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책임님, 저 팀에 좀 다녀올게요.”
오늘따라 조용하던 주성이 주섬주섬 노트북을 챙겨 백에게 가서 작게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 있어?”
백의 물음에 따라오는 주성의 대답은 긴 한숨이었다.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수림도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안경을 한번 추켜올리고 주성과 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고 친 것 같아요. 팀장님께 다녀와서 말씀드릴게요.”
기가 잔뜩 죽은 주성이 꾸벅 백에게 인사를 하고, 프로젝트 룸을 나섰다. 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닫힌 문을 잠시 보다가 손목을 주무르고 마사지했다.
“뭘 그렇게 걱정해요?”
한참 자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백에게 수림이 물었다.
“주승이 고과 챙겨야 하는데… 흐음…….”
굳이 골몰하던 기색을 숨기지 않던 백이 고민이 끝났는지 핸드폰을 들어 익숙하게 팀 동기인 박영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 일이고.
핸드폰 너머로 영태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인은 데이터 추출을 위해 적고 있던 조건절을 괜히 지웠다 살리며 그런 백의 통화에 아무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다.
“박주승이 뭔 사고 쳤어?”
-어제 시스템 이관이 뭐가 잘못됐나 봐. 확인 제대로 안 하고 퇴근한다고 바빴지 뭐.
“커? 걔가 이관한 거면 별로 중요한 건 아닐 건데.”
-지금 긴급으로 수정하면 대미지야 별로 없겠다만, 주성이 또 찍혔지 뭐.
“주승이 혼나야겠네.”
통화를 마친 백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자신이 하던 업무에 집중했다. 어쨌든 주성이 오전 중에 복귀하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한참 엑셀로 작업하던 백이 손목을 살짝 꺾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점심시간이었고, 역시 주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인 과장님.”
백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영인을 불렀다. 바빠 보이던 영인이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하고 ‘왜 부르십니까.’ 하고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미 오전 업무를 마무리한 백은 기지개를 켜고 의자를 뒤로 빼 다리도 쭉 뻗었다.
“내가 준 시계 벽에 달았어요?”
백의 시답지 않은 질문에 영인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죽 올라간 입꼬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가서 달아 줘야겠구먼.”
“허어.”
영인이 사양의 말을 하려는 순간 프로젝트 룸 문이 열렸고, 기가 죽은 주성이 펼쳐진 노트북을 안고 들어섰다. 영인과 백의 대화가 순식간에 끝났다. 백은 아직 채 도착하지 않은 영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주성의 팔을 끌어당겨 제 앞에 세웠다.
까딱까딱, 검은 구두를 신은 백의 발이 규칙적으로 땅을 두드렸다.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앉아 팔짱을 끼고 주성을 보는 백에게서 전에 없던 권위가 느껴졌다. 백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 주성이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 둘의 서열이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주승이 혼나야겠지.”
백이 짐짓 엄한 음성으로 주성을 나무라자 주성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수림은 이 상황이 불편하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재미가 느껴져 이미 빈 화면에 아무 의미 없는 단어들만 두드리고 있은 지 오래였다.
그런 자신의 속물적인 모습이 들킬까 슬쩍 영인의 눈치를 보는데 의외로 영인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자기는 그래도 성의 있게 ‘점심 뭐 먹지’, ‘퇴근하고 뭐하지’ 같은 다양한 문장을 쓰며 일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는데 영인은 아예 시선을 백과 주성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저렇게 티 나게 구경해서야. 수림이 속으로 혀를 찼다.
“너 작년 고과 C잖아. 그때도 아무것도 아닌 거로 실수해서 잘하다가 막판에 자빠진 건데 올해도 이렇게 못 챙기면 어쩌게? 또 C 받게? 선임 안 달아? 다른 동기들 다 선임일 때 혼자 계속 사원 할래?”
백이 주성과 시선을 맞추려고 숙인 주성의 고개 아래로 목을 빼 얼굴을 집어넣었다. 주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치와 분노, 자괴감 같은 것이 멋대로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직 20대의 주성은 감정을 제대로 갈무리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한 햇병아리였다.
“이 프로젝트에 있는 사람들 다 일 엄청나게 잘한다, 주성아. 임수림 책임 맨날 술 먹고 노는 거 같아도 조기 진급한 거 알지? 형은 말 안 해도 알지? 일 잘하는 거. 개발자분들도 이번 프로젝트가 워낙 빡세서 다 엄선해서 모셔 온 거야. 배워. 요령이고 이미지 싸움이라고. 백날 열심히 하다가 이러면 아무도 안 알아주잖아.”
백이 불편한 자세로 주성에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제법 혼내는 어투로 시작한 설교는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주성을 달래는 음성으로 끝나 있었다. 주성은 백의 힐난에는 굳건하더니 막판에 백 특유의 다정한 말투가 나오자 이를 악물었다.
말을 끝내고도 한참 주성을 복잡한 얼굴로 보던 백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주성의 노트북을 빼앗듯이 받아서 들어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축 처진 주성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우리 막내 데리고 밥 먹고 올게요. 식사하고 이따 봅시다.”
백이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땅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주성을 끌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수림이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 울겠다, 울겠어. 그치?”
그리고 같이 재미난 불구경을 한 동지인 영인에게 물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영인은 그런 수림의 질문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영인은 주성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주성의 감정이나 상태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영인은 그저 후배를 혼내고 어르는 백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백에게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지배적이고 어른스러운 모습이 흥미로웠다. 혼나는 상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수림의 질문에 자신이 그러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영인의 얼굴에 순간 당혹의 빛이 스쳐 갔다. 영인은 백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남자가 고픈 건지, 미친 건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 생각을 지우기라도 하고 싶은 사람처럼 벅벅 커다랗고 거친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러 댔다.
낯선 감정의 자각이 불쾌했다. 평생 풀 수도 끊을 수도 없는 매듭이 물밑에 있는 거대한 바위와 자신을 동시에 묶어 놓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영원히 수면 위로 떠 오를 수 없을 것인데 어째서 물 밖에 존재에게 눈길을 준 것인지. 영인은 스스로가 혐오스럽고 한심해 입맛이 달아났다.
“난 오늘 점심 안 먹어.”
수림은 의외로 영인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고 태준과 둘이서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영인은 홀로 남아 배 속 깊이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둔통을 견디고 있었다. 마땅히 느껴야 할 통증이었다. 죄책감이 느껴질 때면 망설임 없이 자기학대를 하고 그 고통을 즐겼다. 마치 그것이 속죄의 행위라도 되는 양. 진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도 되는 양.
먼저 회의실로 들어온 쪽은 수림과 태준이었다. 수림이 들고 있던 커피 두 잔 중 한 잔을 영인에게 주었다.
“아아메.”
영인은 엄청 갈증이 났던 사람처럼 수림이 준 커피를 단 세 모금 만에 바닥이 보이게 마시고 곧장 쓰레기통에 빈 컵을 넣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젝트 멤버 수에 맞게 커피를 사 들고 백과 주성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에이, 이미 다들 커피 한 잔씩 하신 겁니까?”
백이 테이블에 커피 캐리어를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준과 수림의 테이블에는 반쯤 남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어라? 강 과장님은 안 드셨나 보네. 골라 드세요. 라테, 바닐라 라테, 아이스 아메리카노, 종류별로 사 왔습니다.”
영인은 의식적으로 백을 보지 않았다. 백이 사 들고 온 커피와 아까는 미처 살펴보지 못한 주성의 얼굴을 보았다. 주성은 큰 시름을 덜고 온 사람처럼 속 시원해 보였다. 어쩐지 고까웠다.
“강 과장도 아까 커피….”
수림이 말을 마치기 전 영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라 들었다. 백은 자신이 먹던 커피를 책상 한편에 두고 칫솔과 치약을 챙겨 들던 참이었다. 따뜻한 커피인지 백의 테이크아웃 잔은 종이컵이었다.
“마셨는데… 또 먹게?”
영인은 대답 없이 컵의 뚜껑을 벗기고 커피를 바로 목구멍에 쏟듯이 들이부었다. 차갑고 썼다.
* * *
퇴근 시간이 되자 가장 먼저 자리를 정리한 것은 역시 태준이었다.
“과장님, 월요일 아침엔 주간계획 업데이트 좀 해 주세요.”
수림이 흘낏, 일어서는 태준을 향해 말하자 태준이 곧장 그런다고 답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주말 잘 보내세요.”
백의 밝은 인사에 응답하듯 태준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나도 얼른 가서 셔틀버스 타야겠다. 다들 퇴근 안 하세요?”
수림이 백 팩에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물었다.
“그래, 조심히 가. 주성이도 오늘 고생했어. 얼른 퇴근해. 나는 테스트 계획서 좀 체크해 보고 천천히 가게. 일찍 퇴근해 봐야 할 일이 없다.”
백이 수림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대답하고는 성의 없이 손을 까닥여 주성에게 신호를 줬다. 온종일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혼난 주성이 눈치를 보다 백의 손짓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림이 영인에게 같이 퇴근할 것인지 묻듯이 영인의 의자 바퀴 쪽을 발로 툭툭 찼다.
“나도 오늘 마무리 지을 일을 다 못 해서. 이것만 더 하고 가게.”
영인이 키보드를 바쁘게 두드리며 대답했다. 점심시간 이후로는 업무의 진행이 거의 안 되다가 이제야 좀 속도가 붙은 참이었다. 마음도 일도 어지러웠다. 수림은 그 대답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자리를 나섰다. 그러고는 아직도 기가 죽어 있는 듯한 주성을 기다리듯 프로젝트 룸 문을 잡고 섰다. 주성이 후다닥 인사하고 나서자 문이 닫혔고, 백과 영인이 남았다.
침묵 속에서 마우스 클릭 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모두 퇴근하고 한 시간쯤 더 일하던 백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어후, 못하겠다.”
‘좀이 쑤셔 죽겠네요.’ 하며 백이 영인을 보았다. 영인이 그런 백을 보며 설핏 웃었다.
“일 많이 남았어요?”
백이 시원하게 웃으며 물었다. 영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저장 단축 키를 습관적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다 했습니다.”
“과장님, 어차피 퇴근해도 할 일 없죠?”
백이 영인의 처지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현실을 알고 있으니 허튼소리는 받아 줄 마음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서 쉬어야 합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다니는 체육관 같이 안 갈래요? 과장님 굉장히 탐이 나는 인잰데. 진짜 재미있어요.”
백이 어느새 영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영인의 책상에 살짝 엉덩이를 기대고 비스듬히 선 백이 같이 가요, 하며 활짝 웃었다. 언제나처럼 여유 있고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거절은 반려. 리젝! 리젝! 어느 날 울렸던 백의 건배사가 들리는 듯했다.
“배고파요?”
영인이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액셀을 밟은 백이 물었다. 점심마저 먹지 않았는데 영인은 크게 허기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연달아 마신 커피 두 잔 때문인지 묘하게 심장이 뛰는 것 말고 컨디션의 문제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체육관 먼저 갔다가 밥 먹는 거로 하죠. 배부른 상태로 가면 완전 토 나와요.”
백은 익숙한 길을 매끄럽게 운전해 갔다. 중간중간 습관적으로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살피는 모습에서 백의 성격이 드러났다. 어디에서 갑자기 어떤 이상한 물체가 달려들어도 백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슬쩍 피해 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이제 다 왔어요.”
백이 지어지지 얼마 안 된 듯한 상가 건물에 주차했다.
“무슨 운동이기에 밥도 안 먹고 갑니까?”
영인이 안전벨트를 풀며 물었다. 백이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단단히 채운 뒤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짓수 체육관인데, 이건 피지컬로 안 될걸요?”
자신만만한 태도로 체육관으로 영인을 이끈 것까지는 좋았는데 체육관 문이 닫혀 있는 것은 백이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다. 문 앞에는 ‘금일 수업은 체육관 사정으로 7시까지 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백이 정말로 당황했는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웬만해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영인은 크게 감흥이 없어 보였다.
“뭐지?”
“가시죠.”
영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백은 재빨리 근처에서 영인에게 대접할 만한 맛있는 고깃집을 떠올렸다. 금요일 저녁에 사람을 끌어들였으니, 마땅히 책임을 져야 했다. 백이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유리 문에 뺨을 갖다 대고 안을 보려고 애썼다.
“여기 원래 열두 시까지 하거든요. 진짜 이상하다. 불은 켜져 있는데.”
뺨이 눌려 자연스럽게 백의 입술이 비죽 앞으로 튀어나왔다. 영인은 이 모든 상황이 피곤했다. 어차피 닫힌 문 앞에 붙어서서 매달려본다고 상황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영인의 심드렁한 표정을 보고야 자신이 제법 꼴사나운 상태라는 걸 깨달은 백이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냉정해 보일 정도로 단호하게 닫혀 있던 유리 문이 열린 것은 백이 괜스레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형님, 문자 못 봤어요? 오늘 체육관 엠티 때문에 일찍 닫는다고 안내 문자 돌렸는데.”
빼꼼 열린 문으로 짧은 머리를 한 20대 초반의 청년이 몸을 내밀고 백에게 아는 척을 했다. 백은 마치 구세주라도 발견한 것처럼 환하게 웃고 청년의 어깨를 마구 두드려 댔다.
“오늘 진짜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 너는 왜 안 갔어?”
“관장님이 마감 청소하고 오라고 해서요. 나도 이제 가야 하는데.”
청년은 백의 이런 스킨십이 어지간히 익숙한지 저지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경준아, 형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되냐? 오늘 회사 사람 데리고 왔단 말이야. 회원 늘려야지. 이러다 체육관 망하겠어.”
경준이라는 청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백 옆에 벽처럼 서 있던 영인을 보았다.
“우와! 진짜 크시네요.”
어린 경준은 떠오른 생각을 바로 입으로 내뱉었다. 여태까지 경준이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영인은 거대한 남자였다.
“30분만.”
“들어오세요. 관장님한테 회원님 때문에 늦은 거라고 얘기할 거예요.”
“마음껏 팔아. 날 팔아.”
백이 열린 문이 행여 닫힐 것 같은지 경준이 다른 대답을 하기도 전에 좁은 틈을 비집고 체육관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영인은 우격다짐 같기도 하고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한 이 상황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영인이었다면 닫힌 문을 보자마자 포기해서 이런 요행을 얻을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
바로 그때,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백의 손이 불쑥, 열린 문 사이로 튀어나와 영인의 팔목을 붙들어 당겼다.
허락도 없이 자신을 쥐고 있는 단정하고 잘생긴 손을 영인은 잠시 응시했다. 미간이 꿈틀거렸다. 불쾌한 낯이었다. 영인은 어쩐지 이 아무것도 모르는 잘난 남자의 멀끔한 모습을 다 망가뜨리고 싶어졌다.
악의나 적의라고는 없고 결핍이나 불행도, 거절도 모르고 살았을 이 남자에게 자신의 음험하고 축축한, 더러운 속내를 보여 주고 도망가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인에게 그 위험한 욕망이 머문 것은 아주 찰나였다.
하지만 번개가 마른 땅을 내리쳐 불꽃을 일으키는 시간도, 섬광이 밝은 빛으로 시력을 잃게 하는 시간도 결국은 순간이 아니었던가.
영인이 조금 힘주어 자신의 팔에 붙어 있던 백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유리문을 당겨 활짝 열어 백이 자신을 초대한 공간으로 스스로 들어섰다.
영인은 백과 경준의 가운데에 멀뚱히 서 품평 받는 소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경준이 가져온 몇 개의 대여용 도복은 영인이 입기에는 다 작았다.
“관장님 도복 아니면 맞는 사이즈가 없을 거 같은데…….”
“빌리면 혼나?”
“혼나죠. 제가.”
“그러면 빌리자.”
천연덕스러운 백의 대답에 경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인지 관장의 로커에서 곱게 개어 둔 새 도복을 가지고 나왔다.
“이거 입고 나오세요. 이건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걸리면 정말 나만 뒤져요.”
백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도복을 들고 있는 영인에게 턱짓으로 탈의실을 가리켰다. 체육관의 규모가 제법 큰 탓에 탈의실 안에는 개인의 로커가 빽빽하게 있었다. 백은 전용 로커가 있는지 익숙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잠긴 문을 열었다.
“띠는 제가 빌려드릴게요. 저도 아직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화이트 벨트.”
백이 입고 있던 옷을 술술 벗으며 차곡차곡 정돈되어 있던 흰색 도복을 꺼냈다. 영인이 받아 든 도복은 흑색이었다. 상의와 하의에 흰색 자수로 관장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어느새 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고서 백이 여전히 처음 온 상태 그대로 있는 영인을 마주 보며 웃었다.
“왜요? 내외해요?”
예의 그 시원한 미소. 영인이 표정을 숨기지 않고, 불쾌한 기색이 서려 있는 채로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피부가 흰 편인 백의 깨끗한 상체가 영인의 눈에 들어왔다. 백은 이제 바지 버클을 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먹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적어도 영인에게는. 백은 정말이지 조심성이라고는 없었다.
하의를 벗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바지를 내리는 백의 손끝부터 손목과 팔꿈치, 어깨와 이어진 목선을 따라 영인의 시선이 움직였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균형감 있는 몸이었다. 지방과 근육이 완벽한 비율로 들어차 있는 가슴 근육이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어 보였다. 잇자국을 내기 제격인 가슴이었다.
영인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박동에 당황했다. 미친놈처럼 남의 몸을 훑어보며 불순한 상상을 했다. 자신의 중심이 단단해지려고 한다는 것까지 깨달았을 때는 당황을 넘어서 황당함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나타난 생리현상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영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자기혐오와 자괴감이 영인의 발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찰랑, 찰랑, 찰랑.
발목을 지나 무릎으로, 무릎을 넘어 성기로, 골반과 명치, 겨우겨우 숨을 내뱉고 마시는 입과 코를 지나 이미 멀어버린 두 눈으로,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굳어 버린 숨골 위까지.
그 차갑고, 아픈 물살이 영인을 모조리 잠식했다. 잠시 열이 오를 것 같던 중심은 이미 시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영인은 자신이 싫었다. 삶이 버거웠다. 이대로 이 자비 없는 자기를 향한 증오에 휩쓸려 무너지고 싶었다.
“과장님, 몸이 안 좋아요?”
영인이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이미 도복을 단단하게 챙겨입은 백이 영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영인의 얼굴에 놀란 백이 열을 체크하려고 자연스럽게 영인의 이마 쪽으로 손등을 가져갔다. 영인은 갑자기 다가오는 백의 손을 제법 매섭게 내려치고, 도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괜찮습니다.”
백은 영인의 날카로운 반응보다는 영인의 상태가 걱정되는 듯 한걸음 물러서 천천히 옷을 벗는 영인을 지켜보았다. 영인이 그런 백의 시선을 느끼고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백에게서 뒤를 돌아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와.”
백은 영인의 등을 보고서 나오는 감탄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백은 몸을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몸 쓰는 행위를 좋아해서 이 운동, 저 운동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백의 몸은 그런 성향에서 부차적으로 얻게 된 보상이었다.
반면 영인의 몸은 타고난 것 같았다. 노력으로 얻은 백과는 차원이 달랐다. 백의 몸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의 몸이라고 한다면, 영인의 몸은 야성, 어떠한 날 것의 남성성이 느껴졌다. 수컷 냄새가 진동했다. 강인해 보이는 척추를 따라 굵직한 척추기립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의 근육이 섬세하게 쪼개져 백의 움직임을 따라 그 결을 보여 주는 것과는 달리 영인의 몸 구석구석에 붙은 두툼하고, 커다란 근육들은 모두 힘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남자를 보고 주눅이 들었다.
영인이 도복 바지까지 입고 뒤돌아섰다. 아직 띠를 매지 않아, 있는 대로 벌어진 상의 탓에 영인의 가슴과 배가 그대로 드러났다. 백은 방금 느낀 열패감과 그 감정 밑에 묘하게 깔린 어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띠를 챙겨 들고 천천히 영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영인의 키가 큰 탓에 마주 서서 눈을 맞추려니 백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야 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영인과 잠시 시선을 맞추며 백이 동의를 구하듯 이야기했다.
“띠 맵니다.”
영인의 도복을 가지런히 정리한 백이 띠의 길이를 신중하게 맞춘 뒤, 허리를 숙여 영인의 배꼽 근처에 띠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한 바퀴 돌리기 위해 자연스럽게 영인의 허리를 안듯이 팔을 둘렀다.
어지간한 몸싸움에도 되도록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띠를 단단히 조여 감싸는데, 어정쩡한 자세 탓에 딱 마음에 들게 되지가 않았다.
“아, 남의 거 하기 쉽지 않네요.”
시간이 길어지자 괜히 머쓱한지 어색하게 말을 붙인 백이 왼쪽 무릎을 땅에 대고 꿇고 오른쪽 발바닥으로 땅을 디뎌 아예 몸을 굽혔다. 자연스럽게 영인의 앞에 무릎을 꿇은 기사 같은 모양새가 된 셈이었다.
영인은 말없이 서서, 자신의 아래에 자리한 백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곧게 뻗은 목덜미가 벌어진 도복 깃 사이로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영인이 이를 악문 탓에 영인의 턱뼈가 도드라졌다. 눈썹 위로 불거진 혈관마저 영인의 불편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상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백이 한참 만에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완성!”
영인의 허리춤을 백의 띠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감싸 매고 있었다. 노백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하얀 띠였다.
“일찍도 나오셨네요.”
마감 정리는 대충 마친 듯한 경준이 지쳐 보이는 얼굴로 한참 만에 나온 백과 영인을 비꼬았다. 흰색 도복을 입은 백과 흑색 도복을 입은 영인은 도복 모델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미안. 내가 좀 헤맸어.”
매트 위로 올라오자마자 백이 자연스럽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데웠다. 팔과 다리를 쭉쭉 늘이며 몸을 이리저리 꺾던 백이 고개를 돌려 멍청하게 서 있는 영인을 다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과장님, 몸 안 좋으면 오늘은 그냥 쉬세요. 괜히 데리고 왔네.”
영인은 어떠한 변명이나 설명을 하기도 귀찮았다.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벽 앞에 기대어 앉았다. 경준이 익숙하게 백의 옆에서 백의 몸풀기를 돕고 있었다. 영인은 두통이 몰려오는 사람처럼 두 눈을 감고, 큰 손으로 관자놀이와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쫓고 싶은 것이 두통인지, 사념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영인을 비웃기라도 하듯 영인의 귓가에 거친 숨소리와 신음이 들려왔다. 영인은 눈앞에 끔찍한 광경을 두고 있는 사람처럼 천천히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눈을 떴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흐아아… 놔줘! 놔줘!”
백보다 키가 작은 경준은 한참 실력자인지 백의 등에 올라타 백의 팔과 상체를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백은 땅에 머리를 박고, 무릎을 꿇은 채 앓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번쩍 들린 엉덩이의 윤곽이 도복 밖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거 아니잖아요.”
경준이 엄한 목소리로 지적하자 백이 깊은 한숨과 함께 ‘졌습니다.’라는 문구를 세 번 외쳤다. 경준은 그제야 의기양양한 얼굴로 백을 풀어 주었다.
“다시 해. 다시.”
백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세를 잡았다. 경준도 자세를 잡고 신호를 주자 백이 망설임 없이 경준에게 달려들었다. 매트 위에 엉켜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은 역동적이었다.
경준이 아까 걸었던 기술을 다시 걸려고 하자 백이 두 번은 안 당할 생각인지 경준의 손길을 피하고는 그대로 뒤로 누워 두 다리로 억세게 경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경준과 백의 하체가 빈틈없이 맞닿았다.
경준이 다음 동작을 하기 전에 백이 요령 있게 경준의 소매 깃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다리를 들어 경준의 목을 감싸 조였다. 경준이 상체를 흔들자 백이 서둘러 경준의 팔을 자신의 몸 아래로 가두고 목을 조이고 있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탈출을 완전히 차단할 셈인지 단단히 꼰 다리를 강하게 팔로 감싸 안기까지 했다. 경준의 얼굴이 백의 배꼽 근처에 바싹 붙었다.
“회원님, 잘하셨습니다. 그만, 그만.”
경준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말하자, 백이 호탕하게 웃으며 경준을 구속하고 있던 모든 팔다리에 힘을 풀고 대자로 매트 위에 누웠다.
그 잠깐의 대련으로 경준과 백 모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볼품없이 벌어진 도복 사이로 또다시 백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백이 거친 숨을 몰아쉬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영인의 눈에도 보였다.
백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한 번도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자의 모습이었다. 그랬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성적 욕망으로 인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위협 따위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자의 무신경하고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위기의식이라고는 없군.’
영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백은 매트에서 일어서서 아예 띠를 풀고 상의를 풀어 헤쳐 펄럭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재미있을 거 같죠?”
백은 잠깐의 폭발적인 힘겨루기만으로도 충분히 스트레스가 해소된 것인지 개운한 얼굴이었다. 땀이 나고 흐트러진 모습인데도 맑아 보였다.
“오늘 내가 강 과장님 컨디션만 괜찮았으면 아주 혼내 줬을 텐데. 아쉬워라.”
백은 탈의실에서 로커에 있던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오늘 입은 도복과 셔츠와 바지를 챙겨 들었다.
“배고프겠다. 얼른 나가서 밥 먹고 헤어지죠. 샤워는 자기 전에 해야겠다.”
냄새나나? 백이 고개를 외로 꼬아, 자신의 어깨 근처에서 킁킁거렸다. 영인은 고개를 저었다. 땀 냄새는커녕 세탁한 지 얼마 안 됐는지 갈아입은 옷에서는 따뜻한 느낌의 섬유 유연제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탈의실 밖을 나서니 경준은 백과 썼던 매트를 다시 소독하고 닦는 중이었다. 갈 채비를 다 한 백을 보고는 소독용 스프레이를 두고 문 앞까지 경준이 달려 나왔다.
“얼른 승격 심사 보세요. 많이 늘었어요.”
“오늘 고마워.”
백이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자 경준이 먼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아! 됐어요.”
“닭가슴살 사 먹어.”
백은 그런 경준을 놀리듯 경준의 손에 돈을 얹고는 꼭 주먹을 쥐게 했다.
“형아 간다.”
백이 뒤돌아서자 경준이 코가 땅에 닿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언제든지 또 오십쇼, 형님.”
엘리베이터를 탄 백은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막냇동생에게 용돈을 챙겨 준 맏형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어린 녀석이 제법 기특하죠?”
영인은 대답 대신 1층을 눌렀다. 백이 영문을 묻는 듯한 얼굴로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오늘 백과 더 함께 있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백은 영인이 잊고 지냈던 욕구를 자꾸 자극했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영.”
잔뜩 갈라져 나온 목소리에 영인이 황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 모습을 통해 정말로 영인이 아프다고 생각한 건지 백이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해 주지… 괜히 끌고 왔네. 미안해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백이 1층 버튼을 누르자 빨갛게 불이 들어왔던 버튼이 꺼졌다. 그러자 영인이 곧바로 1층 버튼을 또 눌렀다. 다시 숫자 1이 빨갛게 빛났다.
“택시 타면 됩니다. 책임님도 쉬세요. 아깐 몸 괜찮았어요. 미안할 일 없습니다.”
영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거역하지 말라는 완고함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눈치 빠른 백이 그 뜻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1층에 도착한 영인이 가볍게 묵례하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뒤돌아선 영인을 향해 백이 손을 흔들었다.
받아 주는 이 없는 쓸쓸한 인사 뒤 남은 것은 부채감이었다. 백은 오늘의 일을 반드시 만회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짙은 어둠이 찾아온 밤, 영인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백과의 외출에서 돌아와서 TV도 조명도 켜지 않은 집은 적막했다. 진이 죽은 지 2년이 넘었다. 주기적으로 진의 부재는 영인을 수렁으로 끌고 들어갔다. 기일이 돌아올 즘이 최악이었다.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영인을 덮쳐 온 슬픔과 죄책감이 너무 거대해 영인은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수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진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탈출에 대한 의지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영인이 그날의 사고로 잃은 것은 진 하나만이 아니었다. 진과 함께 삶에 대한 애착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욕구도 모조리 사라졌다. 영인은 모질고 외로운 남은 생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죽을 용기는 없는 비겁자가 되어 버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끊임없이 대답 없는 진을 향해 ‘왜’를 묻고 좌절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떠난 연인은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는다. 남은 자는 끝끝내 답을 알 수 없는 시험지를 앞에 두고 하나부터 열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적고 후회하고 전하지 못할 사죄를 읊조리고 있었다.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의미 없는 가정 속에서 수만 번 진을 살렸다가 또다시 잃었다.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삶이 괴로운 것이, 무엇도 원하지 않는 것이 그리하여 차라리 행복이었다. 영인은 그런 자신의 나날이야말로 진을 향한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 하나의 사실이 유일하게 영인을 위로했다.
그런데 그 실낱같은 믿음이 오늘 영인을 배신했다. 영인이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내려쳤다. ‘쩍’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지만, 영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질은 그칠 줄 몰랐다. 무엇도 남지 않은 영인의 삶에서 영인을 벌할 자도 영인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영인이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잔뜩 두들겨 맞은 뺨과 이마가 뜨끈했다. 곧이어 영인의 목에서 잔뜩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인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간신히 간신히 울부짖고 있었다.
이곳에 영인을 용서할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인은 평생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 * *
일요일 아침, 아무도 없는 프로젝트 룸으로 백이 들어섰다. 습관적으로 한 바퀴 돌며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체크했다. 노트북에 잠금장치는 제대로 걸려 있는지,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자료는 없는지, 서랍은 모두 잠겼는지.
보안수칙 위반 사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백이 자신의 의자에 앉아서 바로 업무 준비를 했다. 지난주까지 완료된 사항을 기반으로 혼자 테스트를 진행해 볼 예정이었다. 월요일이 되면 또 다른 태스크에서 할 일들이 쏟아지기 때문에 여유 있게 테스트를 진행할 여건이 안 될 것이 뻔했다.
금요일에 준비했던 테스트 데이터와 계획서 파일을 큰 모니터 화면에 띄워 놓고 노트북 모니터에는 PDA 프로그램과 실제 프로세스가 제대로 완성되었는지 확인을 할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열었다.
야심 차게 시리얼 넘버를 PDA 프로그램에 입력하고 엔터를 눌렀다. 기대하는 것은 순서대로 시스템이 돌아 ‘Success’ 문구가 뜨는 것이었다. 제대로 처리되었는지 데이터 확인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문구가 떴다. 첫 단계부터 막힌 셈이었다. ‘System Error 532 - Check your S/N’
시리얼은 모두 백이 테스트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시리얼이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백이 다른 시리얼 넘버를 복사해 다시 PDA의 시리얼 항목에 붙여 넣었다. 그러자 또 같은 에러가 발생했다.
개발단에서 생긴 문제는 백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백이 업무 분장 엑셀 파일을 열어 해당 부분 개발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개발자의 이름은 강영인이었다.
백이 핸드폰을 손에 쥐고 의미 없이 화면을 두드렸다. 금요일 저녁의 영인을 생각하면 지금 연락하기 애매했다. 아직 몸이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일요일 오전부터 일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껄끄러웠다.
그렇다고 수림에게 묻자니 수림은 집도 서울이고 이 개발 건은 수림 몫도 아니었다. 태준도 마찬가지였고. 주성? 주성은 애초에 연락할 후보군에 들지조차 못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여기서 철수하기에는 백의 시간이 아까웠다. 여태까지 개발 완료된 건들에 대해서 테스트 후, 문제 발생한 부분을 따로 체크해 메일로 뿌려 두는 것까지가 오늘의 목표였다. 첫 단계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일단 목소리만 확인해 볼까? 아파 보이면 접자. 운명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백이 일단 마음을 정하고 서둘러 영인의 연락처를 찾아 가볍게 터치했다. 통화 대기음이 들리는 동안 백은 의미 없이 엔터를 연타하며 한 번 해서 안 받으면 그대로 포기하자고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예고 없이 통화대기음이 끊기고, 곧 영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백은 영인이 바로 귓속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한 간지러움을 느끼며 핸드폰을 살짝 귀에서 뗐다.
-여보세요.
“강 과장님, 저 노백입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백이 짐짓 쾌활한 말투로 물었다. 검은 속내를 감추고 안부를 묻는 척 접근 중이었다. 제발 괜찮아라, 괜찮아라. 백이 속으로 기도했다.
-괜찮습니다.
영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백의 귀를 파고들었다. 귓속으로 들어온 목소리를 삼켜 소화라도 시킬 작정인지 백이 크게 침을 삼켰다. 목소리도 정말 평소와 다를 바 없게 들리기도 했고, 영인도 괜찮다고 하니 본론을 말할 차례였다.
“아니, 이건 강요는 아닌데요, 과장님!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다른 건 아니고, 사실 오늘 제가 테스트하려고 사무실에 나왔거든요. 근데 입고부터 막히네요? 강 과장님 부분인데. 532번 에러가 납니다.”
핸드폰 너머에서 영인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흠… 문제없던 부분들인데. 지금 갈게요.
회사 근처에 사는 덕분인지 통화를 마친지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영인이 도착했다. 테스트가 막혀 백은 다른 할 일을 찾아서 하던 중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백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방문자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왜 그래요?”
기껏해야 조금 피곤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예상은 완벽하게 틀렸다. 백이 거칠게 의자에서 일어선 탓에 바퀴 달린 의자가 요란하게 뒤로 밀렸다. 볼캡을 깊게 눌러쓴 영인이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살짝 인상을 썼다.
백은 그런 영인에게 바짝 다가와 영인의 코앞까지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영인의 양 뺨이 얼룩덜룩했다. 입가도 터졌는지 상처가 나 있었고, 붉게 부어오르고 멍든 부분이 얼굴 여기저기에 가득했다.
백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영인이 큰 손으로 자신의 뺨을 훑었다. 내일이라고 가라앉을 흔적들이 아니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은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별거 아닙니다.”
“변호사 필요합니까? 신고했어요?”
백은 차마 영인의 얼굴에 손도 대지 못하고, 다른 다친 곳은 없는지 드러난 영인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 과장님도 때렸어요?”
백이 영인의 손을 들어 살폈다. 손등이나 손가락 관절에 큰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영인이 누구를 때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때리고 맞았습니다.”
영인이 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쓰며 자리에 앉았다. 눈이 모자챙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그늘 아래 높게 솟은 영인의 선이 굵은 콧대만 간신히 보였다. 금요일 밤 몸이 안 좋다고 가 버리고서는 저 모양으로 일요일 아침에 나타나니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테스트하다 에러 났던 시리얼 보내 주세요.”
영인이 바로 노트북 전원을 켜고 일할 채비를 하자 백도 다시 저 멀리 밀려난 의자를 끌고 와 아까 에러가 난 시리얼 넘버를 복사해 영인의 메신저로 보냈다. 영인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손이 워낙 커서 키보드 전체가 감싸일 것 같았다. 이내 빠른 속도로 영인이 타자를 쳤고 경쾌하게 엔터를 내려치는 소리가 둘만 있는 회의실을 울렸다. 탁.
“되는데요.”
영인이 프로세스가 제대로 돌아 ‘Success’ 결과가 뜬 화면을 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백을 향한 짜증이나 비난의 감정은 묻어 있지 않았다. 백이 당황하며 영인의 뒤로 가서 섰다. 영인의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여 모니터를 유심히 보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영인의 얼굴 바로 옆에 백의 얼굴이 있었다.
“메신저로 보낸 다른 시리얼도 해 봐요.”
영인이 Alt와 Tab 버튼을 눌러 익숙하게 마우스 없이 메신저 화면을 띄우고 백이 보낸 시리얼 넘버를 바로 외워 PDA 화면에 입력했다.
“강 과장님, 머리 좋네.”
백의 가벼운 칭찬이 기분 좋게 영인의 머리 위로 날아와 앉았다. 영인이 다시 엔터를 치자 PDA가 여러 프로그램을 콜 하는 게 뜨다 이내 다시 ‘Success’ 문구가 떴다.
“어? 뭐지? 안 됐는데? 잠시만.”
백이 본격적으로 뭔가 확인할 심산인지 굳이 영인의 의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열어, 테스트 성공한 시리얼의 상태를 체크했다. 창고의 출고와 입고처리, 중간 트랜스퍼 처리 모두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백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왜 이러지? 나도 개발 서버에서 한 건데.”
백이 노트북 잠금장치를 풀고 영인의 테이블로 가져오려는데 걸리는 게 많았다. 영인이 자기가 일어서 백의 옆에 섰다. 아까와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백이 새로운 시리얼을 복사해 다시 테스트하자 역시 아까와 같은 에러가 떴다.
영인이 대번에 원인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 옆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PDA 프로그램 서버를 재가동하는 문구를 빠르게 적어 내렸다. 유려한 손가락 움직임의 결과로 검정 화면에 초록색 글씨가 두두두 생겨났다.
서로의 어깨가 닿을 듯 가까웠다. 모니터 화면과 영인의 손끝을 차례로 보던 백이 고개를 살짝 돌려 영인의 어깨를 보았다.
“PDA 쪽 파일은 개발 환경에서 변경된 프로그램으로 적용하려면 개인이 PDA 재가동을 해야 해요. 운영 쪽에는 이관하면 다 같이 일괄적으로 재가동을 하니까 상관없지만. 해 보세요.”
백은 어깨를 넘어 영인의 굵직한 목덜미 위로 각지고 멍든 턱을 보고 있었다. 말을 마친 영인은 무심한 얼굴로 굳게 입을 다물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서늘하고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 모자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아 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
“과장님한테서 좋은 냄새 나네요.”
영인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인은 향수 같은 건 쓰지 않았다. 감정이 드러나 균열이 생긴 영인의 얼굴을 보고 백이 씨익 웃었다.
“천재의 냄새가 난다. 아, 왜 여태 재가동을 한 기억이 없지? 이상하네.”
백이 뻔뻔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자기 할 일을 시작했다. 영인이 묘한 표정으로 백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백이 그 시선이 느껴지는지 눈앞 화면에 집중하며 가볍게 말했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그건 내 쪽에서 해야 하는 말 아닌가? 일요일에 갑자기 불려 나온 사람은 난데.”
말과는 달리 영인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나중에 강 과장님이 실수하면 무조건 한 번은 덮어 줄게요. 사람이 그럴 수도 있으니까.”
“나 참.”
백의 당당함에 영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자기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에 터진 입가와 턱 근육이 아려 왔다.
“오늘 점심은 제가 쏩니다. 한 시간만 기다려 줘요. 먹고 들어가시죠.”
영인이 자리에 턱을 괴고 앉았다. 눈을 감자 거짓말처럼 잠이 몰려왔다. 프로젝트 룸 한쪽에 있는 커다란 창으로 일요일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백의 타자 소리가 현실과 영인을 연결해 주었다.
영인이 순간적으로 고개가 떨어지는 감각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영인 자신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 본격적으로 자고 있었다. 백은 여전히 고요하게 일에 몰두하는 듯 보였다.
“일어났어요?”
영인이 아직 채 돌아오지 않은 정신을 가다듬는데 백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어제 못 잤나 봐요. 쌈박질하고 다니느라고. 강 과장님 기다리다 할 일 다 해 버렸네.”
영인이 그 말에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네 시간 가까이 잠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불면증은 영인의 오랜 고질병이었다.
계속 멍하니 앉아 있는 영인을 더는 기다려 줄 수 없었는지 백이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평소보다 크게 이야기했다.
“그만 자고, 밥 먹으러 갑시다.”
백의 말투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영인은 그것만으로 자신이 얼마나 무아지경으로 졸았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목 뒤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뭐 먹을까요?”
백의 질문을 들으며 영인이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요사이 백의 차가 너무 익숙해졌다고 느꼈다. 자동차 내부를 둘러보니 차 안에는 어떤 장식도 없었고 지저분한 구석도 없었다. 백 같았다.
“여기 차돌박이 쌈밥 정식 괜찮은 곳 있는데 갈래요? 과장님 기력도 딸려 보이는데.”
“그만 좀 놀리시죠.”
영인의 발끈하는 모습에 백이 소리 내 웃었다.
“침 좀 닦고 화내지.”
시동이 걸리고 자동차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영인이 엄지로 입가를 쓸자 기다렸다는 듯이 백이 희한한 음률을 넣어 말했다.
“농담.”
영인이 눈을 감고 작게 욕을 내뱉었지만 백은 영인이 동요하는 그 모습마저 웃긴지 킥킥거렸다.
영화 전자 공장 밖으로 나와 근처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가니 생뚱맞아 보이는 곳에 제법 한옥 흉내를 낸 식당이 나타났다. 대충 선이 그어진 흙밭 주차장에 백이 능숙하게 칸 맞추어 주차했다. 흙먼지 때문에 차체 아랫부분이 지저분해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도착.”
훌쩍, 운전석에서 내린 백이 두 팔을 위로 뻗어 길게 기지개를 켰다. 티셔츠가 올라간 덕에 백의 탄탄한 아랫배가 드러났다. 여전히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요일이라 그런지 백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다.
머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지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고,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탓에 더 어려 보였다. 편한 차림이었지만, 옷은 모두 깨끗하고 잘 관리되어 있어서 백의 깔끔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아침도 먹지 않은 상태인 영인은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먼저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백을 영인이 뒤쫓았다. 두 사람의 긴 그림자가 노란 흙길에 검게 겹쳐졌다.
“아이고! 잘생긴 총각 오랜만에 왔네.”
“사장님, 별일 없으셨죠?”
백이 신발을 벗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개량 한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바로 아는 척을 해 왔다.
“이리 와 앉아요. 일요일에 웬일이야?”
“오늘 잠깐 출근할 일이 있었어요.”
안내받고 들어간 방은 아늑했다. 전통식으로 창호지를 바른 문과는 대조적으로 한쪽 벽에는 큰 전면 창이 나 있어 바깥 테라스가 한눈에 보였다. 좌식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내릴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덕에 편하게 앉을 수도 있었다. 백은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도 보지 않고 익숙하게 주문했다.
“저희 차돌 쌈밥 2인분에 차돌 1인분….”
말을 하다 말고 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영인을 보았다.
“아니다. 2인분 더 추가해 주세요. 강 과장님, 먹고 모자라면 말해요.”
영인은 순간 그렇게 많이 먹지 않는다는 말이 튀어 나갈 것 같아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쩐지 자꾸만 백에게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주문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쟁반에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 나왔다. 한눈에 봐도 싱싱해 보이는 쌈 채소가 종류별로 있었고 우렁 쌈장과 된장 그리고 된장찌개와 절임류 반찬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서대로 커다란 상에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질 좋아 보이는 고기 세 접시가 백의 옆에 놓였다. 고기를 구울 돌판도 지글지글 달궈지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불판 온도를 가늠하던 백이 충분히 열이 올랐다고 생각했는지, 얇은 차돌박이를 줄 맞춰 올렸다.
“여기 맛 괜찮아요. 자극적이지도 않고.”
“자주 오나 봐요?”
“어르신들 모시고. 갈 만한 데가 없잖아요.”
붉은빛의 고기들이 뜨거운 불판에 올라가자마자 오그라들며 그 생기를 잃어 갔다. 멍하니 지켜만 보는 영인의 앞접시 위로 백이 알맞게 익은 고기 한 무더기를 집게로 집어 옮겼다.
“생고기 하나 붙여 줄까요?”
백이 집게로 자신의 턱 근처를 가리켰다. 멍든 데 소고기 붙이지 않나?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백의 말에 영인이 백을 한번 노려보고, 자기 앞에 놓인 고기를 잔뜩 집어 입에 욱여넣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 말 안 해 줄 거죠?”
백도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상추와 치커리 위에 올리고, 밥을 한 숟가락 떠서 그 위에 또 쌓았다. 앞에 놓인 우렁 쌈장까지 추가한 뒤 신중하게 쌈을 싸 한입에 깔끔하게 넣고 씹었다. 한쪽 뺨이 불룩 나오기는 했지만 버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영인은 백이 한 일련의 행위를 무슨 대단한 묘기라도 보듯이 유심히 쳐다보았다. 백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안 물어볼게요.”
백은 영인의 침묵도 일종의 답이라고 생각했다. 영인과 이번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백을 걱정했다. 강영인이 일이야 잘하지만, 사람이 덜 됐다는 게 공통적인 평이었다. 그렇지만 백이 겪은 영인은 남들 말처럼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다만 숫기가 없을 뿐이었다. 백의 생각은 그랬다.
“근데 아마 식당 사람들은 다 내가 때린 줄 알걸요. 때리고 미안해서 고기 사 준다고 그럴 거 같은데.”
백의 말을 들은 영인이 힘없이 웃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백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호들갑 떨거나 지나치게 걱정하지도 않았고, 집요하게 사연을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싱거운 농담들로 영인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게 하기까지 했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목 뒤 근육과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영인은 단단하게 잠가 둔 빗장과 울타리가 하나씩 하나씩 백에게 열리고 있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백은 고기를 구우며, 잘 익은 고기를 영인의 앞접시가 비지 않게 챙겨 주었다. 자기는 안 먹고 있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능숙한 젓가락질로 착실하게 식사를 해 영인 못지않은 속도로 밥그릇을 비워 내고 있었다. 이런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술 한잔할까요?”
백이 배가 어느 정도 차자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엄지와 검지로 소주잔 흔드는 시늉을 하며 영인에게 말했다.
“차 가져왔잖습니까.”
“대리 부르면 되죠. 아!”
백이 내뱉은 짧은 감탄사에 영인이 백에게 집중했다.
“과장님네서 자고 갈까요?”
영인은 자신의 폐허 같은 집을 잠시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거절합니다. 내일 출근도 하셔야죠.”
영인이 가볍게 턱짓으로 백의 흰색 무지 티를 가리켰다. 백이 그제야 아차 싶은지 영인의 말에 수긍했다.
곧 문이 열리고 주문한 술과 과일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처음 백을 맞이했던 가게 사장이 들어왔다.
“오늘 식사 먹을 만했어요? 이거도 같이 들어요.”
친절한 미소로 사장이 테이블에 내려 둔 접시에는 사과와 떡이 있었다. 접시는 누가 봐도 백의 앞으로 치우친 곳에 놓였다. 사장의 따스한 눈길도 민망할 만큼 백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언제나 맛있죠. 감사합니다.”
백이 그 친절에 보답하듯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참 볼 때마다 잘생겼어.”
나가면서 사장이 아쉬운 듯 뒤돌아 백의 얼굴을 다시 보곤 문을 닫았다. 백은 이런 호의가 꽤 익숙한지 크게 감동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영인에게 잔을 주지도 않고 두 개의 잔을 백이 차례로 채웠다. 그리고 그중 한 잔을 바로 영인에게 건넸다. 어정쩡하게 잔을 든 영인을 향해 웃으며 백도 잔을 들어 올렸다.
“원샷.”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어느새 시간은 일곱 시를 훌쩍 넘겨 있었다. 술을 먹다 보니 안주가 없어 안주를 시키고, 안주를 먹다 보니 술이 없어 술을 더 시킨 게 몇 번 반복되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 것 같다고 백은 생각했다. 일요일의 오후는 항상 쏜살같이 지나곤 했다.
급하게 마신 것도 아닌데 술이 달아 평소보다 많이 마신 것인지 백은 취기가 올랐다. 계산을 마치고 운동화를 신는 백의 앞에 먼저 나가 있는 영인의 큰 등이 보였다. 사위가 어둑해지고 있었다. 짙은 푸른빛의 하늘 위로 달의 윤곽이 어스름히 모습을 드러냈다.
영인이 입은 네이비색의 카라티가 영인의 큰 덩치 탓에 팽팽하게 긴장감을 유지했다. 커다란 영인의 두 손은 상의보다도 짙어 검은색에 가까운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영인은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늦은 봄날의 저녁은 청명하고 따뜻했는데 이상하게 영인은 추워 보였다. 백은 그런 영인의 옆에 빨리 서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본인답지 않게 운동화를 구겨 신고 서둘러 영인에게로 걸어갔다.
대리기사가 올 때까지 둘은 함께 서 있었고, 어떤 말도 더는 하지 않았다.
* * *
“복국 소자 하나 포장해 주세요.”
금요일 저녁 팀 회식이 끝나고 법인카드로 계산을 하던 팀장 신영준이 옆에서 포장 주문을 하는 백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굴 챙겨 먹이시게? 여기 유부남들 아무도 포장 안 하는데 왜 총각이 포장해 가는 거지? 수상해.”
영준이 이쑤시개로 치아 사이를 쑤시며 백을 놀렸다. 한 달에 한 번꼴로 하는 팀 회식 장소는 보통 공장 근처였다. 이번에 새로 생긴 맛집이라고 누군가 추천해 오게 된 복집이었는데, 아주 뜬소문은 아니었는지 모두 만족스럽게 식사를 한 참이었다. 많은 양의 술과 함께.
특히 영준이 먹으면서 해장이 된다고 너스레를 떤 덕분에 영준 옆에 있던 백과 몇몇은 평소보다 과음하고 말았다.
“비밀입니다.”
“여자친구 생겼지?”
영준이 백의 팔짱을 끼며 흔들었다. 술 취한 아저씨의 재롱에 백도 웃으며 영준이 흔드는 대로 몸을 나부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에요.”
호탕한 백의 웃음소리에 영준이 ‘수상한데’ 하며 방금까지 붙들고 늘어진 백의 팔을 팽개치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영준이 열고 간 문틈 사이로 취기가 오른 팀원들의 작별 인사 소리가 가게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백은 대기석에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긴 다리를 쭉 뻗었다. 맑고 시원한 국물을 먹자마자 희한하게 영인이 떠올랐다. 한번 생각이 나자 이 복국을 먹여야겠다는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며칠 전 마주했던 영인의 춥고 쓸쓸해 보이던 등이 떠오르자 더욱 이 뜨끈한 국물과 밥을 먹여야겠다는 의지가 굳어졌다. 술이 들어가서 평소보다 더욱 과감해진 탓도 있었다.
국물이 흐르지 않게 조심스럽게 봉투를 든 백이 휘적휘적 밤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회식 때문에 차를 두고 왔기에 영인의 집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야 했다. 이상하게 그 모든 과정이 하나도 번거롭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호기롭게 영인의 집 앞까지 간 것은 좋았는데 그새 술이 좀 깬 것인지 백은 혹시 영인이 잘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미 음식은 포장했고 바로 앞에 영인의 집 현관문이 있었다.
영 상황이 안 좋으면 국만 전해 주고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같이 퍼질러 앉아 술 먹자고 포장해 온 것도 아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벨 소리는 울렸지만, 집 안에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자나?”
백이 손목을 꺾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한 번 더 초인종을 누를 것인가 전화를 할 것인가 망설이던 백의 눈에 꽉 닫히지 않은 현관문이 보였다.
육중한 철제문은 완전히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채 다 닫히기 전에 잠금 버튼을 누른 것인지 잠금쇠는 튀어나와 있었다. 그 덕에 문이 완전히 닫히지 못한 듯했다.
잠시 문에 귀를 가까이 댄 백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음식만 두고 나오기로 결정했다. 같은 남자끼리인데 이 정도 실례는 괜찮을 것 같았다.
백은 잠기지 못한 문을 당겨 열고 들어가서 마주한 광경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곳은 백이 알던 영인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영인이 널브러져 있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고요히 시든 꽃처럼 쓰러져 있었다.
그런 영인의 모습을 발견한 백이 구두도 벗지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영인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그리고 영인의 코밑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주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백은 그제야 안심하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백이 구두를 벗어 신발장에 정리하고 손을 닦았다. 식당에서 포장해 온 요리는 용기째로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술과 물뿐이었다. 다른 어떤 음식의 흔적도 없었다. 백의 입에서 두 번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영인의 발치에도 역시 술병이 있었다. 그리고 술병 옆에 한 무더기의 약봉지가 쌓여 있었다. 약을 먹은 건지 빈 봉지도 굴러다녔다. 누가 봐도 약과 술을 같이 먹은 모양새였다. 물이나 다른 음료수는 보이지 않았다.
백이 약봉지를 들어 내용물을 보았다. 아침, 점심, 취침 전으로 나뉜 투명한 봉지 안에는 작은 알약들이 들어 있었다. 하늘색과 주황색의 작은 약들. 백은 그 약들을 잘 알고 있었다.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장애를 가라앉혀 주는 향정신성 약물이었다.
잊고 살던 약을 보자 묻어 두었던 얼굴이 떠올랐다. 백은 약 봉투를 차곡차곡 접어 식탁 위에 올려 정리하며, 그리운 사람에 대한 추억도 다시 가슴 어느 깊숙한 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당장 눈앞에 있는 영인을 보았다. 이런 약을 술과 먹으니 문이 제대로 잠기지 않은 것도, 다른 사람이 멋대로 자기 집에 침입한 것도 모르고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마구 뒤섞인 감정이 들었다.
아니, 사실 감정의 원인은 알고 있었다. 잘 살 수 있으면서, 부족한 것도 없으면서 이렇게 함부로 사는 영인이 한심하면서 안쓰러웠다.
지난번 집에 놀러 왔을 때는 분명히 이렇지 않았다. 보기 좋게 영인에게 속아 넘어갔던 셈이었다. 생각보다 잘하고 살고 있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
백은 식탁에 가득한 빈 술병들과 너저분하게 널린 것들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고, 재활용 쓰레기는 따로 구석에 놓인 상자에 정리했다.
백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지럽던 주방이 금방 깔끔해졌다. 제법 분주한 백의 움직임에도 영인은 미동도 없었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거실을 치우기 전, 백이 다시 영인의 코밑에 손끝을 대보았다. 가는 숨을 확인하고서야 남은 정리를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청소를 끝낸 백이 가방에서 포스트잇과 펜을 꺼내 들었다. 우렁각시가 왔다 간 줄 알면 곤란했다.
[노백입니다. 줄 게 있어서 왔는데 문이 열려 있어 잠시 들어왔어요. 말도 안 하고 침입해서 청소까지 한 걸 보니 저도 많이 취했나 봅니다.]
반듯하고 잘생긴 백의 글씨가 빠른 속도로 펜을 따라 생겨났다. 백은 술과 약을 함께 먹지 말라고 적을지 한참 고민했다. 망설이는 시간만큼 펜이 오래 한곳에 머무르는 바람에 짙은 펜 자국이 그곳에만 깊게 생겼다.
“내가 무슨 와이프도 아니고.”
백이 작게 혼잣말을 하고는 결국 가장 염려하며 하고 싶었던 말은 적지 않았다.
[냉장고에 국 넣어 두었으니 꼭 먹어요. 나의 선물.]
길지 않은 쪽지를 소파 테이블에 붙여 두고야 백이 본격적으로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영인을 보았다. 앉지도 눕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있는 영인을 백이 침대까지 옮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영인이 정신이 있으면 모를까, 저렇게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는 거구는 아무리 백이어도 다치지 않게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백이 우선 영인을 제대로 눕혀야겠다고 결정했다. 일단 마음먹으면 행동은 금방이었다.
영인은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마른 나뭇잎 같았다. 잘못 건드리면 퍼석하고 부서질 것같이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연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누구보다 크고 강한 영인이 연약해 보이다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었다.
백이 영인의 뒤통수를 받쳐서 눕히며 나직하게 영인을 불렀다.
“과장님, 정신 좀 차려 봐요. 눕힐게요.”
백은 말로는 일어나라고 했으면서 행여 영인이 깰까 걱정스러운지 퍽 조심스러운 손길로 영인을 다루고 있었다. 영인의 몸이 자연스럽게 백이 의도하는 대로 소파 쪽으로 기울어졌다.
완전히 머리가 소파 헤드에 기대어졌다고 판단이 되자 백이 영인의 뒤통수를 받치고 있던 손바닥을 천천히 빼고 있었다. 영인의 머리가 백의 품 안에 있는 모양새였다. 백은 숨소리마저 죽였다. 영인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영인이 눈을 뜬 것은 백이 손을 빼고 영인에게서 멀어지려던 순간이었다. 눈은 떴지만, 아직 완전한 의식이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정신이 좀 들어요?”
백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아직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으로 영인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쫓았다.
백이 그런 영인과 거리를 두기 위해 몸을 뒤로 조금 물렀다. 그 행동을 막으려는 것처럼 영인의 커다란 손이 백의 팔뚝을 잡아 힘주어 당겼다. 순간적으로 백의 몸이 균형을 잃고 영인의 상체 쪽으로 무너졌다.
이번에는 백이 영인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영인은 그런 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양팔로 힘주어 안았다. 맞닿은 가슴이 함께 두근거렸다. 백이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영인은 더욱 강하게 백을 끌어안았다. 백의 몸이 아플 지경까지.
“강 과장님, 저 노백입니다.”
백이 간신히 손으로 소파 옆을 짚어 몸을 지탱하며 말했다. 영인에 의해 잔뜩 눌려 있어서인지 백의 입술이 영인의 목 근처를 간지럽혔다. 영인이 꽉 붙든 백을 놓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상체를 옆으로 빼냈다. 자연스럽게 백과 영인이 함께 돌아가며 자세가 전복됐다.
백이 상황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영인의 밑에 깔린 후였다. 백이 어떻게든 영인과 눈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과장님! 저 노백인데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라고 이어 외치려고 할 때였다. 영인이 여전히 흐릿한 눈으로 백을 보며 백에게 입을 맞추어 왔다. 까칠하고 건조한 영인의 입술이 아주 소중한 물건을 대하듯, 숭배하듯 백의 입술을 머금고 핥았다.
백이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을 뒤틀었지만, 영인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백은 당혹스러웠다. 당혹의 끝을 타고 스멀스멀 낯선 감정이 올라왔다.
그것은 공포였다.
백은 지금 영인에게 압도되고 있었다. 무서웠다. 이런 일방적인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 두려웠다. 몸집이 커지고서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군대에서 선임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도 분하고 같잖다고나 느꼈지 무섭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왜?
백이 정신을 차리고 영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몸에 힘을 주었다. 결국, 좋게 해결할 수는 없을 듯했다. 붙들린 두 팔은 소파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백이 영인의 급소를 무릎으로 치려고 하체를 움직였다. 그러자 영인이 백의 팔을 놓아주고 커다란 손으로 백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백의 몸통을 자신의 무릎 사이에 가두듯 앉아 백을 내려다보았다.
백 또한 그런 영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영인은 백을 보고 있었지만 백을 보고 있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영인의 두 눈은 젖어 있었다. 영인의 얼굴에는 음울함과 행복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백이 인상을 쓰자 영인이 바로 백에게 달려들었다. 강아지가 주인 품을 찾듯 커다란 몸을 숙여 백의 쇄골 근처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어 백의 뺨에 자신의 젖은 뺨을 문질렀다.
“가지 마. 진아, 가지 마.”
잔뜩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로 영인이 애원했다. 영인의 눈물이 백의 눈가에도 묻었다. 영인이 상대방의 존재를 확인하듯 다시 백의 입술을 빨아당겼다. 그러고는 벌어진 입술 틈새로 기어코 혀를 밀어 넣었다. 영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뜨겁고 축축한 혀였다.
영인의 혀가 백의 입 안 곳곳을 탐했다. 숨 하나까지 모조리 빼앗아갈 기세로 백을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한참을 매달리는 듯한 키스를 퍼붓던 영인이 백을 깔고 앉은 채로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닿은 하반신이 함께 쓸리고 뭉개졌다. 영인의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또 가져가는 키스에 정신을 못 차리던 백이 자신의 예민한 부위에 느껴지는 익숙한 몸짓에 반사적으로 영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영인의 상체가 앞으로 구부러졌다. 백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영인을 옆으로 밀어젖혀 자신의 몸에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영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영인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채 뜨지도 감지도 못한 눈에서 소리도 없이 주르륵 굵은 눈물이 흘렀다.
백이 그런 영인을 두고 황급히 짐을 챙겨 쫓기듯 현관문 밖으로 나섰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서도 백은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이게 뭐야.”
백이 자신의 얼굴에 묻은 영인의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영인이 자신에게 키스한 것도, 운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마당에 피가 몰려 단단해진 자신의 중심이었다. 백이 망연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영인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주 오래 자고 일어난 듯한 감각이었다. 평생을 자고 일어난 듯 몸이 무겁고 무기력했다. 무거운 바위에 깔린 사람처럼 정신이 들고도 한참 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직도 꿈의 여운에서 헤어나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더욱 곱씹고, 곱씹으며 조금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꿈이라면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도 좋았을 것이다.
진이 꿈에 나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진은 영인을 원망하는 눈으로 보다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밤은 달랐다. 다정하게 영인을 대해 주는 진이 나왔다. 따뜻한 손으로 영인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 진을 끌어안고 입 맞추며 처음으로 붙잡았다. 가지 말아 달라 애원하고 매달렸다. 이번에야말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곁에 있을 때는 행복해 죽을 것 같더니 깨고 나니 더욱 괴로워졌다. 차라리 미움받는 편이 나았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영인이 꿈에서 진과 맞닿았던 자신의 뺨과 입술을 만졌다. 체온이나 흔적 같은 것들이 남아 있을 리도 없는데 무엇이라도 찾고 싶은 사람처럼 오래도록 반복해서 쓸어 댔다.
술과 약을 함께 먹어서 머리는 지끈거리고 빈속은 뭐라도 먹으라고 아우성쳤지만, 영인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영인이 마주한 것은 꿈보다 더 현실성 없는 집 안 풍경이었다. 끼니를 챙겨 먹는 것도, 정리하는 것도 모두 버거워진 지 오래였다. 간신히 몸이나 닦고, 있는 옷을 챙겨입고 다녔다.
빨래가 쌓여 입을 옷이 없어지고서야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려 그대로 거기에서 옷을 빼내 입으며 살고 있었다. 프로젝트 멤버들이 집에 온다고 한 전날에 허겁지겁 대충 집을 치웠지만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집은 또 엉망이 되었다. 영인처럼. 그게 익숙했다. 집도, 영인도 방치되어 있는 것이.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집이 깨끗해져 있었다. 가끔 밤사이 기억에 없는 행동을 했다고 짐작할 때가 있었지만 그 행위가 청소였던 적은 없었다. 폭음, 폭식, 자해와 같이 해롭고 가학적인 일들이었다. 취한 영인은 절대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영인이 방어적인 자세로 집 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심장은 빠르게 쿵쿵 뛰는데, 피는 돌지 않는지 손발이 차가워졌다.
초조한 상태로 이 방, 저 방을 둘러 보았지만, 수상한 사람은 없었다. 집 안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소파 앞에 서서야 영인은 이 착한 침입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노백의 쪽지가 영인을 놀리듯 영인이 있던 바로 옆 소파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백이 또 영인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영인을 지배하던 꿈이 영인도 모르는 사이 영인의 뒤로 흩어졌다. 앞에 놓인 백의 쪽지를 영인이 복잡한 얼굴로 읽어 내려갔다. 백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간신히 영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백은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깜깜한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튀어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영인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누가 더 미친놈일지 생각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못 하고 취해서 키스하는 놈과 그런 주인 잘못 찾은 키스를 받고 욕정을 느낀 놈 중 아무리 생각해도 더 미친 인간은 후자 같았다. 게다가 상대는 남자였다.
“미친놈.”
백이 이번에는 확실히 자신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그날 밤 백은 결국 선잠을 자다 새벽같이 깼다. 토요일인데 푹 자지 못한 것은 억울했고 푹 자지 못한 이유는 어이가 없었다. 원수도, 여자도 아니고 남자 때문에 밤잠을 설치다니.
백이 이불을 덮었다가 걷었다가 하며 뒤척였다. 자신에게 달려들던 영인을 생각했다. 오죽 취했으면 그랬는지. 불쾌함보다 먼저 드는 감정은 동정심이었다.
진아? 진화? 그렇게 불렀었지. 백이 어제 영인이 슬프게 부르던 이름을 곱씹었다. 자연스럽게 뺨을 적시던 영인의 눈물과 어제의 키스가 연상되었다.
“으아악!”
백이 몸서리를 치며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친놈!”
백이 욕실로 달려갔다. 가벼운 몸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찬물로 샤워를 마치자마자 백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운동 가방을 챙겨 헬스장으로 향했다.
운동을 해야 했다. 지칠 때까지 쇠질이라도 해서 기력을 빼야 했다. 너무 오래 연애를 쉬어서 남아도는 정력을 얼른 소진하고 말겠노라고 백이 굳게 마음먹었다.
* * *
오후 세 시가 넘은 시간, 백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이 회의 저 회의 끌려다니느라 바빴다. 어떤 회의는 백이 주최했고 또 다른 회의는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라 참석해야 했다.
되도록 점심은 맛있게, 여유 있게 먹자는 주의인 백이었지만 이렇게 바쁜 날은 하는 수 없이 사내 식당을 이용해야 했다. 회의마다 해야 하는 입씨름만으로도 지쳤는데 또 분석해서 전달해야 하는 숙제가 잔뜩 생기기까지 했다.
맡은 시스템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고, 다른 사람 일까지 넘치게 챙기게 되는 성향도 문제였다. 인정 많은 완벽주의자로 사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들고 다니던 노트북을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은 백이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대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얼른 주성을 키워서 안고 있는 시스템 중 몇 개를 떼어 줘야겠다고.
지금 수림과 하는 프로젝트만으로도 남들은 나자빠질 업무 강도였다. 프로젝트 생각을 하자 자연스럽게 영인이 떠올랐다. 의도치 않게 영인을 피한 꼴이 되었다. 정말로 일 때문에 바빠서 정신이 없었던 것뿐인데도.
괜찮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자신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영인에게 해 주는 말이었다. 언젠가 영인이 실수하면 한번은 눈감아 주겠다고 한 약속을 백은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속 장부에서 영인에게 빚진 실수 하나를 차감하며 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로젝트 룸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일 잘하고 계시나요?”
백이 문을 열면서 기운차게 인사를 건넸다. 밝은 미소를 띠고 마주한 프로젝트 룸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안경까지 벗고 인상을 쓰고 있던 수림이 백과 잠시 눈을 맞춘 뒤 다시 태준을 응시했다.
숨 막히는 분위기였다. 태준도 지지 않고 수림을 쏘아보았다. 영인은 이 험악한 갈등과 자신은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일을 하고 있었고, 주성만이 들어온 백을 암흑 속 찾은 등불을 보듯 반가워하며 고개를 수차례 끄덕여 아는 척했다.
“제대로 구현된 게 없잖아요. 하나씩 조건 누락되고, 시스템 안 태우면 차라리 아예 없는 것만도 못한 건데. 이거를 다 됐다고 체크하시면 어떻게 해요?”
수림이 날카롭게 태준을 다그쳤다. 태준 또한 그런 수림의 태도가 거슬리는 듯 반감을 감추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다 처리할 수 있습니다.”
태준의 대답을 들은 수림이 혀를 찼다.
“여기서부터 이렇게 구멍이 생기면 나중에 시스템 다 연결하고 진짜 큰일 나요. 우리끼리만 쓰는 거 아니고 MES부터 생산창고, 판매창고 다 엮어서 관리하자는 건데. 데이터 꼬이면 월 마감 개작살이라고요.”
“허! 강영인 과장 데이터 날렸을 때랑 너무 다르게 반응하시네요?”
태준의 말에 여태까지 전혀 동요 없던 영인이 눈만 살짝 굴려 태준과 수림을 보았다. 키보드 위 손가락이 멈춘 채 가만히 있었다. 영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뭐 이런!”
수림이 당장이라도 욕설을 뱉을 기세였다. 백이 황급하게 수림의 옆으로 가 수림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수림이 큰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다.
“그만하시죠, 김 차장님. 강 과장님 일은 제가 덮은 겁니다. 김 차장님 업무 중에 문제가 생겨도 제가 최대한 제 선에서 처리할 거고요. 오해하지 마세요.”
백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동시에 부드러웠다. 크게 공격적이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태준에게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임 책임님, 나랑 커피 한잔?”
수림이 거칠게 안경을 쓰고 프로젝트 룸 밖으로 나섰다. 백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영인을 슬쩍 보고는 그런 수림의 뒤를 따랐다. 영인은 잔뜩 굳은 얼굴로 모니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수림은 백이 나오자 울상을 지었다.
“책임님, 우리 프로젝트 망할 거 같아.”
백이 그런 수림 옆에 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책임님이 지난 주말에 나와서 한 테스트 결과 보고 다 수정하라고 했잖아. 영인이 쪽은 수정할 거 없었고, 나도 그렇고. 김태준 차장님 쪽에서만 요청사항 많더만.”
“그래, 그랬지.”
“이번 주간보고서 적은 거 보니까 그거 수정사항 다 반영했다고 적었더라고. 그래서 내가 책임님 대신 방금 확인해 보니까 수정하란 거 고치니 괜찮았던 데가 또 꼬인 거야. 무슨 에러 풍선이야. 하나 누르면 반대쪽이 부풀어.”
공장 내에 위치한 카페에 도착하자 백이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러 갔고, 수림은 구석진 테이블을 찾아 자리 잡았다. 백이 곧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수림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스트 더 열심히 해야겠네.”
백이 싱겁게 웃자 수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급인데 이런 실수가 많은 게 말이 되냐고. 내가 너무 이상해서 물어 물어 지난번 사이트 쪽에 확인해 봤거든. 김태준 차장 어떤 사람이냐고.”
수림이 한층 더 어두워진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백에게만 들리게 말을 이어 나갔다.
“완전 폭탄이래. 책임님 안경진 대리 기억나?”
백이 얼마 전 전자와 계약을 끝내고 떠난 프리 개발자를 떠올렸다. 사고뭉치였다. 하다 하다 개발에서는 너무 실수를 연발해서 시스템 관리 업무를 맡겼는데 거기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우리가 안경진 대리 계약이 남았는데 자르기는 또 뭐하고 그래서 케미컬 쪽이랑 트레이드를 했잖아. 그때 넘어온 거였어, 김 차장님이. 우린 막 고급 왔다고 좋아했거든. 분명 평가도 나쁘지 않았단 말이지. 근데 웬걸. 우리랑 케미컬이랑 폭탄 바꾸기 한 거야. 결론은…….”
수림이 백이 사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리 망했다고요.”
“우리가 왜 망해. 안 망해.”
백이 수림의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다리를 살짝 꼰 채로 제법 더워진 날씨에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백에게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에 여태까지 계속 인상을 쓰고 있던 수림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그냥 좀 덜렁거린다 이거잖아. 내가 집중 마크 할게. 좀 일찍 나와서 김 차장님 개발 쪽 테스트 더 빡세게 돌리지 뭐. 좋은 소식도 있어.”
“좋은 소식 뭐?”
수림이 묻자 백이 씨익 웃었다.
“우리 프로젝트 야근 승인받았어. 이제 맘대로 초과 근무해도 돼. 수당 막 올려. 집에 가서 클라우드로 붙어서 일 안 해도 됩니다.”
수림은 백의 말에 소리 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백은 정말로 안 좋은 소식도 좋게 포장하는 데는 선수였다.
시간이 5시 35분이 되자 태준이 기다렸다는 듯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수림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백이 나설 차례였다.
“차장님, 내일부터는 좀 번거롭더라도 개발 완료된 건 바로바로 개발 리스트에 업데이트 좀 해 주세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로 완료된 건 퇴근 전에 색깔이라도 바꿔 넣어 주세요.”
백의 말에 태준과 수림 그리고 영인이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태준이 사무실 밖으로 나서기 전 수림을 곱지 않은 눈으로 흘겼다. 가뜩이나 까다로운 프로젝트인데 멤버들 간 날이 서기 시작하자 백은 골치가 아팠다.
“주승이는 왜 안 가?”
평소라면 눈치껏 퇴근하던 주성이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백이 물었다. 주성이 오랜만에 업무다운 업무를 받았는지 눈 아래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갖고 와 봐.”
주성이 주섬주섬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챙겨 백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도 의자를 옆으로 틀어 주성의 모니터 화면을 잘 보기 위해 자세를 고쳐잡았다. 주성이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준비한 보고 자료를 백이 꼼꼼히 살폈다.
“생산 쪽 3분기 변동비 투자심의네? 영태 책임이 시켰어?”
“넵.”
백이 진지한 얼굴로 마우스 스크롤을 내려가며 주성의 보고서를 보다가 잔뜩 긴장한 채로 백의 피드백을 기다리는 주성의 얼굴을 보았다.
“주승아.”
“넵.”
“일단 변동비는 어차피 시스템즈 시스템 매니저들이 공수산정 다 해 주잖아. 그거 받아서 취합만 잘하면 되거든. 네가 잘해야지 시스템즈도 또 3분기 먹고 사는 거니까.”
주승이 백과 눈을 맞추며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 말이 주성에게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너 다 잘리겠는데?”
백의 말을 듣던 수림이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다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소리에 백도 큭큭 웃었다. 기분 좋게 웃던 백이 정면에서 살짝 왼편을 보자, 수림 옆에 앉은 영인이 보였다. 영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
“주승이 너 투심 보고도 처음이지?”
“네….”
“이거 들고 가면 담당님 앞에서 눈물 날걸. 일단 공유 폴더에 지난 분기 보고서 있는 건 알지?”
주성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백을 보았다. 백이 크게 실망하지 않은 얼굴로 팀의 공유 폴더로 들어가 투자심의보고서가 모여 있는 경로를 찾아 들어갔다.
“영태 책임 말고 내가 만든 거 보고 잘 따라 해 봐. 그리고 보고 들어가면 담당님이나 본부장님이 어떤 수치를 요청하실지 모르니까 여기 데이터는 네가 눈감고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말을 마친 백이 가만히 주성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주승아.”
“네.”
주성의 대답은 언제나 씩씩했다.
“너 vlookup 함수나 피벗은 돌릴 줄 알지?”
“잘은 모릅니다.”
대답만큼은 잘했다.
“주성 씨 알고 보면 막 누구 자제분인 거 아니야? 너무 순백인데?”
백과 주성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수림이 입을 열자 주성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백이 주성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괜찮아. 배우면 돼. 조금 있으면 프로젝트 바빠지니까 그 전에 교육 신청해서 다녀와.”
백의 섬세하지 않은 손길 덕에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주성은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영인은 어쩐지 못마땅한 눈으로 그런 주성을 잠시 보았다.
“다 늦게까지 일할 거면 저녁이나 먹고 들어오죠.”
수림이 지갑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간해서는 회사에서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 백도 오늘은 일이 많이 쌓였는지 아이디 카드를 챙겨 들었다. 주성도 백이 식당에 갈 눈치이자 망설이지 않고 노트북을 정리하고, 밥 먹으러 갈 준비를 했다.
일어선 세 사람이 동시에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퇴근할 기미도 없으면서, 밥을 먹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가자.”
수림이 지갑으로 영인의 의자를 툭 치자 영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패스.”
수림은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더 영인을 설득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백이 끼어들었다.
“밥 먹으러 가시죠. 집에 가 봐야 먹을 것도 없잖아요.”
말을 마친 백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백이 남겼던 노란색 포스트잇을 떠올렸다. 백은 영인의 민낯을 알고 있었다. 백이 영인을 재촉하듯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결국, 영인은 작업하던 것을 저장하고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사내 식당은 한산했다. 일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퇴근 시간은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회사에 남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집에서도 일할 것이었다. 회사에서 돈 받으며 더 일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네 사람 모두 한식 코너에서 육개장을 선택했다. 같은 메뉴를 같은 식판에 담은 채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아, 오늘은 두 끼가 다 회사 밥이네.”
백이 가볍게 한탄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백이 금세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노백입니다.”
통화가 이어질수록 백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짙어졌다. 음성에는 큰 변화가 없어서 상대방으로서는 알 수 없는 변화였다. 통화를 끝낸 백은 입맛이 달아났는지 숟가락을 들지 않고 혀를 찼다.
“왜요?”
수림이 동그란 안경을 손으로 올리며 묻자 백이 고개를 뒤로 젖혀 스트레칭했다. 백의 목에 곧게 자리한 근육이 늘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집주인. 집 빼 달래.”
백이 머릿속으로 현재 처리해야 할 일들과 갑자기 끼어든 주거의 문제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계약도 안 끝났는데 갑자기?”
“자기 딸이 결혼한대. 언제 또 동네 알아보고, 집 알아보냐.”
백의 말을 들은 주성이 눈을 반짝이며 대안을 제시했다.
“책임님, 기숙사로 오십쇼. 저희 방 한 명 자리 있어요.”
주성의 말을 들은 백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주성이 귀엽기도 해 웃음을 터뜨렸다. 백의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었다. 수림도 피식 웃었고, 주성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영인은 즐겁지도 재미있지도 않은데 자꾸만 같이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아 맨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백에게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
“책임님도 세준 집들 있잖아요. 거기로 들어가.”
수림은 백의 경제 사정도 잘 아는지 주성보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렇지만 백은 고개를 저었다.
“거긴 여기랑 너무 멀어. 차 막히면 두 시간도 더 걸리잖아.”
말을 하던 백의 눈에 영인의 모습이 걸렸다. 영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꿋꿋하게 맨밥만 먹고 있었다.
“강 과장님 사는 아파트로 갈까 봐. 거기 괜찮던데.”
백이 영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심상하게 말을 이었다. 백의 말에 가장 크게 반응한 것은 영인이었다. 영인이 사레가 걸렸는지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고 컥컥거렸다.
그런 영인을 보고 백이 훌쩍 일어서 식수대로 걸어갔다. 다리가 긴 만큼 보폭이 커서 금방 물을 한 컵 가득 따라올 수 있었다. 영인에게 무심히 건네진 컵 안에 맑고 찬 물이 일렁였다.
“서울 사람 노빠꾸 책임이 웬일로 회사 근처에 살 생각을 했어? 그렇게 밤샘할 때도 절대로 여기로 이사 안 오더니.”
수림이 백을 미심쩍은 얼굴로 보았다. 한창 영화 전자의 차세대 IT 시스템을 구축할 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새벽 퇴근이 일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영화 전자고, 시스템즈고 할 것 없이 모두 웬만하면 기숙사나 사택에서 살았는데 그때도 백은 꿋꿋이 서울 살이를 주장했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봐. 서울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그래. 거기 전셋값이면 여기 아파트 사고도 남잖아요.”
“근처에 살면서 강영인 과장님도 좀 자주 보고. 이상하게 챙겨 주고 싶은 캐릭터야.”
자리에 앉은 백이 상체를 테이블에 기대며 몸을 맞은편에 앉은 영인 쪽으로 기울였다. 수림은 백과 영인의 사이가 가까워졌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당황한 눈치였다.
“책임님은 요새 저랑은 안 놀아 주시고.”
밥을 먹던 주성이 볼멘소리를 했다. 실제로 주성이 작년 고과를 망친 이후로 백이 주성을 부쩍 챙겼던 터였다. 어쩌다 출근하는 주말이면 기숙사에 혼자 있는 주성을 불러다 밥도 사 주고 술도 사 주었다.
그런 관심이 어쩐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서는 줄어들었다고 주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느껴 오던 차였다.
백이 주성의 식판을 가만히 보다, 자신의 식판에서 메인 반찬 격인 닭고기 간장 조림을 쓰지 않은 젓가락으로 집어 주성의 식판으로 옮겨 주었다. 주성은 진작에 다 먹은 반찬이었다.
“많이 먹어. 강 과장님은 밥을 좀 드릴까요?”
백의 말에 웃음이 묻어 있었다. 진심이 아니라 영인을 놀리는 것이었다. 영인은 반찬은 손도 대지 않고 밥만 먹었는지 밥 칸만 비어 있었다.
“주성아, 봐 봐.”
주성이 백이 준 반찬을 밥과 입에 넣으며 백을 보았다.
“너는 일만 못하잖아.”
“네.”
“강 과장님은 일만 잘한단 말이야. 일만 못 하는 사람이랑 일 빼고 다 못하는 사람이랑 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누구겠어?”
백의 말을 들은 수림이 박장대소했다.
“와! 역시 노빠꾸 책임님, 눈치 엄청 빠르다.”
백과 영인이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백이 영인에게 호감을 보여, 영인을 챙겨 준다면 수림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백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말을 마친 백이 영인을 보고 미소 지었다. 영인의 삶이 왜 그렇게 우울한지, 불안한지 백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영인을 그 괴로움에서 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건 주제넘은 짓이었다.
다만 백은 영인 곁에 잠시 있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술과 약을 먹는 대신 술만 먹고 잠들 수 있게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심 백도 어째서 이렇게까지 영인을 신경 쓰게 됐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쩐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백은 어린 시절 길에서 다 죽어 가던 고양이를 주워 왔던 일을 떠올렸다. 부모님은 고양이를 집에서 기르는 게 아니라며 당장 내다 버리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고양이를 위해 백이 울며 전에 없이 고집을 피우자 결국 부모님이 졌고, 백은 고양이의 이름을 백양이라고 짓고 15년 넘게 함께 살았다.
백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일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납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