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잔인한 짝사랑의 결말 (7/15)

7. 잔인한 짝사랑의 결말

태성은 자신의 모든 짐을 캐리어에 담아 정리했다. 은아는 태성의 방문 앞에 서서 복잡미묘한 얼굴로 태성을 보았다.

“오늘 가실 겁니까?”

은아의 물음에 태성이 짐을 정리하다 말고 은아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요상하다? 나 싫다며?”

“싫다고 한 적 없습니다. 섹스하기 싫다고 했습니다.”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같습니까? 그래서… 지금 가시는 겁니까?”

“왜? 가지 마?”

“그냥… 저에게는 친한 형으로, 태철 형님에게는 친구로 남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 안 돼. 그리고 내가 강태철이랑 어떻게 친구가 되냐? 내가 그놈 배신했고, 이제는 얼굴만 보면 속이 끓는데?”

“…….”

태성은 말을 마치고 짐을 마저 정리했다. 태성의 방은 처음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처럼 텅 비워졌다. 태성은 미련 없이 캐리어를 끌고 마당으로 내려가 차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은아는 태성을 졸졸 쫓아다녔다. 똥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는 꼴이 귀여워 태성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냥 은아 말대로 다 포기하고 이 집에 눌러앉아? 아니다. 강태철하고 붙어 있는 거 보면 속만 쓰리지.

“잠시만요.”

운전석에 앉으려는 태성을 은아가 막았다.

“왜?”

“곧 있으면, 태철 형님 오실 겁니다. 인사는 하고 가시죠.”

“그놈 얼굴 보기 싫은데? 강태철, 그놈도 내 얼굴 보기 싫을걸?”

“그래도요.”

은아가 태성의 옷깃을 잡고 우물쭈물했다. 태성은 한낮의 태양 빛을 그대로 받고 있는 은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진짜 피부가 약하네. 잠깐 나와 있었다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깡패짓 어떻게 했냐?”

“…….”

“그래, 강태철 속이나 뒤집고 가야지. 올라가서 커피 한 잔이나 줘.”

“네.”

은아는 팔랑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고, 태성은 차 문을 닫으려다가 말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캐리어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약은 놈이고, 혹시 모르지. 기회가 생길지.

“여기, 마십시오.”

태성은 뒤늦게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고, 은아는 얼음이 든 믹스 커피를 건넸다. 한 모금 하니, 달달하고 시원했다.

“너희는 믹스 커피만 먹냐? 바리스타 자격증 딴 거 아깝지도 않아? 핸드드립이라도 해 먹지?”

“귀찮더라고요. 그리고 제 입맛엔 믹스 커피가 딱입니다.”

“그래, 촌스러운 강태철, 강은아는 그게 어울리지.”

“태성이 형, 종종 안부 전화 드리겠습니다. 받아 주세요.”

“싫은데?”

“형…….”

“쯧쯧, 불쌍한 강은아. 나는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다. 강태철이랑 행복하게 살지 마.”

“아…….”

태성은 진지하게 은아의 불행을 기도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 은아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참았다. 태성은 눈을 찡그렸다. 저 바보를 어떻게 하지? 떠나는 순간까지 은아를 울려 태성의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강태철 늦네? 금방 올 것 같더니.”

“그러게요. 은행에서 돈만 뽑아 오신다고 했는데.”

은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은아를 보는 태성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저런 우울한 얼굴도 예쁜데. 진짜 포기해야 하나?’ 태성의 나쁜 마음이 고개를 스윽 드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태철이 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한 손엔 자양강장제 박스를 들고 있다.

“나 왔다. 은아야.”

“은행 간다며, 이거 뭐냐?”

“병문안 선물.”

태철은 은아가 목을 졸랐던 남자의 병문안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목을 조르는 것만으로 전치 4주의 진단을 받은 남자는 고소는 안 하겠지만, 병원에 와서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냐고 태철을 긁었다. 태철은 그의 의도를 바로 파악했고,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었다.

“은아야, 옷 갈아입어라.”

“예.”

은아는 옷을 갈아입으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태성은 자양강장제 박스 뚜껑을 열었다. 박스 안에 빼곡히 들어찬 오만원권 지폐에 헛웃음을 날렸다.

“허… 깡패 새끼가 그럼 그렇지. 왕년에 뇌물 먹이던 솜씨 나오네.”

“괜히 일 커져서 좋을 거 없으니까.”

“하… 여기 가득 채우면 오천만 원 정도 들어가. 뭘 그렇게까지 줘?”

“은아가 이 마을을 좋아한다. 괜히 미운털 박혀서 좋을 건 없으니까.”

“유난.”

태성이 툴툴거리고, 태철은 그런 태성을 무시하는 사이 은아가 검은 정장을 입고 나왔다. 태철은 은아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은아의 머리를 쓸었다.

“우리 은아, 오랜만에 이런 모습 보니까 예쁘다.”

“그렇습니까?”

“그래.”

“종종 입겠습니다.”

“으이구, 아가.”

은아는 태철을 향해 수줍게 웃었고, 태철은 은아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둘이 이렇게 붙어 있으니까 완전 깡패네.”

말은 투덜거렸지만, 태성은 은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확실히 원피스보다는 저런 정장이 어울리지.

삐리리리. 태철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태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화를 끊고 은아에게 말했다.

“은아야, 너는 오지 마라네?”

“아… 화가 많이 났나 봅니다.”

“걱정 마라. 문제없을 거다. 금방 갔다 올게. 오랜만에 차려입었는데 외식이나 하자. 밖에 더우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네. 아, 형님. 태성이 형 오늘 떠나신답니다.”

“그래? 잘 가라. 다시는 오지 말고.”

태철은 태성에게 미소를 지었다. 승리자의 미소다. 그 미소에 태성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 곱게 가려고 했는데.’

아니다. 곱게는 무슨. 곱게 가려고 했으면, 애초에 이것도 안 챙겼겠지. 태성은 자신의 주머니 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렸다.

‘강태철, 내 인생이 좆같다고 느껴질 때 말이야. 사람이 악해져. 다 좆 되게 만들고 싶어진다고. 참, 사람, 나쁘게 만드네?’

사실, 태성은 어제 은아를 납치할 생각을 했다. 이렇게 곱게 물러날 태성이 아니다. 그러나 틈이 없었다. 어찌나 태철이 은아 옆에 딱 붙어 있는지. 그래서 진짜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태성은 약은 사람이다. 혹시 몰라서 주머니에 수면제를 챙긴 것만 해도 그렇다. 어쨌든, 태성에게 기회가 생겼다. 은아와 태철이 밖으로 나간 사이, 커피잔에 수면제를 넣었다.

은아는 마당까지 내려가 차에 올라탄 태철을 배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태성은 은아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커피잔을 건넸다.

“얼음 다 녹았네. 마셔.”

“네.”

꼴깍, 꼴깍. 은아의 입속으로 커피가 잘도 들어갔다. 태성은 음흉하게 웃었다.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던 은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노을이 지는 저녁이었다. 은아는 태성의 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은아는 상황을 파악하려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차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분명, 자신은 커피를 마시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이 몰려와 잠깐 눈을 감았는데, 왜 차 안에 있단 말인가. 은아는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묵묵하게 운전하는 태성에게 말했다.

“태성 형, 이게 뭡니까? 제가 왜 여기 있습니까?”

“조폭들 잘하는 거 있잖아. 약 먹여서 납치하는 거. 강은아, 순진한 놈은 아니잖아?”

“하… 형님. 이렇게 하셔도 저는 태철 형님밖에 없습니다.”

“알아. 그렇다고 나를 놓지도 못하지.”

“하아…….”

은아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머리를 헝클려고 손을 올리는데, 두 손이 묶여 있었다. 은아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케이블 타이를 노려보았다.

일이 복잡하게 흘러갔다. 태성이 이렇게까지 했다면, 쉽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태철은 어떻게든 자신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화가 아주 많이 나, 태성을 죽이려고 들겠지. 은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모한 짓을 벌이셨습니다.”

“원래 사랑은 무모한 거지.”

“태철 형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무서우신 분입니다. 태성이 형, 정말 형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차, 돌리십시오.”

“싫어.”

“하…. 정말,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그리고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역시, 도망은?”

“밀항이죠. 항구로 가시는 겁니까? 제 위조 여권도 만드신 겁니까?”

“…섬! 도망은 섬이지!”

“아…….”

“하여간, 조폭 새끼. 통영 가는 길이야. 곧 도착이네. 오늘 밤은 통영에 있는 호텔에서 머물고, 내일 배 타고 섬으로 갈 거야. 내가 아는 섬이 있어. 집 한 채만 있는 아주 작은 섬. 아무도 못 찾아. 거기에서 너와 살 거야.”

“터무니없는 계획이십니다.”

“그래, 맞아. 그런데 내가 이런 미친 짓을 하네. 바보 멍청이가 된 것 같다. 그래, 너 때문에 그 촌구석까지 따라간 것부터가 미친 짓이지.”

“태성이 형, 제가 좋습니까?”

“어, 많이 사랑하는 거 같네. 아니, 많이 사랑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벌일 만큼, 내가 이해가 안 갈 만큼.”

“…….”

은아는 안쓰러움과 걱정, 불안, 답답함이 섞인 눈으로 태성을 보다가 일단은 그가 하는 대로 두기로 했다. 기회를 봐서 태철에게 전화하든가 할 것이다. 지금은 태성이 다시 이성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차는 통영의 한 호텔 주차장에 들어섰고, 태성은 주차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는 은아의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이끌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은아는 순순히 차에서 내려 태성을 따라갔다.

태성은 은아의 묶인 손을 꽉 잡고 로비로 향했다. 은아는 체크인하는 태성의 옆에 서서 예리한 눈으로 탈출구를 눈으로 훑었다. 여차하면 도망가야지, 별수 없다. 체크인을 마친 태성을 은아를 끌고 객실로 올라갔다.

그 때, 엘리베이터를 타는 은아와 태성을 본 사람이 있었다. 이들이 있는 호텔의 주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부성. 태성과도 연이 있고, 은아와도 연이 있는 사람이다. 은아와의 직접적인 연이라기보다는 태철과의 연이다. 태철이 새끼 조폭일 적에 친아우처럼 챙겨 준 조폭 형님이시다.

그리고 태성과는 악연이다. 태성은 조폭 잡는 검사였다. 대표적 희생양이 강태철과 장부성이었다. 부성은 태성의 푸닥거리에 못 이겨 아래 지방, 통영까지 쫓겨난 비운의 조폭이었으니. 그는 최태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런 부성의 나와바리에 태성이 손수 행차하셨다. 부성은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참이었다.

“저거 최 검사 아이가? 그리고 옆에는 강태철이 아가고.”

부성이 하이에나 같은 눈을 빛내며, 제 옆에 있는 부하에게 물었다.

“예. 맞습니다.”

“허… 최 검사, 검사 그만뒀다던데. 맞제?”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허허… 참말로 겁도 없제? 여기로 다 기어들어 오고. 애들 좀 불러라.”

“예.”

이제는 장부성이 푸닥거리할 차례다.

은아와 태성은 객실로 들어갔다. 은아는 소파에 앉아 태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푸십시오.”

“싫어.”

“그럼, 핸드폰 좀 주십시오.”

“왜?”

“형님께 전화해야 합니다.”

“상황 파악이 안 돼?”

태성은 은아의 턱을 잡아 올렸다. 맥없이 딸려오는 얼굴에 웃음이 났다. 입으로는 반항하지만, 몸은 순종적이다. 그래, 내가 아는 은아는 이래야지.

태성은 은아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며 다가갔다. 은아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태성은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다시 제 쪽으로 돌렸다. 은아는 눈을 찡그리고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강태철하고는 좋다고 입을 맞추더니, 왜? 내 좆은 빨아도, 입은 싫어?”

“…….”

“그럼, 좆이나 빨든가.”

태성은 바지 버클을 풀려고 했고, 은아는 몸을 비틀어 저지했다.

“그만하십시오. 더 이상 가면, 우리 관계는 파탄입니다. 저는 계속 태성이 형 좋아하고 싶습니다.”

태성은 입술을 비죽이며 은아의 어깨를 잡고 소파 위에 거칠게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은아의 바지 버클을 풀고,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은아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은아의 눈이 가늘어지고 귀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밖에 누군가 있다.

“형, 잠시.”

은아는 쉽게 케이블 타이를 끊고, 가볍게 태성을 밀치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문에 귀를 대고 바깥 상황을 살폈다. 덩그러니 소파에 널브러진 태성은 황당했다.

‘뭐야? 강은아, 저거 일부러 당해 주고 있었던 거야? 케이블 타이를 이렇게 쉽게 푼다고? 저거 못 푸는데!’

“너……!”

태성이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하려고 입을 떼는데, 은아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쉬잇!”

“뭐야?”

“조용히 하십시오.”

은아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태성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리고 뭐라 따지려는 태성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 호텔, 부성 호텔입니다.”

“그게 뭐?”

“부성파 두목, 장부성 형님이 운영하시는 곳입니다. 형 때문에 조직이 와해되어서 여기, 통영까지 내려온 거 모르십니까?”

“뭐? 아…….”

잊고 있었다. 사랑에 미쳐서 대가리가 완전 맛이 갔구나. 그나저나…….

“뭐야? 너 뭐냐? 어?”

“…….”

“야, 강은아. 여태까지 내 장단 맞춰 준 거였냐? 적선해?”

“아닙니다. 일단 차 키, 저 주십시오.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갈 겁니다.”

태성을 치려고 밖에 조직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인기척으로 가늠 잡아 열 명은 넘는 것 같았다. 한시가 급했다. 대화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은아는 심각한 얼굴로 손을 내밀며 태성을 재촉했다. 태성은 아무 말 없이 은아를 빤히 보기만 했다. 은아는 마음이 급해져 빠르게 말했다.

“형 검사직 그만둔 거 알고 앙갚음하려고 온 거 같습니다. 제 뒤에 꼭 붙어 계십시오. 그리고 빨리 차 키 주십시오. 네?”

은아의 말에 태성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강태철이 말하지 않았나 보네. 그만둔 거 아니고 일 년 휴직계 낸 건데. 이걸, 말할까 말까 하다가 말았다.

자신을 족치러 오는 장부성에게도 잘못 알고 있다고, 어떻게 손 씻은 놈보다 정보가 안 좋냐고, 복직하면 너는 좆 됐다고 말해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 꼭 붙어 있으라는 은아의 말이 마음에 들어서다. 은아의 보살핌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태성은 어쩔 수 없는 척, 은아에게 차 키를 건넸다.

은아는 주머니에 차 키를 넣고, 문고리를 잡았다.

우당탕탕!

거칠게 객실 문이 열렸다. 조직원들이 안으로 들어와 태성을 찾으려 객실 곳곳을 뒤졌다.

“야, 찾아! 어디 갔어!”

“눈치채고 토낀 거 아이가!”

조직원 한 명이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잠겨 있다.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은 게 아니라면 분명, 이곳에 최태성이 있다. 조직원이 발로 문을 차려는 찰나, 은아가 더 빨랐다.

은아는 세게 문을 열었다. 문 가까이에 있던 조직원이 바로 뒤로 넘어갔다. 은아는 자신에게, 정확하게는 제 뒤에 있는 태성에게 달려드는 조직원들을 여유롭게 맞이했다. 큰 덩치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데, 쪼는 모습 따위는 없었다.

‘발차기가 예술이네…….’

태성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덩치들을 하나둘 처리하는 은아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검은색 정장 재킷이 펄럭이는 모습이 우아했다.

은아는 태성을 보호하면서 덩치들의 급소만을 노려 빠르고 정확하게 쓰러뜨렸다. 얼뜨기처럼 서 있는 태성의 손을 꽉 잡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부성과 눈이 마주쳤다.

“태철이 아가야 맞제?”

“아… 형님…….”

은아는 주춤,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제 뒤로 태성으로 숨겼다. 숨긴다고 숨겨질 덩치는 아니지만.

“그, 뒤에 뭐꼬? 최태성 금사님 아입니까? 우리 대단한 금사님! 지금 아가야 뒤에 숨어 계시는 겁니까!”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태성을 신경질을 내며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은아는 태성의 손을 꼭 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자신을 보호하는 모습에 눈치도 없이 웃음이 슬 삐져나왔다.

“아가야, 금사님하고 무슨 사인지는 모르겠어도, 나가 태철이한테 어떤 존잰지 알제? 그런데 네가 내 새끼들을 저렇게 조사 놓나?”

“…….”

“내 새끼들 조진 거는 모르는 척할라니까네, 고마, 최태성이 넘겨주고 가라.”

“죄송합니다. 제 어머니 같은 사람이라 못 넘깁니다.”

“뭐어? 어머니?”

“그리고 죄송한데, 태철 형님께 제가 납치당했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별장으로 갈 테니, 거기로 와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별장은 부성이 모르는 곳이다. 은아는 일부러 안전한 별장으로 간다고 말했다.

“뭐어? 납치?”

부성은 뜨악했다. 자신의 새끼들을 다 조진 애가 납치를 당하다니, 무슨 말인지? 도대체 누가 누구를 납치한다는 건가. 내가? 아님, 은아 뒤에 숨어 있는 최태성이? 아님, 최태성을 은아가 납치했다는 소린가?

상황 파악이 안 돼 어어, 하는 사이, 은아는 빠르게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잔상만 남은 은아의 모습에 부성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고, 옆에 있는 오른팔에게 물었다.

“니는 저게 납치당한 아로 보이나?”

“그…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아야! 스톡호럼이고 뭐고, 지금 네가 한가하게 씨부릴 때가! 안 쫓아가나!”

“아, 아! 네! 빨리 쫓아가!”

오른팔의 말에 부하들이 우르르 계단을 타고 내려갔고, 부성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태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어! 태철 동생! 니, 강생이 하나 안 잃어버렸나?”

은아는 태성의 손을 잡고 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탔다. 은아는 태성이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하고,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 앞을 조직원들이 막아섰다. 은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액셀을 밟았고, 거침없이 돌진하는 차에 조직원들이 혼비백산 피했다.

“운전을 무섭게 하네.”

은아는 태성의 말은 신경도 안 쓰고, 뒤에 쫓아오는 부성의 부하들을 의식하며 거칠게 차를 몰았다. 그리고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속도를 줄였다. 은아는 답답한 셔츠 윗단추를 풀고, 태성에게 말했다.

“저는 중간에 내려서 별장으로 갈 겁니다. 형은 이 차 타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십시오.”

“누구 마음대로?”

“형, 안 그래도 적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거기에 태철 형님까지 더하지 마십시오. 태철 형님, 지금은 손 씻었어도 형님 한마디면 만사 제쳐 두고 달려오는 놈들 많습니다.”

“됐어. 우리는 이미 적이야. 연적.”

“운전대는 제가 쥐고 있습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십시오. 안 그러면… 진짜 죽습니다. 태철 형님은 형,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피하십시오.”

“됐어. 나도 별장 가. 피하는 건 내 스타일 아니야.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어?”

“형…….”

“내가 운전해?”

“하아…….”

태성을 이길 수가 없다. 결국, 은아는 태철의 별장으로 향했다.

태철은 부성의 연락을 받고 미친 듯이 차를 몰아 별장으로 향했다. 그 전까지 태철은 걱정으로 애간장이 다 녹았다.

식당에서 행패를 부린 사람과의 일은 잘 해결되었다. 목이 안 움직인다고 엄살을 부리던 남자는 태철이 성의 표시라고 가져온 자양강장제 박스를 보고는 마을 사람들끼리 얼굴 붉혀야 쓰겠냐고, 좋게 해결하자고, 엄한 식당에서 행패 부려서 미안하다는 사과까지 했다.

태철은 이 일로 은아에게 불이익을 가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 들고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 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로 외식할까 물어볼 요량이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 싸했다. 갑자기 태성이 이렇게 쉽게 물러갈 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너무 안일했을까. 집으로 향하는 내내 초조한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텅 빈 집을 보고 핏기가 싸악 가셨다.

집 안 어디에도 은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면 간다고 말하고 가는 아이다. 절대 말도 없이 사라질 녀석이 아니다. 태철은 당연하게도 태성을 의심했다. 태성은 태철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태철은 집 안 곳곳을 살펴 이상한 점을 발견하려 애썼다. 무언가 단서가 있을 거다.

집을 다 뒤집어 놓은 후에야 다 녹지 않은 가루약이 커피잔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고, 몇 번의 머리 굴림으로 모든 파악을 끝냈다. 야비한 최태성이 약에 취한 은아를 데리고 갔다. 이것이 태철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바로 옛 부하들을 풀었다. 몇 시간 후, 기다리던 은아의 행방은 부하들이 아닌, 부성에게서 나왔다. 제 입으로 납치당했다고는 하는데, 오히려 태성을 보호했다는 말을 듣고는 태철은 결심했다. 아, 최태성을 죽여야겠구나.

‘먼저 나와의 의리를 깬 건 너다. 의리를 깨면, 죽음이다.’

태철은 바로 차를 타고 별장으로 달렸다. 별장에서 은아를 기다리는 내내, 은아가 혹시 별장으로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태철은 태성 한정 약하게 구는 은아의 마음을 안다. 멍청하게도, 어이없게도, 은아는 태성을 ‘어머니’인 동시에, ‘자신을 살려 줄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미움을 받기 싫었고,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정이 고픈 아이다.

태철은 그런 은아가 불안했다. 태성이 또 말로 은아를 홀려 어디 창고 같은 곳에 은아를 가둘까 봐. 혼자 힘으로 풀고 나올 수 있지만, 은아는 굳이 힘을 쓰지 않을 것이다. 태성과 척을 두고 싶지 않으니까.

은아와 태철은 정에 굶주린 사람들이다.

태철은 태성에게 애잔한 마음이 있었다. 미운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미운 정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태성을 봐주고 있었다.

그는 계속 참아 왔다. 태성과 은아의 구멍을 공유하는 것도, 태성이 자신의 집에 붙어 있는 것도. 은아가 태성을 놓지 못하고 애정을 주니, 다 참았다. 그러나 버겁다는 은아의 말을 듣고 태철은 약간 돌았다.

그래도 참았다. 은아가 태성을 잘 달래서 돌려보내는 것 같아서, 태성이 짝사랑을 포기하는 것 같아서. 자신도 그에게 의리가 남아 있어서, 하나의 해프닝으로 넘길 셈이었다. 그런데 최태성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태철은 진짜 돌아 버린다. 그 지독한 짝사랑, 아주 잔악하게 끊어 버릴 참이었다.

늦은 밤, 은아는 태철의 별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태철의 차가 먼저 와 있었다. 은아는 불이 켜진 별장을 보며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리고 저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가는 태성을 붙잡았다.

“이제라도 생각 바꾸십시오. 서울로 가십시오. 태철 형님 화는 제가 어떻게든 풀 테니…….”

“은아야, 내가 너 진짜 사랑한다? 그래서 비겁하게 도망은 가기가 싫어.”

“하, 정말…….”

결국, 은아는 태성을 설득하지 못하고 별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은아는 태성의 앞에 서서 잔뜩 긴장했다. 소파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태철은 은아를 보고 벌떡 일어나 품에 안았다.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혹시나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부성의 부하들과 싸움이 있었다 들었다. 맞고 다니는 아이는 아니지만, 걱정되었다. 태철은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냐?”

“네, 괜찮습니다.”

은아의 말에도 안심이 되지 않은 태철은 은아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리고 안 그래도 미쳐 있는 태철의 눈에 은아의 손목에 남은 결박흔이 보였다.

“이거 뭐냐?”

태철의 눈이 완전히 돌아 버렸다. 은아는 아무 말도 못 했고, 태철은 은아의 뒤에 있는 태성을 노려보았다.

“뭐야? 네 짓이야? 애, 약 먹인 것도 모자라서 손을 묶어!”

태철은 태성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쳤다. 쾅. 둔탁한 소리가 났고, 등을 타고 짜르르 울리는 고통에 태성은 눈을 찡그렸다.

“어, 내가 그랬는데? 은아랑 같이 도망가려고. 아무도 안 오는 섬에 들어가려고 그랬다. 왜?”

“…….”

태철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태철은 무표정한 낯으로 허리춤에서 칼을 꺼냈다. 날카롭게 반짝이는 날붙이에 은아의 눈이 커졌다. 칼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짜로 태성을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다. 은아는 금방이라도 칼을 찌를 듯이 태성의 목을 조르고 자세를 잡는 태철의 팔을 잡았다.

“형님! 안 됩니다!”

“네 입으로 말하잖았냐? 납치당했다고. 부성 형님이 그러던데.”

“형님…….”

“내 거를 건드리면 죽음이다. 잘 알지 않냐?”

“아… 형님…. 안 됩니다. 제발… 죽이시면 안 됩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태성이 형은 저에게…….”

태철은 태성의 멱살을 놓고, 은아를 진득하게 보았다.

“강은아.”

“네.”

오랜만에 듣는 몸을 섬뜩하게 만드는 낮은 소리. 은아는 주먹을 꽉 쥐고 태철을 올려다보았다.

“최태성이 죽는 게 싫냐?”

“네. 형님, 한 번만 봐주십시오. 태성이 형은 제가 잘 달래 보겠습니다.”

“저놈이 네가 달랜다고 말을 들을 놈이냐?”

“…….”

“강은아, 네가 찔러라.”

“네?”

“은아야, 형이 화가 많이 났다. 내가 찌를까?”

태철은 칼을 돌려 손잡이 부분이 은아에게 향하게 했다.

“칼, 잡아. 잡고 찔러라.”

“형님…….”

은아가 태철을 애절하게 불렀다. 그러나 태철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강인한 눈으로 은아를 내려다보았다.

“은아야, 내가 그랬지. 원하는 걸 얻으려면 수단 방법 가리지 말라고. 사람 해치는 거에 감정 넣지 말라고.”

“…….”

“기억나냐? 감방에서 네가 찌르려고 한 놈? 똑같은 거다. 찔러라.”

은아는 태철의 눈을 진득하게 보았다. 그 안에 있는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진하고 어두운 감정에 소름이 돋았다.

은아는 눈을 내리깔고 고민했다. 태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태철이 찌른다면, 급소에 정확하게 칼을 꽂아 넣을 것이다. 그럼, 진짜 목숨이 위험해진다. 차라리 제가 급소를 피해 찌른다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태성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민을 마친 은아는 태철이 건넨 칼을 잡고 태성의 앞에 섰다. 태성은 이 상황이 그저 웃겨 피식 웃었다.

“뭐 하냐? 너네? 진짜 나를 찌른다고? 미친놈들. 너네, 나 좋아하잖아? 강태철. 나 죽인다, 뭐 한다 해도 아직 나는 네 형제 아니냐?”

태성이 이죽거렸다. 태성은 자신에게 물렁한 그들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이렇게 무모한 짓을 벌였다. 이렇게 해도 바보 같은 강은아, 강태철은 봐줄 테니까.

“강은아, 네가 나를 찌를 수 있을 거 같아? 나 최태성인데? 네가 그렇게 염불을 외우던 어머니 같은 최태성. 그런데 그런 나를 찌른…….”

“죄송합니다.”

여유로운 태성의 말소리가 멈췄다. 은아는 태성의 어깨를 잡고 그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은아의 손이 덜덜 떨렸고, 태성은 경악에 찬 눈으로 은아를 보았다.

“너 진짜…….”

은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은아는 칼이 꽂힌 그대로 손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바로 뒤에 있던 태철과 부딪쳐 은아의 걸음이 멈췄다. 은아는 뒤를 돌아 간절하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태철을 올려다보았다. 태철은 태성 가까이 다가가, 배에 있는 칼을 살펴보았다. 태철이 비릿하게 웃었다.

“급소는 피했네. 깊게 찌른 것도 아니고.”

칼을 뽑자, 피가 팍하고 은아와 태철의 얼굴에 튀었다. 태성은 벽에 기대어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고, 은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막고 끅끅거렸다.

은아나 태성이나. 찌른 놈이나, 찔린 놈이나 충격에 빠져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제일 미친 것 같지만, 이성적인 인간은 태철뿐이었다.

태철은 제 옷으로 칼 손잡이에 묻은 지문을 닦고, 손잡이를 꽉 잡아 제 지문만 남겼다. 그리고 태성 앞으로 칼을 던졌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에 태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칼을 집어, 지문을 지웠다. 태철은 태성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식은땀이 나고 배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나왔다. 상처를 막은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급소는 피했어도, 과다 출혈로 죽을 판이었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피를 보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아는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꾹 눌러 지혈했다. 은아는 눈물을 흘리며 사과의 말을 뱉었다.

“형… 형… 죄송합니다. 형…….”

“어떻게… 119라도 불러 줘?”

태철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만한 얼굴로 태성을 내려다보았다.

“하… 씨발…….”

장난하나. 이 꼴로 어떻게 병원에 가. 분명 경찰 조사 들어갈 거고, 강태철이 잡혀가든 강은아가 잡히든 다 문제였다. 태성은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태철을 노려보았다.

“왜, 병원은 싫어? 죽으려고?”

“강…태철, 개…새끼.”

“나는 이제 너 버렸다.”

태철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 말에 태성은 눈물이 나왔다. 진짜 친구가 사라졌다. 갑자기 아쉬워졌고, 후회되었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이다.

“형님, 김 닥터, 김 닥터 불러 주면 안 됩니까?”

은아의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은아는 태철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김 닥터는 뒷골목 의사다. 주 고객은 조폭처럼 병원으로 가지 못하는 불법적인 인간들이다. 간절한 은아의 부탁에 태철은 자신을 따르던 옛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다. 내 별장으로 김 닥터 데리고 와라. 나 말고. 어, 칼에 찔렸다. 어, 그래. 최태성, 너 피, 무슨 형이냐?”

부하와 통화를 하던 태철은 전화기에서 귀를 떼고 태성에게 물었다. 바닥은 이미 피 웅덩이가 형성되고 있었다. 상처를 잘 봉합해도 과다 출혈로 죽을 거다. 수혈이 필요했다.

“하… 씨발…. B형.”

“어, B형이란다.”

태철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끙끙거리는 태성에게 무감하게 말했다.

“한 시간 걸린단다. 살고 싶으면, 그때까지 잘 참아 봐.”

“태성이 형… 참으십시오. 정신 잃으시면 안 됩니다.”

은아는 태성을 애절한 눈으로 보았다. 그 눈에 태성은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죽어서 혹여나 은아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었다. 사랑에 미쳤구나, 최태성. 미친 건 저 새끼도 마찬가지고. 태성은 오만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철을 올려다보았다.

완벽히 졌다. 반격도 못 하고 완패다. 절대 강태철을 이길 수가 없다. 강태철은 이때껏 봐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짝사랑을 완전히 뭉개 버렸다.

은아는 태성을 좋아하지만, 사랑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오직 강태철이다. 태철의 명령에 사람을 칼로 찌를 만큼.

태성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열심히 지혈하는 은아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제 진짜 짝사랑을 끝낼 때였다.

“네가… 찌르고… 하아… 네가 우냐?”

“흐윽… 흐읍! 태성이 혀엉…….”

“됐어. 이미 찔린 거 어쩔 거야? 하아… 그만… 울어. 듣기 싫으니까. 그리고, 나는… 너, 원망 안 해. 인과응보. 끝. 오케이?”

태성은 은아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주며 울었다.

‘보기 거북하게 애틋하네.’

태철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우는 태성과 은아를 삐딱하게 보았다. 그리고 은아를 일으켜 세워 그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짭짤한 눈물 맛이 느껴졌다.

“강은아, 최태성 때문에 울면 안 되지.”

집착과 질투로 태철의 눈이 번들거렸다. 은아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과 강압적인 말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태철은 다시 은아에게 거칠게 키스하며, 자신의 재킷을 벗은 후 은아의 재킷도 벗겼다. 그리고 은아의 바지 버클을 풀고,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겼다.

태성은 아래로 툭, 떨어진 은아의 옷과 태철의 손가락이 들어가는 은아의 구멍을 적나라하게 보았다. 내벽을 꾹꾹 누르며 넓히다가 손가락 두 개를 더 넣고 쑤셨다.

다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뭐 하는 짓인지.

짜증도 화도 나지 않았다. 온몸을 감싸는 것은 죽음의 공포보다 무력감이었다. 태성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태철의 손가락을 오물거리는 은아의 뽀얀 엉덩이를 보며 고통을 삭였다.

은아는 거칠지만 자신을 더욱더 흥분하게 만드는 혀를 느끼며 태철의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태철의 목에 팔을 두르고, 태철이 이끄는 대로 했다.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의사가 올 때까지 태성이 죽을까 봐 벌벌거리며 마음을 졸이고 싶지 않았다.

은아는 입안을 정신없게 휘젓는 태철의 혀와 구멍을 쑤시는 태철의 손가락에 온 감각을 곤두세웠다. 은아의 좆이 발기했고, 태철에게 몸과 마음을 온전히 의지했다.

“흐으, 하아, 흐읏!”

태철은 입술을 떼고 은아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마치 피를 낼 기세로 자근자근 씹고, 혀로 핥고, 입술로 강하게 빨아올렸다. 은아는 아픔을 느꼈다. 태철에게 더 매달려 자신의 좆을 태철의 사타구니에 비볐다. 프리컴으로 미끌미끌해서 잘도 비벼졌다. 은아는 온몸에서 일어나는 성적 자극에 집중했다.

“하응, 흐응…. 형… 더 쑤셔 줘…….”

태철은 은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앞으로 걸어갔다. 은아의 바람과는 다르게 구멍에서 손을 빼고, 태성이 기댄 벽에 은아를 밀어붙였다. 쾅. 은아의 등이 벽에 세게 부딪힘에도 태철은 신경 쓰지 않았다. 태성은 벽의 진동을 그대로 느끼고, 고개를 돌려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태철은 계속해서 은아의 어깨를 물고 빨았다. 태철의 혀가 닿을수록 어깨가 쓰리고 아려 왔다. 기어이 피를 냈다.

“아앗! 흐응…….”

은아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태철이 빠져나간 구멍이 아쉬워 벌렁거렸다. 태철은 입안을 감도는 피 맛을 느끼며 은아의 어깨에서 물러났다.

피가 나고 멍이 든 검붉은 색의 키스 마크. 태철은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아직 입안에 남은 은아의 피 맛을 다시고는 은아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구멍을 벌렸다. 그리고 제 좆을 은아의 구멍에 끼워 넣었다. 뻑뻑하게 들어가는데도 태철은 봐주지 않고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원하던 것이 드디어 들어왔다. 버거워도 좋다. 은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제 아래를 꿰뚫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좆이다. 강하고 거부할 수 없는, 제 주인을 그대로 닮은 좆. 눈물과 함께 기쁨이 몰려왔다.

“하으으응… 흐으… 하아….”

“강은아, 너는 내 거다.”

태철은 은아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유욕 가득한 말에 좆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은아는 정액을 싸질렀고, 둔부와 허리를 찌르르 울리는 아픔에도 웃음을 흘렸다.

“흐응! 흐아! 푸하하하하.”

태성은 은아의 머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태철은 웃는 은아의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그리고 은아의 오금에 양팔을 걸고 번쩍 들었다. 뒷걸음질을 쳐 태성의 앞에 다시 섰다.

허리를 움직여 은아의 구멍에 자신의 좆을 깊게 박아 넣었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 구멍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것에 은아는 태철을 목을 감싸 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흐응, 하앙, 흐응…. 흐읏… 더… 세게…….”

은아의 목소리가 바로 귀 안으로 들어왔다. 태철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흐익! 흐읏- 좋…아! 하읏, 하악!”

은아는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잊게 하는 쾌감에 이성을 잃고, 좋아 미치려 했다. 태성은 은아의 신음을 들으며 완전히 무너진 얼굴로 은아를 관찰했다.

태철에게 완전히 기댄 동그란 뒤통수, 하얀 목, 도드라진 척추뼈, 탐스러운 엉덩이, 태철의 좆을 꽉 무는 구멍, 움직일 때마다 모습을 비치는 붉은 내벽, 달랑거리는 발, 가는 발목, 눈물 나게 야한 신음. 은아의 모든 것에 태성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태철은 은아의 몸을 꽉 잡고 위아래로 움직이며 허리를 튕겼다. 크게 박아 들어오는 좆에 은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앙앙거리다가 스스로 몸을 들썩였다. 저에게 매달려 요란을 피우는 은아를 안정적으로 받치는 태철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몰려오는 쾌락에 태철과 은아의 움직임이 빨라졌고, 동시에 사정했다. 은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엉덩이에 힘을 주고 태철의 좆을 꽉 잡아 물었고, 은아의 허리를 잡은 태철의 손등 핏줄이 도드라졌다. 태성은 경련을 일으키는 은아의 등 근육과 잔뜩 힘이 들어간 엉덩이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은아의 내벽은 태철이 움직이지 못하게 그의 좆을 끈적하게 잡았지만, 분출한 정액으로 미끌미끌한 탓에 좆의 움직임을 막지는 못했다. 태철은 잠시 멈추다가 다시 움직였다. 은아의 구멍에는 오직 자신만 들어와야 한다는 듯이, 오직 자신의 좆에만 미쳐야 한다는 듯이 좆을 거세게 박아 넣었다.

“하응! 흐읏! 그만… 그만!”

절정을 맞이하고 바로 찾아오는 쾌감에 은아는 소리 높여 태철을 불렀지만, 태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철의 좆이 들락거릴 때마다 구멍에서 태철의 정액이 거품을 일으키며 밖으로 새어 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악! 히익! 힉!”

기어코 은아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태철은 은아의 뒤통수를 꽉 잡고 자세를 잡아 주었지만, 좆질을 하는 움직임은 여전히 사나웠다.

“히익! 흐학- 하악, 하흣!”

은아는 비명을 지르듯 크게 신음했고, 허리를 크게 튕기며 투명한 물을 쌌다. 그들의 아래로 소변과는 다른 묽은 액체가 떨어졌다. 태성은 계속해서 몸을 움찔움찔 떨며 진정하지 못하는 은아의 몸과 두 사람의 몸을 가로질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뚫어지게 보았다.

자신은 붉은 피로 가득한 구덩이에 빠져 있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하얗고 투명한 사정액을 싸지른다는 것이 못내 서러워졌다.

그들의 씹질은 태철이 세 번 사정하고 나서야, 은아가 기절하고 나서야 멈췄다. 태철은 은아의 구멍에서 좆을 뺐다. 많은 양의 정액이 잔뜩 벌어진 은아의 구멍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장관이 태성의 눈앞에 펼쳐졌다. 빠져나간 태철의 좆이 그리운지 뻐끔거리는 구멍이 태성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태철은 은아를 공주님 안기로 고쳐 안고, 승리자의 눈으로 태성을 꽤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태성은 고개를 위로 들어 거실 등을 보았다. 하얀빛에 두 눈이 멀 것 같았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태성의 눈이 감기고, 피에 절어 축축한 수건을 놓쳤다. 은아가 준 하얀 수건은 피로 물들어 붉은색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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