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인은 백과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일단 출퇴근은 거의 납치당하는 수준으로 목덜미를 잡혀 백의 차에 실리게 되었고, 일 때문에 밥도 삼시 세끼 같이 먹고 있었다.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내달려도 결국 백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리고 그 실패가 싫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강하게 자신을 붙잡고 버티는 백이 고마웠다. 심지어 백은 영인이 자신을 피하려고 하는 것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목석같고 바위 같은 백 앞에서 영인 혼자 물구나무서고 재주 넘으며 헛짓을 하는 셈이었다.
잠이라도 따로 자려는 것이 영인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백은 몇 번은 같이 자자고 권유하다가 재차 이어지는 거절을 곧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영인이 밤마다 백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룬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매일 12시 넘어서 퇴근했지만, 토요일은 그래도 8시면 퇴근했다.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백은 저녁 시간이 확보된 것이 적지 않게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하고 있었다.
“오늘도 진짜 혼자 잘 겁니까?”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백이 오른손을 영인의 허벅지에 얹었다. 손바닥이 위로 가게 한 채였다. 영인이 멀뚱멀뚱 그 손을 보고 있자 백이 ‘손잡아 줘요.’ 하고 작게 말하며 웃었다. 잠시 망설이던 영인이 자신의 큰 손으로 백의 손을 덮듯이 잡았다. 그리고 괜스레 머쓱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어두운 창밖만 응시했다. 백은 자신의 위에 있는 영인의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같이 자자.”
그리고 다시 아양 떨 듯 영인에게 말했다.
“하.”
영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거리를 둬야 하는데 도무지 백은 틈을 주지 않았다. 영인이 세 걸음 도망가면 네 걸음 뛰어와 어느새 영인의 옆에 섰다. 영인의 한숨을 백이 곤란함으로 받아들였다. 영인이 거절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알았어요. 내가 뭐 잡아먹나? 그럼 내일 영화 보러 갑시다.”
백은 협상을 할 줄 알았다. 상대가 거절할 것 같은 제안을 먼저 하고 그 뒤에 본론을 이야기했다. 영인이 두 번이나 거절하지는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자.”
백이 잡은 손을 다시 흔들며 재촉했다. 영인이 자신과 백의 손을 보았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때는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조금만 더 이 손을 잡고 싶었다.
“그래요.”
영인의 나직한 대답에 백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바쁜 일과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였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함께 있는 시간이 모두 데이트였다. 백은 요즘 일하는 것도 출근하는 것도 모두 즐거웠다. 모두 영인 덕분이었다.
“열 시 반까지 집 앞으로 갈게요. 영화 보고, 점심 먹으면 되겠다.”
마침 신호에 걸리자 브레이크를 밟은 백이 영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영인도 그런 백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요즘 잠 못 자죠?”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영인의 얼굴에 내려앉은 피로를 백이 단번에 읽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낌새는 느꼈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 영인의 불면은 더욱 심각해 보였다.
백이 맞잡은 손을 고쳐잡아 깍지를 꼈다. 영인이 어떻게 잡든 상관없이 백은 영인의 손을 놓치지 않을 것처럼 꽉 붙잡았다.
“잠이 안 와도 술이랑 약은 같이 먹지 말아요.”
오래전부터 해 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맨정신인 영인에게는 처음 건네는 말이었다. 다정한 듯 단호한 백의 말을 듣고 있자니 영인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이 염려와 관심은 모두 영인의 것이었다. 백이 사라져도 영원히 떠올리고 곱씹을 수 있는 온전한 영인의 것이었다.
영인이 고여 있던 단침을 꿀꺽 삼켰다. 백은 아까보다 가라앉은 얼굴로 다시 액셀을 밟았다. 영인을 혼자 보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백이 영인의 아파트 입구 앞에 차를 세웠다. 영인은 차에서 내려 문을 닫기 전 가만히 백을 응시했다. 아직 영인의 체온이 남아 있는 따뜻한 손을 들어 백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지쳐 보이는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잠 안 오면 전화해요. 와도 되고.”
영인도 겨우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고는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영인이 입구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백도 출발했다.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 불빛을 가르고 백의 차가 매끄럽게 바로 뒤에 있는 자신의 집을 향해 떠났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된 백은 쉬는 날도 6시가 좀 넘으면 알람이 없어도 잠에서 깼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누워서 하는 전신 스트레칭이었다. 깊게 숨을 쉬며 자는 동안 뭉친 몸 이곳저곳을 풀어 준 뒤 느끼는 개운함을 백은 좋아했다.
그리고 세수와 양치만 한 채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돈하고 가볍게 시리얼을 먹은 뒤 운동을 하러 가곤 했다. 예전에는 크로스핏이며 주짓수며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번갈아 가며 했지만, 이사 후로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일도 바빴고, 영인과도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체육관을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결국, 첫날 찾았던 헬스장만 간신히 꾸준히 다니고 있었다.
백이 운동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서며 핸드폰을 잠시 보았다. 영인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너무 이른 시간인 것을 자각하고는 참았다. 어차피 곧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참을 만했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러닝머신에서 40분을 달렸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백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향 때문에 뜨거운 커피를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운동할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빨아 봐도 이제 음료수는 빨리지 않았다. 공기 지나는 소리만 요란하게 쉭쉭 나고서야 백이 탈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영인에게 전화를 걸어 깨운 뒤 샤워를 하고 데리러 갈 예정이었다. 지쳤던 몸에 새로운 활기가 돌았다. 오늘은 뭘 먹여야 기력이 좀 돌까 하는 고민조차 즐거웠다.
영인은 진작부터 일어나 백을 만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있었다. 수면이 부족해 거칠어진 피부와 푹 꺼진 뺨을 손으로 몇 번 쓸었다.
노백은 왜 나를 좋아할까?
좋아는 할까?
거울 속 남자는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아주 낡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매서운 눈매도 큰 키도 모두 백의 곁에 있기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하다니. 영인은 차오르는 자기혐오를 무시하기 위해 찬물로 얼굴을 씻어 내렸다.
거울을 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욕실을 나왔다. 보지 않아도 눈에 가득할 탐욕과 욕심을 알고 있었다. 백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영인은 무작정 집을 나섰다. 아파트 건물 앞 벤치에 앉아 늘 백이 주차하는 자리를 보았다. 정확히 10시 30분이 되자 백의 차가 들어섰다. 창문이 열리고 쾌활한 백의 음성이 들렸다.
“왜 기다리고 있어요. 부르면 나오지.”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자 가슴이 떨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영인이 백의 차에 올랐다.
영화의 내용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어 스크린에 집중하는 백의 옆얼굴을 훔쳐보느라 바빴다. 우리가 언제 또 이렇게 영화를 함께 볼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 때마다 더욱 집착적으로 백을 훑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은 간간이 시선을 느낄 때마다 영인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라고 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백이 영인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귓속말했을 때 영인의 몸은 속절없이 굳어 버렸다.
“재미없어요?”
백의 낮은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영인이 살짝 어깨를 들어 백과 거리를 두고 고개를 저었다.
영화가 끝나자 백은 먹었던 음료수 컵을 챙겨 들고 앞장서서 출구로 갔다. 영인은 그런 백의 뒤를 쫓았다.
“점심은 뭐 먹을까요?”
밝은 곳으로 나오자마자 백이 뒤돌아보며 영인에게 물었다. 긴 복도를 따라 수많은 사람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질문을 던진 백은 쓰레기통에 일회용 컵을 분리해 넣었다. 그리고 산뜻하게 다시 영인을 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영인이 무엇인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린 찰나였다. 영인보다 먼저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책임님, 영화 보러 오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는 영인의 뒤에서 들려왔다. 영인과 마주 보고 있던 백이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을 발견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차장님, 일요일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백도 적지 않게 놀란 기색이었다. 영인은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얼었다. 예상하지 못한 만남의 상대는 태준이었다. 백이 상황에 비해 과도하게 경직된 영인을 달래듯 가볍게 영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느새 태준이 영인과 백의 바로 옆까지 왔다.
“아들이랑 영화 보러 왔습니다. 여긴 예매 안 해도 볼 수 있어서요.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하는 바람에.”
태준은 백에게 대답하고 흘낏 옆에 서 있는 영인을 보았다.
“강 과장님이랑 영화 보러 오신 겁니까?”
영인은 태준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사회적인 반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영인은 불안에 매몰되었다. 백이 영인을 대신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외로운 사람들끼리.”
태준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태준의 옆에 있는 아들에게로 백이 시선을 돌렸다.
“차장님 아드님? 몇 살이죠? 키 크네.”
태준이 자기 아들을 따뜻한 눈으로 보며 백에게 소개했다. 16살이라는 아들은 태준만큼이나 키가 컸다. 이내 태준은 영화 시간이 다 되었다며 백과 영인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영인은 태준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차갑게 굳은 얼굴로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백은 어떤 재촉도 하지 않고 그런 영인을 우선 기다려 주었다. 저 잘난 머리통에서 일어난 거대한 해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백과 둘이 있는 모습을 들킨 것만으로도 영인은 절망했다. 사라지고 싶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역시 불길한 예감이 들 때 빠르게 정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영인은 자신으로 인해 타인의 인생이 또 어그러지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다. 영인이 망칠 수 있는 삶은 오직 영인의 것뿐이었다. 백의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거리낄 것 없이 행동하는 백이 좋았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백을 경애했다. 그런 모든 모습들, 영인이 거슬리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한 그 모습들을 사실은 아꼈다.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싶었다. 조금의 티도 묻지 않은 생의 주인으로 남기를 바라였다. 그리고 영인은 백의 인생에 있어서 티끌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영인이 비관의 동굴에서 빠져나올 낌새가 보이지 않자 백이 입을 열었다.
“남자 둘이 영화 보는 게 뭐.”
영인이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백을 보았다. 정작 백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난 자주 보는데? 주승이랑도 작년에 한 10편은 봤어요.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하시나.”
백이 영인의 등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었다. 영인은 백이 미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따뜻하고 단단한 백의 손바닥이 마치 맨살에 닿은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백의 위로는 그럴싸했다. 믿고 싶을 정도로.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영인과 백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 영인이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마주한 것은 팝콘을 들고서 영인과 백을 보고 있던 태준이었다. 영인은 초조해졌다.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여기에서 불운의 고리를 끊어 내야만 했다. 그 일은 영인의 몫이었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었다.
차에 타서 백이 시동을 걸기 전 영인을 살폈다. 영인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았다. 창백하고 파리한 낯빛이었다.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고 붙잡은 손도 차게 식어 있었다. 영인의 손을 주무르며 백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백의 차분한 음성에도 영인은 안정을 되찾을 수 없었다. 영인이 백의 손을 물리치고 자신의 양손끼리 깍지를 꼈다. 할 말을 고심했다. 백은 급격하게 컨디션이 안 좋아진 듯한 영인을 데리고 일단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백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 손을 닦을 때까지 영인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강 과장님.”
백이 영인을 불렀다. 영인은 여전히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최소한의 피해로 이 관계를 끝내야 했다.
“그만하죠.”
그리고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백이 영문을 묻는 표정으로 영인을 보았다.
“뭘요?”
“알잖아요.”
“일단 들어와서 얘기합시다. 김 차장님 마주친 거 때문에 그래요? 불안해요?”
백이 영인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사람들 그렇게 생각보다 동성애 같은 거 의식하지 않아요. 지금 과민한 거 같은데.”
평소라면 백이 이끄는 대로 끌려 왔을 영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기는 힘과 버티는 힘의 대치 때문에 두 사람의 팔이 연결된 채 팽팽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백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영인에게 확신을 줄 말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영인이 자신을 붙든 백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울컥 치미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백이 자신 쪽으로 오지 않는 영인을 향해 움직였다. 영인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갔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영인의 입 근처에 자신의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들어와서 말해 봐요. 매번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거야.”
백의 달콤한 제안에 영인은 직감했다. 편안하게 이 관계를 끝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어설픈 협박이나 자학으로는 백을 쫓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영인은 자신이 없는 백의 미래를 떠올렸다. 좋은 반려자를 만나 백을 닮은 아이를 낳고 늙어 갈 그 찬란한 미래를 상상했다. 보지 않아도 백이 얼마나 자상하고 완벽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영인을 위로했다.
지금 자신이 남길 상처는 곧 아물 것이다. 백은 극복하고 금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영인은 백의 인생에서 작은 흉터조차 되지 않을 사건으로 남을 자신이 있었다.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잊혀야 했다.
“이제 할 만큼 했잖아요.”
영인이 가면을 뒤집어쓰고 입을 열었다. 백이 온도가 달라진 영인의 태도에 영인을 보았다. 이 커다란 변화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더는 책임님한테 볼 일 없어요. 피곤하기도 하고, 그냥 궁금해서 잠깐 장단 맞춰 본 겁니다.”
백은 영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을 듣자마자 실소를 터뜨렸다. 영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영인과 눈을 맞추어 왔다. 약간 화가 난 듯 보였지만 아직 여유를 완전히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야.”
백이 낮고 짧게 영인을 불렀다. 그 부름에 영인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 집의 주인이 어서 자신을 멸시하고 증오하고 때려서 내쫓기를 바라였다. 이제 끝이라는 확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너 나 좋아하잖아.”
그러나 백은 영인의 바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백의 따뜻한 손이 영인의 메마른 뺨을 쓰다듬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 사는 것도 힘든데 우리끼리는 좀 편하면 안 돼?”
곧 백이 영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백보다 키도 몸집도 더 큰 영인이 백의 품 안으로 안겼다. 백은 꽉 찬 그 느낌이 좋았다. 단단한 등과 커다란 몸이 자신에게 기대기를 원했다. 영인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고 백에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 버텼다. 백이 다정한 음성으로 영인의 귓가에 사랑의 말들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나는 우리가 당연히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리 사귀자고 고백을 안 해서 이러는 건가? 내가 확신을 못 주고 있어? 나는 요즘 네 생각뿐이야, 영인아.”
말을 마친 백이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영인을 배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를 향한 연정이라는 낯선 감정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데 급급해서 영인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의하지 않고 있었다. 영인이 혼란스러웠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이 아니라면 하지 않을 일들과 행동이었기에 당연히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치부한 것이 실수였다.
“미안해.”
백이 팔로 감싸고 있는 영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관계의 정의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사랑의 확신이 부족하다면 그 또한 질리도록 줄 수 있었다.
“나는 너를.”
“아니.”
백의 고백이 미처 나오기 전 영인의 낮은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아이처럼 백에게 안겨 있던 영인이 백의 팔을 뿌리치고 몸을 세웠다. 백은 우두커니 선 영인의 모습에서 거리감을 느꼈다.
영인은 이 달콤하고 한없이 기대고 싶은 백의 세상에 머무를 수 없었다. 떠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의 아픔은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책임님, 오해하셨어요. 내가 책임님이랑 같이 잔 건.”
백은 직감적으로 영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예감했다. 말은 뱉고 나면 그만이었다. 다음은 없었다.
“하지 마. 돌이킬 수 없는 말은 하지 마.”
백이 안타까운 눈으로 영인을 보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말해 주지 않으면 그 마음을 백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영인은 자꾸 멀리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궁금했어요. 여자랑만 자던 남자도 뒤로 느끼는지.”
영인이 건조하게 말을 내뱉었다. 어떤 격정이나 분노 혹은 슬픔은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어지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여기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백을 찌를 칼날 같은 말이 영인의 목구멍을 먼저 찢고 나와 백에게로 향했다. 백의 상처 받은 얼굴을 보았을 때 영인은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 말라니까.”
백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충격을 다스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어이가 없어서 의미 없는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백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장 감정 때문에 후회할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영인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쩐지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잘 느끼시더라고요.”
영인이 확인 사살을 하듯 백을 욕보였다. 시선은 바닥에 머무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백은 정신이 없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도 파악이 어려웠다. 태준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안해하는 거라고 여겼던 초반의 판단이 틀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더 해 봐요.”
백의 얼굴에 이제 웃음은 없었다. 여유도 없었다.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영인이 자신을 보지 않아도 백은 영인을 보았다. 영인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덕분에 저도 아주 좋았어요.”
평정심을 가장한 백의 입술이 살짝 비틀리는 것을 영인은 놓치지 않았다. 완벽한 남자에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뜨거워지는 눈가를 영인이 거칠게 손으로 문질렀다. 얼굴은 뜨거운데 손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고통스러운 과정은 곧 끝날 것이었다. 영인은 쉬지 않고 백에게 칼 같은 말을 던졌다. 말이 눈에 보였다면 그 말에는 영인의 살점과 피가 묻어 있을 것이었다.
“호모 새끼랑 떡 치는 게 괜찮으시다면… 계속 이어 가고 싶을 정도로.”
“한 번 싸지도 못한 게 말은 잘한다.”
백이 영인을 비웃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영인이 시선만 올려 백을 보았다. 백은 분노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너 자꾸 개소리 하지 마.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말을 마친 백이 이를 악물었다. 백의 눈 안에는 불과 물이 모두 있었다.
“그때 빨아 주기로 한 거 지금 하죠.”
영인이 백의 어깨를 잡고 힘주어 눌렀다. 영인에게 잡힌 어깨가 아파지고서야 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깨 위 영인의 손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신호 같았다. 백이 입을 열었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겨우겨우 나왔다.
“내가 너를 받아 주고, 받아 주고, 받아 주면 말이야. 너도 나를 언젠간 받아 주기는 하나?”
영인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백을 보는 눈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백은 영인의 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백이 마지막으로 영인을 눈에 담았다. 영인이 찢은 가슴에서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흘러나간 탓에 백에게도 남은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있잖아, 나도 그렇게 말하면 상처 받아.”
음성의 끝이 떨렸다. 영인이 아프도록 주먹을 세게 쥐었다.
“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백이 투항했다. 영인의 손이 백의 몸에서 떨어졌다. 작별 인사도 없이 영인은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무거운 철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까지 들리고서야 백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영인이 헤집고 간 속이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삶이 무너진 것처럼 막막하고 슬펐다.
영인은 백을 마주하던 모습 그대로 비상구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계적인 걸음이었지만 점점 속도가 붙었다. 1층에 가까워질수록 달리는 모습에 가까워졌다. 종내에는 두세 계단씩 한 번에 펄쩍펄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비로소 밖으로 나왔을 때 크게 숨을 쉬었다. 물에 빠져 죽어 가던 사람이 뭍으로 나온 것처럼 다급하고 거칠게 숨을 마시고 뱉었다.
절로 허억거리는 소리가 났다. 채 깨닫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흘러 턱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영인은 얼마나 수없이 또 자신이 전하지 못할 용서를 빌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 *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자마자 백이 화면을 꺼 버렸다. 영인이 그렇게 떠난 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았다. 언제나 명쾌했던 백의 사고가 멈춰 버렸다. 백은 지금 자신이 놓인 상황이 아직 채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폭탄처럼 떨어진 말들에 아프다가도 납득이 가지 않아 설명이 필요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인데 어제의 일은 결과만 있을 뿐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원인을 아는 사람은 백을 버리고 떠났고 백만이 산산이 조각난 마음들을 모아 수습하고 있었다.
관계의 발각이 두려워서 한 일이라기에는 너무 가혹했다. 이렇게까지 망칠 필요가 없었다. 영인의 마음은 오리무중이었다. 어쩌면 그가 했던 말들이 모두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백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백의 마음이 어떻든 시간은 흘렀고 아침은 다시 찾아왔다. 회사로 가야 했다. 백이 욕실로 가다 문득 거실 창을 보았다. 영인도 일어났을 시간이었다. 토요일까지만 해도 약속 없이 당연하게 함께 만나 출근하던 사이였다. 백이 걸음을 돌려 거실 창의 커튼을 모조리 쳤다. 밖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영인도 백과 다르지 않았다.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그렇지만 영인은 수면제와 술 둘 중 무엇도 먹지 않았다. 백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 내겠다는 각오로 일을 저질러 놓고는 백이 남긴 말 한마디를 차마 어기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영인은 습관처럼 백과 만나던 시간에 준비를 마치고 출근했다. 달라진 점은 늘 영인을 기다리던 백의 차가 아니라 택시를 탔다는 것뿐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설렘과 기대로 열었던 문 앞에서 영인이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렇게라도 백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역시 불행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영인이 문고리를 돌렸다.
백은 언제나처럼 자리에 앉아 영인을 맞이했다. 그러나 블라인드도 내려와 있고, 사무실 안 조명도 켜지 않아 은은한 어둠 속에 백이 존재한다는 점만은 평소 같지 않았다.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백은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은 사람처럼 영인을 보았다. 그저 미움받고 싶은 영인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인사를 생략하고 백이 영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책상에 양 팔꿈치를 얹고 가볍게 깍지를 낀 채였다. 백답지 않게 우울한 얼굴이었다.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예요? 아, 과장님 기준으로는 사귄 것도 아니었으니까 헤어지는 것도 아닌가?”
말을 마친 백이 힘없이 웃었다. 그런 백의 모습이 영인에게는 아주 탐스럽게 보였다. 사흘, 나흘 굶은 뒤 찾아낸 음식처럼 유혹적이었다. 영인은 당장에라도 무릎 꿇고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인내했다.
“잠자리 상대라면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자리에도 앉지 못하고 영인이 대답했다. 백이 머리가 아픈지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쉰 한숨보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쉰 한숨이 더 많은 듯했다. 참을 수 없이 답답했다.
“내가 강영인을 좋아한다는 게 강영인이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백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진 모멸을 어떻게든 자신의 방법으로 소화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드디어 영인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영인을 사랑하고 곁에 있고 싶었지만, 자신을 먼저 보호하는 게 맞았다. 백의 의사 결정 시스템의 결론은 그러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백이 다시 영인과 마주 섰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항복한 것은 백이었다. 백은 순순히 영인의 결론을 인정했다. 자신에게 영인은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영인에게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꼬이고 어긋난 타인을 끌어안고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은 그런 일을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인생도 간신히 살아가는 주제에 너무 큰 꿈을 꾼 것이었다.
둘 중 누구 얼굴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둘 다 너절하고 엉망인 상태인 것을 보며 백이 작게 실소했다. 시간을 확인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촌스러운 사람이라서 마음 따로 몸 따로 그런 건 못 해요. 강영인 과장님, 배설이 필요하면 다른 상대를 찾아보세요.”
자신이 촌스러운 사람이라던 백은 누구보다 세련되게 영인을 쳐냈다. 영인은 먼저 이 관계를 망친 것이 자신임을 알면서도 어쩐지 버림 받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말을 마친 백은 어느새 처음 봤을 때와 변함이 없는 친절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가볍게 하는 눈인사를 마지막으로 매정하게 프로젝트 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둡고 좁은 회의실에 홀로 남은 이는 영인이었다. 영인이 바라 마지않던 결말이었다. 영인은 아주 오랜만에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어 냈다. 기뻐야 하는데 기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만족스럽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영인의 자학 같은 난도질에 둘의 관계가 끝나고도 시간은 흘렀고 여러 날이 지났다. 백은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간에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라는 확신이 생기기 전에는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선택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지난 일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필연적으로 후회를 하거나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인생의 낭비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백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백이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백은 처음으로 풍랑을 맞은 나룻배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침몰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영인이 내뱉은 말들 때문에 상처 받았다. 하지만 그 상처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영인과 예전처럼 지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립고 서러웠다. 나이를 먹어서 마음에도 영혼에도 굳은살이 제법 박였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백은 뒤돌아보지만 않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멍청하게 멈춰서 간신히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요즘 바쁘다며. 오픈이 코앞인데 왜 이렇게 회식마다 끼는 거야?”
영태가 백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넌지시 물었다. 입사 동기인 영태와 백은 햇수로 10년째였다. 영태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둘이 몰려다니며 술도 먹고 밥도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영태는 백이 사회인으로, 남자로 여물어 가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한 산증인이었다.
그런 백이 근래 들어 이상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파트가 달랐지만, 영태 파트 회식이 있을 때는 으레 백에게도 오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일이 많을 때면 여지없이 거절하기에 이번에도 퇴짜를 예상하고 한 초대였는데 백이 대번에 합류했다. 이번 회식뿐만이 아니었다. 요새 노백을 부르면 어디든 나타난다는 말이 사무실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백은 묵묵부답이었다. 팔짱을 끼고 술잔만 응시했다. 영태는 그 모습만으로도 백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왜 그러는데?”
영태의 추궁에 백이 희미하게 미소 짓고 고개를 저었다. 영태가 채워 준 술잔을 들고 잠시 보던 백이 술을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영태도 그 모습에 자신의 잔을 비웠다.
“애는 잘 크냐?”
백이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영태는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대번에 히죽 웃으며 핸드폰에서 갤러리를 열었다. 온통 아이의 사진뿐이었다.
“이제 잡고 선다. 신기해.”
작은 화면 속의 아이에게는 희로애락이 다양하게 담겨 있었다. 얼굴의 아래쪽은 영태를 닮았고 위쪽은 영태의 아내를 닮은 것이 신기했다.
“많이 컸네.”
백의 손가락이 무심하게 화면을 옆으로 밀며 말했다. 손끝에 닿은 아이의 사진이 그럴 때마다 바뀌었다. 가끔가다 튀어나오는 사진 속 영태와 영태의 아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해 보였다. 백은 쓸쓸해졌다.
“소개팅해 줄까? 우리 와이프 친구들 중에 아직 미혼 많아.”
영태가 백의 얼굴에 드리운 감정을 읽고 엉뚱한 제안을 했다. 백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영태를 보았다.
“너도 언제까지 혼자 이렇게 살 건데?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지.”
“요즘 나한테 결혼하라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 거야.”
백이 빈 잔을 스스로 채우며 말했다.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지겨웠다. 혼자여서 아쉬운 것은 없었다. 옆자리에 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지금 원하는 것은 오직 영인뿐이었다. 원한다고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니까 문제였다.
“외로워 보여.”
영태가 백이 쥐고 있는 술병에 손을 살짝 대고 함께 기울여 주며 말했다. 백이 술을 마시기 전 술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소주 위에 영인의 얼굴이 달처럼 떠올랐다. 외로움을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영인은 잘 살아 가고 있었다.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삶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 백이 영인에게 마법의 주문을 걸어 둔 듯했다. 영인은 한때 곁에 있었던 백이 입력한 명령어대로 삶을 이어 갔다. 고장 나기 전까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기계같았다. 자의라고는 없었다.
평생 삶을 영위하며 백을 추억할 것이 분명했다. 어질러진 집을 치우며, 설거지를 하며, 이발하며 영인은 백을 떠올리리라. 시간이 흐르면 백은 영인을 잊겠지만, 영인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겨울 눈밭 위에 있던 벌거숭이에게 잠시 머물렀던 그 따스한 품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백이 영인에게 남겨 준 것은 온기였다. 반대로 영인은 백에게 상처와 오욕뿐이 남겨 준 것이 없었다. 영인은 자신이 얼마나 치사한 사람인지 알아차린 뒤 자조했다. 이것은 비겁한 게임이었다.
백은 프로젝트 룸과 자신의 팀을 유동적으로 오가며 일했다. 영인을 피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생명력 넘치던 모습은 점점 빛이 바래고 있었다. 영인은 애가 탔다.
“저는 그럼 오늘은 팀 업무 보고 거기서 퇴근하겠습니다. 이제 얼마 안남았으니까 꼼꼼하게 테스트 좀 부탁드립니다.”
여섯 시가 가까워진 시간, 백이 짐을 챙기며 말했다. 수림이 그런 백을 걱정스럽게 보다가 인사를 건넸다. 백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수림이 언성을 낮춰 주성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주성 씨, 요즘 백 책임님 무슨 일 있어요?”
“모르겠어요. 술도 엄청 많이 드시고, 술자리도 자주 참석하시고. 뭔가 이상해지신 거 같긴 해요.”
주성이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영인은 아닌 척하며 주성이 내뱉는 말들에서 조금이라도 백의 소식을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술 많이 드시냐면요… 어느 순간 사라지세요. 그거 책임님 엄청 옛날 술버릇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나이 먹고 안 그러더니 또 도졌다고 박영태 책임님이 걱정 많이 하세요. 집에 간다고는 하는데 갑자기 없어지시니까 남은 사람들은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주성은 말을 마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우상 같은 백의 약한 모습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수림도 몇 년간 보아 온 백답지 않은 모습에 염려가 들었다. 친한 듯하면서도 사실 사생활은 거의 모르니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강영인, 뭐 아는 거 없어?”
수림이 영인을 보며 질문을 툭 던졌다. 영인이 순간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태준을 보았다. 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금 이 대화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태준의 손가락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인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여전히 태준의 눈치를 살피면서.
“내가 뭐. 나야 모르지.”
“둘이 요즘 친했잖아.”
수림의 말에 영인이 인상을 썼다. 수림은 자신이 한 말이 기분 나쁜 말도 아닌데 저런 반응을 하는 영인을 보며 혀를 찼다. 영인은 초조하게 할 말을 골랐다. 수림에게 하는 대답이지만 태준이 듣기를 바라였다.
“친하긴 무슨.”
“너랑 나보다 노빠꾸 책임이랑 네가 더 친구 같아 보였어. 알아?”
“나는 노백 책임이랑 친구 같은 거 할 생각 없는데.”
영인이 다시 개발하는 척하며 최대한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구문을 떠오르는 대로 적고 있었다.
“또 뭐 말을 그렇게 하냐.”
수림이 영인의 방어적인 태도에 혀를 차며 자신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영인이 정이 없는 편인 것을 알면서도 막상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친구인 자신도 거리감이 느껴지고는 했다. 영인의 대답에도 태준은 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오히려 그런 영인을 못마땅하게 보는 쪽은 주성이었다.
백의 변화가 영인을 슬프게 했다. 자기 때문이 아닐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영인은 백의 사랑을 가늠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동정과 연민이라고 생각했다. 백과 영인의 시간은 백의 마음 약한 구석을 자신이 노리고 일부러 파고들었기에 발생한 사고였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백을 모욕하고 상처 준 자신의 행동은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믿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호의가 있었다. 이것이 영인이 백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애정이자 유일한 호의였다. 더는 백을 욕심내서는 안됐다.
* * *
백은 거창한 좌우명이나 삶의 목표가 있지는 않았다. 대신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말하는 규칙들이 몇 개 있었는데 팀원들은 그것을 백의 3계명이라고 불렀다. 잘 먹는다. 잘 잔다. 잘한다. 아주 간단한 원칙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2주가 넘게 그 원칙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먹고 자는 데 문제가 생겼다. 식욕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고,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것은 백이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사람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없었다. 백은 불면의 밤을 보내며 영인이 어째서 그렇게 자기 파괴적으로 굴었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나날이 지속된다면 백도 영인처럼 술과 약을 털어 넣고 기절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9월이 되었다. 낮에는 볕이 여름보다 뜨겁고 더웠지만 해가 지면 조금씩 선선한 가을바람이 그 존재를 드러내곤 했다. 코앞에 다가온 오픈에 백은 몸에 밴 업무 습관대로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퀭한 눈과 마른 몸을 보며 사람들이 혀 차는 소리를 뒤로하고서.
이렇게 되자 백은 정말로 영인이 원망스러웠다. 영인은 이어지는 격무에도 크게 지친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컨디션에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 백뿐인 듯했다. 함께 걷다 찢어져 따로 걷는데 백의 앞에만 여전히 가시밭길이 이어졌다.
그저 영인 하나 빠진 원래의 삶인데 이토록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번도 이별의 후유증이 이렇게 컸던 적은 없었다. 누구보다 백이 느끼고 있었다. 백을 이루던 근간이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것은 백의 몫이었다. 백은 백의 몫의 고통을, 영인은 영인의 몫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제 둘은 서로의 어려움과 고난을 나눌 사이가 아니었다. 원망의 끝은 결국 다행스러움이었다. 그래, 너라도 괜찮으면 됐다. 생각해 보면 영인에게 차인 것은 자신이니 영인이 힘들 이유도 없었다. 그랬다.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백이 자신도 모르게 영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인은 그림처럼 앉아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각이 진 어깨도, 두툼한 상체도 발달한 가슴 근육이며 두꺼운 목도 모두 그대로였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은 심드렁해 보이기도 했고 진지해 보이기도 했다. 꾹 다문 아랫입술 아래로 그늘이 진 것도 영인다웠다.
도무지 긴장을 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항상 인상을 쓰고 있어서인지 미간에는 살짝 주름이 가 있었다. 턱 근육에 힘을 주고 있어서 턱부터 관자놀이까지 모두 경직되어 보였다.
백이 알던 영인이었다. 한 번쯤 확 풀어졌으면, 자신과라도 편안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돌봐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은 애석하게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관계는 끝났으나 감정은 끝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뒤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멀어지지도 못하는 한심한 꼴이었다.
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보고 있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운 것은 성윤을 보내고서였다. 그런데 지금 영인을 보며 눈물이라니.
그렇지만 백은 알고 있었다. 켜켜이 시간이 쌓이면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아픔도 곧 무뎌지리라는 것을. 상실의 슬픔도 과거가 되리라는 것을. 그리움조차 희미해진다는 것을. 그러니 백은 절대로 뒤돌아설 생각이 없었다. 견뎌 나가야 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프로젝트 룸은 고요했다. 백과 주성은 파트 석식이 있다고 퇴근한 지 오래였고, 백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준도 퇴근했다. 둘만 남게 되자 수림이 모니터를 응시한 채로 영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대충 마무리하고 저녁 나가서 먹자. 내가 너한테 부탁할 것도 있고.”
무슨 아쉬운 소리를 할 셈인지 말을 마친 수림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 2주 뒤면 오픈이었다. 영인이 오늘 해야 할 남은 일을 헤아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는 일찍 퇴근해도 괜찮을 듯했다. 내일 조금 더 속도를 낸다면 커버할 수 있을 양이었다.
수림은 영인을 영인의 집 앞에 있는 소 곱창집으로 데려왔다. 동그란 테이블에 앉으며 영인이 입을 열었다.
“메뉴가 좀 세다. 부탁이 뭔지부터 말해 봐.”
“사장님! 여기 모둠으로 3인분이랑 소주 좀 주세요.”
수림이 우선 메뉴부터 시켰다. 계약서 내용은 보여 주지도 않고 도장부터 찍게 할 셈이었다.
“요즘 영 술은 안 마신다?”
수림이 혼자 소주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영인은 수림이 따라 준 첫 잔을 아직도 비우지 않은 채였다. 소 곱창은 진작 다 사라졌고 직원이 밥을 볶아 주고 떠난 참이었다.
“줄여 보려고.”
“아주 긍정적인 변화야. 칭찬해.”
미소 짓는 수림의 얼굴이 붉었다.
“이제 다 먹었으니까 부탁이 뭔지 말해.”
영인은 크게 높낮이가 없는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수림이 영인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기도하는 손 모양을 했다.
“영인아, 사실 내가 아직 프로젝트 사람들한텐 말을 못 했는데… 뭐 백 책임이랑 주성 씬 알 수도 있겠다. 나 급하게 결혼하게 됐어. 아버지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셔서 당장 식 올리라고 성화시지 뭐야.”
영인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란 표정으로 수림을 보았다. 수림에게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 시기에 결혼이라니 너무 뜬금없었다.
“식도 그래서 창원에서 할 거고, 준비도 틈틈이 하고 있었거든. 어차피 창원은 식 올릴 식장이 몇 개 되지도 않아. 다 패키지로 하고. 덕분에 일 많이 줄였지, 뭐.”
오랜 병환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 때문에 결혼식은 고향에서 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수림이 물을 마셔서 목을 축이고서는 말을 이어 했다.
“근데! 그래도 하루는 내려가긴 해야겠더라고. 최대한 오픈하고 가는 거로 하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네. 내가 무조건 내 개발은 완료할 거거든? 근데 테스트가 문제야. 좀 미비한 부분만 조금 봐주지 않겠어? 친구?”
영인이 자신의 눈썹을 꾹꾹 지압하며 고개를 숙였다. 수림은 맞잡은 두 손을 흔들며 애절하게 영인을 쳐다보았다. 거절은 어려운 일이었다.
“회도 사 줄게. 소고기도 사 줄게. 다음엔 진짜 날로 먹는 프로젝트로 널 데려갈게.”
수림이 끝도 없이 미끼를 던지고 있었다. 영인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수림은 안도한 듯 다시 소주잔을 채웠다.
“나 은혜 잊고 그런 사람 아니다.”
“알겠어. 결혼 준비나 잘해. 축하한다.”
영인의 축하 인사에 수림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미소의 끝에 어떤 떫음이 걸려 있었다. 영인이 진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야만 시원스레 끝까지 개운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림이 호기롭게 계산을 하고 영인과 식당 밖으로 나온 것까지는 굉장히 좋았다. 모두 수림의 계획대로였다. 문제는 나와서 마주한 사람들이었다. 백과 주성의 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수림을 발견해 버렸다.
수림은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작게 욕을 내뱉었다. 무사히 귀가하는 미션만 남았는데 녹록지 않아 보였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수림에게 다가와 아는 척했다.
“림수 책임님! 어쩐 일이세요?”
말을 마친 남자가 흘낏 영인을 보았다. 대충 상황을 파악했는지 웃으며 수림을 끌어들였다.
“우리 노래방 갈 건데 같이 가요. 프로젝트 빡세신데 스트레스 푸셔야죠.”
스트레스는 일이 아니라 너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림은 참았다. 이를 악물고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는데 이미 취한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인간 임수림은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영화 시스템즈 임수림 책임은 그렇지 못했다.
처지가 그랬다. 당장 11월이면 인사 평가가 있었고 거기에는 지금 이 사람들의 평가도 하나의 항목으로 적용되었다. 을의 숙명이었다. 수림이 눈을 질끈 감고 아하하 웃으며 앞장서는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협박하듯 눈을 부라리면서 영인을 보았다. 혼자서 탈출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영인은 피로했다. 이미 얻어먹은 밥에 대한 숙제를 받았는데 여기서 수림 때문에 취미 없는 노래방에 가야 한다니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고개를 돌려 영인이 쫓아오는지 확인하는 수림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영인이 느릿느릿 노래방을 향해 걷는 것을 보고서야 수림이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았다.
그리고 들어선 노래방 룸 안에는 백이 있었다. 영인의 인생에 지뢰이자 선물인 사람이었다. 밟으면 터질 감정을 숨기기 위해 영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정작 백은 영인과 수림이 들어선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수림은 전에 없이 취한 백을 보며 놀랐는지 작게 ‘어머나’라고 외쳤다.
백의 상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것인지 얼굴에서는 취기가 섞인 헤픈 미소가 쉼 없이 새어 나왔다. 영인의 가슴이 저려 왔다.
노래방 기계에서는 쿨의 ‘슬퍼지려 하기 전에’의 간주가 나오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열창할 준비를 했고, 바로 옆에서 주성과 영태가 탬버린을 들고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혼란하고 시끄러운 공간에서 영인은 백의 숨소리를 찾고 있었다. 그 조그만 흔적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노래의 후렴이 나오자 노래방 안에 있는 모두가 너 나 할 것 없이 노래를 불렀다. 마이크를 든 남자는 더 흥이 올랐는지 이상한 추임새까지 넣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백도 비식비식 웃어가며, 힘없이 고개를 흔들면서 분위기를 맞추었다. 영인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그런 백을 아무도 모르게 훔쳐보았다. 달콤했다.
백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백도 다른 사람들처럼 익숙한 가사를 읊조리는 듯했다. 영인이 홀린 듯이 소란 속에서 백의 음성을 듣기 위해 집중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래, 나 이젠 널 떠나보내 줄게. 더 이상 슬퍼지려 하기 전에.’
자막을 보며 생각 없이 가사를 따라부르던 백이 문득 무엇인가 깨달은 사람처럼 모든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던 영인과 눈이 마주쳤다. 군중 속에서 생긴 둘만의 시간이었다. 몹시 찰나였다.
백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영인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리가 없어서 앉지도 못한 상태였다. 양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백의 시선도 그런 영인에게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백이 자신의 구두코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플 정도로 세게 탬버린을 손바닥에 두드려 대던 주성이 바로 백에게 다가왔다.
“책임님, 어디 가세요?”
백을 향한 말에 걱정스러움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백이 실실 웃으며 그런 주성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었다.
“화장실.”
주성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백은 듣지 않고 휘적휘적 긴 다리를 움직여서 걸음을 옮겼다. 백이 지나가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수림은 금세 백이 앉았던 상석으로 끌려와 강제로 노래방 책을 떠안고 선곡을 강요받았다. 이를 갈면서 속으로는 이직을 다짐했다. 갑의 회사로 가고야 말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주성은 당장에라도 그런 백을 쫓아갈 기세였다. 하지만 바로 영태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너는 여기서 임 책임님 챙겨야지. 불편하실 텐데.”
영태의 말에 주성은 힘없이 수림의 옆에 서서 문을 열고 밖으로 떠나가는 백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백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뒤를 따르는 영인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수림은 두꺼운 책의 책장을 앞뒤로 넘기며 이 상황을 타개할 묘수를 고민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배신당한 것을 알아차렸다.
시끄러운 방을 나선 백은 카운터 옆에 위치한 화장실이 아니라 맞은편 계단으로 향했다. 영인이 급하게 따라 나왔지만 보이는 건 계단을 오르는 백의 발뿐이었다. 영인은 잠시 멈춰 서서 백이 사라진 계단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에 두 계단씩 훌쩍 뛰어 올라온 지상에는 백이 영인을 기다리듯 아래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영인을 보는 백의 눈이 차가웠다. 낯선 얼굴이었다. 영인은 벌을 받는 아이처럼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그런 백 앞에 섰다.
“갈 길 가요.”
백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영인을 미리 거절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휘청휘청 위태로운 걸음이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백을 영인이 잡아 주려고 팔을 뻗었다가 닿기 전에 서둘러 내렸다. 감히 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영인은 백을 따라 걸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인도 집에 가는 것이었다. 백을 쫓는 게 아니었다. 백은 영인이 자신의 뒤에서 걷는 것을 알아채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집으로 향할 뿐이었다.
백의 등이 저렇게 작았던가. 영인은 몇 걸음 뒤에서 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번도 작거나 약해 보인 적 없었던 백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험하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두 사람은 외로운 귀가를 함께하고 있었다. 영인은 마치 백의 그림자처럼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 않고 백을 뒤쫓았다. 백이 걸음을 내디디면 영인도 내디뎠다. 백이 멈추면 영인도 멈추었다. 서로를 의식하면서 무시했다. 무시하면서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옆에 설 줄 모르는 영인과 지금 뒤돌아볼 마음이 없는 백의 완벽한 동행이었다. 앞과 뒤, 일직선으로 선 둘의 모습도 옆에서 보면 나란해 보였다.
맑고 어두운 가을밤만이 그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갈림길이 나타났다. 직진하면 백의 집이었고 왼쪽으로 꺾으면 영인의 집이었다. 영인은 선택해야만 했다. 백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영인이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망설임 없이 직진했다.
그리고 영인은 아까보다 멀어진 간격을 줄이기 위해 보폭을 더 크게 해 걸음을 서둘렀다. 머리로는 이제 집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백을 외면할 수 없었다. 걱정되어 혼자 둘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뻔히 보이는 자기기만이었다. 백을 위한다면 지금 영인은 자신의 집으로 가야 맞았다. 그렇지만 결국 백의 뒤를 쫓고 있었다. 잠시 마주하니 말할 수 없이 그리워졌다. 백은 지독한 갈증 끝에 맞이한 이슬 같았다. 참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기어코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올라탄 영인을 보며 백이 인상을 썼다. 양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 상대방을 낮잡고 비웃는 표정이 되었다. 영인의 기분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영인은 영인대로 말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꽉 닫힌 승강기 문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바닥에는 나란히 선 네 개의 발, 공기 중에는 어색한 침묵뿐이었다. 16층에 다다르자 문이 열렸고 백이 먼저 내렸다. 백은 현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영인이 한 템포 늦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와서 백의 뒤에 섰다. 한 걸음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걸음.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던 백이 손가락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너무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백을 마주한 영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른침을 삼켰다. 백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얼굴을 정신없이 살폈다. 상한 곳은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찾느라 백의 표정이 바뀌는 것도 알지 못했다.
처음 백은 무표정하게 영인을 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불쌍할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너는 나랑 뭐가 하고 싶은 거야?”
백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아직 추스르지 못한 감정들이,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영인이 그제야 자신이 넋을 놓고 백을 감상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아직도 허기졌다. 부족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영인의 자책이 시작되었다.
백은 이제 화가 났다. 술기운마저 그런 감정을 부채질해 댔다. 멋대로 밀어내고, 멋대로 쫓아와서 자기가 쑤시고 찢은 상처를 걱정하듯 보는 영인을 보자니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길이 이는 듯했다.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나아질 것들인데 왜 또 헤집고 가려는 것인지. 백이 메마르고 건조한 음성으로 영인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가라고.”
영인은 이제 정말 가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백이 먼저 들어가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영인의 모습에서 백은 그날과는 다른 치욕을 느꼈다. 백이 손을 번쩍 들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구를 때려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영인의 뺨이라도 한 대 갈겨야 가라앉을 감정 같았다.
저 아무렇지 않은 얼굴, 무엇도 드러내지 않는 표정, 자신을 밀어내면서도 갈구하는 눈.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영인은 백의 올라간 손을 보자마자 곧 떨어질 매를 기다렸다. 익숙한 일이었다.
‘너는 정말 사람 신경을 긁어.’
진은 종종 영인을 그렇게 평가했다. 그런 이야기의 끝은 보통 따귀나 주먹질 뭐 그런 것들이었다. 진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였다. 영인은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데 재능이 있는 편이라고 했다. 그러니 백의 이런 행동도 당연했다.
눈을 감고 영인이 고개를 살짝 앞으로 뺐다. 마치 때리려는 백을 배려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 이거 봐라.”
한참을 기다렸는데 날아온 것은 날카로운 통증이 아닌 백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였다. 영인이 살짝 눈을 뜨자 백이 기가 찬다는 듯 영인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이었다.
백의 손바닥은 영인의 뺨을 치지 않았다. 백은 영인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자신이 타인을 때리려고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남자는 또 뭘 하는 짓인지.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삶인지, 어떻게 생겨 먹은 정신머리인지. 영원히 영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백이 엄지와 검지로 영인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어린아이의 보드랍고 여린 살을 잡는 손길과 다르지 않았다.
“때리면 맞으려고요?”
백이 영인을 똑바로 보며 분명하게 말했다.
“누가 때리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하고 손목을 잡든 부러뜨리든 방어를 해야지 뺨을 내주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영인을 보면 답답했다. 이 상황에서조차 영인이 안쓰러웠다. 백은 이런 자신의 처지가 어처구니가 없고 우스웠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나. 그래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해 주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백은 그대로 뒤돌아 빠르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영인에게 어떤 인사도 남기지 않고 문을 닫았다.
영인은 문 앞에 멍청히 서서 백이 잡았던 뺨을 손바닥으로 한참 매만졌다. 냉정하게 닫힌 문을 보고서야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지킨 것이 무엇인지도 잊지 않았다.
복도를 비추던 간접 조명도 꺼졌다. 영인은 차갑고 어두워진 복도에서도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다 백이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고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정말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집에 온 영인은 그 언젠가 백과 마주 보았던 작은 방으로 곧장 걸어갔다. 백의 집은 오늘도 가려져 있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어쩐 일인지 오늘은 커튼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백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밝은 조명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영인은 딱딱한 맨바닥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아닌 그 빛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루한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엉덩이가 아파져 오고서야 시간이 한참 흘렀음을 인지했다. 백이 집에 들어간 지가 오래인데 거실의 조명은 그대로였다. 많이 취해서 바로 잠든 것이리라 생각하면서도 영인은 급격하게 몰려오는 불안을 다스리지 못했다.
일단 한번 불안이 신경을 자극하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뇌보다 먼저 심장이 쿵쿵거리며 마음대로 날뛰었고, 손발이 차게 식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만약에 백이 쓰러진 것이면? 어디가 아픈 것이면? 모두 헛된 망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인은 두려워졌다.
어떤 다른 방법을 고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영인이 내달렸다. 걸리는 대로 신발을 구겨 신고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반복해서 눌러 댔다. 승강기는 10층까지 아주 더디게 올라왔다. 결국, 영인은 계단을 선택했다. 달려서 내려가는 것인지 떨어지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급박한 뜀박질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영인이 다시 백의 집 앞에 섰다. 당장 백에게 가지 않으면 백을 영영 잃을 것같이 서둘러 와 놓고는 정작 문 앞에서는 또 망설이고 있었다. 문에 귀를 대 보았지만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짧은 주저함 끝에 제집처럼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은 열렸다. 비밀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들어선 집 안은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 백을 만나기 전 자신의 집과 다르지 않은 폐허 같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영인의 입에서 흐느낌과 닮은 슬픈 신음이 짧게 터졌다.
얼마 전까지와는 딴판인 백의 집을 보자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영인은 우선 백을 찾아 나섰다. 백은 구토를 하다 지쳐 쓰러져 잠들었는지 화장실 타일에 나부라져 있었다. 영인은 이를 악물고 그런 백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백이 깨지 않도록 노력했다. 느리고 배려 있는 움직임이었다. 백의 목 뒤와 오금을 각각 팔로 받치고 백의 힘없는 머리가 자신의 목 언저리에 기대도록 하였다. 백의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안심했다. 무엇보다 백이 우선이었다.
백을 침대에 눕힌 뒤 천천히 백의 옷을 벗겼다. 양말부터 바지와 셔츠를 벗기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백은 그러는 동안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후에는 수건을 뜨거운 물에 적셔 와 백의 얼굴부터 목, 손과 발을 닦아 주었다. 수건이 식거나 마르면 지체하지 않고 다시 세면대로 가 수건을 충분히 적셨다. 백이 말끔해지자 백의 옷장에서 잠옷을 찾아와 입혔다. 손을 꼼꼼히 씻은 뒤 어설픈 손길로 백의 얼굴에 크림도 발라 주었다. 그리고 이불까지 단단히 덮어 준 뒤에야 영인이 백을 보았다.
무엇이 이 완전한 남자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했다. 이 흠결 없는 사내가 정말로 자신 때문에 이토록 망가진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유능하고 자신만만한 백의 상처투성이 속내를 들여다본 것 같아 슬퍼졌다.
자신이 백의 일상을 훔치고, 망치고야 말았다.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건 악연이었다. 백도 영인도 엉망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 백이 자신에게 해 주었듯 영인은 백의 집을 치웠다. 쓰레기를 버리고, 빨랫감을 정리하고, 설거지했다. 백이 남긴 흔적들을 보며 그의 일상을 헤아리면서. 여기까지였다. 영인이 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들은 딱 여기까지였다. 남은 것은 백의 몫이었다.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영인은 행여 백이 깰까 숨소리마저 죽인 채로 떠났다.
백은 근처에서 울리는 핸드폰 알람 소리에야 겨우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알람을 끄고서야 자신이 곱게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스스로 했을 리가 없었다. 요즘 백은 침대에서 잠들지 못했다. 슬쩍 둘러보니 주변도 정돈되어 있었다.
쪽지가 없어도 백은 이게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있었다. 우렁각시가 아니라 영인일 테지. 백의 입에서 한숨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랑 뭘 하자는 거야, 정말.”
백은 영인이 덮어 준 이불을 더 깊게 끌어안고 그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이불 안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출근하자마자 영인은 백의 자리부터 살폈다. 백은 자리에 없었다. 아예 팀이 있는 원래 사무실 건물로 옮긴 것인지 책상 위에 노트북뿐만 아니라 마우스, 키보드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얼굴로 백을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인이 개발에 집중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나머지 프로젝트 멤버들도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룸은 정말로 조용했다. 이런 분위기는 오픈이 가까워져서 모두의 업무가 과중해진 탓도 있었지만, 백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작업표시줄 위에 임수림의 이름이 뜬 메시지창이 떠오르며 반짝거렸다. 영인은 무표정하게 채팅창을 클릭했다.
[정말 밥 사주자마자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라 부동산에서 급 연락이 ㅠㅠ 오늘만 빨리 퇴근해야 할 듯! 내 몫은 내가 할 수 있는데 김 차장님 파트 받은 거 하나가 좀 간당간당하지 싶어. 최대한 해보는 데까진 해볼 테니까 마무리만 좀 해주라 ㅠㅠ]
다양한 이모티콘과 함께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영인은 다 읽자마자 크게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수림을 보고 ‘그래’라고 대답했다. 수림이 미안함과 고마움을 잔뜩 담아 영인에게 손가락 하트를 날렸지만, 영인은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다시 자신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일이 많은 날은 시간이 빨리 흘렀다. 영인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할 일들이 반가웠다. 퇴근 시간이 되자 수림이 눈치를 보며 짐을 챙겼다.
“오! 책임님, 오늘 칼퇴 하시는 겁니까?”
주성이 가장 먼저 아는 척하며 묻자 수림이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할 게 좀 있어서. 백 책임님한테도 미리 이야기해 놨어요.”
“부러워요. 전 지금 간다고 하면 엄청 욕먹을 듯.”
주성이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자 수림이 가볍게 웃으며 프로젝트 룸을 나섰다. 이제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셋이었다.
백과 수림이 없자 누구 하나 먼저 밥 먹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주성이 눈치를 살피며 노트북의 전원을 껐다.
“저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퇴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어서서 영인과 태준을 보고 꾸벅 인사했다.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가방을 덜렁 들고 주성마저 떠나 버렸다. 적막 속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영인은 태준과 둘만 남은 것이 못 견디게 불편했다. 차라리 혼자가 편했다. 태준은 이미 잊은 지 오래일 영화관에서의 기억이 영인을 계속 괴롭혔다. 작은 것 하나 그냥 넘기지 못했다. 백과 관련된 일이라 더 그랬다. 좀처럼 먼저 입을 여는 법 없는 영인이 태준에게 말을 걸었다.
“일 많이 남으셨습니까?”
평이한 어조였기에 이 한마디만으로 영인이 얼마나 태준을 피하고 싶어하는지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뭐. 내일 할 테스트 데이터만 좀 더 생성하면 됩니다.”
태준도 간결하게 대답했다. 수림이 시킨 일들을 하며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앙심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어차피 제가 오늘 수림 책임 파트 마무리할 부분이 있으니까 그것도 하는 김에 같이할게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데이터 메일로 보내 주시고 먼저 퇴근하세요.”
무거운 짐을 태준과 나누어 지느니 혼자 짊어 지고 가는 편이 나았다. 태준이 영인이 건넨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고 의도를 짐작하기 위해 애썼다. 영인은 조급했다. 얼른 혼자 남고 싶었다.
“오늘 수림 책임이랑 노 책임님도 없으니까요. 편하게 생각하세요.”
영인의 이어지는 설득에 태준도 조금씩 마음이 동했다. 영인이 검은 속내가 있는 타입도 아니었고 솔직히 지금 하는 일은 자기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노가다여서 시간과 품이 드는 일이지 고급 스킬이나 배경 지식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오늘만 좀 부탁할게요.”
태준이 영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인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태준도 금세 퇴근 준비를 하고 사무실을 떠났다. 드디어 프로젝트 룸에 남은 것은 영인 한 명뿐이었다. 영인은 아직 남은 자신의 숙제부터 빠르게 해치우기 시작했다.
고요한 공간에서 혼자 남아 일할 때는 항상 긴장해야 했다. 어느 순간 혼자라는 것을 행여 자각하게 되면 한없이 외로워지곤 했다. 그러니 그냥 앞에 놓인 과제에 집중하는 편이 좋았다. 다른 상념이 떠오를 틈을 주어서는 안 됐다.
영인이 어제 마무리 짓지 못했던 개발 건까지 포함해서 오늘의 목표를 달성했을 때 시간은 이미 1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수림과 태준의 몫이었다. 태준의 것은 길게 잡아 봐야 1시간이면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수림이 부탁한 것 먼저 파악하기 위해 메일함을 열었다.
수림은 영인이 보완해 줘야 할 기능과 테스트가 필요한 부분을 화면 캡처까지 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메일을 보내고 퇴근했다. 영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뻐근한 어깨를 풀어 주며 꼼꼼하게 요구사항을 분석했다.
뻑뻑한 눈을 지압하며 언제쯤 퇴근할 수 있을지 생각할 무렵이었다. 닫혀 있던 프로젝트 룸의 문이 열렸다. 영인이 예상하지 못한 방문자 때문에 놀란 얼굴로 열린 틈을 보았다. 양팔에 노트북과 키보드, 마우스에 여러 파일까지 얹고 들어온 사람은 노백이었다.
백도 영인이 여태 남아 있었을 줄 몰랐는지 들어오다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정적 속 어색한 눈맞춤이 이어졌다. 영인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꾸벅 고개를 숙여 백에게 인사했다. 이제 다시 프로젝트 룸에 사람은 둘. 노백과 강영인이 남았다.
백도 어정쩡하게 묵례를 하고 챙겨 온 짐을 책상 위에 올렸다. 내일은 프로젝트 룸에서 온종일 일을 해야 하니 미리 노트북이며 살림살이를 옮겨 두고 퇴근할 생각이었다.
“왜 아직도 퇴근 안 했어요?”
백이 서먹함을 지우기 위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영인은 백이 자신에게 말 걸어올 줄 몰랐던 탓에 당황하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 저….”
뚜벅뚜벅, 백이 영인의 뒤로 걸어왔다. 그리고 커다란 모니터에 떠 있는 메일 내용을 읽었다. 발신자는 임수림, 내용은 일 미루기였다.
“흠.”
백이 마우스를 손에 쥐고 메일 목록 버튼을 클릭했다. 수림의 메일 뒤에 도착해 있는 태준의 메일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역시 내용은 일 미루기였다.
“이 사람들이 진짜.”
무엇인가 못마땅한 사람처럼 백이 살짝 인상을 쓰고 낮게 중얼거렸다. 영인은 자신의 마우스를 쥐고 있는 백의 손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등 위로 드러난 뼈와 핏줄들이 가슴 아팠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백이 자신의 노트북을 영인의 옆자리로 가지고 왔다. 영인은 백의 등장부터 지금까지 놀라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백의 돌발행동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백은 그런 영인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수림의 의자에 털썩 앉은 뒤 노트북 전원을 켰다. 그리고 영인을 보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김 차장님 파트는 제가 볼 테니까 수림 책임 쪽 얼른 봐요. 지금 1시가 넘었는데 퇴근을 언제 하려고 그렇게 다 끌어안고 있어요. 미련하게.”
백도 피곤한지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들어가세요.”
영인의 말에 백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퍽이나 그러겠다는 표정이었다. 거절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 같은 영인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 조소는 영인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바보 옆에 앉아서 일을 도와주려는 자신도 비웃음당해 마땅했다. 잔인하게 차인 주제에 영인을 돕겠다고 나서다니.
둘은 마치 바보와 멍청이, 머저리와 얼간이 혹은 환장의 커플, 아니 커플은 아니었다. 그냥 환장의 듀오, 그런 것들 같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백은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영인을 끊어 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토록 밉고 원망스러웠던 남자가 어젯밤 보여 준 작은 애정에 무너지고 말았다. 오늘 하루 정신없이 일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을 챙기고 집을 치웠을 영인을 상상하며 수도 없이 혼자 웃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결국,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지만 다시 뒤돌아 영인에게 갈 생각은 없었다. 백은 이번에야말로 멈추기로 마음 먹었다. 영인을 기다려 볼 참이었다. 이 사태를 만회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도 아니라면 끝끝내 안 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그랬다.
영인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였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기를 기도했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할 줄 모르는 호구 같은 영인이 밀어내는 것은 이 세상에 백 하나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시스템을 돌려 적합한 테스트용 시리얼을 생성하던 백이 하던 일을 멈추고 빤히 영인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딱딱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며 능숙하게 코딩을 하던 영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꿀렁,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백은 영인의 아래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다. 영인은 긴장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모조리 보였다. 백은 알 수 있었다.
영인은 무표정한 얼굴 뒤로 감정을 잘 숨겼다. 자신의 진심을 백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백의 집요한 시선 때문에 결국 영인의 귓바퀴가 속수무책으로 점점 달아올라 붉게 물들어 갔다. 영인도 귓가가 홧홧해지며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았다.
커다란 손을 들어 자연스럽게 귀를 긁는 척하며 숨겼지만, 이미 늦었다. 백은 다 보았고, 전부 눈치채고야 말았다.
‘강영인은 나를 좋아한다.’
백이 키보드의 엔터를 검지로 누르며 확신했다. 키보드에서 나는 소리가 경쾌한 종소리처럼 들렸다. 곧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돌아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 처리가 끝난 시리얼 넘버를 복사해 엑셀에 입력했다.
영인이 아무리 밀어 봐야 이제 밀려 줄 생각이 없어졌다. 당기지도 않을 테지만 밀리지도 않을 것이다. 2라운드가 시작된 셈이었다. 백은 제자리에서 영인을 기다릴 것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신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만, 끌고 오지는 않을 계획이었다. 영인이 스스로 자신의 걸음으로 백에게 올 때까지 백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백은 호구 같은 강영인을 좋아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