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인을 위하여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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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님, 진지는 잡수셨습니까?”
노백은 뒤를 따르며 능청스럽게 말을 거는 박주성의 이마를 큼직한 손으로 아프지 않게 툭 밀고 다시 프로젝트 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킥오프 미팅부터 지각이라니, 백이 인상을 썼다. 어제 잔뜩 술을 먹고 늦은 주성 탓이었다. 백이 걸음을 서두르자 주성이 잰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180cm가 넘는 장신인 백과 속도를 맞추자니 주성은 진땀이 났다.
사무실이 있는 A동을 나와 프로젝트 룸이 몰려 있는 B동에 다다르자 백과 주성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5월인데도 날씨가 더웠다. 백이 문을 열기 전 셔츠와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주성에게 “괜찮아?” 하고 묻자 주성이 한껏 미소를 띠고는 끄덕였다. 정작 주성은 술 냄새가 풀풀 나고, 눈이 부어 제법 귀여운 외모가 다 가려진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제일 늦었나요?”
백이 사람 좋은 얼굴로 문을 열고 프로젝트 룸 안으로 들어섰다. 각자 노트북이며 모니터를 설치하느라 바쁘던 사람들이 모두 백과 주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백은 자연스럽게 멤버 하나하나 얼굴을 살폈다.
프로젝트 자체는 난도가 높았다. 선배가 일은 잔뜩 벌여 놓고, 수습되지 않자 그대로 백에게 넘기고 튀어 버렸다. 연구원들을 감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탓에 사용자들의 반발부터 보통이 아닌 일이었다. 잘해 봐야 본전이고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백의 업무 능력부터 존재 이유까지 비난받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함께 전장을 헤쳐 나가야 할 레귤러 전우들은 백을 포함 다섯 명뿐이었다. 그중 백의 후배인 박주성은 전력 외 인물로 쳐야 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전반적인 업무 방식과 해당 시스템의 프로세스를 가르쳐 담당자로 만들려는 목표로 데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백이 투자심의의 처음부터 나섰다면 이토록 처참한 시작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아직 강영인 과장이 안 왔어요.”
임수림이 난처하게 웃으며 백의 질문에 대답했다. 수림은 개발자 리더로, 백과는 오랜 시간 일을 해 온 영화 시스템즈의 책임이었다. 영화 전자의 IT 부서에 있는 노백이 갑이고 수림은 을이었지만 사이는 돈독한 편이었다.
둘 다 일벌레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노백과 임수림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악명 높았다. 알 만한 사람들은 노림수가 뭉쳤다며 투입을 피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다. 그 덕에 누구도 오지 않으려고 해서 소싱부터 애를 먹었다.
대답을 들은 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백이 손목시계를 슬쩍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수림이 초조한지 자꾸 문가로 시선을 옮겼다. 백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마음은 바쁜데 여기저기서 벌써 발목을 잡아 오는 듯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수림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백의 뒤에 있던 문이 열리고 곰처럼 거대한 사내가 프로젝트 룸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들어온 사람의 그림자 때문에 백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사내는 어디 가서 키로 밀린 적 없는 백보다도 반 뼘은 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낮은 목소리가 프로젝트 룸을 웅웅 울렸다. 백은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음성의 주인을 보았다. 언제 미용실에 간 건지 알 수 없는 덥수룩한 머리에 집히는 대로 입은 듯한 옷을 입은 남자가 노트북과 모니터를 들고 서 있었다.
강영인이었다.
백은 별말 없이 살짝 비켜서 영인이 지나가도록 길을 내주었다. 영인은 그런 백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휙 걸어가 수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영인의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프로젝트 멤버인 김태준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영인에게 인사했지만, 영인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세팅하기만 했다.
미묘해진 회의실의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백이 짝짝 손뼉을 쳐서 시선을 모았다. 영인을 제외한 모두가 백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약간의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권태로움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
“이제 멤버가 모두 모였네요. 간단하게 인사하고 시작하도록 하죠. 개발 업무 분장은 임수림 책임이 올린 공수 관련 파일 확인해 보시면 되겠고. 저는 SCM 1팀 노백 책임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리더긴 하지만, 제가 이 일만 하는 건 아니라 급한 일은 임수림 책임이나 박주성 사원과 얘기하시면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백이 익숙하게 자기소개를 마치자 주성이 과장되게 손뼉을 치고 호응했다. 수림이 그런 주성의 모습을 보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자 회의실 분위기가 금세 밝아졌다. 백이 아직 웃음기가 남은 수림에게 가볍게 턱짓을 해서 소개할 것을 재촉했다.
질끈 묶은 머리에 화장기가 없는 수림은 시작도 전에 온갖 풍파를 겪은 사람처럼 지쳐 보였다. 33세인 수림은 올해 책임으로 진급했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입사해 눈치껏 독기 있게 회사생활을 한 덕에 어린 나이임에도 프로젝트 리더 자리를 차지한 재목이었다. 이미 자리 세팅은 물론 마실 커피까지 준비해 둔 수림이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영화 시스템즈 임수림 책임입니다. 소규모 프로젝트 같지만, 일정 보시면 만만치 않다는 거 아실 겁니다. 월요일에 오시면 제일 먼저 주간보고 파일 제출해 주세요. 한번 일정 밀리면 걷잡을 수가 없으니 귀찮다고 생각 마시고요. 나름 정예 멤버로 꾸린 팀이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코밑에 걸려 있던 동그란 모양의 금테 안경을 수림이 슥 올리며 인사를 마치자 백이 바로 주성을 보았다. 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주성이 의욕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노 책임님은 자꾸 저를 주승이라고 부르는데 제 이름은 박! 주! 성! 입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가 보이게 웃으며 주성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백이 그 모습을 귀엽게 보다가 자연스럽게 태준과 영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먼저 소개하실 분?”
백이 영인과 태준을 번갈아 가며 보자, 태준이 눈치껏 먼저 입을 열었다.
“김태준입니다. 영화 전자는 첫 투입이지만 다른 계열사에서 일해 본 경험은 많이 있습니다.”
태준은 프로젝트 멤버 중 가장 연장자였다. 살집 없는 체형과 얇은 입술이 인색하고 성마른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태준의 소개가 끝나자 모든 사람이 영인을 보았다. 영인은 느릿하게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영인이 입을 열자,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다시 프로젝트 룸에 가득 찼다. 백은 자기도 모르게 영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강영인입니다.”
영인은 귀찮은 듯 이름만 말하고 자신이 가져온 모니터를 응시했다. 백은 너무나 짧은 소개에 자기도 모르게 작게 실망했다. 하지만 노련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다시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다 같이 석식 한번 하시죠.”
“좋아요!”
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성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백이 가볍게 주성의 머리를 쓰다듬듯 툭툭 치고, 짧게 영인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다. 영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개발 환경 세팅에 집중하고 있었다.
엑셀을 켜 두고 오랜 시간 작업하던 백이 손목을 꺾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거의 열두 시가 다 된 참이었다. 백이 다이어리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심 맛있게 드십쇼. 저는 선약이 있어서.”
주성이 자연스럽게 백을 따라 일어서자 백이 고개를 저었다.
“주승이 너는 여기서 먹어. 림수 책임이랑 친해져야지. 프로젝트 끝나면 어떻게든 매달려야 할 텐데.”
백이 장난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자 주성이 힘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빠르게 타자를 치던 수림도 그 말을 들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또 얼마나 저를 귀찮게 하려고 저런 초짜를 붙이는 건지. 수림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백이 떠나도 회의실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주성만 엉덩이를 들썩이며 점심 먹으러 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수림은 12시 30분이 지나서야 모니터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주성은 팔짱을 끼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시죠.”
수림이 일어서자 주성이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잠에서 깨 주섬주섬 일어섰다.
“주성 씨.”
“네?”
“내 후배였음 욕 진짜 먹었다.”
수림은 말로는 욕을 안 할 것처럼 했지만 표정으로 욕하고 있었다. 주성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가를 한번 손등으로 훔쳤다. 이어서 태준과 영인도 일어섰다. 모두 재미없는 표정으로 사내 식당을 향해 걸었다. 주성은 지루하고 불편해 아까 백을 따라나서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수림과 다른 개발자들은 모두 메뉴를 고르지 않고, 가장 줄이 짧은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고른 메뉴는 스파게티였다. 주성은 차라리 한식 코너의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지만 어쩐지 혼자서 다른 메뉴를 고를 수 없어 말없이 수림의 뒤에 줄을 섰다. 백은 지금쯤 회사 밖 식당에서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식판에 음식을 받은 수림이 프로처럼 빈자리를 찾아내 앉았다. 주성과 영인, 태준도 수림이 앉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다들 별말 없이 전투적으로 숟가락질을 했다. 태준은 잘 몰랐지만, 수림과 영인은 주성의 팀뿐 아니라 SCM 담당 전체에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수림과 함께 일을 하면 결코 망할 일 없다는 절대적인 신뢰가 영화 전자 SCM 담당에 팽배했고, 영인은 그보다 좀 더 전설적인 사람이었다. 영인은 개발의 신이라고 불렸다. 해 달라고 하면 못 하는 게 없고, 테스트뿐 아니라 테스트 케이스 작성까지 손볼 곳 없이 다 해치운다고 했다. 프리랜서 개발자인 영인의 직급은 과장이었지만, 사실 그가 특급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직급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여느 부장급 프리랜서보다도 더 몸값이 높았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가 없다니. 주성은 차갑게 식은 면발을 넘기며 백을 생각했다. 책임님 없이 이 삭막한 프로젝트 룸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졌다.
* * *
“퇴근하실까요?”
백이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보고 노트북 전원을 끄며 말했다. 수림도 별말 없이 작성 중이던 문서를 저장하고 기지개를 켰다.
“요즘 보안 신경 많이 쓰니까 다들 노트북 제대로 전원 끄시고, 서랍 다 잠그세요.”
백이 자신의 노트와 다이어리를 서랍에 넣고 잠그며 말했다. 주성은 어느새 백팩까지 메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백은 영인 쪽을 보았다. 영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안 되겠던지 가방을 챙기는 수림에게 팔을 뻗었다.
“이것 좀 봐 봐.”
수림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두고 영인의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게 지금 원하는 조건이 명확하지 않은 거 같은데.”
자기소개 이후 처음으로 영인이 내뱉은 말이었다. 수림이 영인의 모니터에 떠 있는 엑셀 화면에 집중하다가 백을 쳐다보았다.
“먼저들 가. 나 이거 영인이랑 확인하고 금방 따라나설게. 자리 잡고 카톡 해 줘요.”
백이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 안 풀리면 내일 해. 어차피 데이터 조건 문제면 내가 봐야 하는 거니까.”
백은 수림의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을 열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주성과 태준이 따랐다. 막상 복도로 나오자 태준도 백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는 퇴근 후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집에서 혼자 쉬어야 다음 날 집중이 잘되거든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태준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백과 주성을 남겨두고 떠났다. 주성이 작아지는 태준의 뒷모습을 이상한 표정으로 끝까지 쳐다보았다. 백으로서는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회식이나 여러 가지 형식적인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프리랜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태준도 그런 사람이려니 생각하며 백은 자연스럽게 주성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걸었다.
“박주승, 뭐 먹고 싶나?”
“보쌈이요.”
주성이 실실 웃으며 막내가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메뉴를 골랐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조명을 받아 하얀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백이 슬쩍 뒤돌아보았지만, 회의실 문은 여전히 닫힌 채로 열릴 줄 몰랐다.
수림과 영인은 대학교 동창으로 둘 다 Y대 컴공과를 졸업했다. 수림이 먼저 영화 시스템즈에 입사했고 뒤이어 영인도 입사했지만, 영인은 1년 만에 그만두고 프리랜서 개발자로 전향했다. 사회생활을 해내기 어려운 성정 탓이었다.
영인은 타인에게 관심도 없고, 남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아서 취업 후 일보다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어차피 영인에게 중요한 사람이라 봐야 연인인 선우진뿐이었다.
수림이 진과 친했던 탓에 영인과도 계속 친구 사이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지 사실 영인에게는 그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수림도 크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수림이 안다면 분명 섭섭해할 생각이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영인은 기본적으로 밥맛 없는 사람이었다.
진이 사고로 죽고 난 이후로는 완전히 맛이 가 버려서 수림은 이대로 영인도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시간이 흘러 괜찮아진 듯싶다가도 주기적으로 영인은 연락 없이 두문불출했고, 그럴 때 찾아가 겨우 만나면 수염은 덥수룩하게 난 상태로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않아 마치 살아 있는 시체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영인은 또 사라졌었다. 집을 막무가내로 찾아가 영인을 만난 어느 날, 수림은 이대로 내버려 두면 영인이 죽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영인에게 정말로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수림의 그 염려가 바로 석 달이 넘도록 칩거하던 영인을 설득해 이 프로젝트에 합류시킨 이유였다. 거절하는 영인에게 끊임없이 연락해서 일이라도 해야 산다고 설득을 해대 겨우 승낙을 받아낸 것이었다.
영인의 몸값이 비싼 탓에 난색을 보이던 백을 설득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영인이 첫날부터 지각하니 수림으로서는 불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지만 너무 아무 말 없이 키보드만 두드려 대는 통에 친한 자신마저도 어렵게 느껴질 지경이니 남들은 오죽할까.
“회식 자리 가면 표정 풀고 대답이라도 열심히 해. 네가 아무리 프리여도 너나 나나 을질 하는 입장인 건 맞잖아.”
건물을 나서며 수림이 영인의 어깨를 툭 쳤다. 영인이 무심하게 수림을 한번 보았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수림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수림이라도 최선을 다해 분위기 메이킹을 해야겠다는 의욕이 들었다.
한편 백과 주성은 식당에 자리를 잡고 메뉴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쌈과 막걸리가 나오자 백이 막걸리 병을 시원하게 흔들고 뚜껑을 따며 병의 대가리를 손바닥으로 휙 내려쳤다.
“진짜 안 넘치네요?”
“그래. 막걸리는 이렇게 쳐 줘야 해.”
그대로 백이 주성의 막걸리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주성이 자연스럽게 막걸리 병을 받아서 백의 잔도 채웠다.
“어제도 과음한 거 같은데 오늘 또 마셔도 되겠어?”
백이 목까지 채웠던 셔츠 단추를 풀며 주성에게 물었다. 주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7살인 주성은 모교로 가면 제법 선배인 척하겠지만, 백의 눈에는 여전히 어리고 순수해 보였다. 둘이 잔을 부딪치고 시원하게 술을 들이켤 때 ‘딸랑’ 하는 방울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리고 영인과 수림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잔을 입에 댄 채로 백이 고개를 돌려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수림이 먼저 들어와 벽에 기댈 수 있는 주성의 옆자리에 앉자 영인은 아무런 표정 없이 백의 옆에 긴 다리를 접고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 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탓에 자꾸만 무릎이 부딪혔다.
“오늘 보던 건 노빠꾸 책임이 내일 좀 봐줘야겠어. 영인이 너 빠꾸 책임이랑은 처음 일하는 거지? 우리 노빠꾸 좋은 사람이니까 잘 해 보자.”
수림이 주성이 채워 준 막걸리를 음복하듯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림 딴에는 최선을 다해 분위기를 맞추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영인을 제외한 모두가 열심히 먹고 마시며 이야기하느라 입을 쉼 없이 벌렸다. 영인만이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고 그림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의식하지 않는 척하며 그런 영인을 신경 쓰던 백이 대수롭지 않게 테이블 위에 있던 영인의 젓가락을 들어 보쌈을 몇 점 집어 영인의 앞접시에 올렸다.
“보쌈 싫어해요?”
영인이 물끄러미 제 앞에 놓인 보쌈을 보다 고개를 들어 백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 건 아닙니다.”
둘의 얼굴이 처음으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눈썹을 덮을 정도로 자란 머리카락 밑에 있는 영인의 눈매가 서늘했다. 유난히 까만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백을 직시했다. 의도를 묻는 듯한 눈이었다. 백이 괜스레 멋쩍어 관자놀이를 긁으면서도 그런 영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말없이 눈을 맞추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각자 적의와 두려움, 호기심과 관심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수림과 주성이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느릿하게 백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런데 왜 안 먹어요? 여기 맛있는데.”
백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백의 미소를 보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호감을 느꼈다. 백은 멀끔하게 잘생긴 데다 인상이 선한 탓에 어디를 가도 떡 하나 더 얻어먹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영인에게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영인은 별 반응 없이 젓가락을 들어 백이 놓아 준 고기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정작 백은 영인이 먹는 모습까지는 보지 않았다. 그렇게 둘만이 공유했던 짧은 시간이 깨졌다.
“책임님, 너무 강 과장님만 챙기시네요.”
영인과 백 사이의 공백을 주성이 파고들었다. 백이 웃으며 자신이 쥐고 있던 젓가락으로 보쌈을 잔뜩 집어 올려 주성의 앞접시에 올려 주고, 수림을 보았다. 수림이 손사래를 치며 “난 내가 먹을게.” 하고 야무지게 쌈을 싸기 시작했다.
주성이 막걸리 잔을 들자 백과 수림도 이어서 잔을 들어 올렸다. 수림이 눈에 힘을 주고 영인을 노려보자 영인도 느지막이 잔을 들고 건배 준비를 했다.
“잘해 봅시다! 건배!”
백의 쾌활한 건배 제의에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느 정도 술자리가 이어지자 영인을 제외한 이들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수림도 취기가 올랐는지 본격적으로 한쪽 무릎은 세우고, 팔꿈치로 테이블을 괴고 편하게 앉았다.
“우리 영인이가 착한데 말이 좀 없고, 낯을 많이 가려.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
수림이 백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백이 옆자리에 목석처럼 앉아 있는 영인을 흘낏 보고는 잔을 들어 그대로 담긴 술을 모조리 마시고 입을 열었다.
“영인 과장님은 어디 사세요?”
“근처 삽니다.”
“나는 서울 사는데, 가끔 과장님 집에서 신세 좀 져야겠다. 그러려면 좀 친해져야겠네.”
백이 다시 밝게 웃으며 영인의 빈 잔에 막걸리를 콸콸 부었다. 넘칠 듯이 찰랑거리는 우윳빛 액체를 보며 영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림이 아니었다면 이런 회식에 참석할 일도 없었고, 관심도 없는 남을 상대하느라 피곤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저도 한 잔 따라 주세요.”
백이 잔을 들자 영인이 막걸리 병 주둥이를 큰 손으로 잡고 마찬가지로 조심성 없이 술을 들이부었다. 역시 넘치기 직전까지 따른 탓에 백이 서둘러 자신의 입술을 잔에 가져다 대 흐르려는 술을 빨아 마셔 수습했다. 맞은편에 앉은 수림과 주성은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노란빛의 양은 막걸리 잔에 맞닿은 백의 입술에 영인의 시선이 닿았다. 백이 술이 넘치지 않도록 주욱 하얀 막걸리를 들이켜자 백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영인은 숨을 참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저 술을 쏟지 않으려는 행동일 뿐인데 색정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 자신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순간 백과 눈이 마주쳤다.
잔을 내려놓으며 백이 꽤 오랜 시간 자신을 지켜본 듯한 영인을 향해 영문을 묻는 표정을 지었다. 백의 잘생긴 눈썹이 까딱 이마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영인은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백은 이견이 없을 미남이었다. 대학교나 항공사의 간판 모델로도 손색이 없었다. 키도 크고 팔다리도 늘씬하게 빠진 데다 늘 자신만만해 보여서 인상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쉽게 다가가기는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을 보면 완벽주의자, 멋지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백은 이미 취해서 벌겋게 된 얼굴로 실없이 웃으며 주성과 주거니 받거니 만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백의 의외의 모습에 영인은 내심 놀랐다. 영인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백이 바늘 하나 안 들어갈 오만한 실력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나 진과 있을 때와는 달리 박장대소를 하는 수림의 모습도 낯설었다.
영인은 이런 답지 않게 살갑고 화목한 모임 속에서 외딴 섬처럼 앉아 있었다. 소란 속에서 홀로 침잠했다. 어지럽던 마음속 부유물이 가라앉으면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영인을 떠나 버린 영인의 연인. 좀처럼 쉽게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진의 고요한 얼굴만이 어두운 영인의 내면에서 사라지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유일한 존재였다.
“…님! 영인 과장님!”
영인이 끝없는 사념에 빠지려는 순간 적막을 깨고 백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영인은 순간 방해받아 불쾌한 사람처럼 사납게 백을 보았다. 백이 영인의 잔을 들어 영인에게 내밀고 있었다.
“우리 말 하나도 안 듣는 거죠?”
“에이, 설마요! 강 과장님은 원래 말씀이 없으신 편일걸요?”
백의 힐난 어린 질문에 대답한 것은 주성이었다. 수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인을 보고 있었다. 영인이 백이 넘겨준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켜자 백과 주성이 박수 쳤다.
“그럼 내 보직이 뭐였는지 말해 봐요.”
방금까지 군대 얘기를 한 모양인지 백이 영인에게 퀴즈를 냈다. 백은 영인의 열외를 용인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영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군대 다녀오긴 했습니까?”
“제일 힘든 일 했습니다. 취사병.”
대답을 마친 백이 애써 웃음을 참았다. 주성과 수림은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이미 웃다가 넘어갔다. 영인만이 맥락을 읽을 수 없는 웃음 속에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힘들었어요. 진짜로.”
백이 그런 영인과 눈을 마주치며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취사병이 힘들어요?”
수림이 식은 보쌈을 새우젓에 찍으며 묻자 백이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삽으로 조리 안 해 봤으면 말을 말아. 그리고 우리 땐 진짜 많이 팼어.”
백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막걸리 병의 뚜껑을 들고 자신의 이마에 붙였다.
“요거 요렇게 하고 원산폭격을 그렇게 했다.”
“왜요? 일을 못해서?”
수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의 15년 전 어렸을 백이 당한 폭력이 실감 나지 않았다.
“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눈빛이 어쩌고. 이유도 없어.”
“노 책임님 얼굴이 왜요? 눈빛이 왜요?”
주성의 얼굴이 과거 당사자인 백보다 억울하고 분해 보였다. 백은 ‘그러게 말이야.’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별뜻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때 또다시 영인과 눈이 마주쳤다.
영인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백과는 느낌이 달랐다. 백이 밝고 호감이 가는 인상이라면 영인의 경우는 냉정하고 모든 일에 무심해 보였다. 생긴 것도 그러한데 영인 자체도 굳이 남들에게 호감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더욱 그런 분위기가 강했다. 그래서 대부분은 영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영인이 백을 보고 있어서인지, 백이 영인을 보고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둘의 시선이 자꾸만 엉켰다. 백은 괜스레 멋쩍어 자신의 목 뒤를 매만지며 머쓱하게 웃었다. 영인이 그런 백의 얼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난 알겠는데, 이유.”
영인의 말을 들은 백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럼에도 장난기와 백 특유의 밝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뭐요?”
백이 영인의 술잔에 막걸리를 가득 붓고 이어 자신의 잔도 채웠다.
“이거 먹고 다시 얘기합시다?”
말을 마친 백의 입꼬리가 시원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영인은 그 모습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한 번의 회식으로 백과 영인이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가 되지는 않았다. 다음 날도 첫날과 다름없는 하루였다. 영인과 백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룸에 있는 모두가 각자의 일로 바빴기에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작은 수다도 없었다. 백은 어김없이 12시가 되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오늘도 저는 점심은 따로 먹겠습니다. 맛있는 식사 하세요.”
백이 상냥하게 웃으며 프로젝트 룸 밖으로 나갔다. 주성만이 아쉬운 얼굴로 사라지는 백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저희도 오늘 해장할 겸 나가서 밥 먹으면 안 되나요? 책임님?”
주성이 12시 10분이 되어도 여전히 일어날 기색이 없는 수림을 향해 말했다. 무엇인가 골몰하던 수림이 주성의 말에 의외로 쉽게 그러자는 대답을 했다.
“어제 김 차장님은 같이 식사도 못 하셨으니까, 같이 나가서 점심 먹죠?”
“그러시죠.”
태준도 작업 중이던 프로그램을 저장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영인을 수림이 못마땅한 얼굴로 보았다.
“나 빼고 먹어.”
영인이 수림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수림이 그렇게는 못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영인의 모니터를 양손으로 가렸다.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말했을 텐데?”
“노백 책임은 혼자 먹잖아.”
“같냐? 같아?”
영인은 수림이 양보할 것 같지 않자 더 기력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거칠게 저장 단축키를 누르고 일어선 영인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다시는 수림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에는 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수림의 관심과 염려가 너무 귀찮았다. 그다지 잘 지내고 싶지도, 잘하고 싶지도 않은데 수림은 자꾸만 영인을 채근했다.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귀찮았다.
“주성 씨, 뭐 먹고 싶어? 막내가 골라요.”
건물 밖으로 나가며 수림이 주성에게 물었다. 주성이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짬뽕 어떠십니까? 해장해야죠. 1 게이트 쪽에 맛있는 데 알아요.”
“김 차장님 짬뽕 괜찮으세요?”
“네, 상관없습니다.”
태준까지 승낙하자 수림이 주성에게 안내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주성이 행복한 얼굴로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1 게이트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식당은 아담했다. 주성이 문을 밀어 열자 ‘딸랑’ 종이 울리는 소리가 울렸다. 주성은 문을 열자마자 곧장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뛰듯이 서둘러 걸어갔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주성의 유쾌한 목소리가 작은 식당 안을 울렸다.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수림과 나머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주성이 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테이블에는 백이 앉아 있었다.
“주승이, 플젝도 나와 먹나?”
백이 환하게 웃으며 주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맨날 저만 두고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책임님, 너무하십니다. 해장할 때 맨날 이 짬뽕 드시는 거 알고 체포하러 왔어요.”
백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은 백과 주성의 팀 사람들이었다. 모두 주성을 보며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노빠꾸 스토커 여기까지 쫓아왔냐?”
거의 식사를 마친 것인지 물로 입가심을 한 백의 동기 박영태가 주성을 놀리듯이 이야기했다. 주성이 발끈했다.
“스토커라뇨. 저는 인간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노백 책임님을 존경하는 것뿐입니다.”
백도 식사를 마쳤는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성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얼른 가서 주문해. 다들 기다리신다.”
백의 말에 주성이 비어 있는 수림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백의 일행은 모두 식당 밖으로 나갔는데 백만 나가지 않고 주성 옆으로 왔다.
“여긴 제가 계산하고 가겠습니다. 탕수육도 하나 드시죠?”
백이 수림을 보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수림이 곧바로 탕수육 추가 주문을 하자 백이 계산서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식사 맛있게 하시고, 천천히 오세요. 저는 오후엔 다른 회의랑 업무 보고가 있어서 퇴근은 A동에서 하겠습니다.”
계산까지 마친 백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자 식당 안이 금세 고요해졌다. 백이 폭풍처럼 있다 가 버렸다. 영인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백을 발견했다.
백은 모르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유쾌하게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낯선 이들 사이에 있으니 백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그 이질감이 영인은 어쩐지 거슬렸다. 어제 저와 무릎을 맞대고 술을 마신 남자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더니 멋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휑하니 사라졌다. 마치 누가 사탕을 줬다 뺏은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영인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백과 자신은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 별생각 없이 입에 넣은 탕수육이 텁텁하고 겉돌아 삼킬 수가 없었다.
위화감. 점심 식사 후 영인은 몰려드는 위화감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불쾌하고 어색한 감정이 영인의 평정심을 흔들었다. 영인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수는 대개 이럴 때 하기 마련이었다. 분명 테스트 서버에서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테이블 데이터를 보정하고 보니 운영 서버였다. 귀찮은 마음에 평소답지 않게 편법을 이용한 게 문제였다. 정식으로 진행했으면 업데이트가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테스트 서버와 운영 서버의 화면 색도 다른데 정신이 나가 있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런… 씨발….”
영인이 작게 내뱉은 욕설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수림이었다. 영인이 욕을 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수림이 곧장 걱정스러운 빛을 애써 감추며 영인의 옆에 가서 섰다.
“무슨 일인데?”
수림이 속삭이듯 영인에게 묻자 영인이 바로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손가락으로 수림에게 가리켜 알렸다. 수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좆 됐네.”
“나 그냥 잘라 주라.”
“얼른 수습부터 하자.”
수림이 통으로 생성 날짜가 오늘 자로 바뀐 데이터를 지켜보며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정공법으로 나가기에는 다가올 후환이 너무 컸다. 잠시 망설이던 수림이 바로 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쨌든 지금 뒤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은 노백뿐이었다.
심상치 않은 수림과 영인의 분위기에 태준과 주성도 자연스럽게 둘을 훔쳐보았다. 벨이 몇 번 울리지 않았는데 백이 전화를 받았다.
-네, 노백입니다.
“노 책임님, 큰일 났는데.”
수림이 백을 노 책임님이라고 불렀다. 노빠꾸 책임, 백 책임 등으로 부르던 평소와는 달랐다. 수림이 노 책임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백에게는 불길한 신호였다. 백도 주변에 누군가 있는지 확 낮아진 목소리로 수림에게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 나 지금 가?
“와 주세요. 재고 창고 날짜 데이터가 지금 꼬였는데, 얼른 가장 최근 거 받아서 업데이트하고 나머지 꼬인 데이터들 다 맞춰야 할 것 같아. 자세한 건 와서 얘기하고 나 우리 TA 쪽에 제일 마지막에 찍힌 데이터 요청할게요. 빨리해야지, 지금도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어. 데이터 요청서 차후에 노 책임님이 작성할 거라고 말하고 먼저 받아도 될까?”
-아! 누가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일단 알았어. 얼른 받아서 해결부터 합시다. 나 지금 갈게.
백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 수림도 전화가 끊기자마자 영인과 주성을 번갈아 보다 주성에게 TA팀 담당자 연락처 검색을 부탁했다. 영인은 영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후 상황은 일사천리였다. TA팀 담당자도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바로 영인이 업데이트하기 4분 전 데이터를 수림에게 넘겼다. 수림은 익숙하게 엑셀 데이터를 운영에 옮기고, 해당 테이블이 이용되는 시스템을 찾아내 모조리 보정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자주 쓰이는 데이터가 아니어서 큰 문제 없이 해결되었다.
수림과 통화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백은 뛰어온 것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목 끝까지 채우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고, 소매 단추도 풀어 걷어붙였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하는 태가 나는 팔뚝이 드러났다.
영인은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참 여기저기 연락을 하던 백이 핸드폰을 손에 든 채로 영인을 응시했다. 덩치가 큰 사내가 본인 때문에 아수라장이 된 꼴을 허망하게 지켜만 보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연약해 보였다. 원래 같았으면 멍청한 실수를 하고 수습도 못 하는 사람을 경멸해야 했는데도 그랬다. 자기보다 손도 발도 크고, 몸통도 두꺼운 영인이 약해 보인다니 웃기는 노릇이었다.
백은 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혀를 찼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듯한 영인의 모습에 연민이 든 것이리라 생각하며 다시 확실한 뒷마무리를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일의 모든 마무리가 완료된 것은 퇴근 시간을 30분 넘기고서였다. 수림이 마지막으로 관련 시스템을 조회해 데이터 보정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고 있었다. 태준은 먼저 퇴근했기에 프로젝트 룸에는 네 명뿐이었다.
“주승이 할 일 없음 먼저 퇴근해.”
계속 서서 체크하던 백도 이제야 자리에 앉으며 아직 떠나지 못한 주성을 향해 말했다. 주성은 분위기를 살피다가 백이 앉자 그제야 좀 안심하는 눈치였다.
“잘 마무리된 겁니까? 커피라도 좀 사 올까요?”
“엉, 대충 됐어. 그냥 가. 늦었다.”
주성이 가방을 챙겨 들고 꾸벅 인사를 한 뒤 프로젝트 룸을 나갔다. 한참 흐르던 정적을 깨고 백이 입을 열었다. 두 손을 깍지껴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임수림 책임, 이거 엄청나게 큰 이슈 될 수 있어.”
백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할 말이 없어요. 일단 데이터 문제는 없는 거 확실하고, 내일까지 계속 모니터링 할게요.”
백의 날카로운 시선이 영인을 향했다. 책상 언저리를 응시하던 영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런 백의 눈을 바라보았다.
“강 과장님, 일 잘하신다고 해서 남들보다 1.5배는 더 비용 쓰면서 투입한 거 아시죠?”
“네. 죄송합니다. 원하시면 빠지겠습니다.”
“그런 무책임한 말씀 하지 마시고요. 공수 다 강 과장님 케파 된다고 해서 짠 건데 지금 와서 강 과장님 빠지면 그건 누가 메워요?”
백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수림이 눈을 감고 자신에게 다시 쏟아질 질타를 받을 준비를 했다.
“림수 책임, 우리도 다 알아. 시스템즈 우리 승인 없이 데이터 만지는 뒷구멍 있는 거. 근데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우리도 알면서 모르는 척 그렇게 하는 거 알지? 이런 일 또 생기면 그땐 나랑 수림 책임이랑 둘 다 망하는 거야. 조심합시다.”
“명심할게요.”
“그래, 더 잔소리해서 뭐하나. 사람이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되는 거지. 그런 날이 있더라고요. 영인 과장님 또 너무 그렇게 기죽어 있지 마요. 마음이 아프네.”
말을 마친 백이 예의 그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림도 이제야 한결 마음이 놓이는지 잔뜩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내가 마음 같아서는 같이 한잔하자고 하고 싶은데 오늘 이거 때문에 보고 자료를 못 만들었어. 나는 야근각. 두 분은 퇴근하시죠?”
수림이 두 손을 모으고 빌듯이 고개를 연신 숙여 댔다. 그 모습을 본 백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프로젝트 룸을 가득 채웠다. 영인도 깊은숨을 내쉬며 긴장해서 뭉쳐 있던 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풀었다.
“고생하세요, 책임님. 저희 프로젝트 먹여 살리셔야죠.”
“네, 추가 투입 열심히 설득해 보겠습니다.”
수림이 먼저 도망치듯 잽싸게 프로젝트 룸을 나섰다. 영인은 느릿하게 짐을 챙기고 노트북 전원을 끈 뒤에야 일어섰다. 그대로 나갈 것 같았던 영인이 우뚝, 백의 옆에 멈춰 섰다. 영인의 그림자가 책상 위로 드리워지자 백이 고개를 틀어 영인을 올려다보았다.
음울하면서 동시에 심각한 분위기의 영인이 무표정하게 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이 무슨 일로 안 가고 서 있냐는 질문 대신 미소를 짓자 영인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죄송합니다.”
잔뜩 갈라진 영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백은 영인의 음성이 좋았다.
“그러시면 다음에 술이나 한잔 사시든지요.”
백에게서 더는 화나거나 냉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영인은 생각보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꾹 다문 탓에 아랫입술 밑으로 음영이 드리웠다.
그것이 끝이었다. 영인은 별말 없이 뒤돌아 프로젝트 룸 밖으로 나갔고, 백은 그대로 다시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백이 슬쩍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다. 떠날 사람이 모두 떠난 공간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오직 백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백은 어쩐지 외로워졌다. 홀로 남아 업무를 보는 일은 이골이 났음에도 영인이 떠나자 왠지 진짜로 혼자가 된 것만 같아 순식간에 쓸쓸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