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9화 (519/521)

⚔️

요젠이 전한 거짓을 믿고 자신을 기다렸겠지. 카델은 매번 이성적인 선택을 추구하나, 부하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끝도 없이 순진해지곤 했다. 마지막 소환진을 해제했으니, 이젠 깨달았을 것이다. 가르엘 몬자시라는, 골칫덩이나 다름없던 부하가 기어이 마계에 남기를 택했다는 것을.

“소환진이 전부 사라졌잖아!”

“폐하의 기운이 모조리……!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길 봐라.”

등가죽을 뚫고 돋아난 한 쌍의 날개. 넓게 펼쳐진 심연의 날개는 추하디추한 마기를 양껏 머금고 있다. 완벽하게 변해 버린 한 쌍의 역안에선 일말의 가능성도 비치지 않는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제 안에 담긴 빛 마력이 모조리 제거되었으니까. 인간성을 적출 당하듯, 체내에 남아 있던 인간의 증거가 전부 사라졌다.

실로 엄청난 약이었다. 이런 약을 우연히 찾아낸 자신의 행운이 대단한 걸까. 아니면 이 선택 또한 거대한 운명의 흐름에 불과할까.

가르엘은 제 주변을 뒤덮은 불쾌한 기운을 느끼며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모든 소환진을 빼앗긴 고위 마족들의 방황은 길지 않았다. 그들은 곧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동족을 발견했고, 그가 가진 기운이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반란 종자의 것임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이런 꼴로 경의 옆에 설 순 없으니까. 너무 미워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어 있던 가르엘의 손아귀로 기다란 마기의 검이 생성됐다. 익숙하면서도 역겨운 기운의 범람을 느끼며, 가르엘은 모여든 적들보다 먼저 그들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조금은 진심을 전해 둘 걸 그랬나. 이왕 요젠 경에게 악역을 시킬 거면 살짝 뻔뻔해져도 됐을 텐데. 못된 부하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넘쳐나는 능력을 과시하듯 몇 배는 강력해진 육체와 우악스럽게 팽창한 기운. 그가 상대해 왔던 모든 고위 마족을 통틀어도, 마족이 된 자신의 힘이 월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일시적인 각성이 아닌, 진정한 마족이 된 자신의 재능이라는 것 역시. 딱히 기쁘지는 않았다.

‘이 끔찍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그런 철없는 이유로 마계에 남기를 택한 건 아닙니다. 단장님이 그렇게 추측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으니, 텔레파시를 보내 볼게요.’

카델도 머지않아 깨달을 것이다. 요젠을 통해 전한 이유조차 결국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인간계에서도 충분히 소환진을 해제할 수 있다. 결국 두 세계를 잇는 마법진이니, 한쪽만 차단해도 소환진은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마계에 남기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카델 라이토스라는 영웅의 옆에, 전쟁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마족이 자리해선 안 됐으니까. 소환진을 해제하기 위해선 반쪽짜리 마기만으로는 부족했다. 각성제를 들이켜 진짜 마족의 힘을 얻어야 했고, 결국 자신은 인간임을 포기해야 했다.

카델이라면 마족이 된 자신이라도 사랑해 줄 것이다. 몇 번이고 그리 약속하지 않았는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해 줄 것이라던 카델의 무수한 약속이, 전부 진심이었음을 안다.

그랬기에 더더욱 카델의 곁에 남을 수 없었다. 너무도 특별한 일을 해낸, 세상에 하나뿐인 영웅이다. 그런 영웅이 손가락질받게 할 순 없었다. 심지어 그 손가락질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삶을 포기하고 싶어지지 않나.

카델의 남은 생이 그림자 한 점 없이 눈부시기를 바랐다. 자신은 인간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마족이 됐다. 이토록 위대한 업적을 세웠는데, 사랑하는 이의 평안 정도는 바랄 수 있는 것 아닌가.

“한 번에 몰아붙여! 저 녀석을 죽여야 한다!”

“죽여, 죽여! 폐하의 기운을 되돌릴 방법이 있을 거다!”

자신의 희생으로 카델이 눈부실 수 있다면, 자신의 생은 그로써 완벽해진다. 비틀린 인생의 빛이 되어 주겠다던, 그 밝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눈부신 종착점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던. 카델의 약속은 사실이었다. 끝에 와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시스템이니, 정해진 운명이니,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카델이기에. 그 몸을 가진 이가 신여환이기에. 자신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 내내 더러울 수밖에 없던 몸으로, 기어이 수많은 사람을 구해 내게 되었다. 살육을 위한 힘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꿈들을 손쉽게 이룰 수 있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녀석이야. 조금만 더!”

“날개를 노려! 추락시켜라!”

그러니 괜찮다. 그토록 기피하던 마족으로서 생을 마감하게 된대도. 자신이 걸어온 길은 전부 옳았고, 카델이 있어 눈부셨기에. 눈물겨울 만큼 찬란한 삶을 건네주어 고맙다고.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마지막 말을 건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당신이라면 끝내 알아줄 거라고.

힘없이 추락하는 몸과 시야를 가득 채우며 쇄도하는 고위 마족의 얼굴. 이상하리만치 느릿하게 늘어지는 모든 감각 속에서, 가르엘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의 사랑, 나의 등불, 내 삶의 이정표…….”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도리가 없었다.

불을 지핀 듯 뜨거워진 심장,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먹먹한 귓속, 누구의 움직임도 도드라지지 않는, 조금씩 사라져 가는 시스템 창만을 응시하는 시야. 카델은 이 모든 변화의 이유가 제게 있다고 생각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어쩌면 제가 없는 곳에서 싸늘하게 죽어 버릴지 모를 가르엘을 생각하느라 혼이 나가 버린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멈춰 버린 세계에, 카델의 탓은 아무것도 없었다.

“…….”

완전히 사라져 버린 시스템 창 너머. 길게 늘어진 적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흐리게 질려 있던 눈빛에 초점이 맺히고. 조금씩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것은. 간절한 바람에도 내내 침묵을 지키던, 고집스러울 만큼 무심한 적룡의 얼굴이었다.

“고생했다. 지금부터 일어날 모든 기적은 전부 네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말거라.”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다. 갈구하던 인정과 칭찬이었다. 하지만 카델은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소리도 없이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이 발치를 적셨다.

사람들은 인형처럼 굳은 채였다. 환희와 안도, 슬픔과 기쁨이 곳곳에 박제되어 있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람도 흐름을 멈추고, 휘어진 잡초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납작 엎드렸다. 모든 것이 정지한 비현실적인 풍경을 더듬더듬 훑어 내던 카델이 다시 쿤라를 바라보았다.

“가르엘이 마계에 갇혔어요. 쿤라. 어떻게 해요? 난 어떻게 해야 해요?”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 카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가르엘의 안위만이 가득했다. 유일한 동아줄을 붙잡듯 간절한 시선에, 쿤라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내게 몸을 맡겨라. 지금만큼은 세계가 아닌 너의 수호신이 되어 줄 테니.”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쿤라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어도 마음은 편안해지지 않았다. 그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라는 확답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좀 전까지의 모습이 환상이었다는 듯, 쿤라는 또다시 자취를 감췄다. 시야를 채우던 붉은 머리칼이 사라진 자리. 텅 빈 허공을 응시하던 카델이 마른침을 삼켰다.

쿤라가 사라졌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멈춰 있다. 오로지 적막만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카델은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이 세계는 왜 멈춰 버린 걸까. 메인 퀘스트가 끝났기 때문일까? 봉인을 끝마쳤으니 이제 자신은 추방당하는 걸까? 어쩌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기는 했다.

미지의 두려움에 떨던 카델은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퀘스트를 클리어했다는 알림이 뜨지 않았어. 왜지?’

가르엘에게 부여된 디버프를 생각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마지막 퀘스트의 조건은 일곱 개의 봉인석을 모아 봉인을 완료하는 것. 그러니 마법사들이 봉인을 완료한 시점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가르엘을 위험 요소로 분류했다는 알림을 띄웠을 뿐. 퀘스트와 관련된 창은 보여 주지 않았다.

‘이것도 스토리가 바뀐 거랑 연관이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새로운 퀘스트 창이라도 보여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세계가 움직임을 재개하면 보여 줄 셈인가? 어쩌면 잠시 세계를 멈춰 둔 뒤, 새로운 스토리를 구상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자신은 시스템이 새 퀘스트를 부여할 때까지 이곳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하는 걸까.

반사적으로 펜던트를 움켜쥐었으나, 쿤라는 지긋지긋한 침묵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뭔가 이상해.”

고요 속에서 숨을 고르던 카델이 중얼거렸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되어 온몸으로 번져 나가는 열기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카델은 제 몸속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쿤라의 기운 때문임을 눈치챘다. 그가 무언가 일을 벌이려는 것이다. 그 무언가를 위해 내내 숨을 죽인 채 제 안으로 부지런히 기운을 옮겨 왔던 것이다.

그게 대체 뭐길래 아무런 언질도 없이. 스멀스멀 들어차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카델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어딘가로, 적어도 부하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작은 세계의 수호자여. 기어이 약속을 어기려 하는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카델의 시야 속으로 들어찬 것은, 다름 아닌 쿤라였다.

“쿤라……?”

당황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카델은 금세 그가 진짜 쿤라가 아님을 깨달았다. 쿤라와 똑같은 외형을 가지기는 했으나 눈빛과 분위기, 목소리의 고저까지 쿤라와는 달랐다.

경계심을 드러낸 카델이 조금씩 몸을 물리며 미간을 좁혔다.

“너 누구야.”

[모습을 드러내라, 작은 세계의 수호자여. 감시자의 몸에 숨어도 소용없다.]

“뭐?”

[이미 운명의 흐름은 망가졌다. 구멍 뚫린 세계선에 수호자의 난동까지 더해진다면, 나는 이 세계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겠지.]

가짜 쿤라의 의미 모를 말을 경청하던 카델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갔다. 세계를 소멸시킨다니. 그 말 한마디만으로 놈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너……. 네가 시스템이구나.”

[……감시자여. 너를 이 세계에 보낸 것은 내 실수였다. 풍족한 즐거움을 망쳤으니, 그 대가로 영혼을 거두어 가겠다.]

“네가, 네가 시스템이었어. 네가 이 세계를 망가뜨린 그 빌어먹을 신이었어!”

시스템이 어째서 쿤라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은 알 바 없었다.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는지 알기나 해? 네가 얼마나 많은 절망을 만들었는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아냔 말이야!”

충혈된 눈에 형형한 살기가 더해지며, 분노로 가득 찬 몸을 주체하지 못한 카델이 시스템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카델이 시스템의 앞에 다다르기도 전.

“……!”

실 끊어진 인형처럼, 갑작스럽게 기세를 꺾은 카델이 크게 비틀거렸다. 반쯤 풀린 눈의 초점이 사라지고, 표독스럽던 표정이 힘없이 풀렸다. 카델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은 듯 앞으로 고꾸라졌으나. 끝내 넘어지지 않았다.

“…….”

풀린 다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허리를 바로 세웠다. 탁하던 눈빛에 총기가 더해졌으나, 표정에선 어떠한 분노의 잔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이 제 앞에 선 시스템을 응시했다.

“내가 언제까지 네놈의 행패를 지켜보기만 할 줄 알았나? 이대로 세계가 소멸하도록 놔둘 줄 알았어?”

[……그것이 너와 나의 약속이었을 텐데.]

다갈색의 눈동자는 어느새 화려한 녹빛으로 물들었다. 삼라만상을 담아낸 듯한 깊은 눈빛에 이채가 맴돌았다. 빼앗은 몸에 적응하듯, 코웃음을 친 쿤라가 손을 가볍게 털어 냈다.

“그런 건 약속이 아니야. 협박이라고 하는 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참 뻔뻔스럽단 말이지.”

[작은 세계의 수호자여. 너의 권능을 거둬라.]

“거절하지. 너와 결판을 낼 때까지 이 세계선은 움직이지 않는다. 내 목숨을 걸고 만들어 낸 찰나의 기회야. 비록 내가 반쪽짜리 세계의 수호자더라도, 널 이곳에서 추방할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하진 않아.”

카델의 몸 위로 강렬한 기운이 번져 나갔다. 은밀하게 숨을 죽인 채 이 작은 몸으로 모든 기운을 끌어왔다. 어느새 수호자의 권능이 가득 들어차 버린 감시자의 몸은, 시스템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다시 이 육체를 통제하려면 그 안에 스며든 수호자의 목을 부러뜨려야 하리라.

[네게 이 세계를 지킬 힘은 남지 않았다. 넌 여전히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고, 결국 모든 영혼을 빼앗기게 되겠지.]

“유감이군. 세계를 지키겠다는 꿈은 포기한 지 오래야. 기억을 되찾는 게 너무 느렸거든.”

[…….]

“내가 지키려는 건 이곳. 신여환이라는 이방인이 희망의 씨앗을 심은 단 하나의 세계선뿐이다.”

[남은 세계선을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그래. 모든 세계선의 유지를 포기하고, 현재의 세계선만을 수호한다. 그게 내 선택이야.”

카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진 못한다. 그것은 그에게 포기하지 않고 싸우기를 약속했던 순간부터 정해진 미래였다. 이미 수많은 세계선을 잃은, 너무나 많은 기회를 버린 자신에게. 모든 잘못을 되돌릴 기회는 없다. 하지만 딱 하나. 신여환이 제 모든 것을 걸고 구해 내려던 이 찬란한 세계선이라면.

[그런 식으로 세계는 유지되지 못한다. 하나 남은 세계선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즉시 세계 전체가 붕괴하게 될 테니.]

“잊고 있나 본데, 나 역시 신이다. 그걸 모를 리 있겠어?”

[그런데도 쓸데없는 발악을 하는 이유가 뭐지? 내게 굴복한다면 이 세계의 영혼은 조금이라도 더 긴 여정을 즐길 수 있을 텐데.]

감정 없던 시스템의 말투에 처음으로 ‘의문’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했던 질문이다. 쿤라 역시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던 것이니까. 이게 정말 옳은 선택일까. 수호자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벼랑 끝에서까지 희망을 놓지 않던 녀석이다. 수호자조차 놓아 버리려던 세계를 목숨 바쳐 구원하려던 그 녀석에게…… 보답을 해 주고 싶을 뿐이야.”

그만큼은 행복해야 했다. 무거운 짐을 이고 내내 가시밭길을 걸어와야 했던, 그럼에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던 신여환만큼은. 제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세계를 구한 영웅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선물해 주어야 했다.

[……어리석군.]

고저 없이 중얼거린 시스템의 등 뒤로, 적룡의 날개가 펼쳐졌다.

“어떠냐. 좀 당황스럽지?”

카델의 얼굴 위로 낯선 미소가 그려졌다. 시스템은 제가 보낸 감시자의 얼굴을 응시하며 지면에 밀려나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쿤라 역시 제가 차지한 카델의 몸을 스트레칭하듯 가볍게 풀어냈다. 꽤 오랫동안 준비했던 만큼, 마음에 드는 힘이었다.

[세계의 영혼을 모조리 끌어왔군.]

“그래, 정확해. 이 세계에 남은 절반의 영혼. 모조리 내 것으로 만들었다.”

[정상적인 수호자라면 할 수 없는 선택이다.]

“네 눈엔 지금 내가 정상으로 보이나?”

코웃음을 친 쿤라가 팔을 휘젓자, 하늘 위로 새빨간 운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운석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속도로 지면을 내리찍는 무수한 운석에는 진정한 신의 권능이 뭉쳐 있었으니.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운석 세례에 날개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시스템이 몸을 방어했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공격이 그의 몸을 할퀴어 상처를 만들기도 했으나. 그것은 제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듯, 시스템은 무감한 표정을 고수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쿤라의 눈빛이 점차 차게 가라앉았다.

‘이게 내 선택이다. 네가 도착한 이 세계선만큼은 지켜 보이겠다는, 한없이 무능하고 이기적인 수호신의 선택. 카델, 부디 만족해 주기를 바란다.’

시스템은 강하다. 이세계의 신인 그는 ‘침략자’라는 호칭답게 다른 세계를 약탈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과 무력을 갖췄으니. 패배가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미치도록 두려웠다. 아직도 뼛속 깊이 각인된 패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겨우 반절 남았을 뿐인 세계의 영혼을 흡수했다. 수호신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를 저지른 것이다. 오로지 한 명의 인간, 그것도 이세계의 감시자를 위해서였다. 이런 끔찍한 선택을 저지르고도 시스템을 이기지 못할까 봐.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세계는 통째로 소멸하게 되겠지.’

시스템의 농락 아래 차차 말라 죽는 것이 아닌, 한 번에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영혼을 잃은 세계는 동작을 멈추고 품어 내던 모든 생명과 함께 죽어 버릴 테니. 이곳의 무수한 생명은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삶을 끝내게 되겠지. 그리도 치열하게 싸워 온 의미마저 잃고서.

자신이 진 짐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 짐을 이고서라도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 나의 의지였다.

“왜 달려들지 않지? 예전처럼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주기엔 내가 너무 강해졌나? 아아,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으스대 봤자 너는 잠깐 방문한 여행객에 불과하니까!”

카델의 몸을 빌려 쓰고 있는 이상, 거친 육탄전은 불가능하다. 시스템이 그의 몸을 해칠까 봐서가 아니다. 그것이 걱정된다면 보호막을 두르면 된다. 현재 시스템과 자신의 격차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자신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힘을 담아내는 그릇인 카델의 육체가 심히 부실하다는 데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아슬아슬한 상태였으니, 함부로 몸을 던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본래 카델부터가 육탄전에 능한 사내는 아니었으니.

[네 선택의 대가는 참혹할 것이다.]

묵묵히 마법을 방어하던 시스템의 나직한 음성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빠르게 사위를 훑어 내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의 뒤편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

[차라리 본래의 몸으로 덤볐어야지. 이런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우리의 싸움을 견디지 못한다.]

온몸으로 묵직한 충격이 번졌다. 이것이 시스템의 강함 때문인지, 카델의 연약함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쿤라는 전신의 내장까지 휘감은 보호막을 강화하며 눈을 굴렸다. 맥없이 날아가는 몸에 날개를 생성하자, 지척까지 따라붙은 시스템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세계를 지킬 힘이 없다면 내놓아라. 네 마음대로 세계를 부술 수는 없다. 네겐 아무런 권리도, 능력도 없어.]

그저 따라붙고 있을 뿐이다. 어떤 행동의 조짐도 보이지 않고, 여유롭게 비행하며 날개를 움직일 뿐이건만. 쿤라는 끊임없이 전신을 난타하는 무형의 기운을 느꼈다.

‘기억이 과장된 건 전혀 아니었군.’

기억대로, 아니, 기억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이다. 어쩌면 시스템을 상대하는 육체가 카델의 것이기에 더욱 과장되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싸움이 무사히 끝난다면, 카델은 제법 괴로운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리라.

“네놈에겐 한 줌의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웃기지 마라.”

시스템과 카델의 몸 사이를 가르며 떠오른 마법진. 그 위에서부터 폭발적인 화염이 솟구쳤다. 빠르게 몸을 물린 시스템이 불꽃을 피하려 했으나.

“넌 그저 방해꾼일 뿐이야.”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 화염이 시스템의 퇴로를 차단했다. 마치 거대한 꽃봉오리처럼, 화려하게 입을 벌린 화염이 그대로 시스템을 집어삼키고. 새로운 마법진들이 시스템의 사위를 둘러싸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인정해 주지. 네가 보낸 감시자, 신여환 말이다. 아주 끝내주는 실수였어.”

그 안에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무수한 손아귀. 새빨간 손아귀가 지옥의 사자처럼 시스템을 가둔 화염 속으로 달려들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불꽃의 범람. 그 화려한 난무의 끝자락에 자리한 것은, 시스템의 몸체를 한가득 뒤덮은 손아귀였다. 징그러울 정도로 촘촘하게 그를 짓누르는 손아귀 너머, 시스템의 무감한 얼굴이 드러났다.

[네가 이곳에서 날 내쫓는대도 영혼의 반쪽은 여전히 내 세계에 있다.]

“그래, 잘 보관해 둬. 이 세계가 죽으면 네가 빼앗은 영혼도 죽게 될 테니까.”

[반대도 마찬가지지. 내가 돌아가 네 세계의 영혼을 소멸시킨다면, 네가 필사적으로 붙든 하나의 세계선 역시…….]

“아니. 그럴 일은 없어.”

시스템은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듯한 얼굴로 멈춰 있지만. 그를 붙든 쿤라는 느낄 수 있었다. 시스템은 밀리고 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나타나 자신을 짓뭉개던 때와는 다르다. 시스템의 주의가 모조리 카델에게 집중되어 있던 때. 그와 그의 기사, 그를 둘러싼 모든 생명이 시스템에 저항하며 놈을 혼란하게 만들던 때. 은밀하게 끌어모은 세계의 영혼이, 제게 화답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난 분명 네게 패배했었지만, 그렇다고 지능까지 부족한 건 아니거든. 세계의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주제에 그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을 것 같나?”

[…….]

“이 세계선은 절대 죽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손아귀에 붙들린 시스템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제 앞으로 다가오는 쿤라를 바라보았다. 시스템을 억누르는 마력 아래로 미친 듯이 요동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저토록 발버둥 치고 있으면서도 표정은 덤덤하기만 하니. 오히려 우습게 비출 뿐이었다.

“지금까지 아주 많은 세계의 영혼을 강탈해 왔겠지. 아주 많은 삶을 조롱하고, 그들의 미래를 빼앗았을 거다.”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래, 네게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에 묶인 시스템을 향해 날았다. 시스템에게 기억을 빼앗기던 때, 자신은 이러한 미래를 상상했었다. 다시 기억을 되찾아 이세계의 신을 박살 내 주겠다고. 그때야말로 복수를 해 주겠다고. 하지만 보라. 이세계의 신이 제 손아귀에 들어왔으나, 자신은 그 대가로 모든 것을 내놓아야 했다. 복수가 아닌 보답을 위해.

“널 이곳에서 영영 내쫓을 거다. 네 세계로 돌아가,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 가끔 떠올리지도, 종종 그리워하지도 마라.”

시스템 앞에 다다른 쿤라가 그의 이마 위로 손을 얹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다행이었다. 꼭 어리석은 과거의 자신을 형벌하는 꼴이지 않나. 자신은 벌을 받아 마땅했다.

그렇게 긴 싸움의 끝을 맺으려는 쿤라를 마주한 채. 시스템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 세계선은 많은 가능성을 상실했다.]

“가능성? 네가 말하는 가능성이 혹시 마계가 부활하는 가능성이냐?”

[분란의 불씨가 사라진 세계는 발전하지 못한다. 영원한 행복을 꿈꾼대도 찰나일 뿐. 어떠한 신도 만들어 내지 못한 천국을, 네가 이룩할 수 있을 것 같나?]

시스템의 목소리엔 묘한 조소가 뒤섞여 있었다. 이곳에서 자신이 추방된대도, 그 세계는 여전히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확신. 그 저주와 같은 확신에도 쿤라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걸 네가 걱정하진 말라는 게, 내가 계속 하고 있던 말이거든. 네가 사라진 이곳이 천국이 되든 지옥이 되든. 그건 남은 생명들이 만들어 갈 과제다. 이세계의 훼방꾼인 네 몫이 아냐.”

시스템의 이마를 짚은 쿤라의 손끝으로 새하얀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반절 남은 세계의 영혼과 그리도 치열하던 생명들의 투쟁, 의지, 사랑을 끌어모은다면. 기회는 한 번뿐. 온 세계선을 통틀어, 이곳에 자리한 수호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밀어 내는 힘을 느낀 듯, 시스템의 몸부림이 더욱 거세졌다. 내내 건조하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그것은 당황보다는 탐탁지 않음에 가까웠다. 이 자그마한 세계의 신이 감히 자신을 내쫓고 있다는 데에 분노하는 것이다.

끈질기게 저항하던 그의 몸체에 기어이 균열이 일었다. 도자기 인형이 깨진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몸체의 사이로 눈부신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감시자는 내 세계의 영혼이다. 나를 내쫓는다면 결국 감시자의 영혼 역시 추방되겠지. 그래도 괜찮은가? 어리석은 수호신이여.]

최후의 순간마저 시스템은, 아니, 이세계의 신은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각인하려 한다. 어쩌면 저 오만함은 신들이 가진 특징일지도 모르지. 실없이 튀어나오는 웃음과 함께, 영혼을 바친 세상이 새하얗게 빛났다.

“작별이다.”

전부 지켜볼 수 있었다. 온통 새까만 공간 속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쿤라의 시선을 통해 모든 장면을 담아냈다. 그가 시스템을 상대하고, 시스템의 불쾌한 발언에 반박하고, 말도 안 되는 선택을 시인하고, 기어이 시스템을 추방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그리고 마침내, 쿤라의 시야를 채우던 눈부신 빛이 범람한 순간.

「경? ??와 혼? ?속? ??집?다」

「?신? ?체? 영?을 ?릅??」

「??에 ?답 ?십시?」

문자가 잔뜩 깨진 기이한 시스템 창이 눈앞을 메웠다. 알아볼 수 있는 단어는 없었지만, 카델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떠날 시간이 된 거야.’

자신을 데려온 신이 추방당했다. 영영 이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할 테니, 그의 힘으로 머물 수 있던 자신 역시 쫓겨나게 되리라.

부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상대로 마지막 인사는 하지 못하게 됐구나. 갑자기 죽어 버린 단장으로 인해 그들은 승리조차 마음껏 기뻐하지 못할 것이다.

가르엘은……. 결국 그를 구하지 못한 채 떠나게 됐다. 하지만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시스템이 궁지에 몰린 것이다. 가르엘이 인간계와 마계의 연결 고리를 완벽하게 끊어 냈기에, 이토록 소중한 기회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선택을 원망하지는 않겠다. 마지막 순간을 그의 최후가 아닌 아름다운 미소로 추억하리라.

카델이 선 암흑의 공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까만 공간에 균열이 이니 그 틈새로부터 찬란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을 응시하자, 급격히 머리가 지끈거리며 심장으로 아릿한 통증이 번졌다. 영혼이 떨어지는 감각이란 이런 것인가. 평생 몰라도 좋았을 고통을 느끼며, 카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쿤라에게는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어려웠던 모양이다.

진정한 이별을 앞두고 카델은 눈물을 흘리지도, 발악하지도, 혼절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추방을 기다리며 과거를 회상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길고도 거칠었던 여정. 평생 받을 일도, 건넬 일도 없으리라 여겼던 깊은 감정의 교류.

그들의 사랑이 자신을 얼마나 성장시켰는지를 실감했다. 그들로 인해 매번 더 나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랬기에 본래의 자신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선택을 반복하며 이곳까지 도착했다. 그러니 세계를 구한 것은 자신이 아닌 그들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닫고, 훨씬 멋있는 모습으로 당차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아주 순순히 떠날 준비를 하는군.”

덤덤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카델이 퍼뜩 뒤를 돌았다. 놀란 눈동자 안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들어찼다.

“쿤라……?”

“그래, 나다.”

“어떻게……. 여긴 제 무의식 속 아니었어요? 카델 라이토스의 정신세계요.”

“내가 네 무의식에 침투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군. 벌써 잊어버린 거냐?”

“아…….”

너무 놀라 순간 바보 같은 소리를 뱉고 말았다. 쿤라가 제 무의식에 침투한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심지어 그는 시스템이 자신을 통제하고 있을 때도 찾아온 전적이 있지 않던가. 겨우 제정신을 되찾은 카델이 쿤라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오히려 잘되었다. 그를 만나지 못하고 떠날까 봐 안타까워하던 참이었는데.

“우리가 해냈어요, 쿤라.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했어요.”

“……그래. 중간에 꽤 많은 작전 변경이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잘 소화하더군.”

“당신 마음대로 변경한 거잖아요. 그거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알긴 해요?”

“네가 잘 해낼 줄 알았다.”

“정말……. 당신만큼 대책 없이 제멋대로인 사람…… 아니, 신은 없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라이돈보다 심해.”

늘어나는 균열과 빛을 따라 앞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카델은 발을 떼어 쿤라와의 거리를 좁혔다.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한 빛을 띠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나와 함께 싸워 줘서. 쿤라가 없었다면 난 별 볼 일 없이 싸우다, 멋없게 퇴장했을 거예요.”

쿤라는 대답 대신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은근한 장난기와 온화함이 뒤섞인, 실로 그다운 미소였다. 마지막으로 보는 그의 얼굴이 평소와 같아 좋았다.

“전 이제 떠나게 되겠죠. 남은 부하들을 잘 보살펴 주세요. 나쁜 생각 하지 않도록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르엘의 시체도 회수해 달라는, 현실적인 부탁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염두에 두고 싶진 않았다.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내쫓기더라도, 마지막까지 가르엘의 생존을 믿고 싶었다. 결국 입을 다문 카델의 앞에서, 쿤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 남고 싶나?”

“……네?”

“진심으로 이곳에 남아, 네 여생을 낯선 이세계에서 보내고 싶냐고 묻는 거다.”

뜻밖의 질문에 카델의 미간이 좁아졌다. 진심으로 이곳에 남고 싶냐니. 물론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오히려 본래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한 번 남기를 결심한 뒤론,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온 마음을 다해 이 세계를 바랐고, 부하들이 있기에 자신의 선택에는 한 톨의 후회도 없으리라 확신했다.

헛웃음을 뱉은 카델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거 묻지 말아요. 마지막에 날 열받게 만들어서 좋을 게 뭔데요?”

“분하지만 시스템이 신으로 존재하는, 네가 본래 살고 있던 세계가 훨씬 안전할 거다. 고작 세계선 하나만 덩그러니 남은, 그마저도 존속이 위태로운 이곳과는 달라. 언제 맥이 끊겨 소멸할지 모를 이런 세계에, 진심으로 남고 싶다는 거냐?”

“……이봐요, 쿤라.”

왜 이해를 못 하는 걸까. 어쩌면 이미 이해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입으로 확인시켜 주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카델은 천천히 손을 뻗어 쿤라의 어깨를 쥐었다. 단단한 어깨의 촉감을 느끼며, 지척으로 다가온 그의 얼굴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당장 내일 아침 이 세계가 소멸한대도, 난 이곳에 남기를 택할 거예요.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라도.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에 있으니까.”

진지한 대답에 쿤라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 말, 진심으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웃음기 어린 표정은 이미 카델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카델이 의아한 표정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은 그가 카델을 끌어안았다.

“가, 갑자기……!”

“그거면 됐다. 이곳에 남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내 영혼, 존재의 전부를 걸고 이루어 주마.”

“……뭐라고요?”

남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니. 영혼의 전부를 건다는 소린 또 뭔가. 당황한 카델이 쿤라의 얼굴을 살펴보려 했으나.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은 힘과 무너진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가는 광휘. 카델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의 의지를 억눌렀다.

“쿤라! 또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떠나려는 건 아니죠? 설명을 해요! 나랑 얘기를 하자고!”

쿤라의 가슴팍에 뺨을 기댄 카델이 질끈 눈을 감은 채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조바심이 난 카델이 그를 밀치려 했으나.

‘왜 몸이……!’

갑작스럽게 굳어 버린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의지로 감은 눈조차 뜰 수 없었고, 팔다리 역시 꼿꼿하게 굳어 버렸다. 곧 카델은 쿤라의 품이 비정상적으로 단단하며, 그에게서 맡아 본 적 없는 비린 흙냄새가 풍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 자신은 쿤라에게 안겨 있는데. 아직도 몸을 누르는 힘이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기이한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았다. 카델은 제 귓가를 간질이는 정체불명의 웅성거림이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음을 느꼈다. 쿤라와 단둘뿐인 무의식의 공간에서 웅성거림이라니, 드디어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 굳게 닫힌 눈꺼풀에 성질이 뻗치려던 순간이었다.

“단장! 일어나 봐요, 단장!”

“대장. 정신 좀 차려 봐, 제발…….”

“카델, 카델! 다 비켜 봐! 카델 얼굴이 안 보이잖아!”

“카델…….”

익숙한 목소리들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알아듣지 못할 리 없는 사랑스러운 부하들의 목소리. 갑자기 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자신은 곧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될…….

“하……! 정신이 좀 들어?”

마치 감전당한 듯한 찌릿한 통증과 함께 번쩍 눈이 뜨였다. 카델은 짧은 숨을 몰아쉬며 순식간에 트인 시야에 적응하려 애썼다. 눈앞에 들풀이 무성했다. 힘 빠진 팔다리를 조금씩 허우적거리자, 자신이 흙바닥에 코를 박고 쓰러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쿤라의 단단한 품이 어느새 흙바닥으로 뒤바뀐 것이다.

“어……?”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낸 카델이 바닥에 처박혀 있던 몸을 뒤집었다. 풀썩 소리를 내며 하늘을 바라보자, 곧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를 채웠다. 반과 루멘, 라이돈과 요젠. 저 너머로 다른 기사들의 얼굴도 보였다.

“뭐야. 나 왜…….”

“단장,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걱정이 가득 담긴 반의 황금색 눈동자를 보자, 문득 이 세계에 처음 방문했던 때가 떠올랐다.

“아직 잠이 덜 깨셨어요? 저 반이에요, 단장.”

“……네?”

“반 헤르도스요.”

모든 여정의 시작이었던 그 순간이 어째서 지금 떠오르는지. 멍하니 반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델이 시선을 옮겼다. 확인해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갑자기 되돌아온 의식과 생생히 움직이는 세계의 이유를.

한차례 숨을 고른 카델이 ‘상태 창’의 열람을 시도했다. 한 번, 두 번……. 평소라면 1초도 지나지 않아 번쩍 떠올랐을 시스템 창은 잠잠하기만 했다. 그럴수록 카델의 호흡은 가빠져만 갔다.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켜봤던 정지된 세계와 신들의 싸움은 꿈이 아니다. 모조리 현실이었다.

“대장, 일어날 수 있겠어?”

불안한 눈빛을 하고 다가온 루멘이 손을 뻗었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그 상처투성이의 손을 담아낸 순간. 카델은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을 터뜨렸다.

전쟁은 끝났다. 마계의 위협으로부터 평화를 지켜 낸 인간군은 환호했으나, 들뜬 분위기는 이어진 줄초상에 오래지 않아 기세가 꺾였다. 위대한 업적을 이뤄 낸 그들이 치른 대가는 가혹했다.

2/3 이상이 사망한 각국의 정예군은 시체조차 회수하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 변방의 소국은 물론 7대국마저 국방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대신 무너진 도시와 성을 바로 세우고, 잔류 마족과 마물을 소탕해 국민을 보호하는 데 집중했다.

물론 그것이 목숨 바쳐 인간계의 평화를 지킨 기사들을 뒷전으로 밀어 두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국왕들은 본분을 다하고 돌아온 기사들에게 그들의 명예에 걸맞은 보상을 해 주고자 노력했다.

그중 황제는 생존한 기사단장과 대대장 전원에게 영지를 내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다만, 세계적으로 힘든 상황임을 고려해 그들 모두에게 영지를 즉시 내어 주지는 않았다. 각 기사의 지위와 명성에 따른 영지 선정에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단장들에게만큼은 곧장 가장 풍요로운 땅을 선물했다.

영지 문서를 건네받은 모리톨과 엑토는 황제의 선물을 거절하는 대신 제 부하들에게 돌아갈 보상의 크기를 늘려 달라 청했으나. 황제는 그들의 청을 무시하고 기어이 문서를 쥐여 주었다. 제국의 상태가 안정되는 대로 모든 기사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두 기사단장에게는 즉시 승리의 보상이 돌아갔으나. 적린 기사단의 단장, 카델은 아니었다. 그가 전쟁이 끝난 직후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운 탓이었다.

치유사들은 카델의 상태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병세’라고 판단했다. 꼭 온몸의 세포가 사멸하고 재생하려는 것처럼 기이하고 위급한 상태라는 것이다. 당장 오늘 밤이 고비라며 호들갑을 떨어 댄 치유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카델은 죽지 않았다.

그가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견뎌 낸 지 무려 32일째 되는 날. 한 달도 넘는 시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의식을 찾자마자 곧장 한 남자를 찾아갔다. 바로 데릭 오스마. 황제였다.

“영지를 주십시오. 아주 넓고, 조용한 곳으로.”

황제는 노크도 없이 집무실에 불쑥 들어온 카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선 짙은 당혹감과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깨어났군.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 말이야. 언제 눈을 뜬 건가? 몸은 괜찮아진 건가?”

난데없는 카델의 등장에 당황하기는 했으나,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은 황제는 우선 그의 상태를 살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탓에 혈색은 창백했고, 살이 쏙 빠져 서 있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인다. 그에게는 충분한 안정이 필요했다.

“내가 자네에게 영지조차 주지 않을까 봐 찾아온 건가? 걱정하지 말게. 이미 가장 귀한 땅을 골라 자네의 앞으로…….”

“바다가 보여야 합니다. 높은 성도요. 성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탁 트인 바다가 보여야 해요.”

“바다? 그런 습한 땅보다는 내가 고른 비옥한…….”

카델의 거친 기침 소리가 황제의 말을 끊었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 격렬한 기침에 놀란 황제가 몸을 일으키고. 당장 카델을 데려갈 치유사를 부르려 했으나.

“바다가 보이는 넓고 조용한 땅. 무조건 그런 땅을 주세요. 다른 영지는 필요 없습니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카델이 황제를 저지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향한 시선에선 누구도 꺾지 못할 단단한 고집이 비쳤다. 어째서 바다가 보이는 영지를 저토록 간절하게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이었으나, 황제에겐 그를 거절할 힘이 없었다.

“알았네. 약속하지. 조건에 부합하는 영지가 몇 개 있을 걸세.”

“그리고 또 하나.”

병상에서 일어난 카델에게선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어느 곳이 달라졌는지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그럼에도 분명히 무언가가 바뀌었다. 황제는 낯설고도 어려운 상대를 대하듯 묘한 긴장감을 품은 채 카델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앞에서 잠시 목을 가다듬던 카델이 황제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제 정체를 밝히는 건 나중으로 미뤄 주세요.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문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싸운 게 아닌가. 당장 미뤄도 큰 영향은 없겠지만, 전쟁의 여파가 사라지기 전에 밝히는 편이 효과적일 거네.”

“아니요. 지금은 싫어요. 되도록 빨리 마땅한 영지를 찾아 주세요. 영지를 관리할 사람을 보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해 주세요.”

바다가 보이는 성에서 고립된 휴가라도 보낼 셈인가. 갑작스러운 카델의 태세 변화가 당황스러웠으나.

“……일주일 안으로 찾아 주지. 그러니 이만 가서 쉬게.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아.”

마왕을 죽인 영웅에게 무엇을 못 해 주겠는가. 심지어 그가 젠가의 귀한 손자인 이상, 황제에게 거부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0