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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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은 아마도 여름의 계절일 것이다. 이름이 여름이니까.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해 버려진 날이 여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던 여름은 늘 ‘여름’이라는 계절 내내 생일인 것처럼 들떴었다.

    원장님은 항상 여름보다 따뜻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말을 들으며, 사람의 피를 말리고 죽이기까지 하는 더위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품었다. 그래도 노력만 하면 그 끝엔 다 이룰 수 있을 줄 알았다.

    노력으로 가능한 일도, 불가능한 일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기나긴 지난날의 잠식은 맑게 지저귀는 아침의 새소리 탓에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무거운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스르르 몸을 일으킨 여름은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인지 몰려오던 졸음이 확 달아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

    마비되었다,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비비며 돌아오지 않는 초점을 잡으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보였다.

    평소와 같이 허름한 보육원 침대가 아닌 하얗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침대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침대에서부터 이어진 두꺼운 밧줄과도 같은 것이 아이의 발목에 묶여 있었다.

    ‘…이게, 무슨.’

    보고 있는 모습이 진짜가 맞는지, 여름은 두꺼운 줄을 떼어 내려 발목을 강하게 흔들었지만, 점차 긁히는 뜨거운 고통만 계속될 뿐이었다.

    줄에 묶여 있으니 제 몸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은 여름은 자신이 이 커다란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분명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 제가 입고 있는 것은 하늘색의 나풀거리는 잠옷이었다. 꽤 부드러운 것이 처음 느껴 보는 감촉이었다.

    무슨 상황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모르겠으나, 찬찬히 눈을 감으니 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보육원에는 그 누구도 없었고, 건물은 전부 불에 타 버렸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전부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원장실에서 만난 무서운 남자들이 저를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 분명했다.

    손을 들어 남자에게 맞은 부근을 어루만졌다. 뺨에는 두꺼운 거즈가 붙어 있었다. 남자에게 맞은 뺨에 상처까지 난 모양이다.

    그렇게 강하게 맞고 기절까지 했는데, 당연했다. 아려 오는 게 뺨인지 두려움에 공허해진 마음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여름은 알 수 없는 상황과 답답함에 몸에 힘을 빼고 늘어뜨린 채 누웠다. 푹신한 침대인 탓에 매트리스 속으로 몸이 빠졌다가 튕겨 나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는 향긋하고도 포근한 향기가 이불 속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있던가.’

    보육원 침구들 역시 자주 세탁하곤 했지만, 오래되고 낡은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덮는 이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기에 안일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비교 대상이 생기니 멋대로 좋고 싫음을 정하고 있는 제 모습이 웃겼다.

    여름은 더 이상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발목에 최대한 힘을 풀고는 깔고 누워 있던 이불을 끌어 올려 목 끝까지 덮었다.

    긴장을 놓지 말자, 놓지 말자 속으로 오십 번은 외쳤을까, 여름은 스르르 감기는 눈을 막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졸음을 떨쳐 낼 이는 몇 없을 것이다.

    ***

    “…십시오. 여름 님.”

    어느새 덮고 있던 이불은 침대 아래로 떨어져 있었고, 그의 몸은 엑스자 모양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편하게 잠에 빠져 있던 여름은 귓가에서 속삭이는 소리 탓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워 있는 여름의 앞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정갈한 옷을 단정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입고 있었고, 안경을 추켜 쓴 채 머리는 젤을 가득 바른 것인지 단단하게 고정한 어떤 남자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점심을 가져왔습니다.”

    여름이 받아 들기도 전에 그는 협탁에 놓여 있는 커다란 판을 아이의 무릎 위에 올렸다.

    “주무시기에 아침은 거르고, 점심으로 가져오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직 먹겠다고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대답은 필요 없는 모양이었다. 여름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당황스러웠으나 반항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이미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과 발에서 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무섭게 노려보는 듯한 그의 시선 때문인지 여름은 뒤늦게나마 수긍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지만 야속하게도 배는 고팠는지 이불로 덮인 무릎 위에 올라온 쟁반을 바라보며 여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쟁반 위에는 무언가 들어간 듯한 하얀 죽과 각종 반찬이 놓여 있었다.

    “전복죽입니다. 천천히 드시고, 웬만하면 다 드셔 주시길 바랍니다. 이온 님께서 지시하신 일이라서요.”

    그는 손을 한곳에 모은 채 예의를 담았지만, 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담겨 있었다. 그가 말하는 ‘이온 님’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 이런 것을 내릴 사람이 보육원에서 보았던 두 명 중 한 명이라는 건 확실했다.

    제 앞에 서 있는 그에게 물어본다 해서 말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기에 여름은 그저 조용히 숟가락을 들어 전복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안경을 추켜올리던 그는 여름이 두어 숟가락 먹는 것을 확인하고는 뒤로 돌아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여름은 입에 담긴 전복죽을 빠르게 삼키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저기,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요…….”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걸어가던 그는 여름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눈을 마주했다. 그는 가운데 있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혹시, 발목에 이건, 누가 묶어 놨더라고요…….”

    여름은 이불 속에서 발목을 슬며시 내밀어 그에게 잘 보이도록 흔들었다. 두꺼운 줄이 아이의 가는 다리와 함께 흔들렸다.

    “그것 역시 지시받은 부분이라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점심은 다 드시고 협탁 위에 두시면 저희가 알아서 가져가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어쩐지 정해진 말 외에는 할 수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꼿꼿이 들었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나이가 몇인데, 겁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정말 납치된 게 맞는 건가.”

    자조 어린 말을 내뱉으며 우물우물 전복죽을 먹기 시작했다. 죽은 어이없게도 따뜻하고 맛있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주는 대로 먹고는 두둑이 부른 배를 끌어안았다.

    여름은 가만히 누워 귀를 열었으나,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자신이 누워 있는 방 근처로는 쥐새끼도 돌아다니지 않는 듯했다. 그 흔한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서 다행인 건지, 가까운 창문 근처로 걸어가는 것 역시 묶여 있는 발목 탓에 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두려움보다는 멍하게 아무 생각 없는 시간이 계속 흘렀다.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달칵하고 문을 열어 천천히 들어왔다.

    “여름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분명히 자신이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아리따운 사내였다.

    여름은 두려움과 함께 몰려오는 당황 탓인지 몸을 뒤로 물리며 천천히 일으켜 앉았다.

    입꼬리를 올려 활짝 웃고 있는 그는 양팔을 활짝 벌리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찰랑이는 머릿결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자신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크고 말랐지만, 왜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잘 잤어? 밥도 다 먹었네.”

    그가 여름이 앉아 있는 침대맡에 앉으니 매트리스가 푹 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게 훤히 느껴졌다.

    “뺨에 흉이 지지는 않겠지? 살살 한다고는 했는데. 괜히 그랬나 보다.”

    사내는 가까이 다가오며 땀에 젖은 여름의 앞머리를 살며시 쓸어 올렸다. 여름이 떨고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뺨 한 대 때렸다고 3일 가까이 쓰러져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겉보기에도 약해 보였지만, 여름이 얼마나 약한지를 알 수 있었다.

    “앞으로는 형이라고 불러도 돼.”

    나는 한이온이야, 그는 말을 덧붙였다. 점심을 가져다준 남자가 말했던 ‘이온 님’이 눈앞에 있는 사내였다.

    이온의 눈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여름의 표정을 바라보니 당황한 건지 무서운 건지, 동공이 떨리듯 흔들리고 있었다.

    묶여 있는 밧줄 탓에 멀리 도망가지 못하는 여름을 보니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름은 절대 모를 터였다.

    “방은 마음에 들어?”

    여름은 고개를 빠르게 흔들며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처음 책상 아래에 갇히듯 앉아 있는 여름을 보았을 때부터 느낀 점이지만, 여름의 얼굴은 백옥보다도 하얀 것이 신기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온 역시 여기저기서 하얀 피부라는 소리를 자주 듣곤 했지만, 여름의 피부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아왔는지 잡티 하나 없이 하얗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왜인지 모르게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형에게 달려가서 여름을 같이 키워 보자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재차 꾀어 보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데려오자는 것도 이훈이 반대하는 터에 막을 틈 없이 기절시키고서야 겨우 데려올 수 있었다.

    아직도 제 동생이 될 이를 기절시키고 난 뒤 형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다시 떠올려도 웃음이 절로 났다. 저보다 몇 년은 더 살아왔으면서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의 발에 족쇄를 걸어 묶는다는 조건으로 빈방에 가둬 둔 것인데도 이훈은 보내 버리라는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도 어떨 때는 매정하기 그지없다.

    여름은 입고 있는 하늘색 잠옷을 꾸기듯 쥐어 만지며 떨고 있는 몸을 감추고 있었다.

    자신이 고른 잠옷을 입고 있는 여름의 모습이 꽤 만족스러웠다.

    귀찮음을 거듭 감추고 기절한 여름의 옷을 직접 갈아입혀 다행이지, 아마 다른 이들이 했다면, 이미 누군가에게 범해져 엉망으로 변해 버렸을 게 분명했다.

    뽀얀 냄새가 나는 여름을 바라본 이온은 아직 기다릴 때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치미는 욕구를 참아 냈다.

    “내일부터는 밥 같이 먹자. 아래로 내려오면 돼.”

    이온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여름의 뺨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떨고 있는 하얀 뺨이 여전히 뜨거웠다.

    무서워서 떨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애처로움을 느끼기보다 강하게 누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모르는 감정에 딱히 명칭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다른 누군가가 여름을 본다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을 느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얼굴에 휘둘리는 성격이었나.’

    헛웃음을 애써 삼키고는 뒤로 돌아 여름에게 인사하고는 그의 방을 벗어났다.

    절대 열리지 않도록 문을 강하게 닫고 나오니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이훈이 보였다.

    “안 바빠?”

    2층에 자주 올라오는 이훈이 아니었다.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이를 노려보는 이훈의 표정에 웃음을 삼킨 이온이었다.

    “언제 보낼 거야.”

    이온은 자연스레 그의 말을 무시하며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듬을 타듯 흥얼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버리면 없어질 아이인데 우리가 가지면 어떻다고.”

    “…….”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내가 데려오던 이가 한두 명이었던 것도 아니잖아.”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던 이온은 자신보다 위층에 있는 이훈을 향해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세 개의 손가락을 펼쳐 삼 형제를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삼 형제가 좋다니까.”

    이훈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얼굴을 구겼다. 오늘만 해도 이온에게 당장 방 안에 갇힌 저 아이를 보내라는 말만 몇 번을 했는지 셀 수 없었다.

    이온은 어떻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충분히 예상되는 이훈의 모습을 흘깃 쳐다보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훈은 이온의 웃음소리가 거슬린다는 듯 강하게 쳐다보고는 그를 스쳐 앞서 나갔다.

    “윤 비서!”

    강하게 소리치며 이온보다 빠르게 1층으로 내려갔다.

    많은 아이가 그들을 거쳐 갔고, 새롭게 나타난 이가 2층의 큰 방을 차지하고 있는 여름이었다. 하필 성도 ‘한’이어서인지 이온이 지나간 다른 아이보다 각별하게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아예 죽여 없애지 않는 이상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불안했다.

    한이온은 아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침밥을 올려 보냈고, 직접 방에 들어가 그와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정말 형제를 원하는 건지, 다른 목적을 위한 상대인지 구별이 안 되는 이온의 모습이 여전히 웃기는 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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