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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바라보니 정말 커다란 저택인 것이 확실했다. 일주일 넘게 문밖을 나서지 못했으나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싶다는 언질 아닌 언질을 남기니 윤 비서님은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정원을 소개해 주었다.
높은 건물이 주변을 가리듯 담장 너머로 보이는 것을 보아 서울인 건 확실한데, 수도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저택 같은 집 안에 서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카디건 하나 입고 나오니 아침의 쌀쌀한 바람도 거뜬했다.
저 멀리서 윤 비서님이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안절부절못하면서 괜히 그를 외면하며 허공을 바라보는 척을 했다. 그는 그런 여름을 신경 쓰지도 않고 정원 중간에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를 내려놓았다.
“이훈 님 내려오실 겁니다. 먼저 앉아서 쉬고 계세요.”
여름은 보육원에서 만났던 다른 이의 이름이 ‘한이훈’이라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윤 비서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툭 쳐, 추켜올리고는 재차 안으로 들어갔다.
‘안경이 자꾸 내려가시나, 다시 맞추시지.’ 같은 생각을 하며 여름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이훈이 내려온다니.’
아침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그가 언제 집에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정원까지 내려온다는 건 분명 저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손을 맞잡고는 꼼지락거리던 여름은 옆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훈이 검은색 티에 긴 바지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안, 안녕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여름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얼굴이 꽤 일그러져 있는 것이 아침부터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싶었던 여름은 최대한 목소리의 크기를 줄였다. 저 때문일까 싶어 거슬리지 않게 하는 것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카디건까지.’
이훈은 얼굴 빼고는 살 하나 보이지 않게 입은 여름의 모습을 바라보며 비어 있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평생 이 집에 살면서 정원에 앉아 본 건 또 처음이었다.
본래 그를 제 방으로 부르려고 했으나, 산책 겸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냐는 윤 비서의 말에 겨우 끌려 나온 셈이었다. 하필 여름이 산책하고 있었던 것이 한몫했다.
“확인해.”
이훈은 들고나온 서류 봉투를 테이블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이거 하나 처리하겠다고 여수까지 내려갔다 온 걸 생각하면 한이온을 스무 번은 넘게 부려 먹어야 속이 풀릴 게 분명했다.
여름은 평소처럼 눈치를 보다 갈색 봉투를 품에 가져왔다. 괜히 불공정한 계약서라도 쓰라는 거 아닐까 했던 것과는 다르게 안에는 주민등록표라 쓰여 있는 하얀 종이가 전부였다.
응? 여름이 눈을 비비며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분명 저의 이름과 교복을 입기에는 많은 나이까지 전부 맞았지만, 처음 보는 이들이 부모 관계라며 쓰여 있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를 이어 ‘한이훈’과 ‘한이온’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같이 채워져 있었다.
학교에 제출용으로 두어 번 뽑았을 적의 주민등록등본에는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저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주소도 바뀌지 않고, 이름도, 혼자라는 사실도 말이다.
“부모는 무시해. 그냥 아무나 앉혀 올린 거니. 주민등록번호나 확인하고 다시 내놔.”
여름 하나를 입적시키려고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이의 먼 친척 하나를 앉혀 가족으로 묶은 셈이었다.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다. 앞으로는 말조심하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한 건지 다 셀 수도 없었다.
여름은 종이에 고개를 처박고는 눈을 떼지 않았다. 뭐 중요한 게 쓰여 있다고 계속 보는 건지. 이훈은 다리를 꼬고는 테이블에 팔을 기대 턱을 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온보다 뽀얀 건 여름인 듯했다. 여름과 이온보다는 어두운 피부색이었지만, 어디 가서 피부 안 좋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들과 함께 다니면 뻔히 비교될 게 분명했다.
얼른 올라가서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감고 있던 이훈은 귀찮음에 가로 뜨고 있던 눈을 티 나지 않게 움직였다.
여름은 양손으로 종이가 구겨지도록 꽉 쥐고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한여름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소리를 들어 보았으나 콧물이 흐르는 건지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인지는 구별하기 힘들었다.
“왜 울어.”
“모르겠, 어요….”
형제가 저의 모든 것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코를 훌쩍이며 팔로 눈물을 닦은 여름은 무거운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이훈이 앞에서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고 있을 게 뻔했고, 그새를 못 참고 눈물을 흘린 스스로가 창피했다.
이훈은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입구로 걸어갔다. 계속 앉아 있어 봤자 위로해 줄 위인도 안 되고, 혼자 있는 게 더 낫겠지 싶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딱히 신경 쓰기도 싫었다. 이온이 고집을 부리건, 여름이 눈물을 흘리든 법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삼 형제가 된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
여름은 침대 위에 놓인 저의 교복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어울리지 않고 과분하게 무겁던 것이었기에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저에게 주어진 옷장은 이온이 넣어 준 옷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었다. 한쪽 틈에 넣을 생각으로 교복을 곤히 접었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학교에 갈 일이 있을까.’
아무리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도 그들은 말을 돌리거나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원장님에게만 알린 사실은 여전히 여름을 얽매고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남들보다 늦게 입학한 날로부터 친구들보다는 한 발짝 뒤에서 걸어야 했다. 남들보다 약한 건강도 보육원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였다.
19살이지만 20살인 것처럼, 20살이지만 19살의 나이로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 많은 차이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성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사실, 유일한 보금자리에서 퇴소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성인이 되었음에도 독립이 싫었기에 성인이라는 나이를 밝히지 못하는 이유였다.
여름 역시 간절히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말 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이대로 더 늦어도 괜찮은 건지, 저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물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전과 달리 강하게 걸려 있던 족쇄는 사라졌지만 마음대로 방문을 열 수도, 저택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누군가가 막는 건 아니었지만 여름이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달라진 건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 하나였다.
이온이 지난밤 걸어 주고 간 옷 중 외출복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나 잠옷과 일상복은 하나의 커다란 옷장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그사이에 입고 왔던 교복을 고이 접어 옷장 한편에 내려놓았다. 검정 조끼는 곳곳 실밥이 터져 있었고 먼지는 바닥을 쓸어내린 것처럼 가득 묻어 있었다.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던 추억이 이제는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고 무서웠다. 제 머릿속에서는 평생 다정했던 원장님의 얼굴이 엉망으로 짓눌러져 있었다.
여름의 허름한 교복을 보며 저택에서 일하시는 분 중 하나가 세탁을 해 주냐는 질문을 했을 때, 됐다며 거절했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교복이었다. 깨끗하게 세탁한다고 해서 새 옷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모습 그대로 옷장에 넣어 보관하고 싶었다.
잊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꺼내고 싶진 않았다. 새겨져 있던 이름과 미련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는 미련한 생각과 함께 말이다.
“여름 님, 점심 준비가 다 됐습니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12시 아니면 1시 빠르면 11시에나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였다.
“네, 나갈게요.”
큰 목소리로 대답한 여름은 커다란 옷장이 어둠으로 드리워지도록 강하게 닫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시 교복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오겠지 하는 희망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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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하얀 스파게티였다. 이런 식의 면 요리는 또 처음이었다. 보육원이나 학교에서 토마토스파게티는 자주 나왔는데, 기름인지 크림인지로 둘러싸인 면을 먹는 것은 어색할 만큼 처음이었다.
속으로 신기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 것인지 모르는 여름은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어 배불리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는 식사 시간이 어색했으나, 매일 달라지는 메뉴가 떨리는 건 사실이었다.
“여름이 울었어?”
하마터면 들고 있던 포크를 놓칠 뻔했다.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정원에서의 지난 일이 떠올랐다. 여름은 천천히 가운데에 앉아 있는 이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말했어요? 입 밖으로 절대 나오지 못할 말이지만 억울한 여름의 눈빛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듯했다.
이훈은 음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화를 듣지 않고 있었다. 그게 형제의 일상이었다.
소득 없이 다시 고개를 숙인 여름을 바라본 이온은 터뜨리는 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웃기다. 혼자 머릿속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갔다.
“좋아서 울었다고 생각해도 괜찮지? 우리와 가족이 되었다는 게 슬플 리는 없잖아.”
좋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감격 어린 감정이었지만, 여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입에 멈추지 않고 하얀 스파게티를 집어넣으며 그에게 의견을 표했다.
늘 식사 시간이 되면 이온이 말을 하고, 이훈과 여름은 그의 말에 대꾸하거나, 조용히 밥을 먹었다. 오늘도 그랬다. 이온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는 맞은편에 앉은 제 막냇동생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과외도 하나 붙여 줄 거니까 학교는 걱정하지 마.”
이온에게 물었던 것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나 오늘 무슨 과외 하게 됐는데’, ‘내일 과외 해야 해’ 등의 대화를 들어만 보았지 직접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대학교는 가야지.”
이온은 너스레를 떨 듯 말을 건넸다. 괜스레 어리광을 부린 아이가 된 듯한 기분에 머쓱해져 돋은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네.”
“오후에 잠깐 온다고 하셨으니 준비하고 있어. 왼쪽 옷장에 있는 옷 있지? 아니다, 형이 밥 먹고 올라갈게.”
이훈은 수저 하나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이온은 밥은 먹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쉼 없이 이야기했다. 무엇 하나 필요 없는 말이 아닌 것이 신기했다.
왼쪽 옷장이면 몇 없는 일상복이 있는 곳이었다. 이온이 직접 올라와 골라 주려는 모양이었다. 여름 역시 버릇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이거 입자.”
점심을 다 먹고, 조금의 시간이라도 흐른 후에나 올라올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오늘 여름을 방에 데려다준 이는 윤 비서가 아니라 이온이었다.
여름보다 먼저 그의 방에 들어간 이온은 가볍고 긴 팔의 후드티 하나를 꺼내 들어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는 얇은 반팔을 입고 있었다. 딱히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저택의 기온 탓에 무엇을 입든 간에 변화가 크지 않았다.
“네. 근데 언제 오세요?”
“누가?”
“과외 선생님이요.”
여름은 그에게서 후드티를 받아 들고는 얼굴을 들어 올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 오시는지 알아야 옷을 갈아입든 말든 할 텐데, 그는 여름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선생님이 아닌가?’
무어라 호칭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과외라고 하면 무언가를 자신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닌가.
당연히 선생님인 줄 알았는데 어디가 잘못됐는지 이온은 큰 눈에 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게 자신을 바라만 보았다.
“곧 올 테니, 옷부터 갈아입자.”
대충 검은색의 바지 하나도 꺼내 들어 여름에게 건넨 이온은 근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여름을 바라봤다.
이온은 늘 무언가 분석하듯 세세히 바라보는 눈빛을 하곤 했다. 해 보라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는 않았다.
“뭐 해? 안 갈아입어?”
“여기서, 가, 갈아입어요?”
당연히 그가 밖으로 나가거나 뒤로 돌든 할 줄 알았던 여름의 생각과 달리 그는 이미 가까운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해 보라는 눈빛을 지우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어떤지 봐주는 사람도 있어야지. 과외 선생님 처음 보는데 허름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잖아. 얼른 갈아입자.”
많이 엉망이었나, 앞머리를 뒤로 젖히거나 어루만지며 황급히 정리한 여름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졌다. 이온의 말이 맞았다. 무엇이 괜찮은지 모르는 자신보다는 이온이 봐주는 것이 훨씬 나을 터였다.
여름은 천천히 바지를 끌어 내렸다. 하마터면 입고 있던 속옷까지 벗을 뻔했으나, 정신 차리고 반쯤 내려간 속옷을 어영부영 올려 입었다. 앞에서 지켜보던 이온에게서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이 새삼 뜨겁게 느껴졌다. 빤히 시선이 느껴졌으나 여름은 천천히 잠옷 앞섬을 풀어 내렸다. 단추가 수없이 많아 떨리는 손이 미끄러졌고 몸에 소름을 돋게 하였다.
“천천히 해.”
“…네.”
완전히 벗은 잠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지 먼저 입을 걸, 어쩐지 아래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요즘 그에게 자신의 맨몸을 보여 주는 일이 잦았다.
“입지 말고, 잠깐 이리 와 봐.”
침대 위에 놓인 옷을 들어 입으려는 참 이온의 말에 멈칫 몸이 굳었다. 여전히 속옷만 입고 있었고 몸에 돋은 소름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천천히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부근으로 다가갔다.
“…왜요?”
하얀 피부의 붉은빛의 젖꼭지가 이온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극적이었다. 바닥으로 솟구치는 아찔한 기분이 느껴졌다. 저 모든 걸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쥔 주먹에는 강한 손자국이 남을 것만 같았다.
“로션. 여기 앉아.”
이온이 두드린 곳은 그의 허벅지 위였다. 거의 나신 상태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앉으라니, 아무리 무서운 이온이라도 부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씻고 나온 지도 오래되었는데, 그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로션이란 걸 확인한 순간 뒤로 뺄 수도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서 이곳까지 왔건만, 더 무거운 걸음으로 그의 허벅지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최대한 힘을 주지 않으려 바닥에 받치고 있던 다리에 가득 힘을 주었다.
그를 눈치를 챈 것인지 이온은 여름의 오금에 손을 넣고는 더욱 끌어 올려 편한 자세로 허벅지 위에 올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로션을 손바닥에 비틀어 짜내고는 한 손으로 여름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여름의 시야는 검은 티를 입은 이온의 가슴팍이 전부였다. 갑작스레 허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여름의 입이 벌어지며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이온은 제 위에 앉은 여름의 몸을 끌어안은 채 손바닥으로 로션을 비비고 있었다. 불투명한 로션이 끈적하게 이온의 손을 적셨다.
충분히 따뜻해질 때까지 비볐을까, 이온은 천천히 홀쭉한 여름의 배부터 맞닿아 발라 주기 시작했다.
“안 차갑지?”
여름은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사실 차갑기보다는 간지러워 입 밖으로 숨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구덩이를 구르다 왔는데도, 로션을 바르지 않아도, 이미 뽀얀 피부를 가진 여름이 신기했다.
매끈하게 비비는 감각이 순조로웠다. 어찌나 날씬한 것인지 여름의 늑골이 쉽게 만져졌다.
이온은 늑골을 타고 올라 가슴 부근에서 원을 그리듯 로션을 퍼 발랐다. 마사지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루만지는 것 같기도 한 감각에 여름은 입술을 깨물어 버텼다.
“흐으.”
이온 몰래 참는다고 참았지만, 이미 여름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된 채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점차 유두 가까이 다가서는 탓에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단숨에 밀려들었다.
차라리 만져 줬으면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이온은 도톰한 유두 주변만을 맴돌며 미끄러운 로션을 바르며 어루만졌다. 로션에 의해 반질거림이 눈에 훤히 보였다.
“으응….”
꾹 다문 잇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온의 목에 팔을 두른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여름은 제 가슴을 터뜨릴 것처럼 쥐어 잡은 이온 탓에 허리가 저절로 비틀렸다.
그제야 이온은 곧게 부푼 유두를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으로 비틀었다. 작은 돌기를 사방위로 비트는 탓에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뭐, 하는 거예요?”
이상하게 머리끝까지 피어오르는 감각 탓에 목소리가 가벼이 떨렸다. 아래가 당겨와 아팠지만, 이온은 쉴 틈 없이 손을 움직였다. 게다가 그의 품 안에 갇혀 있었기에 빠져나갈 길도 없었다.
“다들 이렇게 하는데, 내 동생만 몰랐나 보네.”
이온의 말에 저항하던 여름의 몸이 찬찬히 잦아들었다. 그 틈을 타, 이온의 긴 두 손가락이 유두를 강하게 꼬집었다. 손가락에는 로션이 발라져 있지 않았으나, 이미 충분히 어루만진 탓에 기름져 있어 부드러웠다.
“하읏!”
음 높은 교성이 빠르고 짧게 여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고개를 절로 뒤로 젖혀졌고, 아래에 입은 속옷 위로의 윤곽이 더욱 진해졌다.
다들 로션을 바를 때 이렇게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 쉽게 대꾸가 나오지 않았다.
어딘지 모를 이곳에 와서는 하루하루가 배움의 연속이었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는 것이지만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은 어찌 숨겨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여름은 가만히 수긍하는 쪽을 따랐다.
이온은 여전히 야릇하게 붉어진 여름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 손을 아래로 내려 꼿꼿하게 서 있던 허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다 발랐다. 이제 옷 입자.”
여전히 가벼운 여름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부여잡은 팔은 놓지 않았다. 예상대로 갓 태어난 동물처럼 다리를 바르르 떨고 있었다. 분명 이온이 지탱하지 않았다면 아래로 솟구치듯 주저앉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온과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기름진 몸을 바로 세운 여름은 기다렸다. 그가 옷을 입혀 줄 거로 생각했기에 눈을 감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기다렸지만, 여전히 방 안에는 고요만이 맴돌았다.
“옷 안 입고 뭐 해? 그대로 선생님 맞이하려고?”
그럼 팔은 놔주든가… 여름은 괜히 뚱해진 기분에 “아니요.” 하며 대답하고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옷을 들어 입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서인지 점차 괜찮아졌다.
아래가 당기고 아픈 건 여전했으나, 그것보다는 몸 가득히 묻은 로션이 더욱 신경 쓰였다. 일상복을 입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는 것이 많이 없어서인지 여름은 헷갈리는 게 너무나 많았다.
“예쁘네. 선생님은 아마 곧 올라올 거야. 저기 책상에 앉아 있어. 혼자 잘할 수 있지?”
“아, 어…… 네.”
혼자 할 수 없다고 해서, 누군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열심히 한다면 못 할 것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에 있는 이온을 빤히 바라보니 얼굴에 작은 점이 보였다. 하얀 볼 한편에 자리한 작은 점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듯 보였다.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의 점을 엄밀히 말하면 처음 보았다. 이온의 말간 피부에 잘 어울리는 점이었다.
이온은 빤히 올려다보는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방 한구석에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한 번도 앉아 보지는 않았으나, 제 역할을 다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과외를 시켜 주신다는 건 대학에 가라는 뜻일까, 그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책상에 찬찬히 걸어가 하얀 의자에 앉았다.
보육원에서는 늘 보일러를 가득 때운다고 하더라도 의자만큼은 늘 엉덩이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래서인지 습관처럼 천천히 앉은 여름은 따뜻함이 아래에서부터 밀려오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다.
그리 춥지 않은 밖이지만, 차가운 바람이 부는 건 사실이었기에 의자가 따뜻해서 어디선가 흘러들어 오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위에 누워도 충분할 만큼, 넓은 책상 위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놓여 있었다. 오묘한 감정이 몰려들었다.
정체 모를 문제집과 필기도구, 많은 공책까지 모두 덧없이 비싸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손가락으로 하얀 테이블 위로 장난 아닌 장난을 치고 있으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검정 후드에 잘 빠진 청바지를 입은 채 안경을 쓴 어느 젊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에는 이온이 어깨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번뜩 자리에서 일어난 여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새로 생겼다는 네 동생이야?”
과외 선생인 듯 보이는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여름을 향해 손가락을 펼쳐 가리켰다. 문턱을 넘어 들어온 이온이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하얀 아이를 쳐다보았다.
“새로 생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여름아, 이리 와. 인사해. 네 과외 선생님이자 내 친구, 오민혁.”
“하, 친구?”
민혁은 제 어깨에 올라온 이온의 손을 내팽개치듯 던지고는 여름의 앞으로 다가갔다. 실제로 보니 그는 더 작았고, 어렸다. 고등학생이라고? 얼핏 보면 중학생으로도 볼 수 있는 여린 외모였다.
“반가워, 나는 저 새끼 친구 오민혁이고 잘 부탁해.”
여름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민혁이 악수를 위해 건넨 손을 붙잡았다. 뜬금없이 과외를 하라는 협박 아닌 협박 탓에 오랜만에 온 그의 집이었다. 여전히 거대했고, 컸지만 어울리지 않는 병아리 하나가 있는 것이 더욱 신기했다.
가까이서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데려왔을지 확연히 보이는 취향이었다. 순진하면서 어리고, 뽀얀 피부에, 파란 바다 빛이 도는 어두운 머리. 한이온이 제가 원하는 취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잘 부탁드려요.”
여름은 뒷말을 뭉그러뜨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잘 할 수 있을까 두려웠는데 막상 붙여 주신 선생님을 만나니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민혁은 평범한 대학생처럼, 어린 애새끼 과외를 하라고 하니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게 먼저였으나, 점차 흥미가 솟아났다. 아직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감시하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온의 모습만 봐도 그랬다.
대학생이 아니라 대학원생 분장을 해야 할 나이였지만, 어느새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여름을 보니 자신을 과외를 구하고 있는 평범하고도 공부 잘하는 대학생이라고 충분히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꽤 잘 찾은 것 같은데, 하여튼 징그러운 자식이었다.
“이제 나가. 우리 둘만의 시간 좀 가지게.”
민혁은 억지로 메고 온 가방을 내려놓고는 문 앞에 비스듬하게 기대고 선 이온을 향해 말했다. 쓸데없이 긴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질투가 치밀었기에 금세 눈을 돌렸다.
“민혁아, 둘만의 시간이라니.”
말이 조금 이상하네, 억지로 울상이 된 표정을 만든 이온이 손바닥에 뺨을 기대고는 가만히 서 있는 민혁을 바라보며 웃었다.
“왜, 맞잖아. 네 동생 하루라도 빨리 대학 안 보낼 거냐? 얼른 나가.”
“안 가도 괜찮은데…. 여름이는 아니겠지? 이따 간식이라도 들고 올라올게. 열심히 해.”
“오거나 말거나. 비싼 거나 가져와라.”
가만히 서서 뺨을 어루만지던 이온은 금세 긴 다리로 방을 빠져나갔다. 짧지 않은 대화에 감정이나 실렸을까 싶었지만, 저벅저벅 하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민혁은 긴장을 거둘 수 없었다.
19살이라고 했나, 20살이라고 했나. 이온보다는 작았지만, 얼추 비슷한 키의 민혁은 저보다 훨씬 작고 약해 보이는 여름이 뭐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빛 하나는 좋아 보였지만 말이다.
“너 한씨야?”
민혁은 책상에 턱을 괴고는 여름에게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여름, 하필 한씨라니. 어쩌면 그리 지독하게도 한씨를 맞춰 데려온 것인지, 형제가 아주 지긋지긋했다.
한씨 집안과 얽히기를 지독하게 엮이니 이제는 역할극을 하는 건지, 어디서 주워 온 것인지도 모를 어린애의 대학까지 책임지게 생겼다.
민혁은 이온 앞에서 세상만사 관심 없는 척, 귀찮은 것처럼 행동했어도 21세기에 사람 하나 데려와 속이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들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보나 마나 뱀 같은 혀를 놀려서 어린 여름을 반항 하나 못 하게 한 게 분명했다. 괜히 깊게 파고들어서 좋은 거 하나 없기에 민혁은 고개를 털며 차오르는 생각을 지웠다.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19살?”
민혁의 물음에 여름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오랫동안 속여온 나이는 19살인지 20살인지 기억도 나지 않게 했다. 물론 민혁에게 떠오르는 대로,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민혁의 말에 여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를 더욱 끌어당겨 바르게 앉았다. 이게 맞겠지 싶었다. 허리에는 긴장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믿고 과외 선생님까지 붙여 주셨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자리 잡았다. 민혁이 하는 말 하나하나 되새기며 머리에 담았다.
가만히 여름을 바라보니 때 하나 안 탄 말간 얼굴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매일 쓸데없는 이유로 저를 불러내던 이온 역시 추운 겨울에 내린 새하얀 눈처럼 밝았는데, 여름은 더했다.
게다가 19살 주제에 젖살조차 안 빠진 건지, 마른 몸에 비해 하얀 뺨은 통통했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본 어린애라 그런가, 신기했다.
민혁은 그의 볼을 꼬집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손이 간질거렸다.
“신기하네. 만져 봐도 돼?”
“네?”
책상을 앞에 두고 서로 나란히 앉아 있어서인지, 바로 앞에서 민혁의 손이 올라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굳이 동의를 구하는 말을 꺼냈으나, 이미 여름의 뺨을 문지르듯 어루만지기 시작한 뒤였다.
“난 네 나이 때도 피부가 쓰레기나 다름없었는데, 너희 형제는 다 좋네. 너 진짜 한이온 친동생 아니야?”
친동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여름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닌데요.”
“하긴, 그렇겠지. 이훈이 형이랑 비슷한 부분은 전혀 없어 보인다.”
매일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머리까지 깔끔히 넘기며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빈틈 하나 없는 이훈과 비슷한 부분이라니, 전혀 없을 게 당연했다.
소심하고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나 없는 자신과 이훈은 너무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여름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민혁은 여름의 뺨을 손바닥으로 가득 쥐어 잡으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 말랑하네.”
그의 자극에 여름의 볼이 붉어지며 이상하게 일그러지니 목소리도 이상하게 새어 나왔다.
“아, 아파요….”
아픈가, 살살 문질렀다고 생각했는데, 여름에게는 아팠던 모양이다.
여름의 뺨이 어느새 선홍색으로 붉어져 있었다. 민혁은 눈꼬리를 내린 채 어쩔 줄 모르고 손바닥을 펼쳐 달아 오른쪽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탈칵. 그때였다. 민혁은 여름의 뺨을 살피다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온이 강하게 닫고 나갔던 문이 열려 있었다. 문과 벽 사이에는 어떤 표정인지 모를 굳은 얼굴로 이온이 조금 전처럼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뭐야, 너. 언제 들어왔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민혁의 손이 제 뺨에서 멀어지자 여름은 다른 볼과 달리 뜨거워진 부분을 쓰다듬었다. 성인의 남자는 원래 이렇게 힘이 강한 건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여름도 모르고, 이온의 얼굴을 보자마자 민혁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손을 떼어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기대 있던 이온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감추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뭐 해?”
민혁은 왜인지 모르게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책상에 가로막혔다.
이온은 협탁에 내려놓았던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접시 위에는 딸기가 빨간 장미 모양으로 깎인 채 담겨 있었다. 직접 썰었다고 믿기 어려운 예쁜 모양새였다.
그는 들고 온 접시를 넓은 여름의 책상 위에 올려 두고는 민혁과 여름 사이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민혁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이온의 얼굴을 응시했다. 10년 가까이, 그를 지켜본 사람으로 이온의 눈꼬리가 더욱 가늘어진 게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너 설마 내가 얘 얼굴 조금 만졌다고 이러는 건 아니지?”
설마, 하는 마음에 민혁이 입을 열었다. 어안이 벙벙해서인지 빈 의자에 다시 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이없는 타이밍이 야속했다. 하필 이온이 볼 게 뭐란 말인가.
이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민혁에게서 몸을 틀어 여름을 바라보았다.
밝지만은 않은 분위기라 여름은 고개를 들어 이온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기에 그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약하게나마 딸기 냄새가 코로 흘러들어 왔다.
눈에 띄게 붉어진 여름의 볼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이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찹쌀떡 같은 게 신기해서 만져 본 거야. 아무 생각 없었다고. 야, 너 내 말 듣고는 있냐?”
“…….”
이온은 정신이 하나 나가 있는 사람처럼 하얀 곳에 붉은 자국만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의 뒤에 있는 민혁이 팔을 휘저으며 변명 어린 말을 뱉었지만, 그는 대꾸하나 없었다.
여름은 제 뺨에 닿은 차가운 손에 고개를 살짝 기댔다. 붉어진 곳에 찬 기운이 피어오르니 긴장이 가득 담겨 있던 미간이 편하게 풀렸다. 기분이 좋은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았다.
이온은 한 손으로는 여름의 뺨을 지탱하고, 다른 손으로는 들고 왔던 포크를 들고는 서 있는 민혁에게 내밀었다.
“민혁아, 딸기 먹을래?”
딸기를 향해 먹으라는 듯 턱짓했다. 한이온이 들고 있어서 보통 포크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건 착각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위협적으로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민혁은 주춤했으나, 그에게 포크를 받아서 들어 장미 모양의 딸기 하나를 찍어 입에 넣었다. 독이라도 넣었을까 싶었지만, 딸기 특유의 달콤한 맛이 입에 퍼져서인지 마음이 놓였다.
“근데 민혁아.”
“응?”
딸기 철도 아닌데 어디서 이렇게 맛있는 딸기를 구해 온 건지, 민혁은 하나 더 먹으려 팔을 뻗는 순간 저를 부르는 소리에 멈칫했다.
“여름이는 가족 아닌 남의 손길은 무서워해서. 앞으로 조심해 줄 수 있지?”
이온은 몸을 더욱 뒤로 물려 기대고 있던 몸을 테이블 위로 완전히 올라가 편히 앉았다. 이제 서 있는 건 민혁뿐이었다.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던 이온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의 얼굴에는 감정 없는 웃음만이 남아 있었다.
“네가 이제 여름이 선생이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이해하겠지.”
딸기 먹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었네, 민혁은 입 안에 또 다른 장미 잎 모양새의 딸기 슬라이스를 집어넣고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이 본 여름은 전혀 타인의 손길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표정 변화나 경기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프게 만져서인지 불편해 보이는 게 다였다. 아마 여름은 이온의 말과 달리 남의 손길을 무서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아니, 확실했다.
그렇지만 이온이 말했다면 의도가 달라진다. 한이온은 사람을 길들일 때 온전히 그의 인격을 바꿔 놓는다. 상대는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함부로 그를 떠나지 못하게, 버리지 못하게 한다. 이온의 눈은 늘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 이해했다. 조심할게.”
그의 말과 반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맞춰 주는 게 편한 길이라는 것이 제가 사는 길이라는 사실를 잘 알고 있었다. 여름을 어떻게 만들든, 죽이든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민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이거 작년 수능 특강인데 일단 몇 개 풀어 보고 기본을 더 잡든, 심화하든 결정하려고. 그리고 제 나이에는 못 가는 거 알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이온은 옆에서 느껴지는 여름의 시선 대신, 민혁이 건넨 여러 개의 문제집을 받아서 들었다.
“딸기는 고맙다, 맛있네. 오늘은 그만 가 봐도 되냐? 어차피 이거 전달해 줄 겸, 얼굴 볼 겸 온 거라.”
“그럴래?”
민혁은 가방을 등에 메고는 이온과 여름을 두 눈에 담았다. 왜인지 모르게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넣고 감싸 안아 키우는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이온이 가만히 서 있는 민혁을 뒤로 하고 여름을 바라보니 그는 금세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그래, 다음 주에 만나자.”
길게 수업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빨리 끝나서인지 아쉬우면서도 해야 하는 게 생겼다는 사실에 숨어 있던 의지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내려가면 윤 비서 따라가. 집까지 데려다줄 거야.”
문고리를 부여잡으며 나가려는 순간, 이온의 말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편히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래. 고맙다.”
미소가 가득했던 이온은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여름의 수줍은 고개를 조심스럽게 잡아 돌렸다.
“오늘 어땠어? 앞으로 갈 길이 먼데, 할 수 있겠어? 포기해도 돼.”
이온의 손이 다시 여름의 뺨에 닿았다. 느릿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온의 말대로 정말 갈 길이 멀었다. 여름은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 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족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은 공부밖에 없었다. 집을 청소하는 일을 전담할 수 있는 것도, 밖에 나가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름은 드디어 찾은 부담감에 기분이 좋았다.
“열심히 할게요.”
“음.”
그럴 필요 없는데, 이온은 그 어디에도 없을 여름과 이어져 있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보다 힘을 더욱더 강하게 준다면 그의 볼에는 푸른 멍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만, 뺨에 거즈가 또다시 붙게 된다면 거슬릴 게 분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여름의 모습에 이온은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최대한 깨끗한 방을 골라 필요한 것만 대충 넣어 여름에게 주었는데, 인제 보니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온의 불편한 얼굴을 눈치챈 여름은 숨도 쉬지 않고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고요한 방 테이블 위에 있는 건 먹다 남은 딸기가 놓여 있는 접시와 여러 문제집뿐이었다. 갑작스레 잡혀 온 아이에게 짐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하, 큰 숨을 내뱉은 이온은 테이블에서 뛰어오르듯 일어나 구겨진 바지를 강하게 털었다.
“푹 쉬어.”
이온은 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고는 큰 문을 열고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던 여름은 그가 나간 뒤에나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 늦은 대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