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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일주일 뒤, 카델은 바다가 코앞에 자리한 화려한 고성과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할 고요하고 넓은 영지를 선물 받았다. 시종들조차 보내지 못하게 했으므로, 성은 카델이 도착하기 전에 깨끗하게 청소하고 보강해 둔 상태였다.
“여기가 앞으로 우리가 지낼 곳이야. 우리의 새로운 터전.”
마부를 돌려보낸 카델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신난 웃음소리가 퍼졌다.
“아하하! 최고야, 카델! 여기가 진짜 우리 신혼집이라고? 너무 완벽하잖아!”
“네 신혼집 따위가 아니다, 요정 놈. 정신 차려.”
“흐응, 질투해도 소용없어, 반. 이 바다는 전부 날 위한 카델의 선물이거든!”
웃기지 말라는 반의 역정과 라이돈의 조롱이 정신없이 뒤섞였다. 익숙한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던 카델이 조용히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언덕에 자리한 고성을 바라보는 루멘이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아름답군. 페알르 섬에서 꿨던 꿈보다 훨씬.”
나지막한 음성에는 어렴풋한 흥분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감탄하듯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던 카델이 작게 웃었다.
“다행이네.”
그를 보며 마주 웃어 준 루멘이 자연스럽게 카델의 짐을 들고 언덕을 향했다. 카델은 곧장 그의 뒤를 따르는 대신, 마차가 떠난 빈자리를 훑어보았다.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반과 루멘, 라이돈을 제외한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옅은 한숨을 내쉰 그가 천천히 발끝을 틀었다.
“반, 라이돈! 더 놀다 올 거면 그래도 돼. 난 먼저 성에 가서 짐을 풀고 있을게. 오랜만에 마차 탔더니 피곤하다. 좀 쉬어야겠어.”
“아니에요, 단장. 같이 가요. 제가 저 유치한 요정이랑 같이 놀 리가 없잖아요.”
“반의 방은 가장 칙칙하고 좁은 곳이 적당하겠어. 자기, 우리랑 제일 멀리 떨어진 방으로 보내자. 응?”
라이돈의 권유에 우리 모두에겐 적당한 거리를 둔 ‘각방’이 있을 뿐이라고 선언한 카델이 걸음을 서둘렀다. 뒤따라붙는 라이돈의 투정도 못 들은 척 넘겼다.
도착한 성의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늑한 분위기를 띠었다. 외관이 화려하니 내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소박하고 단정한 환경이었으면 좋겠다던 제 요구를 잘 반영해 준 듯해, 카델은 황제에게 미미한 고마움을 느꼈다.
“난 꼭대기 방을 쓸 거니까, 남은 방은 알아서들 골라. 방이 많으니 몇 개씩 차지해도 좋아.”
미리 제 방을 선점한 카델이 루멘에게서 짐을 빼앗아 계단을 올랐다. 시간이야 넘쳐나니 천천히 성을 둘러보아도 좋겠으나, 마음이 급했다.
그렇게 숨 가쁘게 올라간 성의 꼭대기. 그다지 넓지 않은 방 안에 들어선 카델이 단단히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는 바로 맞은편에 난 커다란 창을 열어젖혔다. 곧장 들이치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눈앞으로 펼쳐진 광활한 푸른 바다. 무엇 하나 거슬리는 것 없이 탁 트인 풍경이 흡족했다. 창밖으로 몸을 빼낸 채 깊게 숨을 들이쉰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나오지 그래, 요젠.”
등 뒤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으나, 카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의식을 찾은 뒤로 내내 소식 없던 요젠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닫힌 문 앞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눈은 붕대로 칭칭 감겨 여전히 볼 수 없었으나, 카델은 그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왜 숨어 있어. 계속 이렇게 날 훔쳐볼 거였으면서.”
“……미안.”
“사과하라고 한 말 아닌데.”
몸을 돌린 카델이 창틀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성의 꼭대기에서 추락하게 될 테지만,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이리 와. 너무 멀다.”
카델의 말에 한참을 망설이던 요젠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그렇게 답답할 만큼 느리게 다가온 그가 제 앞에 다다를 즈음. 카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원망하지 않아.”
우뚝 걸음을 멈춘 요젠의 얼굴에서 미묘한 표정 변화가 일어났다. 카델은 그것이 ‘죄책감’임을 알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카델이 요젠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그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가르엘도 너도, 원망하지 않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실을 알면 넌 분명히 마계로 돌아가려 할 테니까. 그래서 가르엘의 말을 따랐어. 내 마음대로 굴었어.”
“응. 내가 위험해지는 게 싫었던 거지?”
“가르엘을 마계에 혼자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니야. 아주 귀찮고 성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동료였으니까.”
요젠의 음성에 떨림이 더해졌다. 여태 누구의 앞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얼마나 많은 후회와 슬픔을 견뎌 왔을지. 그의 고통을 짐작할수록 그를 이제야 불러낸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카델은 요젠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난 너까지 잃고 싶진 않아, 요젠.”
“네가 날 잃을 일은 없어.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만 미안해하고, 다신 내 앞에서 사라지지 마. 이제부턴 계속 함께야.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영원히.”
“……응.”
카델을 마주 안은 요젠이 그의 머리 위로 얼굴을 묻었다. 동료를 잃은 슬픔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전부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쓸려 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