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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 마을 (15/15)

15. 그 마을

태철은 비쩍 곯은 은아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았다. 은아는 병원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만져지는 대로 흔들렸다. 환자복을 다시 입혀 주고, 꽤 기른 머리를 정성껏 빗겨 주는 태철의 눈이 텅 비었다.

태철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멍하니 은아를 응시했다. 인공호흡기는 뗐지만, 의식은 없었다.

“은아야.”

“…….”

답이 없는 은아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은아야, 손이 왜 이렇게 차냐?”

“…….”

은아의 손이 너무나 차가워 겨울이 지났음에도 태철은 여전히 한기가 도는 겨울 한가운데에 있었다. 은아의 시간과 함께 태철의 시간도 멈췄다.

드르륵. 조용한 병실 문이 열리고, 태성이 큰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야, 강태철.”

“어, 왔냐?”

태철은 태성을 보지 않고 말했다. 태성은 테이블 위에 포장해 온 도시락을 올려놓고 태철을 불렀다.

“야, 밥 먹어.”

“…….”

“빨리 와. 밥 식어.”

태철은 은아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떼고 소파에 앉았다. 태성은 태철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고 봄 코트를 벗었다. 그 움직임에 태성의 옷에 붙어 있었던 벚꽃잎이 팔랑이며 아래로 떨어졌다. 태철은 분홍색 꽃잎을 멍하니 보았다.

병실에만 처박혀 있어서 계절감 없이 살다 보니 봄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태철은 꽃을 보고야 시간을 자각했다.

봄에는 은아가 좋아하는 쑥떡을 해 먹이려 산으로 가야 하고, 개나리와 진달래와 벚꽃을 보러 꽃놀이 가야 하는데. 태철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고 밥 한술을 억지로 떠먹었다. 태철은 태성이 챙겨 주는 밥을 거부하지 않고 꾸역꾸역 먹었다. 은아를 돌보려면 자신이 아프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태철은 온종일 은아가 있는 일인실 병실을 지켰고, 그런 태철의 식사를 챙겨 주는 건 태성이었다. 처음 한 달 정도, 태성은 태철처럼 병실에만 있다가 이렇게 멍청하게 사는 건 태철로 족하다는 결론을 내고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열심히 일하면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병실에 들러 태철의 밥을 챙기고, 쪽잠이라도 자게 그를 닦달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태철을 살뜰히 챙겼다.

태성은 은아가 다시 깨어났을 때, 태철과 자신에게 미안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폐인처럼 있는 자신들을 보고 펑펑 울 것을 예상했다. 태성은 은아의 미안함을 덜어 주고 싶었다.

태성은 은아에게 ‘네가 누워 있었어도 내 할 일 잘하고 잘 살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열심히 살았다. 태철과는 결이 다른 애정 표현이었다.

“야, 오늘은 내가 병실에 있을 때니까 집에 가서 자.”

“됐다.”

“되기는. 네 꼴이 어떤지 알아? 표정은 또 어떻고? 누구 하나 죽일 듯이 흉흉해서는. 아, 몰라. 몰라. 너 집에 가서 자고 와라. 어? 너 쓰러지면 은아가 좋다고 하겠다? 어?”

“…….”

“야.”

“알았다.”

은아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데 몸을 축내서는 안 된다. 태철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은아를 태성에게 맡기고 오랜만에 집에 들어갔다. 태철은 샤워하고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이불보에 묻은 은아의 체취가 태철의 코에 들어갔다. 코가 찡해졌고 감정이 올라왔다. 태철은 꾹꾹 눌러 담아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울부짖으며 슬픔을 토해냈다.

태철은 믿기지 않았다.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의사의 소견도, 기적이 필요하다는 말도,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은아의 상태도, 의식을 잃은 은아가. 전부 다.

태철은 은아보다 먼저 죽을 자신을 염려해 유언장을 써 놓았다. 거기에는 모든 재산을 은아에게 준다는 내용과 함께 은아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빽빽하게 써 놓았다.

계절마다 먹어야 하는 음식, 가야 할 여행지, 읽어야 할 책, 가져야 할 직업, 봐야 할 영화와 드라마 등등. 수백 가지를 써 놓았다.

편지 제일 끝에는 그 모든 것을 다 하고 자신에게 오라고 써 놓았다. 은아의 길을 정해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은아 없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태철은 길을 잃었다.

몇 시간을 내리 울던 태철은 지쳐 잠에 빠졌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사고가 일어났던 낭떠러지 위에 은아가 하얀 옷을 입고 태철을 보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뒤로 간다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태철은 은아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철은 온몸이 굳어 불안한 눈으로 은아를 보았다. 은아가 태철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강태철.」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태철은 답해 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철아, 여보.」

은아가 한 번 더 태철을 불렀다. 태철은 답답함에 눈물을 흘렸다.

「태철아, 울지 마.」

「…….」

「태철이, 기다려. 내가 갈게. 기다려.」

태철은 시선을 내려 은아의 발을 보았다. 은아가 아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 느릿해서 거리가 빨리 줄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태철에게 다가가고 있다. 태철은 속으로 말했다.

‘그래, 기다릴게.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

태철이 잠에서 깼다. 사방을 둘러보자, 어두운 방이 보였다. 태철은 거친 숨을 고르며 자신의 옆자리인 은아의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태철의 귓가에 꿈속에서 들었던 은아가 목소리가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기다려.」

“그래. 기다릴게. 네가 직접 올 때까지.”

텅 비었던 태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태철은 길을 찾았다.

날이 길어졌다. 오후 여섯 시가 넘었으나 하늘은 밝았다. 봄이 지나 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은아는 계속해서 눈을 뜨지 않았지만, 태철은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간병인을 두어 자신 대신 은아를 돌보게 하고, 전과 같은 일상을 살았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직접 음식을 해서 태성과 같이 아침을 먹고, 오후에는 병원으로 가 은아를 돌보고, 밤이 되면 집에 들어가 잤다. 폐인 같고 흉흉했던 모습을 지우고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처음 태성은 갑작스러운 태철의 변화에 혹여나 나쁜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곧 자신과 같이 건강한 모습으로 은아를 맞이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강태철, 나 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태성은 퇴근하자마자 병실에 들렀다.

“그래, 왔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태철은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태성을 반겼다.

“은아는?”

“똑같다.”

태성은 은아의 곁으로 다가가 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은아야, 빨리 일어나.”

태성이 작게 속삭였다.

“최태성. 여기 앉아 봐라.”

태철이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왜?”

소파에 털썩 앉은 태성이 물었다.

“이거.”

태철이 USB를 건넸다. 태성은 그것을 받아 들고 의심 가득하게 보았다.

“이거 뭐냐?”

“이거 가지고 서울 올라가라.”

“허… 뭐냐? 나 쫓아내? 은아가 여기 있는데, 내가 왜 가? 말했잖아? 나는 평생 너희 옆에 붙어서 안 떨어질 거라니까?”

“이건, 네가 나와 은아를 위해 할 일이다.”

“무슨 소리야? 내가 뭘 해?”

“나는 은아를 기다리기로 했다. 넋 놓고 기다리기는 싫어서 선물을 하나 줄 생각이다.”

“무슨 선물?”

“부부가 돼야지.”

“뭐? 너희 이미 신랑 각시 아니야?”

태성이 태철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가리켰다. 태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부부. 아는 형이 아니라 남편이 돼야지.”

“뭔 소리야?”

태성은 멍한 얼굴로 태철을 보았다. 그에 반해 태철은 흔들림이 하나 없는 단단한 표정을 지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는 시간 동안, 태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은아에게 줄 선물을 계획했다. 너무 좋아 눈을 뜰 수밖에 없는 선물 말이다.

태철은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때, 자신과 은아와의 관계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마을 안에는 자신들이 부부로 통했을 리 몰라도 현실적으로 그들은 남남이었다. 태철은 그것을 뒤집고 싶었다.

“강태철,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되는데? 내가 법을 어떻게 만들어?”

“이거 가지고 위로 올라가라.”

태철이 하늘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태성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USB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뭔데?”

“한대한 게이트가 될 자료.”

태성은 깜짝 놀라며 만져서는 안 될 걸 만졌다는 얼굴로 USB를 던지듯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잠깐, 잠깐. 한대한이라면 내가 아는 그 한대한?”

“어.”

“그러니까, 지금 대통령?”

“어.”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나보고 대통령 끌어내리라는 소리야?”

태성이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탁한다.”

“야, 이거 잘못 건드리면 나 매장이야. 또라이야?”

“태 회장과 얘기 끝냈다. 좋다고 하시더라.”

“뭐? 우리 엄마 만났어?”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거래를 했다. 서로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했고, 같은 길을 걷기로 했다.”

태철은 태 회장의 욕망을 알았다. 그래서 먼저 제안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자신도 태 회장이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모든 것을 바치기로.

“둘이서 해. 나를 왜 끌어들여?”

태성이 질린다는 얼굴로 태철을 내려다보았지만, 태철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이미 태선 그룹이 움직이고 있다. 너는 이거 가지고 터트리기만 하면 된다.”

“와, 어머니 나 대통령 만든다, 뭐다 하시더니 결국…. 잠깐, 아니지?”

“맞다. 위로 올라가라. 꼭대기.”

“으아악!”

태성은 발을 구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최태성, 부탁한다. 우리, 가족 아니냐? 은아와 나를 위해 해줘라. 부탁한다.”

태철이 간절한 눈으로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간절함에 태성의 눈빛이 약해졌다. 태성은 고요하게 누워 있는 은아를 바라보았다.

‘강은아, 선물 주면 일어날래?’

“야, 잘못되면 나 완전 좆 되는데. 왜 나는 이것들이랑 엮여서…….”

태성은 한숨을 푹 쉬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고맙다.”

태철은 애달프게 웃었다. 태성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태철을 향해 입술을 삐죽였지만, USB를 집어 드는 손길은 결연했다.

며칠 뒤, 태성은 간단한 짐만 챙겨서 집을 나왔다. 태철은 가기 싫어 미적거리는 태성을 잡아 운전석에 밀어 넣었다.

“나… 가야겠지?”

태성이 안전벨트를 매며 눈썹을 아래로 축 내렸다.

“어, 가라. 네가 사랑하는 은아를 위한 일이다.”

태철의 말에 태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얄밉다는 얼굴을 했다.

“허… 그렇게 말을 하면 가야 하잖아. 약은 강태철.”

“…….”

“어쨌든, 일 끝나며 돌아올 거야. 쫓아내기만 해봐.”

“그래, 잘하고 와라. 그때가 되면 은아는 분명 깨어나 있을 거다. 마을에서, 이 집에서 같이 살자. 평생.”

“그래, 평생.”

태성은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까지 “I'll be back이야!” 하고 태철의 귀에 인이 박이도록 말한 후, 서울로 올라갔다.

그 후, 태성은 한대한 케이트 특검이자 최초 고발자로 국민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계절은 몇 번 바뀌었다. 태철은 자신의 자리에서 은아와 태성을 기다렸다.

태철은 평상시처럼 은아의 병실을 찾았다. 간병인이 틀어 놓은 TV에서는 많은 사람의 함성이 흘러나와 병실을 울렸다. 간병인은 요새 난리가 난 일을 이야기하며 태철에게 말을 걸었고, 태철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간병인을 퇴근시켰다.

대서특필한 뉴스가 나오는 TV를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전원을 끄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은아에게 다가갔다. 눈을 꼭 감고 있는 은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마른 볼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은아야, 이제 일어나라. 선물 받아야지.”

태철의 말이 끝나고, 그의 말을 알아듣는 양 고요하게 가라앉았던 은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태철은 웃으며 다시 한번 더 은아에게 입을 맞췄다.

“일어나서 나에게 와. 은아야.”

애달픈 태철의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절대 뜨이지 않을 것 같았던 은아의 눈이 뜨였다. 태철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은아는 멍한 초점으로 제 앞의 태철을 보려고 쉴 새 없이 눈을 깜박였다.

“은아야.”

태철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은아야.”

태철이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은아는 잘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을 위로 올려 배시시 웃었다. 은아의 미소 하나에 모든 설움과 슬픔이 눈 녹듯 사라졌다.

태철은 은아를 마주 보며 웃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은아가 태철에게 돌아왔다.

태철과 은아는 양옆으로 코스모스가 만개한 둑길을 걸었다. 태철은 길가에 떨어진 꽃을 주워 은아의 귀에 걸어 주며, 깊게 상처가 난 은아의 목을 쓸었다. 애달픈 눈으로 자신을 보는 태철이 마음 아파, 은아는 태철의 손을 맞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태철은 미소 가득한 은아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태철은 손을 맞잡으면 배시시 웃는 은아가 사랑스러웠다.

“태철이, 업어 줘.”

은아가 태철의 손을 흔들었다. 태철은 무릎을 굽혀 은아에게 등을 보였다.

“그래, 업혀라.”

은아는 태철의 등에 덥석 업혀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은아야, 어디로 갈까?”

“마을 입구까지 가자. 태성이 형 기다려야지.”

오늘은 태성이 오는 날이다.

태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은아는 기분이 좋아 다리를 달랑거렸다.

“태철아, 노래 불러 줘. 코스모스 한들한들 있잖아.”

“그래.”

태철은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걸었다. 은아는 기분이 좋아 까르르 웃다가 태철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들은 마을 입구로 걸어갔다. 마을의 이름이 음각된 표석 앞에 걸음이 멈췄다.

태철은 은아를 내려 두고 비석에 쓰인 마을 이름을 보았다.

“어? 태성이 형 차!”

저 멀리 태성을 태운 차가 마을 입구 쪽으로 다가왔고, 은아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차가 멈추고 태성이 내렸다. 은아는 활짝 웃으며 태성에게 갔다. 태성은 은아를 품에 껴안았다. 한동안 마을 이름을 보던 태철은 표석에서 시선을 떼고 은아와 태성에게 다가갔다.

다시 태철, 은아, 태성이 모였다.

봄에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 쑥이 나는 산이 있고, 여름에는 물놀이하기 좋은 계곡이 있으며,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유명하고, 겨울에는 속이 뜨끈한 멸치국수를 파는 가게가 있는 마을. 유난히 마음이 넓었던 동네 사람들과 이상한 세 남자가 있는 마을. 대한민국 최초 법적 동성 부부가 탄생한 마을.

그 마을에 태철, 은아, 태성이 산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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