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1화 (5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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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이 세계에 ‘나의 집’이라는 것이 생긴다면. 마법처럼 모든 나날이 행복해지리라고 믿었다. 모든 걱정은 사라지고, 사랑만이 가득한 하루하루가 이어지리라고. 하지만 현실은 상상만큼 환상적이지 않았다.

성에 머물게 된 이후, 카델은 날마다 부하들과 함께 식사하고, 얘기하고, 휴식하며 지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과 시간을 보낸다거나, 온종일 붙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혼자 보내는 시간이 훨씬 늘어났다. 단원들은 그 부분을 아쉬워하는 듯 보였으나, 라이돈조차 서운함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직 떨쳐 내지 못한 상실감이 남았다. 즐겁게 웃고 떠들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하나둘, 이제는 보지 못할 소중한 이들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들은 침묵했고, 종종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한숨을 따라 입김이 번졌다. 카델은 어두컴컴한 모래사장을 거닐며 귓가에 맴도는 파도 소리에 집중했다. 홀로 거니는 밤 산책은 어느새 그의 새로운 취미가 되어 있었다. 고요한 밤바다를 거닐다 보면,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은 환기가 되었다.

‘복에 겨운 놈. 전부 끝났는데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청승을 떠냐.’

조소하듯 생각하면서도 카델은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떠올렸다.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한 달 남짓의 혼수상태를 이겨 내고 눈을 뜬 순간, 카델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 버렸다고.

자신은 더 이상 카델 라이토스가 아니었다. 예전, 시스템의 이상으로 카델 라이토스와의 영혼이 분리되었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한 공허함과 어색함, 두려움이 그의 전신을 가득 채워나갔다. 정말로 이제 더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이제는 이곳이 자신의 세계였다. 그것은 당시의 카델에게 설렘보다 더 큰 두려움을 안겼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적응됐지만.’

단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조금씩 이 새로운 세계에 뿌리를 내릴 용기가 생겼다. 자신의 새로운 터전이 제법 마음에 든다고도 생각했다. 본래 세계였다면 십 년은 넘게 일하고도 대출을 잔뜩 끼워야 겨우 장만할 수 있을 내 집이다. 이런 젊은 나이에 집은 물론이고 땅까지 얻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물론 기쁘지. 정말 기뻐.’

내 집도 마련했고, 평생 놀고먹어도 될 돈도 생겼고, 명예와 지위까지 있다. 뿐만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고, 그들과 평생을 약속하기까지 했으니. 이젠 정말 즐기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도.

“……….”

두 남자의 부재가 카델의 행복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불쑥불쑥 느껴지는 그들의 빈자리가 고통스러웠다. 봉인된 마계에 갇힌 가르엘. 자신을 이 세계에 머물게 한 뒤 또다시 자취를 감춰 버린 쿤라.

가르엘의 생사가 걱정된다. 쿤라의 안위도 걱정됐다. 자신의 미래가 걱정됐고, 부하들의 마음이 걱정됐다. 결국 모든 게 걱정이었다. 악당을 해치운 용사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따위의 동화는 현실이 아님을 절절하게 느껴야 했다.

“쿤라…….”

그의 싸움을 지켜보고, 그의 결심을 들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걱정되었다. 모든 것을 바쳐 하나의 세계선을 지키겠다던 그가, 세계의 영혼까지 모조리 끌어다 시스템을 추방한 그가. 지금은 대체 어떤 모습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건지.

걸음걸음을 따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늘의 산책은 실패다. 차라리 잠을 자는 편이 낫겠다. 그리 생각한 카델이 산책을 멈추고 되돌아가려던 때였다.

“어……?”

내내 반응 없이 죽어 있던 펜던트가, 미약한 빛을 뿜었다. 어두운 시야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붉은 기운에 카델이 허겁지겁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쿤라? 당신이에요? 돌아온 거예요?”

양손으로 펜던트를 그러쥔 카델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펜던트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고, 쿤라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곧 다시 빛을 잃은 펜던트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자리에 멈춰 선 채 빛의 흔적을 찾던 카델이 입을 앙다물었다.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을 빛내던 그가 이내 널찍한 모래사장 위로 마법진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깨어난 뒤로 마법을 사용하면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몸에 완벽히 적응하기 전까진 마법을 자제하려 했건만.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면 어쩔 수 없다.

기어이 이동 마법진을 만들어 낸 카델이 그 위로 마력을 불어넣고. 여전히 낯설기만 한 마력의 흐름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쿤라!”

도착함과 동시에 쿤라를 불러 젖힌 카델이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이동한 곳은 고요의 산맥. 쿤라의 거처였다.

황제에게 영지를 요청한 뒤, 라이돈의 이동 마법을 통해 산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쿤라에 좌절하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라이돈은 며칠이나 홀로 산맥을 뒤엎었었다. 그럼에도 소득은 없었다.

“쿤라! 어디 있어요, 대답 좀 해 봐요!”

불덩이를 띄워 어두운 산속을 헤집었다. 1년을 넘게 생활했던 곳인 만큼 익숙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쿤라를 처음 봤던 호숫가부터, 부하들과 생활했던 야영지, 쿤라가 좋아하는 열매가 열리는 특별한 장소까지. 모조리 들렀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 신호를 보냈잖아요. 당신이 날 불렀잖아.”

거친 숨을 고르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오래 아팠던 탓에 열심히 끌어 올렸던 체력은 보잘것없어졌다. 카델은 한계에 임박한 몸뚱이를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헛것을 본 걸지도 모른다. 아주 희미하고 짧은 빛이었으니까. 하지만 헛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거길 가 봐야겠어.”

쿤라의 거처. 불러도 대답 없는 이가 태평하게 동굴에 앉아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확실히 살펴보아야 속이 시원할 듯했다.

하필 카델이 있던 곳과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공동에 도착한 카델은 안을 살필 생각도 못 하고 냅다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어두컴컴한 공동에 카델의 가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에 쿤라가 있다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혀를 차며 제 허접한 체력을 비난했겠지. 쿤라는 이곳에 없다. 깨달음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짧은 휴식을 끝낸 카델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몇 개의 불덩이를 더 띄우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쿤라가 없더라도, 그가 존재했다는 흔적 정도는 눈에 담고 싶었다. 그가 보관하던 약병 하나라도 가져가야 마음이 덜 허전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공동의 끝자락까지 다다른 카델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저게 뭐지?”

공동의 끝. 쿤라가 곧잘 정좌를 틀고 앉아 기운을 다스리던 그곳에,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저번에 들렀을 때도 저런 게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으며 가까이 다가가자,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

그것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린 하나의 알. 크기는 대략 타조알만 했고, 겉은 우둘투둘하고 붉은 껍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앞에 꿇어앉은 카델이 알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알을 움켜쥐기 전, 새롭게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알 옆에 가지런히 놓인 종이였다. 봉투에 넣어져 있지도, 접혀 있지도 않은 단출한 한 장의 종이.

홀린 듯 종이를 집어 든 카델이 그 위로 불빛을 비췄다. 아직 글을 읽지 않았음에도 왠지 모를 감정이 북받쳐 심장이 떨렸다.

「지금쯤 네가 잃은 것들을 떠올리며 슬퍼하고 있겠지. 반쪽짜리 영혼에도 적응하지 못해 절절매는 모습이 훤하다. 워낙 걱정이 많은 녀석이니, 승리에 도취된 시늉도 못 할 거야. 미련한 녀석. 그러지 말거라. 네가 살아 숨 쉬는 세계의 수호신이 네 안녕을 바란다. 빈틈없이 행복하거라, 나의 작은 영웅아.」

그다지 길지도 않은 편지였다. 쿤라의 서체를 본 적이 없어, 이게 그의 편지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카델은 본능적으로 쿤라의 흔적을 느꼈다. 이 편지는 그의 것이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으며, 편지를 내려놓은 카델이 시선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알을 그러쥐었다.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 그리고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선명한 온기. 너무도 뚜렷한 온기에 놀라기를 잠시. 두꺼운 껍질 속에서부터 둔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혹시라도 알이 잘못될까, 애지중지 끌어안은 카델의 시선이 알의 끄트머리에 닿았다.

곧 단단한 껍질에 균열이 일며, 무언가가 그 껍질을 밀어 내고 부화하려 했다. 제가 품은 이 강인한 생명의 박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델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제게 빈틈없는 행복을 안겨 주려는, 하나뿐인 수호신의 사랑.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불씨였다.

<끝.>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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