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9)

4

영인과 같은 아파트에 오겠다는 백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는지 백은 정말로 다음 날부터 그 동네 부동산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 둘째 주 일요일 아침, 늘 조용하던 영인의 핸드폰이 느닷없이 울렸다. 화면에는 노백의 이름이 떴다. 영인이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꽉 잠긴 목소리로 영인이 응답했다. 반대편에서 백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지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직도 자요? 우리 오늘부터 동네 주민인데 같이 이른 점심이나 먹을까요? 내가 지금 들어가서 씻고 나오면 열한 시쯤?

영인은 갑자기 들어온 수많은 정보를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네 주민부터 점심 식사까지 뭐하나 명확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부터 다짜고짜 무슨…….”

-준비하고 있어요! 집 앞으로 갈게요.

백은 영인의 질문에 대답도 해 주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영인은 아닌 밤중에 날벼락 같은 백의 접근에 잠이 다 날아가 버렸다. 어제도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수면유도제를 여러 알 먹고 겨우 잠들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9시가 좀 넘어 있었다.

영인이 한참 눈만 껌벅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백의 말을 거절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기에.

준비를 마친 영인이 소파에 앉아 멍하니 켜지지도 않은 TV를 바라보았다. 영인은 네크라인이 좁은 흰 반팔 티에 짙은 색의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건조기에 한참 있던 옷에 온기라고는 없었다.

꺼진 TV의 까만 화면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영인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TV를 켜면 사라질 그 모습에서 영인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혼자 있는 모습을 인식하고 나면 그때부터 말할 수 없이 외로워졌다. 초라해졌다.

커다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좋은 타이밍인지 나쁜 타이밍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백은 종종 이런 식으로 홀로 가라앉는 영인을 잡아 끌어 올리곤 했다.

“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세요.

“네.”

짧은 통화를 끝으로 영인이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나갔다. 백에게로 가기 위해.

영인이 지하 출입구로 나오자 그 앞에 비상등을 켠 백의 차가 있었다. 깜박깜박. 점멸하는 노란빛이 영인에게 길을 안내하는 듯 보였다. 어둡게 선팅된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가고 그 틈으로 백의 환한 얼굴이 보였다.

“빨리 타요. 배고파.”

백의 재촉에 영인이 조금 걸음을 서둘러 보조석에 앉았다. 백은 영인이 안전벨트까지 모두 채우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상등을 끄고 액셀을 밟았다.

“진짜로 이사 오신 겁니까?”

영인의 깊은 눈에 담긴 감정을 백은 곁눈질로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의혹과 어이없음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럼요. 어제 왔어요. 오늘 아침에 체육관 등록해서 운동 좀 하고 바로 동네 친구 만나러 온 건데.”

백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가지런한 이가 보였다. 굳이 감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거침없는 미소였다.

“왜 그렇게 갑자기 사는 동네를 바꿔요?”

영인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지 백에게 물었다. 백이 주변을 한번 살피고 매끄럽게 우회전하며 대답했다.

“길에서 버리는 시간도 아깝고, 거기에 묶여 있는 돈도 아깝고. 나이 드니까 아까운 게 많이 생기네요. 강 과장님 출퇴근하는 거 보니까 편해 보이기도 했고.”

대답을 마친 백이 좌측 깜빡이를 켜서 가장 왼쪽 차선을 향해 차례로 끼어들었다. 안정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운 백이 슬며시 옆을 보며 물었다.

“왜요? 싫어요?”

싫을 이유는 없지 않나? 백이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영인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오른편 창문을 바라보았다. 백의 운전이 조심스러워서인지 또다시 잠이 쏟아졌다.

“…님! 과장님!”

영인이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이미 주차까지 마친 백이 영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깊게도 자네요.”

영인이 눈을 뜨자 백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먼저 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백화점 주차장이었다. 입가를 한번 엄지로 훑으며 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보조석 쪽 문을 잡아 주던 백은 영인이 완전히 나오자 부드럽게 문을 닫았다.

“일단 밥부터 먹죠.”

백이 먼저 출발하자 영인이 그 뒤를 따랐다. 백은 늘 묵묵부답인 영인에게 의견을 물을 생각도 없는지 미리 생각해 둔 식당으로 영인을 안내했다.

“버섯 불고기랑 된장찌개 괜찮죠?”

자동문 버튼을 누르기 전 백이 영인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영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백이 바로 문을 열었다. 어느새 백은 영인과 가장 자주 식사를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영인이 별말 없이 백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백의 식사도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다.

“밥 추가 안 해요?”

백이 의아한 듯 묻자 영인이 고개를 저었다.

“덩치에 비하면 진짜 많이 안 먹는 편이네요.”

백이 어깨를 으쓱한 뒤 마지막 한 숟가락을 큼직하게 떠 입에 넣었다. 벌어진 입 안이 깊어 보였다. 영인이 그 모습을 보다 백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백이 말했다.

“주승이 원래 머리 모르죠?”

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머리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지금 헤어 스타일도 사실 알지 못했다. 영인은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원래 머리가 이렇게 치렁치렁 길었는데, 내가 미용실 데리고 가서 잘라 준 거예요. 사람 됐지. 내 덕에.”

영인은 백이 하는 말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백은 크게 개의치 않고 다음 말을 이어 했다. 본론이었다.

“그 미용실이 이 백화점 7층인데.”

말을 마친 백이 자신도 어이가 없는 발언이라고 생각했는지 활짝 웃었다. 또렷하고 잘생긴 얼굴은 백이 웃자 금세 소년 같은 인상으로 변했다. 나이를 먹어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세월이 얼굴에 묻지 않는 사람들.

“갑시다.”

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계산대로 갔다. 영인이 그런 백의 위쪽 팔뚝을 잡아 세웠다. 매번 얻어먹을 수는 없었다.

“제가 사죠.”

“원래 먼저 먹자고 하는 사람이 사는 겁니다. 사고 싶으면 전화해요.”

백의 넉살은 영인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영인은 백이 하는 말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농담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백과 함께 있으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있는 서프보드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속절없이 흔들려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빠질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영인이 서핑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나요?”

고급스럽고 깔끔하게 꾸며진 미용실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는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했다.

“네. 노백, 12시 30분에 예약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남성분 커트 맞으시죠?”

“네. 제가 아니고, 이쪽이 합니다.”

백이 뒤로 살짝 물러서며 영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영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을 보았다.

“뭡니까?”

“머리만 좀 정리해도 한결 인물이 살 거예요. 기분 전환도 되고.”

영인이 뭔가 거절의 말을 하려 할 때였다. 백이 성큼 영인의 곁으로 다가와 영인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돈은 과장님이 내세요.”

어느새 미용실 직원들이 가운을 가져와 영인에게 걸쳐 줬고, 영인은 누가 미는 것도 아닌데 의지와는 다르게 직원이 안내해 주는 대로 머리를 감는 구역으로 제 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결국, 또 백의 뜻대로였다.

영인의 머리를 감긴 미용사가 새하얀 커트보까지 씌우자 거울 속 영인은 얼굴만 동동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영인이 자신의 처지가 우스운지 실소를 터뜨렸다. 고개를 돌려 서 있는 백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백은 그런 영인의 기분을 안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미용사가 거울 속 영인과 먼저 눈을 맞췄다. 영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미용사가 이번에는 백을 보았다. 백도 거울 속 영인을 잠시 보며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어차피 손질이라고는 안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미용실도 자주 안 오고. 아예 짧게 치는 게 낫겠죠?”

백의 말에 미용사가 영인의 머리통을 손으로 짚어 보며 두상을 체크했다.

“모난 구석이 없어서 짧게 쳐도 괜찮을 거 같아요. 이런 스타일 어떠세요?”

백과 미용사는 영인을 사이에 두고 자기들끼리 태블릿 PC에 저장된 사진을 보며 의논했다. 영인은 처분을 기다리는 포로가 된 기분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괜찮을 거 같은데 유지가 간단한가요?”

“사실 다운펌을 같이 해 줘야 진짜 편하죠. 기르면서도 지저분해지지 않고.”

“일이 커지네?”

백이 거울 속 영인에게 말을 걸었다. 영인은 이제 해탈한 듯 보였다. 백이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정한 듯 미용사가 마지막에 보여 준 사진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이렇게 해 주세요.”

백이 결정을 하자, 미용사가 바로 가위를 들고 영인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눈을 찌를 듯 길게 자랐던 머리카락이 서걱서걱 잘려 나갔다. 영인은 쏟아지는 머리카락에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이 짧아지면서 영인의 반듯한 이마와 남자다운 눈썹이 드러났다.

그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던 백이 작게 외쳤다.

“벌써 인물이 사네.”

“그러게. 왜 이 얼굴을 가리고 다녔어요?”

미용사도 백의 말에 의견을 얹었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이야기를 영인은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미용실 안에 사람이 많았지만, 백의 목소리는 무엇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게 거슬리거나 시끄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해졌다.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인의 커트가 끝날쯤 백은 뒤쪽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았다. 잡지를 뒤적이다가 핸드폰 화면을 보기도 하고, 그러다 지루하면 본격적으로 시술에 들어간 영인의 모습을 구경했다.

영인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는 미용사의 얼굴을 보았다. 핸드폰 액정을 보고 미소 짓는 백을 보았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백의 손끝을 보았다. 가볍게 까닥이는 발끝과 살짝 올라간 바지 때문에 드러난 백의 발목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면을 바라봤을 때, 낯선 표정을 한 자신이 보였다.

* * *

영인은 결국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불면증에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잠들 수 없었다. 이번 병원 상담에서는 도무지 잠들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겠노라 생각하며, 주방으로 가서 찬물을 한 컵 가득 따라 들이켰다.

새벽 5시가 좀 넘은 시간, 어느새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둠의 농도가 옅어졌고 영인은 거실의 창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군가에게는 밝은 희망과 새 시작을 상징할 그 광경이 어쩐지 쓸쓸했다. 모두가 떠오르는 해에 집중할 때, 영인은 물러가야 하는 밤을 아쉬워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다.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며 영인은 어제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백은 2시간이나 미용실에서 영인을 기다려 주었다. 그동안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미용실 직원들과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종종 크게 웃던 백은 기다림조차 즐거운 사람처럼 보였다.

파마가 끝나고 드라이까지 마친 영인을 보고 백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인의 뒤에 서서 쌍 따봉을 들고 감탄했고, 영인은 그 반응이 어쩐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미용사는 이 스타일은 손질이랄 것도 없고 말릴 때 뒤에서 앞으로만 털어 주며 말리면 된다고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백은 영인보다 열심히 그 설명을 들었다.

차에 타서 집에 가는 길에 백은 신호에 걸릴 때마다 영인에게 말했다.

‘머리를 살짝 숙이고, 뒤에서 앞으로 뜨겁지 않은 바람으로 털어 가며 말리고 와요.’

직업병인지 설명이 자세하고 구체적이었다. 자기 고개를 숙여 각도를 보여 준 뒤 불쑥 손을 뻗어 영인의 목 뒤쪽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듯 쓰다듬었다.

‘너무 벅벅 털지 말고, 부드럽게. 오케이?’

영인이 드라이어를 들어 거울을 보다 혀로 이 안쪽을 훑었다. 백의 손이 닿았던 목덜미 근처를 훔쳐, 백을 털어 내고는 백의 설명을 복기해 고개를 숙여 머리를 말렸다. 찬 바람이 나오게 하는 버튼을 엄지손가락이 아프도록 세게 누른 채였다.

모든 출근 준비를 마친 시각은 6시 10분이었다. 통근버스가 오는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 이상이 남아 있었다. 영인이 흘낏, 완전히 밝아진 창밖을 한 번 보고는 콜택시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도착한 건물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무직이 출근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프로젝트 룸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 백이 있었다.

백도 예상하지 못한 방문이었는지 바로 고개를 돌려 열린 문을 보았다. 그리고 방문자가 영인인 것을 알아채고는 놀란 기색을 지우고,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평소에는 내려가 있던 블라인드가 모두 올라가 있었고 들이치는 햇살 속에 백이 있었다.

영인이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노트북을 부팅하고, 사무실 안에 있는 종이컵을 가지고 정수기에 가서 물을 따라 왔다.

“일 많아요?”

백이 빙글 의자를 돌려 사무실로 들어온 영인을 향해 물었다. 오늘도 지적할 곳 없이 멀끔한 모습이었다. 잘 다려진 짙은 회색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더워진 날씨 탓인지 셔츠를 걷어 입어서 보기 좋게 발달한 전완근이 드러났다.

“그냥 일찍 깨서.”

“이따 아침이나 같이 먹으러 가요.”

말을 마친 백이 다시 하던 작업에 집중했다. 영인이 로그온을 위한 비밀번호를 쳤다. 곧 파란 윈도우 화면이 영인을 맞이했다.

백은 관계자들에게 메일을 뿌리며 아침에 하기로 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남들보다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 정도 일찍 출근하는 것은 백의 오랜 버릇이었다. 업무가 과중해질수록 출근 시간은 빨라졌다. 이른 출근은 무장하고 나서는 장군 같은 마음이었다. 일에 지거나 끌려다닐 수 없었다.

마지막 메일의 전송 버튼을 클릭하고 나자 얼추 시간이 7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백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우유와 바나나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오는 편이었지만, 이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팠다. 영인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타자를 치고 있었다. 기계 같은 모습이었다. 배도 안 고프고, 잠도 안 자는 코딩 머신.

“밥 먹으러 가죠. 좀 더 늦으면 이제 사람들 몰려와요.”

백이 일어서며 아이디 카드를 챙겨 들고는 먼저 뒤돌아서 두 팔을 들고 쭉 뻗어 스트레칭했다. 잘 맞는 셔츠 위로 언뜻 곧은 등줄기가 드러났다. 영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백이 문을 열다가 뒤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머리 잘 어울리네요.”

수림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프로젝트 룸으로 출근 중이었다. 어제 남자친구 서윤기와 먹은 저녁에서 술이 과해졌다. 첫 잔이 달면 그날은 조심해야 하는 날인 것을.

숱한 경험으로 그 진리를 터득해 놓고도 결국 제어하지 못했다. 숙취 해소 음료를 세 병이나 때려 넣었지만 도대체 속은 풀릴 줄을 몰랐다. 짧은 진동과 함께 윤기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무사 출근 완료!]

수림이 구토하는 이모티콘으로 답장을 보내고 자리에 겨우 앉았다. 언제나처럼 백의 자리에는 백이 출근한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영인도 일찍 출근한 것인지 영인의 자리도 어지러웠다.

“별일이네. 결근 아니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더니.”

수림이 누가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책상에 엎드렸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아무도 안 왔으면 하고 빌던 수림의 기도가 무색하게 곧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림이 힘없이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림수 책임, 괜찮아?”

백이 수림의 몰골을 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도 술 냄새 나.”

수림이 그 말을 듣고는 바로 토하는 시늉을 하고, 서 있는 백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백의 옆에 있는 영인이 보였다.

지저분하고 보는 사람마저 답답하게 하던 머리카락을 싹 자르고 온 영인이 보였다. 몇 년 만에 보는 말쑥한 모습이었다. 수림이 기억하던 원래 영인의 모습이었다.

바뀐 영인의 모습에 놀라워한 것도 잠시, 수림은 갑자기 목이 메어 와 침을 삼켰다.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힘주어 이를 악물었다. 수림의 턱이 단단하게 긴장하는 것이 백의 눈에도 보였다.

영인과 수림의 눈이 마주쳤다. 수림이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기 위해 윗입술을 아랫니로 물어 보았지만 차오르는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되니 수림조차도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쳐 수림을 흔들었다.

“수림 책임님, 왜 그래?”

백의 걱정스러운 말에 수림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려고 했지만, 얼굴이 더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몇 번인가 코를 훌쩍인 수림이 영인을 보고 겨우 입을 열었다.

“…영인아, 머리 정말 예쁘다.”

최대한 감정을 삭이려는 수림과 그런 수림을 말없이 보는 영인을 백이 번갈아 가며 살폈다.

“커피 한잔하고 올까?”

백이 수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자 백도 수림의 뒤를 따랐다. 영인은 두 사람을 쫓아가지 않았다. 백이 의사를 묻는 듯한 표정으로 살짝 영인을 보았지만, 영인은 고개를 저었다.

문을 닫고 자리에 앉은 영인이 자신의 짧아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었다. 이게 뭐라고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뭐라고 자꾸 마음을 쓰는지.

영인의 황폐한 마음을 적셔 주기에 수림의 관심과 애정은 턱없이 부족했다.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영인은 그래서 수림이 불편했고, 수림과 멀어지고 싶었다. 일부러 거리를 두고 정떨어지는 소리를 내뱉어 본 적도 있었지만, 수림은 끈질겼다.

그래서 영인은 수림에게 미안했다. 이깟 머리가 뭐라고 울기는 왜 우는지. 영인이 쓴 입맛을 다시며 칫솔을 챙겨 들었다.

“림수 책임, 뭐 마실래요? 토마토 주스 먹어. 해장에 좋아.”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르던 수림이 백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이 주문하러 가자, 수림은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백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토마토 주스를 각각 한 손에 쥐고 수림의 맞은편으로 왔다.

“영인 과장 바뀐 헤어 스타일이 그렇게 감동적이었어?”

어느 정도 수림이 진정되어 보이자 백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수림이 그 말에 피식 웃고 주스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감동적이지.”

한숨처럼 말을 내뱉고 수림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지난 세월이 두서없이 눈앞에 떠올랐다. 오늘 영인의 스타일은 영인이 되는대로 자른 것이 아니었다. 전문가의 솜씨였다.

영인이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이 떠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말로 감동적이었다.

“내가 데려간 건데. 미용실 소개해 줄까?”

맞은편에서 백이 커피를 마시며 한 얘기에 수림이 들고 있던 주스를 내려놓고 황당한 얼굴로 백을 보았다.

“책임님이? 왜?”

“그냥. 생각나서.”

“미용실에 가잔다고 가? 강영인이?”

“밥부터 먹이고 데려갔지.”

백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수완을 과시하듯 얘기했다. 아까 전까지 눈물짓던 수림이 대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가 찬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야, 그 자식. 내가 가자고 할 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허!”

방금까지 수림에게 있었던 어떤 감동과 안타까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10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냈고, 솔직히 영인에게 이제 자신 말고는 친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마음을 쓰고 챙겼는데.

“사람 차별하네?”

턱을 괴고 수림의 반응을 보던 백이 자신이 영인에게 특별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제 수림은 일말의 배신감까지 느끼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백은 어쩐지 그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영인에게 남들과 다른 예외가 되었다는 점이.

백은 자리로 돌아와 양치하면서도, 종일 일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묘한 고양감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 감각은 손가락 끝에 남아 떠날 줄을 몰랐다. 손끝이 내내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펜을 쥐고 있을 때도,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마우스 휠을 돌릴 때도 그 손끝이 두근거렸다.

영인은 백에게 괜히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역시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자, 백의 마지막 마음의 문이 열리려고 했다. 영인과 친한 회사 사람을 넘어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알람이 울리기 전 잠에서 깨어 영인이 곧장 출근 준비를 한 지 여러 날이 되었다. 누워서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는 것도, 떠나는 밤을 지켜보며 쓸쓸해하는 것도 지겨웠다. 차라리 이른 아침 공기를 마시고 출근해서 일하는 것이 나았다.

남들보다 몇 시간 먼저 나와 고요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때때로 시간을 버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프로젝트 룸에 도착해서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열면 항상 백이 있었다. 백도 이제는 일찍 출근하는 영인이 익숙한지 더는 놀라지도 않았다. 영인이 오면 손을 흔들거나 어깨춤을 춰 간단하게 인사하고 별다른 말 없이 일에 집중했다.

영인은 그런 사무실의 분위기가 좋았다. 백이 있어서 혼자가 아닌 것도,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은 것도.

말없는 백과 타자 소리만 들리는 그 시간이 영인이 하루 중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끼는 때였다. 영인을 짓누르는 불안이나 우울, 죄책감이 영인이 느끼지 못할 만큼 깊게 가라앉는 순간들이었다. 숨을 쉬는 것도 버겁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 백이 손목시계를 보면 자연스럽게 영인도 하던 일을 정리했다.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영인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일상의 규칙이 다시 생겨나고 있었다.

“오늘 퇴근하고 뭐해요?”

식당으로 가는 길에 백이 물어왔다. 영인은 백보다 반걸음 뒤에서 걷고 있었다. 영인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백도 이미 그런 영인과의 대화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졌는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 했다.

“퇴근하고 여기 근처에 아웃렛 갑시다. 이제 얼굴은 괜찮고, 옷만 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백의 말에 영인이 고개를 살짝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보았다. 검은색 무지 반팔 티에 같은 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동그란 네크라인이 좁아서 영인의 어깨가 더 넓어 보였다. 신발은 항상 검정 바탕에 흰색 로고가 박힌 유명 스포츠 브랜드 운동화였다. 사서 신다가 지저분해지면 버리고 같은 것을 사 신었다.

“과장님 몸이 원체 좋아서 아무렇게나 입어도 나쁘지 않은데, 그래도 이제 좀 격식을 갖춰 입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셔츠까지는 필요 없고, 카라티 정도?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잖아요.”

그것은 별다른 뜻 없는 제안으로 들렸다. 어떠한 가치 판단이나, 평가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영인은 백의 무덤덤한 말투에서 배려를 느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겠지. 영인이 생각했다. 영인에 대한 영화 전자 사람들의 불만이야 누구보다 영인이 잘 알고 있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옷차림마저 지적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영인이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고요한 얼굴로 백을 보았다. 백이 아무렇지 않게 그 눈 맞춤에 응했다.

영인과 아침을 먹은 백은 다른 파트 업무가 있는지 곧장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챙겨서 원래 팀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백이 떠나고 텅 빈 자리를 영인은 일하다가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어느 날은 아주 가깝게 느껴지다가 또 이럴 때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처럼 백이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길고 지루한 오전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주성 씨, 백 책임님 점심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봐.”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수림이 주성에게 넌지시 백의 점심 식사 합류 여부를 확인했다. 주성이 우렁차게 ‘네’라고 대답하고 핸드폰을 꺼내 백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책임님, 저 주성인데요. 오늘 점심 와서 드십니까?”

-주승아, 나는 오늘 팀장님이랑 먹어. 너도 올래?

“아뇨. 여기서 먹겠습니다.”

주성은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지만 껄끄럽고 불편한 자리를 고사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백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주성의 핸드폰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래. 맛있게 먹어. 이따 오후에 간다.

“넵!”

백과 통화를 끝낸 주성이 수림에게 백의 이야기를 전했다. 수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백이 오지 않는다면 굳이 서둘러 점심을 먹으러 갈 필요가 없었다.

영인이 다시 백의 자리를 보았다. 백은 오고 가는 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오고 싶으면 왔다가 가야 할 때는 가 버렸다.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은 영인 자신이었다. 백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있으면서.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이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이 무엇일지 영인이 고민했다. 프로젝트 리더일 뿐인 백이, 다른 업무도 많은 백이 이곳으로 오지 않는 게 왜 불쾌한 것인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영인이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백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영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나. 단지 그뿐이었다. 영인이 다시 마음을 단단하게 다잡았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은 넘치게 많았고, 해치우다 보면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퇴근하면 그때는 백이 영인을 차 안에서 기다릴 것이었다.

“밥 먹으러 갑시다.”

열두 시 반이 넘어서야 수림이 말했고 영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주섬주섬 식당으로 갈 채비를 했다. 태준은 수림과 한판 뜬 이후로 더욱 말을 아꼈고, 수림도 태준의 파트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조용하고 불편한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영인은 혼자 건물 밖으로 나와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깊은숨을 마셨다가 내뱉으니 희뿌연 연기가 눈앞에서 흩어졌다.

흡연은 유해한 숨이었다. 온갖 더럽고 몸에 나쁜 것들이 들어와 영인의 내부를 훑고 나갔다. 들숨과 날숨이 몇 번 더 이어졌고, 어지럽고 알 수 없는 마음들을 연기와 함께 뱉어 냈다. 그리고 바짝 타들어 간 담배를 영인이 재떨이에 비벼 끄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다시 사무실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프로젝트 룸으로 향하는 영인의 뒤를 백이 숨죽여 쫓아가고 있었다. 백과 영인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는데도 영인은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백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백이 거의 영인과 닿을 듯이 다가가서 영인의 귓가에 영인만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작게 외쳤다.

“워!”

영인이 마음을 정리하다가 일순 들려온 백의 음성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워낙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영인이었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큰 반응이 아니었지만. 영인은 정말로 놀랐다. 쿵. 가슴이 떨어지는 감각이 들 정도로.

겉으로는 그다지 놀란 티가 나지 않았음에도 백은 영인의 색다른 표정이 재미있는지 싱긋 웃고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영인이 알아들었다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백이 다시 걸음 소리를 죽이고 앞서 걷고 있던 수림의 뒤로 갔다. 수림의 손에는 칫솔과 치약이 들려 있었다.

영인에게 했던 것처럼 백이 수림의 뒤에 바짝 붙어 작게 ‘워’라고 말하자 수림은 거의 뒤로 넘어갈 듯 화들짝 놀랐다.

“엄마야!”

백이 이제야 만족할 만한 리액션을 얻은 것인지 수림을 보고 크게 웃었다. 수림은 요란하게 놀란 뒤에야 백의 장난에 당한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손을 들어 백의 어깨를 철썩 때렸다.

“아우, 아파.”

“깜짝 놀랐잖아요!”

수림이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지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백을 노려보았고 백은 그런 수림에게 웃으며 사과하고 있었다. 영인은 여러 걸음 뒤에서 그런 둘의 모습을 보았다.

잘 어울렸다. 백과 수림의 모습이 아주 이상적이었다. 백이 여자와 있는 모습은 교과서에 나온 정답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영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멈춰 서서 점점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디에도 영인이 낄 구석은 없었다.

수림과 대화하며 프로젝트 룸을 향해 걷던 백이 불현듯 잊은 것이 생각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강 과장님, 빨리 와요.”

그리고 영인을 불렀다.

나란히 프로젝트 룸으로 들어온 세 사람을 주성이 무슨 영문인지 묻는 듯한 얼굴로 보았다. 백이 한쪽 팔에 끼고 있던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책상 위에 올려 다시 일할 준비를 했다. 자리에 앉은 수림은 어디가 불편한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칫솔을 정리했다.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백이 모니터와 노트북을 연결하며 묻자 수림이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투덜거렸다.

“역류성 식도염이 도져서 커피를 좀 끊었더니 두통이 와서 죽겠네. 커피를 마시면 위가 아프고, 안 마시면 머리가 아프고.”

“카페인 중독이라 그래.”

백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수림을 보았다. 둘의 대화를 듣던 주성이 양손을 들어 휘휘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손목터널증후군이래요. 일자목도 있고.”

갑자기 직장인 질병 자랑 궐기대회가 열리는 분위기였다.

“주승아, 너는 몇 년이나 일했다고 벌써 그럼 어쩌냐.”

백이 주성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성은 자신의 일자목 증후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목을 한참 앞으로 빼고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백의 시선이 영인에게로 옮겨갔다.

영인은 의자 등받이에 살짝 등을 대고 앉아 있었는데, 어디 하나 구부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은 바른 자세였다. 영인의 몸 구석구석에 붙어 있는 근육들이 몸을 단단히 지탱해 주고 있는 듯 보였다. 누가 봐도 굵직한 뼈대도 여간해서는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인상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이 커피를 마실 생각인지 커피믹스가 종류별로 놓여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었다. 수림의 의자 뒤를 지나고, 영인의 의자 뒤를 지나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망설임 없이 목적지를 향해 갈 것 같던 백이 영인의 뒤에 우뚝 멈춰 서더니 두 손으로 가볍게 영인의 어깨를 짚었다. 꼿꼿한 자세로 코딩을 하던 영인의 등과 어깨가 백의 체온이 느껴지자마자 단단하게 굳었다.

“주승아, 이 아저씨 봐. 자세가 FM이지. 이렇게 앉아서 일해. 거북목 되면 진짜로 고생한다.”

말을 마치고도 백은 영인의 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체중을 싣지 않고 가볍게 얹은 것뿐인데도 영인은 마치 셀 수 없는 모래주머니를 영겁의 시간 동안 지고 있는 것처럼 버거웠다.

“오, 근데 진짜 어깨랑 목이 두껍다. 강 과장님 정말 따로 운동 안 해요?”

백은 그런 영인을 놀리듯 이제는 영인의 어깨를 주무르기까지 했다. 영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아프지 않게 제 몸에 붙어 있는 백의 손을 밀어냈다.

“왜 이렇게 만져요?”

영인의 질문에 전에 없이 날이 서 있었다. 백이 그 가시를 느꼈는지 영인에게 양 손바닥을 보이며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상대방에게 무기나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적극적으로 표시하는 제스처였다.

“쏘리! 이상한 오해 하지 마세요.”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가득했다.

“무슨 오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림이 오랜만에 백을 놀릴 건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음흉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은 간식이 놓인 테이블로 가서 설탕이 들지 않은 커피믹스를 골라 들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아니,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결혼을 안 했다고 나를 동성애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더라고.”

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종이컵에 커피 가루를 부었다. 수림은 백의 입에서 동성애자 이야기가 나오자 아무도 모르게 영인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영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까 하던 작업을 이어 하고 있었다.

“동성애자인 게 뭐! 그게 왜 이상한 오해야?”

괜히 수림이 영인 대신 화를 내듯 백을 쏘아붙였다. 백은 대뜸 들어오는 수림의 핀잔에도 미소를 지었다.

“아니니까. 동성애자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난 아니라고. 에이, 그리고 내가 만약 남자를 좋아한다고 쳐.”

백이 복도에 있는 정수기로 가려다가 멈춰서 사무실 안의 인원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면 내가 우리 주승이 같이 귀여운 애를 좋아하지, 미쳤다고 강 과장님 같은 덩치를 좋아할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과장님.”

백은 노상 그렇듯 싱글벙글하였고, 백의 말을 들은 주성 또한 살짝 웃음 지었다. 영인은 그 모든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하아… 저도 노 책임님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합니다.”

영인이 어이없어하며 결국 발끈하고 말았다. 영인이 한 그 말이 엄청 재미있었는지 백이 소리 내 웃었다. 늘 있는 듯 없는 듯하고, 감정도 없어 보이던 코딩 머신이 농담을 했다는 사실이 기특했다. 마구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원래 스타일 아닌데 빠지면 답도 없어요. 조심하세요.”

백이 영인에게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프로젝트 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또다시 남은 것은 영인이었고, 정말로 답이 없었다. 영인이 닫힌 문을 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어지러운 것들을 모두 뱉어 내듯이.

퇴근 후 영인은 자연스럽게 백의 뒤를 따라 백의 차에 타서 무사히 아웃렛까지 실려 왔다. 지난번 집들이 장 보러 갔을 때도 느꼈지만 백은 대책 없이 손이 컸다. 영인은 지친 얼굴로 양손 가득한 쇼핑백을 다시 한번 고쳐잡았다.

“이제 충분한 거 같은데.”

백이 영인의 손에 들린 옷들을 가늠해 보았다. 이 정도면 주 5일 출근복은 마련이 됐다 싶었는지 영인의 말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이건 제가 사 줄게요. 한 번은 입고 싶어지는 날이 오겠지. 아마 이 사이즈면 맞을 거 같은데 혹시 소매 짧으면 말해요. 교환하게.”

백이 회색의 얇은 스트라이프 무늬 셔츠를 골라 들었다. 영인이 백의 손에 들린 옷걸이를 빼앗듯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백이 원한다면 여태까지 산 많은 옷들처럼 살 수야 있지만, 공짜로 받을 이유는 없었다.

“에헤이. 내가 사 준다니까.”

계산대에 줄 선 영인 옆에 온 백이 다시 옷걸이를 잡았다. 영인이 놓지 않아서 완전히 빼앗지는 못하고 있었다.

“뇌물이라고 생각해요. 다음 주부터 프로젝트 일정 진짜 인정사정없어질 거 같던데.”

백이 힘으로는 도저히 영인에게서 옷을 가져오지 못할 것 같아 보이자 영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영인은 묵묵부답으로 있다가 줄어드는 줄을 따라 걸었다.

“아, 진짜로 사 주고 싶다.”

백이 영인의 옆에서 따라 걸으며 부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지만, 영인은 미동도 없었다.

“강영인 과장한테 너무너무 사 주고 싶은데.”

백은 반응이 없는 영인을 자꾸 찌르고 싶었다. 한 번씩 꿈틀거리는 미간이나, 거절을 곤혹스러워하는 모습, 여간해서는 열지 않는 입을 통해 나오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재미있었다.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원래 남들에게 인심이 후한 백이었지만, 그래서인지 영인에게는 좀 더 집요하게 퍼 주게 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영인의 차례였다. 영인이 옷걸이를 올려 두고 지갑을 꺼내자, 백이 잽싸게 준비해 두었던 카드를 점원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영인이 백의 잘생긴 손에 쥐어진 카드를 보고 백의 얼굴을 보았다. 영인의 얼굴에는 백이 예상한 것처럼 당혹스러움과 의아함 그리고 약간의 체념이 묻어 있었다.

“책임님이 왜 삽니까?”

백의 예상과 일치하는 표정과 목소리였다. 색다른 쾌감이 들었다.

“형이니까?”

전자 서명 패드에 사인을 남기며 백이 한 대답에 영인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 할 말을 잃어 살짝 벌어졌던 입을 꾹 다물어서 겨우 그런 자신의 상태를 감출 수 있었다.

백이 점원에게서 받아 든 쇼핑백을 영인에게 건넸다. 시원한 미소 속에 서려 있는 승리감을 영인은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다.

“형의 선물.”

영인은 묘한 표정으로 백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형이었네. 림수 책임이랑 동갑이잖아요.”

아직 어정쩡하게 쇼핑백을 들고 있는 영인을 지나쳐 걸어가며 백이 이야기했다.

“회사에 형이 어디 있습니까?”

“왜 없어요. 술자리에선 주승이도 나한테 형이라고 할 때 있는데.”

매장 문을 밀어 열고 아직 멈춰 있는 영인을 기다리며 백이 말을 이었다.

“강 과장님도 사석에선 편하게 불러도 돼요. 형이라고.”

백은 먼저 나가 문을 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 앞에 있는 사내를 보며, 영인이 자신을 위해 열려 있는 문을 향해 걸었다. 백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저녁은 시켜 먹죠. 식당 가기도 귀찮은데. 강 과장님 집으로?”

백이 운전하며 옆을 보자 팔짱을 끼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영인도 백을 보았다. 영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백이 가볍게 혀를 찼다.

“우리 집으로 가죠. 청소 좀 하고 삽시다.”

지난날 마주했던 영인의 폐허 같은 집을 백이 다시 떠올렸다. 조만간 자신의 집에 일주일에 두 번씩 와 주는 가사도우미를 영인에게도 추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백이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 입구로 차를 몰았다.

“치킨 괜찮죠? 아오, 이게 뭐야?“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백이 기둥 옆에 누군가 잔뜩 쏟아 놓고 간 쓰레기를 보며 인상을 썼다.

“강 과장님 먼저 들어가요. 902동 1605호. 비밀번호는 017517#.”

한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던 영인이 예고 없이 들어온 사적인 정보에 할 말을 잃고 서서 백을 보았다.

“902동 1605호. 비밀번호 017517#. 외웠죠?”

백이 그런 영인에게 보란 듯이 다시 자기 집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를 말했다.

“그렇게 막 비밀번호를 알려 주면….”

“자주 놀러 와요. 도둑질은 하지 말고.”

말을 마친 백이 걸음을 옮겼다. 지하주차장의 출구인 오르막길을 성큼성큼 올라서 금방 뒷모습마저 사라졌다.

902동 1605호 017517#. 영인이 작게 백의 집으로 향하는 숫자 몇 개를 되뇌었다.

경비원에게 지하주차장의 상황을 설명한 백은 그대로 아파트 상가에 있는 치킨집으로 가서 포장 주문을 했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이 하는 치킨집이었는데 옛날식 통닭이 특히 바삭하고 맛있어서 근방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잠시 기다려 갓 튀긴 치킨을 받아 들고는 조금이라도 더 바삭할 때 빨리 영인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백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달리듯이 가벼운 발걸음이 이어졌다.

* * *

어느새 6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백은 또 프로젝트 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인은 백의 부재를 의식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백을 무시했다.

“오늘 마감 날이죠? 빡세겠네.”

수림이 월말인 날짜를 확인하고 백에게 아는 체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지만 백의 오늘 일은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었다.

“응. 마감 지겨워 죽겠다. 부디 이슈가 없길 빌어 줘. 언제 퇴근해?”

백이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매달 말일과 1일에 진행하는 마감 작업은 운이 좋으면 12시 전에 끝나지만, 재수가 없으면 밤을 새워야 할 때도 있었다.

“막차는 타고 가려고. 김 차장님 파트는 잘되고 있는 거 맞아?”

영화 전자의 셔틀버스는 10시까지 운행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수림과 영인은 막차 타고 퇴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태준은 여전히 정시 퇴근 후 집에서 추가 근무를 한다고 했는데 수림은 그것이 못마땅하면서도 다시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테스트는 매일 하고 있는데, 마감 끝나면 1차 개발 건까지 다 같이 이어서 테스트 진행 한번 합시다. 가자, 주승아.”

백에게 잡혀 마감 지원을 하게 된 주성이 힘없이 일어섰다. 백은 수림과 눈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들었다. 그러다 자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개발만 하는 영인을 발견하고는 가늘게 눈을 떴다.

“나 가요.”

백이 나직하게 말했지만, 영인은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인식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타자를 두드리느라 바빴다. 수림은 또 시작이라는 얼굴로 영인을 봤다가 백을 보며 혀를 찼다.

“강 과장님! 나 가요.”

영인이 그제야 퍼뜩 놀라 백을 보았다. 백이 아까부터 능글맞은 표정으로 영인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눈이 마주쳤다.

“간다고요. 인사는 해 줘야지, 우리 사이에.”

“하, 참… 잘 다녀오세요.”

영인의 어색한 인사를 받고서야 만족했는지 백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다녀올게요. 조심히 들어가요.”

그런 날이 있었다. 아다리가 딱딱 들어맞는 날. 오늘 마감이 그러했다. 백은 생각보다 빨리 맞아떨어지는 재고와 물 흐르듯 넘어가는 비용 체크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주승이, 운이 좋네. 오늘 마감 일찍 끝나겠다.”

“정말요?”

시간은 10시가 좀 넘어 있었다. 보통은 12시에서 1시 사이, 늦어지면 새벽 3시, 4시까지도 대중없이 이어지는 작업이었다.

“이런 날이 가끔 있어.”

일 중독자 같은 백도 내심 예상보다 빠른 퇴근이 기뻐 보였다. 영인과 수림은 버스를 타고 퇴근했을 시간이었다. 백이 마지막으로 데이터를 확인하는 쿼리를 돌려보았다. 이것만 맞으면 오늘은 해방이었다.

“집에 가자!”

백이 주성을 보며 시원하게 웃고는 프로그램을 하나씩 종료시켰다. 주성은 아까부터 싸 둔 백팩을 둘러메고, 백의 정리를 기다렸다.

“벌써 가냐? 오늘 뭔 일이야?”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가득 따라온 영태가 퇴근 준비를 하는 백과 주성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서로 다른 파트 마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백이 그중 제일 먼저 퇴근하는 것이었다.

“나도 좀 살자.”

백이 영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주성을 기숙사 앞에 내려주고 집을 향해 가던 백이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을 먹기는 했지만, 사내 식당에서 먹어서인지 허기가 졌다.

평소라면 집에서 계란이나 삶아 먹었겠지만 이제 자신에게는 동네 친구가 생겼지 않은가. 영인도 퇴근해서 집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됐을 시간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이번에는 뭘 사 가면 좋을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치킨은 먹였고.

덩치는 산 만한데 어쩐지 늘 기력이 없어 보이는 영인의 모습을 떠올리자 단박에 회사 근처에 유명한 장어 덮밥집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이미 시간은 늦었고, 아쉬운 대로 순대국밥이라도 사가 뜨끈한 국물에 밥이나 한 공기 먹여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백이 차를 돌렸다. 영인은 이상하게 챙겨 주고 싶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놀려 주고 싶기도 하고.

오래지 않아 식당에 도착한 백이 순대국밥 포장을 주문하고 영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 후에 영인이 전화를 받았다.

“강 과장님, 아직 안 자죠?”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따금 무거운 영인의 신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방금까지 홀가분한 표정으로 있던 백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사장님! 죄송해요. 저 그냥 가 볼게요. 계산은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요. 죄송합니다.”

백이 순대국밥을 막 포장하려는 직원을 향해 급하게 소리치고, 주차해 둔 차로 뛰었다.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손에 꼭 쥐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차 문을 열고 출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액셀 위에 올라간 발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신호등 앞에서 속도를 줄이는 평소와 다르게 행여 신호가 바뀔까 좀 더 속도를 올려 영인의 집으로 향했다.

영인의 집까지 온 기세는 좋았는데 이번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문손잡이를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백이 초인종을 눌렀다. 다음번에는 무조건 영인의 집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말겠다고 생각하며.

여러 번 반복해서 초인종을 누르자 요란한 벨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텅 빈 복도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백은 자꾸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가 걱정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걱정이 되었다.

“강 과장님!”

백이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닫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 연신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백은 계속해서 영인을 불렀다. 영인을 부르는 음성이 어느새 절박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지금 이 문을 열어야만 했다. 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는데도 어쩐지 영인이 자꾸만 자기를 부르는 것 같았다. 백이 헛기침을 하고 동요했던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고 침착해지기 위해 애썼다. 이성적으로 문을 열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경비실에 가야 할지 열쇠 수선공을 불러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무거운 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두운 문 안쪽으로 보이는 것은 문을 밀어 여는 영인의 팔뿐이었다.

그리고 백은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영인의 집 안으로 기꺼이 들어섰다.

영인은 오늘도 흐릿한 눈이었다. 살펴보지 않아도 상태가 어떤지 짐작 가능했다. 집은 역시 엉망이었다. 멍하니 백을 보던 영인이 유령처럼 뒤돌아서 걸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백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왜 화가 날까?’

영인의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자니 화가 났다. 백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보지 못할 표정이었다. 전혀 백답지 않았다.

무서운 얼굴로 백이 비틀거리는 영인을 붙잡고 팔 한쪽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올려 단단히 붙잡았다. 나머지 팔로는 영인의 몸통을 감싸 지탱하고 천천히 영인과 함께 움직여 침실로 향했다. 영인은 힘없이 백에게 기대 끌려오다시피 걸었다.

침대에 도착해 영인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큰 덩치를 밀고 당겨, 겨우 베개를 베고 눕게 할 수 있었다. 얌전히 누운 영인이 백을 올려다보았다. 백은 침대 옆에 서서 그런 영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냉정해 보일 만큼 표정이 없었다.

“술이랑 약 같이 먹지 마.”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백이 영인을 향해 작게 말했다. 지난번에도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영인은 그때도 지금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큰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영인은 백의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잠을 잘 수가 없어. 잘 수가 없어, 진아.”

영인이 커다란 손으로 백의 손을 잡았다.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남자치고 크고 길쭉한 백의 손을 영인의 손은 넉넉하게 감쌀 수 있었다. 영인의 체온이 손바닥을 타고 백의 손등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잠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자면 돼.”

백은 영인이 자신을 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거슬렸지만, 일단 영인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우선순위가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따지는 것은 다음 일이었다.

“네가 꿈에 나와도, 나오지 않아도 잘 수가 없어.”

영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눈꼬리 끝에서 눈물이 주룩 끝없이 흘러내렸다. 백이 영인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런 영인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꿈에 나오면 나오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대로 자. 흘려보내.”

얼마나 호된 이별이었기에 이렇게 형편없이 무너졌는지. 백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영인의 약한 모습에 아까 들었던 노기는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영인의 눈가를 오래도록 쓸어 준 백이 영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주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바닥이 이마를 살짝 누르자 영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맞닿은 피부가 두근거렸다. 영인의 이마에서 느껴지는 맥박인지, 백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맥박인지 알 수 없었다.

백은 영인이 완전히 잠들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영인은 잠들고서도 백의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백이 안고 있던 갓난아이를 품 안에서 내려놓듯 조심스럽게 영인의 손을 자신의 손에서 떼어 놓았다. 그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들려오고서야 발걸음 소리를 죽여 영인의 침실을 나섰다.

어쩐지 참담한 기분이었다. 부엌 싱크대는 엉망이었다. 일회용품과 그릇들이 제멋대로 쌓여 있었다. 백이 한숨을 내쉬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이대로 두고 갈 수가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백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평소 듣던 플레이리스트가 아니라 남들이 만들어 둔 리스트를 검색했다. 지금 백은 신나고 익숙한 무엇이 필요했다.

‘2000년대 신나는 추억의 가요’라는 리스트를 클릭해 임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2000년대는 말하자면 백이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이상한 시기였다. 그때가 좋았지. 백이 생각하며 수세미에 주방 세제를 꾹 짰다.

제일 처음 나온 노래는 클론의 ‘초련’이었다. 영인 때문에 심란했던 마음이 요란하고 익숙한 반주가 나오자 잊히는 듯했다. 지금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오는 문제였다. 야광봉을 흔들던 듀오를 추억하며 백이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오늘따라 가사가 귓속에 쏙쏙 들렸다.

‘난 그냥 좋았어 니 앞에만 서면’

백이 생각 없이 가사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얀 거품이 그릇에 묻은 더러운 것들을 씻어 냈다.

‘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몰라

니 생각만 하고 자꾸 보고 싶고

틈만 나면 난 너를 만나고 싶어’

뿅뿅뿅, 쟁쟁쟁 요란한 반주에도 노래 가사는 선명하게 들어와 박혔다. 그리고 여태 힘차게 해대던 수세미 질을 백이 멈추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백의 움직임은 멎었지만, 노래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길 가다 멋진 옷을 볼 때면 항상

언제나 너에게 다 사 주고 싶고’

백이 마른 침을 삼켰다. 이어폰을 꽂은 귀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백의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내 눈엔 오직 너만 보여

내 자신 조차도 주체할 수 없는

이런 감정이 사랑인가 봐’

백이 거품이 묻은 손으로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그제야 노래도 멈추었다.

“뭐지, 씨발.”

백의 입가가 부자연스럽게 떨려 왔다. 평정심을 잃은 것은 아주 오랜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백이 이어폰을 쥔 손에 힘을 줘 주먹을 꽉 쥐었다. 백의 손등과 팔뚝 위로 푸른 혈관이 도드라졌다.

통속적이고 유치한 노래 가사가 백의 뒤통수를 강렬하게 내려쳤다. 백은 이제서야 자신이 강영인의 집에서 강영인을 걱정하고, 재워 주고, 설거지를 하는 이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 * *

“책임님, 어제 잠 못 주무셨어요?”

출근한 주성이 퀭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는 백을 보자마자 물었다.

“티 나?”

“네, 완전 피곤해 보이세요. 어제 일찍 끝났잖아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백이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마른 입술이 당겨 왔다. 백의 어색한 표정에 주성은 살짝 의문이 드는 표정이었지만 더는 자세히 묻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늘은 마감 핑계로 프로젝트 룸에 가지 않아도 됐지만, 내일은 사정이 달랐다. 다시 복귀해야만 했다, 영인이 있는 그 방으로. 영인을 생각하자 몰려오는 두통에 백이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어제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계속 반복해서 울리는 노래 가사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몇 시간을 뒤척이며 고민했지만, 아직 감정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남들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맛있는 걸 보면 먹여 보고 싶은 게, 삶의 부족한 부분들을 조금 도와서 채워 주고 싶은 게 사랑의 감정이라면…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백이 크게 한숨을 쉬고 미리 따라 둔 찬물을 벌컥 들이마셨다.

“아침부터 한숨을 왜 이렇게 쉬어?! 나까지 기운 빠져.”

옆자리에 있던 영태가 백을 타박했다. 출근 이후로 벌써 여러 차례 반복된 한숨이었다. 백은 무슨 말을 할 듯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한숨을 쉬어도 답답한 속은 풀릴 줄 몰랐다.

차라리 일이 바쁜 날이라 다행이었다. 본격적으로 마감 업무가 몰아치자 백은 잠시 영인에 대한 생각을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 둘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씩 조금의 틈이 생기면 커다란 물음표와 함께 영인의 얼굴이 백의 머릿속을 점령해 버렸다.

영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것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백은 낯선 감정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했다. 아직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영인은 자신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어떤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여기 아주 작은 불씨만 붙으면 걷잡을 수 없는 갈증과 욕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백을 지배할 것이라는 것을 백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번의 연애를 통해서 질리도록 겪은 일들이었다.

그러니까 불씨를 조심해야 했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을 것이라고 백은 시도 때도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독였다.

맛없는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영인의 얼굴은 불쑥불쑥 떠올랐다. 무표정한 그 얼굴이 점점 심술궂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때려서 부술 수 있다면, 불어서 날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텐데 한번 자각한 마음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의식하면 끝난 건데.

백이 몇 숟가락 들지 않은 식판을 들고 퇴식구로 걸어갔다. 함께 밥을 먹던 팀원들은 백의 돌발행동에 놀란 눈치였지만, 떠나는 이를 딱히 잡지는 않았다.

건물 앞 산책로 부지에는 삼삼오오 몰려나온 직원들이 수다를 떨며 걷고 있었다. 백은 그 무리를 지나 가장 사람이 없어 보이는 등받이가 없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여름이 오기는 왔는지 날이 푹푹 쪘다.

“왜 혼자 청승 떨고 있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누군가와 통화하며 걷고 있던 수림이 햇볕을 가려 주는 가림막 하나 없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백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전화 상대방과 다정하게 통화를 마무리한 수림이 백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왜? 마감 이슈 있어?”

백이 고심하는 일은 업무 말고는 없다고 생각한 수림이 재차 물었지만 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전에 없는 완고함이 느껴졌다.

“나 갈까?”

수림이 심상치 않은 백의 분위기를 읽고는 당장이라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준비를 했다. 한참 허공을 보던 백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수림을 마주 보았다. 하루 만에 얼굴이 꺼칠해져 있었다.

“얼굴이 훅 갔네. 얼굴 말고는 볼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해.”

처음 보는 백의 모습에 수림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진이가 누구야?”

“무슨 진이.”

백이 목구멍에 걸려 있던 이름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수림에게 물었다.

“강영인 과장의 진이.”

감정이 혼란스러운 건 혼란스러운 거고, 따질 건 따져야 했다. 자꾸만 저더러 진이라고 하는 건 정말로 불쾌했다. 노백은 노백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아니어야 했다. 그런 건 넌더리가 났다.

“…책임님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그냥. 자꾸 말하더라고.”

백이 시선을 내려 자신과 수림의 발끝을 보았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깍지를 낀 탓에 백의 상체가 기울어져 있었다. 수림이 낮게 내려가 있는 백의 뒤통수를 흘낏 보았다.

강영인의 리스크를 백에게 공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복잡한 생각이 수림의 머릿속에서 엉켜 있었다.

영인의 개인사를 자신이 공개하는 것은 분명 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개인사 때문에 프로젝트에서 영인이 깽판을 친 것이 벌써 몇 번.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지만, 또 언제 영인이 맛이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리 성능 좋은 기계여도 뻑이 나는 횟수가 잦다면 폐기 처리되기 마련이었다. 사람이라고 다를까. 영인은 언제라도 내쫓길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백이 아니었다면 이번 복귀도 어려웠을 것이었다.

인정 많은 백은 사정을 알면 한 번 정도는 영인의 오작동을 이해해 줄지도 몰랐다. 수림이 깊은 고심 끝에 남은 커피를 쪽 빨아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구냐면. 나는 이거 영인이 친구로 말하는 거 아니에요. 개발 리더로 개발자의 상태를 공유해 주는 거지. 비밀 지켜 줘요.”

백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인 의도를 잔뜩 품은 질문에 수림은 공적으로 대답해 주고 있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영인이 죽은 애인. 그렇게 된 지는 2년 좀 넘었고. 차 사고였어요. 근데 아직 극복을 못 했어.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가끔 맛이 갈 때가 있거든. 이번 프로젝트에선 안 그러게 내가 잘 볼 거지만… 혹시 그러면… 이해 좀 해 줘요. 가엽게 생각해 줘.”

수림의 이야기가 끝나자 백의 고개가 푹 고꾸라졌다. 한없이 땅 밑으로 가라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제일 가여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백 자신이었다.

자기보다 10cm 가까이 큰 곰 같은 남자에게 가슴이 떨리려고 하고 있고, 그 남자는 죽은 여자친구를 아직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백 자신도 누구보다 건장한 남자라는 점도 무시 못 할 일이었다. 36살 백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내면에 말도 안 되는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서 좋은 점들이 있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게 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결과를 알면, 미리 그에 맞는 준비를 할 수 있기 마련이었다. 이득을 높이든 손해를 줄이든 남들보다 유리한 입장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연륜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이건 해 보나 마나 한 게임이었다. 필패의 운명. 백은 기름 먹인 볏짚 단을 들쳐 메고 화마의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아직 자신의 감정조차 확실히 정의하지 못했는데, 어려운 숙제들이 줄줄이 꿰인 낟알처럼 따라 올라와 백을 졸라맸다.

당분간은 영인을 피하기로 마음먹고 백이 분연히 고개를 들었다. 차단하고, 무시하고, 외면해서 정리될 감정이기를 간절히 바라였다.

“알았어. 내가 참고할게.”

“그래, 강영인한테는 내가 말한 거 비밀이에요.”

“당연하죠.”

내가 물은 것도 비밀이다. 백은 전하지 못할 말을 속에 눌러 담고 다시 영인이 없는 사무실로 향했다.

* * *

“주성 씨, 솔직히 말해 줘요.”

수림이 침울한 얼굴로 주성을 바라보았다. 수림의 대각선 앞에 앉은 주성은 안절부절못하고 수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노빠구 우리 버렸지? 이 프로젝트 나가리 된 거지?”

“그건 진짜 아니에요! 담당님 보고도 잡으셨던데.”

주성이 오버하며 대답했지만, 수림은 여전히 그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일주일이 넘게 여길 안 오는 거야? 메신저랑 메일에는 답장하면서 왜 여기 안 오는 거지?”

수림의 눈에 광기가 서리는 듯했다. 백 대신 영화 전자 대표로 자리한 주성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백에 대한 그리움과 서운함은 주성도 수림 못지않게 컸다.

“모르겠어요. 자꾸 바쁘다고만 하시고.”

주성도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들 일에는 좀처럼 관심이 없는 영인도 내심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까 해서 집중해서 듣고 있던 차였다. 월 마감이 끝난 지 오래였는데, 금방 돌아올 것 같던 백이 오지 않은 지 벌써 6일째였다.

며칠째 백이 오지 않는데도 영인은 여전히 이른 새벽 출근해서 심호흡을 하고 프로젝트 룸 문을 열었다. 지난 몇 주간 익숙했던 아침 풍경을 기대하며.

그러니까 말하자면 들이치는 햇살과 제자리에 앉아 있는 백의 반듯한 뒷모습 같은 것들.

그러다 백의 빈자리를 마주하면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을 귀찮게 하더니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린 백에게 영인은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었다고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이건 배신이야. 나를 여기 박아 놓고 쳐다도 안 봐?”

수림은 당장이라도 백에게 전화할 기세였다. 주성은 내심 수림의 편이었다. 수림이 어떻게 해서든 백을 다시 프로젝트 룸으로 불러들이기를 간절히 바라였다. 이곳은 아직 아기 새 같은 주성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어미 새가 필요했다.

“오늘 제가 노 책임님 스케줄 봤거든요. 파트 석식 있으시던데.”

“근데요?”

“저희도 그 근처에서 회식하는 척하고 가서 만날까요?”

주성의 말을 들은 수림이 잠시 생각하더니 손뼉을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아니 얼굴이라도 봐야지. 연락하면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만나 주지도 않아 지금.”

수림이 전투적으로 다시 코딩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강영인도 같이 가는 거야. 프로젝트 회식이니까. 김 차장님은… 안 가실 거죠?”

“안 갑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고 수림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유난히 타자 소리가 크게 들렸다. 영인은 물끄러미 백의 빈자리를 보았다. 자리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었던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가 않았다.

식당에 들어온 수림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꽤 넓은 식당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룸이어서 문이 닫힌 곳은 신발을 유심히 보며 백을 찾기 위해 애썼다. 주성 또한 그런 수림과 반대 방향에서부터 훑으며 백을 찾고 있었다.

“여기 없는 거 같은데?”

식당을 샅샅이 뒤진 수림이 이야기하자 주성도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백의 일정표에는 석식 장소가 이 삼겹살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마 중간에 장소가 변경된 모양이었다. 영인은 가만히 서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직원은 이미 수림 일행이 들어섰을 때부터 자리 안내를 하기 위해 다가와서 기다렸는데 덩치가 크고 사나운 인상의 영인 때문인지 차마 재촉도 못 하고 있었다.

“이왕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요. 오늘 엄청 달릴 거야.”

수림이 직원의 뒤에 서자 직원이 그들을 비어 있는 룸으로 안내해 주었다. 수림은 자리에 앉자마자 떠나는 직원의 뒤에 대고 맥주 3병과 소주 1병을 주문했다. 고기도 시키기 전이었다. 주성은 수림의 그 호쾌함에 반했다는 표정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수림과 영인의 앞에 두었다. 세 사람만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주성과 수림의 얼굴은 오래지 않아 발갛게 달아올랐다. 주성이 소맥 황금 비율을 안다고 큰소리치며 끝없이 제조한 폭탄주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연신 잔이 깨지게 건배를 하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는 동안 영인은 어쩌다 한 번씩만 목을 축이는 정도로만 마시고 있었다.

어느새 불판 위에는 식은 고기 몇 점만 널브러져 있었고 주성과 수림은 적당히 취해 즐겁게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영인은 초대받지 못한 채, 이미 다 끝나 버린 파티에 늦게 도착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영인이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백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귀신같이 영인을 다시 무리에 합류시키곤 하였다. 처음부터 그랬다. 지금은 그런 백이 없었다. 영인은 누구와도 닿지 않는 무릎을 손으로 매만졌다. 언젠가 닿았던 누군가의 무릎을 떠올리며.

“이제 가자.”

수림이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말하자, 주성도 흔들거리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장 멀쩡한 영인이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오, 돈 제일 잘 버는 사람이 쏘는 거야?”

술기운 탓에 잔뜩 풀어진 수림이 말을 마치고는 실없이 웃었다. 영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럼 아이스크림은 제가 살게요!”

그 뒤를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 나온 주성이 외쳤다.

“그럼 내일 내가 해장 점심을 살게!”

수림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가게 밖으로 나온 수림이 주성과 바로 옆에 있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영인은 편의점 밖에 서서 별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저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운동화 속 작은 돌멩이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처럼 확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거슬리고 불편한 감각이 드는 것도 돌멩이와 닮은 사람이었다. 영인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로 고정되었다.

그 작은 인영은 백이었다. 거리가 꽤 있어 모습이 아주 작게 보였음에도 모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근처 다른 식당에서 회식한 것인지 거나하게 취한 백은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백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무언가 열정적으로 말하던 백이 갑자기 점프 스쿼트를 시작했다.

제법 캐주얼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신축성이 없는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은 상태인데도 자세가 좋았다. 가볍게 몸이 붕 떴다 내려올 때도 전혀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박자에 맞춰 팔을 흔들며 다리를 굽혔다 펼 때마다 백의 탄탄한 허벅지가 도드라졌다.

“어?! 백 책임님이다!”

정신없이 그런 백의 모습을 훔쳐보던 영인을 방해한 것은 주성의 목소리였다. 주성이 용케도 편의점에서 나오자마자 백을 발견한 것이었다.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수림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콘을 영인에게 건네며 역시 백을 보았다.

“책임님 맨몸 운동하면 엄청 취한 거예요.”

주성이 키득거리며 바로 백을 향해 뛰어갔다. 수림도 오늘은 백과 담판을 짓겠다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백에게로 걸어갔다. 영인은 수림에게 받은 아이스크림콘의 뚜껑을 열지 않고 손에 쥔 채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결국 백에게 닿을 시선이었다.

“책임님!”

주성이 먼저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뛰어서 백의 옆으로 갔다. 그러더니 백의 옆에서 같이 백과 맞춰 점프 스쿼트를 시작했다. 주성이 꽤 괜찮은 자세로 스쿼트를 성공하자 백이 기특한지 와하하 웃으며 주성의 등을 두드려 줬다. 취할 때마다 시킨 보람이 있었다.

해맑은 강아지 다음으로 백을 찾은 사람은 저승사자였다. 백이 수림을 보고는 민망한지 어설프게 웃었다.

“내일! 프로젝트 룸에! 오세요!”

수림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지만 백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주성과 수림을 본 백이 자연스럽게 영인을 찾았다. 그리고 저 멀리 아주 멀리에 서 있는 영인을 발견했다.

영인은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고, 한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영인도 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과 함께 산 명도가 낮은 하늘색 피케 셔츠를 입은 채였다. 목 끝까지 단추를 단단히 잠그고.

답답하지도 않나. 날도 더운데. 첫 단추는 풀어도 될 텐데.

이 생각을 끝으로 백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안 보기 위해 애썼지만, 머나먼 곳에 있는 영인을 보자마자 바로 그를 위해 해 주고 싶은 일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지금 당장 가서 목을 조르는 듯한 단추를 하나 풀어 주고 싶었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영인을 향한 감정은 백의 통제 밖으로 벗어나 버린 일이었다. 통제하지 못할 일을 통제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백이 모든 것을 포기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지었다. 홀가분하면서 동시에 씁쓸해 보였다.

“과장님!”

백이 멀리 있는 영인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영인을 부르며 팔을 크게 흔들었다. 거대한 안녕이었다. 계속 잔잔한 표정으로 백을 보고 있던 영인의 얼굴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내일 봐요!”

백이 활짝 웃었다. 어쨌든 영인을 보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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