부탁 좀 할게.”
뭐? 이온의 대답에 이훈의 동공이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시끄럽고 괜한 곳에 돈 들이는 일은 딱 귀찮았다. 그러나 이상했다. 평상시에도 이유 모를 일을 벌이고 다니는 이온이었지만, 무슨 생각인지 이온은 그러라며 수긍의 뜻으로 고개까지 끄덕여 왔다.
“여름이 너도 괜찮지? 형이 저렇게 보여도 꽤 착한 사람이거든.”
“…아, 네. 괜찮아요.”
자신의 방은 먼지가 쌓이고 구조적으로 별로라 리모델링에 들어갈 것이고, 공사하는 동안 이훈의 방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여름은 괜찮다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이훈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조금 전처럼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이훈이 싫어했다면 조금 곤란했을 텐데 다행이었다.
“둘 다 괜찮다니, 다행이네.”
이온은 그렇게 말하며 박수 한 번을 치더니 재차 국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름은 늦지 않은 저녁이었지만 왜인지 목구멍이 턱 막히는 듯했다.
***
“무슨 생각이야.”
이훈은 집에 돌아오면 줄곧 1층 서재에서 지내곤 했다. 이온이 사용하는 공간은 2층의 커다란 방 하나뿐이지만, 이훈은 잠은 침실에서 업무는 서재를 사용했다.
평소와 같이 서재에 놓인 단단하고도 커다란 원목 책상에 앉아 있으니 이온이 슬그머니 들어와 소파를 차지하고 누웠다. 할 일이 없어도 이훈에게서 떨어지는 법이 없는 소년은 꿀을 찾는 꿀벌처럼 들러붙고는 했다.
“응?”
“재미없는 놀이는 너 혼자 해. 대체 왜 괜찮다고 한 거야.”
손을 한데 모아 머리 아래에 두고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이온은 들려오는 불만 가득한 형의 말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풀거리는 머릿결이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형.”
이온의 눈은 누구보다 맑게 제 형인 이훈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이온은 자기성찰 어린 말을 뱉고 있었다.
이훈은 그런 이온이 늘 신기했다. 만약 자신에게도 형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이온처럼 맹목적으로 솔직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제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늘 하루도 빠짐없이 형이라고 불렀다. 머리가 크고 나서는 너, 아니면 이름을 섞어 부르기도 했지만, 형이라는 단어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외치던 이가 이온이었다.
물론 그런 이온이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이유 모를 말을 해 올 때 짜증이 나는 건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훈이 끼고 있던 안경을 벗으니 어느새 접혀 있던 미간의 주름이 드러났다. 묻는 말에 답하기는커녕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소파의 등받이를 짚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었다.
“하나의 집단일 뿐인데 평생 서로 믿으며 함께 살아가잖아. 무모하면서도 대단하단 말이지.”
“…….”
“나는 여름이랑 단둘이 살아갈 생각 없어. 무조건 형도 있어야 해, 그러니까 둘이 좀 친해져 봐.”
나는 형도 좋아하니까. 이온이 그렇게 말을 이었다.
이온의 맹목적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부모도 모르는 걸 고작 형제인 자신이 알 리가 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어미를 보고 세상이 떠나가라 운다. 당신이 만든 내가 세상에 나왔다고, 나를 평생 책임지라고, 이온의 믿음이 이훈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책임질 부모가 사라지고 하나 남은 가족이자 아이인 이온은 역시 하나 남은 가족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평생 약할 수밖에 없는 이훈이 이온의 말에 할 수 있는 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일뿐이었다.
***
다음 날부터 서울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2층짜리의 집에서는 오랜만에 많은 이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여름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형제들과 아침을 함께 했지만,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바쁜 형제를 대신하여 윤 비서가 이끄는 이훈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이닝 룸을 제외하고 1층을 구경하는 건 저택에 온 이래로 처음이었다. 아예 문밖으로 자주 나오질 않는 여름이었으니 말이다.
“지시하신 사항이 없으셔서 따로 준비한 건 없습니다.”
그는 방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이훈의 침실이라고 걸어온 곳은 1층 복도의 끝방이었다. 어둡고, 채광 하나 들지 않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밝고 넓은 곳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색으로 도배된 방이었기에 의외였다.
“옷과 공부하실 때 필요한 물건들은 창문 근처 책상 위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편히 사용하시면 됩니다.”
윤 비서는 평소처럼 딱딱하고도 감정 없이 말하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넓은 방 안에는 저뿐이었다.
“…….”
눈앞이 확 트였다. 2층에 있는 자신의 방보다 훨씬 넓었다. 여름은 주인이 있는 방이었기에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기를 머뭇거렸다.
과장을 더해 보육원의 식당과 비슷해 보이는 듯한 크기의 방 한가운데에는 널찍한 침대가 놓여 있었고, 윤 비서가 나가기 전 말해 주었던 책상이 옆에 보였다.
여름은 찬찬히 발을 옮겨 침대를 돌아 하얀 테이블로 향했다. 깔끔한 테이블 위로 민혁이 주고 간 문제집들과 필기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아마 옆에 있는 협탁 안에 이훈의 방에서 지낼 옷이 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조금 전, 무슨 일인지 아침을 먹고 같이 출근하는 이온과 이훈을 정원까지 마중했었다. 따라 나간 이유 역시 새로이 만들어 주시는 방에 대해 감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우물쭈물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꺼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온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이훈은 그저 시선을 주고 말았다.
지금 피어오르는 감정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여전히 찾지 못했다. 벅차오르고 감사하다, 그런 말들로는 훨씬 부족했다.
여름은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책상에 다가가 앉았다.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건 여전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늘어져 있는 문제집을 열었다.
모르면 외우기라도 해야지, 여름은 괜히 속으로 읊조렸다. 자신을 구해 준 은인과도 같은 그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의자에 편히 기댄 몸이 늘어지게 퍼졌다.
긴장으로 갇혀 있었던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이후의 기억은 끊겼다.
잠이 들어서였을까, 분명 처음에는 열심히 외우고 있었는데 말이다.
잠에서 깨어나 언제 엎드렸는지 모를 몸을 들어 올린 여름은 바로 앞에 커다란 창을 바라보았다. 땅거미가 지고, 어느새 어슴푸레한 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감히 예상이 안 갔다.
때마침 멀리 있는 문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팔목으로 입을 스윽 닦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짧은 사이에 푹 잤는지 몸이 가벼웠다.
“여름 님, 일어나셨습니까?”
윤 비서님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졸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지 이른 저녁 시간부터 일어났느냐며 물어 왔다. 괜스레 멋쩍어진 기분에 발걸음이 느려졌다. 정말 공부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여름은 대답 없이 문을 열었다. 아침을 먹고 방에 데려다주었던 모습 그대로의 윤 비서가 여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모여 계십니다. 다이닝 룸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녁이요?”
그들이 동시에 퇴근을 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찌 됐건 마중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훈의 방에 있었다. 옷을 갈아입건 볼일을 보기 위해서건 이훈이 이미 왔다 갔다는 뜻이었다.
“네. 어서 가시죠.”
여름은 냉혹하게 몸을 돌려 다이닝 룸을 향해 걸어가는 윤 비서를 따라 걸었다. 시선이 저절로 발끝으로 향했다.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윤 비서에게 들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쥐구멍에 얼굴을 숨기고 싶었는데, 이훈도 진작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 아마 이훈이 윤 비서님께 언질을 준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입맛이 돌지 않는다며 방에 돌아가는 게 맞을까. 그러나 며칠 간은 그와 방을 같이 써야 한다.
“들어가시죠. 맛있는 저녁 식사 되세요.”
“…네, 윤 비서님도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게 한두 번도 아니면서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거웠다.
“왔어? 앉아.”
“…언제 오셨어요?”
그에게 조금은 익숙해진 식탁에서 이훈은 이미 반쯤 먹은 듯, 접시가 비어 있었고 이온만이 여름을 반겼다.
“얼마 안 됐어, 우리도 배고파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온 거야.”
그들의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여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식기를 들었다. 형제와 함께 하는 저녁은 그저 배를 채우기만 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먹어 본 적 없는 새로운 걸 접할 때마다 어떻게 먹는지에 대해 배우고, 알아 가느라 바빴다.
얼마 전 두툼한 안심 스테이크가 나왔을 때도 그랬다. 고깃덩어리가 납작한 접시 위에 놓여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포크를 써야 하는 건가,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 건가. 여름의 머릿속이 혼란스럽다는 건 이상하게도 얼굴 위로 티가 났다.
처음, 이온은 그 무엇도 모르는 여름이 이상하기도 하고, 그 보육원은 뭐 하는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냥 재미있었다.
한여름이라는 아이는 제 목적과 걸맞은 아이가 확실했다. 의지가 없음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이온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 여름이는 형이랑 좀 친해졌어?”
“네?”
“첫날이니까, 아직이려나.”
흐음, 끓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고 있던 이온은 눈가를 살짝 좁히며 여름을 응시했다. 장난기 가득한 눈에 여름은 어쩔 줄 모르고 어, 어 하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친해졌느냐는 물음에 답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와 인사를 해 본 적은 있을까 하는 관계라서인지, 그저 접시를 보며 저녁을 먹고 있는 이훈의 눈치가 보였다. 이후 이온의 이런저런 질문과 대화가 이어졌으나,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던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여름을 고개를 가끔 끄덕이거나 저을 뿐, 끝으로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부끄러움에 머리가 아득했기 때문이었다.
***
“난 서재에서 지낼 거니 신경 쓰지 마.”
“네?”
이온은 서재로 향하려는 이훈을 붙잡고는 여름과 함께 1층에 있는 커다란 방에 밀어 넣었다. 이훈이 곧장 서재로 걸음을 옮길 거라 예상이라도 한 건지, 이온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방문 앞을 지켰다.
어깨를 으쓱이고 말던 이훈은 여름을 지나쳐 긴 팔 두어 개와 작은 짐을 챙겼다. 옷을 팔에 걸어 자리에서 일어난 이훈은 여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나갔다.
‘바쁜 일이 있으신가….’
여름은 고개를 대충 젓고는 책상에 재차 앉았다.
씻기 전에는 오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한 장도 풀지 않은 새것의 문제집을 재차 펼쳤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11시가 지날 때까지 그 누구도 여름이 있는 방 근처에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근처를 돌아다니기도, 귀를 대어 소리를 들어 보기도 했으나 여전히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졸음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가 뜨면 10분도 넘게 지나 있었다. 씻어야 하는데. 여름은 왜인지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씻지 말고 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로 걸어가는 순간 누군가 덜컹하고는 방문을 열었다.
“왜 아직도 안 자.”
방의 주인인 이훈이었다.
그는 옷을 들고 나갈 때와 다르게 안경을 쓰고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방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의아했으나, 여름이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어린애들은 보통 이른 시간에 자지 않나, 이훈은 조용히 팔을 뒤로 뻗어 방문을 닫았다.
“아직 안 씻어서….”
그가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안심 어린 마음은 들었다. 씻고 편히 잘 수는 있겠다 하는 데에서 오는 안도였다.
“그럼 들어가서 씻고, 빨리 자.”
퇴근 후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이훈은 침실에 두었던 노트북을 먼저 옮겼다. 아무도 없던 방에 숨 쉬는 이 하나 늘어난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인사할 거로 생각했던 여름은 다행히도 책상에 앉아 엎드린 상태로 곯아떨어져 있었다.
공부하다가 잠이 든 건지, 그의 작은 등을 바라보며 침대로 옮겨야 하나 싶었지만, 괜히 깨우고 싶지도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올 때 윤 비서에게 언질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아마 그가 여름에게 담요를 덮어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온의 꾀에 넘어가 더욱 귀찮은 더미를 떠안았으니 별 되지도 않는 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이온의 꾀가 아니라 저 자신이 친 함정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침실 하나만이 제 공간이었다면 호텔을 잡거나 빈방 하나를 치우든 했을 텐데 침실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서재가 있어서인지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지만은 않았기에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옷과 속옷을 챙긴 채 서재에서 밀린 일을 보았다. 잠을 자기에 아주 넓은 소파가 있었기에 침실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귀찮아서 속으로 한이온을 씹어 대긴 했으나,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이가 없던 건, 어제 자 회의록을 침대 옆 협탁 위에 두고 왔다는 것이었다. 제 품에 없다는 걸 알아차린 건 늦은 밤이었기에 가져오라 할 윤 비서마저 퇴근한 뒤였다.
이훈은 귀찮다는 말만 계속해서 속으로 읊조리며 대충 여름이 잠들었을 시간까지 최대한 버티며 자리를 지켰다. 늦은 밤 아이와 마주치면 괜히 귀찮은 일만 생길 게 분명했다. 화면 속 시간이 11시가 지나자 복도에는 거칠고도 빠른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여름은 자연스레 방에 붙어 있는 문이 욕실이라는 걸 알았는지,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이훈은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려 협탁 서랍을 열어 쌓여 있는 회의록을 꺼냈다. 침대에 누워서 확인하기 위해 보곤 해서인지, 까맣게 잊고 있을 만했다.
‘씻지 않아서 잠을 못 잤다니.’
분명 어린아이이기에 이 시간이면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다시 생각해도 의외였다.
귓가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왜 문은 안 닫는 거야. 보이지 않는 위치에 서 있었으나, 욕실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만큼은 훤히 보였다. 애들은 화장실을 갈 때도 씻을 때도 문을 열고 한다더니, 진짜인 모양이었다. 이훈은 헛웃음을 삼킨 채 서재로 향하려 몸을 돌렸다.
“왜, 왜 안 들어오세요.”
그때 늘 작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던 여름의 소리가 귀에 강타하는 것처럼 선명히 들려왔다. 욕실에서 외친 소리여서인지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었다.
곧장 침실에서 나가 서재로 향하려 했으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외치는 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문제라도 생겼나.’
이 방에는 처음 오는 여름이었기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던 이훈은 협탁 위에 서류를 내려놓고는 욕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욕실은 넓은 욕조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욕실 앞에 서면 넓고도 직사각형의 욕조가 보이는 구도였다. 이훈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여름의 모습을 예상하며 활짝 열린 문 앞에 섰지만, 되레 여름의 모습은 그를 멈칫하게 하였다.
“왜 다 벗고 있어.”
여름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욕조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반신조차 아무것도 입지 않아서인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무언가 떨어졌을 거라,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 생각했는데 욕실 안은 여전히 깨끗했다.
“…씻으려고요.”
이훈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또다시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양손을 부여잡고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의 태도를 보아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커다란 한숨을 내쉬니 여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왜 부른 거야.”
“…얼른 씻고 자려고요.”
어딘가 계속 아이와 대화가 어긋났다. 이훈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부른 거냐고.”
늘 그렇듯 이온과 여름은 이훈과 한 끗 차이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틀리는 이온과 다르게 정답도 모르고 엉뚱한 답만 내뱉는 여름은 엄밀히 차이가 있었다. 둘 다 답답하다는 공통점은 있었다.
이훈의 말에 도리어 당황스러운 건 여름이었다. 가족끼리는 원래 함께 씻는 게 아닌가. 분명 이온은 그리 말했는데, 이훈은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다 벗고 있는 여름의 몸에는 작은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부끄러움에서 오는 것이었다.
“가족끼리는 같이 씻는 거라고….”
“뭐? 누가. 아니, 말 안 해도 알겠다. 한 명밖에 없겠지.”
불타 사라진 보육원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 그와 접촉하는 이는 이온뿐이었고 말이다. 그런 아이에게 가족을 운운하며 이야기했을 이 역시 한이온밖에 없을 터였다.
아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알몸인 상태로 가족과 같이 씻는다는 건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여름은 이온이 가르쳐 준 말이 법인 것처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부른 게 분명했다.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가족끼리는 같이 씻는다는 걸 안다는 건, 이미 이온과 한차례 아니 몇 번이고 해 왔다는 건데, 그리 생각하니 욕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켰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건 제 자신이었다. 누굴 욕할 처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앞뒤 구별하지 않고 생선을 씹어 먹는 이를 어찌해야 할지 감히 상상도 안 갔다.
“씻고 나와, 그리고 가족, 아니 그 누구랑도 씻지 않아도 돼. 그건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보육원에서 18년 가까이 살아온 아이다.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새로이 지식을 욱여넣었겠지만 스스로 자각하도록 하는 게 쉬웠다.
“그렇지만 가족인데….”
이훈은 여름의 얼굴은 지긋이 응시했다.
그러나 지금껏 살면서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뼛속 깊이 숨어 있던 간절함이 내재되어 있다.
그 욕구는 평생을 걸쳐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 대신 제 손에 욕구가 가득 담긴 사과를 쥐여 주는 이가 나타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깊은 간절함을 채워 준 이가 사과를 바나나라고 해도 믿어야 했고, 머릿속의 학습을 지우고 새로이 끼워서 맞춰야 했다.
그것이 은인에 대한 하나의 보답이자 무의식적인 믿음이었다. 제 앞에 온몸을 드러내고 있는 여름 역시 다를 게 없었다.
가족이 되어 준 형제가 사과를 바나나라고 해도 믿을, 그런 사람 말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여름의 얼굴을 보니 사실을 새로이 학습시키는 건 포기해야 했다. 귀찮게 질질 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씻어. 여기 있을 테니.”
그렇다고 같이 씻을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훈은 욕실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턱짓했다. 기껏 물을 가득히 받아 놓은 욕조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여름은 그의 말에 표정이 조금 전보다 환히 밝아지고는 천천히 다리를 들어 안으로 몸을 옮겼다. 물은 여전히 따뜻했다. 여름은 가만히 서 있는 이훈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욕조 안에 앉았다.
“뭐 해, 빨리 씻어. 머리부터 감든가.”
11시가 지나는 걸 보고 나왔는데, 그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하느라 적어도 30분은 지났을 게 분명했다.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훈은 무릎을 세우고는 얼굴을 묻고 있는 여름의 모습에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 네. 샴푸가….”
그는 엉덩이를 욕조에서 떼어 내지 않고는 질질 끌어 용품이 늘어져 있는 곳으로 옮겨 갔다. 씻을 때마다 이온이 가르쳐 준다든가, 함께 해 줘서 그런지 이훈의 방에 있는 것들은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면이었다.
아이는 이건가, 저건가 하더니 샴푸를 찾았다. 그러나 이훈이 여름의 손을 떼어 내는 게 더 빨랐다.
하아. 이훈의 한숨 소리가 짧게 욕실 가득히 울렸다. 여름은 이훈이 잡고 있던 손목을 문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여름이 하는 꼴을 구경하고 있자니 한 시간은 더 걸릴 듯했다. 누가 봐도 샴푸인 펌프를 짜내 여름의 머리에 칠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인생에 없던 육아를 하게 된 영문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쉼 없이 한숨이 차올랐다.
여름은 무릎을 끌어안고는 눈을 내리감았다. 이훈의 손길을 느끼며 고개가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하기 바빴다. 틀린 줄 알았는데, 이온이 가르쳐 준 건 맞는 모양이었다.
“흣!”
가만히 눈을 감고는 생각하길 몇 분이 지났을까, 상반신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여름은 몸은 흠칫 떨었다. 차갑고 어색한 감각이 가슴팍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었다.
“왜, 아파?”
“아니요….”
아이의 말이 편안함에 늘어졌다. 그에 비해 이훈의 목소리에는 감정 하나 담겨 있지 않았다. 나만 너무 편안했나, 여름은 비누칠해 주는 이훈의 손길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무릎을 세우고 껴안고 있던 다리를 앞으로 쭉 펼쳤다.
“잠, 잠깐.”
“가만히 있어.”
빨리 끝내고 나가 푹 잘 생각만 하고 있던 이훈은 몸을 꿈틀거리며 비틀거리는 여름의 허벅지를 다른 손으로 고정하듯 부여잡았다.
흥분에 가득 차 제 것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사타구니 사이에 있는 것을 숨기려 여름은 계속해서 서로 교차하듯 다리를 모았다. 왜 이러는지 모를 만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훈은 샤워기를 꺼내 들어 여름의 머리부터 끼얹었다. 분명 팔목까지 옷을 끌어 올렸는데, 발기한 성기를 숨기겠다고 꿈틀거리는 여름을 씻기자니 물이 몹시 튀어 있었다. 이미 앞이고 머리고 다 젖어 있었다.
여름의 얼굴을 들어올 때와 달리 얼굴이 심히 붉어져 있었다. 훤히 보이는 아래를 허벅지로 가린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닌데, 아이는 혼자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처럼 끙끙대고 있었다. 겨우 제 손으로 발기했다고 하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말이다.
이훈은 물기에 젖어 몸에 달라붙는 찝찝한 기분에 입고 있던 티를 위로 올려 벗었다. 이 밤에 대체 뭘 하는 건지, 짙은 회의감이 밀려왔다. 고개를 젖혀 욕실 등을 바라보며 멈춤 없이 밀려오는 한숨을 삼켰다.
여름은 윗옷을 벗은 이훈의 팔목을 잡아끌어 당겼다. 욕조 안에 있던 여름과 달리 밖에 있던 이훈이었기에 그의 작은 힘에도 넘어지지 않으려 지탱하는 탓에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제가 씻겨 드릴게요.”
아이의 깨끗한 티는 훌쩍 커 버린 어른이 따라잡을 수도 흉내 낼 수도 없었다. 이훈은 무거운 눈꺼풀과 170cm는 훌쩍 넘은 청년을 씻기니 남은 기력이 얼마 없었다. 게다가 자기 전 씻는 편이었기에 아직 샤워를 마치지도 않았다.
이훈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여름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제 손목을 끌어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잡아 내리고는 그와 같이 나신이 되도록 모든 걸 벗었다.
아이의 유혹 아닌 부탁을 거절하기에는 남은 힘도,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고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리 분별이 흐려지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훈은 욕조 안에 들어가 등을 기대고는 앉았다. 이훈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여름이 새롭게 받은 뜨거운 물이었다. 양팔을 욕조에 걸치고는 노곤한 기운이 올라와 얼굴을 뒤로 젖혀 몸의 힘을 풀었다. 괜한 추가 노동을 했다면 이 기분이었을까 감히 예상이 갔다.
쌓였던 피곤을 내리는 도중 갑작스레 느껴지는 까칠함에 눈이 뜨였다. 어느새 벌어진 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아 무릎을 꿇고 있는 여름이 샤워볼로 자신의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어찌나 강하게 문지르는지 붉은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살살해.”
“아, 네!”
여름은 이훈이 받아 주고 있음에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그는 몸을 이훈의 쪽으로 기울이며 샤워볼을 이용하여 거품 내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훈은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그를 유심히 응시했다. 잡티 하나 없이 균형이 잘 잡힌 몸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얼굴보다 더욱이 말간 몸의 색이 호리호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마른 몸과 어울렸다.
여름은 욕조의 물을 끌어와 거품에 뿌려 흐르게 하기를 반복했다. 생각보다 집중하는 여름의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가 집중하여 자신을 씻겨 주는 모습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는 여름의 것이었다.
가라앉을 만한데도 여기 있다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건지 수그러들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우스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여름의 얼굴을 응시하다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는 걸 눈치챈 것인지, 여름은 움직이던 손까지 멈추고는 허벅지를 꼬아 대기 바빴다. 부끄러움에 가득한 여름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풀어 줘?”
빈정거리는 목소리나 다름없었다. 아이가 부끄러움을 알고 숨기는 모습이 꽤 절경이어서였을까, 여름을 위한 말이었다.
한 사람만이 시선을 주던 둘은 조소 가득한 말을 내뱉고서야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그저 조금 전과 같이 부끄러워하고 말겠지 생각했지만, 여름은 늘 가는 길을 걷지 않고 뒤를 도는 아이임을 간과했다. 여름은 이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샤워볼을 내렸다.
여름은 이훈이 하는 말의 뜻만은 잘 알고 있었다. 왜 풀어 준다는 말을 쓰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의 행동으로 부담스럽고 이상하게 서 있는 제 것이 가라앉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제 것을 만지는 건 부끄러웠지만 혼자서는 전혀 할 수 없었다.
짧고 굵은 한숨을 밖으로 내쉬었다. 여름에게 말하면 상처받은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한동안 들지 않을 게 분명하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행동은 기가 찼다.
‘이것도 이온에게서 배운 것이겠지.’
물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이훈은 벌렸던 다리를 슬며시 모으며 그에게 끄덕이듯 눈짓했다. 아이는 고민 없이 끄덕였던 조금 전과 달리 머뭇거리며 느리고도 둔하게 이훈의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서로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지만, 여름의 눈높이가 높아져 이훈이 시선을 아주 살짝 올려다보아야 했다.
여름의 하반신이 허벅지에서부터 예민하게 느껴졌다. 툭 밀면 미끄러질 것과도 같이 매끄러웠다. 이훈은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워 욕조에 걸치고 있던 손으로 리듬감 있게 툭툭 치기 시작했다.
여름은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빠르게 다가오는 감각에 살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훈은 손가락을 세워 작은 기둥을 퉁 하고는 건드렸다. 여름에게 음모 하나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느껴져서인지 놀랍지는 않았다.
여름은 주먹을 꽉 쥐고는 간지럽게 피어오르는 감각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지탱하려 잡은 게 하나도 없으니 중심 잡기조차 어려워 바닥에 붙여 굽히고 있는 정강이에 힘을 주었다.
“목에 둘러봐.”
이훈의 눈은 여름의 팔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여전히 이훈의 머릿속에는 빨리 끝내고 잠이나 자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었다.
몸 하나를 가누지 못해 움직이는 아이가 흔들리는 기구라도 탄 것처럼 꿈틀거리는 탓에 제대로 하려는 것도 되지 않았다. 여름은 그제야 쭈뼛대며 이훈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여름은 이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이훈은 여름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서로의 시선이 비틀어졌지만, 이훈의 손은 작은 기둥을 둘러 잡고는 엄지손가락만을 펼쳐 귀두를 비비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으로 귀두를 동그란 원을 그리며 비볐다. 가라앉기는커녕 점차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이훈은 멈추지 않고 귀두를 꾹 누르고 비비기를 반복했다.
여름의 허리가 앞뒤로 튕기며 비틀어졌다. 이훈의 목을 지탱하기 위해 두르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게 분명했다.
엄지손가락에서부터 끈적한 여름의 투명한 쿠퍼액이 묻어나왔다. 그의 액이 시발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훈은 쥐고 있던 기둥을 위아래로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도 충분히 쥘 법한 여름의 성기가 그의 손안에서 흔들렸다.
“흐응. 으….”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새어 나오는 숨을 아랫입술을 꾹 다문 채 참아 내고 있었다. 아래가 조여들기도 했고, 간지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래에서부터 숨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속에서 누군가 숨을 위로 밀어내는 것처럼 목 끝까지 차오른 뜨거운 숨이 나가고 싶다 아우성치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의 목에 두른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훈은 어쩌다 보니 그를 껴안고 손으로 그를 풀어 주고 있는 상황이 웃겼다. 게다가 왜인지 모르게 붉게 변해 있을 여름의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쉽다는 감정이 밀려왔다. 혀를 차고는 입맛을 다시며 여름의 성기를 흔드는 손의 속도를 더했다.
“하아, 아… 읏!”
작은 구멍에서 여름의 정액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긴장감에 서려 있던 여름의 몸이 축 늘어지며 제 배에서 무언가 느껴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오래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아이였다.
“어때?”
“괜, 찮아요….”
“다행이네.”
힘이 빠짐과 동시에 굽혀진 여름의 허리를 툭툭 치며 축 눌어진 그와 거리를 넓혔다. 이미 붉어질 때로 붉어진 그의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각오 어린 얼굴로 다가온 것에 비해 한 번에 사정을 끝으로 축 늘어진 모습을 보아하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름을 반대편 벽에 기대게 하고는 욕조 밖으로 나왔다. 정신 하나 못 차리고 얕은 숨만을 내뱉고 있는 여름의 묻은 거품부터 수건을 싸매 침대에 던지기까지는 모두 이훈의 몫이었다
이훈은 그를 침대 위로 보내고는 매일 그래 왔듯 같은 방법으로 씻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시간은 배로 걸렸다. 사타구니 사이로 가는 손이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