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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은 기대하지 않는 삶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도, 상대가 자신의 기대를 알아채고 부담을 느끼는 것도 모두 영인을 괴롭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일들로 상처 받지 않으려다 보니 기대하지 않는 법을 저절로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자꾸만, 왜 자꾸만 백에게는 무엇을 기대하게 되는지 영인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프로젝트 룸에 도착하고서도 한참을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것이었다.
어쩐지 오늘도 백이 없으면 실망할 것 같았다. 내일 보자고 이야기한 건 백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는데 앞에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것은 역시 백이었다.
“어라? 왔으면 들어오지 뭐 하고 있어요.”
전보다 약간 여윈 백이 영인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백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상무님이 부르셔서 다녀올게요. 오면 같이 아침 먹으러 갑시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백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 영인이 들어가도록 문을 잡고 섰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춘 영인이 백의 얼굴을 다시 살피며 물었다. 평소답지 않게 백이 그런 영인의 시선을 피했다.
“있었죠. 무슨 일.”
크게 고개를 한번 주억거린 백이 영인의 큰 등을 가볍게 밀었다. 더 이상 영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감정의 인정까지도 힘들었지만, 그 감정을 인정하고 상대를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 영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미안했다.
좋아하는 감정만으로도 죄가 될 수도 있었다. 사랑의 시작이 죄의식이라니. 백이 닫힌 문을 돌아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백에게 사랑은 언제나 쟁취였다. 첫눈에 반하든 서서히 스며들든 언제나 먼저 사랑에 빠지는 쪽은 늘 백이었다. 그리고 버림받는 쪽도 백이었다. 백의 연애 횟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생각보다 너무 적은 연애 경험 때문에 놀라고는 했다.
백은 정말로 자신의 모든 걸 내어 줄 수 있는 상대와만 사귀었다. 여태까지 그런 사람이 3명이었다. 가장 짧은 연애 기간도 2년이 넘었고, 33살에 헤어진 마지막 여자친구와는 5년이 넘게 만났었다. 강영인이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백이 영인의 등에 닿았던 손바닥을 괜히 한번 보고 조을현 상무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 상무님이 부르셔서요.”
상무의 개인 집무실 앞에서 담당 비서에게 방문 목적을 말했다. 비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백이 들어가도록 안내해 주었다.
“상무님, 아침 드셨습니까?”
“백이 왔나. 마누라가 차려 준 밥 묵었지.”
을현이 가볍게 턱짓으로 응접용 소파를 가리켰다. 백이 앉자 자신도 백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에는 백이 올린 투자심의보고서 출력물이 한가득이었다.
“니 이거 진짜 자신 있나?”
빨간펜으로 여기저기 별표며 밑줄 같은 것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비용 대비 경제적 수익,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안 관리의 용이성 같은 것들을 백이 꼼꼼하게 파악해 둔 부분이었다.
“제가 언제 자신 없을 짓 하는 거 보셨습니까?”
백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꼬장꼬장하고 융통성 없는 을현 앞에서도 백은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을현은 그 점을 굉장히 높게 샀다.
“그러면 이거 이번에 국내 법인 적용하고, 중국으로 바로 확장해. 거기가 제일 문제 아니겠나.”
“네, 준비해 보겠습니다.”
백과 을현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일 잘하는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법이었다. 가 보라는 말을 기다리는 백에게 아주 엉뚱한 말이 쏟아졌다.
“백아, 니 장가 안 가나?”
갑작스러운 을현의 결혼 공격에 백의 표정에 잠시 허점이 드러났다.
“상대가 있어야 가죠.”
“너 인마 너무 눈이 높은 거 아이가. 니 팀장 하고 싶으면 장가 가야 해.”
“네, 상무님.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진짜로. 처자식도 없는 놈을 어떻게 팀장 시키나. 일 백날 잘해 봐야 소용없어. 내가 참한 아가씨로 소개 좀 해 줄까?”
“아입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백이 을현의 경상도 억양과 서울 말씨가 섞인 말투를 따라 하자 을현이 우하하 웃었다.
“니 못 당하겠다. 가 봐라.”
“네. 법인 확장 적용 건은 정리되면 올리겠습니다.”
을현이 성의 없이 손을 휘저었고 백은 해방되었다. 입맛이 싹 달아났다. 그나저나 영인을 마주 보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을 수 있을지 그것도 고민이었다. 그런데도 함께 먹고 싶었다.
조 상무의 잔소리로 나빠졌던 기분이 영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나아졌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랑의 힘이었다.
아, 사랑의 힘이라니. 백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이 마음을 들킨다면 영인은 경멸하는 얼굴로 자신을 볼 것이었다. 어쩌면 주먹으로 칠 수도 있었다. 그 주먹에 맞으면 최소 기절일 텐데.
그렇지만 백은 달려 나가는 마음을 멈추게 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멈추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인생은 짧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도 아쉬울 인생을 머뭇거리며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백에게는, 백의 인생에는 후진 기어라고는 없었다.
백이 아까보다 용감하게 영인이 있는 프로젝트 룸을 향해 걸어갔다.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고 싶었다. 영인의 엄청난 주먹에 맞아야 한다면 그것도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프로젝트 룸 문을 열자 커다란 영인의 모습이 보였다. 백이 살짝 말아쥔 손으로 열린 문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밥 먹으러 갑시다.”
영인이 작업하던 것을 저장하고 백의 곁으로 갔다. 오늘도 백과 산 피케 셔츠 중 하나를 입고 있었다. 평소에는 여간해서 백에게 말 거는 법이 없던 영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 본 사이 이렇게 수척해진 백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상무님한테 혼났습니까?”
“그럴 리가.”
백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말투로 과장되게 대답했다.
“걱정돼요?”
그러고는 물었다.
“그럴 리가요.”
백이 영인에게 익숙해졌듯, 영인도 백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영인은 백이 거는 게임을 이제 이해하고 있었다. 선뜻 도발되지 않는 영인을 보고 백이 미소 지었다. 이런 사소한 대화조차 척박한 삶의 단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백은 이미 마음속으로 영인에게 백기 투항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버리고 나니 영인을 피했던 지난 일주일마저 아까워졌다.
퇴근하고 샤워까지 마친 백은 서재의 문을 꼭꼭 닫고 다시 한번 노트북과 이어폰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지 체크 했다. 행여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고 생각하면 아찔했다. 클릭 한 번이면 됐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포르노라니. 어릴 때나 넘치는 호기심과 욕정을 못 이겨 보았지 나이 먹고 진짜 연애를 하며 관계를 갖고 난 이후로는 오히려 흥미가 떨어져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였다.
새파랗게 어린 나이도 아니고 혼자서 이런 영상을 보려고 준비를 하고 나니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했다. 정말로 동성에게 성애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
물론 지난번 영인과의 사고 같은 키스에 몸이 반응하기는 하였지만, 키스야 남자랑 하나 여자랑 하나 다를 것도 없는 행위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지.
백이 눈을 질끈 감고 정지되어 있던 영상을 재생시켰다. 큰 모니터 화면에 헐벗은 남자들이 엉겨 붙은 모습이 가득 찼다.
“이런 씨.”
백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판판한 가슴의 근육질 남자 둘이 서로를 탐하는 모습이 너무 낯설고 거부감이 들었다. 세상에 매력 있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남자 둘이서 저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영인을 떠올렸다.
백은 남들이 왜 그런지 궁금해할 처지도 못 되는 사람이었다. 자기도 영인을 생각하면, 영인의 벗은 몸을 생각하면… 요란한 신음이 터져 나오는 영상을 백이 꺼 버렸다. 이런 것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백이 영인의 벗은 몸을 떠올렸다. 함께 체육관에 간 날 백은 영인의 몸을 보았었다.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우람한 등 근육과 곧게 뻗어 있던 척추, 강인해 보이는 어깨와 목선. 그러면서 동시에 둔탁해 보이지 않던 긴 팔다리까지 백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영인의 몸은 공들여 무두질한 가죽처럼 본디 날 것이었을 무엇이 잘 손질된 모양이었다. 탐스러워 보이면서도 어떤 야성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묵직해진 아랫도리를 백이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백은 영인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녀를 떠나서 영인이라는 존재에게 욕정이 생겼다. 영인에게라면 박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백은 혼자 이미 100리는 앞서 달렸다.
사랑하면 당연히 섹스도 해야지. 백이 노트북 전원을 끄고 어기적어기적 욕실로 걸어갔다. 다시 몸을 씻어야 할 것 같았다.
* * *
“김 차장님! 그건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백의 언성이 높아진 것은 태준이 영인과 수림의 관계를 물고 늘어졌을 때였다. 백은 영인의 눈가에 스치는 불안을 읽었다. 주성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의 화난 모습에 놀란 기색이었다. 웬만한 진상이 와도 백은 수완 좋게 웃으면서 해결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백의 얼굴에 지금은 어떤 웃음의 잔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싸움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1차 개발 건까지 데이터를 흘려 실전처럼 테스트하는 계획을 수림과 백이 잡고 있었다. 각자 개발한 부분에 대한 테스트 케이스를 만들어 백이 최종 정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테스트 날짜였다. 주중은 개발 일정만으로도 이미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하루 날을 잡아 진행해야 했다. 영인이야 언제든 정해지면 군말 없이 나올 것이니 수림은 바로 태준에게 먼저 가능한 요일을 물었다.
“김 차장님, 이번 주 언제가 좋으세요?”
크게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렇지 못했다.
“테스트 케이스까진 작성 가능하지만 테스트 참여는 불가합니다. 통합테스트는 PI 업무 영역입니다.”
대답을 들은 수림이 조소했다. 이상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교과서 중심으로 학교 선생님 수업을 열심히 들어서 수능 1등급 받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기도 했다. 실무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작년에 대학교 졸업해서 막 입사한 초짜도 아니고 이 바닥에서 구를 만큼 구른 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는 것을 수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상대가 사이코처럼 군다면 수림은 미친개가 될 자신이 있었다.
“테스트야 노백 책임이 진행해도 같이 보면서 뭐가 문제인지 눈으로 확인해야 제대로 수정을 하죠. 혹시 데이터 문제거나 방법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럴 때 당연히 지원해야 하는 게 개발자 업무잖아요.”
수림이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태준과 눈을 마주쳤다. 회식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을 때 진작에 저 사람이 꼴통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원통할 지경이었다.
“저는 임 책임님이랑은 다르게 업무 외 시간에 일해도 특근비 같은 것도 없어요. 제가 계약한 맨먼스(man/month)대로만 참여할 예정입니다.”
“하아, 진짜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투입 기간 동안 앉아만 있으면 공짜로 돈 주는 데도 있어요? 아웃풋이 제대로 나와야 할 거 아니에요!”
수림과 태준의 대화를 들으며 백은 무엇이 최선의 경우인지 따져보고 있었다. 첫 번째는 태준의 말대로 테스트에서 태준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에러가 난 부분은 따로 체크했다가 주중에 태준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일단 수림의 말대로 비효율적이었으며, 이 테스트에서 가장 문제가 될 파트가 태준의 개발 건이라는 점이었다. 영인이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면 흔쾌히 그러라고 할 수 있었는데 태준이라면 말이 달랐다.
두 번째 방법은 수림의 말대로 태준을 강제로라도 부르는 것이었다. 백이 나선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었다. 이 방법의 문제는 서로 감정이 상한다는 점이었다. 백은 웬만하면 일할 때 악역을 자처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사람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굳이 악연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냥 체력 좋고 일 잘하는 자신이 조금 더 손해 보는 셈치고 희생하는 편이 백의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두 케이스의 장단점을 헤아리며 무게를 재는 중에 태준의 입에서 강영인의 이름이 나왔다. 시선을 책상에 둔 채 고심하던 백이 바로 태준과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별 표정이 없는 얼굴로 태준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명백하게 강영인 과장이랑 차별 대우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서로 학교 동창이라고 하던데 이런 관계 문제 안 됩니까?”
자기보다 어린 여자에게 혼나다시피 한 태준도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보였다. 태준이 영인을 공격하자 수림이 심호흡했다. 그러지 않으면 욕이 나갈 것 같았다.
태준을 보던 영인이 눈을 내리깔았다. 기어코 수림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피해는 주지 말아야 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되었다. 역시 이런 프로젝트에는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모든 것이 또 버거워지고 있었다. 존재하지 않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때 백의 싸늘한 음성이 프로젝트 룸을 울린 것이었다.
“김 차장님! 그건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백의 얼굴에는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닌데 백의 말을 들은 모두가 잠시 긴장했다.
“강영인 과장은 내가 뽑은 개발자입니다. 지금 이 공장 안에서 강영인 과장보다 코딩 잘하는 사람 없는 거로 아는데.”
백이 자신의 역성을 들어주는 듯 느낀 수림이 보란 듯이 비죽 웃으며 태준을 보았다. 태준은 예상하지 못한 백의 개입에 당황한 듯했다. 영화 전자 노백은 평화주의자라는 평가를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잠깐 저랑 나가서 이야기 좀 하시죠.”
백이 뚜벅뚜벅 걸어 태준의 테이블을 중지로 톡톡 치고 먼저 프로젝트 룸 밖으로 나갔다. 처음 보는 백의 모습에 주성까지 덩달아 쫄아 고개를 숙였다. 태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백의 뒤를 따라나섰지만 내심 초조해 보였다.
기다란 복도에는 태준과 백 두 사람뿐이었다. 백이 태준을 내려다보았다. 적당히 벌리고 선 다리 때문인지 무표정한 얼굴 때문인지 백에게서 저절로 권위가 느껴졌다. 여태까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던 서열 혹은 갑을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서로 웃으면서 일해야죠. 프로젝트 분위기 삭막해지면 고달픈 사람이 저겠어요, 차장님이겠어요?”
백이 부러 눈도 감지 않고 태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안 하는 것뿐이지. 찍어 눌러서 일을 성사시키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었다. 다만 백은 그쪽을 선호하지 않았기에 그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토요일에 나오세요.”
백이 그 말을 끝으로 먼저 프로젝트 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준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닫았고, 태준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백이 수림과 영인 쪽을 살폈다. 수림은 백과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쓰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진심이 담긴 그 표정에 백이 피식 웃고는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었다. 영인만 보자면 이 사무실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백은 저 단단한 껍데기 안쪽이 얼마나 썩고 곪았을지 알고 있었다. 보나 마나 오늘도 약이며 술이며 잡히는 대로 주워 먹고 기절하고는 잤다고 착각하겠지.
백이 사내 메신저를 켜서 강영인의 이름을 찾아 클릭했다. 반듯한 네모 모양의 메신저 창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오늘 퇴근 후 곱창에 소주? 참치에 청주?]
엄숙한 얼굴을 하고 영인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영인은 갑작스럽게 떠오른 백의 채팅창을 발견하고는 놀랐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백은 그 동요 없는 얼굴에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다른 감정을 찾기 위해 티 내지 않고 영인을 훔쳐보았다. 곧 영인의 답장이 왔다. 강영인 이름이 새겨진 채팅창이 반짝거렸다.
[피곤합니다.]
[참치에 청주로. 10분 안에 정리하고 나오세요.]
어차피 영인이 응하리라 생각하고 한 제안도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은 그래도 위로가 필요할 테니까 밀어붙인 것이었다. 술과 약을 먹고 자기보다는 술만 먹고 자게 해 주고 싶기도 했고. 그 메신저를 끝으로 백이 먼저 컴퓨터를 종료시켰다. 영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퇴근 준비를 하는 백을 바라보았다.
“가게요?”
그런 백에게 수림이 물었다.
“응. 다들 적당히 하다가 퇴근하세요. 갈 길이 멉니다.”
백이 영인을 보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눈짓을 하고는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곧 영인이 알아서 자신의 차로 오리라는 것을 백은 알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영인은 백의 말을 결국에는 들어주었다.
잠시 후 영인이 백의 차로 왔다. 일찍 출근하는 백은 항상 비슷한 곳에 주차했기 때문에 차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영인이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보조석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안전벨트. 다른 사람들이랑 가면 실장 스페셜 먹을 거 우리 둘이 가면 혼마구로 스페셜 먹는 거죠.”
백의 너스레에 영인이 힘없이 웃고는 안전벨트를 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백의 차가 앞으로 출발했다.
영인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백은 식당 예약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작은 방으로 둘을 안내했다. 커다란 상은 두 사람을 위한 세팅이 다 되어 있는 상태였다.
“혼마구로 스페셜로 주시고요, 술은 청하 주세요.”
백이 앉자마자 주문을 했고 영인은 엉거주춤 그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여긴 무한리필 아니고 딱 3번만 나오니까 먹고 모자라면 말해요.”
백이 다정하게 말했고 영인은 이 자리가 말할 수 없이 불편해졌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백은 나에게 왜 이럴까?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알면 분명히 도망갈 텐데.
내가 얼마나 더럽고 역겹고 재수 없는 인간인지 알게 된다면 그때는 나와 눈도 마주쳐 주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영인에게 이 모든 것을 파괴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일한답시고 프로젝트에 남아 수림을 곤란하게 하는 것도, 이 멋모르는 남자 장단에 놀아나는 것도 모두 그만두고 싶어졌다. 외면받기 전에 쫓아 버리고 싶었다.
영인은 망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백과의 이 어쭙잖은 관계를 깨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주 조금 겁만 주면 될 것이었다. 영인의 본모습을 살짝만 말해 줘도 백은 영인을 자신의 삶에서 망설임 없이 쫓아낼 것이 분명했다. 자신은 백에게 이토록 쉽고 가벼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백은 자신의 삶에서 자꾸만 영역을 넓혀갈 텐데 그것은 정말로 영인이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누구도 영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했고, 누구도 영인에게 중요해져서는 안 됐다.
참치회보다 먼저 나온 술을 영인이 술잔이 아닌 물잔에 가득 따랐다. 그리고 백이 채 잔을 채우기도 전에 그대로 그 술을 모조리 비웠다. 백은 얼빠진 얼굴로 영인을 보았고 영인은 백의 손에 들린 술병을 다시 빼앗아 들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백이 거칠게 영인이 들고 있던 물잔을 가져갔다. 빈속에 거의 술 한 병을 한 번에 비운 영인의 눈가가 바로 붉게 달아올랐다. 백이 아까 태준을 볼 때와는 다른 표정으로 영인을 보았다. 명백한 분노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미쳤어요?”
화를 숨기지 않은 백의 말을 듣고 영인이 비식거렸다. 웃고는 있지만 사실 두려웠다. 백으로 인해 잠시나마 느꼈던 평범한 일상을 이제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다.
“벌써 이렇게 화내면 어떻게 합니까?”
영인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백을 보았다. 이제 이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무서운 이야기를 해 줄 건데.”
영인은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코미디언처럼 웃었다. 그가 던지는 농담에 웃어 주는 이는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책임님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내가 특별히 말해 주는 거예요. 근데 술 한 병만 더 시켜 주면 안 되나?”
영인의 입에서 끊임없이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첫 번째 참치회 접시를 가지고 직원이 들어오자 백이 청하를 다시 주문했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얼굴이었다.
영인이 천천히 목을 꺾어 스트레칭했다. 굵은 목 근육이 도드라졌다. 양쪽 어깨까지 한 번씩 내려 몸을 푼 영인이 새까만 눈으로 백을 응시했다. 그 움직임은 먹잇감을 앞에 두고 몸을 푸는 맹수와 닮아 있었다. 위험해 보였다.
영인도 백도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누구 하나 먼저 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인은 분명 가만히 있었는데 백은 어쩐지 자신이 조금만 움직이면 영인이 달려들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그런 영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 보다 더.
직원이 곧 술을 가져오자 영인이 백의 앞에 있던 물잔을 다시 가져와 콸콸 술을 따랐다. 그리고 보란 듯이 백과 시선을 맞추며 다시 그 술을 마셨다. 고요한 방 안에는 영인이 술을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결국 그 잔까지 다 비우고서야 영인이 입을 열었다. 영인의 탁하고 낮은 음성이 백의 귓가를 파고들었고, 백은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책임님, 세상에는 남자 보고 발정하는 새끼들이 있어요.”
말을 마친 영인이 미소 지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영인이 살짝 벌어진 백의 다리 사이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자신의 발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백이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힘을 줘 백의 중심을 밟았다.
“나처럼.”
영인이 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백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떠날 것이다. 알량한 친구 놀음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그런 영인의 예상을 비웃듯이 백은 표정의 변화 없이 영인을 응시했다. 마치 ‘어제 잠을 설쳤어요.’ 따위의 푸념을 들어 주는 사람처럼 감흥이 없어 보였다. 지금쯤 도망가야 하는데, 화를 내고 욕을 해야 하는데 백은 그러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던 백이 영인의 발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한 백의 체온이 느껴졌다. 다른 이의 손길이 맨살에 닿는 행위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영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백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잘됐네요.”
백은 아주 산뜻한 표정이었다. 영인의 복숭아뼈를 엄지로 매만지며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이 주던 죄책감을 날려 준 영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무서운 이야기 다 끝났으면 나도 한잔할게요.”
반병 정도 남은 술을 백이 영인처럼 물잔에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 영인은 백의 반응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취한 것인지 아니 이것이 현실이 맞는지부터 혼란스러워졌다. 앞에 앉은 사람은 진짜 노백이 맞는 걸까. 나의 환상인 것은 아닐까.
백이 영인의 발을 살짝 들어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영인의 무례한 스킨십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럼 진이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어요?”
내친김에 여태까지 마음에 걸렸던 것을 모두 확인할 심산이었다. 영인은 백의 입에서 떠난 연인의 이름이 나오자 놀란 기색이었다. 지금 영인은 모든 것이 꿈 같았다. 왜 노백이 아직 자신의 앞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영인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백이 김에 참기름과 간장을 반반 찍은 참치를 올리고 무순과 생강을 얹었다. 요령 있게 젓가락으로 김을 말아 영인의 앞접시에 풀어지지 않게 뒤집어 올렸다.
“술을 그렇게 먹으니까 내가 진이를 어떻게 아는지도 모르죠. 안주 좀 드세요, 강 과장님.”
백은 영인이 큰맘 먹고 던진 폭탄에도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쑥대밭이 된 것은 영인이었다. 또다시 자신에게 주어진 백의 호의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라만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주제넘은 소리인 거 아는데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른 같은 말이었다. 어른 같은 음성이었고, 어른 같은 태도였다. 영인은 백의 앞에 벌거벗고 선 기분이었다. 한껏 겁을 줘서 쫓아내려고 했는데 도망치고 싶어진 사람은 영인 쪽이었다.
진을 떠올리면 온몸 구석구석이 아파져 왔다. 서서히 부서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걷거나 먹는 것도 못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닳고 닳다가 떨어질 날이 올 것이었다.
백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댄 채 여유 있는 모습으로 영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그 기다림에 절대 지칠 것 같지 않았다. 영인은 그런 백을 보며 자신이 어떤 멍청한 소리를 해도 지금 이 따뜻한 시선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확신의 근거가 백과 생긴 모종의 연대 의식인지 술기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영인에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밀한 죄책감의 근원을 고백할 용기가 생겼다. 수림에게도, 다니는 병원의 의사에게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였다.
“차 사고였어요.”
테이블 위에서 서로 깍지 끼고 있던 영인의 두 손이 볼품없이 떨려 왔다. 마주 잡은 손가락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하얗게 질려 보일 정도였는데도 떨림을 멈출 줄 몰랐다. 백과 차마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영인은 자신의 너절한 지난날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우린 언제나 싸웠는데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싸움의 원인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원망이나 저주 뭐 그런 것들이었죠. 만남 자체를 후회하면서도 그렇다고 헤어지지도 않고. 돌이켜보면 좋은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던 거 같아요. 꼭 서로를 상처 주려고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싸우지 않는 날이 특별한 나날이 됐고 그날이라고 다르지 않았죠.”
영인이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마디마디가 잘생긴 손가락이 부끄러운 얼굴을 감추었다. 감히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매일 새벽에나 퇴근했어요. 나는 얼른 자야 하는데 걔는 뭔가 따지고 싶어 했고 그래서 소리를 질렀던 거 같아요. 어떻게 네가 감히 뭐 그런 얼굴을 하고 그 새벽에 쿵쾅거리고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말을 멈춘 영인이 괴로운 듯 짧게 신음했다. 오랫동안 뱃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토해 내는 일은 고통스럽고 힘겨웠다. 과거는 여전히 활활 타오르며 영인의 내면을 계속해서 태우고 있었다. 재만 남을 때까지 꺼지지 않을 불길이었다.
“이제 잘 수 있겠다.”
영인이 울음을 참기 위해 자신의 혀를 씹었다.
“잠들었는데 전화가 오더라고요. 그렇게 된 이야기예요. 장례까지 다 해 주고 혼자 집에 와서 누웠는데 도무지 잘 수가 없었어요.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그리고 지금까지. 걔는 왜 그랬을까? 어느 날 밤에는 사고였을 거야 그러다가 또 다른 밤에는 죽고 싶어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불현듯 깨닫는 거예요. 아, 사고든 자살이든 나 때문이구나. 나 때문인 거야. 나만 잘했어도, 아니 나만 만나지 않았어도 지금 잘살고 있을 텐데. 지금도 숨 쉬고, 밥 먹고, 잠도 자고, 욕도 하면서 아주 잘살고 있을 텐데 나를 만나서 다 잃었구나. 용서받을 길은 없구나.”
말을 마친 영인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눈물의 흔적은 사라졌었지만, 관자놀이 근처에 툭 불거진 혈관으로 얼마나 그가 곤두서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영인의 이야기를 들은 백이 의자를 당겨 앉아 영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보고 싶고 그리운 게 아니라 그럼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이렇게 사는 겁니까?”
백은 당장에라도 테이블 위에 놓인 영인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죽고 살고, 사랑하고 사랑이 식고 그런 것들. 누구의 잘못도 아닌 문제들.
영인이 말없이 그런 백의 얼굴을 보았다. 영인을 짓누르는 죄책감의 무게가 눈에 보일 듯했다.
“나는 그런 거 싫더라. 사과할 일도 아닌데 사과하고, 자기 맘대로 미안해하는 거. 당사자가 아니어서 이런 말 아무리 해 줘도 와닿지 않죠? 그런데 그렇다고 강영인 인생을 걸레짝처럼 취급하면 속죄가 되나?”
백이 벨을 눌렀다. 직원이 들어왔을 때 이미 다 녹은 회를 물리고 새 회를 요청했고 술도 다시 주문했다. 백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보이는 영인을 보며 백은 다시 한번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저 가여운 영혼을 혼자 둘 수가 없다는 것을.
고양이는 친밀함을 표현할 때 자신의 배를 보여 주곤 했다. 가장 약한 부분을 보여 주며 상대를 향한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처럼. 나는 네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아. 나는 너에게 내 목숨을 맡길 수 있어. 백양이 그럴 때면 백은 자신도 대자로 누워 맨 배를 보여 주고는 했다.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곧 새 술과 새 음식이 들어왔다. 백이 이번에야말로 술을 술잔에 따라 영인에게 건네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영인이 자신의 죄책감을 보여 주었으니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백에게도 가족이 아닌 타인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자신의 열등감에 대해서 영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백은 이야기에 앞서 영인이 먼저 알아야 할 이름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 이름은 ‘노성윤’이었다.
백은 외동아들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외동아들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2살 터울의 형이 있었고 그의 이름이 바로 노성윤이었다.
백의 할머니 이옥자 여사는 젊어서 남편을 잃고 억척스럽게 백의 아버지 노민욱을 키웠다. 남편을 너무 일찍 잃어서 자식이라고는 민욱이 유일했다. 아주 귀한 자식이었다. 두 모자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삶의 역경을 이겨 냈다. 둘의 결말은 민욱의 출세로 인한 해피엔딩이었다.
민욱은 의대를 졸업하고서도 대도시에 남지 않고 어머니 곁에서 살겠다며 경남 소도시에 자리 잡고 그 지역의 유지라면 유지가 되었다. 전형적인 이야기였다.
고향에서 노민욱은 오정희를 만나 노성윤과 노백을 낳았다. 하나뿐인 아들이 낳은 귀한 손주들을 옥자가 얼마나 아꼈는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윤을 향한 사랑은 지나치다 싶게 지극했다.
성윤과 백이 커갈수록 차별은 노골적으로 변했다. 옥자에게 성윤과 백은 우리 장손과 그 떨거지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백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유복한 가정환경과 부모님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성윤은 장남으로서 받는 애정과 기대를 바탕으로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이 바르게 자랐다. 그럴수록 옥자는 성윤에게 집착했다. 내 아들을 쏙 빼닮은 내 손자. 너는 꼭 아빠처럼 의대에 가야 한단다. 백은 덜 사랑받는 대신에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어그러진 것은 성윤이 11살, 백이 9살이 되었던 해였다. 성윤의 투병이 시작되면서 성윤은 일상을 잃었고, 백은 부모의 관심을 잃었다. 서로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던 시기였다. 부모의 부재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백을 힘들게 한 것은 가끔 마주해야 하는 옥자의 시선이었다.
차라리 너였더라면.
백은 어린 나이에도 그 눈빛에 담긴 뜻을 눈치챌 수 있었다.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백이어야 했다는 무언의 압박을 백은 성윤이 완치할 때까지 홀로 감내해야 했다.
그 무서운 병을 이겨 낸 것으로 성윤은 집안의 영웅이 되었다. 누구도 스스로 잘 자란 백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백은 그때까지도 괜찮았다. 형이 아팠던 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안도하였다.
집안의 절정은 결국 성윤의 황금기와 함께 찾아왔다. 성윤은 소아암을 극복해 내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22살에 의대에 입학한 전례 없는 불굴의 청년이 되었다. 지역 신문에는 자신처럼 아픈 아이들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어 열심히 노력했다는 성윤의 기사가 났고 옥자는 그 신문을 10부는 사서 기사를 모두 오려 소중하게 보관했다. 우리 집의 장손은 역시 다르다며 아비의 뒤를 이어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는 말은 성윤이 의대에 입학한 후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같은 해 백도 S대 공대에 입학하였지만 역시 축하와 영광은 모두 성윤의 몫이었다. 하지만 백은 그때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들처럼 성윤이 자랑스러웠다. 부족한 형제보다는 잘난 형제가 여러모로 나았다.
그러나 성윤이 24살, 백이 22살 되던 해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균형은 깨졌고 평화도 사라졌다. 성윤의 암이 백의 가족을 놀리듯 다시 나타났다. 처음부터 가장 최적의 시기를 산산조각 내기 위해 기다려 온 불청객처럼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백은 그때야말로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나였더라면.
백마저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비극적인 일이었다. 당사자인 성윤을 제외하고 모두 절망했다. 정작 성윤은 억지로나마 웃으며 담담히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겠어. 다시 해 봐야지.”
그 힘없는 미소가 역설적이게도 성윤의 강인함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성윤은 울 시간도 아깝다는 자세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했다. 옥자는 성윤의 비보를 듣자마자 정희와 서울로 올라와서 방을 한 칸 얻고 성윤의 병시중을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절에 가서 기도했고, 어느 날은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또 어느 날은 용한 무당에게 가서 절을 해야 산다며 성윤을 병원에서 끌어내려 애썼고, 어느 날은 담당의에게 말도 안 되는 금액의 뇌물을 찔러 넣고는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때 가족 중 이성적인 사람은 오직 성윤뿐이었다. 성윤만이 냉정하게 자신의 예후를 예감했다.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천지신명이 와도 염라대왕이 와도 이번에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성윤만은 알고 있었다. 입퇴원을 반복할수록 성윤의 상태는 나빠져만 갔다.
백은 옥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옥자는 성윤의 상태가 안 좋아지면 질수록 마치 백 때문에 성윤이 아픈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모든 원망이 백에게로 쏟아졌다. 그래서 백은 사랑하는 형의 병문안도 마음껏 가지 못했다.
그날은 옥자와 정희가 또 다른 도사를 찾아간 날이었다. 성윤의 병색이 짙어갈수록 옥자는 더욱 열성적으로 대체의학으로 이름난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가지고 있는 상가와 땅, 집들을 모두 팔아서 성윤의 생명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했다.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필요 없는 사람처럼 오만 돌팔이에게 돈 봉투를 쥐여 주었다.
정희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서슬 퍼런 시모의 기세를 누르지 못해 마지못해 그 장단을 맞춰 주었다. 때마침 간병인도 부를 수 없는 날이었다. 성윤을 혼자 두고 갈 수 없기에 백에게 형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성윤은 백의 기억 속 형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메마르고 앙상한 팔다리,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와 관. 애써 표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자신을 보고 성윤이 웃었을 때 결국 백은 울고 말았다.
백이 서서히 성윤의 곁으로 다가갔다. 성윤이 백의 눈물을 모른 체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약 좀 줘. 거기 제일 위에 있는 약.”
백도 어설프게나마 눈물을 참고 되물었다.
“무슨 약이야?”
“용감해지는 약. 처음 입원해서는 까짓거 죽으면 죽는 거지 그랬는데, 진짜 코앞에 일이 되니까 엄청 무서워. 잠도 못 자겠고.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기도 하고.”
백이 약 봉투 속 약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성윤에게 건넸다. 성윤은 익숙한 듯 약을 먹고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백을 마주했다.
언제나 강건했던 성윤이 백에게 자신의 붕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백의 가슴이 조여 왔다. 건조하고 퍼석한 성윤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속삭였다.
“형, 미안해.”
말을 마친 백은 아이처럼 울었다. 주먹으로 눈물을 아무리 훔쳐도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말아야 하는데 울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뭐가?”
성윤이 백의 손을 잡기 위해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지만, 압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백의 손에서 느껴지는 맥박과 체온을 성윤의 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백아, 네가 나에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성윤은 숨이 찬지 천천히 백을 향해 말을 이어 했다. 백이 젖은 눈으로 성윤을 보았다. 성윤은 울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거? 잘살고 있는 거? 그런 게 미안해?”
성윤의 말이 맞았다. 백은 그런 것들조차 미안했다. 어제도 친구와 만나 먹은 맛있는 음식이, 학교에 가서 들은 수업이, 백이 누린 모든 일상이 죄스러웠다. 형은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데 백은 혼자만 아무렇지 않게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었다.
성윤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고작 눈꺼풀을 들고 내리는 것마저도 버거운 사람 같았다.
“나한테 사과하지 마, 백아. 그러면 나도 너한테 사과해야 하잖아.”
성윤이 말을 잇기 전 오랫동안 숨을 골랐다.
“나 때문에 너는 부모님 사랑도 못 받았고.”
백은 성윤이 말을 마칠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할머니에게 미움받고, 축하받아야 할 때 축하받지 못하고.”
성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애썼다.
“위로받아야 할 때 위로받지 못했잖아. 그런데 나 너한테 이거 안 미안해.”
성윤이 부러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얼굴 근육마저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백이 이를 악물었다.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니잖아. 내 병이, 너의 건강이 왜 서로에게 미안한 일이 되어야 해.”
성윤이 숨을 내쉴 때마다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병마는 성윤의 숨통마저 졸라 오고 있었다.
“죽어도 너한테 미안할 일 없어. 너도 꼭 그래야 해.”
이 말을 끝으로 성윤은 지친 듯 잠에 빠져들었다. 백은 평화롭게 잠든 성윤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것은 성윤이 백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보낼 준비를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성윤은 이미 혼자 떠날 준비를 마쳐 버렸다.
그날 이후 백은 성윤의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성윤의 말이 맞았다. 형제가 서로를 미워할 일도, 미안해해야 할 일도 없었다. 각자의 짐을 알아서 지고 갈 뿐. 백은 백 몫의 고통이 성윤은 성윤 몫의 고통이 있었다. 누가 도와주거나 대신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백도 더는 성윤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성윤의 젊음은 빠른 속도로 쇠락해 갔다. 반짝이던 과거는 아주 오래된 영광이 되어 삽시간에 그 빛을 잃었다. 성윤은 그렇게 사라졌다. 성윤의 미련, 두려움과 헛된 희망, 아름다운 영혼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진짜 악몽은 성윤의 장례가 끝나고 찾아왔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돌아온 집에서 백을 본 옥자가 활짝 웃었다.
“어이구! 내 새끼 성윤이! 내가 니는 산다고 했지? 된다고 했지? 우리 예비 의사 선생님 장하다.”
백은 한 번도 마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옥자의 따스한 눈길을 받으며 실소했다. 민욱과 정희는 옥자가 충격으로 이상해진 것으로 판단했다. 치료며 상담을 다녔지만,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진실을 알리는 충격 요법을 쓰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민욱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민욱이 지켜야 할 가족은 백이 아닌 옥자인 듯했다.
민욱은 백에게 할머니의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만 성윤인 척해달라고 했다. 정희가 백의 이름을 부르면 불같이 화를 냈다. 어머니가 들으면 안 된다고 절대로 백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결국, 집에서 사라진 것은 성윤이 아닌 백이었다. 백은 남았지만 이름을 잃었고, 성윤은 백의 이름을 가지고 떠나 버렸다. 백은 고향에만 가면 자신의 인생이 아닌 성윤의 인생을 사는 척했다. 성윤이 죽지 않았다면 살았을 타임 라인에 맞춰 어설픈 연기를 했다.
의대를 졸업했어요.
부속 대학 인턴 생활 시작했어요.
이제 점점 바빠지네요.
개원했죠.
백의 인생은 완전히 지워졌다. 진짜 개원한 것도 아닌데 그 시기가 되자 옥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거금을 백에게 주었다. 저질 연극에 출연한 형편 없는 배우에게 주어지기에는 과분한 출연료였다.
“내 새끼 개원하는데 할머니가 당연히 돈 주야지. 이제 예쁜 색시 하나 데리고 온나.”
결혼을 생각하던 여자친구와의 이별을 예감한 순간이었다. 성윤의 인생을 가장하는 것은 백 하나로도 충분했다. 결혼하게 된다면 백의 아내도, 백의 아이도 결국 옥자가 죽기 전까지는 성윤의 아내로 성윤의 아이로 살아야 할 것이 뻔했다.
옥자가 죽으면?
그래도 백은 이 집에서 더는 노백으로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백의 자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누구도 불러 주지 않는 이름은 잊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성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을 백으로 불러 주는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노백으로 완벽하게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렇게라도 기억되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다른 이의 대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노백 그 자체로 독보적인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온 인생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내색하지 않으며.
어쨌든 성윤이 갖지 못한 미래를 살고있는 것은 백이었다. 백은 나이 먹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20대에 멈춘 성윤보다 30대가 된 백의 처지가 여러모로 나았다. 백은 이 삶이 소중했다. 오늘 먹을 점심을 고심하는 것도, 곁에 있고 싶은 사람과 만나는 것도 모두 다 백의 것이었다.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아주 귀한 것들이었다.
모든 말을 마친 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인의 곁으로 갔다. 아까부터 잡아 주고 싶었던 영인의 커다란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듯 올려 잡았다.
“그러니까 강 과장님, 우리 좀 잘 살아 봐요.”
영인이 자신보다 섬세하고 반듯한 백의 손을 보았다. 아주 단단하게 영인을 붙잡고 있었다. 영인이 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손으로 그런 백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책임님.”
손목을 잡은 영인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불쌍해요? 불쌍해서 이러는 건가?”
아플 정도로 영인은 백의 손목을 꽉 잡았다. 영인의 손바닥이 닿은 곳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델 것같이 뜨거웠다.
“내가 불쌍하냐고.”
백을 보는 영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음울했다. 그리고 어쩐지 화가 나 보였다. 상처 입고 성난 영인을 보며 백은 생각을 정리했다.
주어진 생의 길이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공평한 삶의 규칙이었다. 누구의 내일도 장담할 수 없었다. 백은 성윤의 미약한 숨결이 점차 약해지다 멎는 것을 보며 그 원칙을 배웠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성윤을 떠올렸다. 그러면 올바른 길이 보였다. 좋은 선택을 위한 기준은 간단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할 것, 언제나 진실할 것. 이것이 바로 후회가 가장 적은 선택을 하는 방법이었다. 성윤이 백에게서 이름을 빼앗아간 대신에 남겨준 유산이었다.
영인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갑자기 내일 죽게 된다면 후회할 것이 오늘 지키지 못한 체면이냐, 전하지 못한 진심이냐의 문제였다. 답은 언제나처럼 쉬웠다.
힘 조절을 하지 않은 영인 때문에 손목이 아팠지만 백은 견뎠다. 오히려 남은 자신의 손으로 솥뚜껑 같은 영인의 손을 다시 한번 감싸 잡았다. 아프지 않게 부드럽게. 두 남자의 손과 팔이 얽히고설켰다.
“불쌍해요. 불쌍하고 짠해서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네.”
말을 마친 백이 싱긋 웃었다. 장난스러워 보이면서도 진지해 보이는,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불쌍한 존재가 얼마나 많은데. 설마 내가 그냥 불쌍해서 밥 사 먹이고, 옷 사 입히고 술 사 주고 그러겠어요? 미친놈도 아니고.”
백의 손목을 쥐고 있던 영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렇지만 이미 그 손마저 백에게 잡힌 바람에 완전히 떨어지지 못했다.
영인이 잔뜩 인상을 쓰고 말을 이어 하려는 백을 보았다. 지금 하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말리려는 사람 같았다. 말은 내뱉고 나면 그대로 끝이었다. 말을 한 사람이든 들은 사람이든 기억하고 있다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절대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영인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백은 그런 영인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귓가에는 클론의 초련이 울리고 있었다.
“좋아해서 이러는 건데.”
경고 사격도 없이 급소를 노린 총알이 날아왔다. 영인이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의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속절없이 떨리던 손은 어느새 안정을 되찾아 있었다. 힘주어 백의 손 안에 있던 그런 자신의 손을 빼내자 엉켜 있던 손이 모두 흩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백을 보지 않고 영인이 이야기했다. 허공에 있던 손을 들어 백이 그런 영인의 어깨를 매만지려다 참고 대신 의자를 짚었다.
“진짠데.”
“남자랑 자 본 적 있어요?”
영인이 고개를 들어 백을 노려보았다. 도전적이면서 적대적인 눈빛이었다. 백을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채였다. 급하게 마신 술이 두 사람 사이에서 출렁였다. 열이 올라 체온도 평소보다 뜨거웠고 심장 박동도 자꾸만 더 크게 들렸다.
백이 마른 침을 삼켰다. 영인의 도발은 작은 불씨가 되었다. 백이 메고 있던 버석하게 마른 볏짚을 활활 태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욕망은 그 언젠가 백의 걱정대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것이 유혹이 아닌 빈정거림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백은 덥석 영인이 던진 미끼를 물었다.
“해 볼래요?”
영인이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쏟아져 나올 대답이 무엇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어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인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어 갔다. 어떤 고통을 인내하는 사람처럼 괴로워 보였다.
백이 술기운을 빌려 다시 용기 냈다. 영인의 손목을 쥐어 손바닥을 자신의 중심에 가져갔다.
“거짓말 아닌데.”
영인이 자신의 손이 닿자마자 거침없이 부피를 키워 가는 백의 중심을 느끼고는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한숨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자신의 이마를 박았다. 그런 영인을 놀리듯 백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 있어요.”
결국, 영인이 애써 닫고 있던 입을 비집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천천히 엎어졌던 상체를 세웠다. 다시 백의 얼굴을 보았다. 아까와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영인은 하나도 숨김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백이 우스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갑자기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지. 좋게 보낼 수도 있지만, 저 자신만만한 얼굴이 당황하는 꼴을 보고 싶어졌다. 잘못했다고 오해였다고 말하면서 비는 꼴이 보고 싶어졌다. 모든 게 쉬워 보이는 백이 싫었다. 백은 차라리 영인을 동정하고 연민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자신에게 이런 고백을 해서는 안 됐다.
백은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대리를 불러 자신의 집까지 온 것인지도 생각할 수 없었다. 떠오르는 건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두근거렸던 가슴과 손끝에서도 느껴지던 맥박 같은 것들이었다. 떨림이 지나쳐 천하의 백이 긴장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영인은 신발도 벗기 전에 백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구두를 신은 백의 발과 운동화를 신은 영인의 발이 엉망으로 엉켜 있었다. 백은 벽과 벽같이 큰 영인 사이에 껴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영인의 목에 손을 둘렀다.
영인의 커다란 손이 백의 얼굴 전체를 감싸 쥐었다. 건조한 영인의 입술이 닿아 오자 처음에는 까슬함이 느껴졌지만 이내 서로의 침과 체온으로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영인은 눈도 감지 않고 자신의 폭력적인 키스를 받아 내는 백을 지켜보았다.
백은 보란 듯이 그 시선을 맞추다가 결국 먼저 눈을 감았다. 영인이야말로 자신을 누구보다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직접적인 욕정이었다.
영인은 백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뜨거운 혀가 멋대로 백의 입 안을 휘젓고 다녔다. 백의 어깨를 잡고 있던 두 손을 아래로 내리더니 엉덩이를 멋대로 주물러 대기 시작했다. 영인의 굵고 단단한 허벅지가 백의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작정한 사람처럼 영인이 자신의 허벅지를 자꾸만 백의 가랑이로 올려붙였다. 노골적이고 거친 행위였다. 백은 사타구니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력 때문에 아프면서 동시에 미칠 것 같았다. 영인의 발기한 물건이 찌르고 있는 배꼽 근처마저 성감이 있는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바지와 속옷을 벗고 마음껏 흔들어 분출해 버리고 싶었다. 온몸이 예민해진 것인지 영인의 허벅지 근육이 세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영인의 방식은 백이 선호하지 않는 쪽이었다. 백이 겨우 힘을 쥐어짜 빼앗긴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애썼다. 영인의 목에 얌전히 둘렀던 팔을 풀고 오른손을 들어 영인의 머리채를 가볍게 잡았다. 영인의 목이 뒤로 꺾이며 드디어 숨 쉴 틈 없이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천천히 좀 해요.”
백의 눈도 입술도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영인이 반쯤 이성이 날아간 표정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백이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영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 둘 사이 공간을 만든 뒤 서서히 영인에게 다가갔다. 처음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둘의 입술이 가볍게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야릇한 소리가 작게 울렸다. 백이 충분히 영인 입술의 감촉을 느끼고서야 천천히 입을 벌려 영인에게 키스했다.
영인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고 다정한 백의 키스에 아까의 기세를 모두 잃은 듯했다. 어설픈 차렷 자세로 서서 눈만 끔뻑이며 백이 하는 짓에 휘둘리고 있었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그 행위가 너무 선정적으로 느껴져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쿵쾅거렸다.
키가 큰 영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든 상태로 백이 영인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영인이 자신을 속박하던 어떤 끈에서 벗어난 듯 다시 자연스럽게 백에게 다가갔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서로의 입술을 핥다가 혀를 빨고 얽었다. 혀와 혀가 닿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달콤하면서 동시에 자꾸만 더 원하게 되었다.
영인이 다시 서두르려는 기색이 보이자 백이 가만히 눈을 떠 영인을 제지하듯 보았다. 백의 마음도 영인과 다르지 않았다. 당장 무슨 짓이든 저질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영인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나면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기에 완전히 영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었다.
영인은 갈증이 나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백의 입 안을 탐했다. 두툼한 혀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으로 헤집어 댔다. 결국, 다시 백의 얼굴이 영인에게 잡혔고, 백의 허리가 점점 뒤로 꺾였다.
입술이 퉁퉁 붓는 느낌인데도 키스는 끝날 줄 몰랐다. 영인의 시선도 백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백이 자신의 입천장을 혀로 쓸어 대는 영인의 혀를 가볍게 빨아당겼다. 혀뿌리에 느껴진 고통에 영인이 인상을 찌푸리자 백이 고개를 뒤로 물러 영인에게서 잠시 해방되었다.
“침대로 가요.”
그리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영인 못지않게 허기진 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백이 신발을 벗고 영인의 손목을 붙잡아 당기며 앞장섰다. 영인도 서둘러 신발을 벗고 그런 백의 뒤를 따라갔다. 붙들린 손목이 싫지 않았다.
침실까지 별 반항 없이 따라 들어온 영인이 막상 침대를 앞두고서 갑자기 멈춰 섰다. 에러 난 시스템처럼 다음 행동이 나오지 않았다. 백은 말없이 그런 영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인에게 내어 줄 시간은 넘치게 많았다.
영인이 백의 앞섶을 보고 얼굴을 보았다. 급해 보이는 아랫도리 사정과는 달리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진짜 할 수 있겠어요?”
영인의 질문은 마치 최후의 기회 같았다. 이 모퉁이를 돌아서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영인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섹스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마찬가지 결말일 것이었다. 바로 관계의 파국. 하지만 지금 그만둔다면 서로 술이 무섭다고 너스레를 떨며 어떻게 해서든 덮을 수 있었다.
백의 몸 전체는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백이 영인의 쓸데없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아직 문 근처에 서 있는 영인에게로 걸어갔다. 자신의 의사가 중요한 것이라면 여기서 멈출 이유는 없었다.
영인을 박력 있게 끌고 와 침대에 눕히는 것까지는 좋았다. 분명히 그랬다. 백이 습관대로 영인의 목덜미며 쇄골 근처를 입술로 지분거리며 그의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었다. 여태까지 있었던 경험과는 확실히 다른 촉감과 양감이었다.
하지만 이쪽도 나쁘지 않았다. 단단하고 부피 큰 가슴 근육을 손으로 매만지다 작게 솟아오른 유두를 손가락 끝으로 자극했다. 자연스럽게 백이 자신의 하체를 영인의 하체의 문지르며 허리를 가볍게 쳐올렸다. 옷 위로 맞닿는 성기끼리의 부딪칠 때마다 기대감에 백의 신체가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느릿하고 여유롭게 삽입하는 것처럼 영인의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던 백이 상대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것은 그런 백을 같잖게 보며 웃고 있는 영인의 얼굴이었다.
백이 영문을 묻는 듯한 표정을 한 채 움직임을 멈추자 이번에는 영인이 움직였다. 영인은 우선 두 발로 땅을 디딘 뒤 위에 겹쳐져 누워 있는 백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일으키며 동시에 팔에도 힘을 줬다. 영인이 일어서자 백은 영인에게 대롱대롱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백으로서는 당혹스럽고 낯선 경험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이토록 번쩍 안아 준 것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릴 적에나 있던 일이었다. 영인보다야 작았지만 백도 어디 가서 키나 덩치로 밀려 본 적이 없었던 남자였다. 영인은 그런 백을 안아 들고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귀여웠어요.”
영인이 아이 안듯 팔을 번쩍 들어 더 높이 백을 들어 올렸다. 명백하게 놀리기 위한 행위였다. 백이 자신의 처지가 어이가 없어 실없이 웃었는데 그 웃음은 금세 지워졌다. 영인이 백을 바로 침대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영인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최후의 확인을 하려 했다. 셋까지 세면 끝나는 게임에서 외치는 하나, 둘, 둘의 반, 둘 반의반과 같이 다시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진짜로 자신 있냐고요.”
질문의 의도는 명확했다. 영인이 백의 다리를 활짝 벌어지게 하고 큰 두 손으로 허벅지를 꽉 잡아 눌렀다. 그리고 아까 백이 했던 것처럼 백의 구멍이 있는 곳 근처에 대고 자신의 성기를 가져가 툭툭 쳐댔다. 분명 둘 다 옷을 입고 있었는데 당장에라도 백의 몸 안으로 영인이 치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일종의 경고이자 위협이었다.
영인은 이대로 백이 울건 말건 채 길들지 않은 구멍을 억지로 가르고 백을 범해 버리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지금이라도 백이 자신의 뺨을 치고 내쫓아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양가감정 사이에서 무엇 하나 시원스럽게 선택하지 못하는 쪽은 자신이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백이었다.
영인은 백의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툭, 툭, 툭. 열리지 않을 문을 두드리며 밤새 있을 수도 있었다. 둘의 몸이 닿을 때마다 성기의 쾌락이 배꼽으로 넘어와 금방 머리끝까지 닿았다. 그럴 때마다 영인의 머릿속 이성 버튼이 깜박깜박 켜졌다가 다시 꺼졌다. 이제는 술도 다 깬 것 같았다. 온통 백만이 가득했다.
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영인의 단단한 성기가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부분을 자꾸 자극하자 점점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런 상황에 놓이니 왜 당연히 자신이 영인에게 박을 것으로 생각했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영인이라면 남자인 것이 상관없이 욕망이 생겼듯, 영인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무엇인가를 재고 따지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영인의 몸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어떤 논리적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백이 영인의 몸짓에 맞춰 자신의 허리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인에 대한 마음을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불길에 내던진 마음이었다. 망설이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하!”
그런 백을 보고 가볍게 헛웃음을 지은 영인이 백이 내뱉는 숨을 모조리 마실 기세로 키스해 왔다. 여유를 가장해 보았지만, 더 다급하고 애달파 보이는 쪽은 영인이었다.
백에게서 입술을 떼지 않고 영인이 백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조급한 손놀림으로 하기에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영인이 인상을 쓰고 셔츠를 찢을 기세로 당겼다. 단추들이 투두둑 떨어지고 백의 하얗고 잘 가꿔진 몸이 드러났다. 바짝 선 옅은 색의 유두가 백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이제 영인은 정신마저 아득할 지경이었다. 백은 아름다웠다. 섬세하게 뻗은 근육도, 곧은 뼈대도 모두 건강하면서 단정해 보임과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음란하게 느껴졌다. 한참 그 모습을 감상하던 영인이 백에게서 입을 떼고 자신의 검지와 중지를 입 안에 넣고 빨았다.
그러면서도 밑에 깔린 백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집요하게 백을 눈으로 훑었다. 기다란 손가락을 충분히 침으로 적신 영인이 젖은 손가락으로 백의 유두를 거칠게 문질렀다.
“흡!”
갑작스러운 자극에 백이 소리를 참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손끝에 자비 없이 농락당하고 있는 유두가 보였다. 온몸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른 이의 손을 탄 적이 없는 여린 부위가 배려 없는 손길에 쓰라리고 뜨거워졌다. 백이 잘게 가슴을 털며 피하려고 하자 영인이 장난을 멈추고 자신의 웃옷을 벗었다.
드러난 탄탄한 상체를 보며 백이 침을 삼켰다. 영인은 백의 하체를 누르고 앉아 있었다. 백은 자신을 올라타고 있는 사내에게서 위압감과 동시에 어떤 경이로움을 느꼈다. 영인은 같은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제3의 성 같기도 했고, 정욕의 화신 같아 보이기도 했다.
가슴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쳤다. 백이 손을 뻗어 영인의 상체를 훑었다. 상상했던 대로 아주 부드럽고 탄탄했다. 영인은 자신의 몸을 만지면서 감탄하는 백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집에 콘돔이나 젤은 있어요?”
영인이 백의 바지 버클을 풀며 말했다. 백이 살짝 허리를 들어 영인이 자신의 바지를 벗기는 것을 보조했다.
“그런 거 없는데.”
백이 스님처럼 무욕의 삶을 살았던 지난날을 잠시 떠올렸다. 콘돔이니 젤이니 하는 삿된 것들이 집에 있을 리 없었다. 바지를 완전히 벗긴 영인이 속옷 위로 불룩 솟은 백의 중심을 손바닥으로 둥글게 문지르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백을 보았다.
“그럼 무슨 수로 합니까?”
“하아… 협탁 서랍에… 바디오일이나 로션 샘플은 있는데… 으읏.”
영인이 백의 반응을 살피며 성기 애무를 계속 달리하는 바람에 백은 곤욕스러워 보였다. 최대한 나오는 신음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요망한 완급 조절 때문에 중간중간 뜨거운 숨과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인은 백이 크게 반응하는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큰 손으로 긁고 강하게 주물렀다가 다시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백의 속옷 앞섶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영인은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백이 자신에게 성욕을 느낀다는 것은 진실인 셈이었다.
아직 다 먹지 못한 사탕을 손에서 놓는 심정으로 영인이 백을 애무하던 손길을 거둬들이고 협탁 서랍을 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안타까웠다. 어서 다시 만지고 빨고 싶었다. 허전하기는 백도 마찬가지였다. 물끄러미 서랍을 열어 샘플을 되는대로 집어오는 영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애가 탔다.
돌아오자마자 영인은 백의 드로어즈를 벗기고 발목을 잡아 다리를 확 꺾었다. 잔뜩 긴장한 허벅지 뒤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서둘러 샘플 하나를 집어 이로 물어 고정한 뒤 휙 뜯어 버렸다. 흘러나오는 내용물을 손으로 급하게 훔쳐 백의 음경과 고환에 치덕치덕 처발랐다. 백의 성기가 체액과 영인이 바른 크림으로 미끈미끈해졌다.
영인이 커다란 손으로 그것을 마구 쥐고 위아래로 쓸어댔다.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었다. 백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압박감 있는 애무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여자와 달리 거친 영인의 손바닥마저 백을 미치게 하고 있었다. 백의 발가락이 저절로 오므려졌다.
영인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백의 표정과 뒤로 자꾸만 넘어가는 고개, 도드라진 백의 늑골과 그것을 감싼 채 이리저리 뒤틀리는 전거근을 놓치지 않고 샅샅이 살폈다. 너무 오랜만에 쏟아지는 직접적인 자극에 백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백의 성기에서 급기야 찔끔찔끔 쿠퍼액이 나오고 있었다. 영인은 그것이 아주 소중한 듯이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엄지로 모아 모조리 백의 귀두에 발라댔다. 가장 여린 부분을 손톱과 손가락으로 멋대로 자극해 대는 탓에 백의 허리가 팡팡 떠올랐다.
“읏! 으… 흑…!”
당장이라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인이 조금만 더 흔들어 주면 백은 그대로 영인의 손에 쌀 것 같았다. 그러나 영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백이 먼저 끝내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남자를 받는 게 처음인 백에게 사정한 뒤 삽입하는 것은 아직 무리일 게 분명했다.
영인이 모든 애무를 멈추었다. 아랫입술을 꽉 물고 열심히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강력한 쾌락을 견뎌내던 백이 영인을 바라보았다. 아쉬운 얼굴이었다. 이미 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핥았다.
평소와 달리 오늘 도무지 영인은 백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번번이 먼저 피하게 되는 쪽은 백이었다. 영인이 백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어떤 수치나 부끄러움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인은 아주 당당해 보였다.
백이 형편없이 벌어져 있는 자신의 다리를 갈무리했다. 영인은 검은색 드로어즈도 망설임 없이 벗어 버렸다. 속옷을 내리자마자 영인의 거대한 성기가 배꼽 위로 벌떡 솟아올랐다.
백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너무 크고 흉흉했다. 살면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자신의 것도 모양이며 크기가 훌륭한 편이었다. 어디 가서 주눅 들어 본 적 없었다. 반듯하고 예쁜 색이었고, 크기도 큼직했다. 그런데 영인의 것은 여태까지 자부심 가졌던 백의 물건을 비웃듯 그 부피를 어마어마하게 키운 채 꺼덕이고 있었다.
“자신 없어졌죠?”
영인이 백의 심정을 대번에 읽은 듯 비죽이 웃으며 물었다. 로션과 백의 체액으로 질척이는 손으로 자신의 것을 쓸고 있었다. 백이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했다.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시도는 해 봐야지.
백이 다리를 벌려 영인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거의 순교 직전의 엄숙함과 비장함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영인이 그런 백의 무모함을 어여삐 여기며 기꺼이 백이 내어 준 자신의 자리로 들어섰다.
무릎을 꿇고 백의 다리 사이에 앉은 영인이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백의 양다리를 한껏 옆으로 밀어서 백의 은밀한 부위가 공기 중으로 그대로 노출되게 하였다. 백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영인은 그런 백의 부끄러움을 무시하고 한술 더 떠 백이 스스로 벌어진 다리를 잡도록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백은 구부러진 자신의 오금을 팔로 걸어 고정했다. 영인이 군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섹스가 처음이 아닌데도 자꾸만 떨리고 기대되었다.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만져 주지 않은 영인의 성기도 이미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토해 낼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영인이 두 번째 샘플을 이로 까 마구잡이로 백의 드러난 회음부와 구멍 위로 짜냈다. 백의 깨끗한 피부가 금세 반짝거렸다. 꽉 다물린 구멍은 누가 봐도 남자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영인이 중지로 그 구멍을 달래듯 살살 간질이고 매만졌다.
처음인 사람은 영인의 것을 다 받을 수 없을 것이었다. 기껏 해 봐야 절반은 들어갈까? 그것도 고통뿐인 삽입일 수도 있었다. 아까부터 울컥울컥 치솟는 음심을 이기고 자신이 자제할 수 있을지 영인은 의문이 들었다. 백이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눈으로 영인을 보았다.
영인의 손길에 응답하듯 빈틈없어 보이던 구멍이 살짝 벌름거렸다. 영인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중지와 검지로 구멍을 잔뜩 벌리고 새 샘플을 뜯어 내용물을 쏟아 냈다. 최대한 안까지 적셔야 백이 편할 것이었다. 균열을 벌리고 손가락에 힘을 줘 백의 순진한 구멍 속으로 윤활액이 되어 줄 오일을 밀어 넣었다.
“으.”
백은 난생처음 느끼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고 작게 신음했다. 불쾌하고 불편한데 묘하게 흥분되었다. 백의 성기가 작아지는 것 같더니 다시 그 크기를 키웠다.
백의 안이 질척해질 때까지 같은 작업을 반복하던 영인이 충분히 젖었다고 판단했는지 이번에는 부드럽게 자신의 검지를 밀어 넣었다. 하도 적셔 두어서 생각보다 큰 이물감 없이 손가락이 쑤욱 들어갔다.
“아앗!”
자신에게도 낯선 신음이 백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영인은 다른 손으로 최대한 백의 구멍을 벌렸다. 당장 손가락을 꽂은 채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턱에 힘을 주는 바람에 서로 맞닿은 이가 부서질 지경이었다.
다시는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욕구보다 우선인 것은 백이었다. 되도록 백을 소중하게 대하고 싶었다.
백의 안에 들어간 손가락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뜨겁고 말캉한 백의 내벽이 손가락을 감싸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영인은 손가락을 휘휘 저어 가며 근육을 조금씩 이완시키고 백의 전립선 위치를 찾았다. 백은 고개를 양옆으로 저어대고 몸을 뒤척이면서도 용케 다리를 잡은 팔은 유지하고 있었다.
“으하악! 큭.”
영인이 손가락 각도를 바꿔 가며 백의 배꼽 쪽을 두드려 댔다. 그러다 어느 부분이 맞아떨어졌는지 여태까지 꾹 다물고 있던 백의 입이 열렸다. 백은 속수무책으로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영인이 중지와 검지를 겹쳐 다시 그 부분을 공략했다. 빠끔 열린 구멍이 허겁지겁 영인의 손가락을 받아먹었다.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구멍이 그 마찰을 못 이기는 듯 백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찔거렸다. 찌걱이는 야릇한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백의 몸이 온통 붉어졌다.
충분히 백의 몸이 적응했다고 느껴지자 영인이 약지까지 더했다. 모인 세 손가락의 끝을 최대한 뾰족하게 만들어 백의 몸 안을 헤집어 가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백은 갑자기 늘어난 부피가 힘겨운 듯했지만, 영인을 저지하지 않았다.
“끄응, 윽.”
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붙잡고 있던 허벅지에 자국이 남도록 손톱을 박아 넣었다. 흥분과 함께 오는 알싸한 고통과 어떤 배덕감을 참아 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영인이 그런 백의 손가락에 입 맞추며 팔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다른 속도와 강도였다. 영인의 팔근육은 모두 경직되었고 곧 백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영인은 아까 찾았던 극점을 집요하게 찔러 대며 손가락을 마구 굽혔다 펼쳤다.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빨리 확보해야 했다.
철퍽철퍽, 백의 회음부와 영인의 손바닥이 맞닿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영인이 잔뜩 짜 넣었던 오일과 크림이 허옇게 변해 질금질금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애써 참아 내던 백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허리와 복근, 허벅지 안쪽 근육이 형편없이 경련했다. 영인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백의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얼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신음이 모두 영인을 애무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자극도 필요 없었다. 백의 음성과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과분했다.
“아아… 앗! 허억… 흡, 잠시, 잠시만….”
백이 영인을 저지하기 위해 한쪽 손으로 영인의 몸을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영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백의 손에 깍지를 끼며 제지했다.
“참아 봐요. 이것도 힘들면 어떻게 나를 감당하려고 그래요.”
백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사이 들어와 있는 영인의 손가락을 꽉 잡고 의지했다. 지금 자신이 그만이라고 한다면 영인이 바로 멈추리라는 것을 백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은 다시 한번 이를 사리물고 참았다. 영인의 강인한 손에 매달린 채로. 영인도 자신에게 온전히 기대 오는 백을 느끼고 있었다.
백의 안을 쑤셔 대던 손가락을 빼낸 영인이 남은 윤활액을 그러모아 자신의 성기에 발랐다. 구멍 밖으로 밀려 나온 것들도 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닦아 자신의 것에 묻혔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피의 물건이 드디어 백의 구멍 앞에 자리 잡았다. 백이 영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진심을 이렇게라도 똑바로 전달하고 싶었다. 영인이 느릿느릿 귀두를 백의 회음부와 구멍 근처에 문질러 댔다. 당장에라도 들어올 것처럼 힘을 주어 밀다가 슥, 여린 다른 피부를 찔렀다.
기대감과 공포심이 동시에 들었다. 백은 차라리 빨리 꿰뚫리고 싶다가도 도망치고 싶었다. 영인이 그런 백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본격적으로 살짝 충혈된 구멍에 자신의 끝을 맞추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만 들어왔을 뿐인데도 백은 물러서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벌써 괄약근이 무리라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영인은 백이 그러도록 두지 않았다. 백의 엉덩이 쪽으로 팔을 넣어 허벅지를 감싸 백을 자신 쪽으로 확 당겼다. 어느새 귀두가 다 들어갔다.
“으읏! 잠시만!”
백이 몰려오는 고통과 팽만감에 애원하듯 영인을 보았다. 영인이 백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은 뒤 마지막 남은 샘플을 다시 뜯어 접합부에 짜냈다. 쿨쩍이는 야한 소리가 영인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왔다.
영인은 진격만 아는 사람처럼 서서히 자신의 양물을 백의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백의 구멍은 주름 하나 없이 한껏 벌어진 채로 버겁게 영인을 받아들였다. 영인이 백과 깍지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백은 손도 구멍도 아파 미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분명히 끝까지 넣을 생각이 없었다. 백을 배려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절반이 들어가고 나니 아예 끝까지 박아 넣고 쑤시고 싶은 욕망이 영인을 지배했다. 이것은 단순한 섹스지만, 끝나면 사라질 꿈같은 일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짜 백의 연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취하고 빼앗고 싶었다.
백이 힘겹게 영인의 깍지를 함께 맞잡았다. 핏줄이 잔뜩 솟은 영인의 손등에 가려져 백의 손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끝까지 넣고 싶어요.”
영인이 잡고 있는 백의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백은 당장에라도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아까 손가락 장난으로 느꼈던 미묘한 쾌락을 느끼기에는 영인의 성기가 너무 컸다. 압도적인 고통만이 존재했다.
지금 처지가 불쌍한 사람은 자신인데도 그런데도 영인이 저렇게 애절하게 이야기하자 백은 마음이 약해졌다. 백의 눈꼬리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사라졌다. 눈을 질끈 감은 백이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영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허리를 쳐올려 백의 안으로 완전히 자신의 것을 박아 넣었다. 백의 허리가 붕 떠오르자 영인이 두 손으로 허리를 감싸 들어 주었다.
억 소리가 났다. 아팠다. 어디가 터졌을지도 몰랐다. 창이라도 박힌 것 같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몸이 굳었다. 영인이 그런 백을 달래듯 이미 시들어 버린 백의 성기를 다시 조심스럽게 만지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영인의 입에서도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깊고 짙은 눈동자에는 음욕만이 가득했다. 백은 영인의 손길보다도 영인의 모습에 전율이 일었다. 자신으로 인해 이토록 음탕하게 변한 영인이 너무 색정적으로 느껴졌다. 아주 도망간 줄 알았던 흥분이 다시 감돌았다. 백의 성기가 천천히 단단해지고 있었다.
영인은 백의 고환부터 기둥까지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귀두 아래에서는 꽉 조이듯 잡았다. 백이 활어처럼 팔딱거렸다. 매끈한 나신이 박동했다. 그런 백을 보며 영인도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둘이 들러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쩍쩍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백의 몸 안으로 다 들어갈 기세로 자신의 것을 배려 없이 쑤셔 박았다. 백의 탄탄한 마른 배가 불룩불룩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백은 사지를 떨고 고통에 겨워하면서도 영인의 손에서 오는 쾌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영인이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그의 엉덩이 근육이 잔뜩 긴장해 쑥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었을까? 영인의 거친 삽입이 백의 내장 안을 자극했고 성기도 달아오를 만큼 달아올라 있었다. 아픔조차 쾌락의 버튼이 되었다. 영인이 백의 상태를 눈치채고 아까보다 더 섬세하고 리드미컬하게 손을 움직여 백의 성기를 주물렀다.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며 삽입도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백의 발끝과 손끝이 모두 경직되었다. 숨을 들이마신 채 내쉬지 못해 가슴은 부풀고 배가 쏙 들어갔다. 백이 숨을 참고 경련했다. 영인의 손 안에 허옇고 진득한 백의 정액이 세차게 쏟아져 나왔다. 영인은 그 모습을 뇌에 새기듯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백은 진이 다 빠져 버렸다.
백의 몸이 축 처졌다. 자신은 사정하지 못했지만, 영인이 미련 없이 백의 안에서 자신의 것을 꺼냈다. 여전히 흉흉한 성기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백이 숨을 고르다가 그런 영인을 보고 입을 열었다.
“강 과장님은 안 끝났잖아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자기 걱정을 하는 백이 신기했다. 평소에는 잘 정돈되어 있는 백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영인은 이 모습도 기억해 두고 싶었다. 자기도 모르게 백의 곁으로 가 머리를 정리해 주며 영인이 대답했다.
“한번 싸고 나면 안이 훨씬 예민해져서 책임님 더 못 합니다. 전 이거면 됐어요.”
하지만 백은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아니 같이했는데 어떻게 저만 좋고 맙니까?”
“좋긴 했어요?”
영인의 말에 백의 귀가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좋으니까 싸지.”
백이 쑥스러움을 숨기려 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영인이 움찔했다.
“나도 끝까지 하면 되겠어요?”
영인은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백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다시 아까 백을 탐하던 자리로 돌아가서 무심하게 백을 내려다보았다.
“다리 좀 벌려 봐요.”
그리고 한 손으로 백의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려 방금까지 자신을 받아들이던 구멍을 응시했다. 붉게 부어올랐지만, 상처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학대처럼 느껴진 삽입이 다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백이 긴장했다. 구멍도 꽉 오그라들었다.
영인은 그 구멍을 보며 천천히 자신의 물건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영인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성기를 위아래로 매만졌다. 백은 눈앞에서 자위를 시작하는 영인을 보고 경악했다. 영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영인의 허리가 마치 백에게 삽입하듯 앞뒤로 움직였다. 영인이 고환부터 기둥 귀두까지 쓸 듯이 만지고 꽉 잡아 압박하며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계속 백의 다리 사이를 보면서.
백은 그 난잡하고 충격적인 장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큭. 아!”
영인의 입에서 작은 감탄 같은 신음과 함께 곧 정액이 울컥 쏟아졌다. 탄탄하고 굵은 허벅지 근육도 긴장한 듯 갈라졌다. 영인은 익숙하게 파정의 증거를 자신의 손바닥에 받았다. 백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됐죠?”
영인이 자신의 손바닥에 고여 있는 정액을 그런 백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책임님.”
영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또 섰네요?”
“씨이발.”
백이 눈을 감고 욕을 내뱉었다. 미친 게 분명했다. 영인이 자신의 정액을 함부로 백의 반쯤 선 성기에 들이붓고 문질렀다. 아직도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백이 어떻게 해서든 손길을 피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영인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날은 참으로 습하고 더운 밤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