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권) (6/9)

<영인을 위하여 2권(외전1포함)>

6

씻고 나온 백이 마른미역을 물에 불려 두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 영인과 경쟁하듯 들이부은 술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니었다. 자신도 속이 쓰리고 울렁거리는데 자기보다 세 배는 더 먹은 영인은 어떨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쓰린 속보다 문제인 건 아직도 아리고 불편한 아래쪽 사정이었다. 아픈 감각이 올라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샤워하며 만져 본 구멍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관처럼 느껴졌다. 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생각을 끊으며 충분히 불어난 미역을 물에 헹궈 꽉 짜냈다. 때로 지나친 상념은 독이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욕망하던 영인의 얼굴과 집요했던 시선만큼은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백이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미역과 다진 마늘을 넣고 볶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 큰 어른들끼리 마음이 동해 한 일이니 부끄러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만 부끄러워지니 큰일이었다.

충분히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자 백이 정수기에서 물을 떠 냄비에 붓고 치킨스톡과 국간장을 한 스푼씩 넣었다. 물이 끓는 동안 달걀을 다섯 알 풀어 놓고, 대파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었다. 그리고 곧은 손끝을 말아 파를 잡고 손목의 힘으로 칼질을 시작했다. 군대에서 배운 칼질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순식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대파가 잘게 다져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팔팔 끓는 미역국에 달걀을 풀고, 후추를 뿌리자 제법 그럴듯한 냄새가 집 안으로 퍼졌다. 소고기미역국에 비하면 얼렁뚱땅 만든 것이지만 아침에 속을 풀기로는 이만한 게 없었다. 남은 달걀과 다진 파로는 간단하게 계란말이도 말았다.

백이 주변에 어질러진 것들을 빠르게 치우고 앞치마를 벗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였다. 강영인을 깨워야 했다. 백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많은 계열사 인원 앞에서 PT 시범을 할 때도, 철저하기로 소문난 임원들 앞에서 보고할 때도 이만큼 떨린 적은 없었다. 지난 연애에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

상대가 남자여서인지 영인이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전에 없이 두근거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치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을 마주하듯 긴장되고 설레었다. 이런 마음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백은 평정심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른답게, 나름 산전수전을 겪어 온 지난 세월을 기억하며 백이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러자 귓불이 약간 빨간 것을 제외하고는 평소의 백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다.

백이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영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영인은 그림처럼 눈을 감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 반듯한 이마부터 높은 콧대까지 이어지는 굵은 선을 백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쓸었다. 감긴 채 미동도 없던 눈가가 살짝 떨려왔다. 영인이 깨어난 것을 눈치챈 백이 장난스럽게 영인의 눈썹을 두드렸다.

“일어나요. 얼른 밥 국에 말아 마시고 씻고 튀어 가야 합니다. 늦었어요.”

백의 상냥한 재촉에 영인이 마지못해 눈을 떴다. 백은 어제와 다름없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영인은 난처한 얼굴로 눈앞에 차려진 아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백은 당장 사무실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차림으로 영인의 맞은편에 앉아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빨리 먹어요. 우리 집에서 씻고, 강 과장님 집에 가서 옷만 후딱 갈아입고 오는 거로.”

말을 하다 말고 백이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식사 시간 10분, 씻고 머리 말리는 데 25분, 강 과장님 옷 갈아입고 차에 타는 거까지 15분. 그러면 무리 없이 출근 가능하겠어요.”

영인은 백의 말을 듣고도 멍한 상태였다. 백이 그런 영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엄지와 중지를 맞닿게 하고 튕겼다. 명쾌한 소리가 영인의 귓가에 울렸고, 그제야 영인이 백을 보았다.

“식사 시간 9분. 빨리요.”

그 말을 끝으로 영인이 기계적으로 국에 밥을 말기 시작했다. 김이 펄펄 나는 국을 한 숟가락 가득 떠올려 입에 넣자마자 영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졌다.

“어후.”

기대하지 않은 맛이었다. 뭘 특별히 넣은 것 같지도 않은데 국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술 때문에 성이 나 있던 속이 일순간에 달래졌다.

“괜찮죠?”

백은 그런 영인을 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어젯밤 분명 백을 쥐고 흔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아침이 되자 영인은 백에게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백을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결국, 모든 것은 백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영인은 백이 그만이라고 외칠 때까지 전투적으로 식사를 마쳤고, 먹은 것을 정리할 새도 없이 백에게 등 떠밀려 욕실로 넣어졌다. 백은 백대로 먹고 난 그릇들을 대충 물로 헹군 뒤 식기세척기에 차곡차곡 넣고 식탁까지 완벽하게 닦아 냈다.

영인이 씻고 나오자 백은 화장대 앞에 영인을 앉혔다. 스킨, 로션, 크림, 선크림 순으로 정렬해 둔 것을 가리키며 영인에게 바를 것을 종용한 뒤 자신은 드라이어를 최고 세기로 켜 영인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워낙 짧게 정리해 둔 머리라 말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폭풍처럼 떠밀려 영인은 어느새 자기가 사는 아파트 공동 현관 앞까지 도착했다.

“얼른 뛰어갔다 오세요.”

백이 비상등을 켜고 영인의 아파트 입구에 요령껏 차를 세웠다. 영인이 엉거주춤 차에서 내리자 백이 창문을 열고 외쳤다.

“두 발 다 땅에 닿으면 혼납니다. 뛰어요!”

영인은 백의 장난 섞인 재촉에 어이가 없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뛰었다. 백의 웃음소리가 영인의 주변을 빙글빙글 감싸 돌았다.

“이게 아닌데.”

영인의 작은 혼잣말이 공허하게 울렸다.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백은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다리를 이리도 꼬았다가 저리도 꼬았다가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진득하게 일하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백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아래가 불편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의자에 앉아 있으니 한 번도 의식하지 않고 살았던 부분들이 생각보다 압박되어 계속 생소한 자극이 몰려왔다. 화끈거리고 아팠다. 내장은 멍이라도 든 것처럼 욱신거렸다. 이게 다 강영인 때문이었다.

“어디 불편해요?”

기어코 수림의 입에서 타박이 나왔다. 옆에서 커다란 남자가 자꾸만 몸을 움직여 대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영인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애써 숨기며 그런 백을 보고 있었다. 주성은 아예 당장 백을 부축해 어디라도 데려갈 기세였다.

“아니,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미안.”

백이 마지막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림은 다시 건조하게 자신의 모니터에 집중했고 영인은 슬쩍 백을 보았다. 백과 영인의 눈이 마주쳤다. 백은 메신저 창을 켜 영인에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다 과장님 때문이잖아요.]

영인은 반짝거리는 백의 채팅창을 열어 그 문장을 읽고서야 모든 사정을 이해했다. 백이 다시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뗐다가 앉았다. 이 모든 행동들이 다 자신 때문이었다. 영인이 마른침을 삼키고 그런 백을 다시 훔쳐보았다.

어제의 정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구도 모를 백의 비밀을 영인은 알고 있었다. 백이 불편해하며 자세를 바꿀 때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이상한 감정이었다. 비옥한 영토에 맘대로 소변을 싸 갈긴 개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백에게 영역표시를 한 것 같았다. 지금 저 남자를 품에 안고 한껏 숨을 들이마시면 분명 자신의 냄새가 진동할 것이었다.

새로운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며 작업표시줄에 있는 백의 이름이 박힌 채팅창이 다시 깜박였다. 채팅창을 키우자 또 다른 백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웃어? 지금 웃어?]

영인은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그 문장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올라간 입꼬리를 지우려는 듯 입술을 매만지던 영인이 백을 보았다. 백이 아주 괘씸한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영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영인은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곧 백도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이따 봐요. 나는 오전은 팀 회의.]

백이 영인에게 인사를 남기고 일어섰다. 주성이 백이 다이어리를 챙기는 것을 보고 눈치껏 자신도 짐을 챙겨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저랑 주성이는 팀에 갔다가 점심 먹고 오후에 올게요. 내일 통합 테스트라기엔 좀 거창하지만, 아무튼 1차 테스트 준비 다 해 두시고요.”

백이 다이어리 모서리로 책상을 몇 번 두드리며 이야기하자 개발에 각자 바빴던 이들이 모두 집중했다. 사람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춘 백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고 그 뒤를 주성이 쭐레쭐레 쫓았다.

영인은 빈자리를 보았다. 자신에게만 건네진 특별한 인사 때문인지 백이 떠나도 어쩐지 허전하지 않았다. 백은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었다.

프로젝트 룸의 큰 창을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 틈새로 바깥의 어둠이 스며들어 왔다. 어느새 늦은 밤이 되었다. 9시 45분이 넘어가자 수림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이고! 삭신이야.”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백도 오랜 시간 앉아 있어 뻐근한지 고개를 뒤로 꺾어 엄지로 턱을 밀며 긴장한 목 근육을 풀었다.

“내일은 9시까지 나오면 되려나?”

수림이 퇴근 준비를 하며 묻자 백이 그 상태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실 크게 바쁜 일도 없으면서 남아 있던 주성도 슬슬 컴퓨터 전원을 끌 준비를 했다.

“언제 퇴근하게요?”

수림의 질문에 백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한 삼십 분만 더 보고. 얼른 들어가. 늦었다.”

“10시 차만 타고 퇴근해도 땡큐지.”

수림이 너스레를 떨며 가방을 챙겼다. 서랍을 열어 보며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고 영인 쪽을 돌아보았다.

“가자.”

수림은 당연히 영인과 함께 퇴근할 생각이었다. 비록 탑승하는 셔틀버스는 달랐지만, 승차장까지는 함께 가곤 했었다.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은 영인이 아닌 백이었다.

“영인 과장님은 내가 태워다 주려고. 우리 같은 아파트 주민이잖아.”

“뭐야?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수림이 백이 아닌 영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영인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얼른 가. 셔틀 놓쳐.”

백의 성화에 수림이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고 주성과 함께 프로젝트 룸을 나섰다. 백은 자연스럽게 영인을 또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 * *

영인은 무지근한 머리를 달래기 위해 빈속에 진통제를 한 알 넘기고 현관을 나섰다. 어제 퇴근 후에 백은 영인을 끌고 24시간 하는 갈비탕 전문 식당에 데려갔다. 거기서 밥과 갈비탕을 시켜 기어코 먹이고는 그대로 얌전히 영인을 집 앞에 내려 주었다.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요. 8시 20분에 만나요.”

산뜻한 인사와 함께 떠난 백의 차 뒤꽁무니를 영인은 한참 지켜보았다. 도대체 백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백의 생각이나 의도는 물음표투성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려고 했다가는 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사실 이 관계를 누구보다 깨고자 했던 사람은 영인 자신이었으면서 막상 정말 잃는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을 느꼈다. 영인도 자신의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백과의 불투명한 관계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약간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 더듬거리며 출입구를 찾는 것만큼이나 막연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차하다가는 그대로 고꾸라지거나 영영 길을 잃을 것이었다.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영인이 아침부터 두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작 상대방인 백은 아무런 고민이나 어려움도 없어 보였다. 그것이 영인을 더 힘들게 했다. 아파트 공동현관으로 나오니 바로 앞에 비상등을 켜고 주차해 둔 백의 차가 있었다.

“잘 잤어요?”

문을 열자 백이 웃으며 영인을 맞이했다. 잠을 설치고 머리가 아픈 건 역시 영인뿐인 듯했다. 백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백과 영인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림이 출근했다. 9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주성이 프로젝트 룸 문을 열었고 10분이 더 지나서야 태준이 왔다. 백은 모두가 모이자 자신의 뒤에 있는 프로젝터 스크린을 내려 고정했고 노트북 화면을 스크린과 연결해 공유했다.

“토요일인데 출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심은 제가 맛있는 거로 대접할게요.”

백이 넉살 좋게 말하며 테스트를 시작했다. 주성이 익숙하게 엑셀 화면을 켜 백이 진행하는 과정마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작성했다. 수림도 액션이 하나 성공하면 바로 백데이터를 뒤져 겉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진짜 데이터도 제대로 적용이 된 것인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테스트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영인은 백이 자신이 개발한 파트의 테스트를 진행하자 묘하게 긴장했다. 문제 될 리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백은 거침없이 데이터를 입력하고 확인했다. 제대로 작동하자 작게 웃으며 영인을 보았다. 칭찬받는 기분에 영인의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대로만 진행하면 오늘 진짜 빨리 끝나겠네요.”

“입방정 떨면 망하는데.”

백의 말을 들은 수림이 장난스럽게 말했고 그 말은 정말로 예언이 되고 말았다. 곧 점심시간이 되어 가는데 태준의 개발 부분으로 넘어가니 단계마다 하나씩 함정이 있었다. 꼼꼼하게 보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갈 만큼 미세한 문제들이었는데 누적이 되니 걷잡을 수 없이 데이터가 꼬였다. 머리 위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백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갔다.

분명 매일 아침 일찍 나와 문제가 있다고 체크해서 태준에게 넘겼던 부분들이었다. 수림의 경고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신경 쓰고 있었는데 넘기고 다시 확인을 안 한 것이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수림은 마치 예상한 결과였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소스 좀 까 봐야겠는데요. 어떻게 이렇게 다 걸리지?”

백이 자기 노트북과 연결된 선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성이 태준의 개발 부분에서 발생한 에러를 정리하느라 연신 백의 화면과 자신의 화면을 번갈아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다 백의 말에 놀랐는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장님 노트북 연결해서 하나씩 확인 좀 하죠.”

백이 고갯짓으로 태준을 자신의 자리로 불렀다. 여태까지 태준과 각을 세우고 대립했던 수림도 백의 강경한 태도에 놀란 기색이었다.

다른 개발자들에게 소스를 공유해 함께 고쳐 나가는 것은 보통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신입사원도 아니고 어쨌든 연차가 있는 개발자에게 하기에는 가혹한 대우였다. 그러나 백은 자신이 한 말을 무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리에 그대로 서서 태준을 기다렸다.

“혼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태까진 그렇게 하시게 했는데 오늘 상황 보니까 답이 안 나오네요. 이제 곧 오픈인데 이러면 사용자 반발 때문에 노력한 게 다 허사가 됩니다.”

백이 단호하게 말하며 다시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제야 태준이 자신의 노트북을 들고 백의 자리로 걸어왔다. 묘한 긴장감이 작은 프로젝트 룸 안에 가득 찼다.

하얀 빔프로젝터 스크린 위로 태준의 에러 가득한 소스가 공개되었다. 수림과 영인은 물론이고 백도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았기에 어디에서 데이터가 꼬였는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셋 다 영화 전자 소스는 질릴 만큼 본 사람들이었다.

“지금 난 여기서 왜 생산창고 쪽 프로시저를 콜 하는지 모르겠네. 우리 프로시저 개발 공수도 다 있지 않나? 림수 책임, 내 말 틀려?”

백이 레이저 포인트를 스크린에 쏘았다. 붉은 점이 하얀 화면에서 둥근 원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수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개발창고 프로시저 개발한 걸로 수정할 예정이었습니다.”

“진작 수정하셨어야죠. 이렇게 두면 계속 트랜잭션이 일어나잖아요. 혹시 하나라도 수정 누락되면 그땐 우리만 문제가 아니고 영업 쪽도 이슈가 커져요. 이건 당장 고치세요. 좀 내려 보세요.”

백이 레이저 포인터를 쥔 손을 까닥였다. 태준이 굳은 얼굴로 스크롤을 내리자 소스 아래쪽이 보였다. 모두 말없이 눈으로 소스를 따라갔다.

“림수 책임은 생각이 어때?”

백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수림을 보았다. 수림의 입에서 끙 하는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재활용도 힘들어 보이는데.”

백의 냉정한 평가에 수림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장님, 어렵거나 불분명한 부분이 있으시면 저한테 바로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임의로 해 버리시면 안 됩니다. 이거 지금 차장님 혼자 어떻게 치울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거든요. 임 책임님이 좀 같이 붙어서 고쳐 줘.”

백이 수림을 향해 말했다.

“아휴.”

수림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각오한 바였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 자신의 몫만으로도 위태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는 막차 타고 하는 퇴근도 불가능해진 듯 보였다.

“내가 같이 볼게.”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영인이 입을 열었다. 좀처럼 남의 일에는 참견하지 않던 영인의 색다른 반응에 수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웬일로? 나 걱정되는구나.”

“프로시저 쪽을 내가 손볼게.”

영인이 더 까다로운 쪽을 골라잡았다. 수림으로서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화면 단 수정이야 솔직히 겉치레였다. 중요하고 어려운 쪽은 데이터베이스 부분이었다.

“강 과장님 괜찮겠어요? 지금도 남들보다 개발 건 많은 거로 아는데.”

백이 영인을 보며 물었다. 영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가 쓸데없이 너무 듬직해 보였다. 악독한 프로젝트 리더에게 걸렸으면 아주 있는 대로 착취를 당했을 게 뻔했다. 분명 이런 상황에서는 희생정신 넘치는 유능한 개발자가 예뻐 보여야 했는데 어쩐지 그렇지가 않았다.

“차장님 다음 주부터는 일찍 퇴근하실 생각만 하지 마시고, 남아서 다 같이 개발하시죠? 지금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는 거잖아요.”

백이 별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태준은 이미 충분히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보였다.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백은 그런 태준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했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했다. 자신이 너무 사람을 믿었던 탓에 결과적으로 피해를 본 것은 영인과 수림이었다.

“점심 먹고 이어서 하도록 하죠.”

이미 시간은 한 시가 지나 있었다. 오늘 하루가 아주 길어지리라는 예감이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다.

집에 오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백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내 들고 거실 창을 열고 섰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백의 욕심 같아서는 철야라도 해서 모든 에러를 낱낱이 찾아내고 싶었지만, 수림의 입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한숨에 나름 타협해서 퇴근한 것이 이 시간이었다. 미지근한 여름 새벽 공기가 입김처럼 닿아 왔다.

까만 밤하늘에는 별이 겨우 한두 개 떠 있었다. 백은 난간에 기대 맥주를 넘기며 또 영인을 생각했다. 어쨌든 이만하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남자와 사귀게 된 것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 통념에 대한 허들이 낮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른이 넘어서 하는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어려웠다. 남자가 좋으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 영인이 좋았다.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영인은 어떨지. 백이 별생각 없이 맞은편인 영인의 건물을 보며 층을 헤아렸다. 영인의 집은 10층이었다. 한 층 한 층 올라가며 도달한 10층 영인의 집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백뿐만이 아니었다.

백이 입고 있던 짧은 반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영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지나지 않고 영인의 음성이 울렸다.

-무슨 일이시죠?

“작은방 베란다로 나와 봐요.”

곧 커다란 인영이 백이 지켜보던 10층 창으로 보였다. 백이 웃으며 손은 흔들었다. 핸드폰에서 새어 나온 백의 웃음소리에 영인이 일순 굳었다.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처음 영인은 백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백은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이쪽을 보지 않는 둔한 영인이 답답하지 않았다.

“나 안 보여요?”

대신 다시 영인에게 힌트를 줄 뿐이었다. 그제야 영인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 16층에 있는 백을 보았다.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 표정을 알 것 같았다. 백이 맥주캔을 흔들어 보였다.

“잠 안 오면 놀러 와요. 나도 하도 노트북 화면을 봤더니 잠이 안 오네.”

영인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건너편에 있는 백도 침묵했다. 작은 심장 고동 소리만 쿵쿵 울렸다. 머나먼 거리에 있는 서로를 말없이 마주 보았다.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빨리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백이 작게 속삭였을 때 영인은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돌아서 백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분명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경고 신호가 계속 울렸지만, 모르는 척 외면했다. 백을 거절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역시 진작에 거절당했어야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영인은 집에서 있던 차림 그대로 집을 나서 익숙한 백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곧 문이 열리고 백이 웃으며 영인을 맞이했다.

“그냥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와도 돼요. 기억 안 나려나?”

잊지 않고 있었다. 한 번 스치듯 들은 그 번호는 뇌에 그대로 낙인처럼 찍혀 잊히지 않고 있었다. 확인 사살하듯 백의 입에서 묘한 음률을 타고 다시 비밀번호가 흘러나왔다.

“017517#. 앉아 있어요.”

이제 영인은 이 번호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멀뚱히 소파에 앉아 있는 영인을 위하여 백이 곧 맥주와 방금 깎은 사과를 쟁반에 챙겨 왔다.

“오늘 고생했어요.”

포크에 찍은 사과를 한 쪽 건네며 백이 말했다. 영인이 뻣뻣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몸을 섞은 사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어색한 모습이었다. 백이 자연스럽게 영인의 앞에 놓인 맥주캔을 먼저 따 준 뒤 자신의 것을 땄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사과를 먹지 않고 맥주부터 벌컥 들이켰다.

“근데 진짜 김 차장님 쪽까지 할 수 있겠어요? 안 될 거 같으면 새로운 사람 소싱하고 오픈을 좀 미루면 돼요. 무리하지 말아요.”

백이 영인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대로 모든 것을 내어 주고 항복할 수 있을 만큼 인자하면서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영인이 투항의 말이 튀어나오기 전 맥주를 마셨다.

“오픈 일정 밀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욕 좀 먹겠죠. 욕이야 뭐 매일 먹는 건데 별일인가?”

“책임님한테 별일이 있긴 합니까?”

영인이 문득 떠오른 의문을 백에게 던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백은 아무렇지 않게 길을 찾아낼 것 같았다. 그에게 어려운 일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별일 있죠. 강 과장님이 완전 내 인생의 별일인데.”

영인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백을 보았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는 백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도 평생 영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백이 그런 영인의 의중을 읽었는지 미소 지었다. 백의 손이 영인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여러모로 별일입니다. 구슬은 꿰어야 보배, 마음은 표현해야 진짜.”

백의 손이 잠시 그 뺨을 간지럽히며 머무르다 떠났다. 백은 단숨에 남은 맥주를 입에 쏟아 넣었다. 빈 캔을 소파 테이블 위에 올리자 바로 영인이 그 손을 다시 낚아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참을 수가 없었다. 백이 자신에게 기대듯 넘어오자 그대로 눈을 감고 입을 살짝 벌린 채 백의 입술을 머금었다. 쌉쌀한 맥주 향이 가득한 키스였다.

* * *

평화로운 일상이 불안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영인은 매일 열두 시가 넘어서 퇴근하면서도 평화롭다고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두려웠다. 백은 영인을 태우고 출근하고 또 함께 퇴근했다. 퇴근 후에는 거의 백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영인은 자신도 모르는 새 백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마른 모래를 뭉치는 것처럼 아무리 해도 안 되던 일들이 수월해진 것도 또 다른 삶의 변화였다. 손바닥 위에 모래를 한가득 올리고 주먹을 꽉 쥐어 봐야 물기 하나 없는 모래는 손을 펴면 금세 흩어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그저 시간을 죽이며 살아가던 영인이 자신만의 질서와 규칙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집을 치우고 냉장고를 채우고 또 비우며 정돈된 나날을 보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져 내리던 발밑이 단단한 반석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인은 그 변화가 무서웠다. 뱃속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있던 진을 향한 죄책감도 서서히 다시 몸부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인은 알 수 있었다. 이 거짓된 평화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백을 보았다. 한결같은 백을 보면 잠시 안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일 뿐이었다. 결국, 백에게 의지할수록 더욱 깊은 상처가 남으리라는 것도 영인은 역시 알고 있었다. 백이 자신에게 얼마나 아픈 사람으로 남게 될지 영인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관계는 몹시 나쁜 중독이었다. 종내에는 자신을 해칠 것을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랬다. 밀물처럼 몰려드는 불안을 거두기 위하여 영인이 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은 토요일 출근마저 당연한 일이 되어서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만 쉬었다. 그런 황금 같은 휴일 아침부터 백은 영인을 끌고 헬스장에 나왔다. 그리고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더니 영인을 앞에 두고 스미스 머신 앞에서 스쿼트 자세를 잡고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없었다.

“나 다음에 과장님도 해 봐요. 일이 많을 때일수록 몸을 써 줘야지.”

그런 백을 보자 역시 불안이 일순 황당함과 어이없음 같은 감정으로 치환되어 사라졌다. 백이 웃으며 바벨을 고쳐 잡았다. 몸풀기로 최대 중량보다 적게 세팅한 상태였다. 백이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자세로 스쿼트를 시작했다.

백의 운동용 반바지는 길이도 짧고 옆이 트여 있었다. 허벅지 근육과 하얀 피부가 여과 없이 드러났지만 백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무거운 중량을 버티고 앉은 탓에 트임이 최대치로 벌어져 바지가 팽팽해졌다. 백의 동그란 엉덩이가 단단하게 긴장하며 그 무게를 감당했다.

“으흡.”

백이 호흡을 조절하고 훌쩍 일어서 바벨을 머신에 고정하고 원판을 추가하기 위해 영인의 곁으로 왔다.

“오늘 잘될 것 같은데. 강 과장님 스쿼트 얼마까지 쳐요? 체급 때문에 상대가 안 되려나.”

영인의 팔뚝을 주무르며 그 파워를 가늠하던 백이 대결도 하기 전에 영인에게 패배를 인정했다. 힘으로는 어떻게 비벼 볼 수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20kg짜리 원판을 두 개 들고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던 찰나였다. 바닥에 누군가 정리하지 않고 제멋대로 놔두고 간 덤벨에 발이 부딪쳤고 그대로 백이 주저앉았다.

“아! 이런 씨.”

백이 황급히 원판을 바닥에 내려 두고 오른쪽 발을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영인이 재빨리 백의 발치로 와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백의 발을 올리고 운동화 끈이 거의 다 빠질 지경으로 느슨하게 만들어 천천히 백의 운동화를 벗겼다.

고통이 상당한지 발을 붙들린 채로 백은 고개를 뒤로 꺾고 신음을 뱉고 있었다. 영인이 백의 양말까지 벗기고 드러난 맨발을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꺾으며 확인했다. 새끼발가락 쪽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다행스럽게도 뼈가 잘못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영인이 큰 손으로 백의 발을 매만졌다. 다친 쪽을 피해 엄지발가락과 발등을 살살 쓸어 주다 고통으로 긴장해 있는 발바닥을 엄지로 꾹꾹 눌러 마사지했다. 영인이 주물러 주는 곳은 시원한데 새끼발가락 끝은 고통스럽고 한 부위에서 복합적인 감각이 동시에 백을 자극했다.

“운동하다가 다치면 무슨 소용입니까?”

영인이 다정하게 백을 핀잔하고 동그랗게 들어간 백의 아치를 꾹꾹 눌렀다. 백이 아까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영인의 지압을 즐기며 그를 보았다. 영인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백의 발을 달래고 있었다. 아무런 사심이 없는 터치가 그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섹슈얼하게 느껴졌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영인이 이번에는 백의 아킬레스건 쪽을 아프지 않게 주물렀다.

“아.”

백의 입에서 묘한 신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영인의 귀에만 들릴 소리였다. 영인이 혹시 백이 어디 탈난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백을 보았다. 백도 그런 소리가 나올 줄 몰랐던 것인지 민망해하며 히죽 웃었다.

영인이 검지로 백의 정강이를 훑었다. 하얀 다리에 어울리지 않는 동그란 흉터가 여러 군데 일직선으로 있었다. 살짝 파여서 다른 피부색보다 짙은 그 동그란 오래된 상처를 영인이 톡톡 두드렸다.

“여긴 왜 이래요?”

“대학생 때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가 나서 철심 박았었어요. 남자는 이런 거 하나씩 다 있는 거 아닌가?”

백이 와하하 웃고는 그 흉을 한번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이제 아프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흔적은 남아 있었다. 백이 의식하지 않고 살아도 몸만큼은 언제까지고 잊지 않을 사고였다.

“22살 되기 전 일이에요. 22살 전에는 아주 위험하게 살았죠. 그럴 나이잖아요. 죽거나 다치는 게 나랑은 아주 먼 일이라고 착각하고 만용을 부리는 나이.”

백의 음성이 쓸쓸하게 들렸다. 영인은 당장 철모르는 어린 시절 백이 저지른 어리석음의 증거들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풋내나고 어설프면서 생동감 넘쳤을 그때의 백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었다.

“집에 가자.”

그런 영인의 마음을 읽은 듯 백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더는 발가락도 아프지 않은지 발을 자유롭게 까닥인 채로. 움직일 때마다 얇은 발등 피부 위로 백의 뼈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반듯한 뼈마저도 단정하고 야해 보였다. 영인이 참지 못하고 그 발등을 손으로 꽉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발목과 복숭아뼈를 몇 번 쓸었다. 뜨겁고 거친 피부 촉감에 백이 찡그리듯 미소 지었다.

헬스장에서 샤워까지 마친 둘은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 한 커피를 하나씩 들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백은 아랑곳하지 않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꿋꿋하게 마셨다. 그리고 영인은 내내 백의 다친 발을 들여다보느라 바빴다.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은 백이 소파에 길게 눕자 영인이 바로 발치에 앉아 다시 백의 발을 확인했다.

“아파요?”

“걸을 때 조금?”

백이 영인의 허벅지 위에 발을 올리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발가락을 영인이 귀엽다는 듯이 보다가 덥석 잡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백은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놀라 발에 힘을 줘 빼려고 했지만, 영인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아직도 빨간 새끼발가락 끝에 영인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자 채 가라앉지 않은 통증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발끝부터 저릿함이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영인이 선사하는 달콤한 고통이었다. 백의 닫힌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가볍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영인이 조금 더 과감하게 백의 발가락을 입 안에 넣고 쭉 빨았다. 뜨거운 혀가 닿는 곳마다 간지러움을 넘어선 묘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질척거리는 음욕의 늪에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영인이 양손으로 백의 가랑이를 잡아 벌렸다. 큰 손이 빈틈없이 백에게 달라붙었다. 푸른 핏줄이 손등부터 팔뚝까지 이어져 있었다. 열이 오를 대로 올라 맞닿은 부분이 아주 뜨거웠다.

곧 영인이 뱀처럼 느긋하게 백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발가락을 핥아 대던 혀가 발등을 자극했다. 살집 없는 발등 위로 백의 뼈대와 얇은 근육이 아우성쳤다.

“하아.”

백의 입에서 한숨 같은 신음이 터졌다. 영인이 여린 허벅지 살을 강하게 잡아 쥐고 놓지 않았다. 백의 몸이 강한 압력에 잠시 꿈틀거렸다. 그러나 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백의 발목을 지나 아까부터 입 맞추고 싶었던 흉터에 입술을 가져갔다. 혀끝으로 그 흉을 누르고 핥았다. 마치 그때의 백을 맛보듯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행위였다. 취할수록 아쉬웠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과거였다.

춥춥거리는 젖은 입맞춤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백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있는 영인의 손가락을 꽉 붙잡았다. 영인이 잔뜩 탐한 정강이를 코끝과 이마로 비비며 인사하고 조금 더 위로 올라왔다. 젖은 숨이 닿은 백의 피부가 잘게 떨렸다.

그 떨림을 느낀 영인이 자신의 손가락을 붙든 백의 손가락을 함께 맞잡아 주었다. 두 남자의 손가락이 빈틈없이 얽혀들었다. 고개를 들고 백을 올려다보며 영인이 입을 열었다. 낮고 탁한 음성이 백의 피부를 뚫고 들어와 여린 속을 헤집었다.

“내가 빨아도 되겠어요?”

백이 마른 침을 삼켰다. 입술을 혀로 핥았지만 금세 버석버석 말라붙는 것 같았다. 영인은 백의 눈을 응시하며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했지만 그 시선에는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칠 정염이 들끓고 있었다.

세 번째로 혀를 내어 입술을 축인 후에야 백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승낙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영인이 얇은 바지 위로 솟아오른 백의 중심에 얼굴을 묻었다. 서로 매달리듯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로 꽉 잡고서는 누구 하나 먼저 힘을 빼지 않았다.

“으읏.”

영인이 옷 위로 백의 성기에 입을 맞추었다. 은은한 맥동이 느껴졌다. 이로 바지를 물어 천천히 당기자 백이 허리를 살짝 들어 협조했다. 실내용 고무줄 반바지가 힘없이 스르륵 내려갔다. 이제 백과 영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짙은 회색의 속옷뿐이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드로어즈의 고무밴드를 영인이 물어서 당겼다가 일부러 놓쳤다. 탄력 있게 늘어난 밴드가 탁 소리 나게 백의 판판한 아랫배에 부딪히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게 뭐라고 백의 입에서 대번에 아흑 하고 애달픈 소리가 쏟아졌다. 영인이 속옷째로 백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얇은 천이 금방 척척하게 젖어 성기에 딱 달라붙었고 그 부분만 검게 물들어 갔다.

백은 영인의 머리통이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처박혀 있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너무 자극적이었다. 영인은 정신없이 백의 것을 핥고 빨아댔다. 속옷 위로 느껴지는 쾌감이 전신으로 야릇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한없이 안타까웠다. 아무것도 없이 영인을 느끼고 싶었다. 진력이 나게 빨리고 싶었다.

백이 영인의 손가락을 더욱 세게 조이며 잡았다. 의도적으로 허리를 들어 영인의 얼굴에 가까이 갖다 대며 영인을 재촉했다. 영인이 젖은 눈으로 그런 백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생일 케이크 위에 촛불을 끄듯 ‘후’ 하고 백의 성기 끝에 바람을 불었다. 젖은 천 위로 여린 숨이 닿자 소름이 돋았다.

영인이 웃으며 백과 잡고 있던 손을 뺐다. 그리고 드디어 백의 드로어즈를 쑥 내려 아예 벗겨 버렸다. 잔뜩 흥분해 붉게 달아오른 성기를 보자 영인의 흔들리던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백의 욕망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영인을 위로했다. 남자인 자신이어도 괜찮다는 확답을 다시 한번 받은 셈이었다. 지난번보다 영인은 좀 더 과감해졌다.

제법 길고 굵은 백의 성기를 영인이 망설이지 않고 한입에 물었다. 목구멍 끝이 찔리는데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백은 내내 애달았던 중심을 단숨에 감싼 영인의 여린 입 안과 혀에 정신이 날아가는 듯했다. 뜨겁고 물컹하고 축축한 볼 안쪽 점막이 쉴 새 없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며 백을 애무했다.

“흐아앗! 하.”

백의 입에서 길고 들끓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백이 온몸을 길게 늘이며 몸살 했다. 쾌락이 용암처럼 쏟아졌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영인이 흘낏 시선만 올려 그런 백을 감상했다. 이리저리 꿈틀거리는 근육들이 아름다웠다. 백의 성기를 문 채로 군침을 삼켰다.

영인이 백이 절정까지 가기 직전에야 백을 놓아주었다. 그것은 해방이라기보다 새로운 속박이었다. 백이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쉬며 영인을 보았다. 약간 원망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영인도 마음 같아서는 백을 끝까지 몰아붙이고 싶었다. 백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싶었다. 정액과 땀, 침, 백의 애원과 울음. 나오는 것이 그 어떤 것이든.

백의 고환을 영인이 손바닥으로 가볍게 문지르다 위로 올리며 드러난 회음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다리 좀 들어 봐요.”

백은 이제 다음 단계를 알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잡고 느리게 백이 다리를 벌리며 올렸다. 영인은 자세가 성에 차지 않는지 백의 양 볼기를 잡고 하체를 더 위로 올렸다. 백의 몸이 거의 반으로 접힐 지경이 되어서야 영인이 자리를 잡았다. 백은 눈앞에 덜렁거리는 자신의 발기된 성기를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둥실 떠오른 백의 엉덩이가 자신의 코앞까지 오도록 영인이 백의 허리를 다시 고쳐 안았다. 무릎을 꿇고 앉자 백의 드러난 등과 영인의 몸체가 맞붙었다.

입을 벌려 백의 봉긋한 엉덩이를 영인이 한입 베어 물었다. 처음에는 입술로만 살짝 물었다가 놓았지만, 이내 참을 수 없었는지 이를 세워 그 살덩어리를 꽉 깨물었다.

“아!”

백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나오고서야 영인이 물러섰다. 잇자국이 난 하얀 엉덩이가 외설적으로 보였다. 병 주고 약 주듯 영인이 자신이 낸 자국을 따라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백의 은밀한 곳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백의 체향이 고스란히 영인에게로 넘어왔다.

“푸흐흣.”

백은 또 난생처음 겪는 경험에 우는지 웃는지 모를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행위를 부정하자니 영인이 상처 받을 것이고, 감내하자니 너무 수치스러웠다. 백이 이를 악물고 참기로 결정했다. 영인이 길게 혀를 내밀어 백의 엉덩이골을 가르고 느릿하게 숨겨져 있는 그곳을 핥았다. 방금 한 고민 같은 건 금방 다 날려 버릴 만큼 강력하고 낯선 감각이 백을 뒤흔들었다.

영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준비된 만찬을 최대한 천천히 즐길 생각이었다. 백의 떠 있는 상체가 내려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릎 꿇고 있는 자신의 하체를 더욱 바짝 백의 어깨 쪽으로 옮겼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벌어진 허벅지를 단단히 잡아 안았다. 우뚝 솟은 코로 백의 부드럽고 약한 부분을 헤치고 들어갔다. 품 안에 있는 백의 전신이 떨려왔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백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혀를 넓적하게 해 전체적으로 핥았다. 백의 도톰한 회음부와 꽉 다물어져 있는 구멍을 달래는 듯한 행위였다. 한참 반복해서 흠뻑 젖고 부드러워졌다고 생각이 되자 혀에 힘을 줘 본격적으로 백의 입구를 두드렸다. 톡, 톡, 톡, 톡. 영인의 음란한 노크가 이어졌다. 백의 구멍이 약 올리듯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히며 침입자를 도발했다.

열락과 수치로 엉망이 된 백이 손에 힘을 주었지만, 무엇도 붙잡을 것이 없었다. 영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계속 백의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흐윽.”

결국 백의 애달픈 신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빠끔 벌어진 틈을 영인이 놓치지 않고 파헤쳤다. 고작 짧은 혀일 뿐인데 백은 왜인지 끝도 없이 침략당하는 느낌이었다. 영인은 보물이라도 찾듯이 집요하게 백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백의 안에는 답이 있을 것 같았다. 백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백에게서 이 흔들리고 어지러운 영인의 마음을 달래 줄 묘약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쁜 중독이 아닌 치료와 구원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영인은 어느새 필사적으로 백을 탐했다.

백의 허리가 뒤틀리고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영인을 차내고 벗어나려는 백의 몸짓은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영인이 더 강하게 백을 끌어안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아예 백의 안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강영인으로 사는 것에 지쳤다. 영인은 백이 되고 싶었다.

“하아… 앗! 과장님! 큽… 그만.”

기어코 백의 입에서 애원이 터져 나왔다. 백이 붙들린 허벅지에 힘을 줘 벌어진 다리를 모으기 위해 애썼다. 영인의 목에 허벅지 안쪽이 닿고서야 영인이 정신을 차린 듯 다리 사이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코끝과 입술, 턱이 온통 침으로 번들거렸다.

여태까지 영인에게 붙들려 정신없이 몰아 붙여지던 백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땀과 애욕으로 물들어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천진해졌다.

“얼굴이 그게 뭡니까? 바보같이.”

백이 팔을 뻗어 영인을 붙잡아 당겼다. 영인이 힘없이 백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백이 두 다리로 영인의 허리를 감싸고, 팔로 영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남자는 순식간에 무력해졌다. 방금까지 폭력 같은 애정을 쏟아붓던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절박하게 서두르는 영인을 달래듯 백이 영인의 등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영인에게 키스했다. 살짝 둘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백이 영인과 시선을 맞춘 뒤에 다시 영인의 입술을 물었다. 급하고 일방적이었던 영인의 시간은 끝나 버렸다. 백이 터질 것같이 부푼 영인의 앞섶에 자신의 젖은 성기를 대고 허리를 움직이며 속삭였다.

“천천히 합시다. 내 사정도 좀 봐주고. 내일 출근.”

영인이 천천히 손을 내려 백의 엉덩이를 벌리고 틈을 가르며 문질렀다. 그리고 구멍이 움찔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질척이고 뜨거운 내벽이 손가락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백은 혀와 달리 단단한 손가락의 침입에 적응하느라 노력 중이었다. 뺨을 소파에 문지르며 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이 세 개째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영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리는데 백의 시선이 느껴졌다. 백이 큰 결심을 한 듯 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열었다.

“나도… 빨아 줄까요?”

백의 질문을 들은 영인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백을 보았다. 백은 벌써 마음을 정한 것인지 자신의 입술에 침을 묻히고 있었다. 눈으로는 영인의 성기 사이즈를 가늠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영인이 자신의 것을 손으로 쥐고 백에게 전시하듯 보여 주었다. 해 주리라고 마음먹었는데 저렇게 되물으면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백은 받기만 하는 성격이 못되었다. 나름 결연한 표정으로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인은 그 각오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장에라도 백의 얼굴에 사정할 수 있을 정도로 흥분되었다.

“다음에.”

다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영인은 다음을 기약했다. 백이 자신의 성기를 핥고 빠는 상상만으로도 성기로 아프게 피가 몰렸다. 그리고 동시에 어쩐지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백은 이런 일을 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된 것이 유감스러웠다. 백이 무슨 대답을 하기 전에 영인이 백의 엉덩이를 손으로 힘껏 벌렸다.

“우앗!”

백이 당황하여 큰소리를 냈지만, 영인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귀두를 빠끔거리는 백의 구멍에 맞추고 천천히 힘을 주었다. 이미 최대한 이완이 되었을 텐데도 구멍은 영인을 받아들이기 버거워 보였다. 백이 고통을 참기 위해 매끄러운 소파를 긁어 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이로 문 아랫입술을 영인이 응시했다. 모두 빛나는 모습이었다. 비극이어서 명작이 된 여러 작품처럼 슬프고 아름다웠다.

진입이 쉽지 않았다. 다른 윤활제 없이 영인의 타액만으로는 역부족인 듯했다. 백은 젤 없는 삽입 때문에 오히려 영인의 성기가 더 그대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좁은 구멍과 내벽이 영인의 모양대로 갈라지는 것만 같아 선뜩해졌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백의 팔을 쓰다듬으며 영인이 작게 물었다.

“힘들면 침대로 갈까요?”

백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라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던 영인이 백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 성기를 백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백은 윽윽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런 영인을 막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마침내 성기의 뿌리까지 모조리 백의 몸 안으로 들어가자 영인이 백의 상체에 자신의 상체를 기대듯 숙였다. 둘의 온몸이 맞붙었다. 영인은 최대한 많은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사람처럼 백에게 매달렸다. 백이 그런 영인을 안아 주자 영인은 더 들어갈 곳이 없는데도 자꾸만 안쪽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백이 좋아질수록 짙어지는 불안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영인의 불행이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 가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했다. 행복은 영인을 두렵게 했다. 불행한 현실만이 영인을 안도하게 했다. 영인은 백이 좋았다. 그래서 슬펐다.

당장의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영인이 눈앞의 백에게 집중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세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백을 보았다. 백은 익숙해진 통증과 쾌락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 *

영인은 몰려오는 두통에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큰 숨소리에 프로젝트 룸에 있는 모두가 영인을 보았다. 갑자기 쏟아진 시선에 영인이 당황해서 헛기침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럴 때는 담배가 도움이 되었다. 불편한 공간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고, 답답한 속을 풀 수도 있었다.

수림과 태준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영인은 불편했다. 지난번 테스트 이후로 모두 날이 서 있었다. 수림은 수림대로 태준의 몫까지 개발하려니 예민해져 있었고, 태준도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프로젝트 내 분위기에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영인은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모두 자신이 떠안아 개발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옆에서 매일 같은 이야기를 하며 큰 소리를 내는 둘 때문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모든 것이 나쁜 일의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어떤 거대한 불행이 다가오는 듯했다. 이런 예감이 들 때면 늘 틀리지 않았다. 먼 훗날 돌이켜 보면 ‘그래, 그때부터 뭔가 이상했었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흡연이 가능한 외부 공간에서 영인이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순식간에 긴장했던 몸을 느른하게 만들어 주었다. 살짝 입을 벌려 하 하고 내쉬자 숨이 하얗게 번졌다.

“강영인.”

갑작스러운 부름에 영인이 고개를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뾰족한 손끝이 영인의 뺨을 기다렸다는 듯이 찔러 왔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은 역시 백이었다. 한쪽 옆구리에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낀 채로 서 있는 모양을 보니 어딘가 가는 길에 영인을 발견한 듯했다.

“몸에 안 좋은 건 다 하는구만.”

백이 영인의 입에 물린 담배를 보며 혀를 찼다. 영인이 백에게로 연기가 가지 않게 하려고 입을 백의 반대 방향으로 돌려 후 짧은 숨을 내뱉고 큰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리고 이로 물고 있던 담배를 황급히 빼서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일련의 과정이 모두 익숙해 보였다. 백을 대하는 태도만 빼고.

백은 그런 영인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담배와 쓸쓸해 보이는 영인은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사람들이 왜 흡연을 멋으로 한다는지 알겠네. 근데 건강 생각해서 좀 줄여 보지?”

백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영인은 아직 담배 냄새가 묻어 있는 손을 등 뒤로 감출 뿐이었다.

“프로젝트 룸 분위기 많이 불편해요?”

백이 흡연 공간에 놓인 벤치에 앉으며 물었다. 영인은 뒤돌아 그런 백과 마주 보고 섰다. 백은 다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곧 정리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해결해 줄게.”

영인의 마음속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백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불안의 원인은 결국 백이었다. 백이 소중해질수록 두려움은 가중되었다.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은 백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불행해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행복 여부는 영인에게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백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영인을 올려다보았다.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으쌰!”

다리를 구르듯이 움직이더니 풀쩍 일어섰다. 그러고는 자신을 보고 있지만 좀처럼 먼저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영인을 향해 걸음을 크게 옮겼다.

“이따 저녁 먹을 때 봐요.”

누구도 보지 못할 순간을 노려 백의 손가락이 영인의 귓불을 가볍게 붙잡았다가 놓았다. 영인이 놀라서 백을 보자 이미 저만치 멀어진 백이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짧은 찰나의 터치에도 영인은 한참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가만히 손을 들어 이미 떠난 백의 체온이 닿았던 곳을 더듬거리며 조금이라도 그 여운을 찾기 위해 애썼다.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흔들림 없이 직진하는 백이 보였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바람에 곧 그 뒷모습은 작아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를 든 몇 명의 남자들이 백에게 아는 척하며 다가왔다. 금세 무리에 싸인 백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역시 백은 영인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영인은 주머니를 뒤져 다시 담뱃갑을 꺼냈다. 자신은 백이 없으면… 백이 없으면… 생각해 보면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가 재투성이로 돌아가듯 영인도 그냥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영인에게는 흘리고 돌아올 유리구두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영인의 마법이 풀리면 그를 되찾으러 올 수 있는 왕자는 없었다. 괜찮았다. 잠시 꾼 단꿈으로 영인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영인은 오랜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깊은 밤을 홀로 부유하고 있었다. 눈을 감자 어둠뿐인 세상에서 진이 나타났다. 평소보다 더 영인을 원망하는 얼굴이었다. 입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말 하지 않고 영인을 응시했다. 그 시선만으로도 영인은 다시 처벌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괴로웠다. 자신 때문에 끊어진 생을 뒤로하고 단꿈이라니. 잠시의 안식이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욕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었다. 비로소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였을 때 영인을 노려보던 얼굴이 백의 얼굴로 변하였다. 꿈의 연인도 현실의 연인도 모두 영인을 미워했다. 영인도 영인이 미웠다. 어서 제자리로 가야 했다. 더 낮아질 곳이 없는 곳이 영인의 자리였다. 밑바닥은 비참할지언정 더 이상의 추락은 없는 영인만의 안락한 안식처였다. 그곳에는 반드시 혼자 있어야 했다. 다른 사람을 끌고 갈 수 없었다.

정리해 주겠다는 백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다음 날부터 프로젝트 룸이 조용해졌다. 태준이 고분고분 수림이 시키는 일을 맡아 하게 된 것이었다. 더 이상의 기 싸움은 없었다. 수림도 사사건건 걸려 오던 태클이 없어지자 굳이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태준의 개발 건 중 중요한 부분은 영인과 수림이 나눠 가졌다.

태준은 테스트 데이터 생성과 어렵지 않은 개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수림은 자신의 돈도 아닌데 태준에게 책정된 몸값이 아까웠다. 태준이 맡은 것들은 자기네 팀 신입사원을 데려다가 해도 될 일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금 와서 새로운 인원을 소싱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국내 법인 오픈까지는 어쨌든 지금 있는 사람들끼리 굴러야 했다.

수림은 이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백이 얼마나 강수를 두었는지 알고 있었다. 개발자 투입은 전적으로 영화 시스템즈의 권한이었다. 보통은 그래서 영화 전자에서 이래라저래라하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 백은 그런 월권을 행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다른 업무 때문에 팀에 가 있던 백에게서 전화가 왔다. 태준을 담당하는 에이전시에 속한 개발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묻는 말로 통화는 시작되었다. 수림은 직감적으로 백이 회사 차원에서 컴플레인을 걸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먹힌 것인지 하여튼 오늘 태준은 기가 죽었고 업무 분위기는 억지로나마 평화로워졌다. 이럴 때면 가끔 백이 무서웠다. 말로만 빽빽거리는 자신과는 분명 달랐다. 아무튼 덕분에 편해졌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백은 이 평화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면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자신의 업무를 하고 있었다. 백 같은 사람만 있으면 아무리 업무가 힘들어도 할 만했다. 수림이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백을 흘낏 훔쳐보았다. 그리고 절대로 백과 척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업무 분장표를 수정했다.

어지럽던 프로젝트가 다시 순항을 시작했다. 사무실 안에 사람들은 모두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랑과 확신,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다른 수많은 감정들이 고요하게 소용돌이쳤다. 잔잔해 보이는 수면의 아래에는 비밀스러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어쨌든 머지않아 곧 9월이 되면 1차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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