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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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를 마친 주성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수림은 반대로 시종일관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림수 책임, 얼굴 좀 풀지?”

스크린 바로 앞에 자리한 백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던 영인의 눈동자가 슬쩍 백을 향했다가 곧바로 모니터 쪽으로 돌아왔다. 영인은 자신이 백을 의식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며 의식하고 있었다.

“자, 림수 책임이랑 주승이랑 저는 열심히 뛰러 가야 합니다. 오늘 할 일 마무리하시고, 퇴근들 하세요.”

백이 싱그럽게 웃으며 쇼핑백을 들고 일어섰다. 주성은 이미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수림도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진짜 할 일도 많은데 짜증 나 죽겠다.”

수림이 인상을 잔뜩 쓰고 백을 향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백도 그런 수림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영화 전자 IT 담당을 맡은 조을현 상무는 협력사와의 돈독한 관계를 강조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영화 전자 쪽 팀과 함께 일하는 영화 시스템즈 팀의 결속을 위한 활동을 강요하곤 했다.

수림은 이 꼴 보기 싫어서 이직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영화 전자의 하청을 받는 입장이므로 같은 계열사임에도 상하 관계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수림이 지원하는 팀은 생산과 공급 관련 SCM 업무를 하고 있어서 서울에 있는 본사가 아니라 생산 설비와 자재창고가 있는 경기도의 영화 전자 공장 옆 사무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 문화가 얼마나 팀끼리 인간끼리 끈끈한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촌스럽다. 촌스러워.”

수림의 구겨진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영화 전자 SCM 2팀과 일하는 영화 시스템즈의 팀은 지난주 함께 등산을 하러 갔었고, SCM 3팀과 MES팀과 일하는 시스템즈 팀들은 모두 모여 1박 2일로 워크숍을 다녀왔다. 1박 2일로 졸지에 갑의 회사와 워크숍을 가야 했던 시스템즈의 ERP팀과 MES팀의 원성이 얼마나 자자했는지는 수림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수림의 팀과 백의 팀이 함께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다. 다른 팀들과 달리 오후 시간만 할애해서 활동하고, 회식한다는 점에서 가장 시간을 덜 뺏는 활동이었지만 이래저래 할 일이 많은 수림으로서는 영 달갑지 않은 스케줄이었다.

주성은 앉아서 일하는 것보다야 공 차고 뛰는 게 좋아서 오늘 출근은 놀러 오는 마음으로 한 상태였고, 몸 쓰기 좋아하는 백도 내심 즐거워 보였다. 한 번씩 IT 담당 내 팀끼리 축구 경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백의 활약은 대단했다.

“심심하면 나와서 구경하세요. 먹을 것도 많을 거예요.”

백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회의실 밖으로 나가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태준과 영인을 향해 한 말인데 시선은 영인과만 마주쳤다. 영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모습을 본 백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백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지며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영화 전자 경기도 공장에는 생산 설비와 자재창고 등이 존재하는 대형 건물이 3개 있었고, 백과 수림 같은 사무직이 일하는 건물이 2개, 연구개발동이 1개 있었다. 부지가 워낙 넓어 산책로와 축구장은 물론이고 실내에는 오락실과 탁구장도 존재했다.

세 사람이 축구장으로 나오자 이미 주변에는 수림과 백의 팀원들이 모두 나와 북적거리는 상태였다. 수림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팀 근처로 자리를 옮겼고, 백의 팀원들은 자신들의 비밀병기가 도착했다며 장난스럽게 백과 주성을 반겼다. 5월의 햇살이 기분 좋게 백의 몸을 달구었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SCM 1팀의 신입사원이 가운데 서서 진행을 시작했다.

“네, 모두 모이셨으니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족구 경기를 할 예정입니다. 각 팀에서 5명씩 멤버를 뽑아 주시고, 꼭 여성분들도 한 분씩 포함하셔야 합니다. 남성분들은 기본 족구 룰대로 적용되고, 여성분들은 손으로 공을 잡아서 던지셔도 됩니다. 멤버 선출해서 경기장으로 모여 주세요! 15점 내기고 듀스 있고, 5판 3선승제입니다.”

그늘진 명당에는 이 사태의 원흉인 조을현 상무가 뒷짐 지고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영화 전자로서는 친목을 다지기 위한 경기이면서도 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이 주성을 데리고 상무 앞으로 가서 꾸벅 인사를 했다.

잠시 후 백과 주성, SCM 1팀의 팀장과 키는 작지만, 몸은 날랜 40대 책임과 여사원이 경기에 나왔다.

“림수 책임! 이제 이런 거 할 짬 아니잖아.”

경기장에 나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수림을 놀리듯 백이 말을 걸었다. 수림이 땅에 운동화 앞코를 두드리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우 씨! 잘들 좀 해 봐요.”

수림이 매섭게 주변 남자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군대에서 어디에서 족구왕이었다는 허세를 들었을 때는 이렇게 처참하게 질 줄 예상하지 못했다. 결과는 비참했다. 그나마 수림이 공을 곧잘 받아 던졌기에 망정이지 수림마저 못했다면 점수라곤 내지도 못했을 수준이었다.

건너편에 선 백은 흰 이를 다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었다. 흰 반팔 티가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마가 땀에 젖었는데도 청량해 보였다. 몸이 어찌나 가벼운지 공이 오면 훌쩍 다리를 들어 어렵지 않게 반대편으로 넘겼다. 백이 움직일 때마다 백의 몸에 붙은 잔 근육들도 섬세하게 꿈틀거렸다.

스코어는 어느새 2대 0이었다. 모두 듀스는커녕 한 손으로 헤아리기도 힘든 점수 차로 수림 쪽이 졌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싫다고 투덜거리던 수림도 어느새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자 이 경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수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때 느릿느릿 걸어오는 영인을 발견했다.

“강 과장님! 이리로!”

수림이 잽싸게 영인 쪽으로 달려가 영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태준은 함께 나오지 않은 것인지 혼자였다. 백이 자연스럽게 수림이 달려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인이 있었다.

“진짜로 나왔네.”

백도 영인을 향해 긴 팔을 들어 휘휘 흔들며 인사했다.

“강 과장님 우리 팀에 넣어 주면 안 돼요?”

수림이 심판을 보는 SCM 1팀 신입사원 쪽으로 가서 물었다. 사원이 난감한 얼굴로 원칙상 안 된다고 중얼거릴 때 백이 와서 끼어들었다.

“난 상관없는데? 팀장님! 이번에 개발 자재 관리 프로젝트 투입된 강영인 과장입니다.”

백이 상황을 살피러 근처까지 온 팀장을 향해 말을 걸었다. 스스럼없이 영인의 손목을 잡고 팀장 앞까지 이끈 백이 영인을 팀장에게 소개했다. 영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팀장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이 너보다 훨씬 크네?”

“에이, 훨씬은 아니죠. 한….”

백이 영인의 키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영인의 몸을 훑었다.

“한… 7cm? 강 과장님 키 190cm쯤 되죠?”

“맞습니다. 그쯤 돼요.”

“훨씬은 아니죠. 제가 팀장님보다 12cm는 크잖아요. 이 정도는 차이나야 훨씬 큰 거죠.”

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팀장과 자신의 키를 손으로 비교했다. 팀장도 과장된 몸짓으로 그런 백의 배와 옆구리를 찔러 댔다. 금세 분위기가 밝아졌다. 큰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영인은 이방인처럼 그 웃음 한가운데서 우뚝 서 있었다.

“강 과장님 족구 잘해요? 한 경기 뛰어 보세요. 딱 한 경기만.”

백이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영인을 보며 말했다. 눈이 곱게 휘어진 채였다. 영인이 거절하려는 순간 수림이 말을 막았다.

“해. 명예롭게 지고 싶다. 한 경기는 이겨야지. 책임님, 영인 과장한테 안 되실 거예요. 얘는 스킬이고 뭐고 다 조지는 피지컬이 있어요.”

수림이 자신만만해하며 영인을 과시하듯 백의 앞으로 밀어댔다. 영인은 꿈쩍하지 않았지만 이미 결론이 난 듯 모두 다시 코트 위로 올라섰다.

“김형찬, 너는 빠져!”

수림이 가장 구멍이었던 후배를 향해 일갈하며 영인에게 손짓했다. 수림의 팀에서 팀원들이 오랜만에 보는 영인에게 너 나 할 것 없이 인사를 건네며 응원했다.

다시 경기가 시작됐다. 백이 자신만만하게 영인을 보고 각오하라는 듯한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 장난스러운 얼굴에 참을 새도 없이 영인의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피지컬로 스킬을 압도한다는 수림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지 백이 요령 있게 넘긴 공들을 영인은 별로 힘들지 않게 뻥뻥 다시 차올렸다. 백이 영인의 공을 받기 위해 다리를 뻗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통증에 실점하고 말았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백이 바로 발목 근처를 감싸 안았다.

“와, 이거 뭐야?”

공에 돌 넣었나? 백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주변에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족구 공인데 타격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면을 보자 수림이 엄지로 자기 목을 그으며 백에게 살인예고를 하고 있었다. 영인도 크게 내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내심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백의 승부욕이 자극됐다.

결과는 14대 16으로 SCM 1팀의 패배였다.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했던 백이 패배를 인정하며 영인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한 판만 하기로 했으니까 강 과장님 다음 판은 빠지세요. 지겠다.”

백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자 옆에 있던 같은 팀 동기 박영태가 백에게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러게. 노빠꾸가 지는 꼴을 내가 다 본다.”

“내가 잘해서 이기면 우리 팀이 이기는 거고, 못해서 지면 내가 지는 거냐?”

“몰랐어? 공은 팀의 것, 과는 너의 것. 회사생활 허투루 했네.”

영태가 낄낄거리자 백이 팔꿈치로 영태의 명치를 쿡 찔렀다. 그리고 물을 마시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영태가 자연스럽게 함께 간식거리가 늘어져 있는 테이블로 함께 걸었다.

“아휴, 더워.”

백이 땀으로 젖은 하얀 티셔츠를 손으로 잡아 펄럭이며 종이컵에 물을 따랐다. 언뜻 균형미 있게 자리한 백의 복근이 보였다. 곧게 뻗은 허리는 얇으면서도 주변에 근육이 단단히 붙어 있어 약해 보이지 않았다.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젖힌 백과 우연히 그리고 또다시 영인의 눈이 마주쳤다. 꿀꺽, 물이 넘어가며 백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백의 하얀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린 땀이 쇄골을 지나 티셔츠 안 백의 속살로 사라졌다. 짧지 않은 시간 영인의 시선이 백에게 머물렀다.

물을 다 마신 백이 새로운 종이컵에 물을 따라 별말 없이 영인에게 내밀었다. 영인이 컵을 받아서 들어 마시는 모습을 백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강 과장님 족구왕이네요.”

영인의 대답이 없자 백도 더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미련 없이 다시 자신의 팀이 있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영인은 백이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보다 벤치에 앉았다. 성큼성큼 뛰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간 백이 다시 활짝 웃으며 공을 들고 누군가와 떠들고 있었다.

영인이 빠진 마지막 경기의 승리를 백은 당연하게 쟁취했다. 주성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백의 모습 위로 봄볕이 반짝거렸다. 영인은 그늘 속에서 그런 백을 바라볼 뿐이었다.

공지된 회식 장소로 먼저 떠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백의 팀 신입사원과 주성, 백을 비롯한 몇 명이 뒷정리를 하느라 후발대로 가게 되었다. 회식 자리에 빨리 가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수림도 차라리 쓰레기를 줍겠다며 남은 상태였다.

“강 과장님, 시스템즈한테 한턱내라고 하셔야죠. 강 과장님 덕분에 완패는 면했는데. 같이 회식 가요.”

커다란 종량제 봉투에 종이컵을 몰아 담으며 백이 말했다. 조용히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영인을 붙잡아 세운 것도 백이었다. 영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완곡한 거절의 뜻이 영인의 눈에 담겨 있었다. 백이 순순히 그런 영인을 존중해 주려고 입을 열려는 찰나 수림이 영인의 등을 후려쳤다.

“불러 줄 때 가세요. 너는 만회할 게 아직도 많아요.”

시스템즈 내에서는 영인 회의론이 불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투입됐던 프로젝트에서 철수하고 두문불출하던 영인의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는 수림 하나였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책임감 없는 행동이었다. 일 좀 잘하면 다냐는 성토의 말이 한동안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참에 아예 블락을 걸고 영화 시스템즈에서 일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강경한 의견까지 나왔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영인을 밀어 넣은 것은 수림으로서도 충분히 무리한 수를 둔 것이었다. 백의 적극적인 어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수림은 영인의 폐쇄적인 성격을 익히 알면서도 영인을 자꾸만 사람들 틈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백이 함께 있을 때가 수림도 영인을 남들 앞에 내놓기가 편했다. 백은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이런 기회를 수림이 놓칠 리가 없었다.

결국, 영인을 다시 사회로 불러 준 것은 영인의 빈약한 인맥이었다. 그러니 여태까지 도도하게 거절했던 수많은 인맥을 위한 자리를 영인은 거절할 수 없었다. 수림의 단호한 태도에 사무실로 돌아가지 못하는 영인을 보며 백이 “꼼짝 못 하네.” 하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회식 장소에 도착한 수림은 아무도 모르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노땅들은 상석에 자리 잡고 앉아서 술을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발주자들은 구석에 빈 테이블에 자기들끼리 앉을 수 있었다.

수림은 백의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영인과 주성이 앉게 되었다. 신입사원은 들어오자마자 팀장에게 불려갔는데 그 얼굴이 참으로 고달파 보였다.

덕분에 수림의 테이블은 누구를 의전할 필요도 챙겨 줄 필요도 없는 완벽한 자리가 되었다. 수림이 눈에 띄지 않게 노력하며 홀서빙 직원을 불러 생맥주와 치킨을 주문했다.

“사회생활을 하라며.”

영인이 그런 수림의 모습을 비웃으며 결국 질타의 말을 내뱉었다. 수림이 머쓱한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왔다는 얼굴도장만 찍으면 돼. 이따 가기 전에 한 번 인사나 하러 가자.”

그러고는 검지를 치켜들어 제 입에 갖다 대고 쉬하며 더 이상의 논쟁을 거부했다. 영인이 피식 웃으며 의자에 큰 몸을 기대앉았다. 오래 걸리지 않아 생맥주와 강냉이 안주가 나왔다.

“좋은 것 좀 사 주지 통합과 결속의 날이라면서 치킨 나부랭이가 뭐예요?”

수림이 강냉이를 한 움큼 집어 먹으며 투덜거리자 백이 방금 수림을 따라 하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 모습을 본 주성이 크게 웃었고, 영인은 작게 미소 지었다.

“강 과장님, 나한테 술 한잔 살 거 있는 거 잊지 않았죠?”

백이 주성이 따르는 맥주를 받으며 영인에게 물었다.

“네. 언제가 좋으세요?”

“우리 그러지 말고 다음 주에 프로젝트 멤버들 집에 한 번 초대해 주지? 술이랑 안주는 내가 살 테니까 장소 제공만!”

백의 제안에 수림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주성이 가볍게 혀를 차며 수림의 잔에도 맥주를 따랐다.

“백 책임님의 다음 희생양이 생겼네요. 강영인 과장님 한동안 수고하십쇼.”

주성이 영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예를 표하고 영인의 잔에도 맥주를 따랐다. 황금빛의 차가운 액체가 찰랑찰랑 차올라 넘치기 직전에 멈추었다. 하얀 거품이 컵 위로 봉긋하게 솟았다.

“거절은 반려. 리젝! 리젝!”

백이 리젝을 외치며 주성에게서 맥주 피처를 받아 주성의 잔도 채웠다. 수림이 주성의 잔이 차자마자 잔을 들어 건배 대신 반려는 리젝을 주창했다. 영인이 어떤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다음 주 수요일 퇴근하고 영인의 집에 가자는 얘기가 나머지 사람의 입에서 복작복작 흘러나왔다.

영인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프로젝트에 들어왔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수림은 말할 것도 없고 노백마저도 영인을 가만두지 않았다. 영인은 도무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왜 이렇게 중심 없이 흔들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밍밍하고 차가운 생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 * *

영인은 백의 차에 올라탔다. 백의 차는 백을 닮은 짙은 남색의 세련된 SUV였다. 푸른색과 흰색이 섞인 자동차의 엠블럼조차 백과 닮은 느낌이었다. 내부에 따로 방향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은은한 향이 기분 좋게 배어 있었다. 차가 워낙 큼직했기에 덩치가 큰 영인도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술이랑 과일만 좀 사면 되겠죠? 음식은 배달시키면 되고.”

“그러시죠. 일회용 젓가락이랑 종이컵도 좀 사야 합니다.”

“집에 없어요?”

“손님 맞이할 일이 없어서요.”

말을 마친 영인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이 액셀을 밟자 차가 매끄럽게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백은 능숙하게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끊임없이 주위를 살폈다. 차도 별로 없는 곳인데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매가 백과 어울리지 않았다. 저 입꼬리는 보통 올라가 있는데. 영인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백은 영화 전자 IT 그룹 내에서는 가장 일찍 출근하는 축이었다. 조을현 상무를 제외하면 백만큼 일찍 출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은 예전부터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하다 담당자들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일을 뿌리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야근하게 되면 결국 저녁을 먹어야 했고, 수다가 이어지고, 일이 딜레이됐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자리 잡고부터는 덕분에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조기 퇴근도 가능했다.

여간해서는 조기 퇴근하지 않는 백이 오늘은 영인의 집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영인을 끌고 네 시에 자리를 나섰다. 영인과 백이 장을 보고 집을 정리하면 퇴근한 수림과 주성이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태준은 이번 모임도 고사했다.

평일 오후 마트는 한산했다. 주차까지 수월하게 한 백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카트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영인도 그 뒤를 느릿하게 따라나섰다. 백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늘 그렇듯 어떠한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알맞게 피트되는 흰색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가 밝은 백과 잘 어울렸다.

영인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훑었다. 오늘도 되는대로 집어 입은 차림새였다. 검은 반팔 티에 같은 색 바지였다. 한때 영인이 이렇게 입으면 검은색이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상의와 하의가 모두 같은 색이면 너무 강해 보인다고 지적해 주는 사람이 그에게도 있었다.

한동안 의식적으로 잊고자 했던 부재가 예고도 없이 영인의 가슴 안쪽을 찢고 튀어나왔다. 백의 뒤를 쫓던 영인이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한산한 주차장, 어두운 조명 아래 영인은 홀로 서 있었다.

카트를 빼내고 영인을 기다리던 백이 그런 영인의 모습을 별말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영인의 눈썹 밑으로 음영이 졌다. 영인 자체가 그림자 같은 모습이었다. 영인은 없고 영인의 그림자만 남은 것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그 누구보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마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나치게 밝은 조명 밑에 선 백과 어두운 주차장 한복판에 있는 영인이 한참 동안 침묵 속에 대치했다. 백은 영인을 보았지만, 영인은 무엇도 보지 않았다. 백이 잠시 영인의 아픔과 그늘을 훔쳐본 셈이었다. 36살인 백은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아픔이, 상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영인에게도 그런 것이 있겠거니 짐작하며 쓴 입맛을 다셨다.

영인은 길을 잃은 사람 같았다. 도무지 다시 걸어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영인을 향해 백이 외쳤다. 시간을 더 준다고 해결될 문제 같아 보이지 않았다.

“차에 가 있을래요?”

백의 차분하지만 작지 않은 음성이 영인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영인의 발아래 땅은 몰려오던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 밑으로 추락하려던 자신을 향해 손이 내밀어진 듯했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영인이 매달려도 괜찮아 보일 만큼 강한 손이었다. 그런 음성이었다.

영인이 깊게 숨을 마시고 다시 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찢어지고 무너진 가슴을 달랬다. 영인이 오는 것을 본 백이 먼저 뒤돌아서 하얀 조명이 가득 찬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영인이 무빙워크에 선 백의 뒤에 와서 섰다. 올라가는 무빙워크의 경사 덕에 영인과 백의 키가 비슷해 보였다.

백이 슬쩍 고개를 돌려 영인의 얼굴을 보았다. 영인도 지친 얼굴로 그런 백을 마주 보았다. 짧은 눈 맞춤으로 영인의 상태를 확인한 백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목적지였다. 카트를 힘주어 밀어 무빙워크에서 빠져나오며 백이 역시 먼저 입을 열었다.

“술은 쏘쏘쏘 쏘주?”

아무 일 없었다는 백의 태도에 영인이 싱겁게 웃어 보이며 ‘좋으실 대로’라고 대답했다. 그 웃음이 영인을 차가운 과거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냈다.

백은 사정없이 장을 보기 시작했다. 사과와 파인애플, 포도를 카트에 넣었다. 영인은 카트를 밀고 여기저기 가서 물건을 주워 담는 백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백이 철이 아니라 비싼 수박 앞에 서서 이놈 저놈 골라가며 주먹으로 통통 수박을 두드릴 때 영인이 고개를 저었다.

“수박은 좀….”

“왜요? 비쌀 때 먹어야 맛있는데.”

“그거 잘라 먹는 것도 일이고.”

“제가 할게요. 뒤처리까지.”

나 취사병. 백이 엄지를 치켜들어 자기 가슴께를 가리키며 짐짓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쿠야. 영인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백은 기어코 수박을 카트에 담았다.

백은 그 이후에도 소비를 멈추지 않았다. 소주를 한 상자 사더니 입가심을 해야 한다며 맥주도 피처로 네 개를 골라 넣었다. 영인은 백을 말리는 것이 아무런 소용 없는 짓이라는 것을 진작 깨닫고 묵묵히 백이 가는 곳으로 카트를 밀고 갈 뿐이었다.

카트가 가득 차고서야 백의 쇼핑도 끝났다. 혼자 혹은 둘이서만 살았던 영인은 이렇게 많은 물건을 한 번에 사 본 적이 없었다. 백과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너무 많이 사면 남습니다.”

“남은 건 냉장고에 잘 넣었다가 강 과장님 드세요. 보너스.”

언제 넣은 건지 카트 안에는 무소음 벽걸이 시계까지 들어 있었다.

“이건 뭡니까?”

“집들이 선물이죠. 강 과장님 집에 시계 없죠? 이거 나도 쓰는데 괜찮아요.”

차분한 네이비색 동그라미 안에 금색 시곗바늘과 숫자가 박혀 있었다. 백은 실속 있고 유능해 보이다가도 철없고 호구 같아 보였다. 어느 것이 진짜 백의 모습인지 알 수 없다고 영인은 생각했다.

시곗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건전지를 챙겨 넣지 않는 이상 저 시계가 시계로 작동할 일은 없을 터였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리던 백이 계산대 바로 옆에 걸려 있던 건전지를 집어 들었다.

“강 과장님 집엔 건전지도 없을 거 같은데.”

“없습니다.”

백이 ‘역시’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건전지를 휙 계산대 위로 올렸다. 백은 시계가 멈춰 있는 것을 볼 생각이 없었다.

“집 깨끗하네요?”

영인이 현관문을 잡고 있는 사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선 백이 감탄했다. 평소 자신에게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사는 듯한 영인을 보고 집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터였다.

영인이 그 말에 큰 반응하지 않고 여전히 중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집을 둘러보는 백의 옆을 지나는 찰나 백이 살짝 굽은 영인의 등을 퍽 하고 쳤다.

“잘하고 살아. 의외야.”

백의 능청스러운 칭찬에 영인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어 보이고는 그대로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손에는 당장에라도 터질 듯 가득 물건이 담긴 봉투가 네 개나 들려 있었지만, 영인은 크게 무겁지 않은지 힘든 내색이 전혀 없었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아니라면 정말로 그 짐이 무겁다는 것을 눈치챌 단서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백은 크지 않은 조리대 옆에서 얼쩡거리는 영인을 다시 채근해 소파로 보냈다. 어차피 음식이야 배달시키면 그만이었고, 백은 사 온 과일들을 씻고 먹기 좋게 잘라내기만 하면 됐다. 영인이 말리던 것들을 기어코 샀으니 이 부분은 당연히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만 큰 소리가 나면 영인이 옆에 서서 도움도 안 되는 커다란 덩치로 길목을 막고 있으니 백으로서는 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강 과장님. 진짜 우리 둘이 이러고 있으면 여기 너무 좁잖아요. 이거 금방 해요. 필요하면 부를게요.”

영인은 결국 다시 소파로 와서 앉았다.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도 못하고 제 무릎에 팔꿈치를 놓고 양손을 깍지 꼈다. 자꾸만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타인이 제집 주방에서 무언가를 했던 적은 전혀 없었다.

괜히 거짓말을 하고 어른 앞에 선 아이처럼 긴장됐다. 건조한 아랫입술을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놓았다 했고, 큰소리가 날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숨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수박까지 먹기 좋게 반듯한 정육면체 모양으로 잘라낸 백이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림이라고는 안 하고 사는 모양새였다. 지나치게 깨끗하고 삶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그 와중에 보이는 것들은 어쩐지 두 짝씩 세트로 있는 컵이나 그릇, 포크 같은 것들이었다. 작은 식탁에도 의자는 둘뿐이었다.

“둘이 살았나?”

그러고 보니 실내용 슬리퍼도 두 개였다. 자연스럽게 영인이 건넨 것을 신느라 몰랐는데 분명 두 개였다.

“여자친구랑 헤어졌네, 헤어졌어.”

가볍게 혀를 차며 백이 접시를 꺼내 과일을 보기 좋게 옮겼다. 마침 타이밍 좋게 인터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면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웃고 있는 수림과 주성의 얼굴이 보였다.

“이거 너무 한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수림의 불평이 터졌다.

“이 집에 테이블이라곤 저 작은 식탁이랑 이 소파 테이블밖엔 없는데 어떻게 해.”

백이 길쭉한 검지로 2인용 식탁을 한번 가리키고, 이내 소파 옆에 놓인 작은 탁자를 가리켰다. 수림과 주성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백의 손끝을 따랐다. 마지막으로 백이 양 손바닥을 보이게 펼쳐 거실 바닥을 소개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MT 왔다고 생각해.”

“세상에, 이 나이에. 상 하나 사 오라고 하지.”

수림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백을 노려보았다. 바닥에는 은색의 빛나는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일회용 접시와 그릇이 세팅되어 있었다.

“…집에 누구 부를 일이 없었잖아. 이해 좀 해 줘.”

지켜보던 영인이 수림의 어깨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금세 백의 귓가에 와 닿았다.

“그래. 네가 누굴 부른 게 기적이긴 하지.”

수림이 이해한다는 듯 어깨 위 놓인 영인의 손을 몇 번 토닥이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백이 기다렸다는 듯 소주를 냉동실에서 꺼내 왔고, 이내 미리 시켜 둔 족발과 회가 차례대로 도착했다.

“근데 일회용 접시랑 이 종이컵 소주잔은 너무 한 거 아닌가?”

어느새 적당히 발갛게 익은 수림이 술이 담긴 잔을 휙휙 흔들었다. 무신경한 움직임에 술이 넘칠 듯 말 듯 찰랑거렸다.

“책임님, 백 책임님이랑 집들이 처음이시죠?”

마찬가지로 얼굴에 열이 오른 주성이 실없이 웃으며 수림을 향해 물었다. 백과 아무리 친해도 팀이 다른 수림은 사실 프로젝트 관련 회식이 아니고서는 백과 어울릴 일이 없었다.

“이거 백 책임님 특기예요, 특기. 누구 회사 근처에 산다고 하면 집들이하자고 하면서 뒷정리도 다 해 주거든요. 근데 설거지 안 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일회용품으로… 푸흐흐….”

“환경 파괴자.”

수림이 휙 고개를 꺾으며 잔에 있던 술을 비우고 백을 향해 날 선 말을 던졌다.

“들었죠? 강 과장님은 그냥 씻고 자면 돼요. 내가 다 치우고 간다. 장소만 제공해 주면 돼요.”

백이 얼마 남지 않은 수박을 입으로 가져갔다. 보기에는 커 보이지 않는 조각이었는데 막상 한입에 넣고 나자 입 안이 가득 찼다.

“빠꾸 책임, 왜 자꾸 남의 집에서 집들이해. 자기 집에서 좀 해. 회사 사람들 말고 진짜 친구들도 좀 만나고. 아니다, 아니다. 연애를 해. 연애! 외로워서 그런 거야.”

수림의 타박에 백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입 안에 조금 남아 있던 수박을 삼켰다. 꿀꺽하는 소리가 자신에게만 이토록 크게 들린 것인지 남들도 들은 것인지 백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자 무표정한 얼굴로 영인이 하나 남아 있던 수박 조각을 백의 젓가락으로 찍어 백에게 내밀었다.

‘비싼 수박.’

영인이 백을 보고 입 모양으로 한 말을 보며 백은 다시 한번 웃었다. 외로운 사람이 주는 위로인 건가. 백은 그런 생각을 하며 영인의 손에 있던 수박을 받아서 들어 한입에 쏙 넣었다.

수림의 말이 맞았다. 백은 외로웠다. 연애나 사랑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장 혼자 남아 있을 때 드는 공허함이 점점 짙어지던 차였다. 같이 어울리던 동기들은 다 결혼해서 이제 평일 저녁에 같이 술 한잔하기도 눈치가 보였고, 후배들 데리고 밥 사 주고, 술 사 주는 것도 지겨웠다. 낄 자리도 아닌 것 같았고.

백에게 수박을 주자마자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수림과 주성이 하는 말들을 듣고 있는 영인을 백이 찬찬히 살펴보았다. 수림과 대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다고 하니 인간성은 문제없을 것 같았다. 집 꼴로 보니 연인과 헤어진 지도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옆자리에 세울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백을 감쌌다.

“책임님. 왜 이렇게 혼자 이상한 표정으로 계세요?”

주성의 물음에 백이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들었다. 모두 어느새 잔을 채우고 건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백은 사람과 친해지는 데는 자신 있었다.

술자리는 오래도록 이어지다 술이 동나고서야 끝났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수림이 머리가 아픈지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진짜로 우리 먼저 가도 돼? 다 같이 치우자.”

그런 수림을 주성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웅웅웅, 수림의 주머니에서는 핸드폰 진동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림수 책임, 지금 계속 전화 와. 얼른 전화 받고, 조심히 들어가. 주승아, 네가 수림 책임 택시 타는 거까지 확인하고 가라. 내일 지각하지 말고.”

“넵!”

주성이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먼저 현관으로 가서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콜택시를 불렀다. 두 사람이 요란하게 떠나자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영인은 가만히 서서 초토화가 된 거실을 둘러보았다.

“강 과장님도 이제 가서 주무세요. 제가 알아서 치우고 갑니다.”

몰려오는 취기를 이기기 위해 백이 머리를 잘게 털었다. 사무실에선 흐트러짐 하나 없던 사내에게서 무방비한 허점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백이 그제야 셔츠가 답답했는지 목까지 채우고 있던 단추를 풀고,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영인은 꼭 맞는 바지 탓에 보기 좋게 드러난 백의 엉덩이를 응시했다. 운동을 좋아하는지 근육이 탄력 있게 올라붙어 있었다. 그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베이지색조차 야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 무렵 영인이 헛기침하며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술이 문제였다. 영인은 어서 백을 보내고 다시 정적과 평화를 되찾고 싶었다. 홀로 남고 싶었다.

“같이 치우면 금방 마무리하겠는데요.”

그래서 무뚝뚝하게 말을 던지고, 허리를 숙여 쓰레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영인의 말대로 함께하니 정리는 금세 끝났다. 모든 인스턴트 술자리가 그러하듯 남은 것은 커다란 쓰레기봉투뿐이었다. 백은 말끔해진 거실을 보자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털썩, 소파에 앉아 눈썹 부근을 마사지하는 백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인은 그런 백을 보며 백이 듣지 못하게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청소만 마치면 당장에 내보내려고 했는데 막상 지쳐 보이는 백을 마주하자 쉽게 작별 인사가 나오지 않았다.

물을 한 잔 든 영인이 백의 옆에 앉아 컵을 백에게 내밀었다. 손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놀란 백이 슬쩍 눈을 떴다. 커다란 유리잔에 가득 담긴 물과 그 잔을 든 커다란 영인의 손이 보였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인지 능청스럽게 이 말, 저 말 잘하던 백도 별다른 반응 없이 컵을 받아 단숨에 그 많던 물을 다 마셨다. 백의 목젖이 백이 물을 넘길 때마다 위아래로 움직였다. 영인은 그 모습을 보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있는 백의 발을 보았다. 그런 영인의 시선을 느낀 백이 잠긴 목을 두어 번의 헛기침으로 푼 뒤 입을 열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죠?”

불쑥 들어온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영인이 눈을 크게 뜨고 상체를 옆으로 돌려 백을 보았다. 무례한 질문이었다. 너무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으로 백이 예고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

“나는 한 3년 됐나? 걔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아무짝에도 필요 없어 보이던 작은 소파 테이블에 백이 빈 컵을 탁 소리가 나게 올리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애초에 대답은 필요 없던 질문을 던진 사람처럼 미련이 없었다.

“외로운 사람끼리 자주 봐요, 우리.”

영인은 여전히 침묵했고, 백은 떠날 때를 아는 사람처럼 영인이 먼저 안녕이라고 하기도 전에 그대로 훌훌 떠나 버렸다. 이미 자리 주인은 사라졌는데 영인은 그가 남긴 여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띠리릭,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영인도 속박에서 풀린 듯 무거운 몸을 소파에 뉘었다. 사람들이 왔다 간 집은 그들이 오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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